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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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삼석은 고려 시대 충숙왕의 측근으로, 남만 출신이다. 연경에서 충숙왕의 눈에 띄어 고려로 들어와 의술로 신임을 얻어 스승이 되었다. 이후 권력을 휘두르며, 현명한 인물을 시기하고 벼슬을 사고 팔았으며, 죄 없는 사람을 가두는 등 전횡을 일삼았다. 또한 유학자들과 갈등을 빚으며, 성균관의 공자상을 훼손하려다 실패하고 성균관 직원들을 파면시키는 등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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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삼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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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한글 | 왕삼석 |
한자 | 王三錫 |
로마자 표기 | Wang Sam-seok |
상세 정보 | |
출신 | 남만 |
성격 | 간사하고 경솔함 |
능력 | 재주와 기술이 없음 |
행적 | 상선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남에게 의지하여 생활 충숙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환관을 통해 알현하여 왕의 마음에 들어 동행하여 귀국 의술로 왕을 현혹하여 총애를 받고 스승으로 칭해짐 현명한 사람을 질투하고 모함하며 벼슬을 팔고 옥사를 농단 대간을 모욕하기까지 이르렀으나 왕은 깨닫지 못함 음양술과 요술로 왕에게 한양, 부원, 용산에 오래 머물 것을 권함 공주가 용산에서 원자를 낳고 죽자 '선사 조륜과 스승 왕삼석이 왕을 유인하여 용산 해변의 습한 땅에 오래 머물게 하여 공주가 병을 얻어 죽게 했다. 이 사실이 황제의 귀에 들어가면 두 사람의 죄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라는 내용의 글이 날아옴 유학제거로 있을 때 문선왕의 소상을 만들려 하자 성균관이 대성전을 닫고 받아들이지 않음 이를 왕에게 모함하여 박사 이훤과 학록 신휼을 의금부에 가두고 파직시킴 |
2. 생애
왕삼석은 본래 남만(南蠻) 출신으로, 원의 수도 연경(燕京)에서 장삿배를 따라 생활하다가 당시 그곳에 머물던 충숙왕의 눈에 띄어 고려로 오게 되었다.[1] 그는 의술을 통해 충숙왕의 깊은 신임을 얻어 '사부(師傅)'로 불릴 정도였으며, 왕의 총애를 등에 업고 점차 권력을 장악해 나갔다.[1]
왕의 신임을 믿고 유능한 인재를 시기하고 매관매직을 일삼았으며, 무고한 사람을 투옥하고 대관(臺官)들을 모함하는 등 여러 폐단을 일으켰다.[1] 심지어 외국인인 양재(梁載)를 우문군(佑文君)에 봉하는 등 조정을 어지럽혔으나 충숙왕은 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1] 또한 유학제거(儒學提擧)로 있을 때는 성균관의 공자 상을 흙으로 본뜨려다 유학자들의 반발을 샀고, 이에 반대한 성균관 관리들을 파면시키는 등 갈등을 빚기도 했다.[1]
2. 1. 출신과 고려 입국
원래 남만(南蠻) 출신으로, 일찍이 장삿배(商船)를 따라 원(元)의 수도였던 연경(燕京)으로 건너가 남의 집에서 얹혀살고 있었다. 당시 연경에 머물고 있던 충숙왕이 왕삼석을 보고 매우 마음에 들어 하여, 고려로 돌아올 때 함께 데리고 왔다.2. 2. 권력 장악과 전횡
의술로 충숙왕의 총애를 받아 스승(사부)으로까지 불리게 되었다. 왕삼석은 왕의 깊은 신임을 바탕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이를 남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현명하고 유능한 인물들을 시기했으며, 벼슬을 팔고 무고한 사람들을 잡아 가두는 등 전횡을 일삼았다. 심지어 대관(臺官)들을 대궐 안에서 공공연히 모함하였으나, 충숙왕은 이러한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또한 외국인인 양재(梁載)를 우문군(佑文君)에 봉하는 등 고려 조정을 쥐고 흔들었다.유학제거의 직책에 있을 때는 성균관 대성전에 모셔진 공자의 상(像)을 흙으로 본뜨려고 시도하였다. 성균관에서는 이를 불경한 행위로 간주하여 대성전의 문을 닫고 그의 요구를 거부했다. 이에 왕삼석은 오히려 성균관 직원들이 왕명을 거역했다며 모함했고, 결국 이들을 체포하여 파면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2. 3. 유학자들과의 갈등
왕삼석은 충숙왕의 신임을 얻어 유학제거(儒學提擧)라는 관직에 올랐다. 이 자리에 있을 때 그는 성균관의 대성전에 모셔진 공자의 상(像)을 흙으로 본뜨려고 시도하였다. 당시 유학자 사회에서는 이를 매우 부적절하고 무엄한 행위로 여겼다. 성균관의 직원들은 왕삼석의 이러한 행동을 막기 위해 대성전의 문을 걸어 잠그고 그를 들여보내지 않았다. 이에 앙심을 품은 왕삼석은 충숙왕에게 성균관 직원들이 불손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모함하였고, 결국 충숙왕은 이들을 체포하고 파면시켰다. 이 사건은 왕삼석과 당시 유학자들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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