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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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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헌지는 동진 시대의 서예가로, 아버지 왕희지와 함께 '이왕' 또는 '희헌'으로 불린다. 그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서예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특히 일필서라는 독특한 서풍을 창안했다. 대표작으로는 '중추첩', '압두환첩', '지황탕첩', '낙신부십삼행', '십이월첩', '이십구일첩' 등이 있다. 왕헌지는 아버지 왕희지와의 일화를 통해 서예에 대한 열정과 섬세한 감성을 보여주며, 그의 서예는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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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헌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두근의
두근(杜堇, b. 1465)의 "버드나무와 바위 사이의 왕헌지와 두 부인"
본명왕헌지 (王獻之)
출생344년
출생지진나라 저장성 사오싱 (산음현, 회계군)
사망386년 (42세)
사망지진나라 산둥성 린이
직업
직업서예가
활동 시기동진
가족
아버지왕희지
경력
관직동진의 중서령
재임 기간372년 ~ 376년
군주동진 열종 효무제 사마 요
섭정태빈 이능용

2. 생애와 업적

왕헌지는 서예의 대가로, 아버지 왕희지와 함께 이왕(희지가 대왕, 헌지가 소왕) 혹은 희헌으로 불린다. 왕희지의 여러 아들 중 막내였지만 글씨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으며, 왕희지의 글씨보다 빼어난 기운이 넘친다고 여겨졌지만, 골격은 아버지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2. 1. 가계

관계이름비고
어머니Features의 딸
첫째 아내Features의 남동생인 Features의 딸, 이혼
둘째 아내사마도복 (신안공주)간문제의 셋째 딸
도엽
장녀왕옥윤Features과의 딸, 요절
차녀왕신애사마도복(신안공주)과의 딸, 안제의 안희황후


2. 2. 평가

서예의 대가로, 아버지 왕희지와 함께 '''이왕'''(희지가 '''대왕''', 헌지가 '''소왕''') 혹은 '''희헌'''으로 불린다. 왕희지의 여러 아들들은 모두 서예가였으며, 왕헌지는 막내였지만 글씨에 대한 천분을 타고났고, 왕희지의 글씨보다 빼어난 기운이 넘친다고 여겨졌지만, 골격은 아버지에 미치지 못한다고 평가받았다.

3. 주요 작품

왕헌지의 대표적인 작품은 다음과 같다.


  • '''중추첩(中秋帖)''' : 행초서로 쓰였으며, 베이징 고궁 박물원에 소장되어 있다.
  • '''압두환첩(鴨頭丸帖)''' : 초서 2행으로 쓰였으며, 상하이 박물관에 모사본으로 추정되는 묵서가 소장되어 있다.
  • '''지황탕첩(地黃湯帖)''' : 행서로 쓰였으며, 도쿄도 타이토 구립 서도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낙신부십삼행(洛神賦十三行)''' : 해서로 쓰였으며, 왕희지가 쓴 작품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 '''십이월첩(十二月帖)''' : 행초체로 쓰였다.
  • '''이십구일첩(廿九日帖)''' : 행서체로 쓰였으며, 랴오닝성 박물관에 소장된 모사본에 수록되어 있다.

3. 1. 중추첩(中秋帖)

중추첩(中秋帖)


당나라 모작, 압두환첩(鴨頭丸帖)


《중추첩(中秋帖)》은 행초서로 쓰여졌다. 첫 행에 "중추(中秋)"라는 글자가 있어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앞뒤가 결여되어 중간의 3행(22자)만이 남아있다. 일필서의 연면체로 화려함이 있으며, 필세에 기백이 있다. 베이징 고궁 박물원에 소장되어 있다.

3. 2. 압두환첩(鴨頭丸帖)



초서 2행으로 쓰여 있으며, 순화각첩에도 수록되어 있다. 상하이 박물관에 견본 묵서가 소장되어 있으나, 모사본으로 추정된다.

3. 3. 지황탕첩(地黃湯帖)

서체는 행서이다. 송나라 고종의 서명이 있다. 그 후, 문징명의 소장품이 되었으며, 현재는 도쿄도 타이토 구립 서도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지본묵서의 탑본이다. 순화각첩에도 수록되어 있다.

3. 4. 낙신부십삼행(洛神賦十三行)

낙신부 13행


서체는 해서이다. 왕헌지는 해서에도 능했다. 왕헌지의 소해(小楷)를 전하는 작품은 이것뿐이다. 이 부(賦)는 위의 조식의 문장으로, 왕헌지가 쓴 것은 앞뒤가 결여되어 있고, 중간의 13행만 남송 시대에 새겨진 석각과 그 탁본으로 유존하고 있다. 또한, 왕희지가 쓴 작품(같은 해서)도 있었다고 한다.[1]

3. 5. 십이월첩(十二月帖)

서체는 행초체이다. 미불이 수장하고 진적으로 존중했기에 유명하다. 미불 자신이 제작한 석각 단편의 탁본이 남아있다. 완전한 형태로는 보진재첩에 수록되어 있다.

3. 6. 이십구일첩(廿九日帖)

이십구일첩(廿九日帖)은 행서체로 쓰여진 서예 작품이다. 랴오닝성 박물관에 소장된 모사본 만세통천진첩에 수록되어 있으며, 당나라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일한 왕헌지의 서적으로 가장 신뢰성이 높다고 평가받는다.[1]

4. 일화

왕헌지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 어느 날, 왕헌지가 글씨 연습을 하고 있는데, 뒤에서 아버지 왕희지가 다가와 그의 손에서 붓을 빼앗으려 하자, "너는 붓을 꽉 쥐고 글을 쓰고 있구나. 분명 잘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 아버지 왕희지가 수도 건강에 갈 때, 왕희지는 벽에 글자를 쓰고 있었다. 이를 왕헌지가 깨끗이 지우고 다시 썼는데, 몰래 아버지보다 잘 쓴다고 생각하며 흡족해했다. 이윽고, 건강에서 돌아온 왕희지가 문득 벽의 글씨를 보고 "얼마 전, 수도에 갈 때는 술에 몹시 취했던 모양이다. 아무래도 이 글자는 형편없군. 어쩌다 이런 엉망진창인 글자를 썼을까"라고 말했고, 왕헌지는 아버지가 그렇게 한탄하는 것을 보고 몹시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참조

[1] 웹사이트 A Narrative on Calligraphy http://vincentpoon.c[...] 2017-11-15
[2] 서적 比田井南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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