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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8일의 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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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8월 18일의 정변은 1863년(분큐 3년) 8월 18일(음력)에 일어난 일본의 정치적 사건이다. 서구 열강의 압력으로 인한 막부의 권위 약화와 존왕양이 운동의 격화 속에서, 조슈 번 등 급진적인 존왕양이파가 교토에서 축출되었다. 이로 인해 공무합체파가 득세하고, 조슈 번과 사쓰마 번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으며, 쇄국을 둘러싼 막부와 조정의 갈등이 더욱 깊어졌다. 정변 이후 존왕양이 운동은 쇠퇴하고, 공무합체 노선이 강화되었으나, 이는 이듬해 금문의 변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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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8일의 정변
개요
사건명8월 18일의 정변
다른 이름분큐의 정변 (文久の政変)
발생일1863년 8월 18일 (음력 분큐 3년 7월 24일)
장소교토
원인존황양이 운동의 과격화, 조정 내에서의 사쓰마 번과 아이즈 번의 주도권 다툼
결과존황양이파 세력의 조정에서의 축출
사쓰마 번과 아이즈 번을 중심으로 한 공무합체파의 주도권 장악
조슈 번의 조정 진입 금지
배경
시대적 배경에도 시대 말기
막부의 쇠퇴와 존황양이 운동의 대두
정치적 배경조정 내에서의 정치적 갈등 심화
사쓰마 번과 아이즈 번의 영향력 확대 시도
사회적 배경존황양이 사상의 확산
사회 불안 증가
주요 인물
주도 세력사쓰마 번
아이즈 번
나카가와노미야 아사히코 친왕
관련 인물고메이 천황
도쿠가와 요시노부 (당시 히토쓰바시 요시노부)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시마즈 히사미쓰
이와쿠라 도모미
나카야마 다다미쓰
미우라 게이노스케
구사카 겐즈이
마키 야스오미
과정
정변 발발사쓰마 번과 아이즈 번의 군사 동원
존황양이파 세력의 조정에서의 축출
조슈 번의 입경 금지
주요 사건7경락
야마토 행행 중지
신센구미의 활약
영향
정치적 영향공무합체파의 득세
조슈 번의 세력 약화
존황양이 운동의 쇠퇴
사회적 영향사회 불안 심화
조슈 번에 대한 반감 고조
이후 사건금문의 변
제1차 조슈 정벌
제2차 조슈 정벌
참고 문헌
서적『국사대사전』(国史大辞典)
『메이지 유신사』(明治維新史)
온라인 자료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 컬렉션
관련 항목
관련 사건분큐삼찰
금문의 변
고쇼의 정변
관련 인물고메이 천황
도쿠가와 요시노부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시마즈 히사미쓰
이와쿠라 도모미

2. 배경

19세기 중반, 일본은 서구 열강의 압력에 직면하여 개항을 강요당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8월 18일의 정변이 일어났다.

1863년(분큐 3년) 조슈 번의 구사카 겐즈이, 도사 번의 다케치 즈이잔존왕양이파 사무라이들은 산조 사네토미 등 존양파 귀족들과 함께 에도의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를 상경시켰다.[1] 당시 고메이 천황은 존양파 귀족들의 영향으로 도쿠가와에게 서양 세력을 몰아낼 것을 명했다.[1] 막부는 5월 10일을 기한으로 약속했지만, 실제로는 서양 세력과 손을 잡고 각 번을 단속하며 세력을 키웠다.[1]

약속한 5월 10일, 조슈 번만이 시모노세키 해협에서 미국 상선에 포격을 가했고, 다른 번들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1] 이로 인해 조슈 번은 서양 각국의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고(시모노세키 전쟁), 교토 조정 역시 궁지에 몰렸다.[1] 결국 교토 황실은 존양파 귀족들을 실각시키고,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 등 막부에 협조적인 공무합체파를 등용했다.[1]

2. 1. 불평등 조약 체결과 막부 권위 하락

1854년 미일화친조약을 시작으로, 에도 막부는 서양 각국과 연이어 불평등 조약을 맺었다. 이 과정에서 외세에 무력한 모습을 보인 막부의 권위는 크게 떨어졌고, 이는 당시 일본 국민뿐만 아니라 정치 권력에서 소외되었던 도자마 다이묘 등의 불만을 야기했다.[1] 안세이 5년(1858년)에는 다이로 이이 나오스케의 지휘 아래 안세이 5개국 조약을 무단으로 체결하여 서양 제국과의 통상을 시작했다.[6]

오랫동안 막부 정치에서 배제되었던 친판·외양 웅번들은 이러한 국제 정세 변화 속에서, 병약한 1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후계자로 히토쓰바시 요시노부를 내세워 체제 개혁과 국정 참여를 시도했다.[6] 그러나 후다이 다이묘와 막신들의 지지를 받은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쇼군으로 결정되면서, 히토쓰바시 파는 이이 나오스케 정권의 조약 조인이 천황의 허가를 받지 않았음을 지적하며 비판했다.[6]

이에 조정이 반발하는 움직임을 보이자, 이이 나오스케는 관련자들에게 강경한 처분을 내렸다(안세이의 대옥).[6] 1860년에는 이이 나오스케가 암살당하면서(사쿠라다몬 밖의 변) 막부의 위신은 더욱 추락했다.[6] 이후 통상 단절과 쇄국으로의 복귀를 요구하는 양이론이 중요한 정치적 쟁점으로 떠올랐다.[6]

2. 2. 존왕양이 운동의 발흥

1854년 미일화친조약을 시작으로 에도 막부의 일본은 서양 각국과 불평등 조약을 연이어 맺었다. 외세의 진출에 대해 무력했던 막부의 권위는 떨어졌으며, 당시 일본 국민들은 물론 정치 권력에서 소외됐던 교토 황궁이나 도자마 다이묘 등이 큰 불만을 표출했다. 전국적으로 존왕양이 운동이 일어나 외세를 격퇴하고 천황제 아래 모든 국민이 단결하자는 움직임이 크게 일었다. 요시다 쇼인이 제창한 일군만민론(一君萬民)은 에도 막부 260년 간 유지된 사농공상의 신분 질서를 흔들며 중세적 신분제까지 동요시켰다.[1]

2. 3. 공무합체론의 대두

안세이 5년(1858년), 에도 막부는 다이로(大老) 이이 나오스케의 지휘 아래 안세이 5개국 조약을 무칙허로 조인하여 서양 제국과의 통상을 시작했다. 오랫동안 막정 운영에서 배제되었던 친판·외양 웅번은 일본을 둘러싼 국제 환경의 격변기에, 병약한 1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후계자로 자파의 후보(히토쓰바시 요시노부)를 밀어 체제 개혁을 실행하고 국정에 참여하려 했다.

하지만 이이를 비롯한 후다이 다이묘·막신이 지지하는 새 쇼군(도쿠가와 이에모치)이 결정되자, 히토쓰바시 파는 이이 정권의 조약 조인이 칙허를 얻지 못한 점을 지적하며 비판했다. 무칙허 조인에 격렬한 반감을 품은 조정이 이에 결부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자, 이이는 그 관계자들에게 강권적인 처분을 가했다(안세이의 대옥). 안세이 7년(1860년) 3월, 이이가 그 반동으로 살해당하면서(사쿠라다몬 밖의 변), 막부의 위신도 떨어져 갔다.

이리하여 통상의 단절, 쇄국으로의 복귀를 요구하거나, 외국을 배척하려는 양이가 그 후의 분큐기 정국의 중대한 테마가 되었다. 분큐 2년(1862년), 막부는 양이를 희구하는 고메이 천황·조정과의 관계 회복을 요구하며, 황매 가즈노미야를 정2품쇼군이에모치의 정실로 맞이하는 것과 교환으로, 장래의 양이 실행을 약속했다. 이면으로는, 무칙허 조인 상태이면서도 당면한 개국·통상 관계의 지속에 천황의 이해를 얻었지만, 천황의 소망은 즉시의 양이(즉금 양이)였다는 것이 전해지면서, 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져 막부의 자세는 인준고식으로 비난받았다.

이 사이에, 히토쓰바시 파의 여러 다이묘(전 당주) 등이 복권을 이루어 막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존왕양이론자로 알려져 중심적인 존재였던 미토번도쿠가와 나리아키는 이미 죽었지만, 에치젠(후쿠이) 번의 마쓰다이라 슌가쿠, 사쓰마(가고시마) 번의 시마즈 나리아키라(그 동생이자 실질적 계승자인 시마즈 히사미쓰), 도사(고치) 번의 야마우치 요도 등은 개국파이면서도, 과거 이이 정권에 대항하기 위해 무칙허 조약 조인을 공격하여 여망을 짊어졌던 경위도 있어, 양이론의 고조에는 곤혹스러워했다.

막부는 즉금 양이를 받들 수밖에 없게 되었지만, 쇼군과 막부 수뇌는 분큐 3년(1863년)에 상락하여 공작을 펼쳐, 양이를 실현하는 구체적 방책과 지휘에 관해서는 천황으로부터 일임을 받았다. 5월 10일, 막부는 조약 체결국에 대해 요코하마의 쇄항을 통고했다. 막부는 온건한 방법으로 양이, 즉 상대국과의 교섭에 의한 조약 철회·쇄국 복귀의 방침을 취했으며, 외국 군함에 대한 공격은 금지되었다(단, 외국으로부터의 공격에 대해 반격하는 것은 인정했다).

그러나 조슈(하기) 번은 이때 외국 군함을 포격하여 무력에 의한 양이를 실행했다. 조슈는 막부의 방침과 날카롭게 대립하게 되었고, 이윽고 외국의 보복 공격을 받아, 타 번의 동조도 얻지 못해 고립감을 깊어졌다. 이렇게 조슈는, 조의의 주도권을 쥔 급진파 공가 무리와 연계하면서, 천황의 위임에 근거한 막부의 양이 실행 지휘를 해소하고, 천황 자신이 지휘하는 무력에 의한 양이(양이 친정)로 전환하는 길로 나아가게 된다.

양이를 희구하면서도 과격한 양이 전쟁을 두려워하며, 어디까지나 막부를 신임하여 막부에 의한 양이 실현을 원하는 고메이 천황은, 조슈와 급진파 공가들의 이러한 움직임에 견디지 못하고, 이를 배제하기 위해 시마즈 히사미쓰의 출마를 간절히 기다렸다.

3. 경위

1854년 미일화친조약을 시작으로 에도 막부의 일본은 서양 각국과 불평등 조약을 연이어 맺었다. 외세의 진출에 대해 무력했던 막부의 권위는 떨어졌으며, 당시 일본 국민들은 물론 정치 권력에서 소외됐던 교토 황궁이나 도자마 다이묘 등이 큰 불만을 표출했다. 전국적으로 존왕양이 운동이 일어나 외세를 격퇴하고 천황제 아래 모든 국민이 단결하자는 움직임이 크게 일었다. 요시다 쇼인이 제창한 일군만민론(一君萬民)을 시작으로 중세적 신분제까지 동요하고 있었다.

1863년(분큐 3년) 조슈 번의 구사카 겐즈이, 도사 번의 다케치 즈이잔 등 존왕양이파 사무라이들은 산조 사네토미 등 존양파 귀족들과 짜고 에도의 세이이대장군 도쿠가와 이에모치를 상경시켰다. 당시 고메이 천황은 존양파 귀족들의 부추김을 받고 '짐은 오랑캐가 싫다'며 도쿠가와에게 서양인들을 쫓아내라고 명령했다. 막부 측은 음력 5월 10일을 양이 결행 기한으로 약속했다.

그러나 막부는 뒤에서 서양 세력과 손잡는 한편, 각 번을 단속해 세를 키웠다. 5월 10일, 조슈 번만이 바칸 해협에서 미국 상선에 포격을 가했고, 다른 번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조슈 번은 서양 각국의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고(시모노세키 전쟁), 교토 조정 역시 궁지에 몰렸다. 교토 황실은 존양파 귀족들을 실각시키고,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공무합체파들을 앉혔다.

1863년 음력 8월 18일(양력 9월 30일), 공무합체파 귀족들은 아이즈 번, 사쓰마 번 등 6천의 병사에게 황궁 경호를 맡겼다.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고노에 다다히로, 고노에 다다후사 부자들이 입궐해 산조 사네토미 등 존양파 귀족들과 모리 다카치카, 모리 모토노리 부자를 탄핵하고, 조슈 번사들을 황궁 경비에서 해임시켜 교토에서 쫓아냈다. 산조 사네토미 등 실각한 존양파 귀족 7명은 조슈 번으로 낙향했다. (7경 낙향)[1]

3. 1. 존왕양이파의 압력과 막부의 대응

1854년 미일화친조약을 시작으로 에도 막부는 일본은 서양 각국과 불평등 조약을 연이어 맺었다. 외세 진출에 대해 무력했던 막부의 권위는 떨어졌으며, 당시 일본 국민들은 물론 정치 권력에서 소외됐던 교토 황궁이나 도자마 다이묘 등이 큰 불만을 표출했다. 전국적으로 존왕양이 운동이 일어나 외세를 격퇴하고 천황제 아래 모든 국민이 단결하자는 움직임이 크게 일었다.

1863년(분큐 3년) 조슈 번의 구사카 겐즈이, 도사 번의 다케치 즈이잔 등 존왕양이파 사무라이들은 산조 사네토미 등 존양파 귀족들과 짜고 에도의 세이이대장군 도쿠가와 이에모치를 상경시켰다. 당시 고메이 천황은 존양파 귀족들의 부추김을 받고 도쿠가와에게 서양인들을 쫓아내라고 명령했다. 막부 측은 결국 음력 5월 10일을 양이 결행 기한으로 약속했다.[1]

그러나 막부는 오히려 뒤에서 서양 세력과 손잡는 한편, 각 번을 단속해 세를 키웠다. 일제히 외세를 공격하기로 했던 5월 10일, 존양파가 득세했던 조슈 번만이 바칸 해협에서 미국 상선에 포격을 가했고 막부를 비롯한 각 번은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조슈 번만 프랑스를 비롯해 서양 각국의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고(시모노세키 전쟁), 교토 조정 역시 거꾸로 궁지에 몰리게 됐다. 교토 황실은 존양파 귀족들을 실각시키고, 대신 그 자리에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 등 막부에 협조해 황실 존속을 주장한 공무합체파들을 앉혔다.[1]

3. 2. 8월 18일 정변

1863년 음력 8월 18일(양력 9월 30일), 공무합체파 귀족들은 막부 측의 아이즈번, 조슈 번의 라이벌 사쓰마번 등과 협력하여 정변을 일으켰다.[1] 산조 사네토미 등 존왕양이파 귀족들과 조슈 번 세력이 교토에서 추방되었다. 이 과정에서 산조 사네토미 등 7명의 존왕양이파 귀족이 조슈 번으로 망명했다.( 7경 낙향)

정변 당일, 공무합체파의 공가 제후(나카가와노미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외) 등이 자시(밤 12시)에 참내하여, 변화된 조정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1]

  • 고메이 천황에 의한 이적친정 행행의 연기
  • 존왕양이파 공가의 참내 및 면회 정지
  • 국사참정 및 국사기인의 양직, 그리고 친병의 폐지
  • 사카이마치 어문의 수위를 조슈번에서 여러 번(사쓰마번, 아이즈번, 요도번)으로 바꾸고, 조슈 번사의 구문 출입을 금지
  • 모리 요시치카 부자의 입경 금지


분큐 3년 8월 18일 오전 4시경, 아이즈, 요도, 사쓰마 번 병사들이 궁궐의 여섯 문을 봉쇄하고 배치가 완료되었다. 재경의 여러 번주들에게도 참내가 명해졌다. 8시가 넘어서자 여러 번주들이 참내했고, 여러 번 병사들이 어소의 아홉 문을 굳게 지켰다. 아이즈는 마침 국원으로부터 교대하는 번 병사들이 상경한 시기였고, 귀국길에 있던 번 병사도 불러들여 총 1800명 정도를 동원하여 정변의 중심이 되었지만, 아이즈 다음으로 동원이 많았던 것은 아와, 비젠, 인슈, 요네자와, 요도 번이었고 (사쓰마 번 병사는 150명), 양이파를 포함하여 27개 번이 병력을 동원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야마토 행행의 연기, 산조 사네토미 등 급진파 공가 15명의 금족과 타인 면회 금지, 국사 참정·국사 기인의 폐지가 결의되었다.

그 무렵, 결기를 안 삼조 등 존양파 공가와 조슈 번 병사들이 사카이마치 문 동쪽 옆의 다카쓰카사 저택에 속속 모여들었다. 조슈 세력은 그곳에서 사카이마치 문 안쪽으로 나아갔지만, 사카이마치 문 서쪽 옆의 구조 저택 앞에 진을 친 아이즈, 사쓰마 양 번의 병사들과 대치하게 되었다. 나카가와노미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이나바 마사쿠니, 우에스기 나리노리(요네자와 번주), 이케다 시게마사(비젠 번주) 등으로 사태 수습 회의가 열렸고, 조슈의 사카이마치 문 경비를 해제하고 교토에서 퇴거를 권고하는 것이 결의되었다. 모든 일이 결정된 후에 소환된 "조슈 관백" 다카쓰카사 스케히로는 11시경에 참내하여 조슈의 병력은 3만이라고 고하고, 계속 경비를 담당하게 할 것을 주장했다. 이케다 요시노리(인슈 번주)와 하치스카 모치아키(아와 세자)도 늦게 참가하여 조슈의 경비 지속을 주장했지만, 결의는 뒤집히지 않았다.

대치는 저녁까지 이어졌고, 산조 등과 조슈 세력은 묘호인으로 퇴거했다. 19일, 실각한 급진파 공가 중 산조와 산조니시 스에토모, 시조 타카우타, 히가시쿠제 미치토미, 미부 모토오사무, 니시키코지 요리노리, 사와 노부요시 등 7명은 금족을 어기고 조슈 세력 1천여 명과 함께 조슈로 내려갔다 (칠경의 낙).

4. 정변의 결과

8월 18일의 정변은 일본 정치 지형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교토 황실에서 존왕양이파가 일소되고, 공무합체파가 득세하면서 정국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1]

이 정변으로 조슈 번과 사쓰마 번은 원수지간이 되었다. 이는 훗날 이케다야 사건금문의 변으로 이어지는 갈등의 불씨가 되었다.[1]

4. 1. 존왕양이 운동의 쇠퇴와 공무합체파의 득세

고메이 천황공무합체파의 주장을 받아들여, 여동생 가즈노미야 지카코 내친왕을 도쿠가와 이에모치에게 시집보냈다. 이 정변으로 조슈 번과 사쓰마 번은 원수가 되었고, 훗날 이케다야 사건이나 금문의 변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정변을 기획한 다케치 즈이잔야마우치 요도에게 체포되어 부하들과 함께 처형되었다.[1]

정변 당일 자시(밤 12시), 나카가와노미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등의 공가 제후들이 참내하여, 조의의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1]

  • 고메이 천황의 이적친정 행행 연기
  • 존왕양이파 공가의 참내 및 면회 정지
  • 국사참정 및 국사기인의 양직, 그리고 친병 폐지
  • 사카이마치 어문의 수비를 조슈 번에서 여러 번(사쓰마 번, 아이즈 번, 요도 번)으로 변경하고, 조슈 번사의 출입 금지
  • 모리 요시치카 부자의 입경 금지


분큐 3년(1863년) 8월 18일 오전 4시경, 아이즈, 요도, 사쓰마 번 병사들이 궁궐의 여섯 문을 봉쇄했다. 여러 번주들에게도 참내가 명해졌고, 8시가 넘어서자 여러 번 병사들이 어소의 아홉 문을 굳게 지켰다. 아이즈 번은 총 1800명 정도를 동원하여 정변의 중심이 되었지만, 아와, 비젠, 인슈, 요네자와, 요도 번도 많은 병력을 동원했다. (사쓰마 번 병사는 150명) 양이파를 포함하여 27개 번이 병력을 동원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야마토 행행 연기, 산조 사네토미 등 급진파 공가 15명의 금족과 타인 면회 금지, 국사참정·국사기인의 폐지가 결의되었다.

한편, 삼조 등 존양파 공가와 조슈 번 병사들은 사카이마치 어문 동쪽 옆의 다카쓰카사 저택에 모였다. 조슈 세력은 사카이마치 문 안쪽으로 나아가려 했지만, 아이즈, 사쓰마 양 번의 병사들과 대치했다. 나카가와노미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등은 조슈의 사카이마치 문 경비 해제와 교토 퇴거를 권고하기로 결의했다. 다카쓰카사 스케히로는 조슈의 병력이 3만이라 주장하며 경비 지속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치는 저녁까지 이어졌고, 삼조 등과 조슈 세력은 묘호인으로 퇴거했다. 19일, 실각한 급진파 공가 중 산조 사네토미, 산조니시 스에토모 등 7명은 금족을 어기고 조슈 번과 함께 조슈로 내려갔다(칠경의 낙). 조슈 번은 다음 해 6월 이케다야 사건을 계기로 교토에 출병하여, 7월 금문의 변에서 아이즈, 사쓰마 등과 교전했다.

교토 수호직은 신센구미에게 시중 순찰을, 교토 마치 부교에게 숙박인 조사를 엄격하게 지시했다. 또한, 인슈, 비젠, 아와, 요네자와 등 13개 번이 윤번으로 시중 경비를 담당했다.

양이케다(인슈, 비젠), 하치스카(아와), 우에스기(요네자와)는 정변 전부터 조정 회의에 참여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조슈 처분에 대해 관대한 처분을 요구했지만, 조정은 냉담했다. 실망한 그들은 9월 하순부터 10월 중순에 걸쳐 귀국했다.

이케다 요시노리 등 양이파 제후들의 중앙 정국 진출은 기회주의적인 면이 컸다. 그들은 양이 친정론을 비난하면서도, 양이에 소극적인 막부도 비판하며, 양이 위임의 입장에서 막부가 적극적으로 양이를 주도하도록 주선하여 정치적 존재감을 높여왔다. 그러나 독자적인 정치 구상은 없었고, 천황의 양이 의지를 확인한 막부가 요코하마 쇄항 담판을 시작하면서 존재감을 잃게 되었다.

양이 위임의 태도를 취했던 시마즈 히사미쓰, 마쓰다이라 슌가쿠, 야마우치 요도 등도 정변 후 소명을 받아 입경했다. 과격한 양이 친정파가 일소되면서, 그들은 본래의 개항론 자세를 드러냈다. 히사미쓰, 슌가쿠 등의 세력이 강해지자, 귀국한 이케다 시게마사는, 이제 와서 양이는 좋지 않고 개국이 좋다고 말할 수도 없고, 다른 좋은 생각도 없다고 한탄했다. 하지만 그 히사미쓰, 슌가쿠 등도, 히토쓰바시 요시노부 때문에 중앙 정국에서 멀어지게 된다.

4. 2. 막부와 조정의 관계 강화

고메이 천황공무합체파의 진언을 받아들여 여동생 가즈노미야 지카코 내친왕을 세이이대장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에게 시집보냈다.[1]

4. 3. 번 간의 갈등 심화

이 정변으로 조슈 번과 사쓰마 번은 원수 관계가 되어, 훗날 이케다야 사건이나 금문의 변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1]

4. 4. 관련 사건

정변 전후로 여러 사건이 발생했다. 고메이 천황공무합체파의 진언을 받아들여 여동생 가즈노미야 지카코 내친왕을 도쿠가와 이에모치에게 시집보냈다. 이 정변으로 조슈 번과 사쓰마 번은 원수가 되어 후일 이케다야 사건이나 금문의 변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으며[1], 도사 번에서는 정변을 기획한 다케치 즈이잔이 번주 야마우치 요도에게 체포되어 그의 부하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4. 4. 1. 사쿠라다몬 밖의 변 (朔平門外の変)

분큐 3년(1863년) 5월 20일 밤, 교토에서 국사참정 아네노코지 긴토모가 암살당했다. 다음 날, 어소(御所)의 9개 문 경비가 조슈(사카이마치 문), 센다이(시모타치우리 문), 미토(하마구리 문), 인슈(나카타치우리 문), 사쓰마(이누이 문), 비젠(오카야마 번, 이마데가와 문), 아와(도쿠시마 번, 샤쿠시 문), 도사(세이와인 문), 히고(테라마치 문)의 각 번에 명령되었다.[12]

아네노코지는 산조 사네토미와 함께 급진적인 양이파 공가의 대표격이었다. 그러나 쇼군이 교토로 내려올 때 감시역으로 동행하면서, 적극적인 개국론자인 막부 군함 봉행 가쓰 가이슈에게서 해안 방어에 대한 의견을 들었다. 막부 함선에 승선하여 셋쓰·하리마·아와지 등 오사카만 연안을 순시하고, 가쓰의 주장에 감화되어 교토로 돌아왔다. 이 때문에, 도사의 다케치 한페이타, 히고의 도도로키 타케베에 등 존황파는 그에게 실망했다.

5월 22일, 도사 탈번 낭인 나스 신고는 현장에 버려진 칼이 사쓰마 번사 다나카 신베에의 것이라고 증언했다. 다나카는 막말 4대 인물 중 한 명으로 꼽히며, 다케치 한페이타와 의형제를 맺고, 오카다 이조 등과 무리를 지어 "천벌"을 반복한 과격 존황파이다. 하지만, 다나카는 교토 마치부교 나가이 나오시의 심문에 대해 입을 다문 채 틈을 노려 자결했기 때문에, 그 배후 관계는 밝혀지지 않았다. 암살에 관여했다는 의심을 받은 사쓰마 번은 모략이라고 항의했지만, 결국 9개 문 경비에서 제외되었다. 게다가 9개 문 안의 번사 왕래도 금지되어, 교토에서의 지위가 더욱 약화되었다.

4. 4. 2. 덴추구미의 변 (天誅組の変)

정변 전날인 8월 17일, 토사 낭인 요시무라 도타로 등은 야마토국 고조에서 고메이 천황의 야마토 행차(대화 행행)의 선봉이 되기 위해 거병했으나, 정변으로 인한 정세 변화로 9월 말에 괴멸되었다.[2] (덴추구미의 변)

4. 4. 3. 혼코쿠지 사건 (本圀寺事件)

1864년 8월 17일, 인슈번의 후시미 유수이와 교토 유수이를 겸임하던 가와다 사쿠마 등 존왕양이파 번사 22명이 번주 측근인 구로베 곤노스케, 다카사와 쇼키, 하야카와 다쿠노조 3명을 참살했다. 다음날인 8월 18일, 이들의 유서에 의해 가토 주지로가 자살했다.[2] 이 사건 처리를 위해 번주 이케다 요시노리의 참내가 늦춰졌다.

4. 4. 4. 이쿠노의 변 (生野の変)

히라노 구니오미와 가와카미 야이치 등은 칠경 중 한 명인 사와 노부요시를 옹립하여 다지마국 이쿠노에서 거병했지만, 여러 번에 포위되어 사와 등은 도망쳤다. 모은 농병이 격앙하여 가와카미 등이 살해되는 등 처참한 패배를 겪었다.[2]

5. 정변 이후의 추이

8월 18일의 정변 이후, 에도 막부안세이 5개국 조약을 체결하여 서양과 통상을 시작했지만, 국내에서는 쇄국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분큐 2년(1862년), 막부는 고메이 천황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가즈노미야를 쇼군 이에모치의 정실로 맞이하고, 앞으로 양이(攘夷)를 실행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천황은 즉각적인 양이를 원했고, 막부는 비난을 받았다.[3]

분큐 3년(1863년) 5월 10일, 막부는 조약 체결국에 요코하마 쇄항을 통고했다. 그러나 조슈 번은 외국 군함을 포격하여 무력 양이를 실행했고, 막부와 대립했다. 조슈 번은 외국의 보복 공격을 받고 고립되었으며, 막부 대신 천황이 직접 무력 양이를 지휘하는 '양이 친정'을 시도했다.[4] 고메이 천황은 과격한 양이를 두려워하여 막부를 신임, 조슈 번과 급진파 공가들을 배제하려 했다.

조슈 번은 막부 명령을 무시하고 시모노세키 해협을 항행하는 미국 상선 등을 포격했지만, 다른 번들은 동조하지 않았다. 조슈 번은 미국과 프랑스로부터 보복 공격을 받아도 근린 번들은 방관했다.

정변 직후, 조정은 여러 다이묘들에게 막부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쇄국을 실행하도록 명하고, 요코하마 쇄항을 막부에 강요했다.[17]

11월 15일, 천황은 시마즈 히사미츠에게 친서를 내려 쇄국을 신속히 행하고, 왕정복고가 아닌 쇼군에게 대정(大政)을 위임하고 공무 협조 정치를 바란다는 뜻을 전했다.

히토쓰바시 파 제후들이 입경하고, 조정은 이들과 교토 수호직 마쓰다이라 가타모리에게 참여를 명했다. 공의 정체 확립을 목표로 한 참여 회의는 요코하마 쇄항 문제를 둘러싼 개항론, 쇄항론 대립 등으로 2개월 만에 붕괴했다.[16]

이 정변은 약 1년 후 금문의 변으로 이어진다.

5. 1. 요코하마 쇄항 문제

안세이 5년(1858년) 에도 막부안세이 5개국 조약을 체결하여 서양과의 통상을 시작했지만, 국내적으로는 쇄국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분큐 2년(1862년) 막부는 고메이 천황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가즈노미야를 쇼군 이에모치의 정실로 맞이하는 대신, 앞으로 양이(攘夷)를 실행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천황은 즉각적인 양이를 원했고, 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져 막부는 비난을 받았다.[3]

막부는 양이를 실행해야 했지만, 쇼군과 막부 수뇌는 분큐 3년(1863년)에 양이의 구체적인 방책과 지휘에 관해서는 천황으로부터 일임을 받았다. 그리고 양이 실행 기한으로 포고한 5월 10일, 막부는 조약 체결국에 대해 요코하마 쇄항을 통고했다. 막부는 온건한 방법으로 양이, 즉 상대국과의 교섭에 의한 조약 철회 및 쇄국 복귀를 목표로 했고, 외국 군함에 대한 공격은 금지했다.[4]

그러나 조슈 번은 외국 군함을 포격하여 무력으로 양이를 실행했고, 막부와 대립했다. 조슈 번은 외국의 보복 공격을 받고 고립되었으며, 막부의 양이 실행 지휘를 해소하고 천황 자신이 지휘하는 무력 양이(양이 친정)로 전환하려 했다. 고메이 천황은 과격한 양이 전쟁을 두려워하여 막부를 신임하고 막부에 의한 양이 실현을 원했기에, 조슈 번과 급진파 공가들의 움직임을 배제하려 했다.

막부는 우선 요코하마 쇄항 교섭을 시작하기로 했다. 그러나 나마무기 사건의 배상금 지불 문제로 영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있었다. 막부는 배상금 110000GBP (약 27만 냥)을 지불하고, 다음 날 열국 공사에게 요코하마 쇄항을 통고하여 양이에 착수한 형태를 갖추었다.

조슈 번은 막부의 명령을 무시하고 5월 10일 시모노세키 해협을 항행 중인 미국 상선에 포격을 가해 양이를 실행했다. 이후 프랑스, 네덜란드 함선도 포격했지만, 다른 번들은 동조하지 않았고, 조슈 번은 6월에 미국과 프랑스로부터 보복 공격을 받아도 근린 번들은 방관했다.

오가사와라 나가미치는 쇄항 통고에 대한 열국 공사의 항의를 막부에 보고하고, 교토를 무력으로 제압할 계획을 내놓았다. 영국과 프랑스 공사도 제안했던 이 계획은 실패했지만, 막부는 쇼군 이에모치를 에도로 귀환시킬 수 있었다.

마쓰다이라 슌가쿠는 조약 파기 쇄국이 실행되면 열국이 오사카 만을 위협할 수 있다고 보고, 요코이 쇼난의 '''거번 상경 계획'''을 통해 쇄항이냐 개항이냐를 결정하려 했다. 그러나 장군이 에도로 돌아가고 마쓰다이라 시게아키의 참근교대가 논의되면서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다.

막부는 외국 함선에 포격을 가한 조슈 번을 견책했고, 조슈 번은 막부의 쇄국 실행 전권 위임을 해제하고 조정이 직접 무력 쇄국을 지휘하는 친정 방식으로 전환하려 했다. 고메이 천황은 쇄국론자였지만, 급진파와 조슈 번을 혐오하여 쇼군에 대한 위임을 멈출 생각이 없었다. 8월 18일의 정변 직후, 조정은 다시 여러 다이묘들에게 막부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쇄국을 실행하도록 명하고, 요코하마 쇄항을 막부에 강요했다.[17]

5. 2. 참예회의 (参預会議)

시마즈 히사미츠는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에게 조정의 오랜 관습을 깨고, 확고한 방침과 체제를 세울 것을 요청했다. 막부 개혁에 이어 조정 개혁도 단행하여 공무 합체의 새로운 정치 체제를 구축하려는 의도였다.[16]

11월 15일, 천황은 시마즈 히사미츠에게 친서를 내려, 전쟁은 피하고 진정으로 국가를 위해 이로운 쇄국을 신속히 행하는 방책을 세울 것, 급진적인 주장의 왕정복고는 바라지 않으므로 쇼군에게 대정(大政)을 위임하고 공무 협조의 정치를 바란다는 뜻을 전했다. 이에 히사미츠는 군사력이 약한 현재 상황에서는 개항과 쇄국 중 어느 쪽을 선택할 권한이 일본에 없으므로 지금은 군사력 강화에 힘쓰고 성급한 쇄국은 하지 않을 것이며, 대정 위임이 타당하고 왕정 복고는 현실적이지 않지만 막부가 조정을 경시할 때는 그 죄를 바로잡을 것이라고 답했다.

히토쓰바시 파 제후들의 입경은, 10월 18일에 마쓰다이라 슌가쿠, 11월 3일에 다테 무네나리, 같은 달 26일에 도쿠가와 요시노부, 12월 28일에 야마우치 요도가 뒤를 이었다. 그리고 12월 30일, 조정은 이 4명과 교토 수호직 마쓰다이라 가타모리에게 참여를 명했다. 무위무관이었던 히사미츠는 이듬해 분큐 4년(1864년) 1월 13일에 종4위하 사콘노에곤쇼조에 임명된 후 참여에 더해졌다. 1월 21일,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참내하여, 참여 제후와 협력을 구하는 칙서가 내려졌다. 이렇게 공무 합체 아래에서 뜻있는 다이묘가 국정에 참여하여 새로운 공의 정체의 확립을 목표로 발족한 참여 회의였지만, 요코하마 쇄항 문제를 둘러싸고 개항론을 지지하며 신체제를 주도하고 싶어하는 시마즈 히사미츠 등 뜻있는 다이묘와, 쇄항론을 내세움으로써 조정과 쇄국 위임파 제후와 협조하여 대정 위임을 재확립하고 싶어하는 도쿠가와 요시노부 및 막부의 대립 등으로 인해 불과 2개월 만에 붕괴하게 되었다.[16]

이 정변은 약 1년 후의 금문의 변으로 이어진다.

참조

[1] 서적 日本歴史大系普及版12:開国と幕末政治 山川出版社 1996
[2] 문서 西郷隆盛(吉之助)は下関で待機する命を受けて先発したが、久光を待たずに伏見に上り過激派の企てを止めようとしたため、君命に背いたとして捕縛され、徳之島さらに沖永良部島に遠島となった。西郷が赦免召還されたのは、政変の翌年、元治元年(1864年)2月である。
[3] 문서 (1)将軍が諸大名を率いて上洛し、攘夷について朝廷と協議する、(2)沿海5大藩主(薩摩・長州・土佐・仙台藩|仙台・加賀藩|加賀)を大老として幕政を担わせ、攘夷を行わせる、(3)一橋慶喜を将軍後見職、松平春嶽を大老とするという内容で、(1)案は長州の主張、(2)案は雄藩のバランスをとるもの、そして(3)案が薩摩の主張であった。
[4] 문서 幕府は外様藩による首脳人事への介入を快く思わず、談判は難航したが、大久保利通が交渉不調ならば老中殺害も辞さない姿勢を示したことが勅使から老中脇坂安宅・板倉勝静に伝わるとまとまった。
[5] 문서 藩主ではなく無位無官の久光は、正式の参内はできず禁裏奥向での内々の対面だったものの、御剣を下賜された。前例のないことだったが、天皇のたっての希望により「参内」ではなく関東の事情を聞くためという名目で実現した。
[6] 문서 岩倉と久我建通・千種有文・富小路敬直・今城重子・堀河紀子の6人が佐幕の「四奸二嬪」として弾劾された。
[7] 문서 実美の母方の祖父は山内豊策。山内豊範は実美の従弟。
[8] 문서 攘夷派・一橋派として活動。梁川星巌・梅田雲浜・頼三樹三郎などとも交流する。刺客は土佐勤王党の岡田以蔵で、大学が安政の大獄で重い処分を受けなかったのは井伊直弼と裏で通じていたからとの誤信によるとされる。
[9] 문서 「征夷将軍之儀、惣而此迄通御委任被遊候、攘夷之儀、精々可尽忠節事」。
[10] 문서 「征夷将軍儀、是迄通御委任被遊候上は、弥以叡慮遵奉、君臣之名分相正、闔国一致奏攘夷之成功、人心帰服之処置可有之候。国事之儀に付ては、事柄に寄り直に諸藩へ御沙汰被為在候間、兼而御沙汰被成置候事」。
[11] 웹사이트 挙藩上洛とは https://www.history.[...]
[12] 문서 5月26日には禁裏六門の警備が、会津、越後長岡藩|長岡(京都所司代)、広島藩|芸州、米沢藩|米沢、中津藩|中津の5藩に命じられた。
[13] 문서 島津斉彬・松平春嶽・山内容堂とともに「四賢侯」と呼ばれた旧一橋派の有志大名。
[14] 문서 その後、越前藩の上洛計画を推進した人々は処分され、立案者の横井小楠も肥後に去ることになった。いっぽう、薩摩と越前の上洛を非常に警戒していた攘夷親征派は、これを阻止すべくさまざまな活動を行っており、計画中止後の7月27日にも越前の宿舎に予定されていた高台寺に放火した。
[15] 문서 藩主小笠原忠幹の官位と所領15万石を没収。ただし、跡目相続の者に旧領のうちから3万石を与える。
[16] 문서 薩摩本国の島津久光・大久保利通の指示を受けて進められたと見る説と、高崎の判断で進められたと見る説とがある。
[17] 간행물 維新史料編纂会 講演速記録. 第1-5輯「文久三年八月政変前後の事情 / 蜂須賀茂韶」 http://dl.ndl.go.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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