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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비암사 영산회괘불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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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종 비암사 영산회괘불탱은 효종 8년(1657년)에 제작된 대형 불교 그림으로, 사찰의 의식에 사용하기 위해 법당 앞에 걸어 예배를 드렸다. 화가 신겸, 응상, 응열 등이 참여하여 제작되었으며, 세련된 필치, 독특한 인물 표현, 파스텔톤의 색감, 원근법 사용 등이 특징이다. 17세기 화풍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며, 노비구들의 해학적인 표현과 사천왕상의 묘사가 돋보인다. 대한민국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한국 불교 미술사에서 중요한 유산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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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비암사 영산회괘불탱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개요
전의 비암사 영산회 괘불탱화
전의 비암사 영산회 괘불탱화
이름전의 비암사 영산회 괘불탱화 (全義 卑岩寺 靈山會 掛佛幀畫)
지정 번호12
지정일2012년 12월 31일
재료마본 채색
시대조선시대 (1657년, 효종 8년)
소유자비암사 주지
수량1폭
길이863cm
486cm
소재지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비암사길 137

2. 역사

조선 효종 8년인 1657년에 제작된 불화이다.[2] 이 괘불탱은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에 위치한 비암사에 봉안하기 위해 만들어졌다.[2] 제작에는 당시 충청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뛰어난 화승인 신겸(信謙), 응상(應祥), 응열(應悅), 덕회(德懷) 등이 참여하였다.[2] 괘불탱 하단에 남아있는 기록(화기)을 통해 조성 연대, 시주자, 참여 화승, 봉안 사찰 등을 명확히 알 수 있어 17세기 불화 및 불교 미술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2]

2. 1. 제작 배경

비암사 영산회괘불탱은 1657년(효종 8년)에 제작되었다. 괘불탱 하단에 먹으로 쓴 기록(화기)이 남아 있어 제작에 참여한 화승들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데, '신겸비구(信謙比丘) 응상비구(應祥比丘) 응열비구(應悅比丘) 덕회비구(德懷比丘)' 등이 대표적이다.[2] 이들은 17세기 충청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뛰어난 화승들이었다.[2]

특히 신겸은 이 괘불탱을 그리기 5년 전인 1652년에 청원 안심사영산회괘불탱(국보 제297호)을 제작한 경험이 있는 당대 최고의 화승 중 한 명이었다.[2] 함께 참여한 응열 역시 1650년 갑사삼신불괘불탱(국보 제298호), 1664년 공주 신원사괘불탱, 1673년 수덕사 노나사괘불탱(보물 제1263호) 등 충청도 지역을 중심으로 다수의 중요한 불화를 제작한 화가였다.[2] 이처럼 비암사 영산회괘불탱은 당대 최고의 기량을 가진 화승들이 참여하여 제작되었으며, 남아있는 화기를 통해 조성 연대와 시주자, 화승, 봉안 사찰 등을 알 수 있어 17세기 불화 및 불화 양식 연구에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2]

2. 2. 화풍 및 양식

이 괘불탱은 17세기 충청도 지역 불화의 대표적인 양식을 보여준다.[2][3] 화면 중앙에는 석가여래가 정면을 바라보며 결가부좌 자세로 앉아 있고, 그 주위로 여러 부처보살, 제자, 신중들이 배치되어 영축산에서의 설법 장면을 장엄하게 나타낸다.[2] 상단에는 6타방불, 시방제불, 용왕과 용녀가 둘러싸고 있으며, 옆에는 제석천범천, 가섭과 아난, 12제자와 신중들이, 하단에는 문수보현보살, 사천왕상이 자리한다.[2]

전체적으로 밝고 선명한 색조를 사용했으며, 특히 보색 대비를 활용하여 장식적이고 화려한 느낌을 준다.[2][3] 필치가 세련되고 안정된 색감을 보여주며, 파스텔톤의 뛰어난 색감도 특징적이다.[2][3] 인물 표현에서는 석가모니와 협시보살의 당당한 모습, 노비구들의 자연스러운 표정, 그리고 사천왕상의 부릅뜬 눈, 다문 입, 큼직한 코 등 해학적인 묘사가 돋보인다.[3] 또한, 화면 하단에서 위로 갈수록 인물의 크기를 작게 그려 원근법을 사용함으로써 입체감을 살렸다.[3] 이는 평면적인 색면 표현이 주를 이루던 동시대 다른 작품들과 구별되는 독특한 채색과 입체적인 묘사이다.[3]

이 괘불은 화가 신겸(信謙), 응상(應祥), 응열(應悅) 등이 함께 그렸으며, 특히 신겸은 1652년 청원 안심사영산회괘불탱(국보 제297호) 등을 제작한 17세기 충청도 지역의 대표적인 화승이다.[2][3] 화면 상단부 일부가 소실되어 후에 다시 제작되었지만, 남아있는 부분의 뛰어난 필치와 안정된 색감은 이 작품이 17세기 괘불의 대표작임을 보여준다.[2] 화기를 통해 조성 연대(효종 8년, 1657년), 시주자, 화승, 봉안 사찰 등을 명확히 알 수 있어 동시대 불화 양식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2][3]

3. 도상 및 특징

세종 비암사 영산회괘불탱은 석가여래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하는 장면인 영산회를 묘사한 불화이다.[2] 화면 중앙의 본존불을 중심으로 여러 불교 존상들이 상하좌우에 대칭적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밝고 화려한 색채와 장식적인 표현이 두드러진다.[2][3] 특히, 화가 신겸(信謙)의 독특한 화풍과 17세기 불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3]

3. 1. 전체 구성

비암사 영산회괘불탱 중앙에는 정면을 바라보는 석가여래가 거신광의 광배에 싸여 결가부좌한 모습으로 자리한다. 그 주위 상단은 6타방불과 시방제불, 용왕과 용녀가 둘러싸고 있으며, 옆에는 제석천범천, 가섭과 아난, 12제자와 신중들이 배치되어 있다. 하단부에는 좌우 협시보살인 문수보현보살, 그리고 사천왕상이 자리한다. 화면 중앙의 석가불은 항마촉지의 수인을 하고 위에서 아래를 굽어보는 듯한 자세로 앉아 있다. 전체적으로 밝은 색조를 띠며 선명한 보색을 사용하여 장식적이고 화려함을 더한다.[2]

3. 2. 세부 묘사

비암사 영산회괘불탱 중앙에는 정면을 바라보는 석가여래가 거대한 광배에 둘러싸여 결가부좌한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다. 석가여래는 항마촉지인의 손 모양을 하고 있으며, 약간 위에서 아래를 굽어보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2][3] 그 주위 상단에는 6타방불과 시방제불, 용왕과 용녀가 둘러싸고 있으며, 옆에는 제석천범천, 가섭과 아난, 12제자와 신중들이 배치되어 있다. 하단부에는 좌우 협시보살인 문수보현보살, 그리고 사천왕상이 자리한다.[2]

전체적으로 밝은 색조를 띠며, 선명한 보색을 사용하여 장식적이고 화려한 느낌을 준다.[2] 필치가 세련되고 인물의 표현 기법 및 배치가 독특하며, 파스텔조의 색감과 당당한 모습의 석가여래 및 협시보살 표현에서 화가 신겸(信謙)의 묘사력을 엿볼 수 있다.[3] 특히 노비구들의 응시하는 듯 자연스러운 얼굴 표정과, 사천왕상의 부릅뜬 눈, 다문 작은 입, 큼직한 코 등에서 나타나는 해학적인 표현이 돋보인다. 또한, 그림 하단에서 위로 갈수록 인물의 크기를 점점 작게 그려 원근법을 사용하여 공간감을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3] 이러한 독특한 채색 활용과 입체적인 묘사는 평면적인 색면을 지향했던 동시대 다른 작품들과 구별되는 점으로, 17세기 화풍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3]

4. 의의 및 평가

세종 비암사 영산회괘불탱은 명확한 제작 기록과 뛰어난 예술성을 지녀 불교 미술사 연구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하단 화기(畵記)를 통해 제작 연대, 참여 화승 등을 알 수 있어 17세기 불화괘불 연구에 기여하며, 특히 당시 충청도 지역 화풍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2][3] 뛰어난 표현 기법과 구성을 보여주는 17세기 대표 괘불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2][3] 이러한 학술적,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국보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4. 1. 학술적 가치

이 괘불탱은 하단부에 먹으로 쓴 화기(畵記)가 남아 있어, 효종 8년(1657년)이라는 명확한 조성 시기, 시주자, 그림을 그린 화승(화원), 봉안된 사찰 등을 알 수 있다.[2][3] 이는 동시대 괘불 및 불화 양식을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2]

화기에는 '신겸비구 응상비구 응열비구 덕회비구'를 비롯한 여러 화승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2] 이 중 신겸(信謙)은 1652년 청원 《안심사영산회괘불탱》(국보 제297호) 제작에 참여했으며, 응열(應悅)은 1650년 《갑사삼신불괘불탱》(국보 제298호), 1664년 《공주 신원사괘불탱》, 1673년 《수덕사노사나불괘불탱》(보물 제1263호) 등을 그린 화가로, 이들은 주로 충청도 지역에서 활동했다.[2] 따라서 이 괘불탱은 17세기 충청도 지역의 대표적인 화승 신겸과 동료 화승들의 작품 세계와 당시 화풍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2][3]

비록 화면 상단부 일부가 없어져 후에 다시 제작되었지만, 남아있는 부분은 뛰어난 필치와 안정된 색감, 상승감을 느끼게 하는 인물 배치 등을 보여주어 17세기 괘불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2] 세련된 필치와 독특한 인물 표현 기법 및 배치, 파스텔톤의 뛰어난 색감, 당당한 모습의 석가모니와 협시보살(문수보살, 보현보살) 표현에서 화승 신겸의 뛰어난 묘사력을 엿볼 수 있다. 또한, 노비구(가섭, 아난)들의 응시하는 듯한 자연스러운 표정이나 사천왕상의 부릅뜬 눈, 다문 입, 큼직한 코 등에서 나타나는 해학적인 표현, 하단에서 위로 갈수록 인물 크기를 작게 그려 원근감을 나타낸 점도 특징적이다. 평면적인 색면 표현을 주로 사용했던 동시대 다른 작품들과 달리, 이 괘불은 독특한 채색 기법과 뛰어난 입체적 묘사를 보여주어 17세기 화풍을 비교 연구하는 데 가치가 높다.[3]

참조

[1] 고시 충청남도 고시 제 2007 - 242호 http://www.chungnam.[...] 충청남도 2007-09-20
[2] 고시 세종특별자치시 지정문화재 및 문화재자료 지정 고시 세종특별자치시장 2012-12-31
[3] 안내문 현지 안내문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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