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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황룡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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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종 황룡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은 결가부좌한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 함께 복장유물로 구성되어 있다. 불상은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전반까지 활동한 조각승 진열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18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복장유물로는 1569년과 1658년에 간행된 진언집과 조선 후기에 제작된 금강왕여래다라니, 육경합부, 후령통 등이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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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황룡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개요
이름연동 황룡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로마자 표기Yeondong Hwangnyongsa Mokjoamitayeoraejwasang mit Bokjangyুমul
국가세종특별자치시
유형유형문화재
지정 번호19
지정일2014년 12월 22일
주소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황우재길 22-17 황룡사
시대조선시대
참고불상규격 : 전체높이 54.0cm, 얼굴 15×11.5cm, 어깨너비 24.0cm, 무릎너비 35.0cm, 무릎높이 11.0cm, 불상바닥면 37.0×32.0cm
수량목조아미타여래좌상 1구, 복장유물 11점
문화재청21,00190000,45

2. 황룡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황룡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결가부좌로 앉아 있는 불상으로 손은 따로 제작하여 끼웠으며 수인은 무릎에 올려 놓은 다음 엄지와 중지를 맞댄 중품하생인이다. 머리에는 원형 정상계주, 반달형 중간계주와 나발을 조각하였고 갸름한 얼굴에 넓은 이마, 반달형 눈, 오똑하면서 작은 코, 입꼬리를 살짝 파서 옅은 미소를 띤 듯 온화한 인상을 풍긴다.

착의법은 변형 통견식으로 편삼 위에 대의를 양 어깨 위로 걸쳤고 편평한 가슴에는 수평의 승각기가 보인다. 대의는 오른쪽 어깨에 끝을 뾰족하게 처리한 대의 끝자락이 특징이며, 편삼은 배 중앙에서 마치 W자 형태로 접혀 있다. 무릎 아래로 흘러 내린 옷자락은 같은 폭으로 주름잡혀져 밑으로 늘어져 있다. 왼쪽 무릎 위에 표현된 나뭇잎형 대의 끝자락은 소매에서 흘러 내린 것으로 사선으로 뻗쳐져있는 특징적인 모습이다.

황룡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특징적인 얼굴 표정과 옷주름, 연화좌 위로 흘러 내린 꽃잎형 옷자락 등에서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전반까지 활동한 조각승 진열의 작품으로 추정된다.[1]

불상의 제작시기는 복장물의 명문을 통해 18세기 전반으로 편년되며, 보존상태가 좋고 시기적 조형성이 뚜렷한 작품이다.[1]

2. 1. 불상의 형태

세종 황룡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결가부좌로 앉아 있으며, 손은 따로 제작하여 끼웠다. 수인은 무릎 위에 놓은 다음 엄지와 중지를 맞댄 중품하생인이다. 머리에는 원형 정상계주, 반달형 중간계주와 나발을 조각하였다. 갸름한 얼굴에 넓은 이마, 반달형 눈, 오똑하면서 작은 코, 입꼬리를 살짝 파서 옅은 미소를 띤 듯 온화한 인상을 풍긴다.

착의법은 변형 통견식으로 편삼 위에 대의를 양 어깨 위로 걸쳤고 편평한 가슴에는 수평의 승각기가 보인다. 대의는 오른쪽 어깨에 끝을 뾰족하게 처리한 대의 끝자락이 특징이며, 편삼은 배 중앙에서 W자 형태로 접혀 있다. 무릎 아래로 흘러내린 옷자락은 같은 폭으로 주름잡혀져 밑으로 늘어져 있다. 왼쪽 무릎 위에 표현된 나뭇잎형 대의 끝자락은 소매에서 흘러내린 것으로 사선으로 뻗쳐져 있는 특징적인 모습이다.

특징적인 얼굴 표정과 옷주름, 연화좌 위로 흘러내린 꽃잎형 옷자락 등에서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전반까지 활동한 조각승 진열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불상의 제작 시기는 복장물의 명문을 통해 18세기 전반으로 편년되며, 보존 상태가 좋고 시기적 조형성이 뚜렷한 작품이다.

2. 2. 착의법 및 특징

황룡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변형 통견식 착의법을 따르고 있는데, 편삼 위에 대의를 양 어깨 위로 걸친 형태이다. 가슴에는 수평의 승각기가 보이며, 대의는 오른쪽 어깨에 끝을 뾰족하게 처리한 끝자락이 특징적이다. 편삼은 배 중앙에서 W자 형태로 접혀 있다. 무릎 아래로 흘러내린 옷자락은 같은 폭으로 주름져 있으며, 왼쪽 무릎 위에 표현된 나뭇잎형 대의 끝자락은 소매에서 흘러내린 것으로 사선으로 뻗쳐 있다. 이러한 옷주름과 꽃잎형 옷자락 등은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전반까지 활동한 조각승 진열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다.

2. 3. 조각승 진열과의 연관성

황룡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결가부좌 자세로 앉아 있으며, 손은 별도로 제작하여 끼운 형태이다. 수인은 무릎 위에 놓은 채 엄지와 중지를 맞댄 중품하생인이다. 머리에는 원형 정상계주와 반달형 중간계주, 나발이 조각되어 있고, 갸름한 얼굴에 넓은 이마, 반달형 눈, 오똑하고 작은 코,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옅은 미소를 띤 온화한 인상이다.[1]

착의법은 변형 통견식으로, 편삼 위에 대의를 양 어깨에 걸쳤으며, 편평한 가슴에는 수평의 승각기가 보인다. 오른쪽 어깨에 뾰족하게 처리된 대의 끝자락과 배 중앙에서 W자 형태로 접힌 편삼이 특징적이다. 무릎 아래로 흘러내린 옷자락은 같은 폭으로 주름져 있으며, 왼쪽 무릎 위에 표현된 나뭇잎형 대의 끝자락은 소매에서 흘러내린 것으로 사선으로 뻗쳐 있다.[1]

이러한 특징적인 얼굴 표정과 옷주름, 연화좌 위로 흘러내린 꽃잎형 옷자락 등은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전반까지 활동한 조각승 진열의 작품으로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1] 불상의 제작 시기는 복장물의 명문을 통해 18세기 전반으로 추정되며,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시대적 조형성이 뚜렷한 작품이다.[1]

3. 복장유물

1569년(선조 2년)에 안심사에서 간행된 진언집 2점과 1658년(효종 9년)에 신흥사에서 간행된 진언집 4점이 발견되었다. 안심사판 진언집은 각각 52.0×26.0cm(27.0×18.8cm), 49.8×25.5cm(30.8×19.2cm) 크기이며, 각각 '無着比丘 莫令保体金權兩主'와 '隆慶 三年名...'으로 시작한다. 신흥사판 진언집은 50.5×25.0cm(27.0×19.0cm), 51.0×26.0cm(28.0×19.0cm), 50.2×26.0cm(27.0×19.5cm), 49.0×25.7cm(27.0×19.5cm) 크기이다. 각각 '遍一切處字輪...', '乾隆戊午...三角山 重興寺 本尊 大施主...李得明兩主...', '仁王護國般若陀羅尼', '達磨娑誐囉三步諦何...' 등으로 시작한다.

조선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금강왕여래다라니, 육경합부, 후령통도 발견되었다. 금강왕여래다라니는 51.0×26.6cm 크기이며 주서로 쓰여 있다. 육경합부는 보현행원품 등으로 구성된 세 종류가 발견되었으며, 각각 52.0×25.8cm(26.2×18.5cm), 51.5×25.7cm(26.4×19.0cm), 51.0×26.0cm(26.5×18.3cm) 크기이다. 후령통은 전체 높이 8.0cm, 뚜껑 높이 1.4cm, 밑면 2.7×2.7cm이며 황초폭자에 싸여 있었다. 외면에는 원형, 삼각형, 방형, 반달형 등 오방경이 확인된다.

3. 1. 진언집

1569년(선조 2년)에 안심사에서 간행된 진언집 2점과 1658년(효종 9년)에 신흥사에서 간행된 진언집 4점이 발견되었다. 안심사판 진언집은 각각 52.0×26.0cm(27.0×18.8cm), 49.8×25.5cm(30.8×19.2cm) 크기이며, 각각 '無着比丘 莫令保体金權兩主'와 '隆慶 三年名...'으로 시작한다. 신흥사판 진언집은 50.5×25.0cm(27.0×19.0cm), 51.0×26.0cm(28.0×19.0cm), 50.2×26.0cm(27.0×19.5cm), 49.0×25.7cm(27.0×19.5cm) 크기이다. 각각 '遍一切處字輪...', '乾隆戊午...三角山 重興寺 本尊 大施主...李得明兩主...', '仁王護國般若陀羅尼', '達磨娑誐囉三步諦何...' 등으로 시작한다.

조선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금강왕여래다라니, 육경합부, 후령통도 발견되었다. 금강왕여래다라니는 51.0×26.6cm 크기이며 주서로 쓰여 있다. 육경합부는 보현행원품 등으로 구성된 세 종류가 발견되었으며, 각각 52.0×25.8cm(26.2×18.5cm), 51.5×25.7cm(26.4×19.0cm), 51.0×26.0cm(26.5×18.3cm) 크기이다. 후령통은 전체 높이 8.0cm, 뚜껑 높이 1.4cm, 밑면 2.7×2.7cm이며 황초폭자에 싸여 있었다. 외면에는 원형, 삼각형, 방형, 반달형 등 오방경이 확인된다.

3. 2. 기타 경전

금강왕여래다라니는 조선 후기에 작성된 경전으로, 주서(硃書)로 쓰여졌다. 크기는 51.0×26.6cm이다.

육경합부는 조선 후기에 작성된 경전으로, 보현행원품 등이 포함되어 있다. 3개의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부분의 크기는 다음과 같다.

부분크기(cm)
보현행원품
(如是経於刹塵劫...)
52.0×25.8
(26.2×18.5)
보현행원품
(佛海及與國土海...)
51.5×25.7
(26.4×19.0)
歸依諸如來五智十身佛...51.0×26.0
(26.5×18.3)


3. 3. 후령통

세종 황룡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유물 중 하나인 후령통은 전체 높이 8.0cm, 뚜껑 높이 1.4cm, 밑면 2.7cm x 2.7cm의 크기이다. 후령통은 황초폭자에 싸여 있었으며, 외면에는 원형, 삼각형, 방형, 반달형 등 오방경이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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