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파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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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여파호는 전한 시대의 인물로, 수형도위와 운중태수를 역임했다. 소제가 즉위한 시원 원년(기원전 86년)에 수형도위에 임명되어 익주군에서 발생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병사를 모집하고 반란군을 격파했다. 시원 4년(기원전 83년)에 익주에서 다시 반란이 일어나자 진압에 나섰으나, 익주 태수가 살해되고 4천여 명의 사상자를 내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군정의 왕평과 대홍려 전광명이 증원으로 파견되어 반란을 진압했고, 시원 6년(기원전 81년)에는 운중태수로 전임되었다.
소제 즉위 후, 여파호는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여러 요직을 거쳤다.
시원 원년(기원전 86년), 수형도위에 임명되었다.[1]
[1]
서적
漢書
2. 생애
기간 직책 주요 사건 시원 원년(기원전 86년) ~ 시원 6년(기원전 81년) 수형도위 익주 반란 진압[1] 시원 6년(기원전 81년) 이후 운중태수 [5]
시원 6년(기원전 81년), 수형도위 임기를 마치고 운중태수로 전임되었다.[5] 이후 그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2. 1. 수형도위 임명과 익주 반란 진압 (기원전 86년 ~ 기원전 83년)
시원 원년(기원전 86년), 여파호는 수형도위에 임명되었다.[1] 같은 해, 익주에서 염두(廉頭)와 고증(姑繒)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켜 한나라 관리들을 살해했다. 장가의 담지(談指)·동반(同竝) 등 24개 현에서도 이에 동조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 인원이 3만여 명에 달했다.[2] 여파호는 촉군을 떠나 건위에서 만여 명의 병력을 모아 장가를 공격하여 크게 물리쳤다.[3]
시원 4년(기원전 83년), 고증·엽유(葉榆)에서 다시 반란이 일어났다. 여파호는 군사를 이끌고 진압에 나섰으나, 적극적으로 진군하지는 않았다. 그 사이 반란군은 익주태수를 죽이고 기세를 올렸고, 여파호와 맞서 싸웠다. 이 전투에서 여파호의 군사 4천여 명이 물에 빠져 죽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4]
2. 2. 운중태수 좌천 (기원전 81년)
시원 6년(기원전 81년), 여파호는 수형도위 임기를 마치고 운중태수로 전임되었다.[5] 이후 그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3. 출전
같은 해, 익주의 염두(廉頭)와 고증(姑繒)의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켜 관리들을 죽이고, 장가의 담지(談指)·동반(同竝) 등 24개 현에서 동조하니, 그 인원이 3만여 명이었다. 여파호는 촉군을 떠나 건위에서 만여 명을 모아 장가를 쳐서 크게 물리쳤다.[3]
시원 4년(기원전 83년), 고증·엽유(葉榆)에서 다시 반란을 일으키니 여파호는 군사를 이끌고 진압에 나섰으나 진군하지 않았다. 오랑캐들은 익주태수를 죽이고 기세가 등등하여 여파호와 싸웠는데, 싸우다 물에 빠져 죽은 이가 4천여 명이었다.[3]
시원 6년(기원전 81년), 운중태수로 좌천되었다.[1]
참조
[2]
서적
漢書
[3]
서적
漢書
[4]
서적
漢書
[5]
서적
漢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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