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푸르트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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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르푸르트 대성당은 독일 튀링겐주 에르푸르트에 위치한 고딕 양식의 대성당이다. 742년 성 보니파시오가 세운 교회를 기원으로 하며, 12세기 중반 로마네스크 양식의 바실리카가 건설되었다. 14세기 초 언덕을 확장하여 성모 마리아 대성당을 위한 공간을 만들었다. 1184년에는 에르푸르트 변소 참사가 발생했고, 1507년 마르틴 루터가 사제 서품을 받았다. 14세기와 15세기에 걸쳐 건축되었으며, 1497년 제작된 마리아 글로리오사 종은 세계에서 가장 큰 중세 종으로 유명하다. 대성당에는 스테인드글라스 창문과 내부 가구, 에르푸르터 볼프람 촛대, 열 처녀 비유 조각상 등 다양한 건축적 특징과 유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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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푸르트 대성당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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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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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 명칭 | 에어푸르트의 성 마리아 대성당 |
독일어 명칭 | Erfurter Dom Hohe Domkirche St. Marien zu Erfurt Propsteikirche Beatae Mariae Virginis |
위치 | 에어푸르트, 튀링겐주 |
국가 | 독일 |
종파 | 로마 가톨릭 |
지위 | 대성당 |
기능적 지위 | 활동 중 |
문화재 지정 | 튀링겐주의 문화재 |
봉헌 | 성모 마리아 |
건축 양식 | 고딕 건축 |
기공 | 12세기 |
높이 | 81.26m |
종 | 14개 |
종 무게 | 11.45톤 |
교구 | 에어푸르트 교구 |
참사회원 | 그레고르 아른트 |
교구장 대리 | 베른하르트 드라파츠 |
부제 | 마티아스 부르케르트 |
오르간 연주자 | 실비우스 폰 케셀 |
웹사이트 | 에어푸르트 대성당 웹사이트 |
2. 역사
에르푸르트는 프랑크 왕국 시대부터 중요한 권력의 중심지였다. 724년 그레고리오 2세는 튀링겐 시민들에게 이곳에서 선교하던 보니파시오를 위해 "집"을 지을 것을 요청했다. 740년경, 보니파시오는 자카리아스에게 "오랫동안 이교도 농민의 정착지 또는 성(도시)이었던 엘페스후르트라고 불리는 곳"에 교구를 설립할 것을 확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고딕 건축 시대에는 다른 대성당이나 대학 교회와 마찬가지로, 모든 참사회를 수용하기에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 특히 성가대를 더 크고 밝게 할 필요성이 높아졌다. 참사회의 수는 여러 재단을 통해 대폭 증가하여 100명 이상, 공휴일에는 최대 300명의 성직자가 예배에 참여했다.
1507년, 마르틴 루터가 이곳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2. 1. 초기 역사
742년, 성 보니파시오는 현재 에르푸르트 대성당이 있는 언덕에 교회를 세웠다.[3] 프랑크 왕국 시대부터 에르푸르트는 중요한 권력의 중심지였으며, 724년 교황 그레고리오 2세는 튀링겐 시민들에게 이곳에서 선교하던 보니파시오를 위해 "집"을 지을 것을 요청했다. 740년경, 보니파시오는 자카리아스에게 "오랫동안 이교도 농민의 정착지 또는 성(도시)이었던 엘페스후르트라고 불리는 곳"에 교구를 설립할 것을 확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12세기 중반, 원래 교회의 기초 위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바실리카가 건설되었다.[3]2. 2. 중세 시대
현재 에르푸르트 대성당 부지는 로마네스크 바실리카와 교회당과 같은 다른 많은 기독교 건축물의 위치였다. 742년, 성 보니파스는 현재 에르푸르트 대성당이 있는 언덕에 교회를 세웠다. 12세기 중반에 원래 교회의 기초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바실리카에 사용되었다. 14세기 초, 성 마리아 대성당을 위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 언덕이 확장되었다.[3]1184년, 독일 왕 헨리 6세가 소집한 회의 중 바닥이 무너진 에르푸르트 변소 참사가 이곳에서 일어났다. 이 사고로 많은 귀족을 포함한 약 60명이 그 아래의 액체 배설물에 빠져 익사했다.
마르틴 루터는 1507년 4월 3일 대성당에서 서품을 받았다.[4] 프랑크 왕국 시대부터 에르푸르트는 중요한 권력의 중심지였으며, 724년 그레고리오 2세는 튀링겐 시민들에게 이곳에서 선교하던 보니파시오를 위해 "집"을 지을 것을 요청했다. 740년경, 보니파시오는 자카리아스에게 "오랫동안 이교도 농민의 정착지 또는 성(도시)이었던 엘페스후르트라고 불리는 곳"에 교구를 설립할 것을 확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고딕 건축 시대에는 다른 대성당이나 대학 교회와 마찬가지로, 특히 모든 참사회를 수용하기에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 특히 성가대를 더 크고 밝게 할 필요성이 높아졌다. 그 수는 여러 재단을 통해 대폭 증가하여 100명 이상, 공휴일에는 최대 300명의 성직자가 예배에 참여했다. 1507년, 마르틴 루터가 이곳에서 서품을 받았다.
2. 3. 종교 개혁 시기
마르틴 루터는 1507년 4월 3일 에르푸르트 대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4]3. 건축
에르푸르트 대성당은 주로 고딕 건축 양식으로 14세기와 15세기에 걸쳐 지어졌다. 스테인드글라스 창문과 내부 가구 등 주목할 만한 건축적 특징이 많다. 대성당의 세 탑 중 중앙 첨탑에는 1497년 게르트 판 보우가 주조한 마리아 글로리오사 종이 있는데,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자유 진동 종이자 현재까지도 세계 최대의 중세 종으로, 순수한 음색으로 유명하다.[5]
3. 1. 주요 특징
에르푸르트 대성당은 주로 고딕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14세기와 15세기에 걸쳐 건축되었다. 이 성당은 스테인드글라스 창문과 내부 가구 등 주목할 만한 특징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마리아 글로리오사(Maria Gloriosa): 대성당의 세 탑 중 중앙 첨탑에는 1497년 게르트 판 보우가 주조한 마리아 글로리오사 종이 있다. 이 종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자유 진동 종이었으며, 현재까지도 세계 최대의 중세 종으로 남아있다. 맑고 순수한 음색으로 유명하다.[5]
- 내부 가구 및 조각품:
- 양다혼으로 추정되는 글라이헨 백작과 두 부인의 무덤
- 1160년경의 회반죽 제단
- 에르푸르터 볼프람이라는 청동 촛대: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독립형 주조 작품이다.
- 현명한 처녀와 어리석은 처녀 조각상: 출입구 밖에 위치해 있다.[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