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와 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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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와 수군은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 통일 이전부터 모리 가문이 맹주로 이끌던 수군으로, 좁은 의미로는 도쿠시마 번의 수군을, 넓은 의미로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하치스카 가문이 아와에 들어오기 전 모리 가문이 이끌던 수군을 지칭한다. 1585년 시코쿠 공격 당시 공을 세워 영지를 얻었고, 임진왜란에도 참전했다. 에도 시대에는 도쿠시마 번의 수군 수장으로서 참근교대를 담당했으며, 메이지 유신 시기에는 신정부군에 협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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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수군은 세토 내해에서 활동한 일본 해상 세력으로, 인노시마, 구루시마, 노지마의 세 가문이 주축을 이루며 남북조시대부터 제해권을 장악하고 해상 경호와 통행세 징수 등으로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해적 정지령 이후 쇠퇴하였다. - 일본 전국수군 - 구키 요시타카 (센고쿠 시대)
구키 요시타카는 센고쿠 시대부터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걸쳐 활약한 구키 수군의 수장으로,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기며 임진왜란에도 참전했으나 세키가하라 전투 후 자결한 철갑선 활용의 해전으로 유명한 무장이다.
| 아와 수군 | |
|---|---|
| 아와 수군 | |
| 주요 활동 지역 | 아와국 (현 도쿠시마현) |
| 주요 거점 | 미나미아와 무기우라 유키 |
| 주요 가문 | 미나미 씨 카지하라 씨 유키 씨 |
| 주요 인물 | 미나미 시게토모 미나미 모토치카 미나미 지카야스 카지하라 마사카게 유키 스케카쓰 |
| 역사 | |
| 성립 시기 | 가마쿠라 시대 말기 ~ 남북조 시대 |
| 주요 전투 | 미나토가와 전투 기타하마 전투 이치노타니 전투 야시마 전투 단노우라 전투 |
| 소속 세력 | 초기: 남조 후기: 미요시 가문 말기: 조소카베 가문 |
| 종말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시코쿠 정벌 이후 몰락 |
| 특징 | |
| 전술 | 해상 전투 및 상륙 작전 |
| 영향 | 아와국의 해상 교통 장악 및 해안 방어 |
| 관련 항목 | |
| 관련 가문 | 미나미 씨 카지하라 씨 유키 씨 미요시 가문 조소카베 가문 |
| 관련 지역 | 아와국 도쿠시마현 세토 내해 |
2. 역사
모리 가문은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 통일 이전부터 아와 수군을 맡고 있었다. 아와 수군은 좁은 의미로 도쿠시마 번의 수군을 의미하지만, 넓은 의미로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무렵 하치스카 가문의 아와 입국 이전 모리 가문이 통솔하던 수군을 가리킨다.
1585년 당주 모리 무라하루(村春)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코쿠 공격 참전과 임진왜란(일본명 분에이의 역) 당포 해전 전사 등 초기 역사는 하위 섹션을 참조하면 된다.
오사카 겨울 전투 및 오사카 여름 전투 참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막번 체제 확립 기여, 도쿠시마 번 중로(中老) 직책 및 참근교대 담당, 메이지 유신 시기 무진전쟁(보신 전쟁)에서 메이지 신정부 측 가담 등 에도 시대부터 근대까지의 역사는 하위 섹션을 참조하면 된다.
2. 1. 초기 역사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모리 가문은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 통일 이전부터 아와 수군을 맡고 있었다. 좁은 의미로는 도쿠시마 번의 수군을 의미하지만, 넓은 의미로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무렵 하치스카 가문의 아와 입국 이전의 모리 가문이 통솔하던 수군을 가리킨다.1585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시코쿠 공격 당시, 당주 모리 무라하루(村春)는 기쓰 성(木津城, 나루토시) 및 이와쿠라 성(岩倉城, 미마시) 공략에 공을 세웠다. 히데요시는 시코쿠 평정 뒤 3천 석을 하사한다는 약속이 적힌 주인장(朱印状)을 주었고, 이후 아와에 들어온 하치스카 이에마사도 이 주인장을 인정하였다. 무라하루는 후쿠이 장(福井庄)의 쓰바키도마리(椿泊)를 본거지로 삼고 후쿠이 장에 2,525석 9두승(1석은 10두), 다른 다섯 촌에 500석 합쳐 3,026여 석을 받았다. 그는 1592년 임진왜란(일본명 분에이의 역)에도 수군을 거느리고 참전하였으나, 6월 2일 당포 해전에서 전사하였다. 한편, 아들 다다무라(忠村)와 조카 무라시게(村重)는 당포 해전에서 세운 전공으로 다다무라는 이에마사로부터 칼을 하사받았고, 무라시게는 조선에서 많은 포로들을 끌고 왔다는 기록이 조선측 피로인이었던 정희득의 《월봉해상록》에 실려 있다.
2. 2. 임진왜란 참전
1592년 임진왜란(일본명 분로쿠·게이초의 역)에 모리 수군도 참전하였다. 모리 무라하루는 수군을 이끌고 참전하였는데, 6월 2일 당포 해전에서 전사하였다. 그의 아들 다다무라(忠村)와 조카 무라시게(村重)는 당포 해전에서 공을 세워 다다무라는 하치스카 이에마사로부터 칼을 하사받았다. 무라시게는 조선에서 많은 포로를 끌고 왔는데, 이는 당시 조선측 피로인이었던 정희득의 《월봉해상록》(月峯海上録)에 기록되어 있다. 이는 당시 조선 백성들에게 큰 고통과 피해를 안겨준 사건이었다.2. 3. 에도 시대 (도쿠시마 번)
모리 수군은 오사카 겨울 전투 및 오사카 여름 전투에 참전했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막번 체제 확립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하치스카 가문이 지배하던 도쿠시마 번에서 모리 가문은 수군 수장으로서 번의 중로(中老) 직책을 맡았고, 참근교대를 담당하였다.
2. 4. 메이지 유신과 근대
16대 모리 진고베 무라히라는 메이지 유신 당시 무진전쟁(보신 전쟁)에 메이지 신정부 측에 가담하여 가신단을 이끌고 각지를 전전했다.3. 역대 당주
모리 가문은 대대로 모리 진고베(森甚五兵衛)라는 이름을 세습했으며, 각 당주는 진고베라는 이름 뒤에 본명을 붙였다.
1585년 당주 무라하루(村春)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시코쿠 공격 당시 기쓰 성(木津城, 나루토시) 및 이와쿠라 성(岩倉城, 미마시) 공략에 공을 세웠다. 히데요시는 시코쿠 평정 뒤 무라하루에게 3천 석을 하사한다는 약속이 적힌 주인장(朱印状)을 주었고, 훗날 18만 석을 얻어 아와에 들어온 하치스카 이에마사도 이 주인장을 인정하였다. 무라하루는 후쿠이 장(福井庄)의 쓰바키도마리(椿泊)를 본거지로 삼고 후쿠이 장에 2,525석 9두승(1석은 10두), 다른 다섯 촌에 500석을 합쳐 3,026여 석을 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일본명 분에이의 역)에 무라하루는 수군을 거느리고 참전하였으나, 6월 2일 당포 해전에서 전사하였다. 아들 다다무라(忠村)와 조카 무라시게(村重)는 당포 해전에서 세운 전공으로 다다무라는 이에마사로부터 칼을 하사받았다. 무라시게는 조선에서 많은 포로들을 끌고 왔다는 기록이 조선측 피로인이었던 정희득의 《월봉해상록》(月峯海上録)에 실려 있다.
16대 모리 진고베 무라히라(村晟)는 메이지 유신이나 보신 전쟁에서 메이지 신정부를 도와 가신단을 이끌고 종군하며 각지를 전전하였다.
4.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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