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우옌푹투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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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응우옌 푹 투언은 1765년 즉위한 베트남 응우옌 왕조의 군주이다. 쯔엉 푹 로안의 전횡으로 국정이 혼란해지고 농민 봉기가 빈번하게 발생했으며, 떠이선 왕조의 침공과 찐 주의 남침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776년 조카에게 양위하고 태상왕으로 물러났으나 이듬해 살해당했다. 사후 응우옌 왕조가 건국된 후 효정황제로 추존되었으며, 능묘는 장소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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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우옌푹투언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응우옌푹투언 (Nguyễn Phúc Thuần) |
| 다른 이름 | 응우옌푹헌 (Nguyễn Phúc Hân) |
| 칭호 | 딘브엉 (Định Vương) 태상왕 (慶暊道人) |
| 묘호 | 예종 (Duệ Tông/睿宗) |
| 시호 | 총명관후영민혜화효정황제 (孝定皇帝) |
| 통치 | |
| 응우옌 주의 군주 | 1765년 7월 7일 ~ 1776년 12월 14일 |
| 응우옌 주의 태상왕 | 1776년 12월 14일 ~ 1777년 10월 18일 |
| 재위 기간 | 1765년 ~ 1777년 |
| 전임자 | 응우옌푹코앗 |
| 후임자 | 응우옌푹아인 |
| 공동 통치자 | 응우옌푹즈엉 |
| 생애 | |
| 출생 | 1754년 12월 31일, 코친차이나 |
| 사망 | 1777년 10월 18일 (22세), 자딘 |
| 부모 | 아버지: 응우옌푹코앗 어머니: 응우옌푹 응옥 까우 |
| 배우자 | 응우옌푹 응옥 툭 |
| 자녀 | 없음 |
| 왕조 | |
| 가문 | 응우옌푹 |
| 종교 | |
| 종교 | 불교 |
| 사후 정보 | |
| 능묘 | 장소릉 (Trường Thiệu Lăng) |
2. 생애
1765년 응우옌푹투언은 쯔엉 푹 로안의 옹립으로 즉위하여 정왕(定王)이 되었으나, 쯔엉 푹 로안이 권력을 장악하여 사실상 꼭두각시였다. 쯔엉 푹 로안의 가혹한 통치로 민중의 불만이 고조되었고, 1771년 떠이선(西山)에서 응우옌반악, 응우옌반혜, 응우옌반려 삼형제의 봉기가 일어났다. 1774년, 북부를 통치하던 레 왕조(黎朝)는 이를 틈타 남하하여 광남 응우옌씨(廣南阮氏)의 수도 부춘(富春, 현재 후에)을 공략했다. 1775년, 응우옌푹투언은 조카 응우옌 푹 즈엉에게 양위하고 태상왕(太上王)이 되었다.
1777년 10월 18일(9월 18일), 떠이선 군에 쫓겨 용주(龍川, 지금의 까마우)로 피신했다가 살해당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24세(만 세)였다.
2. 1. 즉위와 쯔엉 푹 로안의 전횡
1765년 7월 7일(까인흥 26년 5월 20일), 무왕이 서거하였다. 원래는 제2황자 응우옌 푹 루언(Nguyễn Phúc Luân|阮福㫻|완복곤vi)이 계승하여야 하나, 간신 쯔엉 푹 로안(Trương Phúc Loan|張福巒|장복만vi)이 권력을 잡기 위해 집안이 약하면서 가문상 정통성이 높은 응우옌 푹 투언을 군주로 옹립하였다. 호는 경부도인(Khánh Phủ Đạo Nhân|慶暊道人|경부도인vi)이다. 쯔엉 푹 로안은 옹립한 공로로 국부(國傅)로 칭해졌다.이후, 응우옌 푹 투언은 재위 내내 정사를 보지 않고 노는 것에만 열중하였으며, 정사는 쯔엉 푹 로안이 담당하여 국정을 장악하였다. 쯔엉 푹 로안은 뇌물과 불법을 일삼았고 반대 세력을 몰아내거나 주살하는 등 전횡을 일삼았다. 이에 선왕 응우옌 푹 코앗 때부터 이어져온 불만들이 터져나와 전국 각지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1771년(까인흥 32년), 떠이선 봉기(西山 蜂起)가 일어났다. 봉기의 주동자인 응우옌냑(Nguyễn Nhạc|阮岳|완악vi)은 쯔엉 푹 로안과 응우옌 푹 투언을 몰아내고, 요절한 왕세자의 아들이자 조카인 응우옌 푹 즈엉(Nguyễn Phúc Dương|阮福暘|완복양vi)을 군주 후계자로 세워 많은 백성의 지지를 받았다. 응우옌 군은 떠이선 봉기 진압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오히려 평정(平定, 지금의 빈딘), 광의(廣義, 지금의 꽝응아이), 평순(平順, 지금의 빈투언) 등을 봉기군에 내주게 되었다.
1774년(까인흥 35년), 북부를 통치하던 찐씨 정권은 떠이선 봉기를 틈타 쯔엉 푹 로안 토벌을 명분으로 휴전 합의 약 100년 만에 재남침(2차 찐-응우옌 분쟁)을 시작하였다. 호앙 티 푹(Hoàng Ngũ Phúc|黃五福|황오복vi)을 선봉으로 내세워 응우옌 주의 주요 근거지인 부춘(富春, 지금의 후에)을 공략하였다. 응우옌 군은 찐 주의 공격에 반격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부춘이 함락되자 남쪽으로 피신하였다.
1775년(까인흥 36년), 응우옌 푹 투언은 조카 응우옌 푹 즈엉을 왕세자(王世子)로 삼아 민심을 얻으려 하였다. 응우옌 푹 투언은 가정(嘉定, 지금의 호찌민 시)으로, 응우옌 푹 즈엉은 구저촌(俱低村, 다낭 시 호아방 현)으로 피신하여 끝까지 찐 주에 저항하였다.
1776년(까인흥 37년), 응우옌냑의 동생 응우옌르(Nguyễn Lữ|阮侶|완려vi)는 이 기회를 틈타 봉기군을 지휘하여 가정성을 공격하였으며, 응우옌 푹 투언은 진변(鎮邊, 지금의 비엔호아)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응우옌 주 장군인 도 타인 넌(Đỗ Thanh Nhơn|杜淸仁|두청인vi)이 떠이선 군사를 몰아내었다. 이후 리따이(Lý Tài|李才|이재vi)가 떠이선 세력에 반기를 들고, 12월 14일(1776년 11월 4일)에 응우옌 푹 즈엉에게 양위하고 응우옌 푹 투언은 태상왕으로 물러났다.
2. 2. 떠이선 농민 봉기와 찐 주의 침공
까인흥 32년(1771년), 서산 봉기(西山 蜂起)가 일어났다. 봉기의 주동자인 응우옌냑(Nguyễn Nhạc|阮岳|완악vi)은 간신 쯔엉푹로안과 군주 응우옌푹투언을 몰아내고, 요절한 왕세자의 아들이자 조카인 응우옌푹즈엉(Nguyễn Phúc Dương|阮福暘|완복양vi)을 군주 후계자로 세워 많은 백성의 지지를 받았다.[1] 응우옌 군은 서산 봉기의 진압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평정(平定, 지금의 빈딘) , 광의(廣義, 지금의 꽝응아이), 평순(平順, 지금의 빈투언) 등을 오히려 봉기군에 내주게 되었다.[1]까인흥 35년(1774년), 북부를 통치하던 찐 주는 서산 봉기를 보고 쯔엉푹로안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휴전 합의 한지 약 100년 만에 재남침(2차 찐-응우옌 분쟁)을 시작하였다.[1] 호앙응우푹(黃五福)을 선봉으로 내세워 한번에 응우옌 주의 주요 근거지인 부춘(富春, 지금의 후에)을 공략하였다.[1] 응우옌 군은 찐 주의 공격에 반격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부춘이 함락되자 남쪽으로 피신하게 된다.[1]
2. 3. 양위와 최후
까인흥 26년(1765년 7월 7일), 무왕이 서거하였다. 원래는 제2황자 응우옌 푹 루언(Nguyễn Phúc Luân|응우옌 푹 루언vi)이 계승하여야 하나, 간신 쯔엉 푹 로안(Trương Phúc Loan|쯔엉 푹 로안vi)이 권력을 잡기 위해 집안이 약하면서 가문상 정통성이 높은 응우옌 푹 투언을 군주로 옹립하였다. 쯔엉 푹 로안은 옹립한 공로로 국부(國傅)로 칭해졌다.이후, 응우옌 푹 투언은 재위 내내 정사를 보지 않고 노는 것에만 열중하였으며, 정사는 쯔엉 푹 로안이 담당하여 국정을 장악하였다. 쯔엉 푹 로안은 뇌물을 받고 불법을 일삼았으며, 반대 세력 등을 몰아내거나 주살하는 등 백성을 몰살시켰다. 이에 선왕 응우옌 푹 코앗 때부터 이어져 온 백성들의 불만이 터져 나와 농민 봉기가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까인흥 32년(1771년), 떠이선 봉기(西山 蜂起)가 일어났다. 봉기의 주동자인 응우옌 냑(Nguyễn Nhạc|응우옌 냑vi)은 쯔엉 푹 로안과 군주 응우옌 푹 투언을 몰아내고, 요절한 왕세자의 아들이자 조카인 응우옌 푹 즈엉(Nguyễn Phúc Dương|응우옌 푹 즈엉vi)을 군주 후계자로 세워 많은 백성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자 응우옌 군은 떠이선 봉기의 진압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평정(平定, 지금의 빈딘), 광의(廣義, 지금의 꽝응아이), 평순(平順, 지금의 빈투언) 등을 오히려 봉기군에 내주게 되었다.
까인흥 35년(1774년), 북부를 통치하던 찐씨 정권은 떠이선 봉기를 보고 쯔엉 푹 로안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휴전 합의를 한 지 약 100년 만에 재남침(2차 찐-응우옌 분쟁)을 시작하였다. 호앙 응우 푹(Hoàng Ngũ Phúc|호앙 응우 푹vi)을 선봉으로 내세워 한 번에 응우옌 주의 주요 근거지인 부춘(富春, 지금의 후에)을 공략하였다. 이에 응우옌 군은 찐 주의 공격에 반격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부춘이 함락되자 남쪽으로 피신하게 된다.
까인흥 36년(1775년), 응우옌 푹 투언은 조카 응우옌 푹 즈엉을 왕세자(王世子)로 삼아 민심을 사들이려 노력하였다. 응우옌 푹 투언은 가정(嘉定, 지금의 호찌민 시)으로, 세자는 구저촌(俱低村, 다낭 시 호아방 현)으로 피신하여 끝까지 찐 주에 저항하였다.
까인흥 37년(1776년), 응우옌 르(Nguyễn Lữ|응우옌 르vi)는 이 기회를 노려 봉기군을 지휘하여 가정성을 공격하였으며, 응우옌 푹 투언은 진변(鎮邊, 지금의 비엔호아)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응우옌 주 장군인 도 타인 넌(Đỗ Thanh Nhơn|도 타인 넌vi)이 떠이선의 군사를 몰아내었다. 이후에, 리 따이(Lý Tài|리 따이vi)가 떠이선 세력에 반기를 들고, 11월 4일(1776년 12월 14일)에 세자에게 양위시키고 응우옌 푹 투언은 태상왕으로 물러나게 하였다.
까인흥 38년(1777년), 떠이선 세력이 가정을 함락시켰으며, 태상왕은 용주(龍川, 지금의 까마우)로 피신하였다. 9월 18일(1777년 10월 18일)에 쫓아가는 떠이선 군에 의해 살해당하니, 향년 24세(만 세)였다.
3. 시호와 능묘
응우옌 주가 망하고 난 후인 까인흥(景興) 39년(1778년)에 섭정완왕(攝政阮王)으로 오른 응우옌 푹 아인에 의하여 총명관후영민혜화'''효정왕'''(Thông Minh Khoan Hậu Anh Mẫn Huệ Hòa Hiếu Định Vương)으로 추존되었으며, 응우옌 왕조가 건국되고 칭제 후인 자롱(嘉隆) 5년(1806년)에 묘호를 '''예종'''(Duệ Tông), 시호를 총명관후영민혜화'''효정황제'''(Thông Minh Khoan Hậu Anh Mẫn Huệ Hòa Hiếu Định Hoàng Đế)로 다시 추존하였다.[2]
능호는 '''장소릉'''(Trường Thiệu Lăng)이다.[2]
4. 가족 관계
응우옌푹투언은 정비 응우옌 티 짜우(Nguyễn Thị Châu / 阮氏珠 / 완씨주)[1][2]를 두었으며, 슬하에 딸 응우옌 티 응옥툭(Nguyễn Thị Ngọc Thục / 阮氏玉淑 / 완씨옥숙, 1776년 ~ 1818년)을 두었다.
4. 1. 후비
4. 2. 왕녀
5. 기년
26년(1765년 7월 7일) 무왕이 서거하였다. 원래는 제2황자 응우옌 푹 루언(Nguyễn Phúc Luân|응우옌 푹 루언vi)이 계승하여야 하나, 간신 쯔엉 푹 로안(Trương Phúc Loan|쯔엉 푹 로안vi)이 권력을 잡기 위해 집안이 약하면서 가문상 정통성이 높은 응우옌 푹 투언을 군주로 옹립하였다. 호는 경부도인(Khánh Phủ Đạo Nhân|카인 푸 다오 년vi)이다. 옹립한 공로로 쯔엉 푹 로안은 국부(國傅) 칭호를 받았다.
32년(1771년) 서산 봉기(西山 蜂起)가 일어났다.
35년(1774년) 북부를 통치하던 찐 씨는 서산 봉기를 보고 쯔엉 푹 로안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휴전 합의 약 100년 만에 재남침(2차 찐-응우옌 분쟁)을 시작하였다.
36년(1775년) 응우옌 푹 투언은 조카 응우옌 푹 즈엉을 왕세자(王世子)로 삼아 민심을 사들이려 노력하였다.
37년(1776년) 응우옌냑의 동생 응우옌르(Nguyễn Lữ|응우옌 르vi)는 이 기회를 노려 봉기군을 지휘하여 가정성을 공격하였다. 같은 해 11월 4일(1776년 12월 14일) 응우옌 푹 투언은 세자에게 양위하고 태상왕으로 물러났다.
38년(1777년) 떠이선 세력이 가정을 함락시키자, 태상왕은 용주(龍川, 지금의 까마우)로 피신하였다. 같은 해 9월 18일(1777년 10월 18일) 떠이선 군에 의해 살해당하니, 향년 24세였다.
참조
[1]
문서
석군공 응우옌 끄우 삿 (阮久策)
[2]
문서
응우옌 푹 투언 사후, 똥 반 띤 (宋文盛)에게 재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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