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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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는 1212년 기독교 연합군과 무와히드 왕조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이 전투는 1195년 알라르코스 전투에서 카스티야 왕국이 패배한 이후, 십자군 소집을 통해 기독교 세력의 결집을 촉구하며 시작되었다. 알폰소 8세가 이끄는 기독교 연합군은 산초 7세의 기습 공격으로 승리하였고, 이슬람 세력은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 전투의 결과로 카스티야 왕국은 안달루시아 지역으로의 진출을 확보하고,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은 약화되었으며, 나스르 왕조의 그라나다 왕국만이 남게 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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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전투 정보 | |
전투 이름 | 나바스데톨로사 전투 |
아랍어 이름 | معركة العقاب (마으라카트 알이카브) |
전투의 일부 | 레콘키스타, 1172년–1212년 스페인 기독교-무슬림 전쟁 |
장소 | 스페인 안달루시아 하엔 산타 엘레나 근처 |
날짜 | 1212년 7월 16일 |
결과 | 스페인-기독교 연합군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 세력 1 | 카스티야 왕국 아라곤 왕국 나바라 왕국 산티아고 기사단 칼라트라바 기사단 템플 기사단 성 요한 기사단 산트 조르디 데 알파마 기사단 나르본 포르투갈 십자군 프랑스 십자군 레온 십자군 옥시타니아 십자군 독일 및 이탈리아 십자군 |
교전 세력 2 | 무와히드 칼리파국 |
지휘관 | |
지휘관 1 | 중앙: 알폰소 8세 선봉: 디에고 로페스 2세 데 아로 선봉: 로드리고 히메네스 데 라다 (톨레도 대주교) 우익: 산초 7세 좌익: 페드로 2세 |
지휘관 2 | 무함마드 알나시르 |
병력 규모 | |
병력 규모 1 | 12,000–14,000명 |
병력 규모 2 | 22,000–30,000명 |
사상자 | |
사상자 1 | 약 2,000명 |
사상자 2 | 매우 높음, 약 20,000명 |
관련 전투 |
2. 배경
1195년, 알모하드 왕조는 알라르코스 전투에서 카스티야의 알폰소 8세를 패배시켰다. 이후 알모하드 왕조는 트루히요, 플라센시아, 탈라베라 데 라 레이나, 쿠엥카, 마드리드 등 여러 도시를 공격했다.[16] 1211년, 무함마드 알 나시르는 군대를 이끌고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기독교 영토를 침략, 칼라트라바 기사단의 살바티에라 성을 함락시켰다. 이베리아 반도 기독교 왕국들에 대한 위협이 커지자, 인노켄티우스 3세는 십자군 소집을 요청했다.[16]
같은 해, 카스티야는 레온 알폰소 9세의 공격을 받았으나 격퇴했다. 나바라 산초 7세도 레온 및 알모하드 왕조와 공모하여 카스티야를 공격했다. 카스티야는 아라곤과 카소라 조약으로 국경을 정했지만, 나바라 및 레온과는 국경 분쟁을 겪었다.[17]
1196년, 알폰소 9세와 페드로 페르난데스 데 카스트로가 첼레스티누스 3세에게 파문당하고, 1197년 알폰소 8세의 딸 베렝게라와의 결혼으로 화해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알폰소 8세는 알모하드 왕조와 휴전 협정을 맺었고, 이는 1210년까지 연장되었다.[18] 이후 알폰소 8세는 페드로 2세와 연합하여 나바라를 침공, 1200년까지 알라바, 기푸스코아, 비스카야를 병합하여 바스크 지방을 차지했다.[18][19]
톨레도 대주교 로드리고 히메네스 데 라다는 기독교 국가들 간의 분쟁을 종식시키고 이슬람 세력에 대항하기 위한 연합을 촉구했다. 그의 노력은 인노켄티우스 3세의 지지를 받아 십자군 결성으로 이어졌고, 1209년 이베리아 반도의 기독교 국가들이 화해하며 공동 전선을 구축하기 시작했다.[20]
2. 1. 알폰소 8세의 알라르코스 전투 패배와 그 여파
1195년 7월 19일, 무와히드 왕조의 칼리파 야쿱 알 만수르는 알라르코스 전투에서 카스티야의 알폰소 8세에게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카스티야 군대는 2만 5천 명 중 2만 명이 죽거나 포로로 잡히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16] 레콩키스타의 기세는 크게 꺾였다. 야쿱 알 만수르는 이 승리를 발판 삼아 말라곤, 베나벤테, 칼라트라바, 카라쿠엘, 토레 데 과달페르사 등 여러 성채를 함락시켰다.[16] 그의 후계자인 무함마드 알 나시르 역시 공격적인 확장 정책을 이어갔다.알라르코스 전투 이후 무와히드 왕조는 트루히요, 플라센시아, 탈라베라 데 라 레이나, 쿠엥카, 과달라하라, 마드리드, 우클레스 등 주요 도시들을 공격했다.[16] 1211년, 무함마드 알 나시르는 대군을 이끌고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칼라트라바 기사단의 요새인 살바티에라 성을 함락시켰다.[16]
이러한 상황은 이베리아 반도의 기독교 왕국들에게 큰 위협이 되었고, 인노켄티우스 3세 교황은 기독교 기사들에게 십자군 참여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16]
한편, 알폰소 8세는 알라르코스 전투에서의 패배를 틈탄 레온 왕 알폰소 9세의 공격을 받았으나, 이는 격퇴되었다. 하지만, 알폰소 8세의 옛 신하였던 페드로 페르난데스 데 카스트로의 중재로 레온은 무와히드 왕조로부터 지원을 약속받았고, 나바라 왕 산초 7세도 이들과 공모하여 카스티야를 공격했다.[17]
그러나 1196년, 알폰소 9세와 카스트로가 교황 첼레스티누스 3세에게 파문당하고, 1197년 알폰소 8세의 딸 베렝게라와의 결혼으로 화해하면서 상황은 반전되었다. 같은 해, 알폰소 8세는 야쿱 알 만수르와 10년간의 휴전 협정을 맺었고, 이는 무함마드 알 나시르 때까지 연장되었다.[18]
이 기간 동안 알폰소 8세는 페드로 2세와 연합하여 나바라를 침공, 1200년까지 알라바, 기푸스코아, 비스카야를 병합하여 바스크 지방을 차지하며 나바라에 대한 우위를 점했다.[18][19]
톨레도 대주교 로드리고 히메네스 데 라다는 기독교 국가들 간의 분쟁을 종식시키고 이슬람 세력에 대항하기 위한 연합을 촉구했다. 그의 노력은 인노켄티우스 3세 교황의 지지를 얻어 무와히드 왕조에 대한 십자군 결성으로 이어졌고, 1209년에는 이베리아 반도의 기독교 국가들이 화해하고 공동 전선을 구축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20]
2. 2. 가톨릭 세계의 위기의식과 연합군의 결성
알라르코스 전투에서 카스티야가 패배하면서 주변 기독교 왕국들과 교황청은 큰 충격을 받았다. 1211년, 무함마드 알 나시르가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기독교 영토를 침공하여 칼라트라바 기사단의 본거지인 살바티에라 성을 함락시키자 위기감은 더욱 커졌다.[16] 이는 히스패닉 기독교 왕국의 중대한 위기로 이어졌다.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십자군 소집을 통해 기독교 세력의 결집을 촉구했다.[20] 이에 카스티야의 알폰소 8세를 중심으로 아라곤의 페드로 2세, 나바라의 산초 7세, 포르투갈의 아폰수 2세가 연합군을 결성했다.[23]
프랑스를 비롯한 다른 유럽 국가에서도 기사들이 십자군에 합류했다. 그러나 연합군 내부에서는 종교적, 문화적, 정치적 갈등이 존재했다. 특히 일부 유럽 기사들은 알폰소 8세의 관용 정책에 불만을 품고 톨레도에서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등 문제를 일으켰다.[25]
카톨릭 연합군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23]
국가 및 세력 | 주요 인물 및 내용 |
---|---|
카스티야 | 알폰소 8세 (지휘), 디에고 로페스 2세 데 아로 (기수), 메디나 델 캄포, 마드리드, 소리아 등 20개 도시 군단 연합 |
나바라 | 산초 7세 |
아라곤 | 페드로 2세 |
포르투갈 | 아폰수 2세 (왕은 불참, 군대만 참전) |
기타 | 템플 기사단, 산티아고 기사단, 칼라트라바 기사단, 성 요한 기사단(호스피탈리어 기사단), 프랑스 주교가 이끄는 기사들 |
불참 | 레온 왕 알폰소 9세 (아폰수 2세와 적대 관계), 레온 왕국 기사들은 왕의 대표로 참가 |
1212년 7월 16일,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는 알폰소 8세가 이끄는 기독교 연합군과 무함마드 알 나시르가 이끄는 알모하드 군대 간의 격돌이었다. 알폰소 8세는 전략적으로 유리한 지형을 선택하여 알모하드 기병대의 강점을 약화시키려 했다.
3. 전투 경과
전투 초기, 이슬람 기병대는 기독교 군의 방어선을 뚫기 위해 반복적인 돌격을 감행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양측 모두 근접전을 벌였고, 스페인 기사들이 우위를 점했다.[11] 산티아고 기사단 등 일부 기사들은 알모하드 방어선을 돌파하여 틈을 만들었다.
전투의 결정적인 전환점은 산초 7세가 이끄는 나바라 기사 부대의 기습 공격이었다. 이 공격으로 이슬람 군은 혼란에 빠졌고, 결국 무질서하게 후퇴하기 시작했다. 연합군은 이 기회를 틈타 맹렬히 추격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전설에 따르면, 산초 7세는 직접 정예 부대를 이끌고 알 나시르의 본진까지 돌격하여 그의 친위대를 격파했다고 한다.[28]
이 전투에서 기독교 연합군은 큰 승리를 거두었고, 알모하드 군은 막대한 사상자를 냈다. 칼리프 알 나시르는 간신히 도망쳤으나, 이후 마라케시에서 사망했다.[12] 반면 기독교 군의 피해는 상대적으로 적었으나, 여러 기사단에서 주요 인물들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었다.[14]
이 전투의 승리로 나바라 왕국은 새로운 방패 문장을 얻게 되었는데, 붉은 바탕에 금색 사슬과 중앙의 에메랄드로 구성된 문양이다.[29]
3. 1. 초기 전황과 전략
1212년 7월 16일 아침, 알폰소 8세가 이끄는 기독교 연합군은 무함마드 알 나시르가 지휘하는 알모하드 군대를 기습 공격했다.[10] 알폰소 8세는 산으로 둘러싸인 좁은 계곡 내에 군대를 배치하여 알 나시르 기병대의 이점을 제한하는 전략을 택했다. 기독교 연합군은 바위 지형을 이용하여 궁수와 석궁병을 높은 곳에 배치해 적에게 투사체를 퍼부었다.
양측 군대는 근접전을 벌였는데, 이는 알모하드군과 스페인군 모두 궁수를 활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11] 초기 이슬람 기병대의 반복적인 돌격은 기독교 군의 방패벽에 막혀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산초 7세가 이끄는 나바라 기사 파견대의 기습 공격은 이슬람 진형에 혼란을 야기했다.[11]
카스티야 왕들의 라틴 연대기|la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 ''그들은 서로 맞서 싸웠고, 창, 칼, 전투 도끼를 사용하여 근접전을 벌였다. 궁수를 위한 공간은 없었다. 기독교인들은 계속해서 밀고 들어갔다.''
산티아고 기사단을 비롯한 일부 스페인 기사들이 알모하드 방어선을 돌파하여 적 전선에 틈을 만들었다.[11]
3. 2. 전환점과 기독교 연합군의 승리
산초 7세가 이끄는 나바라 기사 부대의 기습 공격은 이슬람 군 진영을 혼란에 빠뜨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10] 어려운 지형으로 인해 이미 전투 조율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이슬람 군대는 갑작스러운 기독교도들의 맹공격에 압박을 받아 후퇴하기 시작했다.
퇴각은 곧 이슬람 군대 사이에 공황이 퍼지면서 무질서한 패주로 바뀌었다. 연합군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끈질긴 추격을 시작하여 도망치는 적들에게 막대한 사상자를 냈다. 많은 무와히드 병사들과 장수들은 참수당했고, 칼리프 무함마드 알 나시르는 간신히 목숨을 건져 도망쳤다.[12]
전설처럼 전해지는 산초 7세의 돌격은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그는 정예 부대를 이끌고 나스르의 본진을 향해 돌격하여, 본진 천막을 사슬처럼 지키는 강인한 노예 친위대를 격파하고 천막까지 난입했다. 나스르와 그의 군세는 허둥지둥 도망치며 9만 명 또는 10만 명에 달하는 희생자를 내고 패주했다.[28]
나바라 왕국의 방패 문장은 이 전투를 계기로 붉은 바탕에 금색 사슬이 그려지고 중앙에 에메랄드가 배치된 문양이 되었다.[29] 이 문장은 지금도 스페인 왕국의 문장 오른쪽 아래 부분에서 볼 수 있다.
4. 전투의 영향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알모하드 왕조가 압도적으로 패배하면서 이베리아 반도와 마그레브에서 알모하드 왕조의 몰락이 크게 앞당겨졌다. 이는 기독교 세력의 레콩키스타에 더욱 탄력을 주었고, 이미 쇠퇴하고 있던 이베리아 반도의 무어인(이슬람교도) 세력은 급격히 감소했다.[15] 전투 직후, 카스티야 왕국은 안달루시아 침공의 관문인 바에사와 우베다를 점령했다.[15]
이후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 세력은 쇠퇴와 후퇴의 길을 걸었으며, 알모하드 왕조의 본국인 마그레브에서도 쇠퇴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한편 가톨릭 국가들의 레콩키스타 진전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가톨릭 국가들 간의 내분과 1225년의 대기근이 없었다면 레콩키스타가 더욱 가속화되었을 것이라고 말해진다.
1252년까지 알모하드 제국은 거의 멸망 직전에 이르렀고, 1269년 마리니드 왕조가 모로코를 장악했다. 이후 마리니드 왕조는 이베리아 반도의 옛 알모하드 영토를 회복하려 했지만, 카스티야의 알폰소 11세와 포르투갈의 아폰수 4세에게 리오 살라도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이 전투는 히스파니아에서 대규모 기독교와 무슬림 군대 간의 마지막 주요 군사 충돌이었다. 따라서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는 서지중해를 포함한 이 지역 역사의 진정한 전환점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4. 1. 이베리아 반도 내 세력 변화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는 무와히드 왕조의 쇠퇴를 가속화하고, 기독교 세력의 레콩키스타를 촉진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카스티야는 칼라트라바를 수복하고, 이후 바에사, 우베다 등 주요 도시들을 점령하며 안달루시아 지방으로 진출했다.[15]카스티야의 페르난도 3세는 코르도바(1236년), 하엔(1246년, 하엔 공성전), 세비야(1248년) 등을 차례로 점령하며 레콩키스타를 진전시켰다. 또한, 알코스, 메디나시도니아, 헤레스, 카디스를 점령했다.[32][33] 1252년 페르난도 3세가 사망했을 때 나스르 왕조의 그라나다 왕국을 제외한 타이파 국가들은 모두 병합되었다.
아라곤의 하이메 1세는 발레아레스 제도(1228년부터 4년에 걸쳐)와 발렌시아(1238년 9월 28일 항복)를 정복하며 지중해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했다.[34] 발렌시아는 13세기 지중해에서 제노바와 베네치아에 이어 세 번째로 큰 상업 도시가 되었고, 아라곤은 발레아레스 제도에서 사르데냐와 시칠리아에 이르는 서지중해 지역을 지배하는 "제국"으로 성장했다.
한편, 무와히드 왕조는 1224년 유수프 2세 사후 후계자 분쟁으로 안달루시아와 북아프리카 본거지 모두에서 분열되었다. 안달루시아에는 소국들(타이파)이 난립하고, 북아프리카에서는 마린 왕조와 튀니지의 하프스 왕조가 탄생하여 1269년 마린 왕조에게 멸망했다.[30]
4. 2. 무와히드 왕조의 몰락과 이슬람 세력의 약화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알모하드 왕조가 크게 패배하면서, 이베리아 반도와 마그레브(북아프리카)에서 알모하드 왕조의 몰락이 빨라졌다.[30] 이는 기독교 세력의 레콩키스타에 힘을 실어주었고, 이베리아 반도의 무어인(이슬람교도) 세력은 급격히 약해졌다.1224년, 유수프 2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무와히드 왕조는 안달루시아와 북아프리카 모두에서 분열되었다.[30] 안달루시아에서는 여러 소국(타이파)들이 생겨났고, 북아프리카에서는 모로코의 마린 왕조와 튀니지의 하프스 왕조가 등장했다.[30] 결국 1269년, 마린 왕조가 무와히드 왕조를 멸망시켰다.[30]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 이후, 카스티야는 바에사와 우베다를 점령하여 안달루시아 진출의 발판을 마련했다.[31] 페르난도 3세 시대에는 1236년 코르도바, 1243년 무르시아, 1246년 하엔, 1248년 세비야를 점령하는 등 레콩키스타가 빠르게 진행되었다.[32] 1252년 페르난도 3세가 사망했을 때, 나스르 왕조의 그라나다 왕국을 제외한 모든 타이파 국가들은 카스티야에 흡수되었다.[32][33]
한편, 아라곤의 하이메 1세는 1228년부터 발레아레스 제도를, 1238년에는 발렌시아를 정복했다.[34] 발렌시아는 지중해의 주요 상업 도시로 성장했고, 아라곤은 서지중해를 지배하는 강국으로 떠올랐다.[34]
4. 3. 그라나다 왕국의 존속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 이후 이베리아 반도에 남은 주요 이슬람 세력은 나스르 왕조의 그라나다 왕국이었다. 그라나다는 카스티야의 봉신국이 되는 조건으로 1492년 가톨릭 군주에게 함락될 때까지 존속했다.4. 4. 사회·문화적 영향 (중도진보적 관점)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는 이베리아 반도의 종교적, 문화적 지형에 큰 영향을 미쳤다. 무와히드 왕조의 패배는 이슬람 세력의 쇠퇴를 가속화했고, 이는 곧 마그레브 지역에도 영향을 미쳤다. 반면, 가톨릭 국가들은 레콩키스타를 더욱 진전시킬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30]1224년 유수프 2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무와히드 왕조는 분열되었고, 안달루시아 지역에는 소국(타이파)들이 난립했다. 북아프리카에서는 마린 왕조와 하프스 왕조가 새롭게 등장하면서 무와히드 왕조는 결국 1269년 멸망했다.[30]
전투 이후, 카스티야는 바에사와 우베다를 획득하며 안달루시아로 진출하는 중요한 거점을 확보했다.[31] 페르난도 3세 시대에는 코르도바(1236년), 무르시아(1243년), 하엔(1246년), 세비야(1248년)를 점령하는 등 레콩키스타가 급격히 진전되었다. 1252년 페르난도 3세가 사망할 무렵에는 나스르 왕조그라나다 왕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이슬람 소국들이 카스티야에 병합되었다.[32][33]
아라곤 역시 하이메 1세 시대에 발레아레스 제도를 정복하고(1228년-1232년), 1238년에는 발렌시아를 점령했다. 발렌시아는 제노바, 베네치아에 이어 지중해에서 세 번째로 큰 상업 도시로 성장했고, 아라곤은 서지중해 지역을 지배하는 강국으로 성장했다.[34]
이러한 변화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기독교 세력의 패권을 강화하고, 이슬람 문화와 유대교 문화의 쇠퇴를 초래하여 이베리아 반도의 종교적, 문화적 지형을 변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5. 평가와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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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대중문화 속 묘사
대중문화에서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는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 해리 해리슨의 1972년작 대체역사/공상과학 소설 《깊은 터널》에서는 무어인들이 이 전투에서 승리하여 20세기까지 스페인 일부를 지배하는 역사를 묘사한다.
- S.J.A. 터니는 그의 역사 소설 《초승달과 십자가》에서 이 전투를 묘사한다.
=== 게임 ===
La croix et l'épée프랑스어 (History&Collectors - Vae Victis #62, 2005년, 크로노노츠 게임)
6. 1. 소설
해리 해리슨의 1972년작 대체역사/공상과학 소설 《깊은 터널》에서는 무어인들이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승리하여 20세기까지 스페인 일부를 지배하는 역사를 묘사한다.S.J.A. 터니는 그의 역사 소설 《초승달과 십자가》에서 이 전투를 묘사한다.
6. 2. 게임
La croix et l'épée프랑스어 (History&Collectors - Vae Victis #62, 2005년, 크로노노츠 게임)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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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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ローマックス、P162 - P165、芝、P131 - P132、関、P113、P153、西川、P138。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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ローマックス、P165、芝、P132、P193、西川、P138 - P139。
[18]
문서
マンスールは初め休戦を拒否、マドリードなどトレド周辺都市を荒らし回っていたが、北アフリカ・チュニジアで反乱が起こり足元に火が付いたため休戦を余儀無くされた。またこの時期、アラルコスの戦いで所領や団員の多くを失ったカラトラバ騎士団・サンティアゴ騎士団など各騎士団は、教皇から新たに所領と城を補充してもらい戦力を増強した。ローマックス、P166 - P168、芝、P133。
[19]
문서
バード、P68、ローマックス、P165 - P166、芝、P132 - P134、P194、関、P153 - P154、西川、P139 - P140。
[20]
문서
ローマックス、P168、芝、P134。
[21]
문서
ローマックス、P168 - P169、芝、P137 - P138。
[22]
문서
ローマックス、P169 - P170、芝、P138、西川、P140 - P141。
[23]
문서
ローマックス、P170 - P171、芝、P138 - P139。
[24]
문서
ローマックス、P171 - P172、芝、P139、西川、P14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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アルフォンソ8世は普通のムスリム住民には寛容であり、カラトラバの町の住民に攻撃を予告して逃がしたために戦意を失ったフランス人騎士たちが帰国した。このフランス人たちに対する評判は悪く、帰路立ち寄ったトレドで彼等は市民から入城を拒否されたばかりか、石を投げられたり罵倒される有様で、従軍していたロドリゴはフランス人を痛烈に批判、アルフォンソ8世の娘ベレンゲラも戦後に父から報告を受け取り、フランスへ嫁いだ妹ブランシュ・ド・カスティーユに伝達した手紙で戦勝報告とフランス人の離脱を書き送っている。ローマックス、P172、P175、鈴木、P178、芝、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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ローマックス、P172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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脇腹へ抜ける山の間道(Despeñaperros Pass;直訳はDespeña-「絶壁から突き落とす」+-perros「犬たちorひどい、劣悪な」→「絶壁にある犬走り、間道」又は「絶壁にある劣悪な間道」か?)をこっそり通って奇襲をかけた、あるいはアンダルシア地方の「王の橋」を通ってシエラ・モレーナ山脈を通り抜けて攻撃をかけたという。鈴木、P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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芝、P139 -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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バード、P69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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ローマックス、P187、P191 - P192、P222、芝、P142 - P144、関、P115 - P116、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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ローマックス、P174 - P183、芝、P140 - P141、P144 - P146、西川、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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フェルナンド3世のレコンキスタが進展した背景にはムワッヒド朝やタイファの内乱があり、それに上手く付け入り町の住民へ寛大な条件で降伏を勧める調略と武力を駆使したことで容易に都市奪取が出来た。カリフ候補者のアブドゥッラー・アーディルとアブー・ムハンマド・アル・バイヤーシーの対立では1224年にバイヤーシーと兄弟のアブー・ザイドを臣従させ、親アーディル派の地方を攻撃、バイヤーシーから協力の見返りにいくつかの都市を獲得した。1233年にはイブン・フードとグラナダ王ムハンマド1世の争いに乗じて、ムワッヒド朝に奪還されていたウベダを再占領、1236年にムハンマド1世と協力しながらコルドバを包囲して落とし、1243年のムルシア降伏でレコンキスタは順調に進んだ。1246年にムハンマド1世の臣従とハエン引き渡しも約束させ、1248年のセビリア陥落でレコンキスタは事実上の終結を迎えた。ローマックス、P188 - P190、P197 - P212、芝、P146 -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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ローマックス、P188 - P216、芝、P146 - P148、関、P154、西川、P144 -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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ローマックス、P193 - P194、P202 - P203、芝、P146、関、P222 - P223、西川、P145 -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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