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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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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윤한식은 대한민국의 섬유공학자로, 아라미드 펄프 개발을 통해 '기적의 섬유'를 만들어 세계적인 과학자로 인정받았다. 서울대학교에서 학·석·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부산사범학교 물리 교사, 대원염료공업사 연구실장, 범아합성화학공업사 기술상무 등을 거쳐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서 선임, 책임, 석좌연구원을 역임했다. 1970년대 듀폰의 케블라에 대항하여 아라미드 섬유 국산화 연구를 추진, 독자적인 제조 공정을 개발하여 듀폰과의 특허 소송에서 승리했다. 1984년 국민훈장 목련장, 1985년 올해의 과학자상을 수상했으며, 1992년 과학기술자 공로연금 제1호 수혜자로 선정되었다.

2. 학력

서울대학교에서 섬유공학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 1. 서울대학교 (1949~1984)

윤한식의 서울대학교 학력
학위전공기간
학사섬유공학1949년 ~ 1955년
석사섬유공학1978년 ~ 1980년
박사섬유공학1980년 ~ 1984년


3. 경력

윤한식은 부산사범학교 물리교사, (구)대원염료공업사 연구실장, (구)범아합성화학공업사 기술상무를 거쳐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에서 선임연구원, 책임·석좌연구원, 명예연구원으로 활동했다.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방문과학자와 호서대학교 석좌교수를 역임하기도 했다.

3. 1. 교사 및 기업 연구원 (1955~1967)

1955년부터 1961년까지 Busan Normal School|부산사범학교영어에서 물리 교사로 재직하였다. 1961년부터 1964년까지는 (구)대원염료공업사 연구실장, 1964년부터 1967년까지는 (구)범아합성화학공업사 기술상무를 역임하였다.

기간직책기관
1955년 ~ 1961년물리 교사Busan Normal School|부산사범학교영어
1961년 ~ 1964년연구실장(구)대원염료공업사
1964년 ~ 1967년기술상무(구)범아합성화학공업사


3. 2.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연구원 (1967~1999)

윤한식은 1967년부터 1979년까지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선임연구원으로 재직하였다. 1974년에는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방문과학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1979년부터 1989년까지는 KIST 책임연구원 및 석좌연구원으로, 1994년부터 1999년까지는 KIST 명예연구원 및 호서대학교 석좌교수로 재직하였다.

윤한식의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경력
기간직책
1967년 ~ 1979년KIST 선임연구원
1974년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방문과학자
1979년 ~ 1989년KIST 책임연구원, 석좌연구원
1994년 ~ 1999년KIST 명예연구원, 호서대학교 석좌교수


4. 생애 및 업적

윤한식은 연구에 몰두했던 과학자였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연구를 멈추지 않았고, "기적의 섬유"라 불리는 아라미드 펄프를 개발하여 세계적인 과학자로 인정받았다. 정년퇴임 후에도 연구에 대한 열정을 보였던 그는, 다른 사람의 연구를 답습하지 않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연구를 추구했다.

경상남도 함양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섬유학과를 졸업하고, KIST 연구원으로 일하며 섬유공학 연구에 평생을 바쳤다. 특히 아라미드 섬유 개발에 헌신하여, 기존 듀폰케블라보다 우수한 성능의 아라미드 펄프 제조 공정을 개발했다. 이는 듀폰과의 특허 분쟁으로 이어졌지만, 결국 유럽특허청에서 독창성을 인정받았다. 그의 논문은 세계적인 학술지 네이처에 게재되었으며, 섬유 형성 과정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윤한식은 1984년 국민훈장 목련장, 1985년 제1회 올해의 과학자상을 수상했고, 1992년 뉴욕과학아카데미 회원으로 추대되었다. 또한, 1992년 신설된 과학기술자 공로연금 제1호 종신 수혜자로 선정되어 그의 공로를 인정받았다. 그의 좌우명은 ‘쉬지 않고 하면 언젠가는 꿈이 이루어진다’였으며, 실제로 끊임없는 노력과 창의적인 연구 자세를 보여주었다.

4. 1. 연구자의 길 (1929~1967)

윤한식은 1929년 경상남도 함양에서 태어났다. 서울 중앙중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섬유학과를 졸업한 후 부산사범학교에서 6년간 물리 교사로 근무했다. 그는 기술 개발에 대한 열망으로 부산의 대원염료공업사 연구실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1965년에는 부산의 범아합성화학공업사에서 기술상무로 일했지만, 회사는 자금난으로 문을 닫게 되었다.

1966년, 한국 최초의 정부출연연구소인 KIST가 설립되면서 윤한식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그는 다년간의 기업 현장 연구개발 경험을 인정받아 KIST 연구원이 되었다. 그는 산업 현장의 기술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했으며, 특히 섬유공학 연구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다. 그의 최고 연구 업적인 고강도 아라미드 펄프 개발은 그의 인내와 끈기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4. 2. 아라미드 펄프 개발과 듀폰과의 특허 분쟁 (1967~1991)

윤한식은 1973년 미국 듀폰이 처음 상용화에 성공한 아라미드 섬유의 국산화를 위해 연구를 추진했다. 아라미드는 400∼500℃의 고온에서도 타거나 녹지 않으며, 5㎜ 정도 굵기의 가는 실로 2t의 무게를 들어 올릴 정도로 강해 '기적의 섬유'로 불린다. 자동차용 타이어코드, 방탄조끼나 헬멧, 미사일 발사용 총동, 여객기 동체, 자동차용 보강재 등 용도가 매우 넓다. 1970년대 당시 세계시장은 듀폰의 아라미드 섬유인 케블라(Kevlar)가 석권하고 있었다.

연구 도중 연구비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코오롱의 지원과 아라미드 개발 프로젝트가 국책산업으로 지정되며 연구는 탄력을 받았다. 1982년 윤한식과 연구팀은 3년간의 연구 끝에 독자적인 제조공정을 개발해 아라미드 펄프를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그가 개발한 제조공정은 방사 과정이 필요했던 기존의 공정과 달리 순수한 화학반응만으로 섬유를 만들 수 있게 한 것으로, 듀폰의 케블라 섬유의 생산 공정보다 단순하며 생산효율이 높고 생산 비용이 낮다는 강점이 있었다. 섬유 생산에서 방사 과정이 차지하는 비용 부담은 90% 정도에 육박하기 때문에 그의 연구가 산업 현장에 미칠 영향은 클 것으로 예상됐다.

그는 개발한 아라미드 펄프와 제조 공정을 각각 미국에 특허 출원했고, 1985년 4월 특허를 획득했다. 미국 이외에도 영국, 일본, 독일 등 7개국에 특허를 출원하며 개발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았다. 케블라를 상용화하는 데 성공했던 듀폰도 그의 연구성과에 관심을 보이며 구매 의사를 여러 번 타진했지만, 그의 결심으로 1984년 연구를 지속적으로 지원해 준 코오롱이 기술을 넘겨받게 됐다. 이후 코오롱과 연구팀은 공동연구를 통해 파일럿 설비를 설치하고, 국내 최초로 아라미드 섬유의 필라멘트사를 시생산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기술 구매에 실패한 듀폰은 그가 개발한 아라미드 펄프를 자신들의 기술을 도용해 개발을 했다는 이유로 특허 소송을 제기했다. 고부가가치 기술개발을 막기 위한 횡포와 다름없었다. 1986년부터 5년간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온 이 사건은 1991년 12월 6일 유럽특허청이 윤한식 연구의 독창성을 인정하면서 마무리됐다. 그는 사건 해결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직접 유럽특허청 항소심판소 재판에 출두해 통역도 어려워하는 연구 내용을 영어로 설명하며 연구의 독창성을 이해시키려 노력 했다. 재판 승소의 배경에는 어려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그의 끈기와 인내, 뚝심이 있었다.

아라미드 펄프 개발에 대한 논문은 1987년 국내 최초로 세계적 학술지인 『네이처 (vol.326 no.6113)』에 실렸다. 아라미드 섬유가 형성되는 과정이 자연 속의 섬유 형성 과정과 동일하다는 이론은 당시 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4. 3. 세계적인 과학자로 인정받다 (1987~2022)

그는 신들린 사람처럼 연구에 매달렸던 천생 과학자였다. 실험실에 편광현미경 하나 놓지 못하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시설과 돈이 없어 연구를 못 한다는 것은 핑계에 불과하다고 일침했던 그는 자신이 한 말처럼 한평생을 연구에 바쳐 기적의 섬유라 불리는 아라미드 펄프를 개발하며 세계적인 과학자로 우뚝 올라섰다. 정년퇴임 후에도 "지금부터야말로 진짜 연구를 해볼 때"라고 의욕을 보였던 진짜 과학자 윤한식. 누구의 연구를 답습하는 것이 아닌, 세상에 없는 자신만의 연구를 만들어갔던 그의 삶은 지금도 연구 현장에서 회자되고 있다.

1970년대 당시 세계시장은 듀폰아라미드 섬유인 케블라가 석권하고 있었다. 이에 윤 박사는 아라미드 섬유의 국산화를 위한 연구를 추진했고, 마침내 아라미드 섬유용 고분자 물질 합성에 성공한다.

연구 도중 연구비 부족으로 연구를 지속할 수 없게 되는 등 뜻하지 않은 어려움도 많았다. 그때 코오롱이 그의 연구를 본격 지원하기 시작했고, 아라미드 개발 프로젝트가 국책산업으로도 지정되며 연구는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1982년 윤 박사와 연구팀은 3년간의 연구 끝에 독자적인 제조공정을 개발해 아라미드 펄프를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그가 개발한 제조공정은 방사 과정이 필요했던 기존의 공정과 달리 순수한 화학반응만으로 섬유를 만들 수 있게 한 것으로, 듀폰케블라 섬유의 생산 공정보다 단순하며 생산효율이 높고 생산 비용이 낮다는 강점이 있었다.

섬유 생산에서 방사 과정이 차지하는 비용 부담은 90% 정도에 육박하기 때문에 그의 연구가 산업 현장에 미칠 영향은 클 것으로 예상됐다. 그는 개발한 아라미드 펄프와 제조 공정을 각각 미국에 특허 출원했고, 1985년 4월 특허를 획득했다. 미국 이외에도 영국, 일본, 독일 등 7개국에 특허를 출원하며 개발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았다. 케블라를 상용화하는 데 성공했던 듀폰도 그의 연구성과에 관심을 보이며 구매 의사를 여러 번 타진했지만, 그의 결심으로 1984년 연구를 지속적으로 지원해 준 코오롱이 기술을 넘겨받게 됐다. 이후 코오롱과 연구팀은 공동연구를 통해 파일럿 설비를 설치하고, 국내 최초로 아라미드 섬유의 필라멘트사를 시생산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기술 구매에 실패한 듀폰은 그가 개발한 아라미드 펄프를 자신들의 기술을 도용해 개발을 했다는 이유로 특허 소송을 제기했다. 고부가가치 기술개발을 막기 위한 횡포와 다름없었다. 1986년부터 5년간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온 이 사건은 1991년 12월 6일 유럽특허청이 윤 박사 연구의 독창성을 인정하면서 마무리됐다. 그는 사건 해결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직접 유럽특허청 항소심판소 재판에 출두해 통역도 어려워하는 연구 내용을 영어로 설명하며 연구의 독창성을 이해시키려 노력했다. 재판 승소의 배경에는 어려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그의 끈기와 인내, 뚝심이 있었다.

아라미드 펄프 개발에 대한 논문은 1987년 국내 최초로 세계적 학술지인 『네이처 (vol.326 no.6113)』에 실렸다. 아라미드 섬유가 형성되는 과정이 자연 속의 섬유 형성 과정과 동일하다는 이론은 당시 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내 연구는 실용적 의미보다 과학적 의미가 크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섬유를 만드는 방법 자체를 완전히 바꾸어 놓는 것이지요. 이것은 인체의 피부 머리털 등 섬유질이 생성되는 과정을 실험실에서 재현해 놓은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국제 학술 저널이 내 연구를 취급해 준 것도 완전히 새로운 분야를 열었기 때문입니다.” (윤한식, 한국경제, “[서재한담] KIST 윤한식 박사..기적의섬유 아라미드펄프 개발”중)

그의 좌우명은 ‘쉬지 않고 하면 언젠가는 꿈이 이루어진다’였다. 윤 박사는 무엇인가에 끈기 있게 매달리면 반드시 무언가 이룰 수 있다는 신념을 지키며 솔선수범 실천했다. 무엇보다 누군가의 연구를 뒤따르는 것이 아닌, 스스로 정립한 이론에 근거해 연구를 진행하는 창조의 과정을 즐겼다.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한 것은 남들보다 늦었지만, 그의 연구성과는 늘 앞서 있었다. 그런 이유로 그에겐 많은 상이 뒤따랐다. 윤 박사는 1984년에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고, 1985년에는 과학기자클럽이 주는 제1회 올해의 과학자상을 받았으며, 1992년에는 뉴욕과학아카데미 회원에 추대됐다. 그리고 정부는 1992년에 신설된 과학기술자 공로연금의 제1호 종신 수혜자로 그를 선정하며 섬유공학 연구에 일생을 바친 그의 공로를 인정했다.

5. 수상

연도수상 내역
1976년국무총리 표창
1984년국민훈장 목련장
1985년과학기자클럽, 제1회 올해의 과학자상
1987년대한섬유공학회 기술상
1992년과학기술자 공로연금 제1호 종신 수혜자
2022년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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