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가야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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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도가야 사건은 1863년 요코하마 거류지 경비를 위해 상하이에서 파견된 프랑스 육군 소위 J. J. 앙리 카뮈가 호도가야주쿠로 가던 중 낭인 3명에게 습격당해 사망한 사건이다. 가나가와 봉행의 수사에도 불구하고 범인은 체포되지 않았고, 프랑스 정부는 막부에게 사죄와 보상금을 요구했다. 이 사건은 막부의 쇄항 협상 실패로 이어졌으며, 영국 장교 어니스트 사토우의 저서를 통해 일본 내에서 토막 운동과 메이지 유신의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사건 현장에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으며, 요코하마시 지역 사적으로 등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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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가야 사건 | |
---|---|
사건 개요 | |
사건명 | 이도가야 사건 |
발생 위치 | 일본 가나가와 현 요코하마 시 미나미 구 이도가야 정 부근 |
발생일 | 1945년 4월 15일 |
유형 | 집단 린치 살인 사건 |
배경 | |
시대적 배경 |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
사회적 분위기 | 전쟁으로 인한 사회 불안 및 외국인에 대한 적대감 고조 |
경과 | |
발단 | 연합군 포로로 추정되는 외국인 조종사가 이도가야 정에 낙하 |
주민들의 반응 | 조종사를 색출하기 위한 수색 시작 조종사 발견 후 집단 구타 |
조종사의 최후 | 구타로 사망 시신은 인근 사찰에 매장 |
관련 인물 | |
피해자 | 연합군 조종사 (국적 및 신원 미확인) |
가해자 | 이도가야 정 주민들 (주로 재향군인회 및 방위대 관계자) |
사건의 결과 및 영향 | |
전후 처리 | GHQ의 수사 및 관련자 체포 관련자들에 대한 재판 진행 (사형 선고 포함) |
사회적 영향 | 전쟁의 참혹함과 광기를 보여주는 사례 외국인 혐오 및 전쟁 범죄에 대한 경각심 고취 |
참고 문헌 | |
관련 서적 | (제목 미상) (저자 미상) |
외부 링크 | |
관련 자료 | 이도가야 사건 관련 자료 (일본어) |
2. 사건 발생
1863년, 요코하마 거류지의 보안을 위해 상하이에서 파견된 프랑스 육군 아프리카 엽보병 제3대대 소속 앙리 카뮈(fr, 1842년 출생[1]) 소위와 다른 장교 두 명이 호도가야주쿠로 가던 중 이도가야 촌 부근에서 낭인(로시) 3명의 습격을 받았다. 선두에 있던 카뮈는 사망했고, 다른 2명은 도주하여 목숨을 건졌다.[1]
가나가와 봉행 대리 고하라 이사부로는 수사를 시작했지만, 프랑스 공사 드 벨쿠르와 프랑스 해군 제독 죠레스는 범인 체포가 어렵다는 보고를 받았다. 범인은 밝혀지지 않은 채 체포되지 않았다. 벨 쿠르는 사건의 해결과 사과를 위해 프랑스에 특사로 외국 부교 다케모토 마사쓰네를 파견하는 것을 막부에 제의했다.[1]
영국 장교 어니스트 사토우는 1866년(게이오 2년) 저술한 『영국책론』에서 이 사건을 언급하며 "1863년 9월의 살해 사건은 현재 대군 정부가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주인의 위력으로 형벌을 면했다. 그러므로 이 조약(영일수호통상조약)은 국가를 통제할 수 없는 자와 맺은 것이다"라고 썼다.
사건 현장에서 북서쪽으로 약 109m 떨어진 이도가야 시다마치 32-1에 있는 고신즈카에 "이도가야 사건의 비"가 세워져 있다.[1] 1988년 11월 1일에 "이도가야 사건의 흔적"으로 요코하마시 지역 사적으로 등록되었다.[1]
3. 사건 수사 및 경과
12월 막부는 요코하마 쇄항 담판을 위해 외국 봉행 이케다 나가오키 등 34명으로 구성된 요코하마 쇄항 담판 사절단을 파견했다. 이듬해 3월 사절단은 프랑스를 방문하여 정부에 사건을 사죄함과 동시에 35000USD의 보상금을 유족에게 지급하고, 사건은 해결되었지만 쇄항 협상은 실패로 끝났다.[1]
4. 사건의 영향
이 기사는 일본 내에서 널리 읽히면서 토막 운동과 메이지 유신의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5. 사건의 흔적
6. 같이 보기
참조
[1]
문서
カミュの階級について文献により中尉とするものがあるが、墓碑には少尉と刻まれている。
[2]
웹사이트
指定・登録文化財目録
https://www.city.yok[...]
横浜市教育委員会
2020-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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