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비아 전투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파비아 전투는 1525년 프랑수아 1세가 이끄는 프랑스군과 카를 5세가 이끄는 신성 로마 제국군 사이의 전투로, 프랑스의 패배로 끝났다. 프랑수아 1세는 포로로 잡혔고, 많은 귀족들이 사망했으며, 프랑스는 이탈리아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했다. 이 전투는 이탈리아 전쟁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프랑스는 마드리드 조약을 통해 영토를 포기하고 석방되었지만, 이후 전쟁을 재개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파비아 - 포 전투
포 전투는 1431년 6월 21일부터 22일까지 포 강 근처에서 밀라노와 베네치아 공화국 간에 벌어진 전투로, 베네치아 공화국이 패배하여 롬바르디아 진출 계획이 좌절되었다.
파비아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전투 개요 | |
전투명 | 파비아 전투 |
관련 전쟁 | 이탈리아 전쟁 (1521년~1526년) |
![]() | |
날짜 | 1525년 2월 24일 |
장소 | 이탈리아, 밀라노 공국 파비아 (현재) |
좌표 | 45.1975° N, 9.1650° E |
결과 | 합스부르크 가문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프랑스 왕국 |
교전국 2 | 합스부르크 제국 |
지휘관 | |
프랑스 | 프랑수아 1세 (포로) 로베르 3세 드 라 마르크 (항복) 안 드 몽모랑시 (항복) 앙리 2세 드 나바르 (항복) 프랑수아 드 로렌 (전사) 리처드 드 라 폴 (전사) 자크 드 라 팔리스 (전사) 루이 2세 드 라 트레무유 (전사) 기욤 구피에 드 보니베 (전사) 샤를 4세 달랑송 미켈레 안토니오, 살루초 후작 |
합스부르크 | 샤를 드 라노이 페르난도 다발로스 샤를 3세 드 부르봉 게오르크 폰 프룬츠베르크 안토니오 데 레이바 (파비아) 알폰소 다발로스 페르난도 데 안드라데 |
병력 규모 | |
프랑스 | 26,200명 |
합스부르크 | 28,300명 |
피해 규모 | |
프랑스 | 8,000명 (사망, 부상, 포로) |
합스부르크 | 1,500명 (사망, 부상) |
2. 배경
1519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 선출된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의 국왕 카를로스 1세에 대항하기 위해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는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이탈리아에 대한 영향력과 카를 5세(카를로스 1세의 새 명칭)의 세력 강화, 그에 편승한 샤를 3세 드 부르봉의 반기에 직면한 프랑수아 1세는 왕권 강화를 위해 이탈리아 지역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전투에서 고전했고, 프랑수아 1세가 직접 롬바르디아에 침공하여 파비아를 포위했다. 이에 대항하여 카를 5세는 구원을 위해 군을 파견하여 양군이 파비아에서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1521년-1526년 이탈리아 전쟁이 시작될 당시 프랑스는 롬바르디아를 장악하고 있었으나, 1522년 비코카 전투에서 패배한 후 이 지역을 포기해야 했다. 롬바르디아를 탈환하기로 결심한 프랑수아 1세는 1523년 말 기욤 구피에 드 보니베의 지휘 하에 이 지역 침공을 명령했지만, 보니베는 세시아 전투에서 황제군에게 패배하고 프랑스로 철수해야 했다.
이후 샤를 드 라누아는 페르난도 다발로스와 부르봉 공작 샤를 3세의 지휘 하에 프로방스 침공을 개시했으나, 마르세유 공성전에서 시간을 허비했고, 프랑수아 1세와 프랑스 본군이 아비뇽에 도착하자 이탈리아로 철수해야 했다.
1524년 10월 중순, 프랑수아 1세는 직접 알프스를 넘어 4만 명이 넘는 군대를 이끌고 밀라노로 진격했다. 부르봉과 페스카라의 군대는 프로방스 전역에서 아직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심각한 저항을 할 수 없었다.[7] 프랑스군은 여러 열로 이동하여 황제군의 진격 저지 시도를 무시했지만, 황제군의 주력 부대와의 전투는 피했다.[7] 샤를 드 라누아는 밀라노를 방어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10월 26일 로디로 철수했다.[8] 밀라노에 진입한 프랑수아 1세는 루이 2세 드 라 트레무이를 총독으로 임명하고, 안토니오 데 레이바가 지키고 있던 파비아로 진격했다.[9]
프랑스군의 주력 부대는 10월 말 파비아에 도착했고, 11월 2일까지 앙 드 몽모랑시는 티치노 강을 건너 남쪽에서 도시를 포위했다.[10] 11월 중순까지 성벽에 여러 개의 틈이 생겼고, 11월 21일 프랑수아 1세는 공격을 시도했지만 많은 사상자를 내고 물러났다.[11] 비오는 날씨와 화약 부족으로 인해 프랑스군은 방어군이 굶주리기를 기다리기로 결정했다.[11]
12월 초, 우고 데 몬카다가 이끄는 스페인군이 제노바 근처에 상륙하여 도시 내 분쟁에 개입하려 했다.[12] 프랑수아 1세는 살루초 후작에게 더 많은 병력을 보내 그들을 저지하도록 했고, 스페인군은 항복했다.[12] 프랑수아 1세는 교황 클레멘스 7세와 비밀 협정을 체결하고, 알바니 공작 존 스튜어트의 지휘하에 부대 일부를 남쪽으로 파견했다.[13] 조반니 데 메디치가 이끄는 이탈리아 용병들이 프랑스군에 합류했지만, 약 5,000명의 그리존 스위스 용병이 자신의 주로 돌아가면서 프랑스군은 약화되었다.[14]
1525년 1월, 게오르크 프룬트스베르크가 신성 로마 제국에서 1만 5천 명의 새로운 란츠크네히트를 데리고 도착하면서 라누아는 공세를 재개했다.
전투를 위한 황제군과 스페인군의 무기와 병사들은 주로 독일 은행 야코프 푸거와 카스티야 은행 방카 팔렌주엘라 레비 카하나가 자금을 지원했다.
2. 1. 1524년 프랑스의 이탈리아 침공
1519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 선출된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의 국왕 카를로스 1세에 대항하기 위해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는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이탈리아에 대한 영향력과 카를 5세(카를로스 1세의 새 명칭)의 세력 강화, 그에 편승한 샤를 3세 드 부르봉의 반기에 직면한 프랑수아 1세는 왕권 강화를 위해 이탈리아 지역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전투에서 고전했고, 프랑수아 1세가 직접 롬바르디아에 침공하여 파비아를 포위했다. 이에 대항하여 카를 5세는 구원을 위해 군을 파견하여 양군이 파비아에서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1521년-1526년 이탈리아 전쟁이 시작될 당시 프랑스는 롬바르디아를 장악하고 있었으나, 1522년 비코카 전투에서 패배한 후 이 지역을 포기해야 했다. 롬바르디아를 탈환하기로 결심한 프랑수아 1세는 1523년 말 기욤 구피에 드 보니베의 지휘 하에 이 지역 침공을 명령했지만, 보니베는 세시아 전투에서 황제군에게 패배하고 프랑스로 철수해야 했다.
이후 샤를 드 라누아는 페르난도 다발로스와 부르봉 공작 샤를 3세의 지휘 하에 프로방스 침공을 개시했으나, 마르세유 공성전에서 시간을 허비했고, 프랑수아 1세와 프랑스 본군이 아비뇽에 도착하자 이탈리아로 철수해야 했다.
1524년 10월 중순, 프랑수아 1세는 직접 알프스를 넘어 4만 명이 넘는 군대를 이끌고 밀라노로 진격했다.[7] 부르봉과 페스카라의 군대는 프로방스 전역에서 아직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심각한 저항을 할 수 없었다.[7] 프랑스군은 여러 열로 이동하여 황제군의 진격 저지 시도를 무시했지만, 황제군의 주력 부대와의 전투는 피했다.[7] 샤를 드 라누아는 밀라노를 방어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10월 26일 로디로 철수했다.[8] 밀라노에 진입한 프랑수아 1세는 루이 2세 드 라 트레무이를 총독으로 임명하고, 안토니오 데 레이바가 지키고 있던 파비아로 진격했다.[9]
프랑스군의 주력 부대는 10월 말 파비아에 도착했고, 11월 2일까지 앙 드 몽모랑시는 티치노 강을 건너 남쪽에서 도시를 포위했다.[10] 11월 중순까지 성벽에 여러 개의 틈이 생겼고, 11월 21일 프랑수아 1세는 공격을 시도했지만 많은 사상자를 내고 물러났다.[11] 비오는 날씨와 화약 부족으로 인해 프랑스군은 방어군이 굶주리기를 기다리기로 결정했다.[11]
12월 초, 우고 데 몬카다가 이끄는 스페인군이 제노바 근처에 상륙하여 도시 내 분쟁에 개입하려 했다.[12] 프랑수아 1세는 살루초 후작에게 더 많은 병력을 보내 그들을 저지하도록 했고, 스페인군은 항복했다.[12] 프랑수아 1세는 교황 클레멘스 7세와 비밀 협정을 체결하고, 알바니 공작 존 스튜어트의 지휘하에 부대 일부를 남쪽으로 파견했다.[13] 조반니 데 메디치가 이끄는 이탈리아 용병들이 프랑스군에 합류했지만, 약 5,000명의 그리존 스위스 용병이 자신의 주로 돌아가면서 프랑스군은 약화되었다.[14]
1525년 1월, 게오르크 프룬트스베르크가 신성 로마 제국에서 1만 5천 명의 새로운 란츠크네히트를 데리고 도착하면서 라누아는 공세를 재개했다. 페스카라는 산탄젤로 로멜리나의 프랑스 전초 기지를 점령했고, 별도의 란츠크네히트 부대는 벨조조소를 점령했다.[15] 2월 2일까지 라누아는 파비아에서 불과 몇 마일 떨어진 곳에 있었다.[16] 프랑수아 1세는 미라벨로의 비스콘티 공원에 주력부대를 주둔시켰다.[16] 2월 21일, 황제군 지휘관들은 미라벨로 성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17]
전투를 위한 황제군과 스페인군의 무기와 병사들은 주로 독일 은행 야코프 푸거와 카스티야 은행 방카 팔렌주엘라 레비 카하나가 자금을 지원했다.
3. 진행 과정
비코가 전투 패배 이후 롬바르디아를 상실한 프랑스는 세지아 전투에서 또다시 황제군에게 패배했다.[48] 샤를 드 라노이가 이끄는 황제군은 프로방스를 공격했지만, 마르세유 공방전에서 시간을 허비하면서 프랑스군에게 반격의 기회를 제공했다.[48]
1524년 10월 중순, 프랑수아 1세는 4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밀라노로 진격했다.[48] 프랑스군은 황제군을 야전으로 유인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샤를 드 라노이는 10월 26일 로디로 후퇴했다.[48] 프랑수아 1세는 루이 2세 드 라 트레무아유에게 밀라노를 맡기고, 안토니오 데 레이바가 지휘하는 9천 명의 황제군이 주둔한 파비아로 진격하여 포위 공격을 시작했다.[48]
11월 2일, 몽모랑시 장군은 티치노강을 건너 파비아 남쪽을 공격하여 포위망을 완성했다.[48] 11월 21일, 프랑스군은 무너진 성벽 두 곳을 통해 파비아 시내로 진입을 시도했으나, 수비군의 완강한 저항에 막대한 사상자를 내고 퇴각했다.[48] 잦은 비와 화약 부족으로 인해 프랑스군은 수비군을 지치게 하여 항복을 받아내는 장기 포위 전략을 선택했다.[48]
12월 초, 우고 데 몽카다가 이끄는 에스파냐군이 제노바에서 벌어진 친프랑스파와 친황제파 간의 갈등에 개입하기 위해 파견되었으나, 프랑수아 1세가 보낸 살루초 후작의 프랑스군과 안드레아 도리아가 이끄는 프랑스 함대에 패배하여 항복했다.[48] 프랑수아 1세는 교황 클레멘스 7세와 비밀 협약을 맺어, 교황의 나폴리 왕국 정복을 돕는 대신 카를 5세를 지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48]
프랑수아 1세가 올버니 공작을 보내 교황을 지원하자, 라노이는 피오렌추올라 근처에서 프랑스군을 저지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프랑스가 고용한 조반니 데 메디치의 악명 높은 용병부대 "검은 군단"과의 전투에서 황제군은 큰 피해를 입고 퇴각해야 했다.[48] 설상가상으로 그라우뷘덴 출신의 5천 명에 가까운 스위스 용병이 란츠크네흐츠 용병부대의 침공을 막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프랑스군은 병력 부족에 직면했다.[48]
1525년 1월, 샤를 드 라노이는 게오르크 폰 프룬즈베르크가 이끄는 15,000명의 란츠크네흐츠 지원군을 받고 공세를 재개했다.[48] 페르난도 다발로스는 산 안젤로의 프랑스군 기지를 점령하여 파비아와 밀라노 사이의 프랑스군 연락망을 차단하고, 벨지오조소를 점령했다.[48] 2월 2일경, 라노이는 파비아 인근에 도달했다.[48]
프랑수아 1세는 병력 대부분을 성벽으로 둘러싸인 미라벨로 평원에 주둔시키고, 레이바의 수비군과 라노이의 지원군 사이에 포위군을 배치했다.[48] 한 달 동안 소규모 전투가 계속되었고, 이 과정에서 조반니 데 메디치가 큰 부상을 입고 피아첸차로 퇴각하면서 프랑스군은 전력 손실을 겪었다.[48] 2월 21일, 황제군 지휘관들은 물자 부족과 프랑스군의 수적 우세를 고려하여 안전한 퇴각을 위해 기습 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48]
카를 5세가 지배권을 주장하던 밀라노 공격에 실패한 후, 프랑수아 1세는 주력군을 이탈리아에서 철수시켰다. 그러나 1524년, 샤를 드 라노이가 이끄는 신성 로마 제국 연합군은 북부 이탈리아에 분산된 잔여 프랑스군을 소탕하고, 2만 명의 병력으로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를 침공했다.[48] 이에 맞서 프랑수아 1세는 4만 명의 병력을 남하시켜 제국군을 프랑스에서 철수시키고 이탈리아로 진격했다.[48] 밀라노에서 전염병이 유행했기 때문에, 라누아는 밀라노 남쪽의 파비아 요새까지 후퇴했지만 그 사이 많은 병력을 잃었다. 프랑스군에 대항하기 위해 일부 병력을 요새 안에 남겨두고 주력 부대는 남동쪽으로 철수했다.[48] 프랑스군은 파비아 요새를 포위했지만, 프랑수아 1세는 군대를 둘로 나누어 일부 병력을 스코틀랜드의 알바니 공작 존 스튜어트에게 맡겨 나폴리 왕국 정복에 투입했다. 또한 스위스 용병 일부가 전선을 이탈하면서 프랑스군의 병력은 2만 명으로 감소했다.[48] 한편, 제국군은 증원군을 받아 요새에 남은 아군을 지원하기 위해 2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파비아로 돌아왔다.[48]
요새를 포위한 프랑스군은 성 안에 남아 있는 적군의 식량이 고갈되기를 기다리며 지구전을 펼치고 있었다.[49] 제국군의 재편성 부대가 도착하여 3주 동안 포격을 지속했지만, 중앙 집권화가 잘 이루어져 왕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체제가 정비된 프랑스군과 달리, 용병과 농민병이 주력인 제국군은 장기전이 지속되면 사기가 저하되어 궤멸될 위험이 있었다. 따라서 실질적인 지휘관이었던 페스카라 후작은 단기 결전을 위해 요새 앞 사냥터를 따라 흐르는 작은 강을 우회하여 사냥터 북쪽을 기습하는 작전을 1525년 2월 24일 새벽에 실행했다. 먼저 사냥터의 미라벨로(Mirabello) 성 근처에 있던 프랑수아 1세의 본진을 기습 공격하고, 이후 요새 내 주둔군도 합세하여 전투를 벌였다. 기습에 당황한 프랑스군은 1만 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퇴했다.[49][48][50]
1525년 2월 23일 저녁, 비스콘티 공원(Parco Visconti) 동쪽 성벽 밖에 주둔하고 있던 샤를 드 라노이의 황제군은 성벽을 따라 북쪽으로 진군을 시작했다. 황제군 공병들은 산 제네시오 마을 인근 포르타 페스카리나(Porta Pescarina)에서 공원 성벽에 틈을 만들었다.[20] 2월 24일 오전 5시, 알폰소 다발로스의 지휘 아래 약 3,000명의 소총병(arquebus) 부대가 공원에 진입하여 프랑스군 본부로 추정되는 미라벨로 성(Mirabello Castle)으로 빠르게 진격했다. 이와 동시에 황제군 경기병(light cavalry) 부대가 틈을 통해 공원으로 진입하여 프랑스군의 움직임을 차단하려 했다.[21]
한편, 샤를 티에르셀랭(Charles Tiercelin)이 지휘하는 프랑스 기병대 분견대가 황제군 기병대와 조우하여 일련의 소규모 교전을 시작했다.[22] 로베르 드 라 마르크(Robert de la Marck, Seigneur de la Flourance)가 지휘하는 스위스 창병대가 프랑스 기병대를 지원하기 위해 이동하여, 공원으로 유인된 스페인 포병대를 제압했다.[22] 오전 6시 30분경, 스위스 창병대는 성 인근 숲에서 나타나 미라벨로 성을 빠르게 점령한 데 바스토(De Basto)의 아르케부시에르(arcabuceros) 부대를 놓치고, 게오르크 프룬트스베르크가 이끄는 6,000명의 란츠크네히트(landsknechts) 부대와 충돌했다. 오전 7시경, 최초 돌파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대규모 보병 전투가 벌어졌다.[23]
한편, 샤를 드 라노이 자신이 직접 지휘하는 독일과 스페인의 중장기병 부대와 페르난도 다발로스의 스페인 보병으로 구성된 제3의 대규모 부대가 서쪽 숲을 통과하여 프랑수아 1세가 주둔한 곳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프랑스군은 상당 시간 동안 황제군의 공격 규모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러나 오전 7시 20분경, 페르난도 다발로스의 선봉대가 프랑스 포병대의 포격을 받으면서 프랑스군은 스페인 진영에 사격을 개시했다. 이 포격은 프랑수아 1세에게 경고 신호를 보냈고, 그는 프랑스 기병대 전체를 이끌고 샤를 드 라노이의 수적으로 열세인 기병대를 공격하여 오전 7시 40분경 스페인군을 격퇴했다.[24]
그러나 프랑수아 1세의 성급한 돌격은 프랑스 포병대의 사격을 가리는 결과를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리샤르 드 라 폴이 지휘하는 프랑스 보병대, 그리고 4,000~5,000명에 달하는 랑켄히트 용병대의 흑색 부대(Black Band)를 이끌던 프랑수아 드 로렌으로부터 프랑스군을 분리시켰다. 샤를 드 라노이가 후퇴하는 기병대를 추격한 후 스페인군 사령관이 된 페스카라 공작은 숲 가장자리에 병력을 배치하고, 부르봉, 프룬트스베르크, 데 바스토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전령을 보냈다.[25]
한편, 게오르크 프룬트스베르크는 수적으로 열세였던 스위스 보병대를 격파했다. 티에르셀랭과 플루랑스는 병력을 제대로 유지하지 못했고, 프랑스 보병대는 전장에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오전 8시경, 대규모 제국군 창병과 소총병 부대가 사방에서 프랑스 기병대를 공격했다. 주변 숲 때문에 기동 공간이 부족했던 프랑스 젠다름들은 포위되어 체계적으로 살육당했다. 프랑수아 1세를 돕기 위해 진격한 리샤르 드 라 폴과 프랑수아 드 로렌은 게오르크 프룬트스베르크가 이끄는 란츠크네히트 부대의 공격을 받았다. 프랑스 보병대는 붕괴되어 궤멸되었고, 리샤르 드 라 폴과 프랑수아 드 로렌은 모두 전사했다. 제국군과 용병 란츠크네히트 간의 치열한 전투에서 흑색 부대는 게오르크 프룬트스베르크의 창병들에게 포위되어 전멸했다. 프랑수아 1세는 이탈리아 용병대장 체사레 에르콜라니에게 말을 잃고 용감하게 싸웠다.[26][27] 그러나 스페인 소총병과 독일 란츠크네히트에게 포위되어 결국 포로로 잡혀 전장에서 끌려나갔다.[28][29]
한편, 안토니오 데 레이바는 수비대와 함께 돌격하여 포위선을 지키던 몽모랑시 휘하 3,000명의 스위스 용병들을 격파했다. 몽모랑시와 플루랑스 휘하의 스위스 용병 잔존 병력은 강을 건너 도주하려 했으나, 막대한 사상자를 냈다.[30] 알랑송 공작이 이끄는 프랑스 후위대는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알랑송 공작은 공원에서 벌어진 상황을 파악하고 신속하게 밀라노로 후퇴했다. 오전 9시경 전투는 완전히 종료되었다.
3. 1. 파비아 포위전 (1524년 10월 ~ 1525년 2월)
비코가 전투의 패배로 롬바르디아를 상실한 프랑스는 세지아 전투에서 재차 패배했다. 샤를 드 라노이가 이끄는 황제군은 프로방스를 공격했으나 마르세유 공방전에서 시간을 허비하여 프랑스군에게 반격의 기회를 주었다.
1524년 10월 중순, 프랑수아 1세는 4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탈리아를 침공, 밀라노로 진격했다. 황제군을 끌어내려 했으나 실패했고, 샤를 드 라노이는 10월 26일 로디로 후퇴했다. 프랑수아 1세는 루이 2세 드 라 트레무아유에게 밀라노를 맡기고 안토니오 데 레이바가 지키는 파비아로 진격, 9천 명의 황제군을 포위했다.
11월 2일, 몽모랑시 장군이 티치노강을 건너 남쪽에서 공격하여 포위망을 완성했다. 11월 21일, 성벽이 무너진 틈을 타 시내 진입을 시도했으나 큰 피해를 입고 퇴각했다. 프랑스군은 포위전으로 수비군을 지치게 하는 전략을 택했다.
12월 초, 우고 데 몽카다가 이끄는 에스파냐군이 제노바의 내분에 개입하려다 프랑스군에 패배했다. 프랑수아 1세는 교황 클레멘스 7세와 밀약을 맺어 나폴리 정복을 지원받는 대신 카를 5세를 지원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프랑수아 1세가 올버니 공작을 보내 교황을 지원하자, 라노이는 피오렌추올라에서 저지하려 했으나 조반니 데 메디치의 "검은군단"에 큰 피해를 입었다. 스위스 용병 일부가 이탈하며 프랑스군은 전력 손실을 겪었다.
1525년 1월, 게오르크 폰 프룬즈베르크가 이끄는 15,000명의 란츠크네흐츠 지원군을 받은 라노이가 공격을 재개했다. 페르난도 다발로스는 산 안젤로의 프랑스군 기지를 점령하여 프랑스군의 연락망을 끊고, 벨지오조소를 점령했다. 2월 2일경, 라노이는 파비아에 접근했다.
프랑수아 1세는 미라벨로 평원에 주둔하며 레이바의 수비군과 라노이의 지원군 사이에 포위군을 배치했다. 한 달간 소규모 전투가 이어졌고, 메디치가 부상으로 퇴각하는 등 프랑스군은 소모전을 겪었다. 2월 21일, 황제군 지휘관들은 물자 고갈과 프랑스군의 수적 우위를 고려하여 기습을 결정했다.
카를 5세가 지배권을 주장하던 밀라노 공격 실패 후, 프랑수아 1세는 주력군을 철수시켰으나, 1524년 신성 로마 제국 연합군은 북부 이탈리아의 잔여 프랑스군을 소탕하고 프로방스를 침공했다.[48] 프랑수아 1세는 4만 병력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진격, 밀라노에서 전염병으로 병력을 잃은 라누아는 파비아 요새로 후퇴했다.[48] 프랑스군은 요새를 포위하고, 프랑수아 1세는 군대를 나누어 일부는 나폴리 왕국 정복에 투입하고, 스위스 용병 이탈로 병력이 감소했다.[48] 제국군은 증원군을 받아 파비아로 돌아왔다.[48]
프랑스군은 요새 안의 적 식량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지구전을 펼쳤다.[49] 제국군은 장기전에 불리했기에 페스카라 후작은 1525년 2월 24일 새벽, 기습 작전을 실행했다.[49] 미라벨로 성 근처 프랑수아 1세의 본진을 공격하고, 요새 주둔군도 합세했다.[49] 프랑스군은 1만 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퇴했다.[49][48][50]
3. 2. 제국군의 증원과 반격
비코가 전투의 패배로 롬바르디아를 상실한 프랑스는 세지아 전투에서 황제군에게 패배했다.[48] 황제군 사령관 샤를 드 라노이는 마르세유 공방전에서 프랑스군이 구원해 오자 퇴각했다.[48]
1524년 10월, 프랑수아 1세는 4만 병력을 이끌고 이탈리아를 침공해 밀라노로 진격했으나, 황제군은 10월 26일 로디로 후퇴했다.[48] 프랑수아 1세는 파비아를 포위하고, 11월 2일 프랑스군 몽모랑시 장군이 티치노강을 건너 파비아 남쪽에서 공격을 가해 포위망을 완성했다.[48] 잦은 비와 화약 부족으로 프랑스군은 포위전으로 수비군을 지치게해 항복시키기로 했다.
12월 초, 우고 데 몽카다가 이끄는 에스파냐군이 프랑스군에 패해 항복했다.[48] 프랑수아 1세는 교황 클레멘트 7세와 밀약을 맺고, 올버니 공작을 보내 교황을 지원했다.[48] 그러나 조반니 데 메디치의 "검은군단"과 스위스 용병이 군을 이탈함에 따라 프랑스군은 난처한 상황에 직면했다.[48]
1525년 1월, 란누아는 게오르크 폰 프룬즈베르크가 이끄는 15,000명의 란츠크네히츠를 지원받고 공격을 재개했다.[48] 다발로스는 산 안젤로의 프랑스군 기지를 점령하고, 파비아와 밀라노 사이의 프랑스군 연락망을 끊었다.[48] 2월 2일경에는 란누아는 파비아에 접근할 수 있었다.
프랑수아 1세의 병력은 대부분 성벽으로 둘러싸인 미라벨로 평원에 주둔하고, 레이바의 수비군과 란누아의 지원군 사이에 포위군을 배치했다.[48] 소규모 전투가 계속되면서 메디치가 큰 부상을 입고 피아첸차로 퇴각했다.[48] 2월 21일, 황제군 지휘관들은 물자 고갈과 프랑스군의 수적 우위를 보고 안전한 퇴각을 위해 프랑스군을 향해 기습전을 벌이려 한다.
2월 23일 저녁, 비스콘티 공원(Parco Visconti) 동쪽 성벽 밖에 진을 치고 있던 라누아(Lannoy)의 황제군은 성벽을 따라 북쪽으로 진군을 시작했다.[18] 황제군 공병들은 산 제네시오 마을 근처 포르타 페스카리나(Porta Pescarina)에서 공원 벽에 틈을 만들었다.[20] 오전 5시, 알폰소 다발로스(Alfonso d'Avalos)의 지휘 아래 약 3,000명의 소총병(arquebus)이 공원에 진입하여 미라벨로 성(Mirabello Castle)으로 신속하게 진격했다.[21] 동시에 황제군 경기병(light cavalry)이 그 틈으로 공원에 퍼져 나가 프랑스군의 움직임을 차단하려 했다.[21]
프랑스 기병대 분견대가 황제군 기병대와 조우하여 일련의 소규모 충돌을 시작했다.[22] 로베르 드 라 마르크(Robert de la Marck, Seigneur de la Flourance) 지휘하의 스위스 창병대가 그들을 지원하기 위해 이동하여 공원으로 끌어들인 스페인 포병대를 압도했다.[22] 그들은 오전 6시 30분경 성 근처 숲에서 나타나 성을 신속하게 점령한 데 바스토(De Basto)의 아르케부시에르(arcabuceros)를 놓치고 게오르크 프룬트스베르크(Georg Frundsberg)의 6,000명의 란츠크네히트(landsknechts)와 충돌했다.[23] 오전 7시까지 대규모 보병 전투가 벌어졌다.[23]
3. 3. 전투 (1525년 2월 24일)
1525년 2월 23일 저녁, 비스콘티 공원(Parco Visconti) 동쪽 성벽 밖에 진을 치고 있던 라누아(Lannoy)의 황제군은 성벽을 따라 북쪽으로 진군을 시작했다. 황제군 공병들은 산 제네시오 마을 근처 포르타 페스카리나(Porta Pescarina)에서 공원 벽에 틈을 만들었다.[20] 오전 5시까지 알폰소 다발로스(Alfonso d'Avalos)의 지휘 아래 약 3,000명의 소총병(arquebus)이 공원에 진입하여 프랑스 본부로 추정되는 미라벨로 성(Mirabello Castle)으로 신속하게 진격했다. 동시에 황제군 경기병(light cavalry)이 그 틈으로 공원에 퍼져 나가 프랑스군의 움직임을 차단하려 했다.[21]
한편, 샤를 티에르셀랭(Charles Tiercelin) 지휘하의 프랑스 기병대 분견대가 황제군 기병대와 조우하여 일련의 소규모 충돌을 시작했다. 로베르 드 라 마르크(Robert de la Marck, Seigneur de la Flourance) 지휘하의 스위스 창병대가 그들을 지원하기 위해 이동하여 공원으로 끌어들인 스페인 포병대를 압도했다.[22] 그들은 오전 6시 30분경 성 근처 숲에서 나타나 성을 신속하게 점령한 데 바스토(De Basto)의 아르케부시에르(arcabuceros)를 놓치고 게오르크 프룬트스베르크(Georg Frundsberg)의 6,000명의 란츠크네히트(landsknechts)와 충돌했다. 오전 7시까지 최초의 돌파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대규모 보병 전투가 벌어졌었다.[23]
한편, 라누아 자신이 지휘하는 독일과 스페인의 중장기병과 다발로스의 스페인 보병으로 구성된 제3의 대규모 부대가 서쪽 숲을 통과하여 프랑수아 1세가 진을 친 곳 가까이로 이동하고 있었다. 프랑스군은 상당한 시간 동안 황제군의 공격 규모를 인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오전 7시 20분경 다발로스의 선봉대가 프랑스 포병대의 포격을 받았고, 이에 프랑스군은 스페인 진영에 사격을 개시했다. 이것이 프랑수아 1세에게 경고를 주었고, 그는 프랑스 기병대 전체 병력을 이끌고 라누아의 수적으로 열세인 기병대를 공격하여 오전 7시 40분경 스페인군을 격퇴했다.[24]
그러나 프랑수아 1세의 성급한 진격은 프랑스 포병의 사격을 가렸을 뿐만 아니라, 리샤르 드 라 폴이 지휘하는 프랑스 보병대와 4,000~5,000명에 달하는 랑켄히트 용병대의 흑색 부대(Black Band)를 이끌던 프랑수아 드 로렌으로부터 프랑스군을 분리시켰다. 라누아가 후퇴하는 기병대를 추격한 후 스페인군 사령관이 된 페스카라(페스카라 공작)는 숲 가장자리에 병력을 배치하고 부르봉, 프룬트스베르크, 데 바스토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사자를 보냈다.[25]
한편 프룬트스베르크는 수적으로 열세인 스위스 보병을 격파했다. 티에르셀랭과 플루랑스는 병력을 유지하지 못했고 프랑스 보병들은 전장에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오전 8시경, 대규모 제국군 창병과 소총병들이 사방에서 프랑스 기병대를 공격했다. 주변 숲 때문에 기동할 공간이 부족했던 프랑스 젠다름들은 포위되어 체계적으로 학살당했다. 프랑수아 1세를 돕기 위해 진격한 리샤르 드 라 폴과 로렌은 프룬츠베르크가 이끄는 란츠크네히트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프랑스 보병대는 붕괴되어 궤멸되었고, 드 라 폴과 로렌은 모두 전사했습니다. 제국군과 용병 란츠크네히트 간의 특히 치열한 전투에서 흑색 부대는 프룬츠베르크의 창병들에게 포위되어 현장에서 전멸했습니다. 프랑수아 1세는 이탈리아 용병대장 체사레 에르콜라니에게 말을 잃고 싸웠습니다.[26][27] 스페인 소총병과 독일 란츠크네히트에게 포위된 그는 포로로 잡혀 전장에서 끌려나갔습니다.[28][29]
한편, 안토니오 데 레이바는 수비대와 함께 돌격하여 포위선을 지키던 몽모랑시휘하 3,000명의 스위스 용병들을 격파했습니다. 스위스 용병들 – 몽모랑시와 플루랑스 휘하 용병들 – 의 잔여 병력은 강을 건너 도망치려 했지만, 막대한 사상자를 냈습니다.[30] 알랑송 공작이 이끄는 프랑스 후위대는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공작은 공원에서 일어난 일을 깨닫고 밀라노로 신속히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오전 9시경 전투는 끝났습니다.
3. 3. 1. 세부 전투 과정
1525년 2월 23일 저녁, 비스콘티 공원(Parco Visconti) 동쪽 성벽 밖에 진을 치고 있던 라누아(Lannoy)의 황제군은 성벽을 따라 북쪽으로 진군을 시작했다. 황제군 공병들은 산 제네시오 마을 근처 포르타 페스카리나(Porta Pescarina)에서 공원 벽에 틈을 만들었다.[20] 오전 5시까지 알폰소 다발로스(Alfonso d'Avalos)의 지휘 아래 약 3,000명의 소총병(arquebus)이 공원에 진입하여 프랑스 본부로 추정되는 미라벨로 성(Mirabello Castle)으로 신속하게 진격했다. 동시에 황제군 경기병(light cavalry)이 그 틈으로 공원에 퍼져 나가 프랑스군의 움직임을 차단하려 했다.[21]
한편, 샤를 티에르셀랭(Charles Tiercelin) 지휘하의 프랑스 기병대 분견대가 황제군 기병대와 조우하여 일련의 소규모 충돌을 시작했다. 로베르 드 라 마르크(Robert de la Marck, Seigneur de la Flourance) 지휘하의 스위스 창병대가 그들을 지원하기 위해 이동하여 공원으로 끌어들인 스페인 포병대를 압도했다.[22] 그들은 오전 6시 30분경 성 근처 숲에서 나타나 성을 신속하게 점령한 데 바스토(De Basto)의 아르케부시에르(arcabuceros)를 놓치고 게오르크 프룬트스베르크(Georg Frundsberg)의 6,000명의 란츠크네히트(landsknechts)와 충돌했다. 오전 7시까지 최초의 돌파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대규모 보병 전투가 벌어졌습니다.[23]
한편, 라누아 자신이 지휘하는 독일과 스페인의 중장기병과 다발로스의 스페인 보병으로 구성된 제3의 대규모 부대가 서쪽 숲을 통과하여 프랑수아 1세가 진을 친 곳 가까이로 이동하고 있었다. 프랑스군은 상당한 시간 동안 황제군의 공격 규모를 인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오전 7시 20분경 다발로스의 선봉대가 프랑스 포병대의 포격을 받았고, 이에 프랑스군은 스페인 진영에 사격을 개시했다. 이것이 프랑수아 1세에게 경고를 주었고, 그는 프랑스 기병대 전체 병력을 이끌고 라누아의 수적으로 열세인 기병대를 공격하여 오전 7시 40분경 스페인군을 격퇴했다.[24]
그러나 프랑수아 1세의 성급한 진격은 프랑스 포병의 사격을 가렸을 뿐만 아니라, 리샤르 드 라 폴이 지휘하는 프랑스 보병대와 4,000~5,000명에 달하는 랑켄히트 용병대의 흑색 부대(Black Band)를 이끌던 프랑수아 드 로렌으로부터 프랑스군을 분리시켰다. 라누아가 후퇴하는 기병대를 추격한 후 스페인군 사령관이 된 페스카라(페스카라 공작)는 숲 가장자리에 병력을 배치하고 부르봉, 프룬트스베르크, 데 바스토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사자를 보냈다.[25]
한편 프룬트스베르크는 수적으로 열세인 스위스 보병을 격파했다. 티에르셀랭과 플루랑스는 병력을 유지하지 못했고 프랑스 보병들은 전장에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오전 8시경, 대규모 제국군 창병과 소총병들이 사방에서 프랑스 기병대를 공격했다. 주변 숲 때문에 기동할 공간이 부족했던 프랑스 젠다름들은 포위되어 체계적으로 학살당했다.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를 돕기 위해 진격한 리샤르 드 라 폴과 로렌은 프룬츠베르크가 이끄는 란츠크네히트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프랑스 보병대는 붕괴되어 궤멸되었고, 드 라 폴과 로렌은 모두 전사했습니다. 제국군과 용병 란츠크네히트 간의 특히 치열한 전투에서 흑색 부대는 프룬츠베르크의 창병들에게 포위되어 현장에서 전멸했습니다. 프랑스 왕은 이탈리아 용병대장 체사레 에르콜라니에게 말을 잃고 싸웠습니다.[26][27] 스페인 소총병과 독일 란츠크네히트에게 포위된 그는 포로로 잡혀 전장에서 끌려나갔습니다.[28][29]
한편, 안토니오 데 레이바는 수비대와 함께 돌격하여 포위선을 지키던 몽모랑시휘하 3,000명의 스위스 용병들을 격파했습니다. 스위스 용병들 – 몽모랑시와 플루랑스 휘하 용병들 – 의 잔여 병력은 강을 건너 도망치려 했지만, 막대한 사상자를 냈습니다.[30] 알랑송 공작이 이끄는 프랑스 후위대는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공작은 공원에서 일어난 일을 깨닫고 밀라노로 신속히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오전 9시경 전투는 끝났습니다.
4. 결과
프랑스의 패배는 결정적이었다.[36] 프랑수아 1세는 샤를 드 라누아에게 포로로 잡혀 피치게토네의 탑에 감금되었다가[31] 제노바를 거쳐 스페인으로 이송되어 마드리드의 탑에 투옥되었다.[36] 몽모랑시와 플루랑스를 포함한 많은 프랑스 귀족들이 포로로 잡혔고, 보니베, 라 트레무이유, 토마 드 푸아-레스크, 사보이아의 르네, 라 팔리스, 리처드 드 라 폴 등 더 많은 수의 귀족들이 전투에서 사망했다.[36] 프랑수아 1세는 피치게토네 요새로 압송되어 어머니인 사보이아의 루이즈에게 "명예와 생명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36]
프랑수아 1세의 항복과 포획 과정은 여러 기록에서 다르게 나타난다. 샤를 드 라누아는 프랑수아 1세와 칼을 교환하며 그를 포로로 잡았고, 존중의 표시로 무릎을 꿇었다고 한다.[31] 알론소 피타 다 베이가, 후안 데 우르비에타, 디에고 다빌라 등 세 명의 스페인 병사도 프랑수아 1세를 포획하는데 기여했다.[32] 카를 5세는 1529년 7월 24일 칙령을 통해 다 베이가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이 프랑수아 1세를 포획했다고 언급했다.[34] 카를 5세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국왕이 부르봉 공작, 샤를 드 라누아, 페스카라 후작 등 주요 장군들에 의해 포로로 잡혔다고 주장했다.[35]
마드리드 조약 체결로 프랑수아 1세는 플랑드르, 밀라노, 부르고뉴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며 석방되었다. 그러나 평화 조약은 같은 해에 파기되었고, 1526년부터 1529년까지 새로운 프랑스-신성 로마 제국 전쟁이 발발했다.
4. 1. 프랑수아 1세의 석방과 전쟁 재개
프랑스의 패배는 결정적이었다.[36] 프랑수아 1세는 샤를 드 라누아에게 포로로 잡혀 피치게토네의 탑에 감금되었다가[31] 제노바를 거쳐 스페인으로 이송되어 마드리드의 탑에 투옥되었다.[36] 몽모랑시와 플루랑스를 포함한 많은 프랑스 귀족들이 포로로 잡혔고, 보니베, 라 트레무이유, 토마 드 푸아-레스크, 사보이아의 르네, 라 팔리스, 리처드 드 라 폴 등 더 많은 수의 귀족들이 전투에서 사망했다.[36] 프랑수아 1세는 피치게토네 요새로 압송되어 어머니인 사보이아의 루이즈에게 "명예와 생명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36]프랑수아 1세의 항복과 포획 과정은 여러 기록에서 다르게 나타난다. 샤를 드 라누아는 프랑수아 1세와 칼을 교환하며 그를 포로로 잡았고, 존중의 표시로 무릎을 꿇었다고 한다.[31] 알론소 피타 다 베이가, 후안 데 우르비에타, 디에고 다빌라 등 세 명의 스페인 병사도 프랑수아 1세를 포획하는데 기여했다.[32] 카를 5세는 1529년 7월 24일 칙령을 통해 다 베이가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이 프랑수아 1세를 포획했다고 언급했다.[34] 카를 5세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국왕이 부르봉 공작, 샤를 드 라누아, 페스카라 후작 등 주요 장군들에 의해 포로로 잡혔다고 주장했다.[35]
마드리드 조약 체결로 프랑수아 1세는 플랑드르, 밀라노, 부르고뉴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며 석방되었다. 그러나 평화 조약은 같은 해에 파기되었고, 1526년부터 1529년까지 새로운 프랑스-신성 로마 제국 전쟁이 발발했다.
5. 평가 및 영향
포위망을 구축한 프랑스군은 병력집중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 결과 프랑스군의 반격은 소수병력을 차례로 투입하게 되어 황제군 주력부대인 테르시오에 의해 각개격파 당하는 잘못을 저지르게 되었다. 반격을 지원하던 포병도 사태변화에 대응하지 못하여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다.
황제군은 병력의 집중과 기동력을 살려 프랑스군에 대해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프랑스군은 완전한 횡대가 아니었기에 황제군 기병대를 막지 못했다. 양군 모두 포격이 산발적으로 이루어졌기에 승패를 결정지은 건 보병부대의 소총병의 운용법이었다. 이 전투로 이탈리아 전쟁은 제 2기를 맞이하게 되고, 프랑스의 세력은 배제되었다.
6. 파비아 전투와 한국사
참조
[1]
서적
This is the only identified work of the master Ruprecht Heller
https://books.google[...]
Phaidon Press for the Samuel H. Kress Foundation
2015-11-14
[2]
서적
Le grandi Battaglie della Storia
Viviani Editore
[3]
서적
Battles that Changed History: An Encyclopedia of World Conflict
https://books.google[...]
ABC-CLIO
2011
[4]
서적
Gunpowder, Masculinity, and Warfare in German Texts, 1400–1700
https://books.google[...]
Boydell & Brewer
2020-10-01
[5]
서적
Europe and England in the Sixteenth Century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20-10-01
[6]
서적
History of Italy
J.Towers
[7]
서적
Pavia 1525
[8]
서적
Pavia 1525
[9]
서적
Pavia 1525
[10]
서적
Pavia 1525
[11]
서적
Pavia 1525
[12]
서적
Pavia 1525
[13]
서적
Emperor Charles V and Pavia 1525
[14]
서적
Pavia 1525
[15]
서적
Emperor Charles V and Pavia 1525
[16]
서적
Pavia 1525
[17]
서적
Pavia 1525
[18]
서적
Pavia 1525
[19]
서적
Historia de la Guerra de Lombardia, Batalla de Pavía y Prisión del Rey Francisco de Francia
Imprenta de la viuda de Calero
[20]
서적
Pavia 1525
[21]
서적
Pavia 1525
[22]
서적
Pavia 1525
[23]
서적
PavÍa 1525
[24]
서적
Pavia 1525
[25]
서적
Pavia 1525
[26]
웹사이트
Chateabriand's Memoirs: Index P
https://web.archive.[...]
2007-02-08
[27]
웹사이트
Storia di Pavia
http://www.informagi[...]
2007-04-24
[28]
서적
Pavia 1525
[29]
서적
Emperor: A new life of Charles V
https://books.google[...]
Yale University Press
2019-09-21
[30]
서적
Pavia 1525
[31]
서적
The Court of France in the Sixteenth Century, 1514–1559
https://www.google.i[...]
R. Bentley
2021-04-14
[32]
서적
Batallas Decisivas de la Historia de España (Decisive battles of Spanish History)
Punto de lectura
[33]
학술지
Inés Suárez y la conquista de Chile
http://iberoamericas[...]
2014-11-03
[34]
서적
Crisol historico español y restauracion de glorias nacionales
https://archive.org/[...]
Imprenta del Tiempo
1862
[35]
서적
The English translation of the autobiography of the Emperor Charles V
[36]
서적
Pavia 1525
[37]
서적
History of Italy
[38]
웹사이트
Leather Box for the Pennant of Francis I at the Battle of Pavia
http://art.thewalter[...]
The Walters Art Museum
2012-11-27
[39]
서적
Birmingham Museum of Art : guide to the collection
Birmingham Museum of Art
[40]
논문
The 'Battle of Pavia' and the Tapestry Collection of Don Carlos: New Documentation
https://www.jstor.or[...]
2022-08-21
[41]
웹사이트
Due palle di cannone nel campo: "Sono della battaglia di Pavia"
https://video.laprov[...]
2015-02-27
[42]
웹사이트
1525 Battaglia di Pavia
http://www.paviaedin[...]
2022-08-21
[43]
웹사이트
Porta Nuova
https://www.lombardi[...]
2022-08-21
[44]
웹사이트
Porta Calcinara
https://www.lombardi[...]
2022-08-21
[45]
웹사이트
S. Antonio abate protegge la città di Pavia durante l'assedio dei Francesi del 1522
https://www.lombardi[...]
2022-08-21
[46]
웹사이트
ブリタニカ国際大百科事典 小項目事典の解説
https://kotobank.jp/[...]
コトバンク
2018-02-10
[47]
서적
Renaissance Warrior and Patron
Press Syndicate of University of Cambridge
[48]
서적
パヴィアの戦い
https://books.google[...]
PHP研究所
[49]
웹사이트
第7話 イタリア征服を再び狙ったフランソワ1世、激闘のパヴィーアの戦いで捕虜となる
http://dramatic-hist[...]
[50]
웹사이트
he Battle of Pavia
http://www.oocities.[...]
1525-02-24
[51]
서적
Renaissance Warrior and Patron
Press Syndicate of University of Cambridge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