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씨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도쿠가와씨는 마쓰다이라 씨의 당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창시한 성씨로, 에도 시대에 일본을 통치한 도쿠가와 막부를 배출했다. 도쿠가와 씨는 미나모토 씨의 후예를 자칭하며, 이에야스가 관직을 얻어 도쿠가와로 복성한 이후, 그의 직계 자손과 고산케, 고산쿄 등 일부 가문에게만 도쿠가와 성을 사용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에도 시대에는 15명의 쇼군이 배출되었으며,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화족으로 대우받으며 일본 지배층으로 존속했다. 현재 도쿠가와 씨는 도쿠가와 종가를 비롯한 여러 가문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가문의 문장인 세 겹의 아욱 문장은 에도 시대를 상징하는 문화적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미나모토 요시시게(1135~1202)는 미나모토 요시이에(1041~1108)의 손자로, 닛타라는 성을 처음 사용한 인물이다. 그는 사촌인 미나모토 요리토모와 함께 헤이케(1180)에 맞서 싸웠고, 가마쿠라로 갔다. 요시시게의 넷째 아들인 닛타 요시스에는 고즈케(군마현)의 도쿠가와에 정착하여 그곳의 지명을 성으로 삼았다.[6]
오다이노가타를 어머니로 둔 초대 이에야스는 여러 자식을 두었다. 그 후손들은 에도 시대에 신판을 형성하여 일본의 지배층으로 군림하였다. 메이지 유신 이후, 도쿠가와 종가는 공작, 고산케는 후작, 고산쿄는 백작 작위를 받았다.
2. 역사
마쓰다이라 씨의 시조는 가난한 승려였다고 전해지는 마쓰다이라 치카우지이다.[1][7] 그는 닛타 요시스에의 8대손으로, 아시카가 씨와의 전쟁에서 닛타 씨가 몰락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그는 미카와(아이치현)의 마쓰다이라에 정착하여 아내의 가문에 입적하였다. 이 지역이 아리와라 노부모리에 의해 개척되었다고 전해지는 것으로 미루어, 마쓰다이라 씨가 아리와라 나리히라와 관련이 있다는 설이 있다.[8]
치카우지의 아들인 마쓰다이라 노부미쓰(15세기)는 오카자키 성을 담당하며 미카와 지방에서 가문의 권력을 강화했다. 노부미쓰의 증손자인 마쓰다이라 기요야스는 씨족을 강하게 만들었으나 암살당했다. 1567년, 기요야스의 손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1542~1616)는 오기마치 천황으로부터 세이와 겐지의 후손으로 인정받아 도쿠가와라는 성을 사용하기 시작했다.[9]
도쿠가와 씨는 전국 시대 말기에 권력을 잡았다. 이 시기에 정치적 영향력과 영토가 확장됨에 따라, 고리키 기요나가, 아마노 야스카게, 혼다 시게쓰구 등 많은 관리들을 새로 임명하여 새로운 영토와 가신들을 통치했다.[10] 1566년, 이에야스는 이마가와 씨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미카와를 평정한 후 미카와 국의 질서를 개혁했다. 그는 세습 가신인 부다이 다이묘를 기반으로 미카와에 도쿠가와 씨의 군사 정부 체제를 만들어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했는데, "삼비의 군제"(三備の軍制)라고 불리는 이 체제는 통치를 세 부분으로 나누었다.[12][13][14]구분 총사령관 주요 지휘관 하타모토-센시 (이에야스의 직속 군대) (없음) 마쓰다이라 이에타다(토죠), 토리이 모토타다, 혼다 타다카쓰,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오쿠보 다다요, 오스가 야스타카, 우오무라 이에즈미 등 히가시 미카와 (미카와 서부) 사카이 다다쓰구 마쓰다이라 이에타다(후코즈), 마쓰다이라 다다마사, 마쓰다이라 이에타다(카타하라) 등 니시 미카와 (미카와 동부) 이시카와 이에나리 시마다 헤이조, 히라이와 치카요시, 나이토 이에나가, 사카이 다다토시, 마쓰다이라 신이치 등
에도 시대에 도쿠가와 씨는 ''쇼군''으로서 일본을 통치했다. 에도 시대에는 15명의 도쿠가와 쇼군이 있었다. 이들의 주요 가족 신사는 도쇼구(닛코)이며, 주요 사찰(보다이지)은 간에이지와 조조지(둘 다 도쿄)이다. 씨족의 가보는 부분적으로 도쿠가와 기념재단에서 관리한다.
1636년부터 오와리, 키슈, 미토에 영지를 가진 세 가문인 ''고산케''의 당주들도 도쿠가와 성을 사용했고, 도쿠가와 요시무네 즉위 후에는 다야스(1731), 히토츠바시(1735), 시미즈(1758) 가문으로 알려진 세 개의 추가 분가인 ''고산쿄''도 도쿠가와 성을 사용했다. 쇼군이 살아있는 상속인 없이 사망하면 ''고산케''(미토 도쿠가와 가문 제외)와 ''고산쿄''의 당주가 그의 자리를 계승할 우선권을 가졌다.[15][16] 많은 다이묘들이 이 씨족의 분가에서 나왔지만, 마쓰다이라 성을 유지했다.
1867년 11월 9일, 15대이자 마지막 도쿠가와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메이지 천황에게 사임을 제출하고 10일 후 공식적으로 물러나 통치권을 천황에게 반환했다.[17] 이는 도쿠가와 막부의 통치 종말을 의미한다. 1868년, 다야스 가문 출신인 도쿠가와 이에사토(1863~1940)가 요시노부의 후계자로 도쿠가와 씨의 당주로 선출되었다.[18] 1884년 7월 7일, 이에사토는 화족으로서 왕족이 되었다.[19]
1946년 일본 헌법은 화족과 귀족 작위를 폐지하여 이에사토의 아들인 도쿠가와 이에마사는 더 이상 왕족이 아니게 되었다. 이에마사는 아들 이에히데가 어린 나이에 사망하여 그의 손자 중 한 명인 도쿠가와 쓰네나리가 계승했다.
쓰네나리는 2007년에 "에도의 유전자"(江戸の遺伝子)라는 책을 출판했고, 2009년에는 영어로 "에도의 유산"(The Edo Inheritance)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이 책은 일본에서 에도 시대가 암흑기와 같았다는 일반적인 믿음, 즉 일본이 세계로부터 고립되어 뒤처졌다는 믿음에 반박한다. 그는 약 250년간의 평화와 번영이 큰 경제 개혁, 정교한 도시 문화 발전,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도시화된 사회의 발전을 가져왔다고 주장한다.[22] 쓰네나리는 2003년에 도쿠가와 기념재단을 설립했다.
2. 1. 가문의 기원과 창설
도쿠가와 씨는 마쓰다이라 씨(안조 마쓰다이라 가) 당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창시한 성씨이다. 에도 시대에 성립된 번한보에 따르면, 그 뿌리는 미카와 국(아이치현)의 촌장 마쓰다이라 다로자에몬 노부시게에게 데릴사위로 들어간 시종(時宗)의 소행승으로 전해지는 도쿠아미로 알려져 있다.[26] 그는 세이와 겐지계 가와치 겐지 요시쿠니류 에가와 씨(도쿠가와 씨, 세라타 씨)의 후예를 자칭하고, 전국을 떠도는 가운데 오오하마 쇼묘지에서 열린 렌가 모임에서 노부시게를 만나 그의 양자가 되었다고 한다.[26][28] 환속 후에는 마쓰다이라 지카우지라 이름하였다고 한다.[26]
에이로쿠 9년 (1566년), 마쓰다이라 이에야스는 관직을 얻기 위해 조정에 종5위하 미카와노카미의 관직과 도쿠가와로의 복성(사실상의 개성)을 신청하였다. 오기마치 천황은 선례가 없는 신청에 주저하였으나, 요시다 가네미기가 마데노코지 가의 문서를 개정하여 닛타 씨계 도쿠가와 씨가 2개의 파로 나뉘어 한쪽이 후지와라 성이 되었다는 선례를 발견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이 과정에는 고노에 사키히사가 관여하였으며, 그가 아들 고노에 노부타다에게 보낸 서찰이 현존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마쓰다이라 일족 전체가 도쿠가와 씨로 개성한 것이 아니라, 도쿠가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개인에게만 허용된 칭호였다는 것이다. 도쿠가와 성은 이에야스가 마쓰다이라 씨 내부에서 권력을 확립하고, 파생된 마쓰다이라 일족과 가신단을 통제하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게이초 10년 (1605년)에 이에야스가 쇼군직과 당주직을 내려놓고 은거할 때까지, 도쿠가와 성을 사용한 사람은 후계자였던 도쿠가와 히데타다뿐이었다.
이에야스의 아들 11명 중 도쿠가와 성을 사용한 것은 3남이자 후계자였던 히데타다, 및 고산케의 시조가 되는 9남 도쿠가와 요시나오, 10남 도쿠가와 요리노부, 11남 도쿠가와 요리후사(1636년(간에이 13년) 7월, 도쿠가와로 복성)의 4명뿐이었다. 고산케의 시조인 세 명은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2대 당주 (쇼군)가 된 후에 원복하였다.
2. 2. 본성(本姓) 논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마쓰다이라 씨(안조 마쓰다이라가)의 당주로서, 도쿠가와 씨의 후예를 자칭하며 '도쿠가와'라는 성씨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도쿠가와가보』에 기록된 가계는 『존비분맥』의 기록과 유사하지만, 당대 사료를 통한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아 도쿠가와 씨와 이에야스의 가계 동일성은 실증되지 않았다.[26] 이시카와 마사니시의 『문견록』에 따르면, 이에야스는 자신이 세이와 겐지의 자손이라고 굳게 믿었고, 이를 증명하고자 했다.[27]
에도 시대에 성립된 번한보에 따르면, 도쿠가와 가문의 뿌리는 미카와 국(아이치현)의 촌장 마쓰다이라 다로자에몬 노부시게에게 데릴사위로 들어간 시종(時宗)의 소행승으로 전해지는 도쿠아미이다.[26] 그는 도쿠가와 씨(세라타 씨)의 후예를 자칭했고,[26] 여러 지역을 떠돌던 중 오하마 쇼묘지[28]에서 열린 렌가 모임에서 노부시게를 만나 그의 양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환속하여 마쓰다이라 지카우지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26]
닛코 도쇼구에 남아 있는 이에야스의 쿠젠 등은 모두 '미나모토노 이에야스'로 되어 있어, 도쿠가와 씨가 미나모토 씨를 계속 칭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는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 시대인 1645년(쇼호 2년)에 흩어진 것을 보전했다는 명목으로 개변된 것이라고 여겨진다.
1566년(에이로쿠 9년)의 작위 수여는 실제로는 "계보 발견"의 경위도 있어 '후지와라노 이에야스'로 행해졌고, 이 시점에서는 후지와라 씨를 칭했다. 카사야 카즈히코는 미나모토 씨의 동량인 아시카가 쇼군가와 이에야스가 관계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무로마치 막부 쇼군이 부재한 이례적인 상황이었고,[35] 중개를 맡은 고노에 사키히사가 관위 청원을 하기 위해서는 후지와라 씨 일문인 쪽이 유리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이후 이에야스는 후지와라 씨나 미나모토 씨를 때에 따라 바꿔 사용하는 등 성씨 사용에 있어 매우 자의적인 모습을 보였다. 도쿠가와 씨가 미나모토 씨라는 견해가 명확하게 정리된 것은 후대의 일이며, 미나모토 씨의 명문인 키라 씨로부터 미나모토노 요시쿠니로부터의 계보를 빌린 것이었다. 고노에 사키히사가 발급 시기 미상의 서장에서 이를 "쇼군을 바라는 일"이라고 지적한 것도 있어, 이에야스가 미나모토 씨를 자칭한 것은 쇼군직 취임을 목적으로 한 1603년(게이초 8년) 정이대장군 취임 직전의 것이라는 견해가 와타나베 요스케와 나카무라 코우야의 연구 이래 정설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동시대 사료에 따르면, 마쓰다이라 씨 3대 노부미쓰는 가모노아손(가모) 성을 사용한 적이 있으며, 마쓰다이라 씨의 아오이 문장도 가모 씨와의 관계를 짐작하게 하는 등, 실제로는 가모 씨의 부민이었다는 지적도 있다. 기요야스 시대에도 이미 안조 마쓰다이라 씨는 세이와 겐지(미나모토 성: 세라타 씨)라고 칭한 적이 있고,[37] 이에야스 자신도 이마가와 씨로부터 독립한 직후인 1561년(에이로쿠 4년)에 발급한 스가누마 씨에 대한 안도장에서 "미나모토노 모토야스"라고 서명했으며(「스가누마가보」·『구노잔 도쇼구 소장문서』),[38] 1561년(에이로쿠 4년)부터 1563년(에이로쿠 6년) 사이에 5점의 정문을 포함한 6점에 "미나모토 씨" 서명이 보인다.
요네다 유스케가 관무인 「미부가 문서」에 있는 쿠젠을 조사한 결과, 1585년(덴쇼 14년) 곤추나곤 취임 이전의 쿠젠은 모두 후지와라 성씨이나, 1586년(덴쇼 15년) 등은 불분명하고, 1592년(덴쇼 20년) 9월 도쿠가와 가를 세이가(청화) 가격으로 하는 "세이가나리(清華成り)" 발급 시에는 미나모토 성씨가 되어 이후 일관되게 미나모토 성씨를 칭했다는 것이 명확해졌다.[39] 요네다는 미나모토 씨 개성을 1592년(덴쇼 20년)으로 보고 있지만, 카사야는 『주라쿠행행기』에서 이에야스가 "다이나곤 미나모토노 이에야스"라고 서명했다는 기사를 지적하고, 1588년(덴쇼 16년) 주라쿠다이 행차 무렵의 시기로 보고 있으며,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출가로 인한 쇼군가 소멸이 계기였다고 보고 있다. 이후 현존하는 발급 문서에서도 미나모토 성씨로 되어 있다.
1586년(덴쇼 15년)에는 히데타다가 도요토미 조신을 하사받았고, 이에야스와 함께 하시바 성씨를 허락받았지만, 당시 도요토미·하시바 성씨 허락은 다이묘뿐만 아니라 의사 등에게도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2. 3. 에도 시대의 번영
영록 9년(1566년), 마쓰다이라 이에야스는 조정의 허가를 받아 도쿠가와로 복성하고, 종오위하 미카와슈에 서임되었다. 이때 정친왕천황은 전례 없는 신청에 주저했지만, 요시다 켄우가 만리로케의 문서를 개주하여 도쿠가와씨가 두 갈래로 나뉘어 한쪽이 후지와라 성이 되었다는 전례를 발견했다고 하였다. 이 과정에는 코노에 마에히사가 관여하였다.[38]
여기서 중요한 점은, 마쓰다이라 일족 전체가 아닌, 이에야스 개인에게만 “도쿠가와” 칭호가 허락되었다는 것이다.[29][30] “도쿠가와” 성은 이에야스가 마쓰다이라씨 내부에서 권력을 확립하고, 파생된 마쓰다이라 일족과 가신단을 통제하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초대 이에야스가 게이초 10년(1605년) 장군직과 당주 자리를 사임하고 은거할 때까지, 도쿠가와 성을 허락받은 유일한 인물은 세자 히데타다였다. 이에야스의 아들 11명 중에서도, 셋째 아들 히데타다, 고산케의 조상이 되는 아홉째 아들 요시나오, 열째 아들 요리노부, 열한째 아들 요리후사[31] 4명만이 도쿠가와 성을 받았다.[32] 이들 중 요시나오, 요리노부, 요리후사는 히데타다가 2대 당주(장군)가 된 이후에 원복하였다.
이후에도 장군가 외에 도쿠가와 성을 허락받은 것은, 이에야스 직계 자손(친번) 중 고산케(오와리가, 키슈가, 미토가), 에도 시대 중기에 창설된 고산쿄(타야스가, 이치노하시가, 시미즈가) 및 그 후계자들뿐이었다.[33] 다른 친족들은 마쓰다이라씨를 칭했고, 무사들은 도쿠가와씨를 이름하는 것을 삼갔으며, 농민·평민은 원칙적으로 미묘자 사용을 허락받지 못했기에, 도쿠가와 성은 절대적인 권위를 지니게 되었다.
2. 4. 메이지 유신과 그 이후
마지막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는 대정봉환(大政奉還) 후 도바·후시미 전투(鳥羽・伏見の戦い)를 일으킨 결과 조적(朝敵)이 되었으나, 요시노부의 은퇴 후 도쿠가와 종가를 계승한 도쿠가와 이에사토(徳川家達)에게는 스루가국(駿河国) 시즈오카번(静岡藩) 석고(石高) 70만 석이 주어졌다.[1] 반적봉환(版籍奉還)으로 지한사(知藩事)와 화족(華族)으로 임명된 후 폐번치현(廃藩置県)까지 지한사를 역임했다.[1] 화족령(華族令) 시행 후에는 공작(公爵)에 서임되어 귀족원 의장 등을 역임했다.[1]
고산케(御三家)는 막말(幕末)에는 도쿠가와 쇼군가와 거리를 두었기 때문에 모두 조적이 되지 않았고, 폐번치현까지 지한사를 역임한 후 화족령(華族令) 시행 후 후작(侯爵)에 서임되었다(미토가(水戸家)는 나중에 공작으로 승작).[2] 고산쿄(御三卿)도 백작(伯爵)에 서임되었다.[2]
1902년(明治35年)에는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도 종가와 별도로 공작위가 주어져 도쿠가와 요시노부가(徳川慶喜家)를 세웠다.[3]
메이지 시대 이후의 도쿠가와 일문은 “패전의 장수”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후대를 받았는데, 이것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의 성격(性格)에 기인한다.[2] 메이지 시대 일본에서는 프랑스 혁명(フランス革命)이나 러시아 혁명(ロシア革命)과 같은 패자의 대량 처형은 일어나지 않았고, 패자를 멸하는 것보다 이용하는 길을 선택하여 복수보다 국가 통일을 우선시했다.[2] 도쿠가와 일문의 우대는 그 상징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2]
에도 시대에는 도쿠가와 쇼군가·고산케·고산쿄의 상속인(相続人) 이외의 아이(子供)는 마쓰다이라를 칭했던 것에 반해, 메이지 이후는 도쿠가와 성을 가진 자의 아이는 상속인 이외에도 모두 도쿠가와 성이 되었다(다른 집 양자 입적 등을 제외).[4] 상속인 이외로 화족(華族)이 된 사람으로는 도쿠가와 아쓰시(徳川厚)(도쿠가와 공작가의 분가로 남작(男爵)), 도쿠가와 마코토(徳川誠)(도쿠가와 요시노부 공작가의 분가로 남작), 도쿠가와 요시히로(徳川義恕)(오와리 도쿠가와 후작가(尾張徳川侯爵家)의 분가로 남작), 도쿠가와 다케사다(徳川武定)(마쓰도 도쿠가와 남작가(松戸徳川男爵家). 미토 도쿠가와 후작가(水戸徳川侯爵家)의 분가로 자작(子爵))이 있다.[4]
또 메이지 이후에는 평민묘자필칭의무령(平民苗字必称義務令)으로 '''묘자(苗字)가 없는 자가 묘자를 창설한 관계로 도쿠가와 성이라면 반드시 구 쇼군가의 도쿠가와 씨와 관계가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3. 가계
이에야스의 자녀 관계 비고 노부야스 장남 가메히메 장녀 다다아키라[51] 히데야스[52] 차남 히데타다 삼남 제2대 쇼군 다다요시[58] 사남 노부요시[59] 오남 다다테루[60] 육남 마쓰치요[61] 칠남 센치요[62] 팔남 요시나오[63] 구남 요리노부[67] 십남 요리즈미[72] 요리노부의 사남 마쓰히메 요리노부의 딸 노부마사를 거쳐 다카쓰카사 마쓰다이라가(요시이가)로 이어짐[73] 요리후사[74] 십일남 야스모토[82] 서자 야스토시[83] 서자 사다카쓰[84] 서자 마쓰히메[89] 서녀 다다미쓰를 거쳐 도다씨로 이어짐 하루사다의 자녀 관계 비고 이에나리 장남 제11대 쇼군 요리후사의 자녀 관계 비고 요리시게[75] 장남 쓰나에다 요리토시 차남 요리토요, 무네타카, 무네모토, 하루모리 요리요시 삼남 요리히로[78] 미쓰쿠니 사남 요리쓰네 요리모토[79] 오남 요리타카[80] 육남 요리오[81] 칠남
3. 1. 도쿠가와 쇼군가 (종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개인의 남계 혈통에 해당하는 도쿠가와씨 가문은, 마쓰다이라라는 이름으로만 인정받은 이에야스 자손인 에치젠 마쓰다이라가, 아이즈 마쓰다이라가 등과 함께 신판을 형성하여, 에도 시대 약 265년에 걸쳐 일본의 지배층으로 군림하였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도쿠가와씨는 무가의 최상류로써 화족에게 대접받았으며, 종가는 공작, 고산케는 후작, 고산쿄는 백작에 올랐다. 현재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자손으로 도쿠가와 성을 쓰는 집은 다음의 8가와 그의 별가이다.
# '''도쿠가와 종가''' (구 쇼군가. 도쿠가와 종가)
# 오와리 도쿠가와가 (고산케)
# 기슈 도쿠가와가
# 미토 도쿠가와가
# 히토쓰바시 도쿠가와가 (고산쿄)
# 타야스 도쿠가와가
# 시미즈 도쿠가와가
# 마쓰도 도쿠가와가 (미토 도쿠가와가의 분가)
현재의 후손은 도쿠가와・마쓰다이라 일문의 모임에 소속되어있으며, 회원 수는 약 600명이다.
도쿠가와 종가는 쇼군가문이자 시즈오카 번주였으며,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공작(公爵) 작위를 받았다.
'''종가(장군가) 계보'''
'''범례'''
# 실선은 친자, 점선은 양자
# '''굵은 글씨'''는 당주(장군). 숫자는 가독 계승 순서.
# 여성 및 어린 시절 요절한 인물은 생략.
1대 | 2대 | 3대 | 4대 | 5대 | 6대 | 7대 | 8대 | 9대 | 10대 | 11대 | 12대 | 13대 | 14대 | 15대 | 16대 | 17대 | 18대 | 19대 |
---|---|---|---|---|---|---|---|---|---|---|---|---|---|---|---|---|---|---|
이에야스 | 히데타다 | 이에미쓰 | 이에쓰나 | 쓰나요시 | 이에노부 | 이에쓰구 | 요시무네 | 이에시게 | 이에하루 | 이에나리 | 이에요시 | 이에사다 | 이에모치 | 요시노부 | 이에사토 | 이에마사 | 쓰네나리 | 이에히로 |
3. 2. 고산케(御三家)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자손으로 도쿠가와 성을 쓰는 집안은 다음의 8가와 그 별가이다.- 도쿠가와 종가 (구 쇼군가. 도쿠가와 종가)
- 오와리 도쿠가와가 (고산케)
- 기슈 도쿠가와가
- 미토 도쿠가와가
- 히토쓰바시 도쿠가와가 (고산쿄)
- 타야스 도쿠가와가
- 시미즈 도쿠가와가
- 마츠도 도쿠가와가 (미토 도쿠가와가의 분가)
현재 후손들은 도쿠가와・마츠다이라 일문의 모임에 소속되어 있으며, 회원 수는 약 600명이다.
다음 집안은 대가 끊긴 집안이다.
- 스루가 도쿠가와가 (당주 도쿠가와 타다나가가 할복하여 가계 단절)
- 코후 도쿠가와가 (고료텐) (2대 당주 도쿠가와 츠나토요가 6대 쇼군이 되었기 때문에 소멸)
- 타테바야시 도쿠가와가 (고료텐) (당주 도쿠가와 츠나요시가 5대 쇼군이 되었기 때문에 소멸)
-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종가 별가) (2017년 가계 단절)
또한, 키슈 도쿠가와가문은 가계 단절이 확정적이며, 다야스 도쿠가와가, 시미즈 도쿠가와 가문도 남계 단절이 농후하다. 오와리 도쿠가와가, 마쓰도 도쿠가와가의 남계는 이미 단절되어 있다.
; 오와리 도쿠가와가(오와리 번주・후작)
; 기슈 도쿠가와가(기슈 번주・후작)
; 미토 도쿠가와가(미토 번주・후작 → 공작)
3. 3. 고산쿄(御三卿)
히토쓰바시 도쿠가와가, 타야스 도쿠가와가, 시미즈 도쿠가와가는 고산쿄에 속한다.다야스 도쿠가와 가문은 가계 단절이 확정적이며, 시미즈 도쿠가와 가문도 남계 단절이 농후하다.
; 다야스 도쿠가와 가 (백작)
; 히토쓰바시 도쿠가와 가 (백작)
; 시미즈 도쿠가와 가 (백작 → 사족 → 남작)
4. 도쿠가와와 마쓰다이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직계 남계 후손인 도쿠가와 씨 여러 가문은, 마쓰다이라 성만을 허락받은 이에야스의 후손인 여러 마쓰다이라 가문(에치젠 마쓰다이라 가, 아이즈 마쓰다이라 가 등)과 함께 친번을 구성하여 에도 시대 약 265년 동안 일본 지배층으로 군림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도쿠가와 씨는 무가의 최고 혈통으로 화족으로 대우받아, 종가는 공작, 어삼가는 후작, 어삼경은 백작에 서임되었다.
2024년(레이와 6년) 현재,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후손으로 도쿠가와 성을 사용하는 가문은 다음의 8가문과 그 분가들이다.
- 도쿠가와 종가(구·장군가)
- * 도쿠가와 아쓰야 가(도쿠가와 종가 분가)
- 오와리 도쿠가와 가(어삼가)
- * 도쿠가와 요시요시 가(오와리 도쿠가와 가 분가)
- 기슈 도쿠가와 가(어삼가)
- 미토 도쿠가와 가(어삼가)
- * 마쓰도 도쿠가와 가(미토 도쿠가와 가 분가)
- 타야스 도쿠가와 가(어삼경)
- 잇쓰브시 도쿠가와 가(어삼경)
- 시미즈 도쿠가와 가(어삼경)
- 도쿠가와 마코토 가(도쿠가와 별가 분가)
2024년(레이와 6년) 현재 후손들은 아오이 교회에 소속되어 있으며, 회원 수는 약 600명이다. 한편, 다음 가문들은 단절되었다.
5. 도쿠가와 가문 연고 사찰 및 보다이지
- 조죠지(도쿄도) - 도쿠가와씨 보다이지
- 칸에이지 (도쿄도) - 도쿠가와 쇼군가 보다이지, 이에미츠가 개기(開基)
- 린노지 (도치기현) - 도쿠가와 쇼군가 묘소. 동조궁, 후타라산 신사라고 총칭하여 2사 1사.
- 다이쥬지 (아이치현) - 도쿠가와 쇼군가 보다이지. 마츠다이라씨 보다이지. 역대 당주의 묘가 있음
- 켄츄지 (나고야시) - 오와리 도쿠가와가 보다이지.
- 코쇼지 (아이치현) - 오와리 도쿠가와가 기원사(祈願寺)
- 호조지 (오카자키시) - 마츠다이라씨 보다이지
- 코게츠인 (아이치현) - 마츠다이라씨 보다이지
- 쵸호지 (와카야마현) - 키슈 도쿠가와가 보다이지. 역대 당주의 묘가 있음
- 죠후쿠지 (츠치우라시) - 미토 도쿠가와가 보다이지.
- 난메이인 - 토후쿠지 탑두. 역대 쇼군의 위패가 모셔져있음.
- 동조궁 (토치기현) - 총본사로써 쿠노잔 동조궁 등 전국의 동조궁에서 이에야스를 모심.
6. 문화적 상징
도쿠가와 씨의 문장(紋章)은 일본어로 "몬"이라고 하며, "세 겹의 아욱"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잘못 알려진 것과 달리, "아오이(葵)"는 사실 마두라화과에 속하며 "세신"(''Asarum'')으로 번역된다. 이 문장은 일본에서 도쿠가와 씨와 막부 말기를 상징하는 널리 알려진 상징이었다.[23]
이 문장은 전설에 따르면 야타가라스에서 유래했다고 하는 가모 씨(賀茂氏)라는 신화적인 씨족에서 유래한다.[23] 마쓰다이라 마을은 아이치현 동가모군에 위치해 있었다. 고요제이 천황이 새로운 문장을 제시했지만, 이에야스는 미나모토 씨와 관련이 없는 이 문장을 계속 사용했다.[24]
시대극에서 이 문장은 종종 이야기의 배경을 에도 시대로 나타내는 데 사용된다. 메이지 유신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는 이 문장이 황실의 국화 문장을 상징으로 하는 왕당파와 대조적으로 막부에 대한 충성을 보여주는 데 사용된다. 19세기 초 월터 스콧이 ''아이리스의 딸''(1829)에서 상상한 영국의 장미 전쟁의 빨간 장미와 흰 장미 상징과 비교해 볼 수 있다.
2012년 도쿠가와 기념재단이 소장하고 있는 역대 쇼군의 초상화 밑그림이 공개되었다.[48][49]
참조
[1]
웹사이트
ja:徳川家康展
http://www.aichi-pre[...]
Aichi Prefectural Library
2008-12-28
[2]
웹사이트
ja:徳川氏
https://kotobank.jp/[...]
Kotobank
[3]
웹사이트
ja:徳川氏
https://japanknowled[...]
Japan Knowledge
[4]
웹사이트
ja:松平元康はなぜ徳川家康になったのか
https://www.touken-w[...]
The Nagoya Japanese Sword Museum Nagoya Touken world
[5]
웹사이트
ja:徳川家康は源氏の英雄・源義家の子孫にあたるのか?
https://www.rekishij[...]
Rekishijin
[6]
웹사이트
ja:十四松平の城・寺・墓を訪ねて
http://www.city.okaz[...]
Okazaki
2008-12-27
[7]
웹사이트
Ieyasu Tokugawa
http://www.shinchosh[...]
Shinchosha
2008-12-29
[8]
서적
古代史の謎を解き明かす「モード・タ」
https://books.google[...]
Bungeisha
[9]
서적
静岡県史〈資料編:中世3〉
https://www.book61.c[...]
1994
[9]
서적
『愛知県史〈織豊1〉
https://www.book61.c[...]
愛知県
2003
[10]
웹사이트
三河一向一揆の鎮圧後、徳川家康はなぜ離反した家臣に寛大だったのか?
https://www.rekishij[...]
ABC ARC, inc.
2023
[11]
논문
[12]
서적
徳川政権と幕閣
https://books.google[...]
新人物往来社
1995
[13]
서적
徳川幕閣: 武功派と官僚派の抗争
https://books.google[...]
中央公論社
1967
[14]
서적
角川日本地名大辞典: 愛知県
https://books.google[...]
Kadokawa Shoten
1978
[15]
백과사전
Tokugawa Gosanke, Tokugawa Owari-ke, Tokugawa Kii-ke, and Tokugawa Mito-ke
Iwanami Nihonshi Jiten
[16]
서적
Japan encyclopedia
https://books.google[...]
[17]
서적
Tokugawa Yoshinobu: kindai Nihon no enshutsusha 德川慶喜 : 近代日本の演出者
Nihon Hōsō Shuppan Kyōkai 日本放送出版協会
[18]
서적
To Stand with the Nations of the World: Japan's Meiji Restoration in World History
Oxford University Press
2017
[19]
웹사이트
官報
http://dl.ndl.go.jp/[...]
1884-07-08
[20]
서적
門閥 — 旧華族階層の復権
Rippu Shobo Publishing Co., Ltd.
1987
[21]
웹사이트
会津松平氏(御家門)
http://reichsarchiv.[...]
2010-05-08
[22]
웹사이트
The Edo Inheritance by Tokugawa Tsunenari
http://www.i-house.o[...]
International House of Japan
2012-02-19
[23]
웹사이트
ja:賀茂別雷神社
http://www4.ocn.ne.j[...]
Kyoto sightseeing taxi
2008-12-30
[24]
서적
戦国武将・闇に消されたミステリー
https://books.google[...]
PHP Kenkyusho
[25]
서적
紋章・マーク・シンボル
野ばら社
2023-10-22
[26]
서적
徳川氏
吉川弘文館
[27]
서적
松平氏〈有徳人〉の系譜と徳川〈正史〉のあいだ
洋泉社
[28]
문서
称名寺 (府中市)
[29]
서적
信長と家康-清州同盟の実体
[30]
서적
松平信康事件は、なぜ起きたのか?
柏書房
[31]
문서
1636-07
[32]
문서
[33]
문서
駿河徳川家, 甲府徳川家, 館林徳川家
[34]
서적
姓氏 姓氏研究の決定版
秋田書店
[35]
문서
1565
[36]
논문
足利一門再考 -[足利的秩序]とその崩壊-
吉川弘文社
2013-00-00
[37]
서적
松平清康
朝日新聞出版
[38]
간행물
静岡県史〈資料編:中世3〉、愛知県史〈織豊1〉
[39]
논문
徳川家康・秀忠の叙位任官文書について
1994-00-00
[40]
문서
徳川光貞の四男
[41]
문서
徳川治済の長男
[42]
문서
徳川斉昭の七男
[43]
문서
松平義建の五男
[44]
문서
徳川慶頼の三男
[45]
문서
松平一郎の次男
[46]
문서
徳川姓の史料不存在
[47]
문서
慶朝の子供と離婚
[48]
뉴스
将軍の肖像画、下絵はリアル 徳川宗家に伝来、研究進む
https://archive.is/2[...]
朝日新聞
2012-08-08
[49]
블로그
鶴は千年、亀は萬年。
http://blog.goo.ne.j[...]
2012-08-08
[50]
서적
紋章・マーク・シンボル
野ばら社
[51]
문서
오쿠다이라씨의 시조
[52]
문서
에치젠 마쓰다이라가의 시조
[53]
문서
다테바야시 도쿠가와가의 시조
[54]
문서
고후 도쿠가와가의 시조
[55]
문서
오치 마쓰다이라가의 시조
[56]
문서
스루가 도쿠가와가의 시조
[57]
문서
아이즈 마쓰다이라가의 시조
[58]
문서
도조 마쓰다이라가의 당주
[59]
문서
다케다씨의 당주
[60]
문서
나가사와 마쓰다이라가의 당주
[61]
문서
나가사와 마쓰다이라가의 당주
[62]
문서
히라이와씨의 당주
[63]
문서
오와리 도쿠가와가의 시조
[64]
문서
요스야 마쓰다이라가의 시조
[65]
문서
오쿠보 마쓰다이라가의 시조
[66]
문서
가와다쿠보 마쓰다이라가의 시조
[67]
문서
기슈 도쿠가와가의 시조
[68]
문서
뉴 마쓰다이라가의 시조이자 제4대 기슈번주
[69]
문서
시미즈 도쿠가와가의 시조
[70]
문서
다야스 도쿠가와가의 시조
[71]
문서
히토쓰바시 도쿠가와가의 시조
[72]
문서
사이조 마쓰다이라가의 시조
[73]
문서
다카쓰카사 마쓰다이라가의 시조 마쓰다이라 노부히라의 정실
[74]
문서
미토 도쿠가와가의 시조
[75]
문서
다카마쓰 마쓰다이라가의 시조
[76]
문서
도쿠가와 요시노부가의 시조
[77]
문서
마쓰도 도쿠가와가의 시조
[78]
문서
마쓰다이라 다이젠가의 시조
[79]
문서
모리야마 마쓰다이라가의 시조
[80]
문서
후추 마쓰다이라가의 시조
[81]
문서
시시도 마쓰다이라가의 시조
[82]
문서
히사마쓰 마쓰다이라가 적류 시조
[83]
문서
다코 번계 히사마쓰 마쓰다이라가의 시조
[84]
문서
사다카쓰계(이요 마쓰야마 번계) 히사마쓰 마쓰다이라종가의 시조
[85]
문서
사다카쓰계 히사마쓰 마쓰다이라 종가의 당주
[86]
문서
사다쓰나계(구와나번계) 히사마쓰 마쓰다이라가의 시조
[87]
문서
사다후사계(이마바리번계) 히사마쓰 마쓰다이라가의 시조
[88]
문서
가리야 번주, 후에 사다마사의 후손들은 하타모토로 전락
[89]
문서
도다 마쓰다이라가의 시조(도다 종가의 당주) 마쓰다이라 야스나가의 정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