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야마 가쓰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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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나야마 가쓰치요는 가이국 가와치 영주 아나야마 노부타다의 아들로, 1572년에 태어나 1587년에 사망한 인물이다. 그는 다케다 가문에 속했으나, 아버지의 배신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귀속되었다. 어린 나이에 가문을 이끌었지만, 천연두로 사망하며 대가 끊어졌다.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자신의 아들에게 다케다 가문의 이름을 잇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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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야마 가쓰치요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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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씨명 | 아나야마씨, 가이 다케다씨 |
이름 | 아나야마 가쓰치요/다케다 노부하루 |
원어 이름 | 穴山勝千代/武田信治 |
별명 | 노부하루? |
가몬 | Mitsu Hanabishi inverted.png |
가몬 설명 | 미쓰하나비시(三つ花菱) |
계명 | 송원원전승악수공대선정문(松源院殿勝岳守公大禅定門) |
묘소 | 야마나시현 미나미코마군 난부정 후쿠시(옛 도군 도미사와초)의 사이온지(最恩寺) |
생애 | |
시대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
출생 | 겐키 3년(1572년) |
사망 | 덴쇼 15년 음력 6월 7일(1587년 7월 12일)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아나야마 노부타다(穴山信君) |
어머니 | 겐쇼인(見性院, 다케다 신겐의 딸) |
양아버지 | 다케다 노부카쓰(武田信勝) |
형제 | 가쓰치요, 운노 노부치카(海野信親) |
양형제 | 게산덴(下山殿, 도쿠가와 이에야스 측실) |
자녀 | 양자: 다케다 노부요시(武田信吉) |
관직 및 직위 | |
주군 | 도쿠가와 이에야스 |
가이 아나야마가 당주 (대수) | 8대 |
가이 아나야마가 당주 (임기) | 1580년 ~ 1587년 |
가이 다케다가 당주 (대수) | 22대 |
가이 다케다가 당주 (임기) | 1582년 ~ 1587년 |
기타 | |
특기 사항 | 다케다 노부요시가 명적 답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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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출신
아나야마 씨는 가이 남부의 가와치(河内) 영지를 다스리던 고쿠진 영주였다. 처음에는 스루가의 이마가와 씨에 속하여 다케다 씨와 대립 관계에 있었으나, 가쓰치요의 할아버지인 노부토모 대에 이르러 다케다 씨에게 복속했다.
아나야마 가쓰치요는 겐키 3년(1572년) 아나야마 노부키미의 적남으로 태어나 가문의 후계자로 길러졌다. 덴쇼 8년(1580년) 아버지가 출가하면서 어린 나이에 가독을 물려받았으나, 실권은 여전히 아버지가 가지고 있었다.
할아버지 노부토모와 아버지 아나야마 노부키미(은거 후 법명은 바이세쓰(梅雪))는 다케다 가문의 고몬슈(御門衆, 일족 중 최고 가신)가 되었다. 노부토모부터 가쓰치요까지 3대에 걸쳐 가와치 영지에서 발급한 문서가 집중적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이 시기에 아나야마 씨의 영지 지배 체제가 정비되었음을 보여준다.
에이로쿠 11년(1568년) 다케다 씨가 스루가 침공을 단행하자, 아버지 노부키미는 기존의 본령인 가와치 영지 외에도 스루가의 에지리(江尻) 영지를 추가로 확보했다. 이로써 아나야마 씨는 다케다 가문과 대치하던 오다·도쿠가와 세력과의 최전선에 서게 되었다.
3. 생애
덴쇼 10년(1582년), 아버지 노부키미가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일본어) 직후 예상치 못한 죽음을 맞이하면서 가쓰치요는 정식으로 아나야마 가문의 당주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 혼란한 정세 속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그의 신변과 영지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영향력 아래 두면서, 아나야마 가문은 사실상 도쿠가와 가문에 종속되었다. 이후 옛 다케다 가문의 영지를 둘러싸고 벌어진 덴쇼 임오의 난(天正壬午の乱일본어)을 거치며, 가쓰치요는 명목상 영지를 안도받았으나 실질적인 지배권은 갖지 못했다.
결국 가쓰치요는 덴쇼 15년(1587년) 천연두에 걸려 1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에게는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아나야마 가문의 대는 끊기게 되었다. 그의 짧은 생애는 전국 시대 말기의 혼란 속에서 권력 투쟁에 휘말린 어린 영주의 비극적인 운명을 보여준다.
3. 1. 어린 시절과 가독 상속
겐키 3년(1572년) 아나야마 노부키미의 적남으로 시모야마관(미노부정 시모야마)에서 태어났다. 사이온지에 소장된 가쓰치요의 화상에는 엔조인 주지의 찬문이 있어, 어릴 때부터 폭넓은 교양을 쌓으며 아버지의 후계자로 길러졌음을 알 수 있다.
『무토쿠 편년집성』에 따르면 덴쇼 8년(1580년) 아버지 노부키미가 출가하면서 가독을 이어받아 아나야마 가문의 당주가 되었다. 이미 덴쇼 7년(1579년) 2월과 12월에 가쓰치요(노부하루)의 이름으로 3점의 주인장이 발급되었으나[1],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실권은 아버지 노부키미(법명 바이세츠)가 쥐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듬해인 덴쇼 9년(1581년)에는 다케다 가쓰요리의 딸과의 약혼이 파기되었는데, 『고요군칸』은 이것이 아버지 노부키미가 다케다 가문을 배반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만 노부키미는 배반할 때 다케다 가문의 명맥을 남기는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고, 가쓰치요를 다케다 가문의 당주로 삼는 것에 대해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승낙을 얻었다.
덴쇼 10년(1582년), 아버지 노부키미는 미카와국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내통하여, 같은 해 3월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의 다케다 영지 침공 때 다케다 가문을 배반했다. 전쟁 후 노부키미는 자신의 영지를 보장받았으나, 같은 해 6월 혼노지의 변 즈음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 일행과 사카이를 견학한 후 귀국하던 중 불의의 죽음을 맞이했다. 이로 인해 가쓰치요가 정식으로 아나야마 가문의 당주가 되었다. 한편,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미카와로 돌아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즉시 가와치 영지를 장악하기 위해 오카베 마사쓰나를 파견했고, 아나야마 가문은 도쿠가와 가문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후 다케다 유령(옛 영지)을 둘러싸고 도쿠가와 가문과 사가미국의 고호조 씨가 벌인 덴쇼 임오의 난에서 가와치 영지는 도쿠가와 측에 의해 통제되었으며, 아나야마 가문의 가신들도 도쿠가와 측에 서서 다케다 유신(옛 가신)의 회유에 힘썼다.
같은 해 8월, 가쓰치요는 이에야스로부터 가와치 영지와 에지리 영지 외에도 스루가국 서산과 가토 스즈(모두 시즈오카현 후지노미야시) 지역의 소유권을 안도받았다. 하지만 에지리성에는 혼다 시게쓰구, 마쓰다이라 이에타다, 아마노 야스카게 등이, 가와치 영지에는 스기누마 사다마사가 주둔하고 있어, 지배권은 사실상 찬탈된 것으로 여겨진다. 가쓰치요 시대의 문서는 23통(유년호 19, 무년호 4)이 있지만, 대부분 아버지 노부키미 시대의 지배를 확인하는 계목 안도 문서이다. 이는 덴쇼 임오의 난을 앞두고 가이국 지배의 안정을 원했던 이에야스의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덴쇼 15년(1587년) 6월 7일, 가쓰치요는 천연두에 걸려 1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는 아버지 노부키미가 죽은 지 5년 만이었다.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아나야마 가문의 혈통은 단절되었다.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자신의 다섯째 아들인 노부요시에게 가이 다케다 가문의 대를 잇게 했다. 가쓰치요의 묘소인 사이온지에는 그의 초상화(견본 채색 아나야마 가쓰치요 화상, 야마나시현 지정 문화재)가 소장되어 있다.
3. 2. 다케다 가문 멸망과 도쿠가와 가문 종속
덴쇼 8년( 1580년 ), 아버지 아나야마 노부키미(바이세츠)가 출가함에 따라 가독을 물려받아 아나야마 가문의 당주가 되었다. 덴쇼 7년( 1579년 ) 2월과 12월에 가쓰치요 명의로 된 3점의 주인장이 발급되었으나[1],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실권은 아버지 노부키미가 쥐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덴쇼 9년( 1581년 )에는 다케다 가쓰요리의 딸과의 약혼이 파기되었는데, 『고요군칸』에 따르면 이 일이 아버지 노부키미가 다케다 가문을 배반하게 된 원인 중 하나라고 한다. 다만 노부키미는 배반할 당시, 다케다 가문의 명맥을 남긴다는 조건으로 가쓰치요를 다케다 가문의 당주로 삼는 것에 대해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승낙을 얻었다.
덴쇼 10년( 1582년 ), 아버지 노부키미는 미카와국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내통하여, 같은 해 3월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연합군이 다케다 영지를 침공할 때 다케다 가문을 배반했다. 전쟁 후 노부키미는 자신의 본래 영지를 안도받았으나, 같은 해 6월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혼노지의 헨일본어)이 일어났을 때 도쿠가와 이에야스 일행과 함께 사카이를 방문했다가 교토 근처에서 예상치 못한 죽음을 맞이했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가쓰치요는 정식으로 아나야마 가문의 당주가 되었다. 혼노지의 변으로 위험에 처했다가 미카와국으로 돌아온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즉시 옛 아나야마 영지인 가와치 지방을 자신의 지배하에 두기 위해 오카베 마사쓰나를 파견했고, 이로써 아나야마 가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종속되었다. 이후 옛 다케다 영지를 둘러싸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사가미국의 고호조 씨가 다툰 덴쇼 임오의 난(天正壬午の乱|덴쇼 진고노 란일본어)에서 가와치 영지는 도쿠가와 군대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었으며, 아나야마 가문의 가신들도 도쿠가와 측에 가담하여 옛 다케다 가신들을 회유하는 데 동원되었다.
같은 해 8월, 가쓰치요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가와치 영지와 에지리 영지 외에 스루가 서부 지역과 하토스즈(시즈오카현 후지노미야시) 등을 안도받았다. 다만, 에지리성에는 혼다 시게쓰구, 마쓰다이라 이에타다, 아마노 야스카게 등이, 가와치 영지에는 스가누마 사다마사 등 도쿠가와 가신단(徳川家臣團|도쿠가와 가신단일본어) 소속 무장들이 주둔하며 실질적인 통치를 행사했기 때문에, 이는 명목상의 조치에 불과했고 아나야마 가문의 지배권은 사실상 빼앗긴 상태였다. 가쓰치요 시대에 발행된 23통의 문서(연호가 있는 것 19통, 없는 것 4통) 대부분이 아버지 노부키미 시대의 지배를 확인하는 내용인데, 이는 덴쇼 임오의 난을 앞두고 가이 지역의 안정을 꾀하려던 이에야스의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해석된다.
덴쇼 15년( 1587년 ) 6월 7일, 가쓰치요는 천연두에 걸려 아버지 노부키미가 죽은 지 5년 만에 1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아나야마 가문의 혈통은 단절되었다.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자신의 다섯째 아들 노부요시에게 가이 다케다 가문의 이름을 잇게 했다. 가쓰치요의 묘소인 사이온지에는 그의 초상화(견본 채색 아나야마 가쓰치요 화상, 야마나시현 지정 문화재)가 소장되어 있다.
3. 3. 요절과 가문의 단절
덴쇼 10년(1582년) 6월, 아버지 노부키미가 혼노지의 변 직후 불의의 죽음을 맞이하자, 가쓰치요는 정식으로 아나야마 가문의 당주가 되었다.[1] 그러나 실권은 이미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넘어가고 있었다. 이에야스는 노부키미 사후 미카와로 돌아오자마자 가와치 영지를 장악하기 위해 오카베 마사쓰나를 파견했고, 아나야마 가문은 도쿠가와 가문의 종속 하에 놓이게 되었다.
같은 해, 옛 다케다 영지를 둘러싸고 도쿠가와와 사가미의 고호조 씨가 다투었던 덴쇼 임오의 난이 발발하자, 아나야마 가문의 영지인 가와치 지방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었다. 아나야마 가문의 가신들 역시 도쿠가와 측에 서서 옛 다케다 유신들을 회유하는 역할을 맡았다.
덴쇼 10년(1582년) 8월, 가쓰치요는 이에야스로부터 명목상 가와치, 에지리 영지와 더불어 스루가 서부 및 하토스즈(현 시즈오카현 후지노미야시) 일대의 소유권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에지리성에는 혼다 시게쓰구, 마쓰다이라 이에타다, 아마노 야스카게 등 도쿠가와 가신들이 주둔했고, 가와치 영지 역시 스기누마 사다마사가 관리하는 등, 실질적인 지배권은 이미 이에야스에게 넘어간 상태였다. 가쓰치요 명의로 발급된 문서 23통이 남아있지만, 대부분 아버지 노부키미 시대의 지배권을 재확인하는 내용으로, 이는 덴쇼 임오의 난을 앞두고 가이 지방의 통치를 안정시키려 했던 이에야스의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해석된다.
어린 나이에 당주가 되어 실권 없이 이에야스의 영향력 아래 놓였던 가쓰치요는 덴쇼 15년(1587년) 6월 7일, 천연두에 걸려 16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아버지 노부키미가 사망한 지 불과 5년 만의 일이었다. 가쓰치요에게는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아나야마 가문은 그의 죽음과 함께 단절되었다. 이후 이에야스는 자신의 다섯째 아들인 다케다 노부요시에게 다케다 가문의 이름을 잇게 하여 가이 지방에 대한 지배를 공고히 했다. 가쓰치요의 묘소는 사이온지에 있으며, 이곳에는 그의 초상화(견본 채색 아나야마 가쓰치요 화상, 야마나시현 지정문화재)가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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