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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타 요리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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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키타 요리스에는 미하루번의 번주로, 1696년에 태어나 1743년에 사망했다. 그는 처음에는 아키타 스에토요의 양자였으나, 이후 미하루번주 아키타 테루스에의 양자가 되어 가독을 상속받았다. 요리스에는 친부 아라키 다카무라와 반대 세력 간의 갈등으로 번정이 혼란스러웠고, 이로 인해 막부로부터 폐문 처분을 받기도 했다. 그는 오이에 소동과 미하루 바케네코 소동이라는 괴담과 관련된 인물이며, 그의 사후 장남 아키타 노부스에가 가문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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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타 요리스에
기본 정보
씨명아키타 요리스에
아키타 요리스에
아키타 요리스에
시대에도 시대 중기
출생겐로쿠 9년 ( 1696년 )
사망간포 3년 6월 1일 ( 1743년 7월 21일 )
이명슈스이 ( 통칭 ), 기료
시호없음
계명고운인덴 슌토쿠 겐묘 다이고지
묘소후쿠시마현다무라군미하루마치 아라마치의 고겐인
관위종5위 하, 시나노 수
막부에도 막부
주군없음
무쓰미하루번 번주
씨족단바 아라키 씨 → 아키타 씨
부모아버지: 아라키 다카무라, 어머니: 아베 스케미치의 딸
양아버지: 아키타 스케토요, 아키타 데루스에
형제자매없음
배우자정실: 이와코 ( 아키타 나카스에의 딸 )
자녀노부스에, 사다스에, 리키히메 ( 혼다 스케미쓰 정실 )
특기 사항없음
정치
미하루번
가문아키타 가문
대수4
임기 시작1715년
임기 종료1743년
전임자아키타 데루스에
후임자아키타 노부스에

2. 생애

미하루번의 중신이었던 아라키 다카무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처음에는 분가인 하타모토 아키타 스에토요의 양자가 되어 가독을 상속하고 '''季亮|키료일본어'''라 칭했으나, 이후 본가인 미하루번주 아키타 테루스에의 양자로 들어가 '''頼季|요리스에일본어'''로 개명하였다. 1715년 양부 테루스에의 은거로 미하루번의 번주가 되었으며, 이후 종5위하 주스이쇼(主水正), 시나노노카미(信濃守) 등에 서임되었다. 양부 테루스에가 사망한 후 발생한 번 내의 권력 다툼은 오이에 소동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미하루 바케네코 소동"의 배경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1. 출생과 가독 상속

1696년(겐로쿠 9년) 미하루번의 중신이었던 아라키 다카무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번의 시조인 아키타 사네스에의 외손이었으며, 요리스에의 외조부 아베 스에미치는 사네스에의 조카였다. 이처럼 요리스에는 아키타 가문 및 아베 가문과 혈연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처음에는 분가인 하타모토 아키타 스에토요의 양자가 되었다. 이 하타모토 아키타 가문은 아키타 사네스에의 셋째 아들 스에노부(季信)를 초대 당주로 하는 500석 규모의 가문이었다. 1706년(호에이 3년) 8월 29일, 스에토요가 사망하기 직전 그의 양자가 되어 가독을 상속받았으며, 이때 '''季亮|키료일본어'''라고 칭했다. 1714년(쇼토쿠 4년) 5월 7일에는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구를 알현했다.

쇼토쿠 5년(1715년) 6월 4일, 본가인 미하루번의 번주 아키타 테루스에는 적남 아키타 나리스에를 잃고 실의에 빠져 정무를 요리스에의 아버지 아라키 다카무라에게 일임하였다. 같은 해 7월 3일, 테루스에는 키료를 자신의 양자로 맞이하였다. 양자로 입적하면서 이름을 '''頼季|요리스에일본어'''로 바꾸었으며, 요리스에가 본가의 후계자가 됨에 따라 그가 상속했던 하타모토 아키타 가문은 단절되었다. 같은 해, 테루스에는 나리스에의 딸 이와코(岩子)를 자신의 양녀로 삼아 요리스에의 정실 부인으로 맞이하게 했다.

같은 해 9월 6일, 요리스에는 다시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구를 알현했으며, 12월 7일에는 양부 테루스에가 은거함에 따라 미하루번의 번주 자리를 계승했다. 이어서 같은 해 12월 18일, 종5위하 주스이쇼(主水正)에 서임되었고, 이후 시나노노카미(信濃守)로 관직명을 바꾸었다.

2. 2. 번주 취임과 번정 혼란

선대 번주 시절부터 중신이자 번주(요리스에)의 친아버지로서 권력을 장악한 아라키 타카무라(荒木高村)에 대해, 번 내의 반대파는 격렬하게 대립했다. 1728년(교호 13년) 6월,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아라키는 자신의 영지를 반납하고 미하루 번을 떠나려 했으나, 번의 중신들은 이를 거부했다. 오히려 중신들은 번 내에서 아라키 일파를 탄압했다. 중신들은 아라키에게 은퇴를 강요했지만, 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듬해인 1729년(교호 14년), 선대 번주 데루스에의 미망인인 데이간인(貞巖院)의 의향에 따라 아라키 타카무라는 결국 칩거 처분을 받게 되었다. 이후 아라키 타카무라의 동생인 아라키 마타이치(荒木又市)의 가신이었던 와타나베 쵸에몬(渡辺長右衛門)이 번의 명령으로 처형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와타나베 쵸에몬의 유족은 이 처사에 불복하여 사건의 전말을 에도 막부에 직접 호소했다. 막부는 번주인 요리스에에게 사건 경위를 물었으나, 요리스에는 막부를 납득시킬 만한 해명을 내놓지 못했다. 막부는 아라키 타카무라를 포함한 번의 중신들에게도 조사를 진행했지만, 사건 당시 아라키는 칩거 중이었기 때문에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했다.

결국 1730년(교호 15년) 3월 15일, 막부는 요리스에가 막부와 상의 없이 중신이자 친아버지인 아라키 타카무라를 칩거시킨 점, 그리고 충분한 조사 없이 와타나베 쵸에몬을 사형에 처한 점 등을 문제 삼아 폐문 처분을 내렸다. 같은 해 7월 12일에 폐문 조치는 해제되었다.

요리스에는 친아버지인 아라키 타카무라보다 먼저 1743년(간포 3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장남인 노부스에가 번주 자리를 계승했다.

3. 가족 관계

구분이름비고
친부아라키 다카무라
친모아베 스에미치의 딸
양부아키타 스에토요
양부아키타 테루스에
정실이와코아키타 나리토시의 딸
측실이치카와 씨
장남아키타 노부스에생모는 측실 이치카와 씨
차남아키타 사다스에
장녀리키히메혼다 스케미츠의 정실


4. 오이에 소동과 미하루 바케네코 소동

요리스에 시대의 번정 혼란은 '미하루 바케네코 소동'이라는 괴담의 배경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혼란의 중심에는 선대 번주 시절부터 중신이었으며 요리스에의 친부로서 권력을 쥐고 있던 아라키 다카무라와 그에 반대하는 세력 간의 격렬한 대립이 있었다.

교호 13년(1728년) 6월, 아라키 다카무라는 혼란을 수습하고자 자신의 지행(知行) 반납과 미하루 번에서의 퇴거를 제안했으나, 다른 중신들은 이를 거부했다. 오히려 중신들은 미하루 번 내에서 아라키의 세력을 탄압하고 아라키에게 은거를 강요했지만, 아라키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듬해인 교호 14년(1729년), 선대 번주 아키타 테루스에의 미망인 테이간인의 의향에 따라 아라키는 결국 칩거 처분을 받게 되었다.

이후 아라키 다카무라의 동생인 아라키 또이치의 가신 와타나베 쵸에몬이 번의 명령으로 사형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와타나베의 유족은 이 처사에 불복하여 사건의 전말을 에도의 막부에 직접 호소했다. 막부는 번주인 요리스에에게 사정을 물었으나, 요리스에는 막부를 납득시킬 만한 해명을 내놓지 못했다. 막부가 아라키 다카무라 등 다른 중신들에게도 질의했지만, 당시 아라키는 칩거 중이었기 때문에 사건의 상세한 내막을 알지 못했다.

결국 교호 15년(1730년) 3월 15일, 막부는 번주 요리스에에게 폐문 처분을 내렸다. 막부와 상의 없이 중신이자 친부인 아라키를 칩거시킨 점, 와타나베 쵸에몬 사형 사건에 대한 충분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점 등이 문제시되었다. 같은 해 7월 12일에 폐문 처분은 해제되었다.

요리스에는 친부인 아라키 다카무라보다 먼저 간포 3년(1743년)에 사망했으며, 장남인 아키타 노부스에가 그의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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