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문의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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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금문의 변은 1864년 조슈번이 교토에서 무력으로 조슈번의 억울함을 호소하려다 실패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1863년 조슈번이 교토에서 추방된 배경에서 시작되었으며, 이케다야 사건으로 인해 조슈번 내에서 무력 진입론이 힘을 얻었다. 조슈번은 교토로 진군했으나, 하마구리 문 전투에서 패배하여, 조슈번의 지도자들은 사망하고, 교토 시가지에 대화재가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조슈번은 조정의 적으로 간주되어 제1차 조슈 정벌을 겪었으며, 이후 삿초 동맹을 통해 막부 타도 운동을 본격화하여 메이지 유신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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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문의 변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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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돌 정보 | |
분쟁 이름 | 금문의 변 |
다른 이름 | 하마구리 문 변 겐지의 변 겐지 갓시의 변 |
로마자 표기 | Kinmon no Hen |
전투 정보 | |
일부 | 바쿠마쓰 분쟁 |
![]() | |
날짜 | 1864년 8월 20일 |
위치 | 교토 |
좌표 | 35°01′23″N 135°45′35″E |
원인 | 존왕양이 칙령 |
결과 | 도쿠가와 막부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조슈 번 휘장 존왕양이 낭인 부대 |
교전국 2 | 도쿠가와 막부 아이즈 번 사쓰마 번 미토번 오와리 번 기이 번 구와나 번 오가키 번 에치젠 번 히코네 번 요도 번 아사오 번 도쿠가와 막부 군대 미마와리구미 유게키타이 |
지휘관 및 지도자 | |
지휘관 1 | 후쿠하라 에치고 |
지휘관 2 | 도쿠가와 요시노부 |
병력 규모 | |
병력 1 | 3,000명 (조슈 군대 1,400명 + 낭인 부대 1,600명) |
병력 2 | 50,000명 |
사상자 및 피해 | |
사상자 1 | 400명 사망 또는 부상 |
사상자 2 | 60명 사망 또는 부상, 주택 28,000채 전소 |
2. 배경
1863년, 아이즈번(会津藩)과 사쓰마번(薩摩藩) 등이 주도한 정변으로 조슈번(長州藩)이 교토에서 추방되었다. 8월 18일의 정변으로 조슈번 병사들은 직무에서 해임되었고, 번주 모리 요시치카(毛利敬親)와 그의 아들 모리 사다히로(毛利元徳)는 근신 처분을 받았다.
이전의 정변으로 인해 급진적인 양이 노선은 후퇴했지만, 궁정은 여전히 양이를 주장했다. 1864년 요코하마 항의 쇄항 방침이 조정과 막부 양측에 의해 합의되었으나, 에도 막부 내의 대립으로 실행되지 않았다. 3월에는 미토번(水戸藩) 존양파가 봉기하는 덴구당의 난(天狗党の乱)이 일어나는 등, 각지의 존양파 사이에서 조슈번의 교토 정국 복귀를 바라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조슈번 내에서도 교토로 진입하여 무력을 배경으로 무죄를 호소하려는 진발론이 라이시마 마타베에(来島又兵衛), 마키 야스오미(真木保臣) 등을 중심으로 논의되었다. 기도 다카요시(木戸孝允),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 구사카 겐즈이(久坂玄瑞) 등은 신중한 자세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진발론이 우세해졌다.
1864년 6월 5일(음력), 신센구미(新選組)가 교토 이케다야 사건(池田屋事件)에서 조슈번 지사들을 습격했다.[5] 이 사건으로 조슈번 내에서는 교토 진격론이 강하게 대두되었다. 이케다야 사건으로 번사(藩士)를 잃은 것에 대한 소식이 장주에 전해지자 번론(藩論)은 순식간에 진발론으로 기울었다.[5] 신중파인 슈부 마사노스케(周布政之助), 다카스기 신사쿠, 시시도 마사미쓰(宍戸真澂) 등은 번론의 진정에 힘썼지만, 후쿠하라 모토히로(福原元僴), 마스다 치카시(益田親施), 구니지 치카소(国司親相) 등 세 명의 가로(家老) 등 적극파는 “번주의 억울함을 고메이 천황(孝明天皇)께 호소한다”는 명목으로 거병을 결의했다.[5]
6월 24일(구력), 구사카 겐즈이는 조슈번의 죄 회복을 기원하는 탄원서를 궁정에 바쳤다. 그러나 사쓰마 번사 요시이 도모자네(吉井友実), 도사 번사 이누이 마사아쓰(乾正厚), 구루메 번사 오쓰카 케이스케(大塚敬介), 다나카 몬지로(田中紋次郎)는 조슈번 병사의 입경을 저지하려는 연서 의견서를 7월 17일(구력) 궁정에 건의했다.[5]
궁정 내부에서는 조슈 세력의 축출을 요구하는 강경파와 유화파가 대립했고, 18일 밤에는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카히토 친왕(有栖川宮幟仁親王),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有栖川宮熾仁), 나카야마 다다야스(中山忠能) 등이 참내하여 조슈 세력의 입경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松平容保)의 추방을 호소했다. 금리 오슈에이 소토쿠(禁裏御守衛総督)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는 조슈번 병사들에게 철수를 호소했지만, 고메이 천황(孝明天皇)에게 조슈 소탕을 명령받고 강경 자세로 돌아섰다.
2. 1. 8월 18일의 정변
1863년, 아이즈번(会津藩)과 사쓰마번(薩摩藩) 등이 주도한 정변으로 조슈번(長州藩)이 교토에서 추방되었다. 8월 18일의 정변으로 조슈번 병사들은 직무에서 해임되었고, 번주 모리 요시치카(毛利敬親)와 그의 아들 모리 사다히로(毛利元徳)는 근신 처분을 받았다.이전의 정변으로 인해 급진적인 양이 노선은 후퇴했지만, 궁정은 여전히 양이를 주장했다. 1864년 요코하마 항의 쇄항 방침이 조정과 막부 양측에 의해 합의되었으나, 에도 막부 내의 대립으로 실행되지 않았다. 3월에는 미토번(水戸藩) 존양파가 봉기하는 덴구당의 난(天狗党の乱)이 일어나는 등, 각지의 존양파 사이에서 조슈번의 교토 정국 복귀를 바라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조슈번 내에서도 교토로 진입하여 무력을 배경으로 무죄를 호소하려는 진발론이 라이시마 마타베에(来島又兵衛), 마키 야스오미(真木保臣) 등을 중심으로 논의되었다. 기도 다카요시(木戸孝允),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 구사카 겐즈이(久坂玄瑞) 등은 신중한 자세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진발론이 우세해졌다.
6월 5일(구력), 이케다야 사건(池田屋事件)으로 번사들이 신센구미(新選組)에게 살해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번론은 진발론으로 기울었다. 후쿠하라 모토히로(福原元僴), 마스다 치카시(益田親施), 구니지 치카소(国司親相) 등 세 명의 가로 등 적극파는 거병을 결의했다.
6월 24일(구력), 구사카 겐즈이는 조슈번의 죄 회복을 기원하는 탄원서를 궁정에 바쳤다. 그러나 사쓰마 번사 요시이 도모자네(吉井友実), 도사 번사 이누이 마사아쓰(乾正厚), 구루메 번사 오쓰카 케이스케(大塚敬介), 다나카 몬지로(田中紋次郎)는 조슈번 병사의 입경을 저지하려는 연서 의견서를 7월 17일(구력) 궁정에 건의했다.[5]
궁정 내부에서는 조슈 세력의 축출을 요구하는 강경파와 유화파가 대립했고, 18일 밤에는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카히토 친왕(有栖川宮幟仁親王),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有栖川宮熾仁), 나카야마 다다야스(中山忠能) 등이 참내하여 조슈 세력의 입경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松平容保)의 추방을 호소했다. 금리 오슈에이 소토쿠(禁裏御守衛総督)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는 조슈번 병사들에게 철수를 호소했지만, 고메이 천황(孝明天皇)에게 조슈 소탕을 명령받고 강경 자세로 돌아섰다.
2. 2. 이케다야 사건
1864년 6월 5일(음력), 신센구미가 교토 이케다야에서 조슈번 지사들을 습격했다.[5] 이 사건으로 조슈번 내에서는 교토 진격론이 강하게 대두되었다. 이케다야 사건으로 번사(藩士)를 잃은 것에 대한 소식이 장주에 전해지자 번론(藩論)은 순식간에 진발론으로 기울었다.[5] 신중파인 슈부 마사노스케(周布政之助), 다카스기 신사쿠, 시시도 마사미쓰(宍戸真澂) 등은 번론의 진정에 힘썼지만, 후쿠하라 모토히로(福原元僴)와 마스다 친시(益田親施), 구니지 친소(国司親相) 등 세 명의 가로(家老) 등 적극파는 “번주의 억울함을 고메이 천황(孝明天皇)께 호소한다”는 명목으로 거병을 결의했다.[5]3. 전개 과정
조슈번은 8월 18일의 정변으로 교토에서 추방되고 번주 모리 다카치카와 아들 모리 사다히로가 근신 처분을 받는 등 정치적 주도권을 상실했다. 1864년(겐지 원년), 요코하마 항 쇄항 정책이 조정과 막부 양측에 의해 합의되었으나 실행되지 않았고, 미토 번에서 덴구당의 난이 일어나는 등 정세가 불안한 가운데 조슈번의 정국 복귀를 바라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조슈번 내에서는 교토로 진군하여 번주의 누명을 황제에게 호소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케다야 사건을 계기로 후쿠바라 모토다케, 마스다 치카노부, 구니시 치카스케 등 3명의 가로가 주도하여 거병을 결의했다. 이들은 오야마자키 덴노 산(天王山), 사가의 덴 류지(天龍寺), 후시미의 조슈 저택 등 세 방면에서 군사를 모아 교토로 진군했다.
6월 24일, 구사카 겐즈이는 조정에 조슈 번의 사면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7월 17일 사쓰마 번사 요시이 도모자네 등이 조슈번 병력의 입경을 저지하는 연판 의견서를 조정에 제출하면서, 조정 내 강경파와 유화파가 대립했다. 7월 18일 밤, 아리스와 다카히토 등 두 친왕과 나카야마 다다야스 등이 입궐하여 조슈 세력의 입경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의 추방을 호소했지만, 고메이 천황의 반복된 조슈 소탕 명령에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강경 자세로 돌아섰다.
3. 1. 조슈번의 진군
조슈번은 8월 18일의 정변으로 교토에서 추방되고 번주 모리 다카치카와 아들 모리 사다히로가 근신 처분을 받는 등 정치적 주도권을 상실했다. 1864년(겐지 원년), 요코하마 항 쇄항 정책이 조정과 막부 양측에 의해 합의되었으나 실행되지 않았고, 미토 번에서 덴구당의 난이 일어나는 등 정세가 불안한 가운데 조슈번의 정국 복귀를 바라는 목소리가 높아졌다.조슈번 내에서는 교토로 진군하여 번주의 누명을 황제에게 호소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케다야 사건을 계기로 후쿠바라 모토다케, 마스다 치카노부, 구니시 치카스케 등 3명의 가로가 주도하여 거병을 결의했다. 이들은 오야마자키 덴노 산(天王山), 사가의 덴 류지(天龍寺), 후시미의 조슈 저택 등 세 방면에서 군사를 모아 교토로 진군했다.
6월 24일, 구사카 겐즈이는 조정에 조슈 번의 사면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7월 17일 사쓰마 번사 요시이 도모자네 등이 조슈번 병력의 입경을 저지하는 연판 의견서를 조정에 제출하면서, 조정 내 강경파와 유화파가 대립했다. 7월 18일 밤, 아리스와 다카히토 등 두 친왕과 나카야마 다다야스 등이 입궐하여 조슈 세력의 입경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의 추방을 호소했지만, 고메이 천황의 반복된 조슈 소탕 명령에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강경 자세로 돌아섰다.
3. 2. 조정의 대응
7월 18일 밤, 아리스와 다카히토, 아리스가와 다루히토 두 친왕과 나카야마 다다야스 등은 급히 입궐하여 조슈 세력의 입경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의 추방을 호소했다. 그러나 고메이 천황의 반복된 조슈 소탕 명령에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결국 강경 자세로 돌아섰다. 조정 내에서는 조슈 세력을 축출을 요구하는 강경파와 유화파가 대립하였고, 조슈를 동정하여 관대한 조치를 바랬던 번사나 공경도 있었다. 7월 17일 사쓰마 번사 요시이 도모자네, 도사 번사 이누이 마사히로, 구루메 번사인 오츠카 케스케 등은 심의를 하여 조슈번 병의 입경을 저지하는 연판 의견서를 조정에 건의했다.4. 전투
7월 19일, 교토고쇼 서쪽 하마구리 문(교토시 가미쿄구) 부근에서 조슈번 병사와 아이즈번, 구와나번 병사가 충돌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일시적으로 후쿠하라 부대와 구니시 시나노, 키지마 마타베 부대는 후쿠오카번이 지키던 추우타치우리 문을 돌파하여 교토 황궁 안으로 침입했으나, 칸몬(乾門)을 지키는 사쓰마번 병사가 지원군으로 달려오자 형세가 역전되어 패퇴했다.[1] 저격을 받고 부상당한 키지마 마타베는 자결했다.
마키, 구사카 겐즈이 부대는 개전에 늦어 도착 당시 키지마의 전사와 전선의 붕괴 소식을 알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쇼 남쪽의 사카이마치 고몬을 공격했다. 그러나 에치젠번 병사들을 격파하지 못하고, 구사카 겐즈이, 테라시마 추자부로 등은 조정에 탄원을 요청하기 위해 침입한 다카쓰카사 저택에서 자결했다. 유명을 부탁받은 이리에 규이치는 다카쓰카사 저택 담을 넘어 탈출했으나, 그때 에치젠번 병사에게 발견되어 창으로 얼굴을 찔려 사망했다.
결판이 난 후, 도망치는 조슈군은 조슈번 저택에 불을 지르고 도주했고, 아이즈군도 조슈번사가 숨어 있다고 여겨지는 추우타치우리 문 부근의 가옥을 공격했다. 전투 자체는 하루 만에 끝났지만, 이 두 곳에서 시작된 화재인 “돈돈야케”로 인해 교토 시가는 21일 아침까지 소실되어 북쪽 이치죠도리에서 남쪽 시치조의 동본원사에 이르는 넓은 범위의 가옥과 사찰이 소실되었다.
생존한 병사들은 제각기 도망쳤고, 후쿠하라·고쿠시 등은 부상자를 가마에 태워 오사카나 하리마 방면으로 후퇴했다. 덴노 산에서 후위를 맡고 있던 마스다 부대도 패전 소식을 듣고 후퇴하여 조슈로 귀환했다.
주전파였던 마키 야스토미는 패잔병과 함께 덴노 산에 도착했지만, 마스다 등 다른 병력은 이미 이탈하여 합류에 실패했다. 마키 등은 병사들을 피신시키고, 미야베 슌조 등 17명으로 덴노 산에 틀어박혔다. 20일에 야마토 군산번의 항복 권고를 무시하고 21일에 아이즈번과 신센구미에게 공격받자, 모두 오두막에 틀어박혀 화약에 불을 붙여 자폭했다. 오사와 이츠헤이는 그 자리를 벗어나 마키의 유언을 다카스기 신사쿠와 산조 사네토미 등에게 전달하기 위해 조슈번으로 향했다.
4. 1. 하마구리문 전투
7월 19일, 교토고쇼의 서쪽 주변 하마구리 문(교토시 가미교구) 부근에서 조슈번 병력과 아이즈번, 구와나번 병력이 충돌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일시적으로 후쿠하라 부대와 구니시 시나노, 키지마 마타베 부대는 후쿠오카번이 지키고 있던 추우타치우리 문을 돌파하여, 교토 황궁에 진입하였으나, 칸몬(乾門)을 지키던 사쓰마번 병력이 원군으로 달려들면서 형세가 역전되어 밀려났다.[1] 저격을 당한 키지마 마타베는 자결했다.마키, 구사카 겐즈이 부대는 개전에 늦게 도착하여, 키지마의 전사와 전선이 무너진 소식을 알고 있었지만, 황궁 남쪽 사카이마치 고몬을 공격했다. 그러나 에치젠번 병력을 돌파하지 못했고, 구사카 겐즈이, 테라지마 추자부로 등은 조정에 탄원을 요청하기 위해 침입한 다카쓰카사 저택에서 자결했다. 이리에 쿠이치는 다사쓰카사 저택에서 탈출하다가 에치젠 번사에 발견되어 얼굴에 창이 찔려 사망했다.
결판이 난 후, 도망치는 조슈군은 조슈 번 저택에 불을 질렀고, 아이즈군도 조슈 번사가 숨어 있다고 여겨지는 추우타치우리 문 부근의 가옥을 공격했다. 전투 자체는 하루 만에 끝났지만, 이 두 곳에서 시작된 화재인 “돈돈야케”로 인해 교토 시가는 21일 아침까지 소실되어 북쪽 이치죠도리에서 남쪽 시치조의 히가시 혼간지에 이르는 넓은 범위의 가옥과 사찰이 소실되었다.
4. 2. 사카이마치 고몬 전투
7월 19일, 교토고쇼의 서쪽 주변 하마구리 문(교토시 가미교 구) 부근에서 조슈번 병과 아이즈, 쿠와나 번 병력이 충돌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일시적으로 후쿠하라 부대와 구니시 시나노, 키지마 마타베 부대는 후쿠오카 번이 지키고 있던 추우타치우리 문(中立売門)을 돌파하여, 교토 황궁에 진입하였으나 칸몬(乾門)을 지키던 사쓰마 병이 원군으로 달려들면서 형세가 역전되어 밀려났다. 저격을 당한 키지마 마타베는 자결했다.마키, 구사카 부대는 개전에 늦게 도착하여, 키지마의 전사와 전선이 무너진 소식을 알고 있었지만, 황궁 남쪽 사카이마치(堺町) 고몬을 공격했다. 그러나 수비를 하던 에치젠 번병을 돌파하지 못했고, 구사카 겐즈이, 테라지마 추자부로 등은 조정에 탄원을 요청하기 위해 침입한 다카쓰카사 저택에서 자결했다. 이리에 규이치는 다사쓰카사 저택에서 탈출하다가 에치젠 번사에 발견되어 얼굴에 창이 찔려 사망했다.
4. 3. 대화재 발생
7월 19일, 교토고쇼의 서쪽 주변 하마구리 문(교토시 가미교 구) 부근에서 조슈번 병과 아이즈, 쿠와나 번 병력이 충돌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귀추가 결정된 후 무사히 퇴각하던 조슈 세는 조슈 번의 저택에 불을 지르고 도주하였다. 아이즈 세도 조슈 번사가 숨어 있다는 추우타치우리 문 부근의 가옥을 공격했다. 전투 자체는 하루 만에 끝났지만, 이 두 곳에서 시작된 화재로 교토 도심은 21일 아침까지 ‘돈돈야케’(どんどん焼け)라는 대화재에 휩쓸려 북쪽은 이치죠 도리에서 남쪽으로 7대문인 히가시 혼간지에 이르는 넓은 범위의 도시 지역과 사찰이 소실되었다. 이 화재는 '돈돈야케'라고 불린다.5. 결과
조슈번은 전투에서 패배하여, 존왕양이파는 큰 타격을 입었다. 마키 야수오미 등 급진파 지도자 대부분이 사망했다. 조슈번은 조정의 적으로 간주되어 제1차 조슈 정벌의 대상이 되었다.[6] 번주 모리 다카치카는 막부로부터 받은 이름을 빼앗기고 경친(敬親)으로 개명당했다.
5. 1. 제1차 조슈 정벌
7월 23일(구력), 효명황제로부터 번주 마쓰라야 요시치카(毛利慶親) 토벌령이 내려지고, 조슈번은 조적(朝敵)으로 지정되어 제1차 조슈 정벌로 이어졌다.[6] 12대 정이대장군 도쿠가와 이에요시(徳川家慶)로부터 받은 "慶" 편휘를 박탈당하고 "경친(敬親)"으로 개명하였다. 경친의 계승자 마쓰라야 사다히로(毛利定広) 또한 1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徳川家定)로부터 받은 "定" 휘를 박탈당하고 "히로후사(広封)"로 개명하였다. 조슈번 병사들은 신발에 "사적회간(薩賊会奸)" 등을 적어 짓밟고 다녔다고 전해지며, 사쓰마(薩摩)와 아이즈(会津)에 대한 깊은 원한이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6. 영향
금문의 변 이후, 조슈번은 막부로부터 '조적'(朝敵)으로 지정되고 제1차 조슈 정벌의 대상이 되었다.[6] 조슈번은 번주 마쓰다이라 요시치카(毛利慶親)가 도쿠가와 이에요시(徳川家慶)에게서 받은 편휘를 박탈당하고, 후계자 마쓰다이라 사다히로(毛利定広) 또한 도쿠가와 이에사다(徳川家定)에게서 받은 편휘를 박탈당하는 수모를 겪었다.[6] 조슈번 병사들은 신발에 "사적회간(薩賊会奸)" 등을 적어 짓밟고 다녔는데, 이는 사쓰마번과 아이즈번에 대한 깊은 원한을 드러낸 것이었다.[6]
이러한 상황에서 조슈번은 삿초 동맹을 맺고 막부 타도 운동을 본격화했으며, 이는 메이지 유신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금문의 변은 막부 말기 정국의 중요한 분기점이었으며,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이 사건은 한국의 근대사에도 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6. 1. 삿초 동맹
금문의 변 이후, 조슈번은 막부로부터 '조적'(朝敵)으로 지정되고 제1차 조슈 정벌의 대상이 되었다.[6] 조슈번은 번주 마쓰다이라 요시치카(毛利慶親)가 도쿠가와 이에요시(徳川家慶)에게서 받은 편휘를 박탈당하고, 후계자 마쓰다이라 사다히로(毛利定広) 또한 도쿠가와 이에사다(徳川家定)에게서 받은 편휘를 박탈당하는 수모를 겪었다.[6] 조슈번 병사들은 신발에 "사적회간(薩賊会奸)" 등을 적어 짓밟고 다녔는데, 이는 사쓰마번과 아이즈번에 대한 깊은 원한을 드러낸 것이었다.[6]이러한 상황에서 조슈번은 사쓰마번과 동맹을 맺고 막부 타도 운동을 본격화했으며, 이는 메이지 유신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7. 역사적 평가
금문의 변은 막부 체제 붕괴와 메이지 유신의 시작을 알리는 일본 역사의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된다.[6] 이 사건은 단순한 군사적 충돌을 넘어, 존왕양이 사상과 막부 권력 간의 대립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조슈번은 효명황제로부터 번주 마쓰라야 요시치카 토벌령이 내려지고 조적(朝敵)으로 지정되어 제1차 조슈 정벌로 이어졌다.[6] 요시치카는 도쿠가와 이에요시로부터 받은 "慶"자를 박탈당하고 "敬親"으로 개명하였고, 그의 계승자 마쓰라야 사다히로 또한 도쿠가와 이에사다로부터 받은 "定"자를 박탈당하고 "広封"로 개명하였다.[6] 장주번 병사들은 신발에 "사적회간(薩賊会奸)" 등을 적어 짓밟고 다녔다고 전해지며, 사쓰마와 아이즈에 대한 깊은 원한이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6]
사쓰마번과 교전하여 사망한 20명의 유해는 사쓰마번에 의해 상국사(相国寺)의 탑두사찰인 대광명사(大光明寺)에 매장되었고, 1906년(메이지 39년)에 마쓰라야가에 의해 묘비가 건립되었다. 다카시(鷹司) 저택에서 전사한 이리에(入江) 등 구사카(久坂) 부대 전사자들의 수급은 후쿠이번(福井藩)의 번사들이 전 번주 마쓰다이라 하루아키의 허락을 얻어, 같은 전사자 8명과 함께 후쿠이번의 교토 보디사찰인 조젠사(上善寺)에 정중히 매장되었다.
한국의 관점에서는, 이 사건 이후 조슈번이 주도한 메이지 유신이 일본의 제국주의 팽창으로 이어져 대한제국 강제 병합에 이르는 과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8. 관련 유적
참조
[1]
웹사이트
The Life of Japan’s “Last Samurai”: Saigō Takamori
https://www.nippon.c[...]
2020-06-18
[2]
웹사이트
Nakayama Tadayasu (1809–88)
http://eos.kokugakui[...]
2013-09-24
[3]
문서
元治甲子戦争という名称
[4]
웹사이트
都市史25 蛤御門の変とどんどん焼け
https://www2.city.ky[...]
2022-09-30
[5]
서적
雋傑坂本龍馬
弘文社
1927-04-01
[6]
문서
藩主父子の官位復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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