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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쇼친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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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에쇼친코 코덱스는 16세기 멕시코의 역사적 사건과 문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문서이다. 이 코덱스는 스페인 정복 이후 우에쇼친코의 나우아족이 겪은 일들을 기록하고 있으며, 특히 누뇨 데 구스만의 횡포와 그에 대한 저항을 상세히 담고 있다. 코덱스에는 성모 마리아의 이미지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초기 원주민 묘사 중 하나로 미술사적 가치를 지닌다. 이 코덱스는 1928년 미국 의회 도서관에 기증되어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으며, 당시 원주민 사회의 경제, 사회, 문화적 상황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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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쇼친코서
개요
우에쇼친코 서 제목 페이지
우에쇼친코 서 제목 페이지
유형회화 사본
문화나후아틀족
시대식민 시대
날짜1531년
언어나와틀어
스페인어
소장처미국 국립 기록 관리국
위치미국 메릴랜드주 칼리지 파크
상세 정보
내용에르난 코르테스와 그가 아스테카인들에게 부과한 과도한 공물에 대한 우에소칭코 인디언들의 소송을 기록함.
우에소칭코 인디언들이 에르난 코르테스를 도와 테노치티틀란을 정복하는 데 도움을 준 것에 대한 보상으로 부당하게 세금을 부과받았다고 주장함.
특징8개의 아마틀 종이 시트로 구성됨.
유럽 및 토착 회화 스타일이 혼합되어 있음.
나와틀어 및 스페인어로 작성된 텍스트가 포함됨.
중요성식민 시대 멕시코의 토착민과 스페인 정복자 간의 관계에 대한 귀중한 통찰력을 제공함.
토착민의 관점에서 식민지 시대의 경제적, 정치적 상황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문서임.
관련 정보
같이 보기마틀라친코 Codex
플로렌스 Codex
멘도사 Codex

2. 역사적 배경

멕시코 시티 남동쪽에 위치한 푸에블라 주의 마을인 우에쇼친코(Huexotzinco|우에쇼친코nah)는 1521년 스페인아즈텍 제국 정복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곳의 나우아족 주민들은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와 동맹을 맺고, 당시 아즈텍의 지도자였던 목테수마 2세에 맞서 싸웠다.[2]

정복 전쟁이 끝난 후, 우에쇼친코는 코르테스의 엔코미엔다(위탁 통치 지역)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나 코르테스의 다른 원주민 동맹이었던 틀락스칼라에 비해 우에쇼친코는 식민 시대에 자신들의 기여에 합당한 특권을 누리지 못했다. 이에 우에쇼친코 주민들은 1560년, 나우아틀어로 스페인 국왕에게 직접 청원서를 보내 정복 전쟁에서의 공헌을 강조하며 정당한 대우를 요구하기도 했다.[2]

또한 코르테스가 멕시코를 비운 사이(1529년-1530년), 스페인의 제1 아우디엔시아(고등법원 겸 행정기관)는 우에쇼친코 공동체에 개입하여 과도한 세금을 물품과 노동력 형태로 부과하는 등 부당한 요구를 하였다. 코르테스가 돌아오자 우에쇼친코 주민들은 그와 함께 제1 아우디엔시아의 착취에 맞서 법적 소송을 제기하며 자신들의 권리를 찾기 위한 투쟁을 시작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우에쇼친코 코덱스가 제작되었다.

2. 1. 스페인의 멕시코 정복과 우에쇼친코

우에쇼친코는 멕시코 시티 남동쪽에 위치한 푸에블라 주의 마을이다. 1521년, 이 마을의 나우아족 주민들은 스페인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와 동맹을 맺고, 공동의 적이었던 아즈텍 제국의 지도자 목테수마 2세를 극복하는 데 기여했다. 코르테스의 또 다른 원주민 동맹이었던 틀락스칼라는 식민 시대에 이러한 협력을 바탕으로 우에쇼친코보다 더 많은 특권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이에 우에쇼친코 주민들은 1560년 나우아틀어로 스페인 국왕에게 직접 청원서를 보내 정복 전쟁에서의 기여를 강조하며 합당한 대우를 요구하기도 했다.[2]

정복 이후 우에쇼친코는 코르테스의 엔코미엔다 소유지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나 코르테스가 1529년부터 1530년까지 멕시코를 비운 사이, 스페인의 제1 아우디엔시아(고등법원 겸 행정기관)는 우에쇼친코 공동체의 일상에 개입하여 과도한 세금을 물품과 노동력 형태로 부과하며 주민들을 착취했다. 코르테스가 돌아오자, 우에쇼친코의 나우아족은 코르테스와 힘을 합쳐 제1 아우디엔시아의 부당한 처사에 대한 법적 소송을 제기했다.

우에쇼친코 코덱스에는 누뇨 데 구스만이 왕의 이름으로 엔코미엔다를 관리하면서 저지른 착취 행위에 대한 증언이 기록되어 있다. 코르테스를 지지했던 원주민들은 구스만이 마을에서 막대한 양의 공물을 징수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벌이는 전쟁에 강제로 동원했다고 증언했다. 여러 증언에 따르면, 우에쇼친코의 영주였던 에스테반(과거 이름은 토첼 또는 토치틀리, '토끼'라는 뜻)은 구스만을 위해 말을 마련해주기 전까지는 전쟁 참여를 거부했다고 한다. 당시 말은 신대륙에 없던 동물이라 매우 귀하고 비쌌는데, 한 증언자는 에스테반이 "21개의 작은 금괴"를 주고 말을 구입했다고 밝혔다. 또한 에스테반은 전쟁에 동원된 600명의 무장 병력 비용으로 27,000개의 천 조각이 들었다고 진술했다.[3]

이 소송은 멕시코에서 처음에는 우에쇼친코 측에 유리하게 진행되었으나, 스페인 본국의 인디아스 평의회에 항소되었다. 소송의 최종 결과는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으나,[4] 이후 미국 의회 도서관에서 발견된 문서에 따르면, 1538년 스페인 국왕 카를 1세는 스페인 행정관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우에쇼친코 주민들로부터 징수한 공물의 3분의 2를 반환하라는 판결을 내렸다.[5]

2. 2. 누뇨 데 구스만의 횡포와 저항

에르난 코르테스가 1529년부터 1530년까지 멕시코를 떠나 있는 동안, 스페인의 제1 아우디엔시아는 우에쇼친코 공동체의 일상에 개입하여 나우아족 주민들에게 물품과 서비스 형태로 과도한 세금을 부과했다. 코르테스가 돌아오자, 우에쇼친코의 나우아족은 제1 아우디엔시아의 부당한 처사에 맞서 코르테스와 함께 법적 소송을 시작했다.

특히 누뇨 데 구스만이 왕의 이름으로 엔코미엔다를 관리하게 되면서 주민들에 대한 착취는 더욱 심해졌다. 우에쇼친코 코덱스에 기록된 증언에 따르면, 구스만은 마을에서 막대한 양의 공물을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일으킨 전쟁에 주민들을 강제로 동원했다. 여러 원주민 증인들은 우에쇼친코의 영주가 전쟁 참여를 강요받았으나, 말을 마련해 주기 전까지는 참전을 거부했다고 증언했다. 당시 말은 신대륙에 없던 동물이었고 1520년대 말에는 현지에서 태어난 말도 거의 없어 매우 귀하고 비쌌다. 한 증언에서는 이전에 Tochel|토첼nah 또는 Tochtli|토치틀리nah("토끼")라 불렸던 에스테반이라는 인물이 말을 사기 위해 "21개의 작은 금괴"를 지불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에스테반은 또한 전쟁을 위해 무장시킨 600명의 남성들에게 들어간 비용이 27,000개의 천 조각에 달했다고 증언했다.[3]

우에쇼친코 주민들은 멕시코에서 진행된 소송에서 처음에는 승소했지만, 이 사건은 스페인의 인디아스 평의회에 항소되었다. 소송의 최종 결과는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으나,[4] 이후 미국 의회 도서관 소장품에서 발견된 문서에 따르면, 1538년 스페인 국왕 카를 1세가 스페인 행정관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우에쇼친코 주민들로부터 징수한 공물의 3분의 2를 반환하라는 판결을 내렸음이 확인되었다.[5]

3. 우에쇼친코 코덱스의 내용

1925년까지 이 코덱스는 코르테스의 후손(이탈리아 몬텔레오네 공작)의 개인 문서 보관소에 속해 있었다.[6] 이후 에드워드 하크니스가 희귀 서적 딜러 A.S.W. 로젠바흐에게서 코덱스를 구입하여 1928-29년에 미국 의회도서관에 기증했다.[6]

코덱스에는 스페인 식민 행정관들의 착취에 대한 나우아족의 증언이 나와틀어로 기록되어 있으며, 소송을 위해 스페인어로 번역된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7] 특히, 누뇨 데 구스만이 누에바갈리시아 정복 원정을 위해 요구한 군기에 그려진 성모 마리아 이미지는 원주민이 그린 초기 기독교 도상 중 하나로 주목받는다.[7] 이 깃발 제작과 관련된 비용 및 물품 동원, 심지어 노예 거래 내역까지 상형 문자로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당시 원주민들이 겪었던 과도한 부담을 보여준다.[8] 자세한 증언 기록과 성모 마리아 도상 분석은 하위 섹션에서 다룬다.

3. 1. 증언 기록

에르난 코르테스가 1529년부터 1530년까지 멕시코를 떠나 있는 동안, 제1 아우디엔시아는 우에쇼친코 공동체의 일상 활동에 개입하여 나우아족에게 과도한 세금을 물품과 서비스 형태로 강요했다. 코르테스가 돌아오자 우에쇼친코의 나우아족은 제1 아우디엔시아의 부당한 처사에 대한 법적 소송에 그와 함께 참여했다.

우에쇼친코 코덱스에는 누뇨 데 구스만이 왕의 이름으로 엔코미엔다를 인수했을 당시 자행된 착취 행위에 대한 증언이 기록되어 있다. 코르테스를 지지했던 원주민들은 구스만이 마을에서 막대한 양의 공물을 징수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전쟁에 나설 때 강제로 동원했다고 주장했다. 여러 원주민 증인들은 우에쇼친코의 영주 역시 참전을 강요받았으며, 말을 마련해 주기 전까지는 참전을 거부했다는 사실을 증언했다. 당시 말은 신세계에 없던 동물이었고 1520년대 말에는 현지에서 태어난 말도 거의 없어 매우 비쌌다. 한 증언에 따르면, 이전에 토첼(Tochel|토첼nah, 또는 토치틀리 Tochtli|토치틀리nah, "토끼")이라고 불렸던 에스테반은 말을 사기 위해 "21개의 작은 금괴"를 지불했다고 한다. 에스테반은 또한 전쟁을 위해 무장한 600명의 남자를 동원하는 데 "27,000개의 천 조각"이 비용으로 들었다고 증언했다.[3]

원고들은 멕시코에서의 소송에서 처음에는 승소했지만, 이 소송은 스페인 인디아스 평의회에 항소되었다. 소송의 최종 결과에 대한 문서는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으나,[4] 이후 미국 의회 도서관 소장품에서 발견된 문서에 따르면, 1538년 스페인 국왕 카를 1세가 스페인 행정관에 대한 판결을 확정하여 우에쇼친코 사람들로부터 징수한 모든 공물의 3분의 2를 반환하라고 명령했음이 밝혀졌다.[5]

3. 2. 성모 마리아 도상

우에쇼친코 코덱스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부분은 성모 마리아의 이미지인데, 이는 아메리카 원주민이 그린 초기 기독교 도상 중 하나로 여겨진다.[7] 이 도상은 당시 누뇨 데 구스만이 신 누에바갈리시아 정복 원정을 위해 요구했던 군기(軍旗)에 그려진 이미지로 추정된다. 우에쇼친코(Huexotzinco)의 원주민들은 이 군기를 제작하기 위해 깃털을 마련해야 했다. 그들은 원주민 상인에게 노예 20명을 팔아 금괴 3개와 매우 귀하게 여겨지던 께찰 깃털 9다발을 확보했다.[7] 당시 우에쇼친코의 원주민 영주였던 루카스(과거 타마발텔레로 알려짐)의 증언에 따르면, 이 성모 마리아 이미지는 "팔의 절반 이상 길이로 넓었다"고 한다.[7]

원주민들의 증언은 나와틀어로 작성되었으며, 소송을 위해 스페인어로 번역되었다.[7] 학자들은 코덱스를 분석하여 각 상형 문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해독했는데, 성모 마리아 깃발 이미지가 있는 페이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8]

상형 문자의미수량/비용
갈대 묶음 위 단지액체 호박400단지
갈대 묶음 + 분할된 사각형여행 중 식량 구입용 작은 망토400개
갈대 묶음 4개 + 작은 사각형 10개샌들1,600켤레 (구스만 원정대 전사용)
깃발/배너 (돈 토메 휴대)깃발 제작 비용짐당 20개의 작은 망토 10짐
원반 3개성모 마리아 깃발용 고급 3개
양식화된 깃털 있는 깃발 9개께찰 깃털 묶음9묶음 (묶음당 20개 깃털, 비용: 짐당 20개 망토 9짐)
성모 마리아 이미지구스만의 깃발크기 약 16" x 16", 금박 처리. 가톨릭교회와 관련된 가장 초기의 원주민 작품 중 하나로 평가됨.
다트 묶음 10개금속다트4,000개 (원정대용)
원반 (성모 마리아 이미지 오른쪽)돈 토메용 말 구입 비용 또는
양식화된 깃발 10개전사용 허리띠200짐
남자 8명남자 노예8명 (성모 마리아 깃발용 금 마련 위해 판매됨)
큰 사각형 있는 양식화된 깃발 3개가죽 덮개 상자60개
독특하게 옷 입은 여성 6명씩 두 그룹여자 노예12명 (성모 마리아 깃발용 금 마련 위해 판매됨)



이처럼 성모 마리아 도상이 포함된 페이지는 단순히 종교적인 이미지를 넘어, 당시 원주민 사회가 스페인 제국의 요구에 따라 어떻게 자원을 동원하고 희생을 치렀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기독교 문화가 어떻게 전파되고 수용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기록이다. 특히, 깃발 제작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동족을 노예로 팔아야 했던 상황은 당시 원주민들이 처했던 복잡하고 어려운 현실을 반영한다.[8]

4. 코덱스 연구와 가치

1925년까지 코르테스 후손(이탈리아 몬텔레오네 공작)의 개인 문서 보관소에 속해 있던 이 코덱스는,[6] 에드워드 하크니스가 희귀 서적 딜러 A.S.W. 로젠바흐에게서 구입하여 1928년에서 1929년 사이에 의회 도서관에 기증하면서 연구가 본격화되었다.[6] 학자들은 코덱스를 면밀히 분석하여 나와틀어 상형문자를 해독하고 그 의미를 밝혀냈으며,[8] 이를 통해 코덱스의 중요한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규명하였다. 코덱스에 담긴 원주민들의 증언은 나와틀어로 작성되었고, 소송을 위해 스페인어로 번역되었다.[7]

4. 1. 역사적 가치

우에쇼친코 코덱스는 16세기 멕시코 원주민 사회의 경제, 사회, 문화적 상황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 자료이다. 특히 스페인 식민 지배 초기, 엔코미엔다 제도를 통해 원주민에게 가해진 과도한 부담과 이에 대한 원주민의 대응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크다.

푸에블라 주 우에쇼친코의 나우아족은 본래 아즈텍 제국 정복 과정에서 에르난 코르테스의 동맹 세력이었으나[2], 정복 이후 코르테스의 엔코미엔다 소유지의 일부가 되었다. 코르테스가 잠시 멕시코를 떠난 사이, 스페인 제1 아우디엔시아는 우에쇼친코 공동체에 과도한 세금을 물품과 서비스 형태로 부과하며 착취를 자행했다.

코덱스는 코르테스가 돌아온 후, 우에쇼친코의 나우아족이 제1 아우디엔시아의 행정관이었던 누뇨 데 구스만 등의 남용에 맞서 코르테스와 함께 제기한 법적 소송 과정에서 제출된 증거 자료들을 포함하고 있다. 코덱스에 담긴 증언들은 구스만이 왕의 이름으로 엔코미엔다를 관리하면서 막대한 양의 공물을 징수했을 뿐만 아니라, 원주민들을 강제로 전쟁에 동원했음을 고발한다. 한 증언에 따르면, 당시 신대륙에서는 매우 귀했던 말을 구스만에게 제공하기 위해 우에쇼친코 주민들은 "21개의 작은 금괴"를 지불해야 했으며, 전쟁에 동원된 600명의 무장 비용으로 "27,000개의 천 조각"을 부담해야 했다고 한다.[3] 이는 당시 원주민들이 겪었던 경제적 수탈의 정도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비록 이 소송은 멕시코에서 초기 승소 후 스페인 인디아스 평의회에 항소되었지만[4], 최종적으로 1538년 스페인 국왕 카를 1세는 원주민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스페인 행정관들이 부당하게 징수한 공물의 3분의 2를 반환하라는 판결을 내렸다.[5] 이는 우에쇼친코 코덱스가 단순히 피해 사실을 기록한 것을 넘어, 스페인 식민 권력의 부당함에 맞서 법적 투쟁을 통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일부 승리를 거둔 원주민들의 저항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임을 시사한다. 따라서 이 코덱스는 식민 초기 원주민 사회의 실상과 스페인 지배에 대한 원주민의 대응 방식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사료로 평가받는다.

4. 2. 미술사적 가치

우에쇼친코 코덱스는 초기 기독교 도상을 원주민의 시각으로 묘사한 희귀한 사례로서 중요한 미술사적 가치를 지닌다. 특히 코덱스에 포함된 성모 마리아 이미지는 원주민이 그린 초기 기독교 성화 중 하나로 주목받는다.[7] 이는 당시 아즈텍 원주민들의 예술적 표현 방식과 외부 문화 수용 과정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자료를 제공한다.

코덱스의 내용은 구스만이 신 뉴 갈리시아 정복 전쟁에 사용할 군기 제작을 우에쇼친코 지역민들에게 강요했던 상황을 나와틀어 상형문자와 스페인어 번역을 통해 기록하고 있다. 우에쇼친코인들은 이 군기를 만들기 위해 금과 께찰 깃털 등 귀한 재료를 마련해야 했으며, 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20명의 노예를 팔아야 했다.[7] 원주민 영주 루카스의 증언에 따르면, 성모 마리아 이미지는 "팔의 절반 이상 길이로 넓었다"고 한다.[7]

코덱스의 각 상형문자는 당시의 물품과 거래 내역을 상세하게 보여준다. 학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성모 마리아 깃발 이미지가 있는 페이지는 깃발 제작 비용과 전쟁 지원을 위해 제공된 물품들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8]

상형문자 (묘사)의미
액체 호박 단지 (갈대 묶음 위)액체 호박 400단지
갈대 묶음과 분할된 사각형작은 면 망토 400개 (식량 구입용)
갈대 묶음 4개와 작은 사각형 10개샌들 1,600켤레 (전사용)
깃발 또는 배너비용: 짐당 작은 망토 20개 x 10짐 (우에쇼친칸 영주 돈 토메가 휴대)
원반 3개마돈나 기준(깃발)에 사용된 고급 금판
양식화된 깃털이 있는 깃발 9개께찰 깃털 9묶음 (각 묶음 20개, 비용: 짐당 망토 20개 x 9짐)
성모 마리아 이미지구스만의 기준 (깃발), 금박으로 장식된 초기 원주민 가톨릭 관련 작품 (약 16" x 16")
다트 묶음 10개금속 팁 다트 4,000개 (캠페인용)
원반 (성모 마리아 이미지 오른쪽)돈 토메를 위한 말을 구입하기 위한 금 또는 은
양식화된 깃발 10개전사들을 위한 허리띠 200짐
남자 8명마돈나 기준을 위한 금을 위해 인도 상인에게 팔린 남자 노예
상단에 큰 사각형이 있는 양식화된 깃발 3개가죽 덮개 상자 60개
독특하게 옷을 입은 여성 6명으로 구성된 두 그룹마돈나 배너를 위한 금을 지불하기 위해 팔린 여자 노예



이처럼 우에쇼친코 코덱스는 단순한 기록 문서를 넘어, 정복 초기 원주민 사회의 경제 활동, 강제 동원, 그리고 외부 종교 미술을 자신들의 전통적인 상형문자 체계로 표현하려 했던 예술적 시도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이다.[8]

참조

[1] 웹사이트 Huexotzinco Codex http://hdl.loc.gov/l[...] Library of Congress, Harkness Collection 2010-11-10
[2] 서적 Letter of the Cabildo [town council] of Huejotzinco to the King, 1560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3
[3] 서적 Huejotzinco Codex Library of Congress 1974
[4] 서적 The Harkness 1531 Huejotzinco Codex, introduction Library of Congress 1974
[5] 웹사이트 Huexotzinco Codex, 1531 https://mapas.wired-[...] The Mapas Project 2024-03-23
[6] 간행물 The examination and conservation treatment of the Library of Congress Harkness 1531 Huejotzingo Codex http://cool.conserva[...] 2013-12-27
[7] 서적 Huejotzinco Codex Library of Congress 1974
[8] 서적 The Huejotzinco Codex Library of Congress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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