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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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윤추는 조선 시대의 문신으로, 윤황의 손자이자 윤선거의 아들이며, 윤증의 동생이다. 1668년 문과에 급제했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으려 했고, 여러 차례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사양하다가 1681년 장흥고 주부에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회덕 현감을 거쳐 사헌부 장령을 지냈으며, 1707년에 7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저서로는 《농은선생유고》가 있다.
충청도 회덕군 읍내리에서 태어났으며 대사간을 지낸 팔송 윤황의 손자이자 학자인 미촌 윤선거의 아들이다. 당색은 서인으로, 훗날 소론의 영수가 되는 명재 윤증의 동생이다. 어려서부터 아버지 윤선거에게 학문을 배웠다.[1]
윤추의 고조부는 윤돈(尹暾)이며, 증조부는 윤창세(尹昌世)이다. 조부는 윤황(尹煌)이고, 조모는 창녕 성씨로 성혼의 딸이다. 숙부로는 윤훈거(尹勛擧), 윤순거(尹舜擧), 윤상거(尹商擧), 윤문거(尹文擧), 윤민거(尹民擧), 윤경거(尹耕擧), 윤시거(尹時擧)가 있었다. 고모부는 남인 당원이자 윤휴의 처남인 권준이었다. 아버지는 윤선거(尹宣擧)이며, 어머니는 공주 이씨이다.
농은선생유고(農隱先生遺稿)가 있다.
2. 생애
30세에 병을 얻어 10년 동안 고생하다가 1668년(현종 9)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전시에는 응시하지 않았다.[1] 1669년 부친상을 당하여 3년상을 치렀고, 이후에도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스스로 호를 농은이라 칭하며 향리에서 지내려 했다.[1] 그러나 조정에서는 계속 출사를 권유해왔다.
1681년 (숙종 7) 장흥고 주부에 처음 임명되었고, 얼마 후 회덕 현감으로 부임하였으나 1년 만에 사직하고 돌아왔다.[1] 이후 여러 벼슬을 거쳐 1706년(숙종 32) 사헌부 장령에 이르렀으나, 사양하고 물러났다.[1] 1707년 7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
2. 1. 가계와 출생
충청도 회덕군 읍내리에서 태어났으며 대사간을 지낸 팔송 윤황의 손자이자 학자인 미촌 윤선거의 아들이다.[1] 당색은 서인으로, 훗날 소론의 영수가 되는 명재 윤증의 동생이다. 어려서부터 아버지 윤선거에게 학문을 배웠다.[1]
30세에 병을 얻어 10년 동안 고생하다가 1668년(현종 9)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전시에는 응시하지 않았다.[1] 1669년 부친상을 당하여 3년상을 치렀고, 이후에도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스스로 호를 농은이라 칭하며 향리에서 지내려 했다.[1] 그러나 조정에서는 계속 출사를 권유해왔다.
1681년 (숙종 7) 장흥고 주부에 처음 임명되었고, 얼마 후 회덕 현감으로 부임하였으나 1년 만에 사직하고 돌아왔다.[1] 이후 여러 벼슬을 거쳐 1706년(숙종 32) 사헌부 장령에 이르렀으나, 사양하고 물러났다.[1] 1707년 7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
2. 2. 관직 생활
충청도 회덕군 읍내리에서 태어났으며 대사간 팔송 윤황의 손자이자 학자 미촌 윤선거의 아들이다. 당색은 서인이었으며, 후일 소론의 영수가 되는 명재 윤증의 동생이다. 어려서부터 아버지 윤선거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가학으로 학덕을 닦았다.[1]
그러나 30세에 병에 걸려 10년 동안 고생하다가, 1668년(현종 9)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전시에는 나가지 않았다.[1] 1669년 부친상을 당하여 출사하지 않았고, 3년상을 마쳤다. 3년상을 마친 뒤에도 관직에 나가지 않고 스스로 자호하여 호를 농은이라 하고, 향리의 전야에 파묻혀 일생을 보내려 하였다. 그러나 계속 조정에서는 출사 권유가 들어왔다.[1]
이후 조정에서 여러 번 벼슬을 내렸으나 나가지 않다가, 1681년(숙종 7) 처음으로 장흥고 주부에 부임하였다.[1] 얼마 후 회덕 현감으로 부임하였으나, 관에 있은 지 1년 만에 벼슬을 버리고 집에 돌아왔다. 그 후 여러 벼슬을 거쳐 1706년(숙종 32)에 사헌부 장령에 이르렀으나, 상소하여 사양하고 물러났다. 1707년에 사망하니 당시 향년 75세였다.[1]
2. 3. 사망
농은 윤추는 1669년 부친상을 당하여 3년상을 마쳤다.[1] 3년상을 마친 뒤에도 관직에 나가지 않고 스스로 자호하여 호를 농은이라 하고, 향리의 전야에 파묻혀 일생을 보내려 하였다.[1] 그러나 계속 조정의 출사 권유로 1681년 처음으로 장흥고 주부에 부임하였다.[1] 회덕 현감으로 부임하였으나, 관에 있은지 1년만에 벼슬을 버리고 집에 돌아왔다.[1] 그 후 여러 벼슬을 거쳐 1706년 사헌부 장령에 이르렀으나, 상소하여 사양하고 물러났다.[1] 1707년에 사망하였으며, 향년 75세였다.[1]
3. 가족 관계
형님은 윤증(尹拯)이며, 매제로는 반남인 박세후(朴世垕), 전주인 이정여(李正輿), 안동인 권준(權儁)이 있었다. 동생으로는 윤발(尹撥), 윤졸(尹拙), 윤읍(尹挹)이 있었다. 첫 번째 부인은 풍양 조씨로 조진양(趙進陽)의 딸이며, 장남은 윤자교(尹自敎), 차남은 윤가교(尹可敎)이다. 두 번째 부인은 전의 이씨로 이유(李𣞗)의 딸이다.
4. 저서
5. 시
言寡方知自耳聾(언과방지자이롱) / 말 수가 적어저야 귀먹은 줄 알아
耳聾誠有寡言功(이롱성유과언공) / 귀먹어서야 말이 적은 공이 생겼구나.
人雖語大吾安聽(인수어대오안청) / 사람들이 큰 질러도 난 편안히 들어
我亦聲微彼不通(아역성미피부통) / 나의 소리도 작아서 그들은 몰라라.
默默謙謙終日坐(묵묵겸겸종일좌) / 묵묵히 조용하게 종일토록 앉았으니
廖廖寂寂一堂空(료료적적일당공) / 고요하고 한적하여 온집이 비었구나.
平生駁雜多尤悔(평생박잡다우회) / 성격 박잡하여 허물과 후회 많았는데
天奪其聰幸此翁(천탈기총행차옹) / 하늘이 현명하여 이 늙은이를 도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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