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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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웅역은 주 성왕 시기에 초나라를 건국한 인물이다. 그는 주 무왕과 주 문왕에게 충성한 신하들을 기리고자 했던 성왕에 의해 등용되어 단양에 초나라의 첫 번째 수도를 건설하고, 자작 작위를 받았다. 웅역은 주 강왕을 보좌하고, 주나라에 공물을 바치는 등 주나라와의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웅애를 아들로 두었으며, 웅역 사후 웅애가 초나라의 통치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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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역 | |
---|---|
인물 정보 | |
이름 | 웅역 |
한자 표기 | 熊繹 |
로마자 표기 | Xiong Yi |
출생 및 사망 | |
생존 시기 | 기원전 11세기 |
신분 | |
직책 | 초나라의 군주 |
작위 | 자작 |
가계 | |
성 | 미(羋) |
씨 | 웅(熊) |
아버지 | 육웅 |
아들 | 웅애 |
통치 정보 | |
재위 기간 | 불명 |
이전 군주 | (초대) |
다음 군주 | 웅애 |
2. 생애
주 성왕(기원전 1042–1021년 재위)은 그의 선대인 주 무왕과 주 문왕에게 충성한 신하들을 기리고자 했다. 성왕은 웅역과 다른 씨족 수장들을 기양(岐陽중국어) (오늘날 산시성 치산현 북동부)에서 소집하여 충성을 맹세하게 하고, 서열에서 모궐(茅蕝중국어) 관리자로 임명했다.[1] 또한 선비족 족장과 함께 제례용 횃불(守燎중국어)의 공동 관리자로 임명되었다.[1] 웅역은 조상들이 과거 주나라 군주들에게 충성스럽게 봉사한 결과, 단양(丹阳중국어) (오늘날 허난성 시촨현) 주변의 토지를 하사받아 그곳에 초나라의 첫 번째 수도를 건설했다.[1] 그는 징산 산맥 산기슭의 가시 덤불을 제거하는 고된 작업을 통해 초나라 백성들이 초나라를 건설하고 주 왕에게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했다.[1] 주 성왕은 웅역에게 주나라 귀족의 세습 작위인 ''자'' (子중국어)를 하사했는데, 이는 이후 수세기 동안 자작에 거의 상응하는 작위가 되었다.[1]
주나라 무왕의 아들인 주 성왕이 즉위했을 때, 주나라 문왕과 주나라 무왕 시대의 대신들의 공적에 감사하기 위해 그들의 자손을 승진시키고, 웅역을 남쪽에 50리 자작의 칭호를 부여하여 초 정권을 수립하여 단양에 거주하게 했다.
웅역은 경산(景山)에 머물며 무성한 잡초를 베어내고 산과 강을 건너 주나라에 봉사하며, 복숭아나무 활과 대추나무 화살로 공물을 바쳤다.
주 강왕 치세 동안, 웅역은 노공 백금, 진후 섭, 정공과 함께 주나라 강왕을 보좌했다.
제후국 지도자 제나라 정공, 위나라 강백( 衛康伯중국어 ), 진나라 사후, 노나라의 공작 보 친이 주 강왕을 만났을때, 왕은 초나라 통치자를 참여시키지 않고 세 명의 제후 지도자에게 각각 귀중한 보물을 하사했다. 이후 춘추 시대인 기원전 530년, 초 영왕은 다시 한번 초나라의 배제 문제를 제기했다.[1] 웅역 37년(기원전 1006년), 웅역은 사망했다. 웅역 사후, 아들 가 초나라 군주가 되었다.
2. 1. 주나라로부터의 인정
주 성왕(기원전 1042–1021년 재위)은 그의 선대인 주 무왕과 주 문왕에게 충성한 신하들을 기리고자 했다. 성왕은 웅이와 다른 씨족 수장들을 기양(岐陽중국어) (오늘날 산시성 치산현 북동부)에서 소집하여 충성을 맹세하게 하고, 서열에서 모궐(茅蕝중국어) 관리자로 임명했다. 또한 선비족 족장과 함께 제례용 횃불(守燎중국어)의 공동 관리자로 임명되었다. 웅이는 조상들이 과거 주나라 군주들에게 충성스럽게 봉사한 결과, 단양(丹阳중국어) (오늘날 허난성 시촨현) 주변의 토지를 하사받아 그곳에 초나라의 첫 번째 수도를 건설했다. 그는 징산 산맥 산기슭의 가시 덤불을 제거하는 고된 작업을 통해 초나라 백성들이 초나라를 건설하고 주 왕에게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했다. 주 성왕은 웅이에게 주나라 귀족의 세습 작위인 ''자'' (子중국어)를 하사했는데, 이는 이후 수세기 동안 자작에 거의 상응하는 작위가 되었다.주나라 무왕의 아들인 주 성왕이 즉위했을 때, 주나라 문왕과 주나라 무왕 시대의 대신들의 공적에 감사하기 위해 그들의 자손을 승진시키고, 웅역을 남쪽에 50리 자작의 칭호를 부여하여 초 정권을 수립하여 단양에 거주하게 했다.
웅역은 경산(景山)에 머물며 무성한 잡초를 베어내고 산과 강을 건너 주나라에 봉사하며, 복숭아나무 활과 대추나무 화살로 공물을 바쳤다.
주 강왕 치세 동안, 웅역은 노공 백금, 진후 섭, 정공과 함께 주나라 강왕을 보좌했다.
제후국 지도자 제나라 정공, 위나라 강백( 衛康伯중국어 ), 진나라 사후, 노나라의 공작 보 친이 주 강왕을 만났을때, 왕은 초나라 통치자를 참여시키지 않고 세 명의 제후 지도자에게 각각 귀중한 보물을 하사했다. 이후 춘추 시대인 기원전 530년, 초 영왕은 다시 한번 초나라의 배제 문제를 제기했다.[1]
2. 2. 초나라 건국
웅이는 주 성왕(기원전 1042–1021년 재위) 시대에 살았으며, 주 성왕은 그의 선대인 주 무왕과 주 문왕의 가장 충성스러운 신하들을 기리고자 했다. 왕은 웅이와 다른 씨족 수장들을 기양(岐陽) (오늘날 산시성 치산현 북동부)에서 소집하여 웅이는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같은 자리에서, 그의 조상들이 과거 주나라 군주들에게 충성스럽게 봉사한 결과, 웅이는 단양() (오늘날 허난성 시촨현) 주변의 토지를 하사받아 그곳에 초나라의 첫 번째 수도를 건설했다. 그는 그 후 초나라 백성들이 초나라를 건설하고 주 왕에게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징산 산맥 산기슭의 가시 덤불을 제거하는 고된 작업을 시작했다. 주 성왕은 또한 웅이에게 주나라 귀족의 세습 작위인 ''자'' ()를 하사했는데, 이는 이후 수세기 동안 자작에 거의 상응하는 작위가 되었다.웅이는 경산(景山)에 머물며 무성한 잡초를 베어내고 산과 강을 건너 주나라에 봉사하며, 복숭아나무 활과 대추나무 화살로 공물을 바치는 것 외에는 할 수 없었다.
주 강왕의 치세 동안, 웅역은 노공 백금, 진후 섭, 정공과 함께 주나라 강왕을 보좌했다.
웅이 재위 기간 중, 제후국 지도자 제나라 정공, 위나라 강백(), 진나라 사후, 그리고 노나라의 공작 보 친이 주 강왕을 만났다. 왕은 초나라 통치자를 참여시키지 않고 세 명의 제후 지도자에게 각각 귀중한 보물을 하사했다. 이후 춘추 시대인 기원전 530년, 초 영왕은 다시 한번 초나라의 배제 문제를 제기했다.[1] 웅이는 아들 웅애가 초나라의 통치자로 계승했다.[1]
2. 3. 주나라와의 관계
웅이는 주 성왕(기원전 1042–1021년 재위) 시대에 살았으며, 주 성왕은 주 무왕과 주 문왕의 충성스러운 신하들을 기리고자 했다.[1] 왕은 웅이와 다른 씨족 수장들을 기양(岐陽) (오늘날 산시성 치산현 북동부)에서 소집하여 웅이는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서열에서 모궐(茅蕝)의 관리자가 되었다.[1] 그는 또한 선비족 족장과 함께 제례용 횃불(守燎)의 공동 관리자로 임명되었다.[1] 웅이는 단양(丹阳) (오늘날 허난성 시촨현) 주변의 토지를 하사받아 그곳에 초나라의 첫 번째 수도를 건설했다.[1] 그는 그 후 초나라 백성들이 초나라를 건설하고 주 왕에게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징산 산맥 산기슭의 가시 덤불을 제거하는 고된 작업을 시작했다.[1] 주 성왕은 또한 웅이에게 주나라 귀족의 세습 작위인 ''자''(子)를 하사했는데, 이는 이후 수세기 동안 자작에 거의 상응하는 작위가 되었다.[1]웅이는 경산(景山)에 머물며 무성한 잡초를 베어내고 산과 강을 건너 주나라에 봉사하며, 복숭아나무 활과 대추나무 화살로 공물을 바쳤다.[1]
주 강왕 시기, 제후국 지도자 제나라 정공, 위나라 강백, 진나라 사후, 노나라의 공작 보 친이 주 강왕을 만났지만, 초나라 통치자는 배제되었다.[1] 이후 춘추 시대인 기원전 530년, 초 영왕은 다시 한번 초나라의 배제 문제를 제기했다.[1] 웅역 37년(기원전 1006년), 웅역은 사망하고 아들 웅애가 초나라의 통치자로 계승했다.[1]
3. 웅이의 유산
참조
[1]
서적
Annotated Zuo Zhuan 《春秋左传注》
Zhonghua Publishing (中华书局)
1990
[2]
서적
Rites of Zhou Tian Guan Dian Shi 《周礼.天官.甸师》
[3]
웹사이트
楚[周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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