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듀푸이 드 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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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앙리 듀푸이 드 롬은 프랑스의 해군 기술자이자 조선 기술자였다. 그는 증기 전함, 철갑선, 비행선, 전기 잠수함 개발에 기여했으며, 프랑스 해군을 근대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듀푸이 드 롬은 최초의 증기 동력 전함인 ''나폴레옹''을 설계했고, 철갑선 ''라 글로르''의 설계를 승인했으며, 비행선 개발에도 참여했다. 그의 업적은 프랑스 해군력을 강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그의 이름을 딴 여러 군함이 건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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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듀푸이 드 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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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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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스타니슬라스 샤를 앙리 뒤퓌 드 롬 |
출생 | 1816년 10월 15일 |
출생지 | 플로에메르 |
사망 | 1885년 2월 1일 |
사망지 | 파리 |
국적 | 프랑스 |
직업 | 해군 기술자 |
2. 생애와 경력
앙리 뒤퓌 드 롬은 모르비앙주 로리앙 근처 플리메르에서 태어나 에콜 폴리테크니크에서 공부한 후 해군 조선 기술자가 되었다. 1842년 영국에서 장갑함 건조 기술을 배우고, 1844년 관련 보고서를 출판했다. 툴롱 해군 조선소에서 근무하며 프랑스 해군 군함 근대화에 기여했다.
1847년 스크류 구동 증기 기관 전열함 르 나폴레옹 건조를 시작, 1850년 진수하여 1852년 14노트(26km/h)의 속도를 기록했다. 또한 장갑함 개발을 지휘, 1859년 세계 최초의 원양 항해 가능 철갑장갑함 라 글로와르를 진수했다.
1870년 보불전쟁 발발 당시 국방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어 프로이센 군대에 포위된 파리와의 연락을 위한 인력 비행선 개발에 착수했으나, 실험은 전쟁이 끝난 1872년에야 이루어졌다.
만년에는 전동 잠수함 개발에 힘썼으며, 사후 구스타브 제디에 의해 짐노트로 완성되었다.
뒤퓌 드 롬은 19세기 여러 기술 발전을 통해 프랑스 해군이 주도권을 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프랑스 해군을 당시 세계 2위 해군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한 영국 부고에서는 "어떤 조선공이든 한 국가의 해군에 그보다 더 큰 공헌을 했을지 의문이다..."라고 평가했다.[1] 그는 1885년 2월 1일 파리에서 사망했다.
그의 이름을 딴 군함은 다음과 같다.
2. 1. 초기 생애
앙리 뒤퓌 드 롬은 모르비앙주 로리앙 근처 플리메르에서 태어났다. 에콜 폴리테크니크에서 교육받은 후 해군에 들어가 조선 기술자가 되었다.[1] 1842년 영국에 파견되어 장갑함 건조법을 배웠고, 그 보고서는 1844년 《장갑함 건설에 대한 기억》(''Memoire sur la Construction des Batiments en Fer'')으로 출판되었다.[1]2. 2. 해군 기술자로서의 초기 경력
모르비앙주 로리앙 근처 플리메르에서 태어난 앙리 듀푸이 드 롬은 에콜 폴리테크니크 졸업 후 해군에 들어가 조선 기술자가 되었다. 1842년 영국에 파견되어 장갑함 건조 기술을 배웠고, 1844년에는 그 보고서를 《장갑함 건설에 대한 기억》(''Memoire sur la Construction des Batiments en Fer'')으로 출판하였다.[1]이후 툴롱 해군 조선소에서 프랑스 해군 군함 근대화에 기여하였다.[1]
2. 3. 증기 전함 개발
프랑스 해군 군함의 근대화에 기여한 앙리 뒤퓌 드 롬은 1842년 영국에 파견되어 장갑함을 만드는 법을 배웠고, 그 보고서는 1844년에 《장갑함 건설에 대한 기억》(''Memoire sur la Construction des Batiments en Fer'')으로 출판되었다.[1]툴롱 무기고에서 일하던 뒤퓌 드 롬은 당시 프랑스 해군에서 유일하게 무장한 증기선은 외륜선으로 추진되었으며, 전열함에 증기 동력을 도입하는 것에 대한 반대가 컸다는 것을 인지했다. 외륜선은 큰 전투선에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졌고, 스크류에 대한 신뢰도 없었으며, 프랑스와 영국 해군 장교들은 돛 면적 감소를 싫어했다.[1]
뒤퓌 드 롬은 브리스톨에서 건조되는 ''그레이트 브리튼''을 보고 전열함에 완전한 증기 동력을 사용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1845년 초, 그는 해군 장관에게 철제 선체와 장갑 벨트로 보호되는 스크류 추진 프리깃 건조를 제안하는 보고서를 보냈다.[1]
뒤퓌 드 롬과 ''Génie Maritime''(해군 공학) 동료들은 배의 건조와 추진 방식에 급진적인 변화가 임박했다고 느꼈다. 영국에서 최초의 스크류 선박이 주문되자, 프랑스도 항해 전열함을 보조 증기 동력을 갖춘 선박으로 전환하기로 결정했다.[1]
2. 3. 1. 르 나폴레옹 함 건조

뒤퓌 드 롬은 1847년 최초의 증기 동력 전함이자 최초의 스크류 전함이 될 ''나폴레옹''의 건조를 주문받았다. ''나폴레옹''은 길이 77.8m, 폭 17m, 배수량 5,000톤, 2개의 포 갑판을 갖춘 배였다. 1850년에 진수되었고, 1852년 시험 운항에서 거의 14kn의 속도를 기록했다.[1] 크림 전쟁에서 이 배의 성능이 크게 주목받으면서, 전 세계 함대에 증기 동력을 도입하려는 계획이 곧 수립되었다.[1]
2. 4. 철갑선 개발
1842년 영국에 파견되어 장갑함을 만드는 법을 배운 뒤퓌 드 롬은, 그 보고서를 《장갑함 건설에 대한 기억》(Memoire sur la Construction des Batiments en Fer프랑스어)으로 1844년에 출판했다. 툴롱 해군 조선소에서 일하며 프랑스 해군 군함의 근대화에 기여했다. 1847년 스크류 구동 증기 기관 전열함인 르 나폴레옹 건조를 시작하여 1850년에 진수하였고, 1852년에는 14노트(26 km/h)의 속도를 얻었다.뒤퓌 드 롬은 장갑함 개발도 지휘하여, 1859년 세계 최초로 원양 항해가 가능한 철갑장갑함 라 글로와르를 진수했다.
2. 4. 1. 라 글로와르 함 건조

뒤퓌 드 롬은 증기 동력 도입과 거의 같은 시기에 이루어진 철갑 사용의 혁명에도 재능을 보였다. 그는 나무로 건조된 선박의 측면에 장갑을 적용하는 것이 실용적임을 보여주었다. 1857년 ''Constructive Corps—Directeur du Matériel''의 최고 직위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에 최초의 항해 철갑선인 ''라 글로르''의 설계가 승인되었다. ''라 글로르''는 비교적 빠르게 건조되었으며, 1863년까지 총 5척의 철갑선을 건조하는 프로그램이 뒤따랐다.[2]
이 철갑선 중에는 뒤퓌 드 롬이 설계한 유일한 2층 갑판 전열 철갑 전함인 ''솔페리노''와 ''마젠타''도 있었다. 이 선박들은 또한 스퍼(spur) 램을 장착한 최초의 선박이었다.
''라 글로르'' 설계에서 뒤퓌 드 롬은 기존의 성공적인 설계에 사용된 형태와 치수를 활용하고, 꼭 필요한 부분만 변경하는 원칙을 따랐다. ''라 글로르''는 수중 형태에 있어서는 ''나폴레옹''을 거의 재현했지만, 2개의 포 갑판 대신 1개의 포 갑판과 완전히 보호된 포대를 갖추었다. 뒤퓌 드 롬은 재직하는 동안 이 원칙을 일관되게 고수했다. 그러나 그는 더 두꺼운 장갑, 더 무거운 대포, 더 빠른 속도에 대한 끊임없이 증가하는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방법을 고려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프랑스 해군에 추가된 선박 중 극히 일부만이 나무 외의 재료로 건조되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2]
2. 4. 2. 마젠타와 솔페리노
뒤퓌 드 롬이 설계한 유일한 2층 갑판 전열 철갑 전함인 ''마젠타''와 ''솔페리노''는 이 새로운 철갑선에 속했다. 이 선박들은 스퍼(spur) 램을 장착한 최초의 선박이기도 했다.
2. 5. 국방위원회 위원 활동
1870년 보불전쟁 발발 당시, 앙리 뒤퓌 드 롬은 국방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어 프로이센 군대에 포위된 파리와의 연락을 위한 인력 비행선 개발에 착수했다. 이 비행선 실험은 전쟁이 끝난 1872년에야 이루어졌다.[3][4]2. 5. 1. 인력 비행선 개발

1870년 앙리 뒤퓌 드 롬은 실용적인 항행 기구를 완성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으며, 프랑스 정부는 실험 수행에 큰 도움을 주었다. 이 프로젝트를 위해 40000FRF의 예산이 지원되었으나, 기구는 항복 며칠 전에야 완성되었다. 이러한 실험을 통해 최초의 항행 기구 중 하나인 ''뒤퓌 드 롬''(fr)이 개발되었다.
''뒤퓌 드 롬'' 비행선은 길이 36m, 직경 14.84m, 높이 29m, 전체 부피 3454m3였다. 4명 또는 8명이 조작하는 크랭크로 구동되었으며, 시속 9~11km의 속도를 낼 수 있었다.[3] 기구 아래의 바구니는 14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4]
2. 6. 말년의 활동
듀푸이 드 롬은 말년에 플롱제의 실험 결과에서 영감을 받아 전동 잠수함 개발에 힘썼다. 그의 사후, 이 프로젝트는 친구 구스타브 제디에 의해 짐노트로 완성되었다.[1]2. 6. 1. 전동 잠수함 개발
듀푸이 드 롬은 말년에 잠수함 ''플롱제''의 실험 결과에서 큰 영감을 받아 전기 잠수함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그가 사망한 후, 이 프로젝트는 그의 친구 귀스타브 제데가 이어받아 세계 최초의 전기 잠수함 중 하나인 ''짐노트''를 진수하는 데 기여했다.3. 기술적 업적과 영향
뒤퓌 드 롬은 19세기 프랑스 해군의 기술 혁신을 이끈 핵심 인물이다. 에콜 폴리테크니크에서 교육받은 후 해군 조선 기술자가 된 그는 툴롱 해군 조선소에서 근무하며 프랑스 해군 군함 근대화에 크게 기여했다.[1]
1842년 영국에 파견되어 장갑함 건조 기술을 배우고 돌아와 1844년 《장갑함 건설에 대한 기억》(''Memoire sur la Construction des Batiments en Fer'')이라는 보고서를 출판했다. 1847년에는 최초의 증기 동력 전함이자 최초의 스크류 전함인 르 나폴레옹 건조를 시작, 1850년에 진수하여 1852년에는 14kn의 속도를 기록했다. 1859년에는 세계 최초의 원양 항해 가능 철갑장갑함 라 글로와르를 진수하여 장갑함 개발을 이끌었다.
보불전쟁 중에는 국방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프로이센 군대에 포위된 파리와의 연락을 위해 인력으로 프로펠러를 구동하는 조종 가능한 비행선 개발을 시도했다. 비록 실험은 전쟁이 끝난 1872년에 이루어졌지만, 이는 항공 기술 발전의 초기 단계에 해당한다. 말년에는 전동 잠수함 개발에 힘썼으며, 그의 사후 구스타브 제디에 의해 짐노트로 완성되었다.
뒤퓌 드 롬의 업적은 프랑스 해군을 세계 2위의 해군 강국으로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이는 당시 영국 다음으로 강력한 산업 기반 덕분이었다. 한 영국 부고에서는 "어떤 조선공이든 한 국가의 해군에 그보다 더 큰 공헌을 했을지 의문이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1]
그의 이름을 딴 군함들은 다음과 같다.
함선 종류 | 함명 | 진수 연도 | 특징 |
---|---|---|---|
장갑순양함 | 뒤퓌 드 롬 | 1887년 | 23kn 속도, 장거리 해상 공격 작전용 |
잠수함 | 뒤퓌 드 롬 | 1915년 | 동급 함선의 선도함 |
정보 수집함 | 뒤퓌 드 롬 | 2004년 | 통신 정보(Comint) 및 전자 정보(Elint) 수집용, 2006년부터 부겐빌 대체 |
3. 1. 증기 전함
영국에서 돌아온 뒤퓌 드 롬은 툴롱의 무기고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당시 프랑스 해군에서 유일하게 무장한 증기선은 외륜선으로 추진되었으며, 전열함에 증기 동력을 도입하는 것에 대한 반대가 컸다.[1] 외륜선은 그렇게 큰 전투선에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졌고, 스크류에 대한 신뢰도 없었으며, 프랑스뿐만 아니라 영국에서도 대다수의 해군 장교들은 돛 면적 감소를 싫어했다.[1]뒤퓌 드 롬은 ''그레이트 브리튼''의 세부 사항을 주의 깊게 연구했는데, 그는 이 배가 브리스톨에서 건조되는 것을 보았고, 전열함에 완전한 증기 동력을 사용해야 한다고 확신했다.[1] 1845년 초에 그는 해군 장관에게 보고서를 보내 철제 선체로 건조하고 여러 겹의 철판으로 이루어진 장갑 벨트로 보호되는 스크류 추진 프리깃의 건조를 제안했다.[1]
뒤퓌 드 롬은 배의 건조와 추진 방식에 급진적인 변화가 임박했다고 느끼는 유일한 사람이 아니었다.[3] ''Génie Maritime''(해군 공학)의 그의 동료들도 같은 생각에 감명을 받았고, 영국에서는 이 무렵 최초의 스크류 선박—개조된 "블록 선"—이 주문되었다.[3] 영국의 이러한 조치는 프랑스도 항해 전열함을 보조 증기 동력을 갖춘 선박으로 전환하도록 결정했다.[3]
뒤퓌 드 롬은 이 아이디어에 대한 작업을 계속했고, 1847년 최초의 증기 동력 전함이자 최초의 스크류 전함이 될 ''나폴레옹''의 건조를 주문받는 것으로 보상을 받았다.[4] 이 배는 길이가 77.8m, 폭이 17m이고, 5,000톤의 배수량을 가졌으며, 두 개의 포 갑판이 있었다.[4] 이 배는 1850년에 진수되었고, 1852년에 시험 운항을 거쳐 거의 14kn의 속도를 냈다.[4] 크림 전쟁 동안 이 배의 성능은 큰 주목을 받았고, 곧 전 세계 함대에 증기 동력을 도입하려는 계획이 세워졌다.[4]
3. 2. 철갑선
증기 동력의 도입과 거의 같은 시기에 철갑의 사용은 또 다른 설계 혁명을 이끌었다. 뒤퓌 드 롬은 나무로 건조된 선박의 측면에 장갑을 적용하는 것의 실용성을 보여주면서 이 분야에서도 재능을 발휘했다. 1857년 그는 ''Constructive Corps—Directeur du Matériel''의 최고 직위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최초의 항해 철갑선인 ''라 글로르''의 설계가 승인되었다. ''라 글로르''는 비교적 빠르게 건조되었으며, 1863년까지 총 5척의 철갑선을 건조하는 프로그램이 뒤따랐다.
이 새로운 철갑선 중에는 뒤퓌 드 롬이 설계한 유일한 2층 갑판 전열 철갑 전함인 ''마젠타''와 ''솔페리노''도 있었다. 이 선박들은 또한 스퍼(spur) 램을 장착한 최초의 선박이었다.
''라 글로르'' 설계에서 뒤퓌 드 롬은 기존의 성공적인 설계에 사용된 형태와 치수를 활용하고, 꼭 필요한 부분만 변경하는 원칙을 따랐다. ''라 글로르''는 수중 형태에 관해서는 ''나폴레옹''을 거의 재현했지만, 2개의 포 갑판 대신 1개의 포 갑판과 완전히 보호된 포대를 갖추었다. 뒤퓌 드 롬은 재직하는 동안 이 원칙을 일관되게 고수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더 두꺼운 장갑, 더 무거운 대포, 더 빠른 속도에 대한 끊임없이 증가하는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방법을 고려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특히 철갑선에 대한 그의 초기 열정 동안, 그의 재임 기간 동안 프랑스 해군에 추가된 선박 중 극히 일부만이 나무 외의 재료로 건조되었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2]
3. 3. 비행선
1870년 앙리 뒤퓌 드 롬은 실용적인 항행 기구를 완성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고, 프랑스 정부는 실험을 수행하는데 40000FRF의 예산을 지원하였다. 이 실험을 통해 최초의 항행 기구 중 하나인 ''뒤퓌 드 롬''(fr)이 개발되었으나, 기구는 프랑스가 항복하기 며칠 전에야 완성되었다.
''뒤퓌 드 롬'' 비행선은 길이가 36m, 직경이 14.84m, 높이가 29m, 전체 부피가 3,454m³였다. 4명 또는 8명이 조작하는 크랭크로 구동되었으며, 시속 9~11km의 속도를 낼 수 있었다.[3] 기구 아래의 바구니는 14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4]
3. 4. 잠수함
말년에 듀푸이 드 롬은 잠수함 ''플롱제''의 실험 결과에서 영감을 받아 전기 잠수함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그가 사망한 후, 이 프로젝트는 그의 친구 귀스타브 제데가 이어받아 세계 최초의 전기 잠수함 중 하나인 ''짐노트''를 진수하는 데 기여했다.4. 평가와 유산
듀푸이 드 롬은 19세기 프랑스 해군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프랑스 해군을 세계 2위의 해군으로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증기 기관 전열함 르 나폴레옹과 최초의 원양 항해 가능 철갑장갑함 라 글로와르의 개발은 그의 주요 업적으로 꼽힌다.
그의 업적은 당시 영국 다음으로 강력한 산업 기반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으며, 미국이나 프로이센보다 앞선 기술력을 보여주었다. 한 영국 부고에서는 "어떤 조선공이든 한 국가의 해군에 그보다 더 큰 공헌을 했을지 의문이다..."라고 언급할 정도로 그의 업적은 높이 평가되었다.
그의 이름을 딴 군함들은 다음과 같다.
4. 1. 당대의 평가
듀푸이 드 롬은 19세기의 여러 기술 발전을 통해 프랑스 해군이 주도권을 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당시 세계 2위의 해군으로 프랑스 해군의 위상을 공고히 하였다. 이러한 혁신은 영국 다음으로 강력한 산업 기반에 의존했으며, 미국이나 프로이센보다 훨씬 앞섰다. 한 영국 부고에서는 "어떤 조선공이든 한 국가의 해군에 그보다 더 큰 공헌을 했을지 의문이다..."라고 평가했다. 그는 1885년 2월 1일 파리에서 사망했다.듀푸이 드 롬의 이름을 딴 여러 군함이 있다.
- 장갑순양함 ''뒤퓌 드 롬''은 1887년 브레스트에서 진수되었으며, 23kn의 속도를 낼 수 있었고, "젊은 학파" 교리에 따라 장기간의 해상 공격 작전 중에 적 상선을 공격하도록 설계되었다.
- 잠수함 뒤퓌 드 롬은 1915년에 진수되었으며, 동급 함선의 선도함이다.
- 뒤퓌 드 롬은 2004년 3월 27일에 진수되었으며, 프랑스 해군을 위해 네덜란드에서 건조되었으며, Comint(통신 정보) 및 Elint(전자 정보)를 수집하도록 설계된 정보 수집함이다. 이 함선은 2006년 4월부터 ''부겐빌''을 대체했다.
4. 2. 후대의 평가
듀푸이 드 롬은 19세기 여러 기술 발전을 통해 프랑스 해군이 주도권을 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당시 세계 2위의 해군으로 프랑스 해군의 위상을 공고히 하는 데 기여했다.[1] 이러한 혁신은 영국 다음으로 강력한 산업 기반에 의존했으며, 미국이나 프로이센보다 훨씬 앞섰다.[1] 한 영국 부고에서는 "어떤 조선공이든 한 국가의 해군에 그보다 더 큰 공헌을 했을지 의문이다..."라고 평가했다.[1] 그는 1885년 2월 1일 파리에서 사망했다.[1]듀푸이 드 롬의 이름을 딴 군함은 다음과 같다.
- ''뒤퓌 드 롬'' (1887년): 브레스트에서 진수, 23kn 속력, 젊은 학파 교리에 따라 장기간 해상 공격 작전 중 적 상선 공격용으로 설계.
- 뒤퓌 드 롬 (1915년): 잠수함, 뒤퓌 드 롬급 잠수함의 선도함.
- 뒤퓌 드 롬 (2004년): 네덜란드 건조, 프랑스 해군용 Comint(통신 정보) 및 Elint(전자 정보) 수집용 정보 수집함. 2006년 4월부터 ''부겐빌'' 대체.
4. 3. 뒤퓌 드 롬의 이름을 딴 함선
듀퓌 드 롬의 이름을 딴 군함은 다음과 같다.
참조
[1]
서적
Mémoire sur la construction des bâtiments en fer
http://gallica.bnf.f[...]
Arthur Bertrand
1844
[2]
EB1911
Dupuy de Lôme, Stanislas Charles Henri Laurent
[3]
서적
Note sur l'Aérostat à Hélice, Construit pour le Compte de l'État
https://books.google[...]
Gauthier-Villars
1872
[4]
서적
Les Ballons dirigeables: Expériences de M. Henri Giffard en 1852 et en 1855 et de M. Dupuy de Lôme en 1872
https://archive.org/[...]
E. Dentu
18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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