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로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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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로토레는 파타고니아에 위치한 산으로, 험난한 등반 조건과 논란이 많은 등반 역사로 유명하다. 1959년 체사레 마에스트리의 첫 등반 시도와 관련된 논란이 있었으며, 1970년에는 압축기를 사용한 등반 시도로 비판을 받았다. 1974년 다니엘레 키아파 등이 논란 없는 첫 등정에 성공했고, 이후 다양한 등반가들이 알파인 스타일 등반, 자유 등반, 볼트 제거 등 다양한 시도를 했다. 세로토레는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국경 분쟁 지역에 위치하며, 영화와 다큐멘터리의 소재로도 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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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로토레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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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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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 | 3128m |
솟아오른 높이 | 1227m |
위치 | 파타고니아, 아르헨티나, 칠레 |
산맥 | 안데스 산맥 |
등반 정보 | |
첫 등정 | 1974년 다니엘레 키아파, 마리오 콘티, 카시미로 페라리, 피노 네그리 (이탈리아) |
가장 쉬운 경로 | 암벽/눈/얼음 |
국가 | |
국가 | 아르헨티나, 칠레 |
2. 첫 등반과 논란
체사레 마에스트리의 등정 주장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대부분의 산악인들은 그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했다.[2] 1970년 마에스트리가 사용한 등반 방식 또한 "부정직한" 방법이라며 심한 비판을 받았다.[6]
1979년 짐 브리드웰과 스티브 브루어가 마에스트리가 사용했던 '압축기 루트'를 통해 정상까지 등반했다.[2][7] 그러나 대부분의 등반대는 러임 아이스 버섯을 정복해야만 등반을 완료한 것으로 간주한다.
1974년 "라니 디 레코" 등반가 다니엘레 키아파, 마리오 콘티, 카시미로 페라리, 피노 네그리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최초 등반을 이루어냈다.[3] 마에스트리의 주장에 대한 논쟁은 2014년 켈리 코르데스가 쓴 세로토레에 관한 책 ''The Tower''의 초점이 되었다.[8]
2. 1. 체사레 마에스트리의 1959년 등정 주장
체사레 마에스트리는 1959년에 자신과 토니 에거가 세로토레 정상에 도달했으며, 하산 중 에거가 눈사태에 휩쓸려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마에스트리는 에거가 정상 사진이 담긴 카메라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지만, 이 카메라는 발견되지 않았다. 마에스트리의 설명에 모순점이 있고, 등반 경로에 볼트, 피톤 또는 고정 로프가 없다는 점 때문에 대부분의 산악인들은 마에스트리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했다.[2]2005년, 에르마노 살바테라, 롤란도 가리보티, 알레산드로 벨트라미는 세계적인 등반가들의 수많은 시도 끝에 마에스트리가 등반했다고 주장한 면에 확실한 등반로를 개척했다.[3][4] 그러나 그들은 마에스트리가 설명한 경로에서 이전 등반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고, 그 경로가 마에스트리의 묘사와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2. 2. 1970년 압축기 루트 논란
체사레 마에스트리는 1959년에 자신과 토니 에거가 정상에 도달했으며, 하산 중 에거가 눈사태에 휩쓸려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마에스트리는 에거가 정상 사진이 담긴 카메라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지만, 이 카메라는 발견되지 않았다. 마에스트리의 설명의 모순점과 등반 경로에 볼트, 피톤 또는 고정 로프가 없다는 점 때문에 대부분의 산악인들은 마에스트리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했다.[2]2005년, 에르마노 살바테라, 롤란도 가리보티, 알레산드로 벨트라미는 세계적인 등반가들의 수많은 시도 끝에 마에스트리가 등반했다고 주장한 면에 확실한 등반로를 개척했다.[3][4] 그들은 마에스트리가 설명한 경로에서 이전 등반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고, 그 경로가 마에스트리의 묘사와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마에스트리는 1970년 에지오 알리몬타, 다니엘레 안젤리, 클라우디오 발데사리, 카를로 클라우스, 피에트로 비디와 함께 세로토레로 돌아와 남동면의 새로운 경로를 시도했다. 가스 동력 압축 드릴의 도움으로 마에스트리는 350m의 암벽에 볼트를 설치하고, 얼음 버섯 바로 아래 산의 암벽 부분 끝까지 도달했다.[5] 마에스트리는 "버섯은 산의 일부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정상까지 등반하지 않았다. 압축기는 마지막 볼트에 묶인 채 정상에서 100m 아래에 남겨졌다. 마에스트리는 산을 등반하는 데 사용한 "부정직한" 방법에 대해 심한 비판을 받았다.[6]
마에스트리가 따른 경로는 현재 ''압축기 루트''로 알려져 있으며, 1979년 짐 브리드웰과 스티브 브루어에 의해 정상까지 등반되었다.[2][7]
최초의 논쟁의 여지가 없는 등반은 1974년 "라니 디 레코" 등반가 다니엘레 키아파, 마리오 콘티, 카시미로 페라리, 피노 네그리에 의해 이루어졌다.[3] 마에스트리의 주장에 대한 논쟁은 2014년 켈리 코르데스가 쓴 세로토레에 관한 책, ''The Tower''의 초점이다.[8]
2. 3. 1974년 논란 없는 첫 등정
체사레 마에스트리는 1959년에 자신과 토니 에거가 정상에 도달했으며, 하산 중 에거가 눈사태에 휩쓸려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마에스트리는 에거가 정상 사진이 담긴 카메라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지만, 이 카메라는 발견되지 않았다. 마에스트리의 설명의 모순점과, 등반 경로에 볼트, 피톤 또는 고정 로프가 없다는 점 때문에 대부분의 산악인들은 마에스트리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했다.[2]2005년, 에르마노 살바테라, 롤란도 가리보티, 알레산드로 벨트라미는 세계적인 등반가들의 수많은 시도 끝에 마에스트리가 등반했다고 주장한 면에 확실한 등반로를 개척했다.[3][4] 그들은 마에스트리가 설명한 경로에서 이전 등반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고, 그 경로가 마에스트리의 묘사와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마에스트리는 1970년 에지오 알리몬타, 다니엘레 안젤리, 클라우디오 발데사리, 카를로 클라우스, 피에트로 비디와 함께 세로토레로 돌아와 남동면의 새로운 경로를 시도했다. 가스 동력 압축 드릴의 도움으로 마에스트리는 350m의 암벽에 볼트를 설치하고, 얼음 버섯 바로 아래 산의 암벽 부분 끝까지 도달했다.[5] 마에스트리는 "버섯은 산의 일부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정상까지 등반하지 않았다. 압축기는 마지막 볼트에 묶인 채 정상에서 100m 아래에 남겨졌다. 마에스트리는 산을 등반하는 데 사용한 "부정직한" 방법에 대해 심한 비판을 받았다.[6]
마에스트리가 따른 경로는 현재 '압축기 루트'로 알려져 있으며, 1979년 짐 브리드웰과 스티브 브루어에 의해 정상까지 등반되었다.[2][7]
최초의 논쟁의 여지가 없는 등반은 1974년 "라니 디 레코" 등반가 다니엘레 키아파, 마리오 콘티, 카시미로 페라리, 피노 네그리에 의해 이루어졌다.[3]
3. 주요 등반 기록
세로토레의 주요 등반 기록은 다음과 같다.
- 1959년 - 체사레 마에스트리(이탈리아)와 토니 에거(오스트리아)가 북벽 등반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에거는 이 과정에서 사망했다.
- 1970년 - 마에스트리 외(이탈리아)가 압축기 루트를 통해 등반을 시도했으나, 정상에서 60m 아래 지점까지 등반했다.[18]
- 1973년 - 케빈 캐롤(호주)과 스티븐 맥앤드루스(미국)가 서벽 5번째 등반 중 낙석으로 사망했다. 이들은 이전에 정상 능선에서 목격되었다.
- 1974년 - 다니엘레 키아파, 마리오 콘티, 카시미로 페라리, 피노 네그리(이탈리아)가 논쟁의 여지 없이 최초로 등반에 성공했다.
- 1979년 - 짐 브리드웰과 스티브 브루어가 압축기 루트 등반을 완료했다.
- 1981년 - 톰 프로크터와 필 버크(영국)가 다이데, 동벽에서 북벽으로 등반을 시도했으나, 처마 아래에서 후퇴했다.
- 2004년 - 에르마노 살바테라, 알레산드로 벨트라미, 자코모 로세티(모두 이탈리아 출신)가 ''파라다이스까지 5년'' (ED:VI 5.10b A2 95도, 1000m) 루트(동벽 중앙 오른쪽)를 등반했다.
- 2006년 1월 22일 - 크르지슈토프 벨친스키와 마르친 토마셰프스키가 노르웨이 쉼터에서 출발하여 33시간 만에 알파인 스타일로 "압축기" 루트 2차 또는 3차 등반에 성공했다.
- 2008년 2월 25일 - 발레리 로조프가 세로토레에서 최초로 윙수트 베이스 점프를 했다.[20]
- 2020년 2월 7일 - 독일의 등반가이자 패러글라이더인 파비안 부흘이 세로토레 정상에서 최초로 등반 후 비행을 했다.
3. 1. 알파인 스타일 등반
1977년 데이브 카먼, 존 브래그, 제이 윌슨(미국)이 알파인 스타일 등반을 처음으로 완수하였다. 이들은 세로토레를 등반하는데 일주일이 걸렸는데, 이는 이탈리아 팀이 두 달 걸린 것과 비교된다.[3]1980년 빌 덴즈(뉴질랜드)는 콤프레서 루트의 첫 번째 단독 등반을 시도하였다. 5개월 동안 13번의 집중적인 시도를 했지만, 매번 폭풍에 의해 되돌아갔다. 1980년 11월의 마지막 시도에서는 정상에서 60m 이내까지 도달했다.
2008년 1월, 롤란도 가리보티와 콜린 헤일리는 아구하 스탠다르트, 푼타 헤론, 토레 에거, 세로토레를 함께 등반하며 전체 매시프의 첫 번째 완전한 횡단을 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루트를 등급 VI 5.11 A1 WI6 머쉬룸 아이스 6로 평가하며 총 2200m의 수직 상승을 했다. 이것은 에르마노 살바테라에 의해 처음 시도된 "세계에서 가장 상징적이고 미등반된 라인 중 하나"였다.[9]
2012년 1월 16일, 미국인 헤이든 케네디와 캐나다인 제이슨 크루크는 논란이 많은 콤프레서 루트 근처의 동남 능선에 대해 마에스트리의 원래 벨레이 앵커 2개만 사용하여 최초의 "공정 방식" 등반을 하였다.[15] 정상에 오른 후, 케네디와 크루크는 하강하는 동안 볼트 사다리 볼트 125개를 제거했다. 노르웨고스에서 등반을 지켜본 콜린 헤일리는 그들이 어깨 위의 비비에서 정상까지 13시간이 걸렸다고 추정했다. 헤일리는 "그들이 상단 헤드월에서 버진 그라운드를 탐색하는 속도는 확실히 헤이든의 훌륭한 암벽 기술을 증명하는 것이다"라고 보고했다.[16] 등반 커뮤니티는 케네디와 크루크가 콤프레서 루트에서 볼트를 제거한 것에 대해 동의했으며, 그들의 행동을 "세로토레의 동남 능선을 진정한 모험의 영역으로 복원"한 것으로 받아들였다.[17]
데이비드 라마의 자유 등반(또한 "공정 방식"; 2012년 1월, 피터 오르트너와 함께)과 대조적으로, 케네디와 크루크는 등반 중에 마에스트리의 볼트가 아닌 볼트를 사용했다.[11] 라마는 볼트 횡단을 우회하고 상단 헤드월에서 새로운 라인을 따른 그의 자유 등반의 어려움을 X− 등급으로 추정했다(8a의 어려운 난이도이지만 정신적으로 매우 까다로움).[11] 라마는 원래 콤프레서 루트의 자유 반복은, 특히 마지막 피치의 암석이 등반 가능한 특징을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진술했다.
3. 2. 콤프레서 루트 등반 완료
2012년 1월 16일, 헤이든 케네디와 제이슨 크루크는 콤프레서 루트 근처의 동남 능선에서 마에스트리의 원래 벨레이 앵커 2개만 사용하여 최초의 "공정 방식" 등반을 완료했다.[15] "공정 방식"은 볼트를 안전과 미학을 위해 합리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파타고니아 산맥에서 오랫동안 받아들여진 관행이다.[14] 정상 등정 후, 케네디와 크루크는 하강하면서 볼트 사다리의 볼트 125개를 제거했다.[16]콜린 헤일리는 이들이 어깨 위 비박 지점에서 정상까지 13시간이 걸렸다고 추정했다. 헤일리는 "그들이 상단 헤드월에서 버진 그라운드를 탐색하는 속도는 헤이든의 훌륭한 암벽 기술을 증명한다"고 언급했다.[16] 케네디와 크루크의 볼트 제거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등반 커뮤니티는 대체로 동의했으며, 이들의 행동을 "세로토레의 동남 능선을 진정한 모험의 영역으로 복원"한 것으로 평가했다.[17]
데이비드 라마는 피터 오르트너와 함께 2012년 1월에 콤프레서 루트를 자유 등반 방식으로 등반하였다.[11] 케네디와 크루크와는 달리, 라마는 등반 중에 마에스트리의 볼트를 사용하지 않았다.[11] 라마는 볼트 횡단을 우회하고 상단 헤드월에서 새로운 라인을 따라 자유 등반했으며, 그 어려움을 X- 등급(8a의 어려운 난이도, 정신적으로 매우 까다로움, 느슨한 플레이크 등반, 긴 런아웃)으로 추정했다.[11] 라마는 원래 콤프레서 루트의 자유 등반은 마지막 피치의 암석에 등반 가능한 특징이 없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했다.[11]
3. 3. 동계 등반
1985년 7월 3일부터 8일까지 파올로 카루소, 마우리치오 지아롤리, 에르마노 살바테라(이탈리아)가 세로토레를 최초로 동계 등반하였다.[18]3. 4. 단독 등반
- 1985년 11월 26일 마르코 페드리니는 ''압축기 루트''를 최초로 단독 등반했다.[19] 풀비오 마리아니가 이를 ''세로토레 쿰브레''라는 영상으로 촬영했다.
- 2013년 2월, 오스트리아의 등반가 마르쿠스 푸처가 세로토레 최초의 자유 단독 등반을 성공했다.
- 2015년 2월 21일, 마크-앙드레 르클레르(22세)는 세로토레의 4,000피트 코르크스크류 루트(5.10d, A1)를 하루 만에 단독 등반했는데, 이는 화강암 탑에서 단독 등반된 가장 어려운 루트였다.
3. 5. 공정 등반과 볼트 제거
1977년, 데이브 카먼, 존 브래그, 제이 윌슨(미국)이 알파인 스타일 등반으로 처음 완등하였다. 이들은 세로토레 등반에 일주일이 걸렸는데, 이탈리아 팀은 두 달이 걸렸다.[3]2010년, 오스트리아 등반가 데이비드 라마는 콤프레서 루트에 약 30개의 새로운 볼트와 수백 미터의 고정 로프를 추가하여 논란이 되었다(악천후로 인해 장비 대부분이 산에 남겨졌고 나중에 현지 등반가들에 의해 제거되었다).[10][11] 많은 볼트들은 등반가들이 보호를 위해 사용하는 균열 옆에 드릴되었다.[13] 라마는 드릴된 볼트의 정확한 수를 알지 못했지만, 자신의 행동에 대한 모든 책임을 졌다. 이후 몇 년 동안, 그는 일어난 일에 대해 공개적으로 후회했다.[11]
2012년 1월 16일, 미국인 헤이든 케네디와 캐나다인 제이슨 크루크는 콤프레서 루트 근처의 동남 능선에서 마에스트리의 원래 벨레이 앵커 2개만 사용하여 최초의 "공정 방식" 등반을 했다.[14][15] "공정 방식" 등반은 볼트를 안전과 미학을 위해 합리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파타고니아 산맥에서 오랫동안 받아들여진 관행이다.[14] 정상에 오른 후, 케네디와 크루크는 하강하는 동안 볼트 사다리의 볼트 125개를 제거했다. 등반 커뮤니티는 이들의 볼트 제거에 동의했으며, 이들의 행동을 "체로 토레의 동남 능선을 진정한 모험의 영역으로 복원"한 것으로 평가했다.[17]
데이비드 라마의 자유 등반(또한 "공정 방식"; 2012년 1월, 피터 오르트너와 함께)과 대조적으로, 케네디와 크루크는 등반 중에 마에스트리의 볼트가 아닌 볼트를 사용했다.[11] 라마는 원래 콤프레서 루트의 자유 등반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언급했다.[11]
3. 6. 자유 등반
1977년, 알파인 스타일 등반이 데이브 카먼, 존 브래그, 제이 윌슨(미국)에 의해 처음으로 완수되었다. 이들은 체로 토레 등반에 일주일이 걸렸는데, 이탈리아 팀은 두 달이 걸렸다.[3]2012년 1월 16일, 미국인 헤이든 케네디와 캐나다인 제이슨 크루크는 콤프레서 루트 근처의 동남 능선에서 마에스트리의 원래 벨레이 앵커 2개만 사용하여 최초의 "공정 방식"(볼트를 안전과 미학을 위해 합리적으로 사용하는 용어) 등반을 했다.[15] 정상 등정 후, 케네디와 크루크는 하강하면서 볼트 사다리의 볼트 125개를 제거했다. 콜린 헤일리는 이들이 어깨 위의 비비에서 정상까지 13시간이 걸렸다고 추정했다.[16] 등반 커뮤니티는 이들의 행동을 "체로 토레의 동남 능선을 진정한 모험의 영역으로 복원"한 것으로 평가했다.[17]
데이비드 라마는 2012년 1월 피터 오르트너와 함께 "공정 방식"으로 자유 등반을 했다.[11] 라마는 볼트 횡단을 우회하고 상단 헤드월에서 새로운 라인을 따라 등반했으며, 그 어려움을 X− 등급(8a의 어려운 난이도이지만 정신적으로 매우 까다로움)으로 추정했다.[11] 그는 원래 콤프레서 루트의 자유 등반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언급했다.[11]
4. 국경 분쟁
1881년 아르헨티나-칠레 간 1881년 조약 서명 이후, 이 지역의 경계는 1898년 아르헨티나의 프란시스코 파스카시오 모레노와 칠레의 디에고 바로스 아라나 국경 측량가에 의해 정의되었다. 우에물은 국경 표지물로 지정되었다. 측량가들은 1902년 중재 판결에서 중재 대상이었던 다른 지역과는 달리, 피츠 로이 산과 세로 스토크스 사이의 지역에서는 이견이 없었다. 경계는 피츠 로이 산, 토레, 우에물, 캄파나, 아가시, 하임, 마요, 그리고 스토크스 (현재 세르반테스)와 같은 산악 지형과 그 자연적인 연속성에 의해 정의되었다.[21][22][23] 칠레는 이곳을 국경 표지물로 옹호해 왔다.[24]
1998년, "피츠 로이 산에서 세로 다우데까지의 경계선을 정하기 위한 칠레 공화국과 아르헨티나 공화국 간의 협정"이 체결되어 A 구역과 B 구역의 작은 부분이 정의되었으며, 피츠 로이와 무라욘 사이의 지역은 여전히 보류 중이다.[25]
5. 대중문화 속 세로토레
체로 토레는 1991년 영화 돌의 울음(Scream of Stone)에 등장했으며, 베르너 헤어조크가 감독하고, 비토리오 메초조르노, 슈테판 글로바츠, 도널드 서덜랜드가 출연했다.[26]
존 크라카우어는 1992년 저서 희박한 공기 속으로(Into Thin Air)에서 그의 초기 등반 중 하나로 체로 토레를 짧게 언급했다. "나는 체로 토레라고 불리는 무시무시한 수직 및 오버행 화강암의 마일 높이의 첨탑을 등반했다. 100노트의 강풍에 시달리고, 부서지기 쉬운 대기권의 서리로 뒤덮인 그곳은 한때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산으로 여겨졌다."
2014년 3월, 데이비드 라마를 주연으로 하는 체로 토레의 "최초의 자유 등반"을 다룬 어드벤처 다큐멘터리 ''체로 토레 - 지옥에서 날아온 눈덩이''가 개봉되었다. 이 영화는 2013년 9월 산세바스티안 국제 영화제에서 초연되었다.[2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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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redbull.[...]
2024-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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