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오지야 치지미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오지야 치지미는 17세기 호리 지로 마사토시가 견직물 기법을 응용하여 에치고 삼베를 개량하면서 시작된 일본의 전통 직물이다. 에치고 축으로 불리며, 오지야를 중심으로 생산 및 유통되었다. 간세이 개혁과 덴포 개혁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에도 시대 후반에는 매우 정교한 기술로 발전했다. 1955년 국가 중요 무형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2009년 유네스코 무형 문화 유산에 등록되었다. 호리 마사토시는 오지야 치지미 발명에 기여했으며, 오지야 치지미는 여름 고급 직물로 명성을 얻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오지야시 - 오지야역
    오지야역은 일본 니가타현 오지야시에 있는 JR 동일본 조에쓰선의 지상역으로, 1920년 히가시오지야역으로 개업하여 1932년 현재의 이름으로 변경되었으며, 쌍단식 2면 2선 구조를 갖추고 나가오카역이 관리하며 JR 니가타 비즈니스가 역 업무를 위탁받아 운영하고 2023년 하루 평균 1,087명이 이용한다.
  • 오지야시 - 토규
    토규는 12세기 농부들의 경기에서 시작되어 류큐 열도 도쿠노시마 지역의 주요 문화 행사로 자리 잡은 소싸움 스포츠로, 스모처럼 소의 능력에 따라 순위와 체급이 나뉜다.
  • 저마섬유 - 한산모시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에서 생산되는 한산모시는 삼국시대부터 이어져 온 전통 모시 직물로, 조선시대 왕실 진상품이었으며, 섬세한 수작업으로 만들어지는 세모시, 광폭세포, 저포교직 등의 종류가 있다.
  • 저마섬유 - 모시풀
    모시풀은 6,000년 이상 사용된 섬유 작물로, 직물 생산에 주로 활용되며, 높은 강도와 형태 유지 능력으로 의류, 산업용 재료, 제본 등에 사용되지만, 재배 및 가공 과정에서 노동 및 환경 문제에 대한 논의가 있다.
오지야 치지미
기본 정보
오지야 치지미
오지야 치지미
종류직물
재료모시
제직 방법직조
생산 방식수공예
생산지오지야, 일본
로마자 표기Ojiya-chijimi

2. 역사

오지야 치지미의 역사는 17세기 호리 지로 마사토시가 기존 직물 기법을 응용하여 에치고 지역의 삼베를 개량하여 '에치고 축'을 탄생시킨 것에서 시작된다.[1] 이 기술은 우오누마 지방 전역으로 확산되었으며, 오지야를 중심으로 한 축시(縮市)의 발달과 함께 에도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했다.[1] 당시 오지야 치지미는 일본 전역에 알려진 고급 직물이었으며, 기술적으로도 매우 정교한 수준에 도달했다.[1] 그러나 간세이 개혁이나 덴포 개혁과 같은 막부의 정책으로 인해 생산과 유통에 어려움을 겪는 시기도 있었다.[1]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거쳐 오지야 치지미는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55년 일본의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2009년에는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하였다.[1]

2. 1. 기원과 발전

17세기, 하리마 국 아카시 출신의 낭인으로 아카시 지로라고도 불렸던 호리 지로 마사토시는 오지야 인근 야마야 촌장의 집에 아내와 두 딸과 함께 이주하였다. 그는 기존 견 직물이었던 아카시 축의 기법을 응용하여 에치고 지역의 삼베를 개량하는 데 성공했다. 이 개량은 씨실에 강한 꼬임을 주어 독특한 질감("시보")을 만들고, 삼을 째는 방법과 천을 삶는 방법까지 개선한 것이었다. 호리는 이 기술을 마을 사람들에게 전수하였고, 개량된 삼베 기술은 우오누마 지방 전체로 퍼져나갔다. 당시 이 직물은 '''에치고 축'''(越後縮)이라 불렸다.

17세기 중반부터 오지야에서는 축시(縮市)가 열리기 시작했다. 우오누마, 가리와, 구비키 등지에서 생산된 치지미가 오지야의 중개인과 도매상에게 집중되었다. 호리노우치도카마치에서도 축시가 열렸다. 『에치고 명부』에는 4월부터 7월까지 열리는 축시에 에도, 교토, 오사카일본 전역의 상인들이 모여들었다고 기록될 정도로 번성했다.

1800년에 간행된 『호쿠에쓰시』에는 "큰 집이든 작은 집이든 민가 중에 베 짜는 소리가 나지 않는 집이 없다. 모두 치지미를 짜고 있다"고 묘사되어 있다. 저자가 에치고를 방문한 시기가 베 짜기 성수기가 아닌 여름이었음에도 많은 집에서 베를 짜고 있었다는 기록을 통해 당시 생산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에도 시대 후기에는 기술이 더욱 발전하여 구리 돈의 구멍을 통과할 정도로 얇은 직물을 만들 수 있을 정도였다. 오사카의 맹인 음악가 미네자키 코토가 작곡한 지우타 곡 에치고지시에서는 에치고의 명산품 중 하나로 "치지미는 살결이 비쳐 보이는 풍류..."라고 노래하기도 했다. 이 곡은 후에 나가우타로 편곡되어 유명한 가부키 무용곡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간세이 개혁(1787년)과 덴포 개혁(1842년) 시기에는 사치품의 제조 및 판매가 제한되면서 고급 직물이었던 오지야 치지미의 도매상과 생산자들이 큰 경제적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호리 지로 마사토시는 오지야 치지미를 개발하고 지역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사후에 그의 공적을 기리는 아카시도가 건립되었다. 현재도 매년 9월 12일에는 직물 조합 주관으로 기념 축제가 열리고 있으며, 아카시도는 2006년 오지야시 지정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현대에 이르러 오지야 치지미는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1955년 5월 12일 '에치고 축'이라는 명칭으로 국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후 1960년 지정 명칭이 ''''오지야 축·에치고 조후'''(小千谷縮・越後上布)'로 변경되었으며, 1976년에는 에치고 조후·오지야 축포 기술 보존 협회가 기술 보유 단체로 인정받았다. 마침내 2009년 9월 30일에는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세계적인 직물 유산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2. 2. 에도 시대의 번영

17세기, 호리 지로 마사토시(아카시 지로)는 기존의 견직물이었던 아카시 축의 기법을 활용하여 에치고 삼베를 개량하는 데 성공했다.[1] 이 개량된 직물 기술은 우오누마 지방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갔으며, 당시에는 에치고 축(越後縮)이라고 불렸다.[1]

17세기 중반에 이르러 오지야에서는 축시(縮市)가 열리기 시작했다. 우오누마, 가리와, 구비키 지역에서 생산된 축 직물들이 오지야의 중개인과 도매상에게 집중적으로 모여들었다.[1] 오지야 외에도 호리노우치도카마치에서도 축시가 개설되었다.[1] 당시의 번영상을 기록한 『에치고 명부』에는 "4월부터 7월까지 열리는 축시에는 에도, 교토, 오사카일본 전역의 상인들이 모여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1]

1800년에 발간된 『호쿠에쓰시』에는 "큰 집이든 작은 집이든 민가 중에 베 짜는 소리가 나지 않는 집이 없을 정도로 모두 축을 짜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1] 이 책의 저자가 에치고 지역을 방문했을 때는 베 짜기의 성수기가 아닌 여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집에서 활발하게 베를 짜고 있었다고 한다.[1]

그러나 간세이 개혁(1787년)과 덴포 개혁(1842년) 당시, 막부의 정책으로 인해 고급품의 매매나 사용이 제한되면서 축 도매상과 생산자들은 상당한 경제적 타격을 입었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도 시대 후반에는 오지야 치지미의 제작 기술이 매우 정교한 수준에 도달하여, 구리 동전의 구멍을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얇은 직물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1] 이러한 명성은 예술 작품에도 반영되어, 오사카의 맹인 음악가 미네자키 코토가 작곡한 테고토모노 지우타 곡인 '에치고 시시(越後獅子)'에는 에치고의 명산품 중 하나로 "축은 피부가 비쳐 보이는 나라의 풍류(縮は肌の透き通る 国の風流)"라고 묘사되었다. 이 곡은 후에 나가우타로 편곡되어 유명한 가부키 무용곡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1]

2. 3. 시련과 극복

17세기, 호리 지로 마사토시는 기존의 견직물 기법을 응용하여 에치고 삼베를 개량하는 데 성공했다. 이 개량된 직물은 '에치고 축(越後縮)'이라 불리며 우오누마 지방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17세기 중반부터는 오지야에서 축시(縮市)가 열리기 시작했다. 우오누마, 가리와군, 구비키군 등 주변 지역에서 생산된 축(縮) 직물이 오지야의 중개상과 도매상에게 집중되었다. 호리노우치도카마치시에서도 비슷한 시장이 형성되었다. 당시 기록인 『에치고 명부』에 따르면, 4월부터 7월까지 열리는 오지야 축시에는 에도, 교토, 오사카를 비롯한 일본 전역의 상인들이 몰려들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1800년의 기록인 『호쿠에쓰시』에는 "큰 집이든 작은 집이든 민가 중에 베 짜는 소리가 나지 않는 집이 없다. 모두 축을 짜고 있다"고 묘사될 정도로 생산이 활발했다. 이 기록은 저자가 방문했던 여름이 베 짜는 성수기가 아니었음에도 많은 집에서 축을 짜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간세이 개혁(1787년)과 덴포 개혁(1842년) 시기, 막부의 사치 금지 정책으로 인해 고급 직물이었던 오지야 축의 매매와 사용이 제한되면서 관련 도매상과 생산자들은 큰 경제적 타격을 입었다. 이는 당시 지배층의 정책이 지역 경제와 민생에 어려움을 준 사례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시련 속에서도 오지야 축의 생산 기술은 에도 시대 후반에 이르러 더욱 발전하여, 구리 돈의 구멍을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얇고 정교한 직물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오사카의 맹인 음악가 미네자키 코토가 작곡한 지우타 곡 '에치고 시시'에서는 "축은 살결이 비쳐 보이는 풍류"라며 에치고의 명산품으로 칭송받았다. 이 곡은 이후 나가우타로 편곡되고 유명한 가부키 무용곡으로 만들어지면서 오지야 축의 문화적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근현대 시기, 오지야 축의 가치는 다시 인정받기 시작했다. 1955년 5월 12일, '에치고 축'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의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1960년에는 그 명칭이 '오지야 축·에치고 조후'로 변경되었다. 1976년에는 '에치고 조후·오지야 축포 기술 보존 협회'가 기술 보유 단체로 공식 인정받았다. 마침내 2009년 9월 30일,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세계적인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이는 오랜 역사 속에서 시련을 겪으면서도 기술과 문화를 계승하고 발전시켜 온 노력의 결실이라 할 수 있다.

2. 4. 근현대

17세기, 호리 지로 마사토시(아카시 지로)는 견 직물이었던 아카시 축의 기법을 응용하여 에치고 삼베를 개량하는 데 성공했다. 이 개량된 직물은 우오누마 지방 전체로 퍼져 나갔으며, 당시에는 '''에치고 축'''이라고 불렸다. 17세기 중반부터는 오지야에서 축시(縮市)가 열리기 시작했다. 이 시장에는 우오누마, 가리와, 구비키 지역에서 생산된 축이 오지야의 중개인과 도매상에게 모여들었다. 오지야 외에도 호리노우치도카마치에서도 축시가 열렸다. 『에치고 명부』에는 4월부터 7월까지 열리는 축시에 에도, 교토, 오사카일본 전역의 상인들이 모여들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800년에 발간된 『호쿠에쓰시』에는 "큰 집이든 작은 집이든, 민가 중 한 집도 빠짐없이 베 짜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이 없다. 모두 축을 짜고 있다"고 기록되어, 당시 에치고 지역에서 베 짜기가 얼마나 성행했는지 보여준다. 『호쿠에쓰시』의 저자가 에치고를 방문한 시기는 여름 무렵으로, 베 짜기의 성수기는 아니었음에도 많은 집에서 베를 짜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간세이 개혁(1787년)과 덴포 개혁(1842년) 시기에는 고급품의 매매나 사용이 제한되면서 축 도매상과 생산자들이 큰 경제적 타격을 입기도 했다. 에도 시대 후반에는 오지야 치지미 제작 기술이 매우 정교해져서 구리 동전의 구멍을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얇은 직물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명성은 오사카의 맹인 음악가 미네자키 코토가 작곡한 테고토모노 지우타 곡 '에치고 시시'에도 반영되었는데, 가사 중에 "축은 피부가 비쳐 보이는 나라의 풍류..."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이 곡은 후에 나가우타에도 도입되어 유명한 가부키 무용곡으로 발전했다.

1955년 5월 12일, '에치고 축'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의 국가 중요 무형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지정 명칭은 1960년에 '오지야 축·에치고 조후'로 변경되었다. 1976년에는 에치고 조후·오지야 축포 기술 보존 협회가 해당 기술의 보유 단체로 인정받았다. 2009년 9월 30일에는 유네스코 무형 문화 유산으로 등록되어 그 가치를 세계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3. 호리 마사토시와 오지야 축

호리 지로 마사토시는 하리마 국 아카시 출신의 낭인으로, 아카시 지로라고도 불렸다. 그는 17세기에 아내와 두 딸과 함께 동시 야마야 촌장의 집으로 이주했다.

호리 마사토시는 기존의 에치고 마포를 개량하는 방법을 연구하여 마을 사람들에게 전수하고, 이를 우오누마 지방 전체로 확산시켰다. 그의 개량 방식은 씨실에 강한 꼬임을 주어 독특한 질감인 "시보"를 만들어 내고, 삼을 째는 방법과 천을 삶는 방법까지 개선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오지야 치지미는 여름철 고급 직물로서 일본 전역에 명성을 얻게 되었다.

호리 마사토시가 세상을 떠난 후, 오지야 치지미를 개발하고 오지야 지역 발전에 기여한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아카시도가 건립되었다. 현재에도 매년 9월 12일에는 직물 조합 주관으로 그를 기리는 축제가 열리고 있다. 아카시도는 2006년에 오지야시 지정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4. 축 상인

니시와키 가문을 비롯한 많은 도매상이 있었다. 또한, 작은 보따리 장수들은 혼자서 30~40필의 오지야 치지미를 짊어지고 에도로 행상을 다녔다. 이들은 점차 세력을 키워 나중에는 옷감 도매상 등에도 영향을 미칠 정도가 되었다. 행상인들은 조합을 결성하였는데, 魚沼|우오누마일본어 지역에 43명, 頸城|구비키일본어 지역에 41명, 刈羽|가리와일본어 지역에 25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참조

[1] 웹사이트 小千谷縮(おぢやちぢみ) - 小千谷市ホームページ https://www.city.oji[...] 2021-07-24
[2] 웹사이트 小千谷縮とは - 歴史・技法・素材 - {{!}} IONOストア https://ojiya-chijim[...] 2021-07-24
[3] 웹사이트 小千谷縮(おぢやちぢみ) - 新潟県ホームページ https://www.pref.nii[...] 2021-07-24
[4] 웹사이트 小千谷縮とは https://kotobank.jp/[...] 2021-07-24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