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크가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요크가는 잉글랜드 왕가의 일원으로, 랭글리의 에드먼드가 1385년 요크 공작이 되면서 시작되었다. 요크가는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랭커스터 왕가와 장미 전쟁을 벌였고, 리처드 플랜태저넷의 아들 에드워드 4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요크 왕조가 성립되었다. 에드워드 4세의 사후, 리처드 3세가 왕위를 찬탈했으나 보즈워스 전투에서 헨리 튜더에게 패배하며 요크 왕가는 몰락하고 튜더 왕조가 시작되었다. 요크 가문은 이후에도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했고, 튜더 왕조의 헨리 7세와 에드워드 4세의 딸 엘리자베스의 결혼으로 요크 가문과 튜더 가문은 통합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잉글랜드의 왕가 - 플랜태저넷가
플랜태저넷가는 12세기부터 15세기까지 잉글랜드를 통치한 왕조로, 앙주 가문에서 유래하여 헨리 2세부터 시작해 리처드 2세의 폐위로 본가가 막을 내렸으며, 랭커스터 왕조와 요크 가문과의 장미 전쟁을 거쳤다. - 잉글랜드의 왕가 - 앙주가
앙주가는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잉글랜드와 프랑스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플랜태저넷 왕조의 기원이 되었고, 잉글랜드 법률과 행정 제도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요크가 - 리처드 3세
리처드 3세는 잉글랜드 요크 왕가 마지막 왕으로, 장미 전쟁에서 공을 세웠으나 조카들을 런던탑에 가두고 왕위에 올랐다가 보즈워스 전투에서 패배하여 사망하며 요크 왕가의 몰락을 초래했고, 셰익스피어 희곡 등에서 악인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 요크가 - 엘리자베스 우드빌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에드워드 4세의 왕비로, 장미 전쟁의 격변 속에서 몰락과 부활을 겪으며 요크 가문과 랭커스터 가문의 화합에 기여했고, 그녀의 삶은 여러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 잉글랜드의 역사 - 장미 전쟁
장미 전쟁은 1455년부터 1487년까지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의 왕위 계승 분쟁으로 시작되어 헨리 7세의 승리로 튜더 왕조가 건국되면서 종결된 일련의 내전입니다. - 잉글랜드의 역사 - 잉글랜드 왕국
잉글랜드 왕국은 9세기에 정치적 통일을 이루었고, 바이킹 침략과 노르만 정복을 거친 후 봉건 제도가 확립되었으며, 1707년 스코틀랜드와의 통합으로 대영제국이 성립되면서 잉글랜드 왕국은 독립적인 정치적 실체로서의 역사를 마감했다.
요크가 | |
---|---|
기본 정보 | |
국가 | 잉글랜드 왕국 |
상위 가문 | 플랜태저넷 가문 |
창시자 | 랭글리의 에드먼드 |
마지막 통치자 | 리처드 3세 |
설립 | 1385년 |
해체 | 1499년 |
작위 | |
가문의 역사 | |
주요 인물 | 랭글리의 에드먼드 요크의 리처드 에드워드 4세 에드워드 5세 리처드 3세 |
주요 사건 | 장미 전쟁 |
분가 | |
분가 | 분가 존재 |
문장 | |
2. 요크 왕가의 기원
요크 왕가는 에드워드 3세의 아들인 랭글리의 에드먼드로부터 시작되었다. 랭글리의 에드먼드는 1362년에 케임브리지 백작, 1385년에 초대 요크 공작으로 봉해졌다.
에드먼드의 장남 노르윅의 에드워드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2대 요크 공작이 되었으나, 1415년 아쟁쿠르 전투에서 자식 없이 전사하였다.[1] 에드먼드의 다른 아들 코니스버프의 리처드는 앤 모티머와 결혼하여 아들 리처드 플랜태저넷을 두었다. 리처드는 숙부 에드워드의 요크 공령과 아버지 리처드의 케임브리지 백작령을 계승하였다.
앤 모티머는 리처드 2세의 추정 상속인이었던 에드먼드 모티머의 동생으로, 1425년 에드먼드가 사망하자 마치 백작령을 계승했다. 이로써 리처드 플랜태저넷은 요크 공작령, 케임브리지 백작령, 마치 백작령을 모두 상속받아 왕위 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2. 1. 요크 공작
랭글리의 에드먼드는 제1대 요크 공작으로 두 아들이 있었다. 장남 노르윅의 에드워드는 제2대 요크 공작이 되었으나 1415년 백년전쟁 중 아쟁쿠르 전투에서 전사했고, 자손이 없었다.[1]그의 동생 제3대 캠브릿지 백작 코니스버프의 리처드는 앤트워프의 리오넬의 증손녀이자 제4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의 동생인 모르티메의 앤과 결혼하였다. 제4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는 잉글랜드의 리처드 2세의 추정상속인이었다. 1425년 제4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가 후계 없이 사망하자 앤은 그의 지위를 이어받았다. 그러나 1399년 이미 랭커스터 왕가의 잉글랜드의 헨리 4세가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이들의 왕위 계승권은 시기가 지난 것이었다. 제2대 요크 백작 에드워드가 전사한 후 코니스버프의 리처드와 모르티메의 앤 사이에서 태어난 리처드 플랜태저넷이 제3대 요크 공작 지위에 올랐다. 리처드 플랜태저넷은 어머니의 마치 백작 지위도 함께 물려받았다.[2]
리처드는 어머니와 아버지 양쪽 모두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랭커스터 가문이 실패할 경우 왕위에 대한 상당한 주장을 가지게 되었고, 인지 장자 상속에 따라 더 우월한 주장을 가질 수 있었다. 그는 1448년에 플랜태저넷 성을 처음으로 사용하면서 이 점을 강조했다. 그는 마치와 얼스터의 작위를 물려받아 잉글랜드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귀족이 되었으며, 왕 다음으로 서열이 높았다. 리처드는 요크 공작부인 세실리 네빌과 결혼하여 13명 또는 15명의 자녀를 두었다.[3]
이름 | 초상화 | 출생 | 배우자 | 사망 |
---|---|---|---|---|
랭글리의 에드먼드 (요크 가문 창시자) 1385–1402 | ![]() | 1341년 6월 5일 킹스 랭글리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와 에노의 필리파의 아들 | 카스티야의 이사벨라 1372년 자녀 3명 조안 드 홀랜드 자녀 없음 | 1402년 8월 1일 킹스 랭글리 61세 |
노리치의 에드워드 1402–1415 | ![]() | 1373년 노리치 랭글리의 에드먼드와 카스티야의 이사벨라의 아들 | 필리파 드 모훈 자녀 없음 | 1415년 10월 25일 아쟁쿠르 42세 |
리처드 플랜태저넷 1415–1460 | ![]() | 1411년 9월 21일 케임브리지 백작 리처드와 앤 드 모티머의 아들 | 세실리 네빌 1437년 자녀 12명 | 1460년 12월 30일 웨이크필드 49세 |
에드워드 플랜태저넷 1460–1461 | ![]() | 1442년 4월 28일 루앙 리처드 플랜태저넷과 세실리 네빌의 아들 | 엘리자베스 우드빌 1464년 5월 1일 자녀 10명 | 1483년 4월 9일 웨스트민스터 40세 |
에드워드 플랜태저넷은 1461년 에드워드 4세가 되어 요크 공작 칭호를 왕관과 병합했다.
2. 2. 왕위 계승권
랭글리의 에드먼드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장남 노르윅의 에드워드는 아버지에게서 제2대 요크 공작 작위를 물려받았으나 백년전쟁 중 아쟁쿠르 전투에서 전사했고, 자손은 없었다.[1]그의 동생 제3대 캠브릿지 백작 코니스버프의 리처드는 앤트워프의 리오넬의 증손녀이자 제4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의 동생인 모르티메의 앤과 결혼하였다. 제4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는 잉글랜드의 리처드 2세의 추정상속인이었다. 1425년 제4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가 후계 없이 사망하자 앤은 그의 지위를 이어받았다. 그러나 1399년 랭커스터 왕가의 잉글랜드의 헨리 4세가 이미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이들의 왕위 계승권은 시기가 지난 것이었다. 제2대 요크 백작 에드워드가 전사한 후, 코니스버프의 리처드와 모르티메의 앤 사이에서 태어난 리처드 플랜태저넷이 제3대 요크 공작 지위에 올랐다. 리처드 플랜태저넷은 어머니로부터 마치 백작 지위도 물려받았다.[2]
리처드 플랜태저넷은 어머니와 아버지 양쪽 모두 에드워드 3세의 후손이었기에, 랭커스터 왕가가 끊길 경우 왕위를 주장할 강력한 명분을 갖게 되었으며, 인지 장자 상속에 따라 더 우선적인 권리를 주장할 수도 있었다.[2] 그는 1448년에 플랜태저넷 성을 처음으로 사용하면서 이러한 점을 부각시켰다.
3. 장미 전쟁
잉글랜드의 헨리 6세가 정신이상으로 정치에 관여할 수 없게 되자, 요크 공작 리처드 플랜태저넷이 섭정이 되어 정치를 맡았다. 왕비 앙주의 마거릿은 이를 왕위에 대한 위험으로 여겨 서머싯 공작의 도움을 받아 리처드를 추방했다. 리처드는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고, 장미 전쟁이 발발했다. 리처드는 마치 백작과 에드워드 3세의 추정상속인의 지위에 따라, 헨리 6세를 대신하여 왕위에 오를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였다.[1]
높은 지위에도 불구하고, 리처드 플랜태저넷에게는 병약한 국왕 헨리 6세의 측근, 특히 서머싯 공작과 왕비 마거릿 오브 앙주에 의해 왕정에서 주요 직책은 주어지지 않았다. 헨리 6세의 병세가 악화된 1453년부터 1454년 사이, 요크 공작이 호국경이 되어 국왕의 후견인 자리를 차지했지만, 국왕이 회복되자 서머싯 공작에게 관직을 넘겨주어야 했다.[1]
전쟁 중에 요크 공작 리처드 플랜태저넷은 전사하였으나, 요크 왕가는 랭커스터 왕가를 격파하고 리처드의 아들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4세가 왕위에 올랐다.[1]
3. 1. 요크 왕가의 승리
장미 전쟁은 1455년 제1차 세인트 올번스 전투부터 시작되었고, 서머싯 공작에드먼드 보퍼트를 처치한 요크 공작이 다시 호국경으로 정권을 담당했다.[1] 처음 요크 공작의 전쟁 목적은 국왕 측근에서 랭커스터파 귀족을 일소하는 데 있었지만, 그가 자신의 왕위 계승권을 주장한 것은 1460년 10월에 이르러서였다.[1] 이 해, 요크파는 7월 노샘프턴 전투에서 국왕 헨리 6세를 생포했다.[1] 그러나 승리는 오래가지 못하고, 12월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오히려 요크 공작과 차남 라틀랜드 백작에드먼드가 붙잡혀 처형되었다.[1]요크 공작의 왕위 계승의 뜻은 장남 에드워드가 이었다.[1] 외가 쪽 사촌이자 후에 '킹메이커'라고 불린 워릭 백작리처드 네빌의 지원을 받은 에드워드는, 이어진 모티머스 크로스 전투에서 랭커스터파를 격파하며 앞길을 열었다.[1] 이에 대응하기 위해 헨리 6세와 왕비 마거릿 오브 앙주가 북부에서 활동하는 동안, 워릭 백작은 수도의 지배권을 얻어, 1461년 런던에서 에드워드가 국왕으로 선언되도록 했다.[1] 그 사이에 에드워드는 토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 사실상 랭커스터파 군을 궤멸시키고, 왕위를 결정적으로 굳혔다.[1]
3. 2. 요크 왕조의 통치
에드워드 4세의 초기 통치는 랭커스터 왕가의 음모와 헨리 6세를 지지하는 봉기로 얼룩졌다. 워릭 백작은 변절하여 1470-71년에 앤주 여왕 마가렛과 왕의 질투심 많은 동생 조지, 클래런스 공작을 지지하며 헨리를 잠시 복위시켰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왕위를 되찾았고, 랭커스터 왕가는 1471년 런던 탑에서 헨리 6세가 사망하면서 멸망했다. 1478년, 클래런스의 지속적인 문제로 인해 그는 런던 탑에서 처형되었으며, 대중적으로 그는 말름시 와인 통에 빠져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22]1483년에 에드워드가 사망하자 왕위는 그의 열두 살 된 아들 에드워드 5세에게 넘어갔다. 에드워드 4세의 동생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는 섭정으로 임명되었고, 어린 왕과 그의 동생 리처드는 런던 탑에 수용되었다. 유명한 탑의 왕자들의 운명은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오늘날까지도 그들이 살해되었는지, 누가 살해했는지 알 수 없다. 의회는 문서 ''티툴루스 레지우스''에서 에드워드 4세의 결혼이 무효라는 이유로 두 소년이 사생아라고 선언했으며, 이에 따라 리처드가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그는 1483년 7월에 리처드 3세로 즉위했다.[22]
4. 요크 왕가의 몰락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4세가 사망하자 왕위는 당시 10세에 불과한 그의 아들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5세가 계승하였다. 그러나 에드워드 4세의 동생이었던 잉글랜드의 리처드 3세가 조카인 에드워드 5세와 그의 동생 요크 공작 리처드를 런던탑에 가두고 즉위하였다. 이에 반발한 요크 왕가의 일원들은 랭커스터 왕가의 후계인 튜더 왕가의 잉글랜드의 헨리 7세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1485년 헨리 7세는 보즈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를 격파하고 잉글랜드의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1483년 말에 쿠데타 시도가 실패했지만, 보즈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는 헨리 튜더와 맞붙었다. 전투 중에 리처드의 중요한 지지자 중 일부는 편을 바꾸거나 자신의 가신들을 전장에 투입하지 않았다. 결국 리처드 3세는 전사했고, 그는 플랜태저넷 왕가의 마지막 왕이자 전투에서 죽은 마지막 잉글랜드 왕이었다.
헨리 튜더는 스스로 왕임을 선언하고, 에드워드 4세의 장녀인 요크의 엘리자베스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는 요크 가문과 랭커스터 가문의 생존자들을 통합했다고 주장하며, 1603년까지 통치한 튜더 왕조의 창시자 잉글랜드의 헨리 7세로서 왕위에 올랐다.
4. 1. 이후의 요크 왕가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4세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5세가 왕위를 계승했으나, 에드워드 4세의 동생 잉글랜드의 리처드 3세가 조카들을 런던탑에 가두고 왕위에 올랐다.[5] 요크 왕가의 일원들은 이에 반발하여 랭커스터 왕가의 후계자인 튜더 왕가의 잉글랜드의 헨리 7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헨리 7세는 보즈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를 격파하고 왕위에 올랐다. 이 전투에서 리처드 3세의 주요 지지자들 일부가 배신하거나 참전을 보류하여 리처드 3세는 전사했고, 그는 플랜태저넷 왕가의 마지막 왕이자 전투에서 죽은 마지막 잉글랜드 왕이 되었다.[8]헨리 7세는 에드워드 4세의 장녀인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하여 요크 가문과 랭커스터 가문을 통합하고 튜더 왕조를 열었다.[6] 그러나 부르고뉴 공작 부인 마가렛과 드 라 폴 가문은 요크 왕가를 복원하려는 시도를 계속했다.[7] 마가렛의 조카 워릭 백작 에드워드는 런던 타워에 투옥되었지만, 마가렛은 워릭을 사칭한 램버트 시므넬이 이끄는 반란에 자금을 지원했다. 링컨 백작 존 드 라 폴은 이 반란에 가담했다가 스토크 필드 전투에서 사망했다.[8] 워릭은 퍼킨 워벡이 일으킨 추가적인 침략 시도에 연루되어 1499년에 처형되었고, 이로써 플랜태저넷 가문과 요크 가문은 적자 남계에서 단절되었다.[9]
이후 에드워드 4세의 여동생 엘리자베스와 서퍽 공 존 드 라 폴의 자손이 요크 가문의 권리 계승자로 인정받았지만, 이들의 장남 링컨 백작 존 드 라 폴은 헨리 7세에게 반란을 일으켜 전사했고, 차남 에드먼드 드 라 폴도 헨리 7세에게 항거하다 처형되었다. 막내아들 리처드 드 라 폴이 파비아 전투에서 사망하면서, 마거릿 폴이 요크 가문의 마지막 생존자가 되었고, 그녀의 자손들이 요크 가문의 유산을 계승해 갔다.
5. 역대 요크 공작 및 군주
(요크 왕가의 시조)
1385–1402
킹스 랭글리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와 에노의 필리파의 아들
자녀 3명
조안 홀랜드
자녀 없음
킹스 랭글리
61세
1402–1415
노리치
랭글리의 에드먼드와 카스티야의 이사벨라의 아들
자녀 없음
아쟁쿠르
42세
1415–1460
케임브리지 백작 리처드와 앤 드 모티머의 아들
(1437년)
자녀 12명
웨이크필드
49세
1460–1461
루앙
리처드 플랜태저넷과 세실리 네빌의 아들
(1464년 5월 1일)
자녀 10명
웨스트민스터
40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