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 신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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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이 신세이는 717년 견당사 일행으로 당나라에 건너간 일본인으로, 734년 당나라에서 사망했다. 묘지명에는 '일본'이라는 국명이 명시되어 있으며, 그의 묘지는 2004년 시안시에서 발견되었다. 묘지명과 묘지의 형태, 그리고 장례 절차 등에서 다양한 의문점이 제기되었으며, 출신과 당나라에서의 삶에 대한 여러 학설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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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 신세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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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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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井真成 (정진성) |
성별 | 남성 |
생몰년도 | 불명 ~ 개원 16년 (728년) |
국적 | 당나라 |
묘지 정보 | |
발견 장소 | 섬서성 서안시 온강현 |
시대 | 당나라 |
재료 | 도기 |
형태 | 덮개돌이 있는 항아리 |
크기 | 높이 35.6 cm, 배 지름 20.2 cm |
비문 글자 수 | 165자 |
소장 | 서안 비림 박물관 |
기타 정보 | |
비문 내용 | '일본국 견당사 井眞成의 묘지명'이라고 새겨져 있음. 정진성이 당나라에 유학 온 일본인 유학생이라는 설이 있었으나, 비문의 내용으로 보아 일본에서 온 견당사라는 것이 밝혀짐. |
2. 묘지
2004년 중국 산시성 시안시의 한 공사현장에서 세이 신세이의 묘지가 발견되었다.[9] 발견 후 개인 소유였다가 서북대학교 부속박물관이 소장하게 되었다.[1] 묘지에는 세이 신세이가 개원 22년(734년) 정월에 사망하여 상의봉어(尙衣奉御) 관직을 추증받았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중국에서 발견된 첫 일본인 묘지이자, 현존하는 석각 자료 중 '일본'이라는 국호를 표기한 가장 오래된 사례로 고고학적 가치가 높다.[2]
2. 1. 묘지명 원문 및 해석
아래는 묘지명 원문이며, ■는 판독이 어려운 글자이다.贈尚衣奉御井公墓誌文并序중국어
公姓井字眞成國號日本才稱天縱故能중국어
■命遠邦馳騁上國蹈禮樂襲衣冠束帶중국어
■朝難與儔矣豈圖強學不倦聞道未終중국어
■遇移舟隙逢奔駟以開元廿二年正月중국어
■日乃終于官弟春秋卅六皇上중국어
■傷追崇有典詔贈尚衣奉御葬令官중국어
■卽以其年二月四日窆于萬年縣滻水중국어
■原禮也嗚呼素車曉引丹旐行哀嗟遠중국어
■兮頹暮日指窮郊兮悲夜臺其辭曰중국어
■乃天常哀茲遠方形旣埋于異土魂庶중국어
歸于故鄕중국어
묘지명 해석은 다음과 같다.[1]
: 증상의봉어 정공 묘지문 병서
: 공의 성은 정(井)이고, 자는 진성(眞成)이며, 국호는 일본(日本)이다. 재능은 천성이었고, 그러므로
: ■명(命)이 먼 나라에 이르러 상국(上國)에서 달려가며, 예악(禮樂)을 따르고 의관(衣冠)을 물려받았으니,
: ■조정(朝廷)에서 비할 자가 없었다. 어찌 강하게 배우고 게으르지 않아, 도(道)를 듣고도 마치지 못할 줄 알았으랴.
: ■우연히 배를 옮기는 틈에, 달리는 말을 만나 개원 22년 (734년) 정월
: ■일에 관저(官邸)에서 생을 마쳤으니, 춘추(春秋)는 36세였다. 황상(皇上)
: ■슬퍼하시어 추숭(追崇)의 전례(典禮)가 있어, 조(詔)를 내려 증상의봉어(贈尚衣奉御)를 하시고, 장례를 명하시어,
: ■이에 그 해 2월 4일에 만년현(萬年縣) 찬수이(滻水)의
: ■언덕에 예(禮)에 따라 장례를 치렀다. 아, 소거(素車)가 새벽에 인도하고, 붉은 깃발이 애도하며 멀리 행하니,
: ■아, 해질녘의 쓸쓸한 그림자는 외로운 교외(郊外)를 가리키고, 슬픈 밤의 제단이여. 그 글은 이러하다.
: ■이에 하늘은 항상 슬퍼하고, 이 먼 곳에 형체가 묻히니, 혼백(魂魄)은 부디 고향으로 돌아가소서.
묘지명에는 세이 신세이가 개원 22년(서기 734년) 정월 ■(삭~10, 20 중 하나)일에 사망하여, "상의봉어" 관직을 추증받았다는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다.[2]
2. 2. 묘지명의 특징 및 의문점
세이 신세이의 묘지명은 일반적인 묘지명과 비교했을 때 몇 가지 특징과 의문점을 가지고 있다.- 형태 및 크기:
- 일반적인 묘지는 석면 한쪽 면에 글을 새기지만, 세이 신세이의 묘지는 왼쪽 1/4 부분이 공백으로 남아있다. 다른 예로, "고 구성 돌염계심 이중랑 증 우군위대장군 묘지문"은 묘지명 뒤에 빈칸 3행이 있다.[4]
- 묘지 덮개가 작아서 묘지를 덮을 수 없고, 무늬도 없으며 전체적으로 소형이며 간소하다. 재질은 한백옥질이며 크기는 39.5cm 정방형, 두께 10cm이다. 덮개는 마름모꼴이고 청백질이며 한 변 37cm, 두께 7cm이다.
- 묘지 가로줄의 세로선은 직선이지만 가로선은 끊어지거나 여러 번 다시 그어진 흔적이 있어, 장례와 함께 각문 작업이 급하게 이루어졌다고 추정된다.[5]
- 내용:
- 일반적인 묘지명에는 관직을 지낸 연혁이 기재되지만, 세이 신세이의 묘지명에는 관력이 기록되어 있지 않음에도 사후에 고위 관직(상의봉어)을 받았다.
- 당나라에서 묘지명에 쓰이는 일반적인 표기 형식("당(대당) 고 상의봉어")과 달리 "증, 상의봉어"로 시작한다.[10] 유증에서는 678년에 "고증상의봉"으로 하는 현주 관직 묘지명의 예가 있다.[11]
- 묘지명의 '묘지문'이라는 표현은 보통 '묘지명'으로 쓰인다. 10행의 '사왈'은 '명'인지 '사'인지 불분명하다.[12]
- 11행의 '이토'는 통상적인 당나라 용어가 아니어서 문안 작성에 일본인이 관여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으나, 당나라 시대 문헌에 '이토' 사용 예가 있어 아직 발굴 예가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다.[13]
- 작성 시기 및 배경:
- 당나라 시대 묘지에서는 사망에서 장례까지 평균 7개월이 걸리는데, 세이 신세이의 장례는 최단 13일 또는 최장 33일로 매우 짧다.[6] 657년 다른 상의봉어 관료 부인의 장례는 41일이 걸렸다.[6] 이는 당시 관중 일대에 대기근이 발생하여[7] 현종 황제가 낙양으로 장기 피난을 가는 등[7]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사망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8]
- 묘지명 문안은 당나라 비서성의 문서 담당 저작랑이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도해'나 '사인'과 같은 정보가 누락되어 있다.[9]
- 묘지명은 냉정하고 세심한 해서체로 쓰여 있는데, 서자는 묘지 작성 훈련을 받은 것으로 보이나, 덮개의 전서체는 미숙한 흔적이 보인다. 덮개의 전서체는 묘지의 해서와 같은 오른쪽 위로 향하는 각도를 보이지만, 문자 구조를 이해하지 못하고 형태만 흉내 낸 것으로 보인다.[10]
- 기타 의문점:
- 세이 신세이가 당나라에서 어떤 생계를 유지하며 학문을 닦았는지, 당나라 조정에서 관직을 맡았는지 여부가 불분명하다.
- 유학생 신분으로 왜 중요한 직책인 상의봉어가 추증되었는지, 왜 장례가 관급으로 치러졌는지도 의문이다. 당나라 규정에는 견당사의 왕로 사망에 100관, 아내와 부사의 왕로 사망에 70관의 장례료가 지급되고 묘도 공장되었지만, 세이 신세이는 해당되지 않는다.
- 다른 유학생들의 묘지는 발견되지 않았는데, 왜 세이 신세이의 묘지만 작성되었는지도 의문이다. 신라 유학생은 매년 유학하여 누계 216명에 달했고, 주변국 유학생도 많아 장안에 1000명, 많을 때는 수천 명이 거주하고 있었지만, 낙양을 포함하여 다른 유학생의 묘지는 발견되지 않았다.
- 묘지가 과학적인 조사가 아닌 공사 현장에서 굴착기에 의해 발견되었고, 이후 개인의 손을 거쳐 시장에서 팔렸기 때문에 정확한 발굴 시기와 장소가 불분명하다.
이러한 특징과 의문점들은 세이 신세이의 묘지명이 당시의 일반적인 관례와 다른 점이 많음을 보여주며, 그의 삶과 죽음에 대한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함을 시사한다.
3. 세이 신세이에 대한 연구
세이 신세이는 717년 다지히노마히토 아가타모리(多治比真人県守)를 대사(大使)로 한 견당사(遣唐使)로 당나라에 건너간 것으로 추정되며, 아베노 나카마로(阿倍仲麻呂)나 기비노 마키비(吉備真備)와 같은 시기에 활동했다.[9]
산시성 시안시내 공사현장에서 발견된 묘지는 서북대학교 부속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9] 묘지에는 세이 신세이가 734년 정월에 사망하여 상의봉어(尙衣奉御) 관직을 추증받았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중국에서 발견된 첫 일본인 묘지이자, '일본'이라는 국호를 표기한 가장 오래된 석각 자료이다.[9]
733년(덴표 5년, 당나라 현종 개원 21년) 다지히노마히토 히로나리(多治比真人広成)를 대사로 하는 견당사가 당나라에 왔으며, 이듬해 일본 유학생 기비노 마키비 등을 데리고 귀국하였다. 세이 신세이는 이 견당사가 당나라에 머무를 때 병사한 것으로 보인다.[10] 묘지에 '일본'이라는 국명이 기재되어 있다.[10]
세이(井)라는 성은 중국풍으로 한 글자로 생략된 것으로, 이노우에 씨(井上氏)나 후지이 씨(葛井氏) 출신으로 추정된다. 2005년 NHK스페셜 『신 실크로드(新シルクロード)』에서 관련 드라마가 방송되었다.[10]
3. 1. 출신에 대한 학설
세이 신세이(井真成)의 일본 내 출신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존재한다.- 후지이 씨(葛井氏) 설: 나라 여자 대학교 교수 도노 하루유키(東野治之)와 전 홋카이도 대학 교수 사에키 아리키요(佐伯有清)는 세이 신세이가 고대 호족이자 귀화인의 후예로 외교관 등을 배출한 후지이 씨(葛井氏) 일족이라고 주장한다.
- 이노우에 씨(井上氏) 설: 고쿠가쿠인 대학 교수 스즈키 야스미(鈴木靖民)는 세이 신세이가 고대 호족이자 귀화인의 후예인 이노우에 씨(井上氏) 일족이라고 주장한다. 스즈키 야스미는 후지이 씨(葛井氏)가 한 글자로 성을 표기할 때 중국에도 흔한 '갈(葛)'을 쓰지 않은 점, 후지이 씨가 720년에 하사받은 성씨이므로 세이 신세이가 717년 견당사로 파견된 사실과 연대적으로 맞지 않는 점, 이노우에 씨(井上氏)와 후지이 씨 모두 가와치국 시키 군(志紀郡)을 거점으로 하는 도래계 씨족이라는 점을 근거로 제시한다.[13]
- 정진성(情真誠) 설: 중일관계사학회 부회장 장운방(張雲方)은 '정진성'이 중국어에서 성실하고 정직한 인품을 가리키는 말과 비슷한 뜻을 가진 이름으로, 황제가 하사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경우 세이 신세이의 일본 이름은 알 수 없다.
- 중국 성씨 설: 중국 서안 서북대학 왕유곤(王維坤) 교수는 '정(井)'이 당나라 때부터 장안 주변에 흔한 성씨였고, 세이 신세이가 이를 채용했다고 주장한다. 이 경우에도 일본에서의 본명은 알 수 없다.
- 고급 관리 설: 중국 푸단 대학 교수 한승(韓昇)은 세이 신세이가 717년 유학생이 아니라 733년 견당사 수행원(고급 관리)이었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 당나라 제도에서는 관립 학교 재학 기간이 최장 9년이므로, '17년 동안 유학하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 세이 신세이 사후 추증된 관직인 '상의봉어(尚衣奉御)'는 황제의 의복을 관리하는 부서의 책임자로, 단순한 유학생에게 주어졌다고 보기 어렵다.
- 세이 신세이가 사망한 장소로 표기된 '관제(官第)'는 외국 사절용 숙소이다.
- 세이 신세이의 죽음은 황제에게 보고되었고, 장례 비용은 당 정부에서 부담했는데, 이는 3등관 이상 외국 사절에게 지급되는 것이었다.
3. 2. 당나라에서의 삶과 죽음
세이 신세이는 717년에 다지히노마히토 아가타모리(多治比真人県守)를 대사(大使)로 한 견당사(遣唐使)로서 당나라로 건너갔다. 이는 아베노 나카마로(阿倍仲麻呂)나 기비노 마키비(吉備真備)와 같은 시대에 해당한다.[10]세이 신세이가 죽기 1년 전인 733년 (덴표 5년, 당나라 현종 개원 21년)에는 다지히노마히토 히로나리(多治比真人広成)를 대사로 하는 견당사가 당나라에 왔으며, 이듬해에는 일본의 유학생 기비노 마키비 등을 데리고 귀국하였다. 세이 신세이는 이 견당사가 아직 당나라에 머무르고 있을 때 병으로 죽은 것으로 보인다.[10]
세이 신세이의 사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학설들이 존재한다.
- 당나라 규정 연한 초과 지급설: 히가시노 하루유키는 20년에 1번 견당사를 파견하므로 그 연한을 초과하여 지급했다고 주장한다.[7]
- 근로설: 지급금이 끊어진 후 세이 신세이가 관저에서 죽은 것처럼, 마지막 7-8년은 다음 견당사를 기다려 홍려시의 알선으로 관리의 하청 업무로 생계를 유지했다는 설이 있다.
- 당나라 봉직설: 사문학에서 배우고, 졸업 후에 당나라에서 과거에 합격하여 하급 관리에 봉직했다는 설이 있다.
묘지에는 '일본'이라는 국명이 기재되어 있어 의미가 깊다. 2005년 12월에 NHK스페셜 『신 실크로드(新シルクロード)』에서 세이 신세이의 이미지 드라마가 방송되기도 했다.[10]
3. 3. 묘지의 관급 및 상의봉어 추증
세이 신세이(井眞成)의 장례는 관급으로 치러졌고, 사후 상의봉어(尙衣奉御)라는 높은 관직이 추증되었다. 이는 묘지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데, 몇 가지 특이점이 발견된다.우선 묘지 자체가 일반적이지 않다. 묘지석 일부가 비어 있고, 덮개는 작고 간소하다. 글씨체는 정교하지만 급하게 새긴 흔적이 있다. 이는 당시 장안(長安)에 대기근이 닥쳐 장례가 급박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3] 당시 현종 황제는 장안의 식량 문제로 낙양(洛陽)으로 피난을 가기도 했다.[4]
묘지명 표기 방식도 일반적이지 않다. '증(贈)'자가 붙은 직함으로 시작하고, '묘지문(墓誌文)'이라는 표현을 쓰는 등 통상적인 당나라 표기법과 다르다.[7] 이는 묘지 작성에 일본인이 관여했을 가능성을 제기하지만,[10] 당나라 문헌에도 유사한 표현이 있어 단정하기 어렵다.[11]
가장 큰 의문은 왜 유학생 신분이었던 세이 신세이에게 상의봉어라는 높은 관직이 추증되고, 장례가 관급으로 치러졌는가 하는 점이다. 당나라 규정에 따르면 견당사(遣唐使)의 왕로(往路) 사망자에게는 장례 비용이 지급되었지만,[13] 세이 신세이는 이에 해당하지 않았다. 당시 장안에는 수많은 유학생이 있었지만, 묘지가 발견된 것은 세이 신세이뿐이다.
이에 대해 아베노 나카마로(阿倍仲麻呂)를 중심으로 한 재당 일본인들의 활약이 있었을 것이라는 가설이 있지만, 묘지가 간소하고 세이 신세이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여 반론도 있다.
결론적으로, 세이 신세이의 관급 장례와 상의봉어 추증은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4. 묘지의 발견과 현대의 해석
2004년 시안시의 한 공사 현장에서 세이 신세이의 묘지가 우연히 발견되었다. 발견된 묘지는 잠시 개인 소유였다가 중국 서북대학 부속박물관에 소장되었다.[9] 이 묘지는 734년에 사망한 일본 유학생 세이 신세이에게 상의봉어(尙衣奉御)라는 관직이 추증되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이는 중국에서 발견된 최초의 일본인 묘지이자, 현존하는 석각 자료 중 '일본'이라는 국호를 표기한 가장 오래된 사례로서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9]
세이 신세이는 717년 견당사로 당나라에 건너가 아베노 나카마로, 기비노 마키비 등과 교류했던 인물이다. 733년 일본에서 새로운 견당사가 당나라에 도착했을 때, 세이 신세이는 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세이(井)라는 성은 중국식으로 한 글자로 줄인 것으로, 일본 귀화인 계통의 씨족인 이노우에 씨(井上氏) 또는 후지이 씨(葛井氏) 출신으로 추정된다. 특히 후지이 씨와 관련된 후지이데라시에서는 세이 신세이를 후지이 씨로 추정하고 그를 기리는 운동을 벌였다. 2005년에는 묘지를 일본으로 가져와 공개하기도 했다.[11] 또한, 후지이데라시의 공식 캐릭터 '마나리 군'이 만들어지기도 했다.[12]
4. 1. 한국의 관점
세이 신세이의 묘지명에 나타난 '일본' 국호는 한국 고대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이다. 묘지명에는 세이 신세이가 734년에 사망하여 상의봉어(尙衣奉御) 관직을 추증받았다는 사실과 함께 '일본'이라는 국명이 명기되어 있다. 이는 중국에서 발견된 첫 일본인 묘지이자, 현존하는 석각 자료 중 '일본' 국호를 표기한 가장 오래된 사례로, 당시 일본이 '일본'이라는 국호를 대외적으로 사용했음을 보여준다.[9]세이 신세이는 717년 견당사로 당나라에 건너가 아베노 나카마로, 기비노 마키비 등과 같은 시대에 활동했다. 733년 일본에서 새로운 견당사가 당나라에 도착했을 때 세이 신세이는 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세이 신세이의 사례는 고대 한일 관계 및 동아시아 국제 관계 연구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참조
[1]
뉴스
填补历史空白 日本遣唐留学生墓志首次在西安发现
http://www.chinanews[...]
2004-10-12
[2]
뉴스
遣唐留学生の墓誌を発見玄宗皇帝が官位贈る中国西安市
産経新聞
2004-10-11
[3]
웹사이트
第10集 西安 永遠の都
http://www.nhk.or.jp[...]
2004-10-28
[4]
간행물
唐「井真成墓誌」研究の総括
https://doi.org/10.3[...]
専修大学社会知性開発研究センター
[5]
간행물
唐「井真成墓誌」研究の総括
https://doi.org/10.3[...]
専修大学社会知性開発研究センター
[6]
서적
中国西安の日本遣唐使墓誌と墓主井真成
吉川弘文館
[7]
뉴스
《井真成》はどんな人? 中国で官吏説
朝日新聞夕刊
2010-01-27
[8]
뉴스
西安の墓誌
http://osaka.yomiuri[...]
2005-02-07
[9]
뉴스
填补历史空白 日本遣唐留学生墓志首次在西安发现
http://www.chinanews[...]
2004-10-12
[10]
웹사이트
第10集 西安 永遠の都
http://www.nhk.or.jp[...]
2004-10-28
[11]
뉴스
西安の墓誌
http://osaka.yomiuri[...]
2005-02-07
[12]
웹사이트
후지데라 시 공식 캐릭터 마나리 군 홈페이지(일본어)
http://www.fujiidera[...]
[13]
서적
中国西安の日本遣唐使墓誌と墓主井真成
吉川弘文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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