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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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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미 전쟁은 1455년부터 1485년까지 잉글랜드 왕위를 두고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 간에 벌어진 일련의 내전이다. 에드워드 3세의 후계 문제, 유사봉건제도, 두 가문의 왕위 계승권 주장, 백년 전쟁의 영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했다. 1455년 세인트 올번스 전투를 시작으로 에드워드 4세의 집권과 워릭 백작의 반란, 헨리 6세의 재집권 등 격동의 시기를 거쳤다. 결국 1485년 보즈워스 전투에서 헨리 튜더가 리처드 3세를 물리치고 헨리 7세로 즉위하면서 장미 전쟁은 종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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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분쟁 이름장미 전쟁
영어 명칭Wars of the Roses
시기1455년 5월 22일 ~ 1487년 6월 16일
장소잉글랜드, 웨일스, 칼레
결과랭커스터 가문의 승리
튜더 왕조 창건
교전 세력
교전국 1[[파일:Yorkshire rose.svg|20px]] 요크 가
지원 세력[[파일:Blason fr Bourgogne.svg|15px]] 부르고뉴 공국
교전국 2[[파일:Red Rose Badge of Lancaster.svg|20px]] 랭커스터 가
[[파일:Tudor Rose.svg|20px]] 튜더 가
지원국[[파일:Royal Arms of the Kingdom of Scotland.svg|15px]] 스코틀랜드 왕국
[[파일:France moderne.svg|15px]] 프랑스 왕국
지휘관
교전국 1 지휘관[[파일:Royal Arms of England (1399-1603).svg|15px]] 요크 공작 리처드 }
[[파일:Royal Arms of England (1399-1603).svg|15px]] 에드워드 4세
[[파일:Royal Arms of England (1399-1603).svg|15px]] 리처드 3세 }
교전국 2 지휘관[[파일:Royal Arms of England (1470-1471).svg|15px]] 헨리 6세
[[파일:Arms of the Prince of Wales (Modern).svg|15px]] 웨일스 공 에드워드 }
[[파일:Arms of Edmund Tudor, Earl of Richmond.svg|15px]] 헨리 7세
[[파일:Arms of Margaret of Anjou.svg|15px]] 앙주의 마르그리트#
관련 전투
주요 전투1st St Albans
Blore Heath
Ludford Bridge
Sandwich
London (1460)
Northampton
Worksop
Wakefield
Mortimer's Cross
2nd St Albans
Ferrybridge
Towton
Piltown
Hedgeley Moor
Hexham
Edgcote
Losecoat Field
Barnet
Tewkesbury
London (1471)
Buckingham's rebellion
Bosworth Field
Stafford's & Lovell's rebellion
Stoke Field
추가 정보
사망자 수105,000명
기타 지휘관
요크 가문[[파일:Arms of Edmund, Earl of Rutland.svg|15px]] 러틀랜드 백작
[[파일:Coat of Arms of Sir Richard Neville, 5th Earl of Salisbury, KG.png|15px]] 솔즈베리 백작
[[파일:Neville Warwick Arms.svg|15px]] 워릭 백작 "킹메이커" (이반)
[[파일:Arms of George Plantagenet, 1st Duke of Clarence.svg|15px]] 클래런스 공작
[[파일:Quartered arms of Sir John Nevill, 1st Marquess of Montagu, KG.png|15px]] 몬태규 후작 (이반)
[[파일:Coat of Arms of Sir William Nevill, 6th Baron Fauconberg, KG.png|15px]] 포콘버그 경
[[파일:Quartered arms of Sir Anthony Woodville, 2nd Earl Rivers, KG.png|20px]] 제2대 리버스 백작
[[파일:Coat of Arms of Sir William Hastings, 1st Baron Hastings, KG.png|15px]] 헤이스팅스 경
[[파일:Falcon and Fetterlock Badge of Edward IV.svg|15px]] 에드워드 5세 #
[[파일:Arms of Richard of Shrewsbury, 1st Duke of York.svg|15px]] 요크 공 리처드 #
[[파일:White_Boar_Badge_of_Richard_III.svg|20px]] 리처드 3세
[[파일:Coat of Arms of Sir Henry Stafford, 2nd Duke of Buckingham, KG.png|15px]] 제2대 버킹엄 공작(이반)
[[파일:Howard_arms_(John,_duke_of_Norfolk).svg|15px]] 노퍽 공작
[[파일:CoA of John de la Pole, 1st Earl of Lincoln.svg|15px]] 링컨 백작
[[파일:Coat_of_Arms_of_Sir_Francis_Lovell,_1st_Viscount_Lovell,_KG.png|20px]]
램버트 심넬
퍼킨 워벡
랭커스터 가문[[파일:Arms of John Beaufort, 1st Earl of Somerset.svg|15px]] 제2대 서머셋 공작
[[파일:Stafford Coat of Arms.jpg|15px]] 제1대 버킹엄 공작
[[파일:Modern arms of Percy.svg|15px]] 제2대 노섬벌랜드 백작
[[파일:Arms of John Beaufort, 1st Earl of Somerset.svg|15px]] 제3대 서머셋 공작
[[파일:Arms of John Holland, 2nd Duke of Exeter.svg|15px]] 엑세터 공작 #
[[파일:Arms_of_Owen_Tudor.svg|15px]] 오웬 튜더 경
[[파일:Arms_of_Jasper_Tudor,_Duke_of_Bedford.svg|15px]] 베드포드 공작
[[파일:Arms of Clifford.svg|15px]] 클리퍼드 경
[[파일:Modern arms of Percy.svg|15px]] 제3대 노섬벌랜드 백작
[[파일:Coat of Arms of Sir James Butler, 1st Earl of Wiltshire, KG.png|15px]] 윌트셔 백작
[[파일:Talbot arms.svg|15px]] 슈루즈버리 백작
[[파일:SIr_Andrew_Trollope%27s_coat_of_arms.svg|15px]]
[[파일:Arms of John Beaufort, 1st Earl of Somerset.svg|15px]] 제4대 서머셋 공작
[[파일:Coat of arms of Sir John de Vere, 13th Earl of Oxford.png|15px]] 옥스퍼드 백작
[[파일:Welsh dragon rampant with pizzle.png|20px]] 헨리 7세
[[파일:Quartered_arms_of_Sir_Thomas_Stanley,_1st_Earl_of_Derby,_KG.png|20px]] 더비 백작
[[파일:Coat_of_arms_of_Sir_William_Stanley,_KG.png|20px]] (이반)

2. 배경

장미 전쟁이라는 이름은 잉글랜드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싸운 플랜태저넷 왕가의 두 경쟁 가문과 관련된 문장 배지에서 유래했는데, 바로 요크의 백장미와 랭커스터의 홍장미를 가리킨다.[1] 이 용어는 1727년 비빌 히건스가 "두 장미 사이의 다툼"을 묘사하면서 초기 형태로 사용되었고, 데이비드 흄은 그의 저서 『잉글랜드 역사』(1754~1761)에서도 언급했다.[1]

현대적인 용어인 "장미 전쟁"은 1829년 월터 스콧이 쓴 소설 『기어르슈타인의 앤』이 출판된 후 19세기 초에 일반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스콧은 템플 교회 정원을 배경으로 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헨리 6세 1부』(2막 4장)의 한 장면을 바탕으로 이 이름을 지었다. 이 장면에서 여러 귀족과 한 변호사가 랭커스터파 또는 요크파에 대한 충성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빨간 장미나 흰 장미를 뽑는다. 셰익스피어 시대에는 이 갈등은 단순히 "내전"으로 불렸다.

요크 가문은 갈등 초기에 백장미 상징을 사용했지만, 랭커스터 가문의 홍장미는 1485년 보스워스 필드 전투에서 헨리 튜더가 승리한 후에야 도입되었다. 헨리가 승리하고 요크의 엘리자베스(즉, 에드워드 4세의 상속인)와 결혼한 후, 두 장미는 결합되어 튜더 장미가 되어 두 가문의 연합을 상징했다. 장미 자체를 인식표로 사용한 것은 에드워드 1세가 "적절하게 줄기가 달린 금장미"를 사용한 데서 유래했다. 종종 귀족들이 여러 작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 이상의 배지를 사용했다. 예를 들어, 에드워드 4세는 마치 백작으로서의 태양을 사용했지만, 그의 아버지의 매와 족쇄(즉, 요크 공작으로서의)도 사용했다. 배지가 항상 명확했던 것은 아니다. 바넷 전투에서 에드워드의 '태양'은 옥스퍼드 백작의 베어 별과 매우 유사하여 치명적인 혼란을 야기했다.

많은 참가자들은 그들의 직속 영주 또는 후원자와 관련된 리버리 배지를 착용했다. 리버리 착용은 "영주의 지속적인 고용"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제한되었으며, 용병 부대는 제외되었다. 예를 들어, 보스워스에서 헨리 튜더의 군대는 붉은 용 깃발 아래에서 싸웠고, 요크 가문 군대는 리처드 3세의 개인 문장인 흰 멧돼지를 사용했다.

경쟁 가문의 이름은 요크와 랭커스터 도시에서 유래했지만, 해당 공국공작령은 이 도시들과 거의 관련이 없었다. 랭커스터 공국에 딸린 토지와 직책은 주로 글로스터셔, 북웨일스, 체셔 및 요크셔에 위치해 있었고, 요크 공작의 영지는 잉글랜드와 웨일스 전역, 특히 웨일스 국경 지대에 있었다. 역사학자들은 전쟁의 주요 원인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장미 전쟁이라는 명칭은 두 왕가의 문장인 요크 가문의 흰 장미, 랭커스터 가문의 붉은 장미에서 유래한다. 랭커스터 가문의 붉은 장미 사용은 전쟁 말기에 나타났다. 이 명칭은 19세기 소설가 월터 스콧의 『가이어스타인의 앤』에서 널리 사용되게 되었다.

당시 봉건제 하에서 이 전쟁에 참여한 많은 이들이 직접 섬기거나 후원하는 영주 문장이 새겨진 "리버리 배지"를 착용했다. 예를 들어, 보즈워스 전투에서 헨리 튜더의 군대는 "붉은 용" 깃발 아래 싸웠고, 요크 가문 군대는 리처드 3세의 문장인 흰 멧돼지를 사용했다. 전쟁 후 헨리 7세는 붉은 장미와 흰 장미를 합쳐 요크 가문과 랭커스터 가문의 통합을 상징하는 튜더 장미 문장을 사용했다.

라이벌 양 가문의 명칭은 각각 요크와 랭커스터 마을에서 유래하지만, 양 세력의 지지 기반과는 관련이 적다. 요크 가문은 잉글랜드 중부와 웨일스 국경 지방에 세력을 확장했고, 가문 이름의 요크셔에서는 랭커스터 가문이 우세했다.

1330년대 스코틀랜드 정책을 둘러싼 프랑스 왕 필리프 6세와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의 대립이 백년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당시 잉글랜드 왕은 대륙에 영토를 가진 아키텐 공작을 겸하고 있어, 프랑스 왕의 봉신이기도 했다. 필리프 6세가 에드워드 3세의 봉신 예의 부족을 이유로 아키텐 영토 몰수를 선언하자, 에드워드 3세는 발루아 왕가의 필리프 6세의 즉위의 불법성을 주장하며, 1340년 스스로 "프랑스 왕"을 선포하고 필리프 6세와 개전했다. 에드워드 3세와 유능한 장수인 에드워드 흑태자크레시 전투(1346년)와 푸아티에 전투(1356년)에서 프랑스군을 대파하며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1360년 브레티니-칼레 조약에서 왕위 계승권 포기를 대가로 옛 앙주 왕령의 회복과 칼레, 퐁티우, 기네의 할양을 프랑스 왕에게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 후, 국내에서는 반란이 일어나고, 흑태자가 병에 걸리면서 전황도 불리해져 칼레, 보르도를 제외하고 정복한 영토 대부분을 잃게 되었다.

장미 전쟁으로 이어지는 "대귀족 간의 항쟁"은 에드워드 3세에 의해 시작되었다. 에드워드 3세와 왕비 필리파 에노는 13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성인이 된 남자아이는 5명이었다. 에드워드 3세는 그들을 잉글랜드 귀족의 여자 상속인과 결혼시켜 클레어렌스, 랭커스터, 요크 그리고 글로스터 등 잉글랜드 최초의 공작가를 설립했다. 이들 공작가의 후손들은 왕위를 놓고 다투게 된다.

1377년 에드워드 3세가 사망하자, 전년에 사망한 에드워드 흑태자의 아들인 9세의 리처드 2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에드워드 3세의 아들인 초대 클레어렌스 공작 라이오넬 앤트워프도 사망했고, 딸 필리파가 남아 리처드 2세의 왕위 계승권자(추정상속인)가 되었다. 필리파는 제3대 머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와 결혼했다. 1381년 에드먼드와 필리파는 연이어 사망했다. 자식이 없는 리처드 2세는 그들의 아들인 제4대 머치 백작 로저 모티머를 왕위 계승자로 지명했지만, 로저는 1398년 사망하고 제5대 머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가 남게 되었다. 흑태자의 계통이 단절되었을 때 장자 상속권 법에 따르면 라이오넬 앤트워프의 자손인 제5대 머치 백작이 왕위를 계승해야 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았고, 이것이 장미 전쟁의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백년 전쟁에 고전하고 있던 리처드 2세는 왓 타일러의 난을 비롯한 빈번한 민중 반란에 시달렸고, 국고 낭비와 측근 정치가 의회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1399년 삼촌인 랭커스터 공작 존 오브 곤트가 사망하자, 리처드 2세는 존 오브 곤트의 아들 헨리 볼링브룩을 영토 몰수와 국외 추방에 처했다. 볼링브룩은 귀국하여, 처음에는 랭커스터 공작 작위의 회복을 주장했다. 많은 귀족들이 그를 지지하게 되자, 그는 리처드 2세를 폐위하고 헨리 4세로 즉위하여, 랭커스터 왕조가 시작되었다. 어린 에드먼드 모티머의 왕위 계승권을 지지하는 귀족은 없었다. 그러나 즉위 후 몇 년이 지나자, 헨리 4세는 웨일스, 체셔 그리고 노섬벌랜드에서 반란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이들 반란은 제5대 머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의 왕위 계승을 명분으로 이용했다. 이들 반란은 진압되었다.

1413년, 헨리 4세가 사망하자 헨리 5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헨리 5세는 국내가 안정되었다는 점을 고려하여 중단되었던 백년 전쟁을 재개하고, 1415년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프랑스에 침공하여 아쟁쿠르 전투에서 프랑스 귀족 연합군을 격파했다. 그리고 1420년 프랑스와 트루아 조약을 맺고 헨리 5세의 자손에 의한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인정받았다.

헨리 5세의 9년간의 통치에는 사우스햄프턴 음모 사건이 발생했고, 에드워드 3세의 넷째 아들 에드먼드 랭리의 아들인 캠브리지 백작 리처드 오브 코니스버러가 아쟁쿠르 전투에 앞선 1415년에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왕위 계승권을 가진 캠브리지 백작의 아내 앤 모티머(라이오넬 앤트워프의 증손녀이자 로저 모티머의 딸)는 1411년 사망했다. 앤의 남동생인 제5대 머치 백작은 헨리 5세에게 충실했고, 1425년 자식 없이 사망했으며, 그의 왕위 계승권과 작위는 앤의 후손에게 상속되었다.

캠브리지 백작과 앤 모티머의 아들 리처드는 아버지가 처형되었을 때 4세였다. 캠브리지 백작은 권리를 박탈당했지만, 나중에 헨리 4세는 아쟁쿠르 전투에서 전사한 캠브리지 백작의 형인 요크 공작 에드워드의 작위와 영토를 리처드에게 상속시켰다. 헨리 5세에게는 세 명의 남동생이 있었고, 그 자신도 건강했고 결혼도 했으므로, 랭커스터 가문의 왕위는 흔들리지 않을 것으로 여겨졌다.

1422년 8월 31일 헨리 5세가 급사하고, 즉위한 외아들 헨리 6세는 생후 9개월이었다. 그 2개월 후 프랑스 왕 샤를 6세도 사망했는데, 트루아 조약에 따르면 프랑스 왕위는 헨리 6세의 것이 되지만, 왕태자 샤를(샤를 7세)를 옹립한 아르마냐크파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헨리 6세에게는 베드퍼드 공존과 글로스터 공험프리의 두 명의 삼촌이 있었고, 장남인 베드퍼드 공이 보호령(섭정)이 되었으며, 베드퍼드 공이 잉글랜드에 없는 동안에는 글로스터 공이 그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글로스터 공과 랭커스터 가문 방계인 윈체스터 주교 헨리 보포르, 서퍽 백작 윌리엄 드 라 폴이 대립하게 되었다.

1429년, 잔 다르크의 활약으로 아르마냐크파가 오를레앙을 해방시켰고, 샤를 7세는 랑스에서 프랑스 국왕의 대관식을 거행했다. 잉글랜드 측도 파리를 일시적으로 확보하여 1431년 헨리 6세의 프랑스 국왕 대관식을 거행했지만, 1435년 아라스 조약에서 동맹국이었던 부르고뉴 공 필리프 3세가 샤를 7세와 강화하여 잉글랜드에게는 불리한 상황이 되었다.

베드퍼드 공이 1435년에 사망하자, 헨리 6세는 권력 다툼이 끊이지 않는 평의원과 고문관들에게 둘러싸이게 되었다. 글로스터 공은 보호령의 지위를 요구하며, 의도적으로 서민들의 인기를 얻으려고 했지만, 추기경 헨리 보포르와 서퍽 백작의 저항을 받았다.

서퍽 백작은 프랑스 국왕과의 평화 정책을 추진하여, 샤를 7세의 왕비 마리의 조카인 앙주 공 르네의 딸 마르그리트(마가렛)과 헨리 6세의 결혼을 결정했다. 1445년에 결혼식이 거행되었지만, 이 평화에는 메인의 할양이 포함되어 있어 잉글랜드 국내에서는 매우 불만이었다. 1447년, 서퍽 후작은 평화에 반대하는 글로스터 공 험프리를 반역죄로 체포했고, 그 5일 후 글로스터 공은 베리 세인트 에드먼즈 감옥에서 사망했다.

글로스터 공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 때문에 오히려 서퍽 공의 입지가 나빠졌고, 이번에는 프랑스와의 강화를 파기하고 공격을 감행하지만, 실패하여 프랑스 영토의 대부분을 상실했다. 1450년 서퍽 공은 실각하여, 국외 추방 도중 살해되었다.

대신 서머셋 공 에드먼드 보포르가 평화파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한편, 1446년까지 "프랑스 및 노르망디 총독"직에 있었던 요크 공 리처드(글로스터 공의 죽음으로 제1 왕위 계승자가 됨)가 주전파의 중심이 되어, 궁정, 특히 서머셋 공을 대프랑스 전쟁에서 자금과 병사의 공급을 지연시켰다고 심하게 비난했다.

1450년, 켄트에서 민중 폭동이 발생했다(잭 케이드의 반란). 요크 공의 사촌이라고 자칭하는 케이드가 이끄는 봉기군은 정치적 요구를 내걸고 런던으로 향해 정부군과 충돌했지만 이를 격파하고 런던의 일부를 점령하여 켄트 주지사와 궁정 신하 1명을 살해했다. 정부가 사면령을 내린 것으로 폭도는 해산되었지만, 케이드를 포함한 몇몇이 처형되었다.

1452년, 아일랜드 총독으로 좌천되었던 요크 공 리처드가 잉글랜드로 귀환하여 서머셋 공의 축출과 정부 개혁을 요구하며 런던으로 진군했다. 이 시점에서는 그의 대담한 행동에 동조하는 귀족은 거의 없었고, 블랙히스에서 헨리 6세와 회견하지만 속아서 투옥되었다. 그는 1452년부터 1453년까지 투옥되었지만, 사면으로 석방되었다.

궁정의 불화는 전국에 반영되어 귀족들은 사투를 벌이고 국왕의 권위와 궁정법에 대한 불복종을 보였다. 북동부에서의 퍼시 가문과 네빌 가문의 다툼은 이 시대의 전형적인 사투였고, 다른 귀족들도 제약 없이 이를 행했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오래된 귀족과 헨리 4세 이후 등장한 신흥 귀족 사이에서 싸웠다. 오래전부터 노섬벌랜드 백작의 지위를 가진 퍼시 가문과 이에 비하면 신흥 가문인 네빌 가문의 다툼은 이 패턴이며, 이 외에는 콘월과 데번에서 행해진 코트네이 가문과 봉빌 가문의 사투가 있다.

프랑스에서는 샤를 7세가 잉글랜드군을 몰아붙였고, 1453년 10월 19일, 잉글랜드군의 마지막 거점이었던 보르도를 함락시켰다. 그 후 잉글랜드 세력에 의한 반격이 시도되었지만, 소규모 충돌 정도였기 때문에 백년 전쟁은 종결되었다.

1453년 8월 헨리 6세는 첫 발작으로 정신착란에 빠져, 왕자(에드워드 오브 웨스트민스터)의 탄생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마가렛 왕비는 자신을 섭정으로 삼으라고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귀족원의 지명으로 요크 공이 보호령에 임명되었다. 그는 곧 이 권력을 대담하게 행사하여 서머셋 공을 투옥하고 퍼시 가문의 노섬벌랜드 백작(헨리 6세의 지지자)과 사투를 벌이고 있던 그의 동맹자인 네빌 가문(솔즈베리 백작, 그의 아들 워릭 백작)을 지원했다.

1455년 헨리 6세가 회복되자 요크 공의 정책은 뒤집히고 서머셋 공이 복귀했다. 마가렛 왕비는 요크 공에 대항하는 당파를 구성하여 그의 영향력을 빼앗는 음모를 꾸몄다. 점점 궁지에 몰린 요크 공과 그의 일당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무력으로 대항하기로 결심한다.

2. 1. 13-14세기 유럽의 변화와 영국의 정세

13세기 말, 근대적인 형태의 주권 국가가 나타나려는 징후가 보였다. 이전 시기의 중복되는 사법권은 점차 일원화되었고, 대부분의 지역에서 권위를 행사하는 하나의 정부가 등장했다. 보니파키우스와의 투쟁에서 에드워드 1세필립 4세는 외부 세력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 왕국의 모든 이들에 대해 과세하고, 재판하고, 법을 제정할 수 있는 권위를 주장했다. 이러한 권리들은 교황과의 투쟁에서 주장되었고, 프랑스와 영국의 성직자들조차 왕을 충실하게 지지하며 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정치 권력으로의 이행은 14~15세기에 들어서며 중단되었다. 세속 정부는 내부분쟁과 대외 전쟁으로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14세기 초, 영국과 프랑스는 주권 국가의 등장에 필요한 크기, 통일, 안정된 왕조를 갖춘 유일한 국가였다.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 왕들은 14세기의 경제적 문제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경제 불황에 대한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주요 수입원이었던 농업 생산은 계속되었지만, 좋지 않은 기후 때문에 정체되거나 감소했다. 따라서 개인이나 국가의 수입을 늘리는 유일한 방법은 이웃의 것을 빼앗는 것이었고, 프랑스와 영국은 그 세기의 대부분을 서로 전쟁하며 보냈다. 귀족들은 이익이 되는 관직을 차지하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왕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으며, 무거운 세금 때문에 하층민들은 불만에 차 있었고 반항적이었다. 영국과 프랑스 왕들의 목표는 왕국의 모든 특권 계급과 지역들을 왕권에 복속시키고, 약한 변경의 공국들을 합병하는 것이었다. 신민들에게 정복 전쟁을 위한 과세가 부과되었고, 정복은 새로운 재정 수입원을 가져다주었다. 성직자, 귀족, 도시인들은 자신들의 특권이 왕의 요구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왕국에서의 특권 집단에 대한 공격은 주변의 약한 세력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졌다.

에드워드 3세가 스코틀랜드를, 필립 6세가 플랑드르를 병합하려 했을 때, 그들은 상대를 과소평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코틀랜드인들과 플랑드르인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했고, 에드워드 3세와 필립 6세는 장기적이고 많은 비용이 드는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말년에 에드워드와 필립은 세금을 부과하면 폭동이 일어날 위험에 빠지고, 세금을 부과하지 못하면 정복 정책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딜레마에 빠졌음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특권 계급에게 현재의 실정을 설명하고 그들의 의견을 조정할 필요성을 증가시켰다. 성직자들과 귀족들의 특권에 대한 공격, 중앙 정부의 강화, 왕의 권위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설명되고 인정되어야 했다. 반복되는 무거운 세금은 성직자, 귀족, 도시인들의 동의 없이는 징수할 수 없었다.

영국은 이미 단일한 정치적 단위였고, 왕의 궁정에서 이루어지는 결정들은 왕국 전역에 걸쳐 적용되었다. 특권 계급의 대표들을 중앙의 회의에 소집하는 의회가 이미 이용되고 있었다. 에드워드 3세는 그가 일으킨 전쟁이 그에게 더 압박을 줌에 따라 의회의 성원을 늘리고, 의회를 그의 정책을 설명하고 과세에 대한 동의를 얻는 장으로 삼아 점점 더 빈번하게 사용했다. 영국 정부에서 의회를 필수 기구로 만들면서도 에드워드 3세는 자신의 권력을 양보할 생각이 없었고, 정책에 관한 한 언제나 주도권을 잡았다. 그러나 에드워드 3세가 만든 의회는 그의 나약한 계승자들에게는 위험스러운 기구가 되었다. 강력한 왕들은 정책에 관한 모든 것을 하나의 기구에 집중시킴으로써 시간과 노력을 줄일 수 있었지만, 이러한 기구는 귀족이 반대를 제기할 수 있는 장소였다. 정부의 많은 일들이 의례적으로 의회의 최종적인 승인을 받는 절차를 거쳤기에, 귀족들은 의회를 통제함으로써 정보를 통제하려고 하였다.

에드워드 3세 사후, 귀족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왕은 귀족의 지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귀족들은 신민들을 중립적인 태도에 서게 했고, 왕들은 귀족들에게 고위 관직을 주어야 했다. 왕들은 그들의 충성을 유지하기 위해 토지나 연금으로 보수를 주어야 했고, 귀족과 기사들의 군사적 봉사에 의존해야만 했다. 귀족에 의해 소집되고 왕실 재정에서 급료를 받는 군대로 이루어졌는데, 이들은 종종 왕보다 자신들의 지휘관에게 더 충성했고, 반란이나 내란에 이용될 수 있었다. 귀족들은 부와 권력을 얻기 위해 중앙 정부를 통제하려고 했다. 귀족들의 반란, 반란이 성공한 이후 귀족들 사이의 분쟁, 왕과 귀족의 한 당파 사이의 동맹, 왕권의 일시적인 회복, 새로운 귀족의 반란 등으로 정치는 극도로 혼란한 상태에 빠졌다. 1307년에서 1485년 사이에 영국에서는 9명의 왕들 중에서 6명이 퇴위당하고 5명이 살해당했다(에드워드 2세, 리처드 2세, 헨리 6세, 에드워드 5세, 리처드 3세). 에드워드 4세는 퇴위되었다가 다시 왕위를 되찾았다. 프랑스에서의 실패는 영국에서 장미 전쟁으로 이어졌고, 토지와 좋은 관직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왕가의 어느 가문이 더 정당한 왕위 계승권을 갖고 있나를 결정하는 전쟁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에드워드 3세는 다섯 명의 공작을 두었다. 에드워드 (콘월 공작), 라이오넬 (클래런스 공작), 존 (랭커스터 공작), 에드먼드 (요크 공작), 토마스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 2세는 그의 아버지 흑태자 에드워드 사후 그의 할아버지 에드워드 3세의 뒤를 이은 어린 왕이었다.

1327년부터 1377년까지 잉글랜드를 통치했던 에드워드 3세는 성년에 이른 다섯 명의 아들을 두었다. 우드스톡의 에드워드 "흑태자", 앤트워프의 라이오넬, 건트의 존, 랭글리의 에드먼드, 그리고 우드스톡의 토마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그는 아들들을 위해 공작령을 세웠다. 1337년 에드워드를 위해 콘월 공작령을, 그리고 1362년 라이오넬을 위해 클래런스 공작령을, 존을 위해 랭커스터 공작령을 세웠다. 1385년, 리처드 2세 통치 기간 동안, 에드먼드는 요크 공작이 되었고, 토마스는 글로스터 공작이 되었다.

그때까지 영국 군주가 신하에게 공작 작위를 수여한 적은 없었다. 1337년 콘월 공작령이 생기기 전까지는 말이다. 공작령의 탄생은 왕위 계승을 주장할 수 있고, 이론적으로는 왕위를 놓고 경쟁할 만한 힘을 가진 강력한 새로운 영국 귀족 계급을 낳았다. 새로운 공작령은 에드워드의 아들들과 그들의 상속인들에게 군주 또는 국가로부터 독립적인 수입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의 개인 군대를 설립하고 유지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러한 공작령들은 소위 "유사봉건제도"에 내재된 구조적 결함을 악화시키기 시작했다. 이는 1885년 역사가 찰스 플러머가 만든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는 용어이지만, 주로 플러머의 동시대 사람인 윌리엄 스터브스에 의해 정의되었다. 에드워드의 할아버지 에드워드 1세 통치 기간 동안, 스터브스는 징병 기반의 봉건적 군역이 군주를 섬기는 귀족들의 군사 봉사에 대한 왕실의 지불 체계로 대체되는 사회 역학의 실질적인 변화를 설명한다. 따라서 봉신들이 소환될 때 군사 봉사를 제공하는 대신, 그들은 자신의 수입의 일부를 영주에게 지불했고, 영주는 고용된 수행원들로 부족한 봉사를 보충했다. 이러한 수행원들은 추종자로 알려져 있었는데, 본질적으로 영주가 봉사를 위해 모은 모든 개인들의 집합체였으며, 유사봉건제도의 가장 근본적인 측면 중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추종자들은 더 강력한 귀족들을 하급 귀족들에게 묶는 수단도 가지고 있었지만, 이러한 관계는 이제 유사봉건제도에 앞서 존재했던 토지 소유 또는 봉건적 관계가 아니라 상호 이익을 보이는 개인적 관계에 의해 크게 정의되었다. 결과적으로 영주들은 추종자들이 그들의 후원자에게 그들의 지위를 빚지고 있었기 때문에 암묵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수행원들을 모을 수 있었다. 이러한 추종자들은 영주가 실제로 알고 있는 사람들의 수보다 훨씬 많았는데, 추종자 구성원들도 서로 알고 서로 지지했기 때문이다.

리처드 2세 통치 기간 동안, 이것은 귀족들의 성장하는 수행원들에 대한 대항마로서 리처드가 자신의 추종자들의 규모를 늘리려고 했기 때문에 귀족들과의 권력 투쟁을 야기했다. 귀족들의 수행원들은 리처드에 대항하여 건트의 존, 그리고 나중에 그의 아들 헨리 볼링브룩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영주의 이익을 군주 권위에 맞서 방어할 만큼 강력해졌다. 전쟁 중에 요크의 리처드 및 워릭 경과 같은 불만을 품은 귀족들은 복잡한 하인 및 수행원 네트워크에 의존하여 헨리 6세의 권위에 성공적으로 도전할 수 있었다.

2. 2. 교황권의 쇠퇴

70여년에 걸친 아비뇽 유수(1309~1378)는 교황의 권위를 더욱 실추시켰다. 클레멘스 5세는 교황 우위에 있어서의 프랑스 시대의 문을 열었다. 영국 왕의 프랑스 신민으로 부르도우의 주교인 클레멘스는 필립 4세의 지지를 받아 교황이 되었다. 그는 보니파시오 8세를 견책했고, 템플 기사단을 정죄하고 결국 해체시켰는데, 이는 그들의 재산을 원했던 필립 4세의 주장에 따른 것이었다. 아비뇽 교황 시대에 교황청의 중앙집권화는 심화하고 교황의 세금은 늘어났다. 건물 경비와 운영비 충당을 위해 기대세, 사례비, 첫 해 수입의 헌납 외에도 성직록의 1/10세, 법정 수수료, 감사 헌금 등으로 세원을 확보했다.

서방대분열(1378~1417)은 40여 년 동안 서방 기독교 세계를 분열시켰다. 각 교황은 서로 다른 계승자를 세우며 분열을 심화시켰다. 경쟁적인 교황에 대한 지지는 국가별로 갈렸다. 아비뇽 교황은 프랑스, 스코틀랜드, 카스티야 및 프랑스 동맹국들의 지지를 받았고, 로마 교황은 영국, 포르투갈, 플란데런, 이탈리아 대부분 지역과 독일의 지지를 받았다. 이는 교황권에 대한 심각한 손상을 초래했으며, 상충하는 교황들과 이중 임명권 행사로 혼란이 가중되었다. 세속 군주들은 자신들에게 의존하는 교황으로부터 새로운 특권을 얻어냈다.

1417년부터 1537년까지 교황은 주로 왕족 출신이거나 인문주의 성향의 성직자들이 맡았다. 이 시대의 교황들은 교회의 물질적, 정신적 회복에 주력했다. 마르티노 5세는 분열을 종식시키고 로마 재건을 시작했다. 에우제니오 4세는 공의회를 바젤에서 페라라, 피렌체, 로마로 옮겨 소집하여 후스파 문제를 해결하고 비잔티움과의 재결합을 시도했다. 니콜라오 5세는 바티칸 도서관을 재건하고 르네상스 예술을 후원했다. 이전의 인문주의자였던 비오 2세는 공의회 지상주의를 비판하는 칙서 Execrabilis(1460)를 발표했다. 식스토 4세와 알렉산데르 6세는 교황으로서 족벌주의 정책을 펼쳤다. 르네상스 시대 교황들은 교황의 권위와 신앙의 수호를 주장하며 선교 활동을 지원하고, 온건한 개혁을 추진하며 르네상스의 여러 긍정적인 면모를 후원했다.

중세 후기에 일어난 혁명적인 이론과 운동은 중세 기독교를 흔들었다. 피에르 뒤부아는 《성지 회복》에서 교회의 영적 우위를 인정하면서도 교회의 세속사에 대한 군주의 통치를 주장했고, 파도바의 마르실리오는 《평화의 수호자》에서 국가와 교회의 권위는 인민의 의지에서 나온다고 주장했다. 그는 교회를 신앙인들의 민주적 연합체로 보고, 인민을 대표하는 공의회가 교황보다 우위에 있으며 교황은 일종의 대표자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공의회 운동은 이러한 사상을 일부 채택하여 교회 헌법에 도전했다. 오컴주의는 기독교의 합리적 기반인 추상적 보편 개념을 부인했고, 신비주의는 직접적인 신과의 경험을 강조하여 교회와 규율을 약화시켰다. 또한 중세 후기의 이단들은 기존의 교회 조직과 관행을 공격했다. 존 위클리프는 성직자들의 부와 사치스러운 생활을 비판하며 교회의 위계 질서, 교황의 우위, 주교의 권위를 부정했다. 그는 성경의 개인적 해석을 주장하고 일부 성례를 거부했다. 위클리프의 추종자들인 롤라드(Lollards)는 그의 교리를 설파했다. 영국에서 위클리프가 활동하는 동안 보헤미아의 존 후스는 위클리프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후스 운동을 일으켰고, 이는 게르만 지배에 대한 민족적 저항으로 발전했다. 후스가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화형당한 후(1415), 후스 전쟁이 발발하여 20여 년간 지속되었다. 당시 교회는 형식적인 효율성을 지나치게 추구했고, 때로는 미신적이거나 염세적인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많은 성인과 축복받은 이들이 이 시대에 살았으며, 당시 많은 사람들이 종교 개혁을 바라고 높은 수준의 신앙생활을 유지했다.

2. 3. 영국의 부 축적 방식의 변화

중세 말 잉글랜드의 부는 토지였으며, 대부분의 영국인들은 토지 경작에 종사했다. 그들은 곡물을 기르고 낙농품을 생산했으며, 가축을 돌보았다. 영국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이었던 직물은 토지에 간접적인 기반을 두고 있었는데, 대규모의 양떼로부터 유럽에서 가장 질 좋은 양모를 생산하고 있었다.

그러나 금융 및 상업 서비스 분야는 당시 경제에 기여하는 바가 미미했다. 에드워드 1세에드워드 3세는 이탈리아 회사에 진 전쟁 채무 변제를 늦추기도 했다. 헐 출신의 라 포울 가문을 제외하면 런던에 지점을 둔 이탈리아 국제 은행가들과 경쟁할 수 있는 영국 상인은 거의 없었다. 영국 상선은 연안을 제외하고는 외국 선박 운송에 밀리고 있었다. 하지만 가스코뉴의 포도주와 모직물을 저지대 국가로 해상 운송하는 것은 점차 영국 상인과 선박이 장악하게 되었다.

촌락 주변에 흩어진 시장과 장의 숫자가 많아졌고, 소규모 도시와 촌락 대부분이 시골 배후지와 통합되었다. 부유한 주민들은 길드에 가입하고 도시 주택을 사거나 임대하여 도시 관직을 차지하는 등 도시 생활에서 역할을 수행했다. 일부 항구를 포함한 소수의 도시는 더 커졌고, 더 넓은 사업권을 가졌다.

이러한 부를 둘러싸고 개인, 단체, 국왕 간 분쟁이 발생했다. 최대 지주는 속인 대영주, 주교, 수도원 및 기타 종교 단체였다. 1300년대에 그들은 이전 세기의 인구 팽창으로 창출된 시장 붐을 통해 상당한 이득을 얻고 있었고, 물가가 오르고 토지 수입이 상당했다. 영주들은 영지를 직접 경영하며 효율적인 경영에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토지 보유 농민에게 높은 지대를 부과하고, 장원 법정에서 보유지에 부과한 의무를 세심하게 기록하는 등 가능한 한 권리를 주장했다. 이러한 토지 재산이 귀족의 정치적, 행정적, 사회적 영향력의 토대였다.

국왕은 모든 이들 중 최대 지주였다. 에드워드 1세가 웨일스 공국을 획득하고 1399년에 랭커스터 가문의 영지가 왕령지에 통합되기 이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에드워드 1세와 그의 계승자들은 세금 증가를 통해 개인 토지 소유주와 상인으로부터 부를 얻을 수 있었다. 특히 전쟁이라는 최우선 사업을 위해 국왕은 신민의 재산과 인내심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신민의 부가 성장을 멈추거나 개인과 단체의 번영이 위축된다면, 국왕이 수행해야 하는 비상한 임무는 결국 그가 택할 수 있는 수단의 한계를 넘어설 것이고, 신민의 인내심도 한계에 다다를 것이었다.

14세기 중엽에 이르러 번영했던 집약 농업 시대는 저물어갔다. 물가는 내리고 시장을 위한 경작도 수익이 줄었다. 임금은 오르고 있었는데, 수공업자보다 농업 노동자의 임금이 더 올랐다. 대규모 농업 경영이 매력을 잃은 주요 이유는 인구 붐이 끝나고 급속한 인구 하락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흉작과 흑사병, 빈곤, 기아, 사망률 상승이 노동자 수를 줄게 하자 임금이 올랐다. 인구가 줄자 식품과 식량에 대한 수요가 줄었고 물가도 하락했다.

끔찍한 죽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14세기 말과 15세기 동안의 삶은 이전과는 달라졌다. 많은 농민에게 그 때는 기회와 야망, 풍요의 시대가 되었다. 농민들은 축소된 노동 시장에서 수 세기 동안의 어려움을 떨쳐내고 지대를 낮추도록 압력을 가할 수 있었으며, 더 나은 임금을 요구할 수 있었다. 물가 폭락과 함께 그들의 생활 수준도 향상되었다. 성공적이고 야심 찬 농민들은 새로운 토지를 임차했고, 여분의 현금을 동료들에게 대부하는 방식으로 투자했다. 반면 토지 소유자들은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했다. 밀과 양모 및 기타 상품의 시장 생산에서 수익이 줄었고, 잉글랜드의 경작지 면적이 축소되었으며, 농업 투자가 줄어들었다. 임금과 다른 비용이 올랐으며, 번성하는 농민들에게 임대지로 임대하기 위해 집약 농업 기술을 포기하는 것이 현명해 보였다. 토지 소유자들은 고통스럽게 이에 적응해야 했으며 여러 가지 반응을 보였다.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교회 영주를 포함한 일부 영주들은 남아있는 보유 농민에 대해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해 고압적인 방법을 사용했고, 심지어 억압과 강탈을 자행했다. 일부 영주들은 수입을 유지하기 위해 영지를 무자비하게 수탈했다. 또 다른 영주들은 15세기 후반에 영지의 수익성을 개선하기 위해 더욱 효과적인 경영법을 채택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은 방목과 경작을 위해 들과 공동지를 인클로저하는 것이 불안정한 지대를 보강하는, 비용이 적게 들며 대안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인클로저는 15세기 후반에 특히 북부와 서부에서 활발히 진행되었다. 대소 영주들은 모두 게으르고 흑사병 이후 추가 임금 없이는 일하려 하지 않는 피고용자들의 행태를 억제하기 위해 행동했다. 임금을 흑사병 이전 수준으로 되돌리고 해방된 노동력의 유동을 억제하기 위해 에드워드 3세가 공포한 왕령(1349)은 재빨리 의회 제정법으로 바뀌었다. 더욱이 상당한 지위에 있던 대영주나 젠틀맨에게는 토지와 돈, 가문 상속, 많은 재산을 가진 상속녀나 부유한 미망인과의 결혼 등 보충적인 부의 원천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특히 전쟁 시 국왕에게 봉사함으로써 전쟁 수익으로 번영했다.

3. 원인

"장미 전쟁"은 플랜태저넷 왕가의 두 경쟁 가문인 요크 가문과 랭커스터 가문이 잉글랜드 왕좌를 놓고 벌인 싸움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이 명칭은 두 가문의 문장 배지인 요크의 백장미와 랭커스터의 홍장미에서 유래되었다[1]. "두 장미 사이의 다툼"이라는 표현은 1727년 비빌 히건스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고, 데이비드 흄도 그의 저서 『잉글랜드 역사』에서 이를 언급했다[1].

"장미 전쟁"이라는 용어는 1829년 월터 스콧의 소설 『기어르슈타인의 앤』이 출판된 후 19세기 초에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스콧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헨리 6세 1부』(2막 4장)의 한 장면에서 영감을 받아 이 이름을 지었다. 셰익스피어 시대에는 이 갈등을 단순히 "내전"이라고 불렀다.

요크가는 전쟁 초기에 백장미를 상징으로 사용했지만, 랭커스터의 홍장미는 1485년 보스워스 필드 전투에서 헨리 튜더가 승리한 후에야 도입되었다. 헨리가 승리하고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한 후, 두 장미는 결합되어 튜더 장미가 되었고, 이는 두 가문의 통합을 상징했다.

경쟁 가문의 이름은 각각 요크와 랭커스터에서 유래했지만, 해당 공국공작령은 이 도시들과 관련이 거의 없었다. 역사학자들은 전쟁의 주요 원인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에드워드 3세 사후 왕위 계승 문제는 장미 전쟁의 근본 원인으로 지목된다. 에드워드 3세의 계승은 확실해 보였지만, 그의 치세 말년에 "직계 계승자의 갑작스러운 축소"가 있었다. 흑태자 에드워드와 클래런스 공작 라이오넬이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하면서 왕위 계승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졌다.

장자 상속제에 따르면, 리처드 2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 그의 계승자는 클래런스 공작 라이오넬의 후손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1376년 에드워드 3세가 발표한 법령은 계승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었는데, 그가 발표한 칙허장은 계승권을 그의 남계로 제한했기 때문에, 존 오브 곤트가 클래런스의 후손보다 앞서게 되었다.

1455년 5월, 요크 공 리처드가 헨리 6세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이후, 1485년 튜더 왕조가 성립될 때까지 플랜태저넷 가문의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 사이에서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 요크 가문과 랭커스터 가문은 모두 에드워드 3세의 혈통을 이은 가문이었다.

랭커스터 가문은 붉은 장미를, 요크 가문은 흰 장미를 사용했기 때문에 장미 전쟁이라고 불리지만, 이 명칭은 후대에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백년 전쟁 중에, 랭커스터 가문은 플랜태지넷 왕조를 무너뜨리고 랭커스터 왕조를 세웠다. 1422년, 헨리 5세가 사망하고, 9개월 된 헨리 6세가 잉글랜드 왕에 즉위했다.

1430년대 이후, 프랑스에서 온 왕비 마거릿 앤주와 에드먼드 보퍼트를 비롯한 국왕 측근의 평화파(랭커스터파)와 요크 공 리처드를 중심으로 한 주전파(요크파)가 권력 투쟁을 벌이게 되었다. 잉글랜드는 백년 전쟁에서 패배했고, 헨리 6세는 정신 착란을 일으켜 투쟁을 수습하지 못했다. 양 가문은 대립을 심화시켰고, 1455년 제1차 세인트 올번스 전투에서 전쟁이 발발했다. 이후 30년 동안 내전이 잉글랜드 전역에서 벌어졌다.

3. 1. 역사적 기원

플랜타지넷 왕가는 프랑스의 앙주에서 시작되었으며, 1154년 헨리 2세가 즉위하면서부터 1485년 리처드 3세가 사망할 때까지 영국 왕좌를 차지했다.[325][326][327][328] 플랜타지넷 왕가의 왕들은 왕권을 제한하는 대헌장과 같은 협상을 진행해야 했다. 왕은 더 이상 절대 군주로 간주되지 않았고, 국가는 사법 제도에 의해 운영되었다. 프랑스, 스코틀랜드, 웨일스, 아일랜드와의 갈등과 영어를 기본 언어로 설정함으로써 국가적 정체성이 형성되었다.

14세기에 플랜타지넷가는 백년 전쟁에서 패하고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인 위기에 직면했다. 민중의 반란이 빈번하게 발생했고, 영국 귀족들은 용병을 사들여 헨리 6세를 위협했다.

이러한 혼란한 시기에 플랜타제넷가는 가문 내 분열이 발생했다. 요크 가문과 랭커스터 가문은 각각 지리적 기반을 두고 경쟁하며 장미 전쟁을 일으켰고, 영국 왕위 계승을 위한 싸움이 벌어졌다.

"장미 전쟁"은 잉글랜드 왕좌를 놓고 싸운 플랜태저넷 왕가의 두 가문과 관련된 문장 배지, 즉 요크의 백장미와 랭커스터의 홍장미를 가리킨다.[1] 1727년 비빌 히건스가 "두 장미 사이의 다툼"을 묘사하면서 사용되었고, 데이비드 흄도 『잉글랜드 역사』에서 언급했다.[1]

"장미 전쟁"이라는 용어는 1829년 월터 스콧의 소설 『기어르슈타인의 앤』이 출판된 후 19세기 초에 일반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스콧은 템플 교회 정원을 배경으로 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헨리 6세 1부』(2막 4장)의 한 장면을 바탕으로 이 이름을 지었다. 셰익스피어 시대에는 이 갈등은 단순히 "내전"으로 불렸다.

요크가는 갈등 초기에 백장미 상징을 사용했지만, 랭커스터의 홍장미는 1485년 보스워스 필드 전투에서 헨리 튜더가 승리한 후에야 도입되었다. 헨리가 승리하고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한 후, 두 장미는 결합되어 튜더 장미가 되어 두 가문의 연합을 상징했다. 장미 자체를 인식표로 사용한 것은 에드워드 1세가 "적절하게 줄기가 달린 금장미"를 사용한 데서 유래했다. 귀족들은 여러 작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 이상의 배지를 사용했다. 예를 들어, 에드워드 4세는 마치 백작으로서의 태양을 사용했지만, 그의 아버지의 매와 족쇄(요크 공작으로서의)도 사용했다. 바넷 전투에서 에드워드의 '태양'은 옥스퍼드 백작의 베어 별과 매우 유사하여 혼란을 야기했다.

많은 참가자들은 그들의 영주 또는 후원자와 관련된 리버리 배지를 착용했다. 보즈워스 전투에서 헨리 튜더의 군대는 붉은 용 깃발 아래에서 싸웠고, 요크 가문 군대는 리처드 3세의 문장인 흰 멧돼지를 사용했다.

경쟁 가문의 이름은 각각 요크와 랭커스터에서 유래했지만, 해당 공국공작령은 이 도시들과 관련이 없었다. 랭커스터 공국에 딸린 토지와 직책은 주로 글로스터셔, 북웨일스, 체셔 및 요크셔에 위치해 있었고, 요크 공작의 영지는 잉글랜드와 웨일스 전역에 걸쳐 있었다.

역사학자들은 전쟁의 주요 원인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요크 가문은 에드워드 3세의 네 번째 아들인 랭글리의 에드먼드와 그의 동생인 곤트의 존의 후손이었다. 가문의 이름은 1385년 조카인 리처드 2세 통치 시절 랭글리가 얻은 요크 공작 작위에서 유래한다.[6] 요크 가문의 왕위 계승 주장은 랭커스터 가문과 달리 클래런스 공작 라이오넬의 후손인 여성 계승권에 기반을 두었다. 랭글리의 둘째 아들인 코니스버러의 리처드는 마치 백작 로저 모티머의 딸이자 마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의 누이인 앤 드 모티머와 결혼하였다. 앤의 할머니인 클래런스의 필리파는 안트워프의 라이오넬의 딸이었다. 14세기 동안 모티머 가문은 왕국에서 가장 강력한 웨일스 변경백 가문이었다.

에드워드 3세 사후 왕위 계승 문제는 장미 전쟁의 근본 원인이라고 한다. 에드워드 3세의 계승은 확실해 보였지만, 그의 치세 말년에 "직계 계승자의 갑작스러운 축소"가 있었다. 에드워드 3세의 두 아들, 흑태자 에드워드와 클래런스 공작 라이오넬은 각각 1376년과 1368년에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다. 에드워드 3세는 왕위 계승에 대한 주장을 가진 세 아들을 남겼다: 랭커스터 공작 존 오브 곤트, 요크 공작 에드먼드, 그리고 글로스터 공작 토마스.

흑태자는 리처드 2세를 두었는데, 그는 상속인의 아들이 삼촌보다 왕위 계승 순위에서 우선한다는 원칙에 따라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다. 따라서 리처드는 그의 삼촌들인 존, 에드먼드, 토마스보다 왕위 계승에 대한 더 우선적인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리처드는 미성년자였고, 형제가 없었으며, 그의 세 명의 삼촌들은 정치적으로 강력하고 야심 차 있었기 때문에, 누가 왕위를 계승해야 하는지에 대해 왕국 내에 상당한 불확실성이 있었다. 결국 에드워드 3세는 그의 손자인 리처드 2세에게 왕위를 계승했는데, 그는 겨우 10살에 왕위에 올랐다.

장자 상속제에 따르면, 리처드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 그의 계승자는 에드워드 3세의 둘째 아들인 안트워프의 라이오넬 클래런스 공작의 후손이 될 것이다. 클래런스의 외동딸인 얼스터 백작 부인 필리파는 모티머 가문과 결혼하여 아들 마치 백작 로저 모티머를 두었는데, 그는 기술적으로 가장 좋은 법적 계승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376년 에드워드 3세가 발표한 법령은 계승 문제에 복잡성을 더했는데, 그가 발표한 칙허장은 계승권을 그의 남계로 제한했기 때문에, 존 오브 곤트가 클래런스의 후손보다 앞서게 되었다.

1455년 5월, 요크 공 리처드가 헨리 6세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이후, 1485년 튜더 왕조가 성립될 때까지 플랜태지넷 가문의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 사이에서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 요크 가문과 랭커스터 가문은 모두 에드워드 3세의 혈통을 이은 가문이었다.

랭커스터 가문이 붉은 장미를, 요크 가문이 흰 장미를 사용했기 때문에 장미 전쟁이라고 불리지만, 이 명칭은 후대에 붙여진 것이다.

백년 전쟁 중에, 랭커스터 가문은 플랜태지넷 왕조를 무너뜨리고 랭커스터 왕조를 세웠다. 1422년, 헨리 5세가 사망하고, 9개월 된 헨리 6세가 잉글랜드 왕에 즉위했다.

1430년대 이후, 프랑스에서 온 왕비 마거릿 앤주와 에드먼드 보퍼트를 비롯한 국왕 측근의 평화파(랭커스터파)와 요크 공 리처드를 중심으로 한 주전파(요크파)가 권력 투쟁을 벌이게 되었다. 잉글랜드는 백년 전쟁에서 패배했고, 헨리 6세는 정신 착란을 일으켜 투쟁을 수습하지 못했다. 양 가문은 대립을 심화시켰고, 1455년 제1차 세인트 올번스 전투에서 전쟁이 발발했다. 이후 30년 동안 내전이 잉글랜드 전역에서 벌어졌다.

요크 가문은 권력을 장악하지만, 마거릿 앤주가 이끄는 랭커스터 가문의 반격을 받아 요크 가문이 궁지에 몰리자 1459년 전쟁이 재개되었다. 1460년 노섬프턴 전투에서 요크 가문이 승리하여 헨리 6세를 사로잡고, 요크 공은 왕위를 눈앞에 두지만, 스코틀랜드의 지원을 받은 마거릿 왕비의 반격을 받아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전사한다. 1461년, 마거릿 왕비는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을 무찌르고 헨리 6세를 탈환하지만, 런던 점령에는 실패한다. 요크 공의 장남 에드워드 4세가 워릭 백작과 합류하여 런던에 입성하고, 새로운 국왕 에드워드 4세로 추대되어 요크 왕조가 성립했다. 토턴 전투에서 요크 가문이 대승하여 내전의 승패가 결정되었다. 1465년에는 헨리 6세도 잡혀 감금되었다.

에드워드 4세는 평민 출신인 엘리자베스 우드빌과의 결혼을 강행하고, 우드빌 일족을 중용하는 등 독단적인 행동을 하여 워릭 백작의 반역을 불렀다. 1469년 워릭 백작은 왕의 동생인 클라렌스 공 조지와 함께 반란을 일으켜 에드워드 4세를 일시적으로 복종시키지만, 이듬해 1470년 에드워드 4세가 그들을 반역자로 선포하자 해외 망명을 강요받았다.

워릭 백작은 마거릿 앤주와 화해하여 랭커스터 가문과 손을 잡고, 잉글랜드에 상륙하여 에드워드 4세를 해외로 몰아내고, 헨리 6세를 복위시켰다. 그러나 에드워드 4세는 매제인 부르고뉴 공작 샤를의 지원을 받아, 이듬해 1471년 잉글랜드를 공격하여, 배럿 전투에서 워릭 백작을 죽이고, 튜크스베리 전투에서 랭커스터 군을 격파하여 마거릿 왕비를 사로잡았다. 헨리 6세와 에드워드 왕자는 살해되었고, 랭커스터 가문의 왕위 계승자는 거의 멸절되었다.

1483년 에드워드 4세가 급사하자, 왕의 동생인 글로스터 공 리처드는 에드워드 4세의 어린 아들 에드워드 5세와 모후 엘리자베스 우드빌 일족을 제거하고, 귀족과 시민들의 추대를 받아 리처드 3세로 즉위한다. 리처드 3세의 즉위에 반대하는 세력에 의해 국내는 다시 혼란에 빠졌다. 프랑스에 망명했던 랭커스터 가문의 리치몬드 백작 헨리 튜더는 1485년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에 상륙하여, 보즈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를 격파했다.

헨리 튜더는 헨리 7세로 즉위하여 엘리자베스 요크와 결혼하여 요크 가문과 화해하고, 튜더 왕조를 열었다.

존 오브 곤트, 랭커스터 가문의 창시자


요크 공작 에드먼드(Edmund of Langley), 요크 가문의 창시자


3. 2. 유사봉건제도 (Bastard Feudalism)

에드워드 3세는 다섯 명의 공작을 두었다. 에드워드 (콘월 공작령), 라이오넬 (클래런스 공작령), 존 (랭커스터 공작령), 에드먼드 (요크 공작령), 토마스 (글로스터 공작령)

리처드 2세는 그의 아버지 흑태자 에드워드 사후 그의 할아버지 에드워드 3세의 뒤를 이은 어린 왕이었다.

1327년부터 1377년까지 잉글랜드를 통치했던 에드워드 3세는 슬하에 우드스톡의 에드워드 "흑태자", 앤트워프의 라이오넬, 건트의 존, 랭글리의 에드먼드, 그리고 우드스톡의 토마스 총 5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는 통치 기간 동안 아들들을 위해 공작령을 세웠는데, 1337년 에드워드를 위해 콘월 공작령[3], 1362년 라이오넬을 위해 클래런스 공작령[4], 존을 위해 랭커스터 공작령[5]을 세웠다. 리처드 2세의 통치 기간인 1385년에는 에드먼드와 토마스가 각각 요크 공작[6]과 글로스터 공작이 되었다.[4]

영국 군주가 신하에게 공작 작위를 수여한 것은 1337년 콘월 공작령이 처음이었다. 공작령의 탄생은 왕위 계승을 주장할 수 있는 강력한 새로운 영국 귀족 계급을 탄생시켰고, 이론적으로는 왕위를 놓고 경쟁할 만한 힘을 가질 수 있었다. 새로운 공작령은 에드워드 3세의 아들들과 그들의 상속인들에게 군주나 국가로부터 독립적인 수입을 제공했기 때문에[7] 자체적인 사병을 설립하고 유지할 수 있었다.[8]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공작령들은 소위 "유사봉건제도(Bastard Feudalism)"에 내재된 구조적 결함을 악화시키기 시작했다. "유사봉건제도"는 1885년 역사가 찰스 플러머가 만든 용어로, 그의 동시대 사람인 윌리엄 스터브스에 의해 정의되었다. 스터브스는 에드워드 1세 통치 기간 동안 징병 기반의 봉건적 군역이 군주를 섬기는 귀족들의 군사 봉사에 대한 왕실의 지불 체계로 대체되는 사회 역학의 실질적인 변화를 설명했다. 즉, 봉신들이 소환될 때 군사 봉사를 제공하는 대신, 수입의 일부를 영주에게 지불하고, 영주는 고용된 수행원들로 부족한 봉사를 보충했다. 이러한 수행원들은 영주가 봉사를 위해 모은 모든 개인들의 집합체인 "추종자"로 알려져 있었으며, 유사봉건제도의 가장 근본적인 측면 중 하나가 되었다.[9] 이러한 추종자들은 더 강력한 귀족들을 하급 귀족들에게 묶는 수단이 되기도 했지만, 이러한 관계는 이제 유사봉건제도에 앞서 존재했던 토지 소유 또는 봉건적 관계가 아니라 상호 이익을 보이는 개인적 관계로 정의되었다.[10] 결과적으로 영주들은 추종자들이 후원자에게 지위를 빚지고 있었기 때문에 암묵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수행원들을 모을 수 있었다.[11] 이러한 추종자들은 영주가 실제로 알고 있는 사람들의 수보다 훨씬 많았는데, 추종자 구성원들도 서로 알고 서로 지지했기 때문이다.[12]

리처드 2세 통치 기간 동안, 귀족들의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리처드는 자신의 추종자 규모를 늘려 이에 대응하려 했고, 이는 귀족들과의 권력 투쟁으로 이어졌다. 귀족들의 수행원들은 리처드에 대항하여 건트의 존, 그리고 그의 아들 헨리 볼링브룩처럼 영주의 이익을 군주 권위에 맞서 옹호할 만큼 강력해졌다.[8][9] 장미 전쟁 중 요크의 리처드 및 워릭 경과 같이 불만을 품은 귀족들은 복잡한 하인 및 수행원 네트워크에 의존하여 헨리 6세의 권위에 성공적으로 도전할 수 있었다.[13]

3. 3. 두 가문의 상반된 왕위 계승권 주장

요크 가문은 에드워드 3세의 네 번째 아들인 랭글리의 에드먼드의 후손이다. 가문의 이름은 1385년 에드먼드가 요크 공작 작위를 받은 데서 유래한다.[6]. 요크 가문의 왕위 계승권 주장은 랭커스터 가문과는 달리, 클래런스 공작 라이오넬의 후손인 여성 계승권에 기반을 두고 있다. 랭글리의 둘째 아들인 코니스버러의 리처드는 마치 백작 로저 모티머의 딸 앤 드 모티머와 결혼했는데, 앤의 할머니인 클래런스의 필리파는 안트워프의 라이오넬의 딸이었다. 14세기 동안 모티머 가문은 웨일스 변경백 가문 중 가장 강력했다.

한편, 랭커스터 가문은 에드워드 3세의 세 번째 아들인 곤트의 존의 후손이다. 곤트는 랭커스터 공작이라는 칭호에서 유래했으며, 그의 배우자인 랭커스터의 블랑쉬의 권리로 이 이름을 사용하게 됐다. 랭커스터 가문의 왕위 계승권 주장은 에드워드 3세의 세 아들 중 곤트의 존이 남성 혈통을 강조한 우선권을 가진다는 것이다.

1460년, 요크 공작 리처드는 자신이 랭커스터 가문보다 형인 라이오넬 오브 안트워프의 자손이라는 것을 근거로, 더 우위에 있는 왕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문서를 귀족원에 보냈다[220]. 의회는 논의 끝에 합의령(Act of Accord)을 통해 요크 공작을 헨리 6세의 왕위 계승자로 인정하고, 헨리 6세의 아들 에드워드 왕자의 계승권을 박탈했다[221].

3. 3. 1. 랭커스터 가문의 주장

랭커스터 가문은 에드워드 3세의 세 번째 아들인 곤트의 존의 후손이다. 곤트가 랭커스터 공작이라는 칭호에서 유래했으며, 그의 배우자인 랭커스터의 블랑쉬의 권리로 이 이름을 사용하게 됐다. 왕좌에 대한 랭커스터 가문의 주장은 남성 혈통을 강조한 에드워드 3세로부터 우선권을 받았다는 것이다.[344] 헨리 4세리처드 2세를 퇴위시키고 이후 왕위를 물려받을 권리를 이 주장에 근거했다[345]. 한편 라이오넬, 클라렌스 공작, 모티머는 그의 할머니인 필리파로부터 소유권을 물려받아 여성 계통의 후손이었다. 랭커스터 가문의 중요한 분파는 보퍼트 가문이었는데, 그의 외가인 캐서린 스윈포드의 후손인 곤트 가문의 후손이었다. 원래는 사생아였으나, 곤트와 캐서린이 결혼했을 때 의회법에 의해 합법화되었지만 헨리 4세는 그들의 왕위 계승에서 제외시켰다[346].

1459년 9월 23일, 랭커스터 군은 요크셔의 미들함 성에서 러들로 성으로 향하던 솔즈베리 백작의 군대를 스태퍼드셔의 블로어 히스 전투에서 맞서 싸웠으나 패배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인 10월 12일, 합류한 요크 군은 래드퍼드 브리지 전투에서 수적으로 우세한 랭커스터 군과 대결한다. 전투는 워릭 백작이 칼레 수비대에서 파견한 앤드류 트롤로프 부대가 배신했기 때문에 요크 군의 패배로 끝났다.[203] 요크 공작은 아일랜드로 돌아갔고, 장남인 마치 백작 에드워드, 솔즈베리 백작, 그리고 워릭 백작은 칼레로 도망쳤다.[212]

랭커스터 측이 주도권을 되찾았고, 요크 공작과 그의 지지자들은 반역죄로 몰려 영지와 작위를 빼앗겼으며, 요크 공작과 그의 자손의 왕위 계승권도 박탈되었다.[213] 서머싯 공작이 칼레를 탈환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워릭 백작은 칼레를 지켜냈다.[210] 1460년 1월부터 6월까지, 워릭 백작은 칼레에서 잉글랜드 해안을 역습하여 왕실군에 타격을 입혔다.[214] 3월, 워릭 백작은 요크 공작과 작전을 협의하기 위해 칼레를 떠나, 엑세터 공작이 이끄는 왕실 함대를 피해 아일랜드로 건너갔다.[215][210]

1460년 6월, 솔즈베리 백작과 워릭 백작 그리고 마치 백작 에드워드가 해협을 건너 샌드위치에 상륙했고, 워릭 백작 휘하에 병사들이 모여 7월에 런던탑을 제외한 런던 시가지를 장악했다.[216] 코벤트리에 있던 국왕과 왕비는 군대를 소집했고, 요크 측에 대항하기 위해 헨리 6세의 군대는 남하했으며, 마가렛 왕비는 에드워드 왕자와 함께 코벤트리에 남았다.[216] 7월 10일의 노샘프턴 전투에서 워릭 백작은 그레이 경의 배신으로 랭커스터 군을 격파할 수 있었다.[216] 이 전투에서 랭커스터 측의 버킹엄 공작험프리 스태퍼드, 슈루즈베리 백작, 에글리몬트 경, 보몬트 경 등이 전사했다. 헨리 6세는 다시 요크 측에 붙잡혔고, 그는 정신적으로 이상이 있는 모습이었다. 국왕을 손에 넣은 요크 측은 런던으로 개선했다.

이 군사적 성공을 발판 삼아, 요크 공작 리처드는 랭커스터 가계의 불법성을 근거로 왕위 계승권 주장에 나섰다. 웨일스에 상륙한 요크 공작과 그의 아내 세실리는 국왕과 같은 형식으로 런던에 입성했다.[217] 10월에 열린 의회에서 요크 공작은 왕좌를 차지하려 했지만 저지당했고,[218] 왕위 계승권을 선언했지만, 귀족들, 솔즈베리 백작과 워릭 백작조차도 헨리 6세에 대한 충성 의무를 버리지 않고 요크 공작에 동조하려 하지 않았다.[219]

요크 공작은 자신이 랭커스터 가문보다 형인 라이오넬 오브 안트워프의 자손이라는 것을 근거로 더 우위에 있는 왕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문서를 귀족원에 보내 거듭 왕위를 요구했다.[220] 의회에서의 긴 논의 끝에, 타협안인 「합의령」(Act of Accord)이 성립했다. 요크 공작이 헨리 6세의 왕위 계승자로 인정받았고, 6세의 에드워드 왕자의 계승권은 배제되었다.[221] 이 합의는 그에게 요구했던 대부분을 주었고, 그는 보호령이 되어 헨리 6세의 이름 아래 전국을 지배할 수 있었다.



마가렛 왕비와 에드워드 왕자는 여전히 랭커스터파의 세력권이었던 북부 웨일스로 도망쳤다. 그 후, 그들은 해로 스코틀랜드로 건너가 원조를 요청했다.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2세의 왕비 메리는 군대를 빌려주는 조건으로 베릭의 할양과 메리 공주와 에드워드 왕자의 약혼을 제시했다. 마가렛 왕비는 이 조건을 받아들였지만, 그녀에게는 병사들에게 급여를 지불할 재산이 없어 남잉글랜드에서의 약탈을 허락했다.[223]

마가렛 왕비의 군대는 요크셔를 제압했고, 그녀에게 랭커스터파가 집결했다.[216] 1460년 말에, 요크 공작 리처드는 솔즈베리 백작과 함께 북부의 랭커스터 군을 치기 위해 런던을 출발했다. 12월 21일에 요크 공작은 웨이크필드 근교의 에 들어갔지만, 마가렛 왕비의 군세는 요크 공작의 4배에 달했고, 그는 원군을 기다리며 성에 머물렀지만, 랭커스터군은 이를 포위하여 식량 보급을 차단했다.[224] 12월 30일에 요크 공작은 성을 나서 랭커스터군에 야전을 걸었다. 웨이크필드 전투는 랭커스터군의 승리로 끝났고, 요크 공작과 17세의 차남인 럿랜드 백작 에드먼드가 전사했고, 솔즈베리 백작은 붙잡혀 참수되었다.[225] 마가렛 왕비는 요크 공작의 목에 종이 왕관을 씌운 후, 그들의 목을 요크의 성문에 내걸었다.[226][217]

웨이크필드 전투의 결과, 전사한 요크 공작 리처드의 장남이자 18세의 머치 백작 에드워드가 요크 공작위와 합의령에 근거한 왕위 계승권을 계승하게 되었다. 그는 웨일스 국경 지방의 친요크파 군세를 모아 1461년 2월 2일, 웨일스에 침공해 온 오웬 튜더, 펜브룩 백작 재스퍼 튜더 부자와 윌트셔 백작 제임스 버틀러가 이끄는 랭커스터군을 헤리퍼드셔 근처의 모티머스 크로스에서 맞섰다. 이 전투 전에 그는 새벽에 보인 세 개의 태양(환일 현상으로 알려짐)을 요크 공작 리처드의 살아남은 세 아들(자신, 조지, 리처드)의 구현으로 여기며, 승리의 전조라고 말하며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았다.[227] 이것을 기념하여 에드워드는 후에 태양의 광채를 자신의 헤럴딕 배지(기장)에 넣었다. 전투는 요크군의 승리로 끝났고, 요크 공작 에드워드는 오웬 튜더를 처형했다.

한편, 요크 공작 리처드를 죽인 마가렛 왕비의 랭커스터군은 남잉글랜드에서 약탈 행위를 하면서 왕을 되찾기 위해 남하를 계속했다.[228] 워릭 백작은 이것을 요크파에 대한 지지를 강화하기 위한 선전에 이용했고, 코벤트리 시는 요크파로 돌아섰다. 워릭 백작의 군대는 교통의 요충지인 세인트 올번스 북쪽에 진지를 구축했지만, 적군에게 수적으로 열세였고, 마가렛 왕비군은 서쪽으로 우회하여 그의 군세를 뒤에서 공격했다.[228] 2월 17일의 제2차 세인트 올번스 전투는 랭커스터군의 압승으로 끝났다. 요크군은 헨리 6세를 버리고 궤멸했고, 국왕은 도시의 한 집에서 발견되었다.[228]

전투 후, 헨리 6세는 30명의 랭커스터군 병사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했다. 마가렛 왕비는 6세인 에드워드 왕자에게 요크군 기사(헨리 6세의 경호원으로 전투 내내 그에게 따라다녔음)의 처형 방법을 결정하게 했다.

랭커스터군의 남잉글랜드에서의 약탈 행위로 런던 시민들은 공황 상태에 빠졌고, 랭커스터파의 위신은 추락했다.[229] 마가렛 왕비는 런던의 항복 협상을 시도했지만, 시민들은 성문을 닫고 국왕과 왕비의 입성을 거부했다.[223]

3. 3. 2. 요크 가문의 주장

요크 가문은 에드워드 3세의 넷째 아들 랭글리 에드먼드의 후손이다. 요크 가문이라는 이름은 에드먼드가 요크 공작이라는 칭호를 받은 데서 비롯되었다[347]. 요크 가문의 왕위 계승권 주장은 랭커스터 가문과는 다르게, 클라렌스 공작 라이오넬의 후손인 여성 혈통에 기반을 두고 있다. 랭글리의 둘째 아들 코니스버그의 리처드는 로저 모티머의 딸 앤 디 도티머와 결혼했는데, 앤의 할머니인 클라랜스의 필리파는 앤트워프 라이오넬의 딸이었다. 14세기에는 모티머 가문이 웨일스 국경 지방에서 가장 강력한 귀족 가문이었다[348]. 트레블리언은 장미 전쟁이 영국 왕좌와 밀접하게 관련된 귀족들, 특히 웨일스 국경에 근거지를 둔 귀족들 간의 싸움이었다고 설명한다[349].

요크 공작은 네빌 가문을 웨일스 경계 지방의 러들로 성에 모았다. 1459년 9월 23일, 랭커스터 군은 요크셔의 미들함 성에서 러들로 성으로 향하던 솔즈베리 백작의 군대를 스태퍼드셔의 블로어 히스 전투에서 막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 후 10월 12일, 요크 군은 래드퍼드 브리지 전투에서 수적으로 우세한 랭커스터 군과 싸웠지만, 워릭 백작이 칼레 수비대에서 파견한 앤드류 트롤로프 부대의 배신으로 패배했다[203]. 요크 공작은 아일랜드로, 그의 아들 마치 백작 에드워드, 솔즈베리 백작, 워릭 백작은 칼레로 도망쳤다[212].

랭커스터 가문이 다시 주도권을 잡으면서 요크 공작과 그의 지지자들은 반역죄로 몰려 영지와 작위를 잃었고, 요크 공작과 그의 후손들은 왕위 계승권도 박탈당했다[213]. 서머싯 공작이 칼레를 되찾으려 했지만, 워릭 백작이 칼레를 지켜냈다[210]. 1460년 1월부터 6월까지 워릭 백작은 칼레에서 잉글랜드 해안을 공격해 왕실군에 타격을 입혔다[214]. 3월에는 요크 공작과 작전을 논의하기 위해 칼레를 떠나 엑세터 공작이 이끄는 왕실 함대를 피해 아일랜드로 갔다[215][210].

1460년 6월, 솔즈베리 백작, 워릭 백작, 마치 백작 에드워드가 샌드위치에 상륙했고, 워릭 백작 휘하에 병사들이 모여 런던탑을 제외한 런던 시가지를 장악했다[216]. 코벤트리에 있던 헨리 6세와 왕비는 군대를 소집해 요크 가문에 맞서 싸우려 했고, 헨리 6세의 군대는 남하했지만 마가렛 왕비는 에드워드 왕자와 함께 코벤트리에 남았다[216]. 7월 10일 노샘프턴 전투에서 워릭 백작은 그레이 경의 배신 덕분에 랭커스터 군을 격파할 수 있었다[216]. 이 전투에서 랭커스터 가문의 버킹엄 공작험프리 스태퍼드, 슈루즈베리 백작, 에글리몬트 경, 보몬트 경 등이 전사했고, 헨리 6세는 다시 요크 가문에 붙잡혔다.

이 군사적 성공을 바탕으로 요크 공작 리처드는 랭커스터 가문의 불법성을 근거로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다. 웨일스에 상륙한 요크 공작과 그의 아내 세실리는 국왕처럼 런던에 입성했다[217]. 10월 의회에서 요크 공작은 왕좌를 차지하려 했지만 실패했고[218], 왕위 계승권을 선언했지만 귀족들은 헨리 6세에 대한 충성 의무를 버리지 않았다[219].

요크 공작은 자신이 랭커스터 가문보다 형인 라이오넬 오브 안트워프의 자손이라 왕위 계승권이 더 앞선다는 주장을 귀족원에 보냈다[220]. 의회 논의 끝에 합의령(Act of Accord)이 성립되어 요크 공작이 헨리 6세의 왕위 계승자로 인정받고, 에드워드 왕자의 계승권은 박탈되었다[221]. 이 합의로 요크 공작은 헨리 6세의 이름으로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토튼 전투.
작. 1922년.


워릭 백작의 군대와 합류한 요크 공 에드워드의 군대는 런던으로 진군했고, 왕비군은 던스터블로 후퇴했다. 1461년 2월 27일, 에드워드와 워릭 백작은 런던에 입성했고, 시민들은 그들을 환영하며 재정 지원도 해줬다[230].

이제 에드워드는 왕위 쟁탈전을 시작했다. 요크 가문은 헨리 6세가 전년의 합의령에 따라 정당한 왕위 계승자인 요크 공 리처드를 죽였기 때문에 왕위를 유지할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230]. 3월 4일, 7명의 제후로 구성된 의회와 런던 시민들의 지지를 받은 요크 공 에드워드는 왕위에 올랐다('''에드워드 4세''')[231]. 그는 헨리 6세와 마가렛 왕비를 처형하거나 추방할 때까지 즉위식을 거행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3월 19일, 요크 군이 런던을 출발했고, 에드워드와 워릭 백작은 병력을 모으며 북상했다. 3월 27일부터 28일까지 워릭 백작이 이끄는 선봉대가 랭커스터 가문의 근거지 요크 근처에서 랭커스터 군과 충돌했다(페리브리지 전투).[232]

3월 29일, 요크 서쪽의 토튼에서 양군의 결전이 벌어졌는데, 이 토튼 전투는 장미 전쟁 최대의 전투였다. 강풍과 폭설 속에서 수만 명의 병사들이 하루 종일 싸운 끝에 에드워드가 이끄는 요크 군이 승리했고, 랭커스터 군은 대부분 전사했다[227]. 요크 군 약 12,000명, 랭커스터 군 약 20,000명이 전사했고, 영국 본토에서 하루 동안 가장 많은 사람이 죽은 전투로 기록되었다[233].

요크에 있던 헨리 6세와 왕비, 에드워드 왕자는 패전 소식을 듣고 스코틀랜드로 도망쳤다[234]. 살아남은 랭커스터 가문의 귀족들은 에드워드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일부는 북부 국경 지대나 웨일스의 성에 숨었다. 에드워드는 요크를 점령하고, 성문에 걸려 있던 아버지와 동생, 솔즈베리 백작의 머리를 내리고, 클리포드 경 존을 비롯한 랭커스터 가문의 머리를 내걸었다.

4. 경과

헨리 4세


헨리 5세


헨리 4세는 즉위 직후 1400년에 일어난 "에피파니 봉기"라는 폐위 시도에 직면했다. 존 몽태규, 존 홀랜드, 토마스 홀랜드, 그리고 토마스 데스펜서가 감금된 리처드 2세를 왕으로 복위시키려 시도했다. 이 시도는 실패했고, 네 명의 음모자는 모두 처형되었으며, 리처드 2세는 얼마 후 폰테프랙트 성에서 "원인 불명"으로 사망했다.[14] 서쪽 웨일스에서는 웨일스인들이 일반적으로 리처드 2세의 통치를 지지했고, 다른 수많은 사회경제적 문제들과 맞물려 헨리 4세의 즉위는 웨일스 귀족 출신인 오웬 글린더가 이끄는 웨일스의 대규모 반란을 촉발했다.[15] 글린더의 반란은 헨리 4세의 통치 기간을 넘어 1415년까지 지속되었다.[15] 반란 중 글린더는 저명한 앵글시 가문이자 글린더의 외사촌인 튜더 가문의 일원들로부터 지원을 받았는데, 이 가문은 훗날 장미 전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토지, 돈, 왕실의 호의에 대한 약속을 둘러싼 분쟁은 퍼시 가문을 이끄는 헨리 퍼시와 토마스 퍼시가 헨리 4세에 대항하여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키게 했다. 첫 번째 도전은 1403년 슈루즈베리에서 패배했고 워스터는 처형되었으며,[16] 두 번째 시도는 1408년 브램햄 무어에서 실패했고, 노섬벌랜드는 사망했다. 헨리 4세는 1413년에 사망했고, 그의 아들 헨리가 헨리 5세로 즉위했다.[17]

국내외적으로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 헨리 5세는 프랑스 왕위에 대한 오래된 왕조적 주장을 되살렸고, 상업적 분쟁과 프랑스가 오웬 글린더에게 제공한 지원을 ''카수스 벨리''로 이용하여 1415년 프랑스를 침략했다.[18] 아버지의 통치처럼 끊임없는 반란에 시달리지는 않았지만, 헨리 5세는 프랑스 원정 직전에 사우스햄프턴 음모라는 형태로 그의 권위에 대한 중대한 도전에 직면했다. 이는 토마스 그레이 경, 헨리 스크로프 남작, 그리고 리처드 오브 코니스버러가 주도했는데, 후자는 요크 공작 1세인 에드먼드 오브 랭글리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들은 헨리 5세를 에드워드 3세의 증손자이자 한때 리처드 2세의 예비 상속인이었던 젊은 에드먼드 모티머(리처드 오브 코니스버러의 매제)로 대체하려 했다. 모티머는 충성을 유지하고 헨리 5세에게 음모를 알렸고, 헨리 5세는 세 명의 배후자 모두를 처형했다.[19]

헨리 5세는 9월 22일 아르플뢰르를 함락했고 10월 25일 아쟁쿠르에서 프랑스군을 결정적으로 패배시켜 프랑스 귀족의 상당수를 몰살했다. 아쟁쿠르 전투와 헨리 5세의 후속 원정은 랭커스터 왕가의 정통성과 프랑스 왕위에 대한 헨리 5세의 주장을 확고히 했다. 1420년, 헨리 5세와 샤를 6세는 트루아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프랑스 왕위 계승에서 프랑스의 도팽 샤를을 제외하고, 샤를의 딸 카트린 드 발루아를 헨리 5세와 결혼시켰으며, 그들의 장래 아들들을 프랑스 왕위의 합법적인 계승자로 인정했다.[20]

리처드 오브 코니스버러의 아들인 리처드 오브 요크는 아버지가 처형되었을 때 네 살이었다. 그의 숙부인 에드워드가 아쟁쿠르 전투에서 자식 없이 사망했으므로, 헨리 5세는 리처드 오브 요크가 요크 공국의 작위와 토지를 상속하도록 허락했다. 에드먼드 모티머가 1425년에 자식 없이 사망했을 때, 리처드 오브 요크는 머치 백작령도 상속받았고, 고인이 된 어머니(에드먼드 모티머의 누이)를 통해 모티머의 왕위 계승 주장도 이어받았다.

최근 카트린과 결혼한 헨리 5세 자신에게는 세 명의 남동생이 있었고, 왕관에 대한 랭커스터 가문의 주장이 확고하다고 의심하지 않았다. 1421년 12월 6일, 카트린은 아들 헨리를 낳았다. 그 이듬해 헨리 5세는 이질로 사망했고, 그의 아들은 불과 아홉 달 만에 왕위에 올랐다.[21] 헨리 5세의 남동생들은 살아남은 합법적인 상속인을 남기지 않았고, 보포르 가문만이 대안적인 랭커스터 가문의 계승자로 남았다. 리처드 오브 요크가 성년에 이르고 헨리 6세의 통치가 악화됨에 따라 요크의 왕위 계승 주장이 더욱 매력적으로 보였다. 그의 영지에서 나오는 수입 또한 그를 왕국에서 가장 부유한 거물로 만들었다.

잉글랜드의 헨리 6세(Henry VI of England)


어린 시절부터 잉글랜드의 헨리 6세는 다툼이 많은 측근과 고문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의 아버지의 동생이자 살아남은 가장 어린 삼촌인 글로스터 공작 험프리(Humphrey, Duke of Gloucester)는 헨리가 성년이 될 때까지 섭정(Lord Protector)이 되고자 했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 대중의 인기를 의도적으로 얻으려 했지만, 그의 이복 삼촌인 헨리 보퍼트 추기경(Cardinal Henry Beaufort)의 반대에 부딪혔다. 보퍼트는 여러 차례 글로스터의 형이자 헨리의 명목상 섭정이었던 베드퍼드 공작 존(John, Duke of Bedford)에게 프랑스에서의 지휘관직을 떠나 글로스터의 반역 혐의에 대한 중재 또는 방어를 위해 돌아올 것을 요청했다. 해외에서는 프랑스가 잔 다르크(Joan of Arc) 주위에 결집하여 오를레앙의 포위 공격과 파테이 전투에서 영국군에게 큰 패배를 안겨주었고, 헨리 5세가 거둔 많은 성과를 뒤집어 1429년 7월 17일 랭스에서 도팽이 샤를 7세로 즉위하도록 이끌었다. 헨리는 7세의 나이로 샤를의 즉위에 대한 대응으로 얼마 지나지 않은 11월 6일에 헨리 6세로 정식 즉위했다. 이 무렵 헨리의 어머니 발루아의 카트린은 오웬 튜더와 재혼하여 두 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그들은 에드먼드 튜더와 재스퍼 튜더로, 둘 다 다가오는 전쟁의 마지막 단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헨리는 1437년 16세에 성년이 되었다. 그러나 베드퍼드는 2년 전인 1435년에 사망했고, 보퍼트는 그 이후로 공적인 일에서 상당 부분 물러났는데, 그 이유는 부분적으로 그의 동맹자인 서퍽 백작 윌리엄 드 라 폴(William de la Pole, Earl of Suffolk)이 왕실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보퍼트와 마찬가지로 서퍽은 프랑스의 악화되는 상황에 대한 외교적 해결책을 군사적 해결책보다 선호했는데, 이는 본질적으로 폭력과 유혈 사태를 싫어했던 헨리와 공감하는 입장이었다.[23] 서퍽은 글로스터와 부상하는 요크의 리처드의 반대에 직면했는데, 그들은 모두 프랑스에 대한 군사적 해결책을 계속 추진하는 것을 선호했다. 서퍽과 보퍼트 가문은 종종 그들의 매파 성향이 덜했던 것을 선호하는 왕으로부터 많은 돈, 토지, 그리고 중요한 정부 및 군사 직책을 받았고, 프랑스에서 리처드와 글로스터의 군사 작전에서 꼭 필요한 자원을 전용하여 리처드가 보퍼트 가문에 대한 격렬한 적개심을 키우게 했다.

서퍽은 1444년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에 평화를 중재하기 위한 투르 조약의 주요 설계자로서 궁정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계속 키웠다. 서퍽은 헨리와 앙주 공작 샤를 7세의 먼 친척인 앙주의 마가렛의 결혼을 협상하여 전략적으로 중요한 메인과 앙주의 땅을 얻었다.[24] 비록 서퍽이 자신의 노력으로 백작에서 후작으로 승진했지만(1448년 공작이 될 것이다), 프랑스에 토지를 할양해야 한다는 조약의 조항은 상당한 반발을 우려하여 영국 대중에게 비밀로 유지되었지만, 헨리는 그 조약을 고집했다. 2년 후인 1447년에 서퍽은 글로스터가 반역죄로 체포되도록 했다. 글로스터는 재판을 기다리는 동안 사망했고, 당시 일부 사람들은 서퍽이 그를 독살했다고 의심했다.[25] 요크의 리처드는 프랑스에서의 명예로운 지휘권을 박탈당하고 10년 임기의 상대적으로 먼 아일랜드 영지를 다스리도록 보내져 궁정의 일에 간섭할 수 없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 잉글랜드는 프랑스에서 계속 역전을 겪었다. 이제 왕좌 뒤의 주요 실세가 된 서퍽은 이러한 손실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 또한 메인과 앙주를 프랑스에 할양하라는 불리한 요구에 대한 비난도 서퍽에게 돌아갔지만, 그는 그러한 요구에 대한 협상 중에 어떤 약속도 하지 않았다고 계속 주장했다. 1450년에 서퍽은 체포되어 런던탑에 투옥되고 하원에서 탄핵을 당했다. 헨리는 개입하여 서퍽을 5년 동안 추방했지만, 칼레로 가는 도중 서퍽은 체포되어 1450년 5월 2일에 처형되었다.[26] 서퍽의 뒤를 이어 헨리 보퍼트의 조카인 서머셋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가 프랑스와의 평화를 추구하는 파벌의 지도자가 되었고, 1448년 리처드의 프랑스 지휘관직 대체자로 임명되었다. 섬머셋의 정치적 입지는 다소 불안정했는데, 적대 행위가 재개된 후 1449년 영국의 군사적 실패로 인해 궁정에서 리처드의 동맹국의 비판에 취약해졌다. 섬머셋은 이때 헨리의 아내인 앙주의 마가렛과 가까운 동맹이 되었다.[27] 마가렛 자신은 유순한 왕 헨리를 거의 완전히 장악했고, 섬머셋과의 깊은 우정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두 사람이 불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의심하게 되었는데, 실제로 1453년 헨리와 마가렛의 아들인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가 태어났을 때, 섬머셋이 아버지라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1450년 4월 15일, 영국은 포르미니 전투에서 프랑스에 큰 패배를 당했고, 이는 프랑스가 노르망디를 재정복하는 길을 열었다. 같은 해 켄트에서 잭 케이드의 반란이라는 폭력적인 대중 봉기가 일어났는데, 이는 장미 전쟁의 전조로 종종 여겨진다. 반군 지도자 잭 케이드의 지휘 아래 작성된 반군 선언문인 ''켄트 가난한 공동체의 불만''은 왕관을 착취, 정의의 왜곡, 선거 사기로 비난했다. 반군들은 런던의 일부 지역을 점령했고, 인기 없는 재무장관인 제임스 피네스를 처형했다.[28] 그들은 사면받은 것으로 여겨진 후 해산되었지만, 케이드를 포함한 여러 주동자들이 나중에 처형되었다. 반란 후 케이드와 그의 추종자들의 불만은 요크의 리처드가 자신이 부당하게 배제되었다고 느끼는 왕실 정부에 대한 반대의 기초가 되었다. 요크의 리처드는 아일랜드에서 돌아와 런던으로 갔다. 자신을 개혁가로 내세우며 더 나은 정부를 요구했고, 결국 1452년과 1453년 대부분을 투옥당했다. 그 해 여름까지 리처드는 권력 다툼에서 패한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다툼 내내 헨리 자신은 절차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외할아버지인 프랑스의 샤를 6세로부터 물려받았을 가능성이 있는 여러 정신 질환 증상을 보였다. 군사 문제에 대한 그의 거의 전적인 무능력은 프랑스의 영국군을 흩어지고 약하게 만들어 1450년 포르미니에서 패배하기 쉽게 만들었다. 헨리는 종교와 학문에 더 관심이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는데, 이는 그의 소심하고 수동적인 성격과 전쟁에 대한 혐오감과 결합되어 그를 당시에 무능한 왕으로 만들었다.[29] 1453년 7월 17일, 프랑스 남부의 영국군은 카스티용 전투에서 참패를 당했고, 잉글랜드는 칼레 해협을 제외한 프랑스의 모든 영토를 잃어 유럽의 권력 균형을 바꾸고 백년 전쟁을 끝냈다. 아마도 이 소식에 대한 반응으로 헨리는 완전한 정신 붕괴를 경험했고, 그 동안 그는 자신의 신생아 아들 에드워드를 알아보지 못했다. 1454년 3월 22일, 대법관인 존 켐프 추기경이 사망했고, 헨리는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왕의 이름으로 정부를 운영하는 것이 헌법적으로 불가능해졌다.

중앙 권력의 부재는 불안정한 정치 상황을 계속 악화시켰고, 특히 퍼시 가문과 네빌 가문의 싸움, 본빌 가문과 쿠르트네이 가문의 싸움과 같은 더 강력한 귀족 가문 사이의 오랜 불화를 중심으로 양극화되어 내전을 일으킬 만한 불안정한 정치적 분위기를 조성했다. 국가를 통치할 수 있도록 섭정 의회가 설립되었고, 앙주의 마가렛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1454년 3월 27일 섭정이자 수석 고문으로 임명된 요크의 리처드가 이끌었다. 요크는 그의 매형인 솔즈베리 백작 리처드 네빌을 대법관으로 임명하여 네빌 가문을 주요 적수인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에 대항하여 지원했다. 네빌 가문을 지원함으로써 요크는 왕국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거물 중 한 명인 솔즈베리 백작의 아들인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이라는 중요한 동맹을 얻었다. 요크는 서머셋 공작을 그의 직책에서 해임하고 런던 탑에 투옥했다.

1455년 헨리는 정신 불안정에서 놀라운 회복을 했고, 요크의 리처드의 진전을 상당 부분 뒤집었다. 서머셋 공작은 석방되어 총애를 되찾았고, 요크는 궁정에서 쫓겨나 추방되었다. 그러나 주로 워릭 백작과 그의 아버지인 솔즈베리 백작과 같은 불만을 가진 귀족들은 정부 통제에 대한 경쟁자인 요크 가문의 주장을 지지했다. 헨리, 서머셋 공작, 그리고 소수의 귀족으로 구성된 의회는 런던의 서머셋 공작의 적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레스터에서 5월 22일에 대의회를 열기로 결정했다. 반역죄 혐의가 제기될 것을 두려워한 요크와 그의 동맹은 의회에 도착하기 전에 왕실 일행을 요격하기 위해 군대를 모아 세인트 올번스에서 만났다.

요크 공작 리처드 3세(리처드 오브 요크, 요크 공작 3세)는 약 약 2721555.00kg~약 6350295.00kg명의 군대를 이끌고 런던 남쪽으로 진군했고, 1455년 5월 22일 런던 북쪽 세인트 올번스에서 헨리 6세의 약 1814370.00kg명의 군대와 맞닥뜨렸다. 이어진 전투에서 사상자는 160명도 채 되지 않았지만,[31] 요크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잉글랜드 국왕 헨리 6세는 요크의 군대에 포로로 잡혔는데, 궁정 신하들과 고문들에게 버려진 채 현지 무두장에서 숨어 있던 것을 발견되었던 것이다. 양측의 사상자가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요크와 네빌 가문의 가장 영향력 있는 적대 세력 중 많은 인물들이 살해되었는데, 여기에는 서머싯 공작 에드먼드 보퍼 2세,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 2세, 그리고 클리포드 남작 토마스 클리포드 8세가 포함된다. 국왕을 사로잡고 주요 경쟁자들을 제거한 요크는 다시 의회에 의해 섭정으로 임명되었고, 요크파는 다시 영향력을 되찾았다.

요크의 동맹들은 일시적으로 안정된 상황 덕분에 곧 우세해졌는데, 특히 젊은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 16세가 칼레 함장으로서 잉글랜드 해협에서 해적 퇴치 작전을 수행했다. 워릭은 아버지 솔즈베리 백작 리처드 네빌 5세를 능가하여 요크의 핵심 동맹이 되었고, 의회에서 요크의 복수를 막았다. 워릭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항구인 칼레의 사령관으로서 잉글랜드 최대의 상비군을 지휘했다. 헨리의 왕비인 앙주 백작부인 마가렛은 워릭을 왕위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여기고 그의 보급을 차단하려 했지만, 1457년 8월 프랑스의 샌드위치 공격으로 프랑스 침략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면서 마가렛은 양보하고 워릭에게 왕국을 보호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제공해야 했다. 그러나 1456년 2월 헨리는 정신을 회복하고 요크를 섭정직에서 해임하고 왕국에 대한 통치권을 다시 행사했다.[32] 불안한 평화에도 불구하고, 네빌 가문과 퍼시 가문 사이에 산발적인 싸움이 다시 일어나면서 왕국에 무질서가 돌아왔다. 커지는 불만을 진압하기 위해, 헨리는 1458년 3월 25일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두 세력 간의 공개적인 화해를 중재하려 했지만, 행렬이 해산하자마자 음모는 다시 시작되었다.

한편 잉글랜드에서 평화를 확보하려는 헨리 6세의 시도가 헛수고로 끝나는 동안, 워릭은 왕권을 무시하고 1458년 5월 카스티야 왕국 함대를 공격하고, 몇 주 후에는 한자 동맹 함대를 공격했다. 그의 칼레 지위는 그에게 프랑스의 샤를 7세와 부르고뉴 공작의 필립 2세와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해주었고, 이 국제적인 관계는 앞으로 그에게 도움이 될 것이었다. 이러한 공격에 대한 대응으로 워릭은 요크와 솔즈베리와 함께 런던으로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동맹국들로부터 고립된 후 체포될까 두려워 그들은 거부했다. 요크는 대신 네빌 가문에게 웨일스 변경에 있는 그의 거점인 러들로 성에서 만날 것을 명령했고, 워릭은 칼레 주둔군 일부를 이끌고 주요 요크파 군대에 합류했다.

이 기간 동안 마거릿은 게으르지 않았고 헨리 6세를 위해 적극적으로 무장 지원을 모집했으며, 그녀가 직접 모집한 기사와 무관들에게 은 백조 문장을 배포했다. 워릭이 그들에게 합류하기 전에, 솔즈베리가 이끄는 5,000명의 요크파 군대는 1459년 9월 23일 블로어 히스에서 오들리 경이 이끄는 그들의 두 배에 달하는 랭커스터파 군대의 기습을 받았다. 랭커스터파 군대는 패배했고, 오들리 경은 전투 중 사망했다. 9월에 워릭은 잉글랜드로 건너가 북쪽으로 러들로로 향했다. 근처 루드포드 브리지 전투에서 앤드류 트롤로프가 이끄는 워릭의 칼레 군대의 배신으로 요크파 군대는 흩어졌다.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요크는 아직 아일랜드 총독이었기에 두 번째 아들인 럿랜드 백작과 함께 더블린으로 갔고, 워릭과 솔즈베리는 요크의 상속자인 요크 공작 에드워드와 함께 칼레로 항해했다. 랭커스터파는 워릭을 대신하여 새로운 서머싯 공작을 칼레에 임명했지만, 요크파는 주둔군의 충성심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루드포드 브리지 전투에서의 승리에 고무된 랭커스터파는 요크, 그의 아들들, 솔즈베리, 워릭을 단죄할 유일한 목적으로 코번트리에서 "악마의 의회"를 소집했지만, 이 의회의 행동은 많은 중립적인 귀족들이 자신의 작위와 재산을 두려워하게 만들었다. 1460년 3월, 워릭은 가스콘 출신의 뒤라스 영주의 보호하에 아일랜드로 항해하여 요크와 계획을 세우고, 엑서터 공작이 지휘하는 왕실 함대를 피해 칼레로 돌아왔다.

1460년 6월 말, 워릭, 솔즈베리, 마치 백작 에드워드는 해협을 건너 런던으로 북쪽으로 진격했고, 그곳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솔즈베리는 런던탑 공성을 위해 군대를 남겨두었고, 워릭과 마치 백작은 헨리 6세를 북쪽으로 추격했다.

요크파는 랭커스터파를 따라잡아 1460년 7월 10일 노섬프턴 전투에서 그들을 패퇴시켰다. 버킹엄 공작, 슈롭셔 백작, 보먼트 자작, 그리고 에그레몬트 남작은 모두 왕을 방어하다 전사했다. 헨리 6세는 두 번째로 요크파에게 포로로 잡혀 런던으로 호송되었고, 런던탑 주둔군은 항복했다.

그해 9월, 요크는 아일랜드에서 돌아왔고, 그해 10월 의회에서 그는 왕위를 주장하려는 의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왕좌에 손을 얹었고, 이 행위는 의회를 충격에 빠뜨렸다. 요크의 가장 가까운 동맹조차도 그러한 행동을 지지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요크의 주장을 평가한 판사들은 영국 관습법 원칙으로 계승 순위를 결정할 수 없다고 느끼고, 그 문제는 "법 위의 것이며 그들의 학식을 넘어선다"고 선언했다. 이 시점에서 헨리 6세를 몰아낼 의향이 없는 귀족들 사이에서 그의 주장에 대한 결정적인 지지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된 요크는 타협안을 마련했다. 1460년 10월 25일 합의법이 통과되었는데, 이 법은 헨리 6세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는 상속권을 박탈당하고 왕위는 요크에게 넘어갈 것이라고 명시했다. 그러나 이 타협안은 곧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 밝혀졌고, 적대 행위는 재개되었다.

마거릿 왕비와 그녀의 아들은 랭커스터파가 장악한 하를레흐 성으로 피신하여 웨일스와 서부 지방에서 병력을 모집 중이던 헨리의 이복형제인 재스퍼 튜더와 엑서터 공작 헨리 홀랜드와 합류했다. 마거릿은 북쪽으로 스코틀랜드로 향하여 스코틀랜드의 군대와 다른 지원을 랭커스터파를 위해 섭외하는 데 성공했는데, 그 대가로 1년 전 제임스 2세가 전쟁의 혼란을 틈타 재탈환을 시도했던(그리고 록스버러 함락에서 성공했으나, 목숨을 잃었다.) 버윅을 할양하는 조건이었다. 이는 섭정 게르더의 메리와의 협상을 통해 이루어졌다. 같은 해 랭커스터파를 위한 프랑스 군대와 지원을 얻는 데에도 비슷한 성공적인 협상이 이루어졌는데, 이번에는 저지의 할양을 대가로 했다. 이로써 고대 동맹이 랭커스터파를 지지하여 요크파가 통치하는 잉글랜드가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부르고뉴 공국에 가담하는 것을 막게 되었다. 양측 모두 이러한 시나리오를 원하지 않았다. 랭커스터파는 잉글랜드 북부에서 퍼시 가문이 지지 세력을 모으고 있던 곳에서 결집했다. 그들은 서머셋과 데번 백작 토마스 쿠르트네이와 합류했다. 요크, 그의 아들 럿랜드 백작, 그리고 솔즈베리는 랭커스터파의 북부 위협을 막기 위해 런던을 떠났다.

1460년 12월 16일, 요크의 선봉대가 서부 지방 출신 서머셋의 군대와 워크소프 전투에서 충돌하여 패배했다. 12월 21일, 요크는 웨이크필드 마을 근처의 자신의 요새인 샌들 성에 도착했고, 랭커스터파는 불과 약 14.48km 거리에 진을 쳤다.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요크는 12월 30일에 성에서 출격했고, 이어진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요크, 럿랜드, 그리고 워릭의 동생인 토마스 네빌이 모두 전사했다. 솔즈베리는 다음 날 밤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헨리 트레섬(Henry Tresham)의 그림. 웨이크필드 전투(Battle of Wakefield) 이전에 워릭(Warwick the Kingmaker)이 맹세했다고 알려진 장면을 묘사하고 있음.


에드워드 4세(Edward IV of England)


요크 가문이 웨이크필드 전투(Battle of Wakefield)에서 패배한 후, 리처드 3세 요크 공작(Richard, 3rd Duke of York)의 18세 아들인 에드워드 마치 백작(Edward, Earl of March)은 요크 공작 작위(Dukedom of York)의 상속자가 되었고, 따라서 리처드의 왕위 계승권을 상속받았다. 에드워드는 잉글랜드 서부와 웨일스에서 튜더(Tudors) 가문의 지휘 아래 집결하고 있는 랭커스터군이 북부에서 자신과 대치하고 있는 주력 랭커스터군에 합류하는 것을 막고자 했다.

1461년 2월 2일, 그는 모티머 크로스 전투(Mortimer's Cross)에서 랭커스터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했고, 헨리 5세(Henry V of England)의 미망인 발루아의 캐서린(Catherine of Valois)의 남편인 오언 튜더(Owen Tudor)는 그의 군대에 의해 처형되었다. 전장에 새벽이 밝아오자, '권운(parhelion)'으로 알려진 기상 현상이 발생하여 세 개의 태양이 떠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에드워드는 이것이 성삼위일체(Holy Trinity)를 나타내는 것이며, 따라서 그들의 대의에 대한 신의 축복의 증거라고 설득하여 두려워하는 병사들을 진정시켰다. 에드워드는 나중에 찬란한 태양의 문장을 자신의 개인 문장(personal device)으로 삼았다.[41][42]

북부에서는 리처드를 패배시키고 살해한 마거릿의 군대와 승리한 랭커스터군이 남쪽으로 이동했고, 워릭은 포로로 잡힌 헨리를 데리고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고대 로마 도로인 왓링 스트리트(Watling Street)를 따라 세인트 올번스(St Albans)에서 그들과 만났다. 워릭의 군대는 잘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었지만, 2월 17일 세인트 올번스 제2 전투(Second Battle of St Albans)에서 결국 패배했다.

헨리는 랭커스터군에 의해 풀려났고, 그의 어린 아들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Edward of Westminster)를 기사로 임명했으며, 그는 다시 30명의 랭커스터 지도자들을 기사로 임명했다. 워릭과 그의 군대는 모티머 크로스 전투에서의 승리 직후 에드워드가 이끄는 마치 지역(Marches)의 요크군과 합류하기 위해 행군했다. 세인트 올번스 전투 이후 랭커스터군이 전략적 우위를 점했지만, 랭커스터의 대의는 런던에서 인기가 없었고, 시민들은 마거릿의 군대의 입성을

4. 1. 개관

새로운 요크 왕조의 국왕이 된 에드워드 4세는 결정적으로 불리한 점이 있었다. 폐위당한 왕(헨리 6세)과 그의 왕비와 왕자가 붙잡히지 않은 채 자유로운 몸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스코틀랜드프랑스에게 힘을 모을 구심점이 되었다. 게다가 에드워드 4세는 잉글랜드의 대영주들과 그들의 부하들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얻지 못하였다. 워릭 백작과의 갈등에, 동생 클래런스 공 조지에게 버림받았다. 에드워드 4세에게 반감을 지닌 여러 세력은 1469년 반란을 음모했고 랭커스터 왕조의 왕비 마거리트 앤주와 불편한 협약을 맺게 되었다. 워릭과 클래런스, 랭커스터 가문, 요크파의 비주류는 잉글랜드로 돌아왔고, 에드워드 4세는 그의 동맹자인 부르고뉴 공에게 도망갔다. 그들은 헨리 6세를 복위시켰다. 하지만 폐위당한 에드워드는 체포되지 않았기 때문에 부르고뉴의 도움으로 군대를 모아 다시 잉글랜드로 돌아와 헨리 6세와 마거리트 왕비를 제거했다. 워릭과 클래런스, 요크 파의 비주류도 제거되었다. 에드워드 4세는 헨리 4세가 직면했던 것처럼 자신의 정통성을 확인하는 문제에 봉착했지만 그는 유능한 군주였고 그의 통치는 신민들에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그는 정부 재정을 개선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그가 어린 두 왕자만 두고 죽음으로써 다시 혼란이 시작된다. 12살 된 왕자(에드워드 5세)가 미성년으로 왕위에 오른 것은 이미 여러 차례 별다른 어려움 없이 헤쳐나왔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하지만 1450년대 이래 에드워드 4세와 워릭, 클래런스가 제멋대로 불법적인 행위를 자행한 것은 에드워드 5세의 즉위를 특별히 위험스럽게 만들었다. 에드워드 4세는 왕국에서 그의 권위를 넓히기 위해 대부분 자신의 가문이나 아내의 우드빌 가문과 연관을 맺고 있던 대영주들에게 의존했다. 북부에서는 글로스터 공작, 웨일스에서는 우드빌 가문, 미들랜즈에서는 헤이스팅스 경에게 권력을 나누어 주었다. 에드워드가 살아있을 동안은 그들 관계가 그나마 매끄럽게 돌아갔지만, 1483년 에드워드 4세 사후 서로에 대한 불신, 특히 글로스터와 우드빌 가문의 불신은 지배 집단을 약화시켰고 이 집단 바깥으로 밀려나 있던 퍼시 가문(북부)과 버킹엄 공(웨일스 및 서부 미들랜즈)은 이것을 기회로 생각했다. 이러한 상황은 리처드가 어린 조카(에드워드 5세)의 왕위를 찬탈하고 런던탑에 감금시키게 하였다. 왕비의 남자 형제와 헤이스팅스 경을 처형하였다. 에드워드 4세와 그의 아들들이 사생아였다고 선언하고 클래런스의 자식들은 아예 무시해 버렸다. 이러한 리처드 3세의 행위는 다시 왕조 전쟁이 벌어지게 하였다. 1483년 10월 에드워드 3세의 다섯째 아들 토머스의 후손인 버킹엄 공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더 성공을 거둔 것은 1485년 헨리 튜더(Henry Tutor)가 프랑스로부터 건너와 영국에 상륙한 것이었다. 그는 에드워드 3세의 아들인 존 오브 곤트의 사생아에서 비롯된 보퍼트 가문으로부터 그의 아버지에게 시집온 그의 어머니를 통해 그의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지만 그의 주장은 빈약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1485년 8월 22일 보스워스 필드 전투에서 리처드 3세를 무찌르고 그의 목숨을 빼앗았다.

"장미 전쟁"이라는 이름은 잉글랜드 왕좌를 장악하기 위해 싸운 플랜태저넷 왕가의 두 경쟁 가문과 관련된 문장 배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요크의 백장미와 랭커스터의 홍장미를 말한다. 이 용어의 초기 형태는 1727년 비빌 히건스가 "두 장미 사이의 다툼"을 묘사하면서 사용되었고, 데이비드 흄은 그의 저서 『잉글랜드 역사』(1754~1761)에서도 언급했다.[1]

현대적인 용어인 "장미 전쟁"은 1829년 월터 스콧이 쓴 소설 『기어르슈타인의 앤』이 출판된 후 19세기 초에 일반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스콧은 템플 교회 정원을 배경으로 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헨리 6세 1부』(2막 4장)의 한 장면을 바탕으로 이 이름을 지었다. 이 장면에서 여러 귀족과 한 변호사가 랭커스터파 또는 요크파에 대한 충성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빨간 장미나 흰 장미를 뽑는다. 셰익스피어 시대에는 이 갈등은 단순히 "내전"으로 불렸다.

요크파는 갈등 초기에 백장미 상징을 사용했지만, 랭커스터의 홍장미는 1485년 보스워스 필드 전투에서 헨리 튜더가 승리한 후에야 도입되었다. 헨리가 승리하고 요크의 엘리자베스(즉, 에드워드 4세의 상속인)와 결혼한 후, 두 장미는 결합되어 튜더 장미가 되어 두 주장의 연합을 상징했다. 장미 자체를 인식표로 사용한 것은 에드워드 1세가 "적절하게 줄기가 달린 금장미"를 사용한 데서 유래했다. 종종 귀족들이 여러 작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 이상의 배지를 사용했다. 예를 들어, 에드워드 4세는 마치 백작으로서의 태양을 사용했지만, 그의 아버지의 매와 족쇄(즉, 요크 공작으로서의)도 사용했다. 배지는 항상 명확하지 않았다. 바넷 전투에서 에드워드의 '태양'은 옥스퍼드 백작의 베어 별과 매우 유사하여 치명적인 혼란을 야기했다.

많은 참가자들은 그들의 직속 영주 또는 후원자와 관련된 리버리 배지를 착용했다. 리버리 착용은 "영주의 지속적인 고용"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제한되었으며, 따라서 예를 들어 용병 부대는 제외되었다. 예를 들어, 보스워스에서 헨리 튜더의 군대는 붉은 용 깃발 아래에서 싸웠고, 요크파 군대는 리처드 3세의 개인 문장인 흰 멧돼지를 사용했다.

경쟁 가문의 이름은 요크와 랭커스터 도시에서 유래했지만, 해당 공국공작령은 이 도시들과 거의 관련이 없었다. 랭커스터 공국에 딸린 토지와 직책은 주로 글로스터셔, 북웨일스, 체셔 및 아이러니하게도 요크셔에 위치해 있었고, 요크 공작의 영지는 잉글랜드와 웨일스 전역에 걸쳐 있으며 많은 부분이 웨일스 국경 지대에 있었다.

역사학자들은 전쟁의 주요 원인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1377년 에드워드 3세 사후 왕위 계승 문제는 역사가 이언 모티머에 따르면 장미 전쟁의 근본 원인이라고 한다. 에드워드 3세의 계승은 확실해 보였지만, 그의 치세 말기에 "직계 계승자의 갑작스러운 축소"가 있었다. 에드워드 3세의 두 아들, 흑태자 에드워드와 클래런스 공작 라이오넬은 각각 1376년과 1368년에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다. 에드워드 3세는 왕위 계승에 대한 주장을 가진 세 아들을 남겼다: 랭커스터 공작 존 오브 곤트, 요크 공작 에드먼드, 그리고 글로스터 공작 토마스.

흑태자는 살아남은 아들 잉글랜드의 리처드 2세 한 명을 두었는데, 그는 상속인의 아들이 삼촌보다 왕위 계승 순위에서 우선한다는 원칙에 따라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다. 따라서 리처드는 그의 훨씬 나이 많은 삼촌들인 존, 에드먼드, 토마스보다 왕위 계승에 대한 더 우선적인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리처드는 미성년자였고, 형제가 없었으며, 그의 세 명의 살아있는 삼촌들(에드워드 3세 사망 당시)은 정치적으로 강력하고 야심 차 있었기 때문에, 누가 왕위를 계승해야 하는지에 대해 왕국 내에 상당한 불확실성이 있었다. 결국 에드워드 3세는 그의 손자인 리처드 2세에게 왕위를 계승했는데, 그는 겨우 10살에 왕위에 올랐다.

장자 상속제에 따르면, 리처드가 적법한 상속인 없이 사망하면 그의 계승자는 에드워드 3세의 둘째 아들인 클래런스 공작 라이오넬의 후손이 될 것이다. 클래런스의 외동딸인 얼스터 백작 부인 필리파는 모티머 가문과 결혼하여 아들 마치 백작 로저 모티머를 두었는데, 그는 기술적으로 가장 좋은 법적 계승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376년 에드워드 3세가 발표한 법령은 계승 문제에 복잡성을 도입했는데, 그가 발표한 칙허장은 계승권을 그의 남계로 제한했기 때문에, 후자는 여계를 통해 계승되었기 때문에 그의 셋째 아들인 존 오브 곤트가 클래런스의 후손보다 앞서게 되었다.

헨리 4세는 즉위 직후 1400년에 일어난 "에피파니 봉기"라는 폐위 시도에 직면했다. 존 몽태규, 존 홀랜드, 토마스 홀랜드, 그리고 토마스 데스펜서가 감금된 리처드 2세를 왕으로 복위시키려 시도했다. 이 시도는 실패했고, 네 명의 음모자는 모두 처형되었으며, 리처드 2세는 얼마 후 폰테프랙트 성에서 "원인 불명"으로 사망했다. 서쪽 웨일스에서는 웨일스인들이 일반적으로 리처드 2세의 통치를 지지했고, 다른 수많은 사회경제적 문제들과 맞물려 헨리 4세의 즉위는 웨일스 귀족 출신인 오웬 글린더가 이끄는 웨일스의 대규모 반란을 촉발했다. 글린더의 반란은 헨리 4세의 통치 기간을 넘어 1415년까지 지속되었다. 반란 중 글린더는 저명한 앵글시 가문이자 글린더의 외사촌인 튜더 가문의 일원들로부터 지원을 받았는데, 이 가문은 훗날 장미 전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토지, 돈, 왕실의 호의에 대한 약속을 둘러싼 분쟁은 퍼시 가문을 이끄는 헨리 퍼시와 토마스 퍼시가 헨리 4세에 대항하여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키게 했다. 첫 번째 도전은 1403년 슈루즈베리에서 패배했고 워스터는 처형되었으며, 두 번째 시도는 1408년 브램햄 무어에서 실패했고, 노섬벌랜드는 사망했다. 헨리 4세는 1413년에 사망했고, 그의 아들 헨리가 헨리 5세로 즉위했다.

국내외적으로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 헨리 5세는 프랑스 왕위에 대한 오래된 왕조적 주장을 되살렸고, 상업적 분쟁과 프랑스가 오웬 글린더에게 제공한 지원을 ''카수스 벨리''로 이용하여 1415년 프랑스를 침략했다. 아버지의 통치처럼 끊임없는 반란에 시달리지는 않았지만, 헨리 5세는 프랑스 원정 직전에 사우스햄프턴 음모라는 형태로 그의 권위에 대한 중대한 도전에 직면했다. 이는 토마스 그레이 경, 헨리 스크로프 남작, 그리고 리처드 오브 코니스버러가 주도했는데, 후자는 요크 공작 1세인 에드먼드 오브 랭글리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들은 헨리 5세를 에드워드 3세의 증손자이자 한때 리처드 2세의 예비 상속인이었던 젊은 에드먼드 모티머(리처드 오브 코니스버러의 매제)로 대체하려 했다. 모티머는 충성을 유지하고 헨리 5세에게 음모를 알렸고, 헨리 5세는 세 명의 배후자 모두를 처형했다.

헨리 5세는 9월 22일 아르플뢰르를 함락했고 10월 25일 아쟁쿠르에서 프랑스군을 결정적으로 패배시켜 프랑스 귀족의 상당수를 몰살했다. 아쟁쿠르 전투와 헨리 5세의 후속 원정은 랭커스터 왕가의 정통성과 프랑스 왕위에 대한 헨리 5세의 주장을 확고히 했다. 1420년, 헨리 5세와 샤를 6세는 트루아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프랑스 왕위 계승에서 프랑스의 도팽 샤를을 제외하고, 샤를의 딸 카트린 드 발루아를 헨리 5세와 결혼시켰으며, 그들의 장래 아들들을 프랑스 왕위의 합법적인 계승자로 인정했다.

리처드 오브 코니스버러의 아들인 리처드 오브 요크는 아버지가 처형되었을 때 네 살이었다. 그의 숙부인 에드워드가 아쟁쿠르 전투에서 자식 없이 사망했으므로, 헨리 5세는 리처드 오브 요크가 요크 공국의 작위와 토지를 상속하도록 허락했다. 에드먼드 모티머가 1425년에 자식 없이 사망했을 때, 리처드 오브 요크는 머치 백작령도 상속받았고, 고인이 된 어머니(에드먼드 모티머의 누이)를 통해 모티머의 왕위 계승 주장도 이어받았다.

최근 카트린과 결혼한 헨리 5세 자신에게는 세 명의 남동생이 있었고, 왕관에 대한 랭커스터 가문의 주장이 확고하다고 의심하지 않았다. 1421년 12월 6일, 카트린은 아들 헨리를 낳았다. 그 이듬해 헨리 5세는 이질로 사망했고, 그의 아들은 불과 아홉 달 만에 왕위에 올랐다. 헨리 5세의 남동생들은 살아남은 합법적인 상속인을 남기지 않았고, 보포르 가문만이 대안적인 랭커스터 가문의 계승자로 남았다. 리처드 오브 요크가 성년에 이르고 헨리 6세의 통치가 악화됨에 따라 요크의 왕위 계승 주장이 더욱 매력적으로 보였다. 그의 영지에서 나오는 수입 또한 그를 왕국에서 가장 부유한 거물로 만들었다.

어린 시절부터 잉글랜드의 헨리 6세는 다툼이 많은 측근과 고문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의 아버지의 동생이자 살아남은 가장 어린 삼촌인 글로스터 공작 험프리(Humphrey, Duke of Gloucester)는 헨리가 성년이 될 때까지 섭정(Lord Protector)이 되고자 했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 대중의 인기를 의도적으로 얻으려 했지만, 그의 이복 삼촌인 헨리 보퍼트 추기경(Cardinal Henry Beaufort)의 반대에 부딪혔다. 보퍼트는 여러 차례 글로스터의 형이자 헨리의 명목상 섭정이었던 베드퍼드 공작 존(John, Duke of Bedford)에게 프랑스에서의 지휘관직을 떠나 글로스터의 반역 혐의에 대한 중재 또는 방어를 위해 돌아올 것을 요청했다. 해외에서는 프랑스가 잔 다르크(Joan of Arc) 주위에 결집하여 오를레앙의 포위 공격과 파테이 전투에서 영국군에게 큰 패배를 안겨주었고, 헨리 5세가 거둔 많은 성과를 뒤집어 1429년 7월 17일 랭스에서 도팽이 샤를 7세로 즉위하도록 이끌었다. 헨리는 7세의 나이로 샤를의 즉위에 대한 대응으로 얼마 지나지 않은 11월 6일에 헨리 6세로 정식 즉위했다. 이 무렵 헨리의 어머니 발루아의 카트린은 오웬 튜더와 재혼하여 두 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그들은 에드먼드 튜더와 재스퍼 튜더로, 둘 다 다가오는 전쟁의 마지막 단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헨리는 1437년 16세에 성년이 되었다. 그러나 베드퍼드는 2년 전인 1435년에 사망했고, 보퍼트는 그 이후로 공적인 일에서 상당 부분 물러났는데, 그 이유는 부분적으로 그의 동맹자인 서퍽 백작 윌리엄 드 라 폴(William de la Pole, Earl of Suffolk)이 왕실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보퍼트와 마찬가지로 서퍽은 프랑스의 악화되는 상황에 대한 외교적 해결책을 군사적 해결책보다 선호했는데, 이는 본질적으로 폭력과 유혈 사태를 싫어했던 헨리와 공감하는 입장이었다. 서퍽은 글로스터와 부상하는 요크의 리처드의 반대에 직면했는데, 그들은 모두 프랑스에 대한 군사적 해결책을 계속 추진하는 것을 선호했다. 서퍽과 보퍼트 가문은 종종 그들의 매파 성향이 덜했던 것을 선호하는 왕으로부터 많은 돈, 토지, 그리고 중요한 정부 및 군사 직책을 받았고, 프랑스에서 리처드와 글로스터의 군사 작전에서 꼭 필요한 자원을 전용하여 리처드가 보퍼트 가문에 대한 격렬한 적개심을 키우게 했다.

서퍽은 1444년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에 평화를 중재하기 위한 투르 조약의 주요 설계자로서 궁정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계속 키웠다. 서퍽은 헨리와 앙주 공작 샤를 7세의 먼 친척인 앙주의 마가렛의 결혼을 협상하여 전략적으로 중요한 메인과 앙주의 땅을 얻었다. 비록 서퍽이 자신의 노력으로 백작에서 후작으로 승진했지만(1448년 공작이 될 것이다), 프랑스에 토지를 할양해야 한다는 조약의 조항은 상당한 반발을 우려하여 영국 대중에게 비밀로 유지되었지만, 헨리는 그 조약을 고집했다. 2년 후인 1447년에 서퍽은 글로스터가 반역죄로 체포되도록 했다. 글로스터는 재판을 기다리는 동안 사망했고, 당시 일부 사람들은 서퍽이 그를 독살했다고 의심했다. 요크의 리처드는 프랑스에서의 명예로운 지휘권을 박탈당하고 10년 임기의 상대적으로 먼 아일랜드 영지를 다스리도록 보내져 궁정의 일에 간섭할 수 없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 잉글랜드는 프랑스에서 계속 역전을 겪었다. 이제 왕좌 뒤의 주요 실세가 된 서퍽은 이러한 손실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 또한 메인과 앙주를 프랑스에 할양하라는 불리한 요구에 대한 비난도 서퍽에게 돌아갔지만, 그는 그러한 요구에 대한 협상 중에 어떤 약속도 하지 않았다고 계속 주장했다. 1450년에 서퍽은 체포되어 런던탑에 투옥되고 하원에서 탄핵을 당했다. 헨리는 개입하여 서퍽을 5년 동안 추방했지만, 칼레로 가는 도중 서퍽은 체포되어 1450년 5월 2일에 처형되었다. 서퍽의 뒤를 이어 헨리 보퍼트의 조카인 서머셋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가 프랑스와의 평화를 추구하는 파벌의 지도자가 되었고, 1448년 리처드의 프랑스 지휘관직 대체자로 임명되었다. 섬머셋의 정치적 입지는 다소 불안정했는데, 적대 행위가 재개된 후 1449년 영국의 군사적 실패로 인해 궁정에서 리처드의 동맹국의 비판에 취약해졌다. 섬머셋은 이때 헨리의 아내인 앙주의 마가렛과 가까운 동맹이 되었다. 마가렛 자신은 유순한 왕 헨리를 거의 완전히 장악했고, 섬머셋과의 깊은 우정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두 사람이 불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의심하게 되었는데, 실제로 1453년 헨리와 마가렛의 아들인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가 태어났을 때, 섬머셋이 아버지라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요크의 리처드(Richard of York)


1450년 4월 15일, 영국은 포르미니 전투에서 프랑스에 큰 패배를 당했고, 이는 프랑스가 노르망디를 재정복하는 길을 열었다. 같은 해 켄트에서 잭 케이드의 반란이라는 폭력적인 대중 봉기가 일어났는데, 이는 장미 전쟁의 전조로 종종 여겨진다. 반군 지도자 잭 케이드의 지휘 아래 작성된 반군 선언문인 ''켄트 가난한 공동체의 불만''은 왕관을 착취, 정의의 왜곡, 선거 사기로 비난했다. 반군들은 런던의 일부 지역을 점령했고, 인기 없는 재무장관인 제임스 피네스를 처형했다. 그들은 사면받은 것으로 여겨진 후 해산되었지만, 케이드를 포함한 여러 주동자들이 나중에 처형되었다. 반란 후 케이드와 그의 추종자들의 불만은 요크의 리처드가 자신이 부당하게 배제되었다고 느끼는 왕실 정부에 대한 반대의 기초가 되었다. 요크의 리처드는 아일랜드에서 돌아와 런던으로 갔다. 자신을 개혁가로 내세우며 더 나은 정부를 요구했고, 결국 1452년과 1453년 대부분을 투옥당했다. 그 해 여름까지 리처드는 권력 다툼에서 패한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다툼 내내 헨리 자신은 절차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외할아버지인 프랑스의 샤를 6세로부터 물려받았을 가능성이 있는 여러 정신 질환 증상을 보였다. 군사 문제에 대한 그의 거의 전적인 무능력은 프랑스의 영국군을 흩어지고 약하게 만들어 1450년 포르미니에서 패배하기 쉽게 만들었다. 헨리는 종교와 학문에 더 관심이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는데, 이는 그의 소심하고 수동적인 성격과 전쟁에 대한 혐오감과 결합되어 그를 당시에 무능한 왕으로 만들었다. 1453년 7월 17일, 프랑스 남부의 영국군은 카스티용 전투에서 참패를 당했고, 잉글랜드는 칼레 해협을 제외한 프랑스의 모든 영토를 잃어 유럽의 권력 균형을 바꾸고 백년 전쟁을 끝냈다. 아마도 이 소식에 대한 반응으로 헨리는 완전한 정신 붕괴를 경험했고, 그 동안 그는 자신의 신생아 아들 에드워드를 알아보지 못했다. 1454년 3월 22일, 대법관인 존 켐프 추기경이 사망했고, 헨리는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왕의 이름으로 정부를 운영하는 것이 헌법적으로 불가능해졌다.

중앙 권력의 부재는 불안정한 정치 상황을 계속 악화시켰고, 특히 퍼시 가문과 네빌 가문의 싸움, 본빌 가문과 쿠르트네이 가문의 싸움과 같은 더 강력한 귀족 가문 사이의 오랜 불화를 중심으로 양극화되어 내전을 일으킬 만한 불안정한 정치적 분위기를 조성했다. 국가를 통치할 수 있도록 섭정 의회가 설립되었고, 앙주의 마가렛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1454년 3월 27일 섭정이자 수석 고문으로 임명된 요크의 리처드가 이끌었다. 요크는 그의 매형인 솔즈베리 백작 리처드 네빌을 대법관으로 임명하여 네빌 가문을 주요 적수인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에 대항하여 지원했다. 네빌 가문을 지원함으로써 요크는 왕국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거물 중 한 명인 솔즈베리 백작의 아들인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이라는 중요한 동맹을 얻었다. 요크는 서머셋 공작을 그의 직책에서 해임하고 런던 탑에 투옥했다.

1455년 헨리는 정신 불안정에서 놀라운 회복을 했고, 요크의 리처드의 진전을 상당 부분 뒤집었다. 서머셋 공작은 석방되어 총애를 되찾았고, 요크는 궁정에서 쫓겨나 추방되었다. 그러나 주로 워릭 백작과 그의 아버지인 솔즈베리 백작과 같은 불만을 가진 귀족들은 정부 통제에 대한 경쟁자인 요크 가문의 주장을 지지했다. 헨리, 서머셋 공작, 그리고 소수의 귀족으로 구성된 의회는 런던의 서머셋 공작의 적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레스터에서 5월 22일에 대의회를 열기로 결정했다. 반역죄 혐의가 제기될 것을 두려워한 요크와 그의 동맹은 의회에 도착하기 전에 왕실 일행을 요격하기 위해 군대를 모아 세인트 올번스에서 만났다.

1455년 5월, 요크 공작 리처드(리처드 플랜태지넷 3세)가 헨리 6세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이후, 1485년 튜더 왕조가 성립될 때까지(1487년 6월 스톡필드 전투까지로 보는 견해도 있음), 플랜태지넷 가문의 방계인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 사이에서 벌어진 권력 투쟁이다. 요크 가문과 랭커스터 가문은 모두 에드워드 3세의 혈통을 이은 가문이었다.

랭커스터 가문이 붉은 장미를, 요크 가문이 흰 장미를 배지(기장)로 사용했기 때문에 장미 전쟁이라고 불리지만, 이 명칭은 후대에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백년 전쟁 중에, 랭커스터 가문은 플랜태지넷 왕조를 무너뜨리고 랭커스터 왕조를 세웠다. 1422년, 프랑스 왕에 대한 승리를 거듭하며 백년 전쟁에서 우위를 확립한 랭커스터 왕조 2대 왕 헨리 5세가 사망하고, 9개월 된 헨리 6세가 잉글랜드 왕에 즉위했다.

1430년대 이후, 대륙에서의 전황이 불리해지자 프랑스에서 온 왕비 마거릿 앤주와 에드먼드 보퍼트를 비롯한 국왕 측근의 평화파(랭커스터파)와 플랜태지넷 가문의 방계인 요크 공작 리처드를 중심으로 한 주전파(요크파)가 권력 투쟁을 벌이게 되었다.

4. 2. 갈등 초기 단계(1377-1399)

헨리 4세는 즉위 직후인 1400년, "에피파니 봉기"라는 폐위 시도에 직면했다. 존 몽태규, 존 홀랜드, 토마스 홀랜드, 토마스 데스펜서 등이 리처드 2세를 복위시키려 했으나 실패하고 모두 처형되었으며, 리처드 2세 또한 얼마 후 폰테프랙트 성에서 사망했다.[14]

웨일스에서는 웨일스인들이 리처드 2세의 통치를 지지했고, 여러 사회경제적 문제와 맞물려 헨리 4세의 즉위는 오웬 글린더가 이끄는 웨일스의 대규모 반란을 촉발했다.[15] 이 반란은 헨리 4세의 통치 기간을 넘어 1415년까지 지속되었으며,[15] 반란 중 글린더는 튜더 가문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는데, 이 가문은 훗날 장미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토지, 돈, 왕실의 호의에 대한 약속을 둘러싼 분쟁은 퍼시 가문을 이끄는 헨리 퍼시와 토마스 퍼시가 헨리 4세에 대항하여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키게 했다. 첫 번째 도전은 1403년 슈루즈베리에서 패배했고 워스터는 처형되었으며,[16] 두 번째 시도는 1408년 브램햄 무어에서 실패했고, 노섬벌랜드는 사망했다. 헨리 4세는 1413년에 사망했고, 그의 아들 헨리가 헨리 5세로 즉위했다.[17]

국내외적으로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 헨리 5세는 프랑스 왕위에 대한 오래된 왕조적 주장을 되살렸고, 상업적 분쟁과 프랑스가 오웬 글린더에게 제공한 지원을 ''카수스 벨리''로 이용하여 1415년 프랑스를 침략했다.[18] 헨리 5세는 프랑스 원정 직전에 사우스햄프턴 음모라는 형태로 그의 권위에 대한 중대한 도전에 직면했다. 이는 토마스 그레이 경, 헨리 스크로프 남작, 그리고 리처드 오브 코니스버러가 주도했는데, 그들은 헨리 5세를 에드먼드 모티머로 대체하려 했다. 모티머는 충성을 유지하고 헨리 5세에게 음모를 알렸고, 헨리 5세는 세 명의 배후자 모두를 처형했다.[19]

헨리 5세는 9월 22일 아르플뢰르를 함락했고 10월 25일 아쟁쿠르에서 프랑스군을 결정적으로 패배시켜 프랑스 귀족의 상당수를 몰살했다. 아쟁쿠르 전투와 헨리 5세의 후속 원정은 랭커스터 왕가의 정통성과 프랑스 왕위에 대한 헨리 5세의 주장을 확고히 했다. 1420년, 헨리 5세와 샤를 6세는 트루아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프랑스 왕위 계승에서 프랑스의 도팽 샤를을 제외하고, 샤를의 딸 카트린 드 발루아를 헨리 5세와 결혼시켰으며, 그들의 장래 아들들을 프랑스 왕위의 합법적인 계승자로 인정했다.[20]

리처드 오브 코니스버러의 아들인 리처드 오브 요크는 아버지가 처형되었을 때 네 살이었다. 그의 숙부인 에드워드가 아쟁쿠르 전투에서 자식 없이 사망했으므로, 헨리 5세는 리처드 오브 요크가 요크 공국의 작위와 토지를 상속하도록 허락했다. 에드먼드 모티머가 1425년에 자식 없이 사망했을 때, 리처드 오브 요크는 머치 백작령도 상속받았고, 고인이 된 어머니(에드먼드 모티머의 누이)를 통해 모티머의 왕위 계승 주장도 이어받았다.

최근 카트린과 결혼한 헨리 5세 자신에게는 세 명의 남동생이 있었고, 왕관에 대한 랭커스터 가문의 주장이 확고하다고 의심하지 않았다. 1421년 12월 6일, 카트린은 아들 헨리를 낳았다. 그 이듬해 헨리 5세는 이질로 사망했고, 그의 아들은 불과 아홉 달 만에 왕위에 올랐다.[21] 헨리 5세의 남동생들은 살아남은 합법적인 상속인을 남기지 않았고, 보포르 가문만이 대안적인 랭커스터 가문의 계승자로 남았다. 리처드 오브 요크가 성년에 이르고 헨리 6세의 통치가 악화됨에 따라 요크의 왕위 계승 주장이 더욱 매력적으로 보였다. 그의 영지에서 나오는 수입 또한 그를 왕국에서 가장 부유한 거물로 만들었다.

어린 시절부터 잉글랜드의 헨리 6세는 다툼이 많은 측근과 고문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의 아버지의 동생이자 살아남은 가장 어린 삼촌인 글로스터 공작 험프리는 헨리가 성년이 될 때까지 섭정(Lord Protector)이 되고자 했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 대중의 인기를 의도적으로 얻으려 했지만, 그의 이복 삼촌인 헨리 보퍼트 추기경의 반대에 부딪혔다. 해외에서는 프랑스가 잔 다르크 주위에 결집하여 영국군에게 큰 패배를 안겨주었고, 헨리 5세가 거둔 많은 성과를 뒤집어 1429년 7월 17일 랭스에서 도팽이 샤를 7세로 즉위하도록 이끌었다. 헨리는 7세의 나이로 샤를의 즉위에 대한 대응으로 얼마 지나지 않은 11월 6일에 헨리 6세로 정식 즉위했다. 이 무렵 헨리의 어머니 발루아의 캐서린은 오웬 튜더와 재혼하여 두 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그들은 에드먼드 튜더와 재스퍼 튜더로, 둘 다 다가오는 전쟁의 마지막 단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헨리는 1437년 16세에 성년이 되었다. 그러나 베드퍼드는 2년 전인 1435년에 사망했고, 보퍼트는 그 이후로 공적인 일에서 상당 부분 물러났는데, 그 이유는 부분적으로 그의 동맹자인 서퍽 백작 윌리엄 드 라 폴이 왕실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보퍼트와 마찬가지로 서퍽은 프랑스의 악화되는 상황에 대한 외교적 해결책을 군사적 해결책보다 선호했는데, 이는 폭력과 유혈 사태를 싫어했던 헨리와 공감하는 입장이었다.[23] 서퍽은 글로스터와 부상하는 요크의 리처드의 반대에 직면했는데, 그들은 모두 프랑스에 대한 군사적 해결책을 계속 추진하는 것을 선호했다. 서퍽과 보퍼트 가문은 종종 그들의 매파 성향이 덜했던 것을 선호하는 왕으로부터 많은 돈, 토지, 그리고 중요한 정부 및 군사 직책을 받았고, 프랑스에서 리처드와 글로스터의 군사 작전에서 꼭 필요한 자원을 전용하여 리처드가 보퍼트 가문에 대한 격렬한 적개심을 키우게 했다.

서퍽은 1444년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에 평화를 중재하기 위한 투르 조약의 주요 설계자로서 궁정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계속 키웠다. 서퍽은 헨리와 앙주 공작 샤를 7세의 먼 친척인 앙주의 마가렛의 결혼을 협상하여 전략적으로 중요한 메인과 앙주의 땅을 얻었다.[24] 비록 서퍽이 자신의 노력으로 백작에서 후작으로 승진했지만(1448년 공작이 될 것이다), 프랑스에 토지를 할양해야 한다는 조약의 조항은 상당한 반발을 우려하여 영국 대중에게 비밀로 유지되었지만, 헨리는 그 조약을 고집했다. 2년 후인 1447년에 서퍽은 글로스터가 반역죄로 체포되도록 했다. 글로스터는 재판을 기다리는 동안 사망했고, 당시 일부 사람들은 서퍽이 그를 독살했다고 의심했다.[25] 요크의 리처드는 프랑스에서의 명예로운 지휘권을 박탈당하고 10년 임기의 상대적으로 먼 아일랜드 영지를 다스리도록 보내져 궁정의 일에 간섭할 수 없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 잉글랜드는 프랑스에서 계속 역전을 겪었다. 이제 왕좌 뒤의 주요 실세가 된 서퍽은 이러한 손실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 또한 메인과 앙주를 프랑스에 할양하라는 불리한 요구에 대한 비난도 서퍽에게 돌아갔지만, 그는 그러한 요구에 대한 협상 중에 어떤 약속도 하지 않았다고 계속 주장했다. 1450년에 서퍽은 체포되어 런던 탑에 투옥되고 하원에서 탄핵을 당했다. 헨리는 개입하여 서퍽을 5년 동안 추방했지만, 칼레로 가는 도중 서퍽은 체포되어 1450년 5월 2일에 처형되었다.[26] 서퍽의 뒤를 이어 헨리 보퍼트의 조카인 섬머셋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가 프랑스와의 평화를 추구하는 파벌의 지도자가 되었고, 1448년 리처드의 프랑스 지휘관직 대체자로 임명되었다. 섬머셋의 정치적 입지는 다소 불안정했는데, 적대 행위가 재개된 후 1449년 영국의 군사적 실패로 인해 궁정에서 리처드의 동맹국의 비판에 취약해졌다. 섬머셋은 이때 헨리의 아내인 앙주의 마가렛과 가까운 동맹이 되었다.[27] 마가렛 자신은 유순한 왕 헨리를 거의 완전히 장악했고, 섬머셋과의 깊은 우정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두 사람이 불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의심하게 되었는데, 실제로 1453년 헨리와 마가렛의 아들인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가 태어났을 때, 섬머셋이 아버지라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1450년 4월 15일, 영국은 포르미니 전투에서 프랑스에 큰 패배를 당했고, 이는 프랑스가 노르망디를 재정복하는 길을 열었다. 같은 해 켄트에서 잭 케이드의 반란이라는 폭력적인 대중 봉기가 일어났는데, 이는 장미 전쟁의 전조로 종종 여겨진다. 반군 지도자 잭 케이드의 지휘 아래 작성된 반군 선언문인 ''켄트 가난한 공동체의 불만''은 왕관을 착취, 정의의 왜곡, 선거 사기로 비난했다. 반군들은 런던의 일부 지역을 점령했고, 인기 없는 재무장관인 제임스 피네스를 처형했다.[28] 그들은 사면받은 것으로 여겨진 후 해산되었지만, 케이드를 포함한 여러 주동자들이 나중에 처형되었다. 반란 후 케이드와 그의 추종자들의 불만은 요크의 리처드가 자신이 부당하게 배제되었다고 느끼는 왕실 정부에 대한 반대의 기초가 되었다. 요크의 리처드는 아일랜드에서 돌아와 런던으로 갔다. 자신을 개혁가로 내세우며 더 나은 정부를 요구했고, 결국 1452년과 1453년 대부분을 투옥당했다. 그 해 여름까지 리처드는 권력 다툼에서 패한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다툼 내내 헨리 자신은 절차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외할아버지인 프랑스의 샤를 6세로부터 물려받았을 가능성이 있는 여러 정신 질환 증상을 보였다. 군사 문제에 대한 그의 거의 전적인 무능력은 프랑스의 영국군을 흩어지고 약하게 만들어 1450년 포르미니에서 패배하기 쉽게 만들었다. 헨리는 종교와 학문에 더 관심이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는데, 이는 그의 소심하고 수동적인 성격과 전쟁에 대한 선의가 아니더라도 혐오감과 결합되어 그를 당시에 무능한 왕으로 만들었다.[29] 1453년 7월 17일, 프랑스 남부의 영국군은 카스티용 전투에서 참패를 당했고, 잉글랜드는 칼레 해협을 제외한 프랑스의 모든 영토를 잃어 유럽의 권력 균형을 바꾸고 100년 전쟁을 끝냈다. 아마도 이 소식에 대한 반응으로 헨리는 완전한 정신 붕괴를 경험했고, 그 동안 그는 자신의 신생아 아들 에드워드를 알아보지 못했다. 1454년 3월 22일, 대법관인 존 켐프 추기경이 사망했고, 헨리는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왕의 이름으로 정부를 운영하는 것이 헌법적으로 불가능해졌다.

중앙 권력의 부재는 불안정한 정치 상황을 계속 악화시켰고, 특히 퍼시-네빌 가문의 싸움과 본빌-쿠르트네이 가문의 싸움과 같은 더 강력한 귀족 가문 사이의 오랜 불화를 중심으로 양극화되어 내전을 일으킬 만한 불안정한 정치적 분위기를 조성했다. 국가를 통치할 수 있도록 섭정 의회가 설립되었고, 마가렛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1454년 3월 27일 섭정이자 수석 고문으로 임명된 요크의 리처드가 이끌었다. 요크는 그의 매형인 솔즈베리 백작 리처드 네빌을 대법관으로 임명하여 네빌 가문을 주요 적수인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에 대항하여 지원했다. 네빌 가문을 지원함으로써 요크는 왕국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거물 중 한 명인 솔즈베리 백작의 아들인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이라는 중요한 동맹을 얻었다. 요크는 섬머셋을 그의 직책에서 해임하고 런던 탑에 투옥했다.

1455년 헨리는 정신 불안정에서 놀라운 회복을 했고, 요크의 리처드의 진전을 상당 부분 뒤집었다. 섬머셋은 석방되어 총애를 되찾았고, 요크는 궁정에서 쫓겨나 추방되었다. 그러나 주로 워릭 백작과 그의 아버지인 솔즈베리 백작과 같은 불만을 가진 귀족들은 정부 통제에 대한 경쟁자인 요크 가문의 주장을 지지했다. 헨리, 섬머셋, 그리고 소수의 귀족으로 구성된 의회는 런던의 섬머셋의 적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레스터에서 5월 22일에 대의회를 열기로 결정했다. 반역죄 혐의가 제기될 것을 두려워한 요크와 그의 동맹은 의회에 도착하기 전에 왕실 일행을 요격하기 위해 군대를 모아 세인트 올번스에서 만났다.

요크 공작 리처드 3세(리처드 오브 요크, 요크 공작 3세)는 약 약 2721555.00kg~약 6350295.00kg명의 군대를 이끌고 런던 남쪽으로 진군했고, 1455년 5월 22일 런던 북쪽 세인트 올번스에서 헨리 6세의 약 1814370.00kg명의 군대와 맞닥뜨렸다. 이어진 전투에서 사상자는 160명도 채 되지 않았지만,[31] 요크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잉글랜드 국왕 헨리 6세는 요크의 군대에 포로로 잡혔는데, 궁정 신하들과 고문들에게 버려진 채 현지 무두장에서 숨어 있던 것을 발견되었던 것이다. 양측의 사상자가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요크와 네빌 가문의 가장 영향력 있는 적대 세력 중 많은 인물들이 살해되었는데, 여기에는 서머싯 공작 에드먼드 보퍼 2세,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 2세, 그리고 클리포드 남작 토마스 클리포드 8세가 포함된다. 국왕을 사로잡고 주요 경쟁자들을 제거한 요크는 다시 의회에 의해 섭정으로 임명되었고, 요크파는 다시 영향력을 되찾았다.

요크의 동맹들은 일시적으로 안정된 상황 덕분에 곧 우세해졌는데, 특히 젊은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 16세가 칼레 함장으로서 잉글랜드 해협에서 해적 퇴치 작전을 수행했다. 워릭은 아버지 솔즈베리 백작 리처드 네빌 5세를 능가하여 요크의 핵심 동맹이 되었고, 의회에서 요크의 복수를 막았다. 워릭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항구인 칼레의 사령관으로서 잉글랜드 최대의 상비군을 지휘했다. 헨리의 왕비인 앙주 백작부인 마가렛은 워릭을 왕위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여기고 그의 보급을 차단하려 했지만, 1457년 8월 프랑스의 샌드위치 공격으로 프랑스 침략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면서 마가렛은 양보하고 워릭에게 왕국을 보호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제공해야 했다. 그러나 1456년 2월 헨리는 정신을 회복하고 요크를 섭정직에서 해임하고 왕국에 대한 통치권을 다시 행사했다.[32] 불안한 평화에도 불구하고, 네빌 가문과 퍼시 가문 사이에 산발적인 싸움이 다시 일어나면서 왕국에 무질서가 돌아왔다. 커지는 불만을 진압하기 위해, 헨리는 1458년 3월 25일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두 세력 간의 공개적인 화해를 중재하려 했지만, 행렬이 해산하자마자 음모는 다시 시작되었다.

한편 잉글랜드에서 평화를 확보하려는 헨리 6세의 시도가 헛수고로 끝나는 동안, 워릭은 왕권을 무시하고 1458년 5월 카스티야 왕국 함대를 공격하고, 몇 주 후에는 한자 동맹 함대를 공격했다. 그의 칼레 지위는 그에게 프랑스의 샤를 7세와 부르고뉴 공작의 필립 2세와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해주었고, 이 국제적인 관계는 앞으로 그에게 도움이 될 것이었다. 이러한 공격에 대한 대응으로 워릭은 요크와 솔즈베리와 함께 런던으로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동맹국들로부터 고립된 후 체포될까 두려워 그들은 거부했다. 요크는 대신 네빌 가문에게 웨일스 변경에 있는 그의 거점인 러들로 성에서 만날 것을 명령했고, 워릭은 칼레 주둔군 일부를 이끌고 주요 요크파 군대에 합류했다.

이 기간 동안 마거릿은 게으르지 않았고 헨리 6세를 위해 적극적으로 무장 지원을 모집했으며, 그녀가 직접 모집한 기사와 무관들에게 은 백조 문장을 배포했다. 워릭이 그들에게 합류하기 전에, 솔즈베리가 이끄는 5,000명의 요크파 군대는 1459년 9월 23일 블로어 히스에서 오들리 경이 이끄는 그들의 두 배에 달하는 랭커스터파 군대의 기습을 받았다. 랭커스터파 군대는 패배했고, 오들리 경은 전투 중 사망했다. 9월에 워릭은 잉글랜드로 건너가 북쪽으로 러들로로 향했다. 근처 루드포드 브리지 전투에서 앤드류 트롤로프가 이끄는 워릭의 칼레 군대의 배신으로 요크파 군대는 흩어졌다.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요크는 아직 아일랜드 총독이었기에 두 번째 아들인 럿랜드 백작과 함께 더블린으로 갔고, 워릭과 솔즈베리는 요크의 상속자인 요크 공작 에드워드와 함께 칼레로 항해했다. 랭커스터파는 워릭을 대신하여 새로운 서머싯 공작을 칼레에 임명했지만, 요크파는 주둔군의 충성심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루드포드 브리지 전투에서의 승리에 고무된 랭커스터파는 요크, 그의 아들들, 솔즈베리, 워릭을 단죄할 유일한 목적으로 코번트리에서 "악마의 의회"를 소집했지만, 이 의회의 행동은 많은 중립적인 귀족들이 자신의 작위와 재산을 두려워하게 만들었다. 1460년 3월, 워릭은 가스콘 출신의 뒤라스 영주의 보호하에 아일랜드로 항해하여 요크와 계획을 세우고, 엑서터 공작이 지휘하는 왕실 함대를 피해 칼레로 돌아왔다.

1460년 6월 말, 워릭, 솔즈베리, 마치 백작 에드워드는 해협을 건너 런던으로 북쪽으로 진격했고, 그곳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솔즈베리는 런던탑 공성을 위해 군대를 남겨두었고, 워릭과 마치 백작은 헨리 6세를 북쪽으로 추격했다.

요크파는 랭커스터파를 따라잡아 1460년 7월 10일 노섬프턴 전투에서 그들을 패퇴시켰다. 버킹엄 공작, 슈롭셔 백작, 보먼트 자작, 그리고 에그레몬트 남작은 모두 왕을 방어하다 전사했다. 헨리 6세는 두 번째로 요크파에게 포로로 잡혀 런던으로 호송되었고, 런던탑 주둔군은 항복했다.

그해 9월, 요크는 아일랜드에서 돌아왔고, 그해 10월 의회에서 그는 왕위를 주장하려는 의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왕좌에 손을 얹었고, 이 행위는 의회를 충격에 빠뜨렸다. 요크의 가장 가까운 동맹조차도 그러한 행동을 지지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요크의 주장을 평가한 판사들은 영국 관습법 원칙으로 계승 순위를 결정할 수 없다고 느끼고, 그 문제는 "법 위의 것이며 그들의 학식을 넘어선다"고 선언했다. 이 시점에서 헨리 6세를 몰아낼 의향이 없는 귀족들 사이에서 그의 주장에 대한 결정적인 지지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된 요크는 타협안을 마련했다. 1460년 10월 25일 합의법이 통과되었는데, 이 법은 헨리 6세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는 상속권을 박탈당하고 왕위는 요크에게 넘어갈 것이라고 명시했다. 그러나 이 타협안은 곧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 밝혀졌고, 적대 행위는 재개되었다.

마거릿 왕비와 그녀의 아들은 랭커스터파가 장악한 하를레흐 성으로 피신하여 웨일스와 서부 지방에서 병력을 모집 중이던 헨리의 이복형제인 재스퍼 튜더와 엑서터 공작 헨리 홀랜드와 합류했다. 마거릿은 북쪽으로 스코틀랜드로 향하여 스코틀랜드의 군대와 다른 지원을 랭커스터파를 위해 섭외하는 데 성공했는데, 그 대가로 1년 전 제임스 2세가 전쟁의 혼란을 틈타 재탈환을 시도했던(그리고 록스버러 함락에서 성공했으나, 목숨을 잃었다.) 버윅을 할양하는 조건이었다. 이는 섭정 게르더의 메리와의 협상을 통해 이루어졌다. 같은 해 랭커스터파를 위한 프랑스 군대와 지원을 얻는 데에도 비슷한 성공적인 협상이 이루어졌는데, 이번에는 저지의 할양을 대가로 했다. 이로써 고대 동맹이 랭커스터파를 지지하여 요크파가 통치하는 잉글랜드가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부르고뉴 공국에 가담하는 것을 막게 되었다. 양측 모두 이러한 시나리오를 원하지 않았다. 랭커스터파는 잉글랜드 북부에서 퍼시 가문이 지지 세력을 모으고 있던 곳에서 결집했다. 그들은 서머셋과 데번 백작 토마스 쿠르트네이와 합류했다. 요크, 그의 아들 럿랜드 백작, 그리고 솔즈베리는 랭커스터파의 북부 위협을 막기 위해 런던을 떠났다.

1460년 12월 16일, 요크의 선봉대가 서부 지방 출신 서머셋의 군대와 워크소프 전투에서 충돌하여 패배했다. 12월 21일, 요크는 웨이크필드 마을 근처의 자신의 요새인 샌들 성에 도착했고, 랭커스터파는 불과 약 14.48km 거리에 진을 쳤다.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요크는 12월 30일에 성에서 출격했고, 이어진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요크, 럿랜드, 그리고 워릭의 동생인 토마스 네빌이 모두 전사했다. 솔즈베리는 다음 날 밤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15세기 잉글랜드는 신권에 의한 왕위 계승을 주장하며, 백성들에게는 신의 지시를 받고 이끄는 "신성하게 축성된 군주"로 믿어지는 국왕에 의해 통치되었다.[192] 국왕의 주요 기능은 적들로부터 백성을 보호하고, 공정하게 통치하며, 법을 유지하고 집행하는 것이었다.[192] 이러한 사회에서 통치자의 성격은 자신의 안전 확보와 신민의 평화에 달려 있었기 때문에 매우 중요했다.[193] 통치와 군림을 통해 국왕은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지만, 300만 명의 국민을 거느리는 정부의 복잡성은 정부 기관의 증가와 함께 신하들에게 권한을 위임하는 것을 초래했다.[193]

왕위 계승법은 명확하지 않았지만, 일반적으로 장남 상속권 규칙, 즉 장남과 그의 상속자에게 계승하는 것이 적용되었다. 12세기 여왕 마틸다의 짧은 통치 기간부터 1399년 리처드 2세의 폐위까지, 플랜태저넷 왕조에는 많은 남계 상속자가 있었기 때문에 이 장남 상속권으로도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194] 그러나 1399년부터 15세기 말까지는 법학자 존 포트스큐의 1460년대 저서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과도하게 강력해진 신하"들의 등장으로 왕위는 분쟁의 대상이 되었다.[195] 이 시대에는 왕위 계승자 또는 그 배후가 되고자 하는 야망을 가진 강력한 대귀족들이 너무 많았다.[195] 그 결과, 새롭고 불안정한 요소가 왕위 계승 결정에 추가되어 권력에 대한 자의적인 행사가 만연하게 되었다.[195]

국토 방위는 특히 중요했고, 잉글랜드 국민 대부분은 군사적 성공에 중점을 두었다. 그렇기 때문에 국왕은 유능한 전사로 여겨져야 했다. 장미 전쟁으로 알려진 일련의 내전의 결정적인 요인은 국왕 자신이 상비군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국왕은 필요할 때 자신을 보호할 병사의 동원을 귀족들에게 의존했고, 따라서 자극하면 그 병력을 국왕에게 돌릴 수 있는 귀족이나 젠트리(지방 유지)와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이것은 국왕이 대귀족 간의 권력 투쟁(특히 왕국의 안정을 위협할 수 있는 것)을 억제할 책임이 있음을 의미한다.[193]

장미 전쟁은 주로 을 가진 대귀족들 사이에서 벌어졌다. 그들은 왕족인 공작, 비교적 소수의 후작과 백작, 많은 남작과 기사, 그리고 토착 젠트리들이었다.[196] 그들은 광대한 사유지를 소유하는 한편, 투자와 무역을 통해 재산을 늘리고, 정략 결혼을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다.[194] 그들은 봉건적인 (retainer 또는 tenants)로 구성된 무력에 의해 지원을 받았으며, 종종 외국 용병을 고용하기도 했다. 고용된 많은 병사들을 통제하는 행위는 "방조"(maintenance)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사병의 규모 외에도, 귀족의 위신은 "호종단"(affinity: 아피니티)에 의해서도 측정되었다.[194] 호종단의 일원이 된 호종은 그 귀족의 "제복"(livery: 똑같은 제복과 휘장)을 착용하고, 전투에 참여했다. 그 대가로 귀족은 연금 지급, 법적 보호, 그리고 토지나 관직과 같은 보상을 제공했다.[194] 이 비공식적인 "제복과 방조"(livery and maintenance) 제도는 백년 전쟁 이후 봉건 제도의 쇠퇴를 거치면서 나타난 것으로, 봉건 제도 본래의 토지 수여를 매개로 한 봉신으로서 귀족을 섬기는 방식이 아니라, "제복을 입은 호종"(liveried retainer)으로서 귀족과 도급 계약을 맺는, 역사가들이 말하는 "의사 봉건 제도"(bastard feudalism)의 일환이었다.[194][197] 장미 전쟁 시대에는 프랑스 전쟁에서 패하여 잉글랜드 군에서 제대된 많은 병사들이 있었다. 귀족들은 그들을 고용하여 습격을 하거나, 또는 종신과 함께 법정에 데려가 원고나 청중 그리고 판사들을 위협하는 데 사용했다(소송 불법 방조).[198]

전세기 전쟁의 경험에서 궁병에 대한 기병 돌격이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기병(장갑병)들은 대부분 보병으로 싸웠다.[199] 그러나 이것은 자주 언급되는 것과 같이, 귀족들이 병사들보다 더 위험했다. 부르고뉴인 관찰자 는 에드워드 4세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을 때 "병사들은 놓아주되, 귀족들은 용서하지 마라"라고 명령했다고 전한다.

4. 2. 1. 후계 위기



Mortimer는 에드워드 3세 사망 이후의 계승권 문제가 장미 전쟁의 근본 원인이었다고 분석한다[350]. 에드워드의 왕위 계승은 안정적으로 진행되는 듯했으나, 그의 통치 말기에는 "직계 계승의 범위가 갑자기 좁아졌다"[351]. 에드워드 3세의 장남이자 상속인인 코너월 공작 에드워드(검은 왕자 the Black Prince Edward 라고도 함)와 클래런스 공작 라이오넬은 각각 1376년과 1368년에 사망했다. 에드워드 3세에게는 왕위를 이을 아들로 랭커스터 공작 존, 랭글리의 에드먼드, 우드스톡의 토마스가 있었다.

코너월 공작 에드워드는 리처드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당시 왕위 계승 원칙에 따라 형의 아들보다 우선권을 가졌다. 하지만 리처드는 미성년자였고, 아버지의 직계 혈족이 생존한 상황에서 에드워드 3세 사망 시점에 왕위를 상속할 후계자는 불확실했다[352]. 결과적으로 에드워드는 손자 리처드를 10세에 리처드 2세로 즉위시켰다[353].

최장자 승계 법칙에 따라 리처드가 적법한 상속자 없이 사망하면, 클래런스 공작 리오넬의 후손, 즉 에드워드 3세의 둘째 아들이자 리처드의 삼촌인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의 후손이 상속권을 갖게 된다. 클래런스 공작은 외동딸 필리파를 통해 모티머 가문과 혼인했고, 그녀는 아들 로저 모티머를 낳았다. 즉, 로저 모티머는 법적으로 가장 높은 상속권을 가진다. 그러나 에드워드 3세가 1376년에 발표한 특허장(patent letter)에 따라 계승 문제가 복잡해졌다. 이 법령은 남성 직계에게만 상속권을 한정했다. 따라서 클래런스 공작의 후손은 여성 직계 혈통이므로, 에드워드 3세의 셋째 아들인 랭커스터 공작 존이 우선 상속권을 받게 된다. 즉, 리처드 2세가 합법적인 후계자 없이 사망할 경우 여성 직계 혈통인 앤트워프 공작 리오넬의 후손보다 남성 직계 혈통인 에드워드 3세의 셋째 아들 존이 왕위 계승권을 갖는다는 의미다[354].

1327년부터 1377년까지 잉글랜드를 통치한 에드워드 3세는 성년이 된 다섯 아들을 두었다. 우드스톡의 에드워드 "흑태자", 앤트워프의 라이오넬, 건트의 존, 랭글리의 에드먼드, 우드스톡의 토마스. 그는 통치 기간 동안 아들들을 위해 공작령을 세웠다. 1337년 에드워드를 위해 콘월 공작령[3], 1362년 라이오넬을 위해 클래런스 공작령[4], 존을 위해 랭커스터 공작령[5]을 세웠다. 리처드 2세 통치 기간인 1385년에는 에드먼드가 요크 공작[6], 토마스가 글로스터 공작이 되었다.[4]

영국 군주가 신하에게 공작 작위를 수여한 것은 1337년 콘월 공작령이 처음이었다. 공작령의 탄생은 왕위 계승을 주장하고, 이론적으로 왕위를 놓고 경쟁할 힘을 가진 강력한 새로운 영국 귀족 계급을 탄생시켰다. 새로운 공작령은 에드워드의 아들들과 그 상속인들에게 군주나 국가로부터 독립적인 수입을 제공했기 때문이다.[7] 따라서 이들은 사병을 설립하고 유지할 수 있었다.[8]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공작령들은 소위 "유사봉건제도"에 내재된 구조적 결함을 악화시키기 시작했다. 이는 1885년 역사가 찰스 플러머가 만든 용어지만, 주로 플러머의 동시대인 윌리엄 스터브스에 의해 정의되었다. 스터브스는 에드워드 1세 통치 기간 동안 징병 기반의 봉건적 군역이 군주를 섬기는 귀족들의 군사 봉사에 대한 왕실의 지불 체계로 대체되는 사회 역학의 실질적인 변화를 설명했다. 즉, 봉신들은 소환될 때 군사 봉사를 제공하는 대신 수입의 일부를 영주에게 지불했고, 영주는 고용된 수행원들로 부족한 봉사를 보충했다. 이러한 수행원들은 추종자로 알려졌는데, 영주가 봉사를 위해 모은 개인들의 집합체였으며, 유사봉건제도의 가장 근본적인 측면 중 하나가 되었다.[9] 추종자들은 강력한 귀족들을 하급 귀족들에게 묶는 수단이기도 했지만, 이러한 관계는 토지 소유나 봉건적 관계가 아닌 상호 이익을 보이는 개인적 관계로 정의되었다.[10] 결과적으로 영주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후원자에게 빚지고 있는 추종자들을 신뢰할 수 있는 수행원으로 모을 수 있었다.[11] 이러한 추종자들은 영주가 실제로 알고 있는 사람보다 훨씬 많았는데, 추종자 구성원들도 서로 알고 지지했기 때문이다.[12]

리처드 2세 통치 기간에는 귀족들의 성장하는 수행원에 대한 대항마로 리처드가 자신의 추종자 규모를 늘리려 했기 때문에 귀족들과의 권력 투쟁이 발생했다. 귀족들의 수행원은 리처드에 대항하여 건트의 존, 그리고 그의 아들 헨리 볼링브룩처럼 영주의 이익을 군주 권위에 맞서 방어할 만큼 강력해졌다.[8][9] 전쟁 중에 요크의 리처드, 워릭 백작과 같이 불만을 품은 귀족들은 복잡한 하인 및 수행원 네트워크에 의존하여 헨리 6세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었다.

리처드 2세(Richard II), 보르도의 리처드(Richard of Bordeaux)로도 알려진 그는 1377년부터 1399년 폐위될 때까지 잉글랜드 국왕이었다. 리처드 2세가 국왕으로 재위한 초기에는 그의 삼촌인 존 오브 곤트와 우드스톡의 토마스의 영향을 받은 섭정 평의회가 정부를 장악했다. 이후 잉글랜드 왕국은 백년 전쟁과 같은 여러 문제에 직면했다. 리처드 2세 시대의 주요 과제는 1381년 농민 반란이었고, 젊은 국왕은 이 위기를 진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버지나 할아버지보다 호전적이지 않았던 그는 백년 전쟁을 종식시키고자 했다. 왕실 특권을 굳게 믿었던 리처드 2세는 귀족들의 권력을 억제하고 군사적 보호를 위해 사적인 수행원에 의존했다. 할아버지와 달리 리처드 2세는 궁정에서 예술과 문화를 중심으로 세련된 분위기를 조성했고, 그곳에서 국왕은 고귀한 인물이었다.

리처드 2세의 통치는 혼란스러웠으며, 군주와 강력한 귀족들 사이의 불화가 증가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리처드는 어린 나이에도 섭정 평의회 없이 통치하여 삼촌 랭커스터 공작 존 오브 곤트가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배제했다. 유럽에서의 실패한 군사 원정에 자금을 지원하기 위한 세금은 1381년 농민 반란을 촉발했고, 의회는 국왕의 대법관인 서퍽 백작 마이클 드 라 폴과 협력하기를 거부하여 무자비한 의회라는 정치 위기를 초래하여 리처드를 폐위 위기에 몰아넣었다. 리처드는 정치적 적들을 멀리하기 위해 재위 기간 동안 여러 번 상속인을 바꿨다.

소수의 신하에게 의존하는 국왕의 태도는 영향력 있는 사람들 사이에 불만을 야기했고, 1387년에는 상소 귀족으로 알려진 귀족 집단이 정부를 장악했다. 1389년 리처드 2세는 권력을 되찾았고, 이후 8년 동안 이전 상대들과 비교적 조화롭게 통치했다.

프랑스에서는 에드워드 3세가 정복한 영토 대부분이 상실되었고, 리처드 2세는 1389년 7월 프랑스의 샤를 6세와 뢰링엄 휴전(Truce of Leulinghem)으로 알려진 평화 조약을 협상했다. 영국을 프랑스의 속국으로 만들 평화 제안은 전쟁 수행을 지지하는 기사들이 장악한 의회의 반발을 샀다. 리처드 2세는 의회의 승인을 구하지 않고 샤를 6세와 직접 평화를 협상하기로 결정하고, 여섯 살 난 딸 발루아의 이사벨라와 결혼하기로 합의했다. 리처드 2세는 임시 평화를 이용하여 정적들을 처벌했다. 1397년에는 상소 귀족들에게 복수하여 많은 이들이 처형되거나 추방당했다. 이후 2년은 역사가들에 의해 리처드 2세의 "폭정"으로 묘사되었다.

1399년 존 오브 곤트가 사망하자 리처드 2세는 1398년 프랑스로 망명 보낸 곤트의 아들 랭커스터 공작령의 토지와 작위를 몰수했다. 1399년 5월, 리처드 2세는 아일랜드 원정을 위해 잉글랜드를 떠났고, 이는 볼링브룩에게 잉글랜드로 돌아갈 기회를 제공했다. 헨리 4세는 1399년 6월 소규모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를 침공했고, 군대는 빠르게 성장하여 거의 저항을 받지 않았다. 많은 불만을 품은 귀족들의 지지를 받은 볼링브룩은 리처드 2세를 폐위시키고 헨리 4세로 즉위하여 랭커스터 왕조의 초대 국왕이 되었다.[13] 리처드 2세는 감금 중 굶어 죽은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의 최후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리처드 2세의 사후 평판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그의 희곡 ''리처드 2세''에서는 리처드 2세의 잘못된 통치와 폐위가 장미 전쟁의 원인으로 묘사되었다. 현대 역사가들은 이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지만, 리처드 2세의 폐위에 대한 책임을 면제하지는 않는다. 19세기와 20세기의 많은 역사가들이 믿었던 것처럼 그가 미치지는 않았을지라도, 특히 통치 말기에 성격 장애를 겪었을 가능성이 있다. 대부분의 권위자들은 그의 정책이 비현실적이거나 전례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정책을 실행한 방식이 정치 체제에 받아들여지지 않아 몰락으로 이어졌다는 데 동의한다.

《A Chronicle of England》(영국 연대기), 1864년.
과부가 된 엘리자베스 우드빌이 에드워드 4세에게 영지 반환을 청원하러 온 것이 두 사람의 만남이었다. 그녀와의 신분 차이가 나는 결혼은 이후 혼란을 초래했다.


에드워드 4세 옹립의 주역이 된 워릭 백작은 잉글랜드 최대의 토지 소유자가 되었다. 그는 아내의 재산으로 이미 뛰어난 대귀족이었지만, 아버지의 영지를 상속받았고 몰수된 랭커스터파 귀족의 영지까지 받았다. 그는 다섯 항구의 장관직과 칼레 수비대 사령관직을 받았다.[237] 워릭 백작은 친프랑스파 입장을 취하고 에드워드 4세와 프랑스 왕족의 혼인을 루이 11세와 협상하고 있었다.[238] 그러나 에드워드 4세는 1464년 랭커스터파 기사의 미망인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비밀 결혼했다. 이후 에드워드 4세는 이를 기정사실(fait accompli)로 공표하여 혼담을 진행하던 워릭 백작의 체면을 손상시켰다.[239]

에드워드 4세는 엘리자베스 왕비의 아버지 리처드 우드빌을 리버스 백작으로, 동생 앤서니를 스케일스 경으로, 의붓아들 토마스 그레이를 도싯 후작으로 임명하고 친족 대부분을 귀족과 결혼시켰으며, 다른 이들에게도 작위와 관직을 수여했다.[240] 에드워드 4세는 우드빌 가문 중용에 그치지 않고 측근들에게도 작위를 주고, 네빌 가문의 숙적이었던 퍼시 가문의 유자녀 헨리 퍼시에게 노섬벌랜드 백작위를 반환하여 독자적인 당파를 형성했다.[235]

에드워드 4세
즉위에 기여했고, 제2차 장미 전쟁에서는 헨리 6세 (잉글랜드)를 복위시켜 후세에 “킹메이커”라는 별명을 얻었다.[241]제1차 장미 전쟁에서는 에드워드 4세가 프랑스 국왕과의 동맹 대신 부르고뉴 공 샤를과 여동생 마거릿의 결혼을 통해 동맹을 맺은 것, 그리고 동생인 클라렌스 공작과 글로스터 공작과 워릭 백작의 딸들의 혼인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도 워릭 백작을 실망시킨 요인이었다.[242] 에드워드 4세는 워릭 백작의 동생 조지 네빌을 서기관 장관직에서 해임하여 네빌 가문을 배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243]

워릭 백작은 임지인 칼레에서 국왕의 부정을 규탄하는 동시에 에드워드 4세의 뜻을 거스르고 워릭 백작의 딸 이자벨과 결혼한 왕의 동생 조지 클라렌스 공작과 동맹을 맺었다.[244] 1469년 4월, 워릭 백작의 선동으로 북부 지방에서 레즈데일의 로빈의 봉기가 일어났고, 에드워드 4세는 진압에 나섰다. 워릭 백작은 칼레의 군사를 이끌고 켄트에 상륙했지만, 에드워드 4세는 7월 6일 엣지코트 무어 전투에서 반란군에게 패했다.[235] 에드워드 4세는 버킹엄셔의 올니에서 붙잡혀 요크셔의 미들함 성에 유폐되었다.[235] 워릭 백작은 왕비의 아버지 리버스 백작과 동생 존 우드빌을 처형하고 에드워드 4세의 측근들을 숙청했지만, 에드워드 4세 자신의 불법성을 주장하며 클라렌스 공작을 옹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았다.[245][246]

국내는 혼란에 빠지고 귀족들은 다시 사병을 이용한 항쟁을 시작했으며, 랭커스터 가문은 반란을 선동했다.[247] 워릭 백작의 권력 장악을 지지하는 귀족은 거의 없었다. 에드워드 4세는 요크 대주교 조지와 함께 런던에 들어가 워릭 백작과 표면적으로 화해했다.

1470년 3월, 링컨셔에서 또 다른 반란이 일어났다. 에드워드 4세는 워릭 백작과 사이가 멀어진 자들을 골라 왕실 군대를 소집했고[235], 루즈코트 필드 전투에서 반란군을 격파했다. 포로가 된 주모자는 워릭 백작과 클라렌스 공작의 사주에 의한 반란이었다고 증언했다.[235] 그들은 반역자로 선고되어 프랑스로 도피했다.

4. 2. 2. 리처드 2세의 통치

리처드 2세는(Richard of Bordeaux) 1377년부터 1399년까지 영국 왕실의 왕이었다. 그는 웨일스 왕자로서, 에드워드(블랙 프린스라는 명칭으로 후대에 잘 알려짐)와 켄트의 존 카운티스의 아들이었다. 리처드의 아버지가 1376년에 사망했기 때문에 리처드 2세는 할아버지 에드워드 3세의 후계자가 되었고, 후에 에드워드 3세가 사망하면서 당시 10살이었던 리처드가 왕위를 계승했다.

리처드가 왕으로 부임한 후 몇 년 동안은 여러 국가 주요 회의에서 영국의 통치는 리처드의 삼촌인 곤트의 존과 우드스탁의 토마스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 영국은 백년 전쟁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적 문제로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리처드의 통치 기간 중 가장 중대한 이슈 중 하나는 1381년에 발생했던 농민 반란이었으며, 리처드 2세는 이로 인한 사회적 위기를 성공적으로 진압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아버지나 할아버지처럼 호전적인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에 백년 전쟁을 종결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왕권 강화를 중시했던 리처드는 귀족의 세력을 억제하고 자신의 신변 보호를 위해 사병에 의존했다. 리처드는 할아버지와 달리 왕궁에서 예술과 문화를 중심으로 세련된 분위기를 조성하고자 했다.

이러한 정책으로 인해 리처드 2세는 통치 기간 동안 세력이 강했던 귀족과의 갈등이 심화되었다[355]. 리처드는 삼촌인 곤트의 존, 랭커스터 공작으로부터 실질적인 국가 권력을 되찾기 위해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상임 통치 회의 없이 통치했다. 유럽에서 실패한 군사 원정을 지원하기 위한 막대한 세금은 1381년 농민반란을 유발했으며, 의회는 왕의 측근인 마이클 데 라폴과의 협력을 거부함으로써 리처드를 퇴위시키고자 했다. 리처드는 정치적인 적을 제압하기 위해 후계자 선정 과정을 번복하기도 했다[356].

왕이 소수 옹호 세력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것은 불만을 야기했고, 1387년 귀족들의 모임이었던 "Appellant Lords"가 정부를 통제하는 권한을 행사했다. 1389년에 리처드는 통제력을 되찾았고, 이후 8년 동안은 갈등 세력들과 비교적 조화를 이루며 평화롭게 통치했다.

에드워드 3세의 정복 활동으로 프랑스는 많은 영토를 잃었고, 1389년 7월 샤를 6세(Charles VI)와 알렝검(Leulinghem) 간에 휴전 조약으로 불리는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자 했다. 이 평화 제안은 사실상 영국을 프랑스의 속국으로 만드는 것이었기에 당시 전쟁에 참전하고 있던 기사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의회의 반대로 거절되었다. 한편 리처드는 의회의 승인을 구하지 않고 찰스와 직접 사실상의 평화를 협상하기로 결정하고 6살의 딸인 Valois의 Isabella와 결혼하기로 합의했다. 리처드는 이 평화 기간을 이용하여 정치적 경쟁 세력을 처벌할 기회를 잡았다. 1397년, 그는 Appellants에 대한 복수를 감행하여 많은 사람들을 처형하거나 추방했다. 이후 2년을 역사가들은 리처드의 "폭정" 시대로 규정한다.

1327년부터 1377년까지 잉글랜드를 통치했던 에드워드 3세는 성인이 된 다섯 아들을 두었다. 우드스톡의 에드워드 "흑태자", 앤트워프의 라이오넬, 건트의 존, 랭글리의 에드먼드, 그리고 우드스톡의 토마스. 그는 통치 기간 동안 아들들을 위해 공작령을 세웠다. 1337년 에드워드를 위해 콘월 공작령[3], 1362년 라이오넬을 위해 클래런스 공작령[4], 존을 위해 랭커스터 공작령[5]을 세웠다. 리처드 2세 통치 기간인 1385년, 에드먼드는 요크 공작[6]이 되었고, 토마스는 글로스터 공작이 되었다.[4]

리처드 2세 통치 기간 동안 귀족들이 거느리는 수행원이 증가하자, 리처드는 이에 맞서 자신의 추종자 규모를 늘리려 했고, 이는 귀족들과의 권력 투쟁으로 이어졌다. 귀족들의 수행원은 건트의 존, 그리고 나중에는 그의 아들 헨리 볼링브룩처럼 영주의 이익을 옹호하며 군주의 권위에 대항할 만큼 강력해졌다.[8][9]

4. 2. 3. 리처드 2세 폐위와 헨리 4세의 부임

1399년 고트의 존이 사망하자 리처드 2세는 그의 아들 헨리 볼링브룩을 프랑스로 추방하고 그의 땅과 세력을 흡수했다. 1399년 5월, 리처드 2세는 아일랜드의 군사 작전을 위해 영국을 떠났고 헨리는 이 시기에 영국으로 돌아올 기회를 잡았다. 헨리는 1399년 6월 작은 군대를 이끌고 영국을 침공했고,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많은 지지를 받아 리처드 2세를 폐위시키고 랭커스터 왕조 최초의 헨리 4세로 즉위했다[357]. 리처드 2세는 포로로 잡혀 굶주림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최종 운명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리처드 2세의 사후 평판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연극 '리처드 2세'에 큰 영향을 받았다. 이 연극에서는 리처드 2세의 폐위와 그의 비인간적인 통치가 장미 전쟁의 배경이 된 것으로 그려졌다. 하지만 현대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리처드 2세의 폐위에 대한 책임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는다. 리처드 2세가 19~20세기의 많은 역사학자들이 믿었던 것처럼 정신 이상은 아니었을지라도, 통치 말기에는 인격적인 결함이 나타났을 가능성이 있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리처드 2세의 정책이 비현실적이거나 전례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정책을 실행하는 방식이 정치 지도부의 지지를 얻지 못해 결국 그는 정치적으로 고립되었다고 평가한다.

4. 3. 랭커스터 왕조 통치 시기(1399-1455)

헨리 4세는 즉위 직후인 1400년에 "에피파니 봉기"라는 폐위 시도에 직면했다. 존 몽태규, 존 홀랜드, 토마스 홀랜드, 토마스 데스펜서가 감금된 리처드 2세를 왕으로 복위시키려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네 명의 음모자는 모두 처형되었으며, 리처드 2세는 얼마 후 폰테프랙트 성에서 사망했다.[14] 서쪽 웨일스에서는 오웬 글린더가 이끄는 웨일스의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15] 글린더의 반란은 헨리 4세의 통치 기간을 넘어 1415년까지 지속되었으며,[15] 튜더 가문의 일원들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토지, 돈, 왕실의 호의에 대한 약속을 둘러싼 분쟁은 퍼시 가문을 이끄는 헨리 퍼시와 토마스 퍼시가 헨리 4세에 대항하여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키게 했지만, 1403년 슈루즈베리에서 패배했고 1408년 브램햄 무어에서 실패했다. 헨리 4세는 1413년에 사망했고, 그의 아들 헨리가 헨리 5세로 즉위했다.[17]

헨리 5세는 프랑스 왕위에 대한 오래된 왕조적 주장을 되살렸고, 1415년 프랑스를 침략했다.[18] 헨리 5세는 프랑스 원정 직전에 사우스햄프턴 음모라는 형태로 권위에 대한 중대한 도전에 직면했는데, 에드먼드 모티머로 대체하려 했다. 모티머는 충성을 유지하고 헨리 5세에게 음모를 알렸고, 헨리 5세는 세 명의 배후자 모두를 처형했다.[19]

헨리 5세는 9월 22일 아르플뢰르를 함락했고 10월 25일 아쟁쿠르에서 프랑스군을 결정적으로 패배시켜 프랑스 귀족의 상당수를 몰살했다. 1420년, 헨리 5세와 샤를 6세는 트루아 조약을 체결하여 프랑스 왕위 계승에서 프랑스의 도팽 샤를을 제외하고, 샤를의 딸 카트린 드 발루아를 헨리 5세와 결혼시켰으며, 그들의 장래 아들들을 프랑스 왕위의 합법적인 계승자로 인정했다.[20]

리처드 오브 요크는 아버지가 처형되었을 때 네 살이었고, 숙부인 에드워드가 아쟁쿠르 전투에서 사망했으므로, 헨리 5세는 리처드 오브 요크가 요크 공국의 작위와 토지를 상속하도록 허락했다. 에드먼드 모티머가 1425년에 사망했을 때, 리처드 오브 요크는 머치 백작령도 상속받았다.

헨리 5세에게는 세 명의 남동생이 있었고, 왕관에 대한 랭커스터 가문의 주장이 확고하다고 의심하지 않았다. 1421년 12월 6일, 카트린은 아들 헨리를 낳았다. 그 이듬해 헨리 5세는 이질로 사망했고, 그의 아들은 불과 아홉 달 만에 왕위에 올랐다.[21] 헨리 5세의 남동생들은 살아남은 합법적인 상속인을 남기지 않았고, 보포르 가문만이 대안적인 랭커스터 가문의 계승자로 남았다. 리처드 오브 요크가 성년에 이르고 헨리 6세의 통치가 악화됨에 따라 요크의 왕위 계승 주장이 더욱 매력적으로 보였다. 그의 영지에서 나오는 수입 또한 그를 왕국에서 가장 부유한 거물로 만들었다.

헨리 6세는 어린 시절부터 다툼이 많은 측근과 고문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의 아버지의 동생이자 살아남은 가장 어린 삼촌인 글로스터 공작 험프리는 헨리가 성년이 될 때까지 섭정이 되고자 했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 대중의 인기를 얻으려 했지만, 그의 이복 삼촌인 헨리 보퍼트 추기경의 반대에 부딪혔다. 해외에서는 프랑스가 잔 다르크 주위에 결집하여 영국군에게 큰 패배를 안겨주었고, 헨리 5세가 거둔 많은 성과를 뒤집어 1429년 7월 17일 랭스에서 도팽이 샤를 7세로 즉위하도록 이끌었다. 이 무렵 헨리의 어머니 발루아의 캐서린은 오웬 튜더와 재혼하여 에드먼드 튜더와 재스퍼 튜더를 낳았는데, 그들은 다가오는 전쟁의 마지막 단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헨리는 1437년 16세에 성년이 되었다. 그러나 베드퍼드는 2년 전인 1435년에 사망했고, 보퍼트는 그 이후로 공적인 일에서 상당 부분 물러났는데, 그 이유는 부분적으로 그의 동맹자인 서퍽 백작 윌리엄 드 라 폴이 왕실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보퍼트와 마찬가지로 서퍽은 프랑스의 악화되는 상황에 대한 외교적 해결책을 군사적 해결책보다 선호했는데, 이는 폭력과 유혈 사태를 싫어했던 헨리와 공감하는 입장이었다.[23] 서퍽은 글로스터와 부상하는 요크의 리처드의 반대에 직면했는데, 그들은 모두 프랑스에 대한 군사적 해결책을 계속 추진하는 것을 선호했다. 서퍽과 보퍼트 가문은 종종 그들의 매파 성향이 덜했던 것을 선호하는 왕으로부터 많은 돈, 토지, 그리고 중요한 정부 및 군사 직책을 받았고, 프랑스에서 리처드와 글로스터의 군사 작전에서 꼭 필요한 자원을 전용하여 리처드가 보퍼트 가문에 대한 격렬한 적개심을 키우게 했다.

서퍽은 1444년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에 평화를 중재하기 위한 투르 조약의 주요 설계자로서 궁정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계속 키웠다. 서퍽은 헨리와 앙주 공작 샤를 7세의 먼 친척인 앙주의 마가렛의 결혼을 협상하여 전략적으로 중요한 메인과 앙주의 땅을 얻었다.[24] 비록 서퍽이 자신의 노력으로 백작에서 후작으로 승진했지만, 프랑스에 토지를 할양해야 한다는 조약의 조항은 상당한 반발을 우려하여 영국 대중에게 비밀로 유지되었지만, 헨리는 그 조약을 고집했다. 2년 후인 1447년에 서퍽은 글로스터가 반역죄로 체포되도록 했다. 글로스터는 재판을 기다리는 동안 사망했고, 당시 일부 사람들은 서퍽이 그를 독살했다고 의심했다.[25] 요크의 리처드는 프랑스에서의 명예로운 지휘권을 박탈당하고 10년 임기의 상대적으로 먼 아일랜드 영지를 다스리도록 보내져 궁정의 일에 간섭할 수 없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 잉글랜드는 프랑스에서 계속 역전을 겪었다. 이제 왕좌 뒤의 주요 실세가 된 서퍽은 이러한 손실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 또한 메인과 앙주를 프랑스에 할양하라는 불리한 요구에 대한 비난도 서퍽에게 돌아갔지만, 그는 그러한 요구에 대한 협상 중에 어떤 약속도 하지 않았다고 계속 주장했다. 1450년에 서퍽은 체포되어 런던 탑에 투옥되고 하원에서 탄핵을 당했다. 헨리는 개입하여 서퍽을 5년 동안 추방했지만, 칼레로 가는 도중 서퍽은 체포되어 1450년 5월 2일에 처형되었다.[26] 서퍽의 뒤를 이어 헨리 보퍼트의 조카인 서머싯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가 프랑스와의 평화를 추구하는 파벌의 지도자가 되었고, 1448년 리처드의 프랑스 지휘관직 대체자로 임명되었다. 서머싯의 정치적 입지는 다소 불안정했는데, 적대 행위가 재개된 후 1449년 영국의 군사적 실패로 인해 궁정에서 리처드의 동맹국의 비판에 취약해졌다. 서머싯은 이때 헨리의 아내인 앙주의 마가렛과 가까운 동맹이 되었다.[27] 마가렛 자신은 유순한 왕 헨리를 거의 완전히 장악했고, 섬머셋과의 깊은 우정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두 사람이 불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의심하게 되었는데, 실제로 1453년 헨리와 마가렛의 아들인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가 태어났을 때, 섬머셋이 아버지라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1450년 4월 15일, 영국은 포르미니 전투에서 프랑스에 큰 패배를 당했고, 이는 프랑스가 노르망디를 재정복하는 길을 열었다. 같은 해 켄트에서 잭 케이드의 반란이라는 폭력적인 대중 봉기가 일어났는데, 이는 장미 전쟁의 전조로 종종 여겨진다. 반군 지도자 잭 케이드의 지휘 아래 작성된 반군 선언문인 ''켄트 가난한 공동체의 불만''은 왕관을 착취, 정의의 왜곡, 선거 사기로 비난했다.[28] 반군들은 런던의 일부 지역을 점령했고, 인기 없는 재무장관인 제임스 피네스를 처형했다.[28] 그들은 사면받은 것으로 여겨진 후 해산되었지만, 케이드를 포함한 여러 주동자들이 나중에 처형되었다. 반란 후 케이드와 그의 추종자들의 불만은 요크의 리처드가 자신이 부당하게 배제되었다고 느끼는 왕실 정부에 대한 반대의 기초가 되었다. 요크의 리처드는 아일랜드에서 돌아와 런던으로 갔다. 자신을 개혁가로 내세우며 더 나은 정부를 요구했고, 결국 1452년과 1453년 대부분을 투옥당했다. 그 해 여름까지 리처드는 권력 다툼에서 패한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다툼 내내 헨리 자신은 절차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외할아버지인 프랑스의 샤를 6세로부터 물려받았을 가능성이 있는 여러 정신 질환 증상을 보였다. 군사 문제에 대한 그의 거의 전적인 무능력은 프랑스의 영국군을 흩어지고 약하게 만들어 1450년 포르미니에서 패배하기 쉽게 만들었다. 헨리는 종교와 학문에 더 관심이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는데, 이는 그의 소심하고 수동적인 성격과 전쟁에 대한 선의가 아니더라도 혐오감과 결합되어 그를 당시에 무능한 왕으로 만들었다.[29] 1453년 7월 17일, 프랑스 남부의 영국군은 카스티용 전투에서 참패를 당했고, 잉글랜드는 칼레 해협을 제외한 프랑스의 모든 영토를 잃어 유럽의 권력 균형을 바꾸고 100년 전쟁을 끝냈다. 아마도 이 소식에 대한 반응으로 헨리는 완전한 정신 붕괴를 경험했고, 그 동안 그는 자신의 신생아 아들 에드워드를 알아보지 못했다. 1454년 3월 22일, 대법관인 존 켐프 추기경이 사망했고, 헨리는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왕의 이름으로 정부를 운영하는 것이 헌법적으로 불가능해졌다.

중앙 권력의 부재는 불안정한 정치 상황을 계속 악화시켰고, 특히 퍼시-네빌 가문의 싸움과 본빌-쿠르트네이 가문의 싸움과 같은 더 강력한 귀족 가문 사이의 오랜 불화를 중심으로 양극화되어 내전을 일으킬 만한 불안정한 정치적 분위기를 조성했다. 국가를 통치할 수 있도록 섭정 의회가 설립되었고, 마가렛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1454년 3월 27일 섭정이자 수석 고문으로 임명된 요크의 리처드가 이끌었다. 요크는 그의 매형인 솔즈베리 백작 리처드 네빌을 대법관으로 임명하여 네빌 가문을 주요 적수인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에 대항하여 지원했다. 네빌 가문을 지원함으로써 요크는 왕국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거물 중 한 명인 솔즈베리 백작의 아들인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이라는 중요한 동맹을 얻었다. 요크는 섬머셋을 그의 직책에서 해임하고 런던 탑에 투옥했다.

1455년 헨리는 정신 불안정에서 회복되었고, 요크의 리처드의 진전을 상당 부분 뒤집었다. 섬머셋은 석방되어 총애를 되찾았고, 요크는 궁정에서 쫓겨나 추방되었다. 그러나 주로 워릭 백작과 그의 아버지인 솔즈베리 백작과 같은 불만을 가진 귀족들은 정부 통제에 대한 경쟁자인 요크 가문의 주장을 지지했다. 헨리, 섬머셋, 그리고 소수의 귀족으로 구성된 의회는 런던의 섬머셋의 적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레스터에서 5월 22일에 대의회를 열기로 결정했다. 반역죄 혐의가 제기될 것을 두려워한 요크와 그의 동맹은 의회에 도착하기 전에 왕실 일행을 요격하기 위해 군대를 모아 세인트 올번스에서 만났다.[30]

리처드 오브 요크, 요크 공작 3세는 약 3,000~7,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런던 남쪽으로 진군했고, 1455년 5월 22일 런던 북쪽 세인트 올번스에서 헨리 6세의 2,000명의 군대와 맞닥뜨렸다. 이어진 전투에서 사상자는 160명도 채 되지 않았지만, 요크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잉글랜드 국왕 헨리 6세는 요크의 군대에 포로로 잡혔는데, 궁정 신하들과 고문들에게 버려진 채 현지 무두장에서 숨어 있던 것을 발견되었던 것이다. 양측의 사상자가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요크와 네빌 가문의 가장 영향력 있는 적대 세력 중 많은 인물들이 살해되었는데, 여기에는 서머싯 공작 에드먼드 보퍼 2세,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 2세, 그리고 클리포드 남작 토마스 클리포드 8세가 포함된다. 국왕을 사로잡고 주요 경쟁자들을 제거한 요크는 다시 의회에 의해 섭정으로 임명되었고, 요크파는 다시 영향력을 되찾았다.

요크의 동맹들은 일시적으로 안정된 상황 덕분에 곧 우세해졌는데, 특히 젊은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 16세가 칼레 함장으로서 잉글랜드 해협에서 해적 퇴치 작전을 수행했다. 워릭은 아버지 솔즈베리 백작 리처드 네빌 5세를 능가하여 요크의 핵심 동맹이 되었고, 의회에서 요크의 복수를 막았다. 워릭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항구인 칼레의 사령관으로서 잉글랜드 최대의 상비군을 지휘했다. 헨리의 왕비인 앙주 백작부인 마가렛은 워릭을 왕위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여기고 그의 보급을 차단하려 했지만, 1457년 8월 프랑스의 샌드위치 공격으로 프랑스 침략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면서 마가렛은 양보하고 워릭에게 왕국을 보호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제공해야 했다. 그러나 1456년 2월 헨리는 정신을 회복하고 요크를 섭정직에서 해임하고 왕국에 대한 통치권을 다시 행사했다.[32] 불안한 평화에도 불구하고, 네빌 가문과 퍼시 가문 사이에 산발적인 싸움이 다시 일어나면서 왕국에 무질서가 돌아왔다. 커지는 불만을 진압하기 위해, 헨리는 1458년 3월 25일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두 세력 간의 공개적인 화해를 중재하려 했지만, 행렬이 해산하자마자 음모는 다시 시작되었다.

요크(Richard of York)의 거점; 잉글랜드 슈롭셔주 남부의 러들로 성


한편 잉글랜드에서 평화를 확보하려는 헨리 6세의 시도가 헛수고로 끝나는 동안, 워릭은 왕권을 무시하고 1458년 5월 카스티야 왕국 함대를 공격하고, 몇 주 후에는 한자 동맹 함대를 공격했다. 그의 칼레 지위는 그에게 프랑스의 샤를 7세와 부르고뉴 공작의 필립 2세와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해주었고, 이 국제적인 관계는 앞으로 그에게 도움이 될 것이었다. 이러한 공격에 대한 대응으로 워릭은 요크와 솔즈베리와 함께 런던으로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동맹국들로부터 고립된 후 체포될까 두려워 그들은 거부했다. 요크는 대신 네빌 가문에게 웨일스 변경에 있는 그의 거점인 러들로 성에서 만날 것을 명령했고, 워릭은 칼레 주둔군 일부를 이끌고 주요 요크파 군대에 합류했다.

이 기간 동안 마거릿은 헨리 6세를 위해 적극적으로 무장 지원을 모집했으며, 그녀가 직접 모집한 기사와 무관들에게 은 백조 문장을 배포했다. 워릭이 그들에게 합류하기 전에, 솔즈베리가 이끄는 5,000명의 요크파 군대는 1459년 9월 23일 블로어 히스에서 오들리 경이 이끄는 그들의 두 배에 달하는 랭커스터파 군대의 기습을 받았다. 랭커스터파 군대는 패배했고, 오들리 경은 전투 중 사망했다. 9월에 워릭은 잉글랜드로 건너가 북쪽으로 러들로로 향했다. 근처 루드포드 브리지 전투에서 앤드류 트롤로프가 이끄는 워릭의 칼레 군대의 배신으로 요크파 군대는 흩어졌다.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요크는 아직 아일랜드 총독이었기에 두 번째 아들인 러틀랜드 백작과 함께 더블린으로 갔고, 워릭과 솔즈베리는 요크의 상속자인 요크 공작 에드워드와 함께 칼레로 항해했다. 랭커스터파는 워릭을 대신하여 새로운 서머싯 공작을 칼레에 임명했지만, 요크파는 주둔군의 충성심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루드포드 브리지 전투에서의 승리에 고무된 랭커스터파는 요크, 그의 아들들, 솔즈베리, 워릭을 단죄할 유일한 목적으로 코번트리에서 "악마의 의회"를 소집했지만, 이 의회의 행동은 많은 중립적인 귀족들이 자신의 작위와 재산을 두려워하게 만들었다. 1460년 3월, 워릭은 가스콘 출신의 뒤라스 영주의 보호하에 아일랜드로 항해하여 요크와 계획을 세우고, 엑서터 공작이 지휘하는 왕실 함대를 피해 칼레로 돌아왔다.

1460년 6월 말, 워릭, 솔즈베리, 마치 백작 에드워드는 해협을 건너 런던으로 북쪽으로 진격했고, 그곳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솔즈베리는 런던탑 공성을 위해 군대를 남겨두었고, 워릭과 마치 백작은 헨리 6세를 북쪽으로 추격했다.

요크파는 랭커스터파를 따라잡아 1460년 7월 10일 노섬프턴 전투에서 그들을 패퇴시켰다. 헨리 6세는 두 번째로 요크파에게 포로로 잡혀 런던으로 호송되었고, 런던탑 주둔군은 항복했다.

그해 9월, 요크는 아일랜드에서 돌아왔고, 그해 10월 의회에서 그는 왕위를 주장하려는 의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왕좌에 손을 얹었고, 이 행위는 의회를 충격에 빠뜨렸다. 요크의 가장 가까운 동맹조차도 그러한 행동을 지지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요크의 주장을 평가한 판사들은 영국 관습법 원칙으로 계승 순위를 결정할 수 없다고 느끼고, 그 문제는 "법 위의 것이며 그들의 학식을 넘어선다"고 선언했다. 이 시점에서 헨리 6세를 몰아낼 의향이 없는 귀족들 사이에서 그의 주장에 대한 결정적인 지지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된 요크는 타협안을 마련했다. 1460년 10월 25일 합의법이 통과되었는데, 이 법은 헨리 6세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는 상속권을 박탈당하고 왕위는 요크에게 넘어갈 것이라고 명시했다. 그러나 이 타협안은 곧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 밝혀졌고, 적대 행위는 재개되었다.

마거릿 왕비와 그녀의 아들은 랭커스터파가 장악한 하를레흐 성으로 피신하여 웨일스와 서부 지방에서 병력을 모집 중이던 헨리의 이복형제인 재스퍼 튜더와 엑서터 공작 헨리 홀랜드와 합류했다. 마거릿은 북쪽으로 스코틀랜드로 향하여 스코틀랜드의 군대와 다른 지원을 랭커스터파를 위해 섭외하는 데 성공했는데, 그 대가로 1년 전 제임스 2세가 전쟁의 혼란을 틈타 재탈환을 시도했던 버윅을 할양하는 조건이었다. 이는 섭정 게르더의 메리와의 협상을 통해 이루어졌다. 같은 해 랭커스터파를 위한 프랑스 군대와 지원을 얻는 데에도 비슷한 성공적인 협상이 이루어졌는데, 이번에는 저지의 할양을 대가로 했다. 이로써 고대 동맹이 랭커스터파를 지지하여 요크파가 통치하는 잉글랜드가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부르고뉴 공국에 가담하는 것을 막게 되었다. 양측 모두 이러한 시나리오를 원하지 않았다. 랭커스터파는 잉글랜드 북부에서 퍼시 가문이 지지 세력을 모으고 있던 곳에서 결집했다. 그들은 서머셋과 데번 백작 토마스 쿠르트네이와 합류했다. 요크, 그의 아들 럿랜드 백작, 그리고 솔즈베리는 랭커스터파의 북부 위협을 막기 위해 런던을 떠났다.

1460년 12월 16일, 요크의 선봉대가 서부 지방 출신 서머셋의 군대와 워크소프 전투에서 충돌하여 패배했다. 12월 21일, 요크는 웨이크필드 마을 근처의 자신의 요새인 샌들 성에 도착했고, 랭커스터파는 약 14.48km 거리에 진을 쳤다.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요크는 12월 30일에 성에서 출격했고, 이어진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요크, 럿랜드, 그리고 워릭의 동생인 토마스 네빌이 모두 전사했다. 솔즈베리는 다음 날 밤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요크 가문이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패배한 후, 리처드 3세 요크 공작의 18세 아들인 에드워드 마치 백작은 요크 공작 작위의 상속자가 되었고, 따라서 리처드의 왕위 계승권을 상속받았다. 에드워드는 잉글랜드 서부와 웨일스에서 튜더 가문의 지휘 아래 집결하고 있는 랭커스터군이 북부에서 자신과 대치하고 있는 주력 랭커스터군에 합류하는 것을 막고자 했다.

1461년 2월 2일, 그는 모티머 크로스 전투에서 랭커스터군을 격파했고, 헨리 5세의 미망인 발루아의 캐서린의 남편인 오언 튜더는 그의 군대에 의해 처형되었다. 전장에 새벽이 밝아오자, '권운'으로 알려진 기상 현상이 발생하여 세 개의 태양이 떠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에드워드는 이것이 성삼위일체를 나타내는 것이며, 따라서 그들의 대의에 대한 신의 축복의 증거라고 설득하여 두려워하는 병사들을 진정시켰다. 에드워드는 나중에 찬란한 태양의 문장을 자신의 개인 문장으로 삼았다.

북부에서는 리처드를 패배시키고 살해한 마거릿의 군대와 승리한 랭커스터군이 남쪽으로 이동했고, 워릭은 포로로 잡힌 헨리를 데리고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고대 로마 도로인 왓링 스트리트를 따라 세인트 올번스에서 그들과 만났다. 워릭의 군대는 잘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었지만, 2월 17일 세인트 올번스 제2 전투에서 결국 패배했다.

헨리는 랭커스터군에 의해 풀려났고, 그의 어린 아들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를 기사로 임명했으며, 그는 다시 30명의 랭커스터 지도자들을 기사로 임명했다. 워릭과 그의 군대는 모티머 크로스 전투에서의 승리 직후 에드워드가 이끄는 마치 지역의 요크군과 합류하기 위해 행군했다. 세인트 올번스 전투 이후 랭커스터군이 전략적 우위를 점했지만, 랭커스터의 대의는 런던에서 인기가 없었고, 시민들은 마거릿의 군대의 입성을 거부했다. 워릭과 에드워드는 기회를 잡고 급히 런던으로 행군했고, 그곳에서 에드워드는 급히 소집된 의회에 의해 에드워드 4세로 선포되었다. 에드워드는 잉글랜드 국민들에게 더 매력적인 군주 후보였다. 헨리의 신체적, 정신적 약점은 그의 지지를 치명적으로 약화시켰다.

자신의 지위를 굳히기 위해 에드워드와 워릭은 랭커스터군과 대치하기 위해 북쪽으로 이동했다. 요크군 선봉대를 이끈 워릭은 3월 28일 페리브리지 전투에서 랭커스터군과 충돌을 벌였고, 그곳에서 워릭은 부상을 입었으며, 랭커스터군 사령관인 클리포드 남작과 네빌 남작이 사망했다. 에드워드는 다음 날인 3월 29일 요크셔의 토우턴 근처에서 랭커스터군의 주력군과 교전했다. 그 후 있었던 토우턴 전투는 잉글랜드 땅에서 벌어진 가장 크고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투였으며, 에드워드의 결정적인 승리로 이어져 북부의 랭커스터군의 세력을 붕괴시켰다. 왕실 법정에서 랭커스터의 통제의 중추는 살해당하거나 나라를 떠났다. 헨리, 마거릿, 그리고 그들의 아들 에드워드 왕자는 스코틀랜드로 도망쳤다. 에드워드는 잉글랜드 국왕의 즉위식을 위해 런던으로 돌아왔고, 워릭은 남은 랭커스터군의 저항을 진압하기 위해 북부에 남았다. 토우턴 전투는 적어도 당분간 에드워드가 잉글랜드의 통치자임을 잉글랜드 국민들에게 확인시켜 주었다. 결과적으로 에드워드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단죄법을 사용하여 14명의 랭커스터 귀족과 96명의 기사, 그리고 젠트리의 하급 구성원들의 작위를 박탈했다.

에드워드는 1461년 6월 28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공식적으로 잉글랜드 국왕으로 즉위했다. 에드워드는 패배한 적들의 마음을 얻고자 했다. 그는 토우턴 전투에서 승리한 후 항복한 랭커스터 가문의 많은 사람들을 사면했고, 그들의 재산과 작위를 유지하도록 허락했다.

워릭은 에드워드의 후원으로 큰 이익을 얻었고, 나라에서 가장 강력한 귀족이 되었다. 그는 부모 양쪽의 토지와 작위를 상속받았고, 잉글랜드 해군 원수, 랭커스터 공국의 청지기를 비롯한 여러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 1462년 여름, 워릭은 스코틀랜드와 휴전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필타운에서 토마스 피츠제럴드가 이끄는 요크 가문 군대가 존 버틀러가 이끄는 랭커스터 가문 군대를 결정적으로 패배시켰다. 이로 인해 오먼드 가문은 망명길에 올랐고, 아일랜드에서 랭커스터 가문의 야망은 끝났다. 그해 10월, 앙주 백작부인 마가렛은 프랑스에서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를 침공하여 알닉 성과 밤버러 성을 점령했다. 하지만 이 성들은 3개월 만에 다시 요크 가문의 손에 들어왔다.

1463년 봄, 랄프 퍼시 경이 노샘 성을 포위 공격하면서 헨리 6세를 지지하는 반란이 영국 북부에서 일어났다. 1463년 말까지 스코틀랜드와 프랑스와 별도의 휴전 협정이 체결되어 워릭은 1464년까지 북부에서 잃었던 영토 대부분을 회복했다. 그러나 랭커스터 가문의 주력군은 노섬벌랜드를 통해 남쪽으로 이동했고, 1464년 5월 15일 헥섬 전투에서 존 네빌, 1대 몽태규 후작이 이끄는 요크 가문 군대에 의해 궤멸되었다. 랭커스터 가문의 세 지휘관이 포로로 잡혀 처형되었다. 요크 가문 군대는 리블 강 근처 숲에서 폐위된 왕 헨리 6세를 사로잡았고, 런던으로 압송되어 탑에 감금되었다. 서머싯의 군대가 패배하고 헨리가 포로가 되면서 에드워드의 통치에 대한 모든 효과적인 저항은 사라졌다.

에드워드는 그의 아들이 살아있는 동안 헨리를 죽이는 데 이익을 보지 못했고, 대신 허약한 포로로 랭커스터 가문의 계승권을 유지하는 것을 선호했다. 마가렛과 에드워드 왕자는 스코틀랜드를 떠나 마가렛의 사촌인 프랑스 루이 11세의 궁정으로 항해했고, 그곳에서 수년간 가난한 망명 생활을 했다.

윌리엄 네빌이 토우턴 전투에서 장궁병을 지휘하는 모습 - 19세기 판화

4. 3. 1. 헨리 4세와 헨리 5세의 통치



헨리 4세는 왕위를 계승한 후, 1400년 존 몬타구, 엑세터 공작 존 홀랜드, 서리 공작 토마스 홀랜드, 글로스터 백작 토마스 데스펜서 등이 "주현절 봉기"를 일으켜 수감 중이던 리처드 2세를 다시 왕위에 올리려 했다. 이 계획은 좌절되었고, 4명의 공모자는 처형되었으며, 리처드는 이후 포테프랙트 성에서 "미상의 원인"으로 사망했다[358]. 이와 별도로, 웨일스에서는 웨일스 귀족 출신의 오와인 글린두르가 주도하는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359]. 반란은 헨리의 통치 기간을 넘어 1415년까지 지속되었다[359]. 반란 기간 동안 글린두르는 자신의 친척인 앵글시 가문, 즉 이후 장미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 튜더 가문의 지원을 받았다[360]. 또한, 땅, 돈, 왕실에서의 중요 자리 약속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으로 하우스 오브 퍼시가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1403년 슈루즈베리 전투에서 이 반란은 진압되었고, 우스터는 처형되었다[361]. 1408년 브래머 무어 전투에서 두 번째 반란이 일어났지만, 노스퍼럼버랜드가 사망하면서 실패로 끝났다. 헨리는 1413년에 사망하였고, 그의 아들 몬머스 헨리가 헨리 5세로 즉위했다[362].

헨리 5세는 국내외에서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과거 프랑스 왕위에 대한 청구권을 다시 주장했다. 오와인 글린두르에 대한 프랑스의 지원과 상업적 분쟁을 명분으로 삼아 1415년 프랑스를 침공했다[363]. 아버지 시대만큼 반란에 시달리지는 않았지만, 프랑스 원정 전에 왕권에 대한 여러 위협이 있었다. 이는 Southampton Plot으로 이어졌으며, Sir Thomas Grey, Henry, Baron Scrope, 그리고 Richard of Conisburgh 등이 주도했다. Richard of Conisburgh는 에드워드 3세의 증손이자 리처드 2세의 후계자 후보였던 Edmund of Langley, 1st Duke of York의 둘째 아들이었다[364]. 그러나 몰티머가 이 사실을 헨리에게 알림으로써 반란 세력이 반동을 일으키기 전에 세 주모자를 처형했다[365].

헨리는 9월 22일에 Harfleur를 점령하고, 10월 25일 아쟁쿠르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대파하여 프랑스 귀족의 상당수를 죽이는 대승을 거두었다. 아쟁쿠르 전투와 헨리의 이후 정책은 랭커스터 왕조의 정당성과 프랑스 왕위에 대한 헨리의 청구권 주장을 확고히 했다. 1420년, 헨리와 프랑스의 샤를 6세는 Troyes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프랑스 왕위 계승자인 샤를 7세를 상속권에서 배제하고, 샤를 6세의 딸 Catherine of Valois를 헨리와 결혼시켜 그들의 아들을 프랑스 왕위의 합법적인 계승자로 인정한다는 내용이었다[366].

리처드 오브 요크는 Richard of Conisburgh의 아들이며, 그의 아버지가 처형당할 때 4살이었다. 리처드 오브 요크의 아버지였던 에드워드 2세 요크 공이 아쟁쿠르 전투에서 자식 없이 전사한 뒤, 헨리 5세는 리처드 오브 요크가 요크 공국의 지위와 토지를 상속받을 수 있도록 허용했다. 1425년 에드먼드 모티머가 자식 없이 사망하면서 리처드 오브 요크는 모티머의 여동생으로부터 왕위 후계자로서의 권리를 물려받게 되었다.

헨리 5세는 자신의 형제들이 모두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면서 자신과 캐서린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랭커스터 가문의 왕위를 확실하게 계승할 것이라고 믿었다[367]. 1421년 12월 6일, 캐서린은 아들 헨리를 출산했고, 이듬해 8월 31일 헨리 5세는 36세의 나이로 이질로 사망했다. 그의 아들 헨리 6세는 9개월의 나이에 왕위를 계승했다[368]. 헨리 5세의 동생들이 모두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면서 랭커스터 가문의 대안적인 후계자는 보페르 가문밖에 남지 않았다. 리처드 오브 요크는 헨리 6세의 통치가 악화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왕위 계승에 대한 야망을 키웠고, 자신의 영지에서 얻는 막대한 수입을 바탕으로 잉글랜드에서 가장 부유한 귀족이 되었다[369].

4. 3. 2. 헨리 6세 통치



헨리 6세는 어린 시절부터 고문관과 의회 세력들의 갈등에 둘러싸였던 왕이었다. 험프리 글로스터 공작은 헨리의 삼촌으로, 헨리가 성인이 될 때까지 왕권을 대신 수행하며 자신의 인지도를 높이려 했다[370]. 하지만 그는 또 다른 삼촌인 헨리 베드포드와 대립했다. 베드포트는 글로스터의 반역 혐의에 대해 중재하거나, 형인 존 베드포드 공작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371]. 한편 프랑스에서는 잔 다르크를 중심으로 프랑스군이 힘을 얻어, 헨리 5세가 이룬 성과를 뒤집고 1429년 샤를 7세의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에 헨리 6세도 같은 해 11월 6일, 7세의 나이로 대관식을 치렀다[372]. 헨리의 어머니인 Catherine of Valois는 Owen Tudor와 재혼하여 Edmund Tudor와 Jasper Tudor를 낳았는데, 이들은 훗날 장미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373].

헨리는 1437년 16세에 성인이 되었지만, 베드포드는 1435년에 사망했고 베어포트는 공적 업무에서 물러났다[371]. 이후 윌리엄 드 라 폴, 서필 백작이 부상하며 귀족 정치를 주도했다[374]. 베어포트와 서필 백작은 프랑스 문제에 대해 군사적 해결보다는 외교적 해결을 선호했는데, 이는 헨리의 성향과도 일치했다. 반면 글로스터와 리처드 오브 요크는 군사적 해결을 주장하며 대립했다. 헨리는 소극적인 성향을 가진 서필 백작과 베어포트 가문에게 금전, 토지, 정부 및 군사적 지위를 주었고, 리처드는 외교 정책 추진과 자원 부족에 불만을 품었다[375].

사우스햄튼 백작 윌리엄 드 라 폴은 1444년 투르 조약(Treaty of Tours)을 통해 영국과 프랑스 간의 평화를 중재하려 했다. 그는 앙주의 마르그리트와 헨리 6세의 결혼을 성사시키고, 앙주와 메인의 땅을 얻고자 했다[376]. 이 공로로 사우스햄튼은 후작, 공작으로 승격되었지만, 프랑스에 땅을 양도하는 조항을 숨기려 했다[377]. 헨리 6세는 이 조약을 프랑스에 요구했고, 1447년 사우스햄튼은 글로스터 공작을 반역죄로 체포했다[378]. 글로스터는 재판을 기다리다 사망했고, 사우스햄튼이 그를 독살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리처드 오브 요크는 프랑스에서의 명성을 잃고 아일랜드 총독으로 파견되어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다.

영국은 프랑스에서 계속 패배했고, 서필 백작은 그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 그는 멘-앙쥬를 프랑스에 넘겨주지 않으려 했지만 실패했고, 이 또한 그의 책임으로 돌아갔다[379]. 하지만 그는 협상에서 그런 요구를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380]. 1450년 서필 백작은 체포되어 런던 탑에 갇혔고 하원에서 탄핵을 받았다. 헨리 6세는 그를 5년간 추방했지만, 칼레로 가던 중 체포되어 5월 2일 처형되었다[381]. 서필 백작의 후임으로는 1448년 리처드의 후임으로 프랑스 지휘관에 임명된 에드문드 보포트, 서머싯 공작이 임명되었다. 하지만 그의 입지는 불안정했고, 1449년 재개된 전쟁에서 영국의 패배로 리처드의 지지자들에게 비판을 받았다[382]. 서머싯은 헨리 6세의 아내인 앙주 마르그리트와 가까운 동맹자가 되어 헨리 6세를 통제했고, 두 사람의 불륜설이 돌았다. 1453년 헨리와 마르그리트의 아들인 에드워드 오브 웨스트민스터가 태어나자 서머싯이 그의 아버지라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383].

1450년 4월 15일, 영국은 포르미니 전투에서 패배하며 프랑스가 노르망디를 재점령할 기회를 제공했다. 켄트에서는 왕실에 대한 반감이 커져 반란이 일어났고, 이는 장미 전쟁의 시작으로 여겨진다[384]. 반란군은 Jack Cade를 지도자로 삼아 왕권의 부정부패와 사법 왜곡, 선거 부정을 비난했다. 그들은 런던 일부를 점령하고 국고 감사원장 제임스 파인스를 처형했다[385]. 반란군은 사면을 받았지만, Cade를 비롯한 주요 인물들은 처형되었다[386]. 이 반란은 리처드 오브 요크가 왕권에서 배제되었다는 불만과 연결되어, 그의 개혁주의적 입장에 힘을 실어주었다. 리처드 오브 요크는 1452년과 1453년에 갇혀 지내면서 아일랜드에서 돌아와 왕실의 행정 개선을 요구했고, 여름까지 권력 투쟁에서 밀려난 듯 보였다[387].

이 시기 헨리는 정사에 거의 관여하지 못했고, 프랑스의 찰스 6세로부터 물려받은 정신 질환 증세를 보였다[388]. 군사적 지도력이 부족했기에 프랑스 전장에서 영국군은 약화되었고, 1450년 포르미니 전투에서 패배했다. 헨리는 종교와 학문에 관심이 많았고 소극적인 성격이었기에, 당시 시대에는 효과적인 왕이 되기 어려웠다[389]. 1453년 7월 17일, 영국군은 카스티용 전투에서 패배하며 프랑스 내 모든 영토를 잃고 백년 전쟁이 종식되었다. 헨리는 정신 붕괴를 겪으며 새로 태어난 아들 에드워드를 알아보지 못했다[390]. 1454년 3월 22일, 대신 존 켐프 추기경이 사망하고 헨리는 후임자를 지명할 수 없어 정부 운영이 어려워졌다[391].

중앙 집권 체제의 약화와 왕의 부재는 귀족 가문 간의 불화, 특히 Percy-Neville feud와 Bonville-Courtenay feud를 중심으로 정치 불안을 심화시켰다[392]. 이는 내전으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1454년 3월 27일, 리처드 오브 요크는 총리 대리와 주요 고문으로 임명되었고, 처남인 리처드 네빌을 총리로 임명하여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를 견제했다. 이로써 요크는 워윅 백작 리처드 네빌 16세를 얻게 되었고, 그는 왕국에서 가장 강력한 가문 중 하나였다. 요크는 서머싯을 제거하고 런던 탑에 가두었다[393].

1455년 헨리가 회복되면서 리처드 오브 요크의 성과를 뒤집었고[394], 서머싯은 석방되어 복귀하고 요크는 궁정을 떠나야 했다. 하지만 워릭 백작과 그의 아버지 솔즈버리 백작은 요크 가문을 지지했다[395]. 헨리 6세와 귀족 위원회는 5월 22일 레스터에서 대의원회를 열기로 했지만, 요크는 반역죄로 몰릴 것을 우려하여 세인트올번스에서 왕족 당과 충돌하기 위해 군대를 모았다[396].

4. 4. 요크 가문의 반란기(1455-1460)

1377년 에드워드 3세 사후 왕위 계승 문제는 장미 전쟁의 근본 원인으로 지목된다.[1] 에드워드 3세의 두 아들, 흑태자 에드워드와 클래런스 공작 라이오넬이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하면서 왕위 계승에 대한 주장을 가진 세 아들이 남게 되었다. 그들은 랭커스터 공작 존 오브 곤트, 요크 공작 에드먼드, 글로스터 공작 토마스였다.

흑태자의 아들 잉글랜드의 리처드 2세는 삼촌들보다 왕위 계승 순위에서 우선한다는 원칙에 따라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다. 그러나 리처드는 미성년자였고, 형제가 없었으며, 삼촌들은 정치적으로 강력하고 야심 차 있었기 때문에 왕국 내에 상당한 불확실성이 있었다.[2] 결국 에드워드 3세는 그의 손자인 리처드 2세에게 왕위를 계승했는데, 그는 겨우 10살에 왕위에 올랐다.[3]

장자 상속제에 따르면, 리처드가 적법한 상속인 없이 사망하면 그의 계승자는 에드워드 3세의 둘째 아들인 클래런스 공작의 후손이 될 것이다. 클래런스의 외동딸인 얼스터 백작 부인 필리파는 모티머 가문과 결혼하여 아들 마치 백작 로저 모티머를 두었는데, 그는 기술적으로 가장 좋은 법적 계승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376년 에드워드 3세가 발표한 법령은 계승권을 그의 남계로 제한했기 때문에, 그의 셋째 아들인 존 오브 곤트가 클래런스의 후손보다 앞서게 되었다.[1]

헨리 4세는 즉위 직후 1400년에 일어난 "에피파니 봉기"라는 폐위 시도에 직면했다. 이 시도는 실패했고, 네 명의 음모자는 모두 처형되었으며, 리처드 2세는 얼마 후 폰테프랙트 성에서 "원인 불명"으로 사망했다.[14] 서쪽 웨일스에서는 웨일스인들이 일반적으로 리처드 2세의 통치를 지지했고, 헨리 4세의 즉위는 오웬 글린더가 이끄는 웨일스의 대규모 반란을 촉발했다.[15] 글린더의 반란은 헨리 4세의 통치 기간을 넘어 1415년까지 지속되었다.[15] 반란 중 글린더는 튜더 가문의 일원들로부터 지원을 받았는데, 이 가문은 훗날 장미 전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토지, 돈, 왕실의 호의에 대한 약속을 둘러싼 분쟁은 퍼시 가문을 이끄는 헨리 퍼시와 토마스 퍼시가 헨리 4세에 대항하여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키게 했다. 첫 번째 도전은 1403년 슈루즈베리에서 패배했고 워스터는 처형되었으며,[16] 두 번째 시도는 1408년 브램햄 무어에서 실패했고, 노섬벌랜드는 사망했다. 헨리 4세는 1413년에 사망했고, 그의 아들 헨리가 헨리 5세로 즉위했다.[17]

헨리 5세는 프랑스 왕위에 대한 오래된 왕조적 주장을 되살렸고, 상업적 분쟁과 프랑스가 오웬 글린더에게 제공한 지원을 ''카수스 벨리''로 이용하여 1415년 프랑스를 침략했다.[18] 헨리 5세는 프랑스 원정 직전에 사우스햄프턴 음모라는 형태로 그의 권위에 대한 중대한 도전에 직면했다. 이는 토마스 그레이 경, 헨리 스크로프, 그리고 리처드 오브 코니스버러가 주도했는데, 후자는 요크 공작 1세인 에드먼드 오브 랭글리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들은 헨리 5세를 에드먼드 모티머로 대체하려 했다. 모티머는 충성을 유지하고 헨리 5세에게 음모를 알렸고, 헨리 5세는 세 명의 배후자 모두를 처형했다.[19]

헨리 5세는 9월 22일 아르플뢰르를 함락했고 10월 25일 아쟁쿠르에서 프랑스군을 결정적으로 패배시켜 프랑스 귀족의 상당수를 몰살했다. 아쟁쿠르 전투와 헨리 5세의 후속 원정은 랭커스터 왕가의 정통성과 프랑스 왕위에 대한 헨리 5세의 주장을 확고히 했다. 1420년, 헨리 5세와 샤를 6세는 트루아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프랑스 왕위 계승에서 프랑스의 도팽 샤를을 제외하고, 샤를의 딸 카트린 드 발루아를 헨리 5세와 결혼시켰으며, 그들의 장래 아들들을 프랑스 왕위의 합법적인 계승자로 인정했다.[20]

리처드 오브 코니스버러의 아들인 리처드 오브 요크는 아버지가 처형되었을 때 네 살이었다. 그의 숙부인 에드워드가 아쟁쿠르 전투에서 자식 없이 사망했으므로, 헨리 5세는 리처드 오브 요크가 요크 공국의 작위와 토지를 상속하도록 허락했다. 에드먼드 모티머가 1425년에 자식 없이 사망했을 때, 리처드 오브 요크은 머치 백작령도 상속받았고, 고인이 된 어머니(에드먼드 모티머의 누이)를 통해 모티머의 왕위 계승 주장도 이어받았다.

최근 카트린과 결혼한 헨리 5세 자신에게는 세 명의 남동생이 있었고, 왕관에 대한 랭커스터 가문의 주장이 확고하다고 의심하지 않았다. 1421년 12월 6일, 카트린은 아들 헨리를 낳았다. 그 이듬해 헨리 5세는 이질로 사망했고, 그의 아들은 불과 아홉 달 만에 왕위에 올랐다.[21] 헨리 5세의 남동생들은 살아남은 합법적인 상속인을 남기지 않았고, 보포르 가문만이 대안적인 랭커스터 가문의 계승자로 남았다. 리처드 오브 요크가 성년에 이르고 헨리 6세의 통치가 악화됨에 따라 요크의 왕위 계승 주장이 더욱 매력적으로 보였다. 그의 영지에서 나오는 수입 또한 그를 왕국에서 가장 부유한 거물로 만들었다.

어린 시절부터 잉글랜드의 헨리 6세는 다툼이 많은 측근과 고문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의 아버지의 동생이자 살아남은 가장 어린 삼촌인 글로스터 공작 험프리(Humphrey, Duke of Gloucester)는 헨리가 성년이 될 때까지 섭정(Lord Protector)이 되고자 했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 대중의 인기를 의도적으로 얻으려 했지만, 그의 이복 삼촌인 헨리 보퍼트 추기경(Cardinal Henry Beaufort)의 반대에 부딪혔다. 해외에서는 프랑스가 잔 다르크(Joan of Arc) 주위에 결집하여 오를레앙의 포위 공격[22]과 파테이 전투에서 영국군에게 큰 패배를 안겨주었고, 헨리 5세가 거둔 많은 성과를 뒤집어 1429년 7월 17일 랭스에서 도팽이 샤를 7세로 즉위하도록 이끌었다. 헨리는 7세의 나이로 샤를의 즉위에 대한 대응으로 얼마 지나지 않은 11월 6일에 헨리 6세로 정식 즉위했다. 이 무렵 헨리의 어머니 발루아의 캐서린은 오웬 튜더와 재혼하여 두 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그들은 에드먼드 튜더(Edmund Tudor, 1st Earl of Richmond)와 재스퍼 튜더(Jasper Tudor)로, 둘 다 다가오는 전쟁의 마지막 단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헨리는 1437년 16세에 성년이 되었다. 그러나 베드퍼드는 2년 전인 1435년에 사망했고, 보퍼트는 그 이후로 공적인 일에서 상당 부분 물러났는데, 그 이유는 부분적으로 그의 동맹자인 서퍽 백작 윌리엄 드 라 폴이 왕실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보퍼트와 마찬가지로 서퍽은 프랑스의 악화되는 상황에 대한 외교적 해결책을 군사적 해결책보다 선호했는데, 이는 본질적으로 폭력과 유혈 사태를 싫어했던 헨리와 공감하는 입장이었다.[23] 서퍽은 글로스터와 부상하는 요크의 리처드의 반대에 직면했는데, 그들은 모두 프랑스에 대한 군사적 해결책을 계속 추진하는 것을 선호했다. 서퍽과 보퍼트 가문은 종종 그들의 매파 성향이 덜했던 것을 선호하는 왕으로부터 많은 돈, 토지, 그리고 중요한 정부 및 군사 직책을 받았고, 프랑스에서 리처드와 글로스터의 군사 작전에서 꼭 필요한 자원을 전용하여 리처드가 보퍼트 가문에 대한 격렬한 적개심을 키우게 했다.

서퍽은 1444년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에 평화를 중재하기 위한 투르 조약의 주요 설계자로서 궁정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계속 키웠다. 서퍽은 헨리와 앙주 공작 샤를 7세의 먼 친척인 앙주의 마가렛의 결혼을 협상하여 전략적으로 중요한 메인과 앙주 땅을 얻었다.[24] 비록 서퍽이 자신의 노력으로 백작에서 후작으로 승진했지만(1448년 공작이 될 것이다), 프랑스에 토지를 할양해야 한다는 조약의 조항은 상당한 반발을 우려하여 영국 대중에게 비밀로 유지되었지만, 헨리는 그 조약을 고집했다. 2년 후인 1447년에 서퍽은 글로스터가 반역죄로 체포되도록 했다. 글로스터는 재판을 기다리는 동안 사망했고, 당시 일부 사람들은 서퍽이 그를 독살했다고 의심했다.[25] 요크의 리처드는 프랑스에서의 명예로운 지휘권을 박탈당하고 10년 임기의 상대적으로 먼 아일랜드 영지를 다스리도록 보내져 궁정의 일에 간섭할 수 없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 잉글랜드는 프랑스에서 계속 역전을 겪었다. 이제 왕좌 뒤의 주요 실세가 된 서퍽은 이러한 손실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 또한 메인과 앙주를 프랑스에 할양하라는 불리한 요구에 대한 비난도 서퍽에게 돌아갔지만, 그는 그러한 요구에 대한 협상 중에 어떤 약속도 하지 않았다고 계속 주장했다. 1450년에 서퍽은 체포되어 런던 탑에 투옥되고 하원에서 탄핵을 당했다. 헨리는 개입하여 서퍽을 5년 동안 추방했지만, 칼레로 가는 도중 서퍽은 체포되어 1450년 5월 2일에 처형되었다.[26] 서퍽의 뒤를 이어 헨리 보퍼트의 조카인 섬머셋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가 프랑스와의 평화를 추구하는 파벌의 지도자가 되었고, 1448년 리처드의 프랑스 지휘관직 대체자로 임명되었다. 섬머셋의 정치적 입지는 다소 불안정했는데, 적대 행위가 재개된 후 1449년 영국의 군사적 실패로 인해 궁정에서 리처드의 동맹국의 비판에 취약해졌다. 섬머셋은 이때 헨리의 아내인 앙주의 마가렛과 가까운 동맹이 되었다.[27] 마가렛 자신은 유순한 왕 헨리를 거의 완전히 장악했고, 섬머셋과의 깊은 우정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두 사람이 불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의심하게 되었는데, 실제로 1453년 헨리와 마가렛의 아들인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가 태어났을 때, 섬머셋이 아버지라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1450년 4월 15일, 영국은 포르미니 전투에서 프랑스에 큰 패배를 당했고, 이는 프랑스가 노르망디를 재정복하는 길을 열었다. 같은 해 켄트에서 잭 케이드의 반란이라는 폭력적인 대중 봉기가 일어났는데, 이는 장미 전쟁의 전조로 여겨진다. 반군 지도자 잭 케이드의 지휘 아래 작성된 반군 선언문인 ''켄트 가난한 공동체의 불만''은 왕관을 착취, 정의의 왜곡, 선거 사기로 비난했다. 반군들은 런던의 일부 지역을 점령했고, 인기 없는 재무장관인 제임스 피네스를 처형했다.[28] 그들은 사면받은 것으로 여겨진 후 해산되었지만, 케이드를 포함한 여러 주동자들이 나중에 처형되었다. 반란 후 케이드와 그의 추종자들의 불만은 요크의 리처드가 자신이 부당하게 배제되었다고 느끼는 왕실 정부에 대한 반대의 기초가 되었다. 요크의 리처드는 아일랜드에서 돌아와 런던으로 갔다. 자신을 개혁가로 내세우며 더 나은 정부를 요구했고, 결국 1452년과 1453년 대부분을 투옥당했다. 그 해 여름까지 리처드는 권력 다툼에서 패한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다툼 내내 헨리 자신은 절차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외할아버지인 프랑스의 샤를 6세로부터 물려받았을 가능성이 있는 여러 정신 질환 증상을 보였다. 군사 문제에 대한 그의 거의 전적인 무능력은 프랑스의 영국군을 흩어지고 약하게 만들어 1450년 포르미니에서 패배하기 쉽게 만들었다. 헨리는 종교와 학문에 더 관심이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는데, 이는 그의 소심하고 수동적인 성격과 전쟁에 대한 선의가 아니더라도 혐오감과 결합되어 그를 당시에 무능한 왕으로 만들었다.[29] 1453년 7월 17일, 프랑스 남부의 영국군은 카스티용 전투에서 참패를 당했고, 잉글랜드는 칼레 해협을 제외한 프랑스의 모든 영토를 잃어 유럽의 권력 균형을 바꾸고 100년 전쟁을 끝냈다. 아마도 이 소식에 대한 반응으로 헨리는 완전한 정신 붕괴를 경험했고, 그 동안 그는 자신의 신생아 아들 에드워드를 알아보지 못했다. 1454년 3월 22일, 대법관인 존 켐프 추기경이 사망했고, 헨리는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왕의 이름으로 정부를 운영하는 것이 헌법적으로 불가능해졌다.

중앙 권력의 부재는 불안정한 정치 상황을 계속 악화시켰고, 특히 퍼시-네빌 가문의 싸움과 본빌-쿠르트네이 가문의 싸움과 같은 더 강력한 귀족 가문 사이의 오랜 불화를 중심으로 양극화되어 내전을 일으킬 만한 불안정한 정치적 분위기를 조성했다. 국가를 통치할 수 있도록 섭정 의회가 설립되었고, 마가렛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1454년 3월 27일 섭정이자 수석 고문으로 임명된 요크의 리처드가 이끌었다. 요크는 그의 매형인 솔즈베리 백작 리처드 네빌을 대법관으로 임명하여 네빌 가문을 주요 적수인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에 대항하여 지원했다. 네빌 가문을 지원함으로써 요크는 왕국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거물 중 한 명인 솔즈베리 백작의 아들인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이라는 중요한 동맹을 얻었다. 요크는 섬머셋을 그의 직책에서 해임하고 런던 탑에 투옥했다.

1455년 헨리는 정신 불안정에서 놀라운 회복을 했고, 요크의 리처드의 진전을 상당 부분 뒤집었다. 섬머셋은 석방되어 총애를 되찾았고, 요크는 궁정에서 쫓겨나 추방되었다. 그러나 주로 워릭 백작과 그의 아버지인 솔즈베리 백작과 같은 불만을 가진 귀족들은 정부 통제에 대한 경쟁자인 요크 가문의 주장을 지지했다. 헨리, 섬머셋, 그리고 소수의 귀족으로 구성된 의회는 런던의 섬머셋의 적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레스터에서 5월 22일에 대의회를 열기로 결정했다. 반역죄 혐의가 제기될 것을 두려워한 요크와 그의 동맹은 의회에 도착하기 전에 왕실 일행을 요격하기 위해 군대를 모아 세인트올번스에서 만났다.[30]

에드워드는 1461년 6월 28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공식적으로 잉글랜드 국왕으로 즉위했다.[46] 에드워드는 패배한 적들의 마음을 얻고자 했다. 그는 토턴 전투에서 승리한 후 항복한 랭커스터 가문의 많은 사람들을 사면했고, 그들의 재산과 작위를 유지하도록 허락했다.

워릭은 에드워드의 후원으로 큰 이익을 얻었고, 나라에서 가장 강력한 귀족이 되었다. 그는 부모 양쪽의 토지와 작위를 상속받았고, 잉글랜드 해군 원수, 랭커스터 공국의 청지기를 비롯한 여러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 1462년 여름, 워릭은 스코틀랜드와 휴전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필타운 전투에서 토마스 피츠제럴드, 7대 데스몬드 백작이 이끄는 요크 가문 군대가 존 버틀러, 6대 오먼드 백작이 이끄는 랭커스터 가문 군대를 결정적으로 패배시켰다.[47] 이로 인해 오먼드 가문은 망명길에 올랐고, 아일랜드에서 랭커스터 가문의 야망은 끝났다.[48] 그해 10월, 앙주 백작부인 마가렛은 프랑스에서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를 침공하여 알닉 성과 밤버러 성을 점령했다. 하지만 이 성들은 3개월 만에 다시 요크 가문의 손에 들어왔다.

1463년 봄, 랄프 퍼시 경이 노샘 성을 포위 공격하면서 헨리 6세를 지지하는 반란이 영국 북부에서 일어났다. 1463년 말까지 스코틀랜드와 프랑스와 별도의 휴전 협정이 체결되어 워릭은 1464년까지 북부에서 잃었던 영토 대부분을 회복했다. 그러나 랭커스터 가문의 주력군은 노섬벌랜드를 통해 남쪽으로 이동했고, 1464년 5월 15일 헥섬 전투에서 존 네빌, 1대 몽태규 후작이 이끄는 요크 가문 군대에 의해 궤멸되었다. 랭커스터 가문의 세 지휘관인 헨리 보퍼트, 3대 서머싯 공작, 토마스 로스, 9대 로스 남작, 로버트 헝거포드, 3대 헝거포드 남작이 포로로 잡혀 처형되었다. 요크 가문 군대는 리블 강 근처 숲에서 폐위된 왕 헨리 6세를 사로잡았고,[49] 런던으로 압송되어 런던탑에 감금되었다.[50] 서머싯의 군대가 패배하고 헨리가 포로가 되면서 에드워드의 통치에 대한 모든 효과적인 저항은 사라졌다.

에드워드는 그의 아들이 살아있는 동안 헨리를 죽이는 데 이익을 보지 못했고, 대신 허약한 포로로 랭커스터 가문의 계승권을 유지하는 것을 선호했다. 마가렛과 에드워드 왕자는 스코틀랜드를 떠나 마가렛의 사촌인 프랑스 루이 11세의 궁정으로 항해했고, 그곳에서 수년간 가난한 망명 생활을 했다.

왕위가 안정되자 에드워드는 국내외 야망을 추진할 수 있었다. 국제적으로 에드워드는 부르고뉴 공국과의 전략적 동맹을 선호했지만, 워릭은 그를 설득하여 프랑스의 루이 11세와 조약을 협상하게 했다. 협상에서 워릭은 에드워드가 프랑스 왕관과의 결혼 동맹을 고려할 것이라고 제안했는데, 예비 신부는 루이의 시누이인 사보이의 보나 또는 그의 딸인 프랑스의 앤이 될 것이었다. 1464년 10월, 워릭은 4개월 전인 5월 1일에 에드워드가 랭커스터 귀족의 미망인인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비밀리에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고 상당히 당황하고 분노했다. 엘리자베스에게는 12명의 형제 자매가 있었고, 그중 일부는 유명한 가문과 결혼하여 우드빌 가문은 워릭의 통제를 벗어난 강력한 정치 세력이 되었다. 이 결혼은 많은 사람들이 추측했던 것처럼 워릭이 섭정이 아니었음을 보여주었고, 공작이나 백작의 딸도 아닌 여성과의 결혼은 왕족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에드워드의 추밀원 의원들의 비판을 받았다. 워릭은 엘리자베스와 그녀의 어머니인 룩셈부르크의 자케타를 마녀로 고발하여 잃어버린 영향력을 회복하려고 시도했지만, 이 음모는 실패했지만 워릭과 에드워드의 관계를 깨뜨리지는 못했다.

에드워드의 신부 선택은 그의 통치 기간 내내 그를 정치적으로 괴롭혔다. 정치적으로 이 결혼은 워릭이 프랑스를 속여 왕이 결혼 제안에 헌신했다고 믿게 했다는 비난을 받게 했다. 엘리자베스의 가족은 중요한 지위에 오르기 시작했고, 에드워드의 장인인 리버스 백작은 대장관으로 임명되어 부르고뉴 동맹을 지지했다. 워릭의 몰래 에드워드는 1466년 10월에 이미 부르고뉴와 비밀리에 조약을 체결했고, 워릭은 프랑스 궁정과의 운명적인 협상을 계속했다. 1467년 에드워드는 워릭의 형제인 요크 대주교 조지 네빌을 대법관직에서 해임했고, 왕은 워릭의 장녀인 클라렌스 공작 부인 이자벨과 에드워드의 형제인 클라렌스 공작 조지 플랜태저넷 사이의 결혼 제안을 거절했다. 여러 가지 이유로 클라렌스는 형의 간섭에 매우 분개했다. 1468년 에드워드는 프랑스로부터 저지를 탈환했다.

1469년 4월, 요크셔에서 레즈데일의 로빈으로만 알려진 지도자 휘하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다음 달에 랭커스터를 지지하는 두 번째 반란이 발생하여 퍼시를 노섬벌랜드 백작으로 복위시킬 것을 요구했다. 이 반란은 몽태규 후작 존 네빌 백작에 의해 신속하게 진압되었지만, 그는 레즈데일의 행동을 진압하려는 시도를 거의 하지 않았다. 워릭과 클라렌스는 여름 동안 공식적으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모았지만, 7월 초 칼레로 여행을 떠나 클라렌스와 이자벨이 워릭의 주재하에 결혼식을 올렸다. 그들은 런던으로 돌아와 군대를 집결시켰는데, 명목상으로는 왕의 측근에서 '악한 조언자들'을 제거하고 선정을 재확립하기 위해서였고, 요크셔 반군과 합류하기 위해 북쪽으로 이동했다. 비밀리에 워릭은 에드워드를 폐위하고 19세의 클라렌스를 왕위에 올리기를 바랐다.

레즈데일은 1469년 7월 26일 에지코트 전투에서 왕실 군대를 물리쳤다. 레즈데일은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왕실 사령관 펨브룩 백작 윌리엄 허버트와 데번 백작 험프리 스태퍼드는 모두 포로로 잡혀 처형되었다.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아버지인 리버스 경과 그의 형제인 존 우드빌 경은 체포되어 살해되었다.[51] 전투 후 에드워드는 조지 네빌에게 포로로 잡혀 미들함 성에 감금되었다. 곧 반군들에게 워릭이나 클라렌스가 상당한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고, 증가하는 혼란을 진압할 수 없었던 에드워드는 그 해 9월 석방되어 왕으로서의 직무를 재개했다. 1470년 3월, 워릭과 클라렌스는 정치적 불안을 이용하여 1470년 링컨셔 반란을 선동하여 에드워드를 북쪽으로 유인하여 워릭의 부하들에게 붙잡히도록 하려고 했다. 1470년 3월 12일, 에드워드는 루즈코트 필드 전투에서 요크셔 반군을 격파하고 반란의 지도자인 윌로비 드 에레스비 남작을 사로잡았는데, 그는 워릭과 클라렌스를 반란의 "공범이자 주동자"로 지목했다. 두 사람의 공모를 증명하는 물적 증거도 발견되었고, 그들은 5월에 프랑스로 도망쳤다. 윌로비는 참수되었고 그의 토지는 몰수되었다.

워릭이 국왕에게 불만을 품고 있는 것을 이용하려던 프랑스의 루이 11세는 헨리 6세를 즉위시키기 위해 워릭과 그의 숙적이었던 앙주 백작부인 마가렛 사이의 화해를 주선했다. 그 합의의 일환으로 워릭은 자신의 딸인 앤을 마가렛과 헨리의 아들이자 왕위 계승자인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와 결혼시키기로 동의했다.

4. 4. 1. 반란 근거지, 세인트올번스

리처드 오브 요크 3세는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런던 남쪽으로 3,000~7,000명의 병력을 데리고 원정에 나섰으며, 1455년 5월 22일 런던 북쪽의 세인트올번스에서 헨리 6세의 2,000명 군대와 맞붙었다. 이 전투에서 양측 사망자는 160명 이하였으나, 요크 가문의 결정적인 승리를 가져왔다[397]. 헨리 6세는 요크 가문의 군대에 포위되어 포로로 잡혔다. 요크 가문의 정적인 에드먼드 보포트, 2세 서머싯 공작, 헨리 퍼시, 2세 노퍽 백작, 토마스 클리포드, 8세 클리포드 남작 등이 전사했다[398]. 헨리 6세가 포로로 잡힌 동안 요크는 다시 의회에서 임시 경영자로 임명되어 요크 가문이 영향력을 되찾았다.

요크 가문은 일시적인 안정 덕분에 빠르게 세력을 확장했다. 특히 리처드 네빌, 16세 워윅 백작은 칼레 선장으로서 영국 해협에서 반해적 작전을 수행하여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다[399]. 워윅 백작은 의회에서 요크 공을 옹호하며 그의 아버지 리처드 네빌, 5세 솔즈베리 백작보다 더 중요한 동맹으로 부상했다[400]. 칼레 항구를 장악한 워윅 백작은 잉글랜드에서 가장 큰 상비군을 지휘할 수 있었다. 헨리 6세의 왕비 마르그리트는 워윅 백작을 왕위의 위협으로 간주하여 그의 보급로를 차단하려 했으나, 1457년 8월 프랑스가 샌드위치를 침공하자 워윅 백작을 방어하기 위해 자금을 지원해야 했다. 1456년 2월, 헨리 6세는 정신을 회복하고 잉글랜드를 통치하기 시작했지만, 불안한 평화 속에서도 네빌 가문과 퍼시 가문 간의 충돌은 계속되었다[401]. 헨리 6세는 사회적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1458년 3월 25일 성 바울 대성당에서 두 가문의 화해를 시도했으나, 양측은 곧 다시 반란을 모의했다[401].

4. 4. 2. 요크의 왕위 차지 시도



헨리가 영국 내 평화를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왕권에 대한 불만을 가졌던 워릭은 1458년 5월 카스티야 함대와 그 후 며칠 뒤 하노베르 연맹 함대를 공격하는 등의 활약을 펼쳤다.[402] 워릭이 지휘하는 칼레에서의 지위는 그에게 프랑스의 샤를 7세와 부르고뉴의 필립 굿과의 외교 관계를 확립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이후 워릭은 이러한 국제적 연결고리를 활용하게 된다. 이러한 공격에 대응하여 워릭, 요크, 그리고 솔즈베리는 런던에서 조사를 받기 위해 소환됐다. 하지만, 그들은 동맹에서 분리되면 체포될까 봐 걱정하여 이에 대한 출석 요청을 거부했다[403]. 대신, 요크는 네빌 가문을 웨일스 국경 지역에 위치한 그의 주성인 러들로 성으로 소환했다. 워릭은 이에 맞서 요크군의 본대에 합류하기 위해 칼레에서 일부 군대를 데리고 떠났다[404].

이 기간 동안 마가렛 왕비는 헨리를 위해 무장 지원을 적극적으로 모집하고 그녀가 직접 선발한 기사와 경호병들에게 은빛 백조 문양의 계몽 문장을 배포했다[405]. 워릭이 합류하기 전에, 1459년 9월 23일 블로어 히스 전투에서 솔즈베리가 지휘하는 요크군 5,000명의 병력은 제임스 투chet 제5대 오들리 남작이 이끄는 2배 이상의 랭커스터군에게 습격을 받았다[406]. 랭커스터군은 패배하였고, 오들리 남작은 전투 중에 사망했다[407]. 9월에 워릭은 영국으로 건너가 러들로로 북쪽으로 이동했다. 인근 럿포드 다리(Ludford Bridge)에서 워윅의 칼레 주둔 부대 앤드루 트롤로프의 배신으로 요크군은 해산되었다[408].

아일랜드 지사로 남아 있던 요크 공은 자신의 둘째 아들인 럿랜드 백작 에드먼드와 함께 더블린으로 도망쳤고, 워윅과 솔즈베리는 요크 공의 상속인인 마치 백작 에드워드와 함께 칼레로 항해했다[409]. 랭커스터 세력은 워윅 대신 새로운 칼레 사령관으로 헨리 보 포트를 임명했지만, 요크 세력은 수비대의 충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345]. 럿포드 다리에서의 승리 후, 랭커스터 세력은 요크, 그의 아들, 솔즈베리, 워윅을 명예 박탈하고자 코벤트리에서 "악마의 의회"를 소집했지만, 이 의회의 행동으로 많은 무소속 군주들이 자신의 직위와 재산을 위협받게 되었다[410]. 1460년 3월, 워윅은 가스콘의 듀라스 부주임의 보호 하에 아일랜드로 항해하여 요크 공과 계획을 합의했고[411], 헨리 홀랜드, 제3대 엑서터 공이 지휘하는 왕실 함대의 추격을 피해 칼레로 돌아갔다.[412][413]

1460년 6월 말, 워윅, 솔즈베리, 에드워드는 해협을 건너 런던으로 북상하여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솔즈베리는 런던 타워를 포위할 병력을 남겨두고, 워윅과 에드워드는 헨리를 추격하여 북상했다[414]. 요크 세력은 1460년 7월 10일 노샘프턴에서 랭커스터 세력을 만나 전투에서 승리했다. 험프리 스태퍼드, 제1대 버킹엄 공작, 존 탈봇, 제2대 슈루즈베리 백작, 존 보몬트, 제1대 비콘트 보몬트, 토마스 퍼시, 제1대 에그레몬트 남작 모두 자신의 왕을 지키기 위해 전사했다[415]. 한편 헨리는 요크파에 잡혀 런던으로 호송되었으며 요새의 항복 요구를 강제로 받게 되었다.

그해 9월, 요크 공은 아일랜드에서 돌아와 10월 의회에서 영국 왕위를 요구하는 의미에서 왕좌 위에 손을 얹는 상징적인 제스처를 취했다[416]. 이 행위는 의회에 충격을 주었다[417]. 심지어 요크 공의 가장 가까운 지지자들도 이러한 행동을 지원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418]. 판사들은 요크 공의 청구를 검토하고, 공법 원칙으로는 누가 왕위 계승에서 우선순위를 가지는지를 결정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법 이상이며 학문 이상"이라고 선언했다[419]. 당시 군주들이 헨리를 대체하려는 욕구가 없었기 때문에 요크 공의 청구를 지지할 충분한 지지가 없어 타협이 이루어졌다. 1460년 10월 25일, '합의령'이 통과되었으며, 이는 헨리의 사망 후 그의 아들 에드워드 오브 웨스트민스터를 배제하고 왕위를 요크 공에게 넘기기로 결정한 것이었다[420]. 그러나 이 타협은 금방 좌절되었으며,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다[421].

4. 4. 3. 리차드 요크의 죽음

1460년 말, 마가렛 왕비의 군대는 요크셔를 장악하며 랭커스터파 세력을 결집시켰다.[216] 요크 공작 리처드는 솔즈베리 백작과 함께 북부의 랭커스터 군을 치기 위해 런던을 출발, 12월 21일 웨이크필드 근교의 사달 성에 들어갔다. 마가렛 왕비의 군세는 요크 공작의 4배에 달했고, 요크 공작은 원군을 기다리며 성에 머물렀지만, 랭커스터군은 이를 포위하여 식량 보급을 차단했다.[224]

12월 30일, 요크 공작은 성을 나서 랭커스터군에 야전을 걸었으나, 웨이크필드 전투는 랭커스터군의 승리로 끝났다. 요크 공작과 17세의 차남 럿랜드 백작 에드먼드가 전사했고, 솔즈베리 백작은 붙잡혀 참수되었다.[225] 마가렛 왕비는 요크 공작의 목에 종이 왕관을 씌운 후, 그들의 목을 요크의 성문에 내걸었다.[226][217]

4. 4. 4. 요크파의 승리(1461)



잉글랜드에드워드 4세는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요크 가문이 패배한 이후, 리처드 요크 공작의 18세 아들인 에드워드 마치가 요크 공작의 상속인이 되어 왕위를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425]. 에드워드는 잉글랜드 서부와 웨일스에서 튜더 가문이 이끄는 랭커스터 군대가 북부에서 자신과 대치하는 랭커스터 군대와 합류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

1461년 2월 2일, 그는 Mortimer's Cross에서 랭커스터 군대를 패배시켰으며[426], 헨리 5세의 미망인 캐서린 드 발루아의 남편이었던 오웬 튜더는 병사들에게 처형되었다[427]. 해가 뜨는 동안 세 개의 태양이 떠오르는 듯한 기상 현상인 parhelion이 나타나 기사들은 두려워했지만, 에드워드는 이것이 삼위일체를 상징하며 자신들의 대의에 대한 신의 축복이라고 설득했다[428]. 이후 에드워드는 태양을 상징하는 'sunne in splendour'를 개인 문양으로 채택했다[429][430].

북부에서 마거릿 앤주가 이끄는 랭커스터 군대가 승리한 후, 승리한 군대는 남쪽으로 이동했다. 헨리 6세를 포로로 잡은 채 워릭은 군대를 이끌고 로마 시대 도로로 알려진 워털링 스트리트의 세인트올번스에서 적을 맞이하기 위해 이동했다. 워릭의 군대는 방어 준비를 철저히 했지만[431], 결국 2월 17일 세인트올번스 2차 전투에서 패배했다[432].

헨리는 랭커스터 가문에 의해 풀려났고, 어린 아들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를 기사로 임명하고 총 30명의 랭커스터 가문 지도자들을 기사로 임명했다[433]. 워릭과 그의 군대는 에드워드가 모티머스 크로스에서 승리한 후 마치 지방의 요크 군대와 합류하기 위해 행군했다[434]. 세인트올번스에서 승리한 후 랭커스터 가문은 전략적 우위를 점했지만, 그들의 움직임은 런던 시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워릭과 에드워드는 적극적으로 런던으로 빠르게 진군했고, 급하게 소집된 집회에서 에드워드는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4세로 선언되었다[435]. 에드워드는 잉글랜드 국민들에게 더욱 매력적인 군주 후보였다. 동시대 사람인 필리프 드 코민은 그를 활기차고 잘생겼으며 상냥하다고 묘사했고, 그는 전장에서 완전한 갑옷과 화려한 의복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의 지지자들은 헨리의 신체적, 정신적 쇠약함이 그의 지지를 약화시켰다는 점을 강조하여 자신들의 지지 기반을 확보하려 했다[436].

에드워드와 워릭은 자신들의 지위를 굳건히 하기 위해 북쪽으로 이동하여 랭커스터 군대와 맞섰다. 워릭은 요크 군대의 선봉을 이끌고 3월 28일 페리브리지에서 랭커스터 군대와 교전했는데, 이 과정에서 부상을 입었고 랭커스터 가문의 지휘관인 클리퍼드와 워릭의 친척인 네빌 경이 전사했다. 에드워드는 다음 날인 3월 29일, 요크셔의 Towton에서 랭커스터 주력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는 잉글랜드 역사상 가장 크고 가장 많은 피를 흘린 전투 중 하나였다. 이 전투는 에드워드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안겨주며 북부 지역에서 랭커스터 가문의 권력을 무너뜨렸다. 랭커스터 궁정의 중심 인물들은 대부분 전사하거나 나라를 떠났다.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는 전사했고[437], 가장 뛰어난 랭커스터 지휘관 중 한 명인 앤드루 트롤로프도 전사했다. 또한 제임스 버틀러, 제5대 오먼드 백작 역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헨리, 마거릿, 그리고 그들의 아들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 왕자는 북쪽으로 스코틀랜드로 도망쳤다[438]. 에드워드는 대관식을 위해 런던으로 돌아갔고[439], 워릭은 랭커스터 군대의 저항을 진압하기 위해 북쪽에 남았다[440]. Towton 전투는 잉글랜드 국민들에게 에드워드가 당분간 잉글랜드를 안정적으로 통치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주었다[441][442]. 이에 따라 에드워드는 14명의 랭커스터 귀족과 96명의 기사 및 종신 재산 보유자들의 작위를 박탈하는 법안을 시행하려 했다[443].

4. 5. 요크파 에드워드 4세의 집권 및 통치(1461-1483)

헨리 6세의 군대에 다시 왕위에 복귀한 것은 오래가지 않았다. 바넷 전투가 벌어진 날, 마거릿은 그녀의 군대를 웨이머스에 상륙시키고 웨일스 변경지역에서 모집한 신병들과 함께 군대를 보강했다.[487] 바넷 전투에서 큰 패배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투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랭커스터 여왕 주변에 모였다. 에드워드는 랭커스터 군대가 세 번 강을 건너 웨일스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움직였다. 헨리 6세가 보낸 서신에 따르면, 글로스터의 총독인 리처드 보샴은 마거릿의 군대가 강을 건널 수 없도록 게이트를 막는 작전을 펼쳤다. 1471년 5월 4일, 에드워드는 튜크스베리 전투에서 마거릿의 군대와 전투를 벌여 승리했다. 헨리 6세와 마거릿의 외아들인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는 클래런스의 군대에 의해 죽었으며[488], 서머싯 공작과 존 커트니, 데번 백작 모두 죽음을 맞았다[489].

역사 기록의 왕실 선전가는 에드워드 4세의 귀환 이야기에서 왕군이 "작지만 무장도 잘하고 의지가 강했다"며 에드워드는 요크 공작령만을 위해 돌아왔다고 주장했다고 말했다[490]. 그러나 헨리 6세는 잉글랜드 남부 지역에서 약 3,000명이 노팅엄에 모였고 윌리엄 파와 제임스 해링턴과 그들의 60명 기병대를 만나는 등 자신의 관할 지역 외부에서 군대를 모집할 수밖에 없었고, 북부에서는 예상보다 적은 인원이 도착했다고 한다[491].

에드워드 4세는 5월 21일 런던에 입성했다. 그날 밤 또는 그 이후에 헨리 6세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의 죽음 원인으로는 아들의 죽음 소식에 의한 우울증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헨리의 유일한 후계자가 죽었으므로 에드워드가 전 왕의 살해를 지시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있다[492]. 앙주의 마거릿은 1475년 프랑스의 루이 11세에게 몸값을 지불받고 석방되어 남은 생애를 그곳에서 보내다 1482년 8월 25일에 사망했다[493].

바넷 전투와 튜크스베리 전투에서의 패배로 무장한 랭커스터가의 저항은 끝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에드워드 4세의 통치는 형제인 클래런스 공 조지와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 사이의 불화로 점차 분열되었다. 1476년 12월 22일, 클래런스의 아내 이사벨이 사망했다. 클래런스는 이사벨의 시녀 중 한 명인 앙카레트 트위니호가 그녀를 살해했다고 비난했고, 그 대가로 클래런스는 앙카레트를 살해했다. 앙카레트의 손자는 1478년 에드워드로부터 앙카레트의 사면을 받았는데, 이는 에드워드가 점점 경계하게 된 클래런스의 준군주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사례였다[494]. 1477년, 클래런스는 막 부르고뉴 공작 부인이 된 메리의 구혼자로 추천되었지만, 에드워드는 이 결혼을 반대했고, 클래런스는 왕실에서 멀어지게 되었다[495].

한편, 글로스터는 앤 네빌과 결혼했는데, 앤과 이사벨은 모두 워릭 백작 부인의 딸이었으므로 어머니의 상당한 재산을 상속받았다. 두 형제가 소유한 많은 부동산은 에드워드의 후원으로 얻은 것이었으며, 에드워드는 그들이 소유한 부동산을 취소할 권리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혼으로 얻은 재산은 그렇지 않았고, 이러한 차이점이 불화의 원인이 되었다[496]. 클래런스는 에드워드의 총애를 잃어갔고, 에드워드를 거스르는 반란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투옥되어 1478년 2월 18일 런던탑에서 처형당했다[497].

에드워드의 국내 통치는 비교적 평화로웠다. 그는 1475년에 프랑스를 침공했지만, 피키니 조약을 통해 7.5만파운드의 초기 지불금과 연간 5만파운드의 연금을 받기로 합의하고 철수했다[498]. 1482년에는 스코틀랜드 왕위를 찬탈하려 했지만 결국 잉글랜드로 돌아가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베윅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499]. 1483년, 에드워드의 건강이 악화되었고, 그는 죽기 전에 동생 리처드를 그의 12살 아들이자 후계자인 에드워드를 위한 수석 보호자로 지명했다. 1483년 4월 9일, 에드워드 4세는 사망했다[500].

리처드 3세 (1452년 10월 2일 ~ 1485년 8월 22일)는 1483년 6월 26일부터 1485년 사망할 때까지 잉글랜드 국왕이자 아일랜드의 영주였다. 그는 요크 왕가의 마지막 국왕이자 플랜태저넷 가문의 마지막 왕이었다. 그의 패배와 죽음은 장미 전쟁의 마지막 전투였던 보스워스 전투에서 일어났으며, 이는 잉글랜드 중세 시대의 종말을 나타냈다.

리처드는 그의 형 에드워드 4세가 즉위한 후 1461년에 공작으로 승격되었다. 1472년, 리처드는 리처드 네빌 워릭 백작의 딸인 앤 네빌과 결혼했다. 그는 에드워드 4세의 통치 기간 동안 잉글랜드 북부를 통치하고 1482년 스코틀랜드 침공에도 참여했다. 에드워드 4세가 1483년 4월에 사망했을 때, 리처드는 에드워드의 장남이자 계승자인 12세의 에드워드 5세의 잉글랜드 섭정으로 임명되었다. 1483년 6월 22일 에드워드 5세의 대관식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그의 부모의 결혼이 무효화되면서 왕위 계승 자격을 박탈당했다. 6월 25일, 귀족과 평민들의 모임은 리처드를 정당한 국왕으로 선포했고, 그는 1483년 7월 6일에 왕위에 올랐다. 에드워드와 그의 남동생인 리처드 슈루즈버리, 요크 공작, "탑 속의 왕자"는 8월 이후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훗날 튜더 왕조가 권력을 잡은 후 리처드 왕의 명령으로 살해되었다는 비난이 제기되었다.

리처드의 통치 기간 동안 두 차례의 큰 반란이 있었다. 1483년 10월, 에드워드 4세의 충실한 지지자이자 리처드의 전 동맹자인 헨리 스태포드 공작이 주도하는 반란이 일어났지만 실패했다. 1485년 8월, 헨리 7세와 그의 삼촌인 재스퍼 튜더가 프랑스 군대의 지원을 받아 남부 웨일스에 상륙하여 펨브로크셔를 행진하며 병사를 모집했다. 헨리의 군대는 마켓 보스워스 근처에서 리처드의 군대를 물리쳤고, 리처드는 전투에서 사망했다. 이로써 리처드는 전투에서 사망한 마지막 잉글랜드 국왕이 되었고, 헨리 튜더는 헨리 7세로 즉위했다.

4. 5. 1. 에드워드 4세의 대관식과 워윅의 권력 정점



에드워드 4세는 1461년 6월 28일 웨스트민스터 수도원에서 영국 왕으로 정식 선출되어 대관식을 치렀다[444]. 그는 패배한 적들의 마음을 얻으려 노력하며, 토우턴 전투 이후 자신의 통치를 받아들인 랭커스터 가문 사람들을 사면하고 그들의 재산 유지를 보장하려 했다[445][446].

워윅은 에드워드의 후원을 받아 막강한 권력을 누리며 국내 최고 귀족이 되었다[447]. 그는 부모의 땅과 지위를 상속받고[448], 영국 왕실의 고위 해군 직책, 랭커스터의 스튜어드 등 주요 직책을 맡았다[449]. 1462년 여름, 워윅은 스코틀랜드와의 휴전을 협상하는 데 성공했다. 한편, 아일랜드의 필타운에서는 데스먼드 백작 토마스 피츠제랄드가 이끄는 요크 가문 세력이 오먼드 백작 존 버틀러가 이끄는 랭커스터 연맹을 격파했다[450]. 이로써 랭커스터 연맹은 아일랜드에서의 계획을 중단하고 망명길에 오르게 되었다[451]. 같은 해 10월, 앙주의 마가렛은 프랑스 군대를 이끌고 영국을 침공하여 알니크 성과 밤버그 성을 점령했지만, 3개월 만에 요크 가문에게 진압당했다[452].

1463년 봄, 랄프 퍼시 경이 노어햄 성을 포위하면서 헨리를 지지하는 반란이 북부에서 일어났다[453]. 1463년 말, 워윅은 스코틀랜드, 프랑스와 휴전을 체결하여 1464년까지 북부 지역 대부분을 되찾았다[454]. 그러나 랭커스터 주요 군대는 북엠버랜드를 통과해 남하했지만, 1464년 5월 15일 존 네빌의 요크 군에게 헥스햄에서 패배했다[455]. 소머셋 공작 헨리 보우포트, 남쪽의 로스, 헝거포드 남작 등 랭커스터 지휘관들은 모두 포획되어 처형되었다. 요크 군은 헨리 6세를 리블 강 근처 숲에서 포획하여 런던으로 끌고 가 런던 탑에 가두었다[456][457]. 소머셋 공작 군대가 패배하고 헨리가 포획되면서 에드워드 4세 통치에 대한 저항은 사실상 사라졌다[458].

에드워드 4세는 헨리의 아들이 살아있는 한 그를 죽일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459]. 앙주의 마가렛과 왕자 에드워드는 스코틀랜드를 떠나 마가렛의 사촌인 루이 11세의 프랑스 궁전으로 망명하여 가난한 피난민 생활을 이어갔다[460].

4. 5. 2. 불만 고조 시기

엘리자베스 우드빌, 에드워드 4세의 부인이자, 여왕


정복과 협상을 통해 입지를 다진 에드워드는 국내외 야심을 펼칠 수 있었다. 국제적으로 에드워드는 부르고뉴 공국과의 전략적 연합을 선호했지만, 워윅은 그를 설득해 프랑스 왕 루이 11세와 조약을 맺도록 했다. 워윅은 협상에서 에드워드가 프랑스 왕가와 결혼할 수 있다는 것을 내비치며 루이 11세의 친척인 보나와 딸 프랑스의 앤 중 한 명과의 혼인을 제안했다.[461]

하지만 워윅은 1464년 10월, 에드워드가 4개월 전에 랭커스터 귀족의 과부인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비밀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고 큰 수치심과 분노를 느꼈다.[462] 엘리자베스는 12명의 형제자매가 있었는데, 그 중 일부는 저명한 가문과 결혼하여 우드빌 가문을 워윅의 통제를 벗어나 독립적인 권력 집단으로 만들었다.[463] 엘리자베스의 유력한 가문 출신이 아닌 여성과의 결혼은 에드워드가 고문들로부터 비판을 받는 이유가 되었다. 워윅은 엘리자베스와 그녀의 어머니인 자케타를 마녀로 비난하기도 했지만[466], 이는 별다른 정치적 영향력은 없었고 워윅과 에드워드 사이의 관계를 깨뜨릴 정도도 아니었다.[467]

이 결혼은 에드워드의 훗날을 악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468] 워윅이 프랑스와의 결혼 제안을 속인 것으로 의심받게 되었고, 엘리자베스의 가족들은 영국 왕실의 권력 세력으로 자리매김하였다.[469] 엘리자베스의 시아버지인 리버스 백작은 국고감독관으로 임명되어 버건디와의 연합을 지원하였다. 에드워드는 1466년 10월 비밀리에 버건디와 조약을 체결하면서 워윅을 프랑스와의 협상에 계속하게 두었다.[470] 1467년, 에드워드는 워윅의 형제였던 요크 대주교를 보직에서 해임시켰고, 워윅의 맏딸인 이사벨라와 에드워드의 형제인 클라렌스 공작과의 결혼 제안을 거절했다.[471] 이 일로 클라렌스 공작은 형제의 개입에 크게 분노하였다. 1468년, 에드워드는 그의 군대를 보내어 프랑스로부터 저지 섬을 되찾아냈다.

기병들이 적들을 오른쪽으로 강 건너 쫓는 모습
1885년 판화. 바넷에서 워릭의 군대 패배를 파올로 우첼로의 방식으로 묘사


워윅이 국왕에게 불만을 품고 있는 것을 이용하려던 프랑스의 루이 11세는 헨리 6세를 즉위시키기 위해 워윅과 그의 숙적이었던 앙주 백작부인 마가렛 사이의 화해를 주선했다. 워윅은 자신의 딸인 앤을 마가렛과 헨리의 아들이자 왕위 계승자인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와 결혼시키기로 동의했다. 이 결혼은 성사되었지만, 마가렛은 아들이 왕이 된 후 더 나은 배우자를 찾기를 바랐기 때문에 완전한 결혼 생활은 아니었을 수도 있다. 워릭과 클라렌스는 북부에서 분산 작전을 펼치며 1470년 9월 13일 데번주 다트머스플리머스에서 영국을 두 갈래로 침공했다. 워릭의 형제인 몬태규 후작도 그에게 합류했는데, 그는 이전 반란 당시 왕을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작령을 회복하지 못한 것에 대해 왕에게 분노하고 있었다.[53] 에드워드는 남쪽으로 급히 이동하여 침공에 대응했고, 몬태규의 군대는 북쪽에서 진격했으며, 국왕은 포위된 자신을 발견했다. 에드워드는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어, 그의 동생인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와 수백 명의 수행원과 함께 10월 2일 당시 부르고뉴 공국의 일부였던 플랑드르로 도망쳤다.

헨리 6세의 복위로 그는 다시 왕이 되었고, 워윅은 이제 의심할 여지 없이 왕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했다. 11월에 에드워드는 몰락했고, 그의 동생 클라렌스는 요크 공작 작위를 받았다. 부르고뉴는 에드워드의 누이 마가렛의 남편인 용감한 샤를이 통치하고 있었다. 샤를은 그의 매부에게 거의 도움을 주지 않았는데, 이는 에드워드가 결코 잊지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워릭과 클라렌스에게 불행하게도 헨리의 새로운 정권은 불안정했다. 에드먼드 보퍼트(4대)는 1455년 그의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워릭을 책임지고 있었고, 그 이후의 내분은 결국 워릭과 클라렌스를 정치적으로 고립시켰다. 플랑드르 상인들의 지원을 받은 에드워드는 1471년 3월 14일 요크셔의 레이븐스번에 상륙했고, 험버랜드 백작의 지원을 받았다. 에드워드는 윌리엄 파르 경과 제임스 해링턴 경의 지휘하에 있는 군대에 합류했고, 이는 랭커스터 가문과의 합의로 인해 정치적으로 불리한 처지에 놓였던 클라렌스가 워릭과 헨리를 버리고 그의 형제에게 합류하도록 설득했다. 에드워드의 군대는 런던으로 빠르게 이동하여 이제는 약해진 헨리 왕을 포로로 잡고 런던 탑으로 보냈다.

악천후로 인해 마가렛과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가 이끄는 프랑스 군대는 대륙에 머물러 있었고, 워릭은 증원을 받지 못했다. 이와 클라렌스의 탈주에도 불구하고 워릭은 에드워드의 증강된 군대를 추격했고, 두 군대는 1471년 4월 14일 바넷에서 전투를 벌였다. 짙은 안개로 인한 시야 악화와 에드워드의 태양 문장과 옥스퍼드 백작의 별 문장이 유사했던 것 때문에 랭커스터 군은 자기편을 공격했고, 에드워드의 집요한 공격과 결합되어 워릭의 군대는 궤멸되었다. 혼란 속에서 워릭은 말에서 떨어져 사망했고, 그의 형제인 몬태규 후작 존 네빌(1대)도 사망했으며, 엑서터 공작 헨리 홀랜드(3대)는 체포되어 런던 탑에 투옥되었다. 1475년에 엑서터는 요크파 원정대에 참여하여 프랑스로 파견되었는데, 바다에서 배에서 떨어져 목숨을 잃었다고 전해진다. 워릭의 패배와 죽음은 랭커스터 진영에 치명적인 타격이었고, 네빌 가문의 정치적 영향력은 돌이킬 수 없이 깨졌다.

바넷 전투와 투크스베리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무장한 랭커스터파의 저항은 끝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에드워드 4세의 통치는 그의 형제인 클래런스 공작 조지와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 사이의 악화되는 불화로 점차 분열되었다. 1476년 12월 22일, 클래런스의 아내인 이사벨이 사망했다. 클래런스는 이사벨의 시녀 중 한 명인 안카레트 트위니호가 그녀를 살해했다고 비난했고, 그 대가로 클래런스는 그녀를 살해했다. 안카레트의 손자는 1478년 에드워드로부터 안카레트에 대한 사후 사면을 받았는데, 이는 에드워드가 점점 경계하게 된 클래런스의 준군주적인 태도를 보여준다.[58] 1477년, 클래런스는 막 부르고뉴 공작 부인이 된 메리의 구혼자로 제안되었지만, 에드워드는 이 결혼을 반대했고, 클래런스는 왕궁을 떠났다.[133]

글로스터는 앤 네빌과 결혼했다. 앤과 이사벨 모두 워릭 백작 부인의 딸이었고, 따라서 어머니의 상당한 재산을 상속받았다. 두 형제가 소유한 많은 영지는 에드워드의 후원으로 그들에게 주어졌다(에드워드는 그 영지를 몰수할 권리를 유지했다). 그러나 결혼을 통해 얻은 재산은 그렇지 않았다. 이러한 차이점이 불화의 원인이 되었다. 클래런스는 에드워드의 총애를 잃어갔다. 그가 에드워드에 대한 반란에 연루되었다는 널리 퍼진 주장이 지속되면서 그는 투옥되었고 1478년 2월 18일 런던탑에서 처형되었다.

에드워드의 통치는 국내적으로는 비교적 평화로웠다. 1475년 그는 프랑스를 침공했지만, 피키니 조약을 맺어 7.5만파운드의 초기 지불과 연간 5만파운드의 연금을 받고 철수했다. 1482년에는 스코틀랜드 왕위를 찬탈하려 했지만 결국 잉글랜드로 돌아가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베릭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1483년, 에드워드의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고 그 부활절에 치명적인 병에 걸렸다. 사망하기 전에 그는 그의 열두 살짜리 아들이자 후계자인 에드워드의 섭정으로 그의 형제 리처드를 지명했다. 1483년 4월 9일, 에드워드 4세는 사망했다.

4. 5. 3. 워릭의 반란과 헨리 6세의 재집권

튜크스베리 전투


프랑스의 루이 11세는 워릭이 국왕에게 불만을 품고 있다는 것을 이용, 워릭과 그의 숙적이었던 앙주 백작부인 마가렛 사이의 화해를 주선했다.[53] 그 합의에 따라 워릭은 자신의 딸 앤 네빌을 마가렛과 헨리 6세의 아들이자 왕위 계승자인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와 결혼시키기로 한다. 이 결혼은 성사되었지만, 마가렛은 아들이 왕이 된 후 더 나은 배우자를 찾기를 바랐기에 완전한 결혼 생활은 아니었을 수도 있다. 워릭과 클래런스는 1470년 9월 13일, 북부에서 군사를 일으켜 다트머스와 플리머스를 통해 영국을 침공했다.[53] 한편, 워릭의 형제인 몬태규 후작 역시 과거 왕을 지지했음에도 백작령을 회복하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워릭에 합류한다. 에드워드 4세는 남쪽으로 진군하여 침공에 대응하고, 몬태규의 군대는 북쪽에서 진격해 에드워드 4세를 포위한다. 결국 에드워드는 동생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와 수백 명의 수행원과 함께 10월 2일, 당시 부르고뉴 공국의 일부였던 플랑드르로 망명한다.

헨리 6세의 복위로 헨리는 다시 왕이 되었고, 워릭은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한다. 11월, 에드워드는 몰락하고 그의 동생 클라렌스는 요크 공작 작위를 받는다. 한편, 부르고뉴는 에드워드 4세의 누이 마가렛의 남편인 용감한 샤를이 통치하고 있었는데, 샤를은 에드워드에게 거의 도움을 주지 않아 에드워드의 원한을 샀다. 하지만 워릭과 클라렌스에게 불행하게도 헨리의 새로운 정권은 불안정했다. 에드먼드 보퍼트(4대)는 1455년 그의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워릭에게 책임을 묻고, 이후 내분으로 워릭과 클라렌스는 정치적으로 고립된다. 에드워드 4세는 플랑드르 상인들의 지원을 받아 1471년 3월 14일 요크셔의 레이븐스번에 상륙, 험버랜드 백작의 지원을 받는다. 에드워드는 윌리엄 파르 경과 제임스 해링턴 경의 지휘하에 있는 군대에 합류한다. 한편, 랭커스터 가문과의 합의로 정치적 입지가 불안해진 클라렌스는 워릭과 헨리를 버리고 에드워드 4세에게 합류한다. 에드워드의 군대는 런던으로 빠르게 진격, 헨리 6세를 포로로 잡아 런던 탑에 가둔다.

마가렛과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가 이끄는 프랑스 군대는 악천후로 인해 대륙에 머물러 있었고, 워릭은 지원군을 받지 못한다. 클라렌스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워릭은 에드워드의 군대를 추격, 1471년 4월 14일 바넷에서 격돌한다. 짙은 안개로 시야가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에드워드의 태양 문장과 옥스퍼드 백작의 별 문장이 유사하여 랭커스터 군은 아군을 공격하는 혼란이 발생하고, 에드워드의 맹공으로 워릭의 군대는 궤멸된다. 워릭은 혼전 중에 말에서 떨어져 전사하고, 그의 형제인 몬태규 후작 존 네빌(1대) 역시 전사한다. 엑서터 공작 헨리 홀랜드(3대)는 체포되어 런던 탑에 투옥된다. 1475년, 엑서터는 요크 가문의 프랑스 원정에 참여했다가 바다에서 실족사한다. 워릭의 패배와 죽음은 랭커스터 진영에 치명적인 타격이었고, 네빌 가문의 정치적 영향력은 회복 불능 상태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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