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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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한응은 1874년 용인 출생으로, 대한제국 말기 외교관이자 을사늑약 반대에 항거하여 순국한 인물이다. 25세에 국립 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성균관 진사 시험에 합격했으며, 한성부 주사, 영어 교관 등을 역임했다. 1901년 영국 및 이탈리아 총영사관 3등 서기관으로 런던에 파견되어 대한제국 공사관 업무를 수행했다. 1904년 임시대리 대사로서 한반도 정세에 대한 각서를 영국 외무부에 제출했으나, 영국의 지원을 얻지 못하자 1905년 4월 을사늑약 체결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자결했다. 사후 종2품 가선대부 내부협판에 추서되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현재 묘소는 용인시 향토유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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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응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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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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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이름 | 이한응 |
한자 이름 | 李漢應 |
로마자 표기 | I Han-eung |
별명 | 자는 경천(敬天), 호는 국은(菊隱) |
출생 | |
출생일 | 1874년 10월 30일 |
출생지 | 경기도 용인 |
사망 | |
사망일 | 1905년 5월 12일 |
사망지 | 4 Trebovir Rd, Earl's Court, London, UK |
신상 정보 | |
국적 | 대한제국 |
가족 관계 | |
부모 | 부친 이경호 (생부 이명호) |
직업 및 경력 | |
직책 | 대한제국의 주영 서리공사 |
군주 | 대한제국 고종 |
기타 정보 | |
서훈 | 건국훈장 독립장 |
웹사이트 | 이한응 웹사이트 |
2. 생애
2. 1. 초기 생애 (1874-1901)
이한응은 1874년 10월 30일 경기도 용인에서 이경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3]25세에 국립 영어학교에 입학하여 2년 만에 졸업했다. 1894년 성균관 진사 시험에 합격했다. 1897년에는 한성부 주사로 임명되어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1899년에는 영어 교관으로 임명되어 젊은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3]

2. 2. 런던에서의 외교 활동 (1901-1905)
1901년, 이한응은 영국 및 이탈리아 총영사관 3등 서기관으로 임명되어 민용돈 공사와 함께 런던 사무소로 이동했다.[3]
이한응은 1901년 4월 15일 한국을 출발하여 1901년 6월 24일경 런던에 도착했다. 민용돈과 이한응을 포함한 6명의 한국 공사관 구성원들은 퀸 빅토리아 스트리트에 임시 거처를 마련한 후, 최종적으로 얼스 코트의 4 트리보버 로드로 이사했다.[3]
이 건물은 지하실을 포함하여 4층으로 된 빅토리아 시대의 타운하우스로, 1879년 벨기에 출신 반 캄프스에 의해 지어졌다. 2023년 10월 30일, 건물의 외교적 유산을 기념하기 위해 현관 위에 명판이 설치되었다.[5]
최근 밝혀진 바에 따르면, 로랜드 본 윌리엄스 경과 레이디 로라 본 윌리엄스 부부가 이끄는 한 가족이 대한제국 공사관에 엄청난 호의를 베풀었다고 한다. 고종 황제를 대신하여 보낸 메시지에는 이한응에게 보여준 친절함이 '폐하께 서양인의 새로운 긍정적인 면을 보여주었고, 깊은 감동을 주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6]
본 윌리엄스 가족은 대한제국 공사관 건물 옆인 6 트레보비어 로드에 거주했다. 그들은 대한제국 공사관에 엄청난 지원을 보냈으며, 때로는 공사관 관계자들을 서리 주 레이트 힐에 위치한 그들의 저택 '하이 애쉬스'에 초대하여 접대하기도 했다.
1903년, 민용돈이 한국으로 돌아갔지만, 후임자는 임명되지 않았다. 1904년 초까지 이한응은 임시대리 대사로서 공사관 업무를 맡았다. 그는 1904년 1월 13일 영국 외무부 청사를 방문하여, 한반도 주변의 지정학적 상황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설명하는 각서를 제출했다.[3][4]
2. 2. 1. 대한제국 공사관
이한응은 1901년 4월 15일 한국을 출발하여 1901년 6월 24일경 런던에 도착했다. 민용돈과 이한응을 포함한 6명의 한국 공사관 구성원들은 퀸 빅토리아 스트리트에 임시 거처를 마련한 후, 최종적으로 얼스 코트의 4 트리보버 로드로 이사했다.[3]
이 건물은 지하실을 포함하여 4층으로 된 빅토리아 시대의 타운하우스로, 1879년 벨기에 출신 반 캄프스에 의해 지어졌다. 2023년 10월 30일, 건물의 외교적 유산을 기념하기 위해 현관 위에 명판이 설치되었다.[5]
2. 2. 2. 본 윌리엄스 가문과의 교류
최근 밝혀진 바에 따르면, 로랜드 본 윌리엄스 경과 레이디 로라 본 윌리엄스 부부가 이끄는 한 가족이 대한제국 공사관에 엄청난 호의를 베풀었다고 한다. 고종 황제를 대신하여 보낸 메시지에는 이한응에게 보여준 친절함이 '폐하께 서양인의 새로운 긍정적인 면을 보여주었고, 깊은 감동을 주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6]본 윌리엄스 가족은 대한제국 공사관 건물 옆인 6 트레보비어 로드에 거주했다. 그들은 대한제국 공사관에 엄청난 지원을 보냈으며, 때로는 공사관 관계자들을 서리 주 레이트 힐에 위치한 그들의 저택 '하이 애쉬스'에 초대하여 접대하기도 했다.
2. 3. 을사늑약 반대와 순국 (1905)
래스다운 경은 1902년 체결된 영일 동맹을 통해 영국이 일본과 공통의 이익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 주재 대리공사였던 이한응과의 어떠한 대화도 거부했다.[7] 그는 1905년 3월 22일 다시 영국 외무부에 평화 협상 개입을 요청했지만, 래스다운 경은 1905년 4월 1일 그의 메모를 접수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7] 영국 측의 지원을 확보하는 데 실패한 이한응은 1905년 5월 12일 책임을 지고 4 트레보비어 로드에 있는 자신의 침실에서 자살했다.[7] 이 사건 이후 런던의 한국 공사관은 폐쇄되었다.[8]
오호라 국가는 주권이 없고 인종은 평등을 상실하여 각종 교섭에 치욕이 그지없으니 이 어찌 피끓는 자가 참을 수 있는 일인가. 오호라 장차 종묘 사직은 망하고 민족은 노예가 될 것이다. 구차하게 살아남아 치욕을 더하는 것보다 차라리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잊는 것이 옳을 것이다.[11]
형님인 이한풍에게 보내는 유서
시운이 이렇게 되니 다만 죽을 뿐이요, 살 길이 없습니다. 나라에 충성을 다 못하고 어버이께 효도를 다 못하오니, 이 어찌 즐겨할 일이 오리까. 사세 궁하게 되오니 어찌할 길이 없습니다. 이른 바 형편이 과연 면할 길이 없아오나 그 중에 가련하기는 지은 죄가 없는 사람이 이 무슨 원통한 일이리오, 가혼 이후에 별로 즐거움도 없었고 4,5년이나 서로 나누어 있어 아들 아이도 하나 못보고, 이제 길이 작별하게 되니 이 일이 원한이로소이다. 사세 이렇건만 어찌하리까. 기별을 들으시더라도 너무 염려 마옵시기를 바라옵고 생양모친 위로하시고, 제 처에게도 잘 개유하시어 어린 딸이나 잘 길러 모든 근심을 잊도록 하여 주십시요. 사체가 고국에 돌아가는 날에는 용인 선산밑 양지에 깊이 묻어 주시옵소서. 이 곳에 수년 있는 동안에, 월봉으로 몇 천원 저축이 있아온데, 지금 영국은행에 맡긴 것이 二千八十四원 十六전인데 그 가운데 천 여원은 반드시 시체 운반비로 쓰일 것이나, 이것은 후에 외무부에서 지불하여 줄 것입니다. 그리고 공사관 비용이 모자라서 채워쓰고, 아직 못 찾은 것이 二千一百八十四원 十六전인 바 그 중에서 四百八十四원 十六전은 몇 달 식비로 제할 것이요 금년 봄 석달 동안 찾지 못한 월봉이 一千五百三十三원이요. 또 이 四月 몇일 동안 월봉이 몇백원 될터이오니 런던은행과 우리 외무부에서 찾을 돈이 모두 지폐로 六千여원 됩니다. 바라옵건데 이 돈을 찾으시어 가족을 대리고, 시골에 내려가시어 조용한 곳에 전토나 사가지고, 부지런히 농사나 지으시고, 생양모친 위양하시고, 세상 일에 휩싸이지 말으시면 어떠하올지? 끝의 아우 한승은 시무(時務)에 눈 뜨지 않게 하여 주시고, 부디 이 돈으로 전토를 사신다면, 가히 벼 백석이나 얻을 것이오니 두어집 호구는, 되실 것입니다. 남은 일은 길 게 말씀 드리지 아니 하렵니다. 다만 양자에 대해서는, 이후에 끝아우 한승이가 만일 아들이 셋이 되면 한아이 뜻을 머물어 주시옵기 바라옵니다. 멀리서 백번 절하고 글을 올립니다. -음 四월 九일 사제 한응 올림
상장. 오래 편지 못하여, 향렴 간절 하옵니다. 나는 별반 죄악은 없으나, 시운이 불행하여 이에 작별하니 진실로 원통하고 섭섭합니다. 그렇지만 사제 형편이 죽는 것이 사는 것 보다 나으니, 나은 것을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하니 당신이 참으로 불쌍합니다. 나의 일 과히 생각하지 말으시고 생양가모친 위로 하시고, 어린 딸 잘 길러 자미드리시기 바랍니다. 나는 덕이 없고 복이 없는 사람이오니, 생각하지 말고, 형님에게 의지하셔서 살으시옵소서. 찾을 돈은 한 육천여원이 되나봅니다. 집안 일은 다 형님께 말씀 올렸사옵기, 이만 씁니다. - 음 사월 구일 죄인 이 한 응 상장

2. 3. 1. 유서
오호라 국가는 주권이 없고 인종은 평등을 상실하여 각종 교섭에 치욕이 그지없으니 이 어찌 피끓는 자가 참을 수 있는 일인가. 오호라 장차 종묘 사직은 망하고 민족은 노예가 될 것이다. 구차하게 살아남아 치욕을 더하는 것보다 차라리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잊는 것이 옳을 것이다.[11]형님인 이한풍에게 보내는 유서
시운이 이렇게 되니 다만 죽을 뿐이요, 살 길이 없습니다. 나라에 충성을 다 못하고 어버이께 효도를 다 못하오니, 이 어찌 즐겨할 일이 오리까. 사세 궁하게 되오니 어찌할 길이 없습니다. 이른 바 형편이 과연 면할 길이 없아오나 그 중에 가련하기는 지은 죄가 없는 사람이 이 무슨 원통한 일이리오, 가혼 이후에 별로 즐거움도 없었고 4,5년이나 서로 나누어 있어 아들 아이도 하나 못보고, 이제 길이 작별하게 되니 이 일이 원한이로소이다. 사세 이렇건만 어찌하리까. 기별을 들으시더라도 너무 염려 마옵시기를 바라옵고 생양모친 위로하시고, 제 처에게도 잘 개유하시어 어린 딸이나 잘 길러 모든 근심을 잊도록 하여 주십시요. 사체가 고국에 돌아가는 날에는 용인 선산밑 양지에 깊이 묻어 주시옵소서. 이 곳에 수년 있는 동안에, 월봉으로 몇 천원 저축이 있아온데, 지금 영국은행에 맡긴 것이 二千八十四원 十六전인데 그 가운데 천 여원은 반드시 시체 운반비로 쓰일 것이나, 이것은 후에 외무부에서 지불하여 줄 것입니다. 그리고 공사관 비용이 모자라서 채워쓰고, 아직 못 찾은 것이 二千一百八十四원 十六전인 바 그 중에서 四百八十四원 十六전은 몇 달 식비로 제할 것이요 금년 봄 석달 동안 찾지 못한 월봉이 一千五百三十三원이요. 또 이 四月 몇일 동안 월봉이 몇백원 될터이오니 런던은행과 우리 외무부에서 찾을 돈이 모두 지폐로 六千여원 됩니다. 바라옵건데 이 돈을 찾으시어 가족을 대리고, 시골에 내려가시어 조용한 곳에 전토나 사가지고, 부지런히 농사나 지으시고, 생양모친 위양하시고, 세상 일에 휩싸이지 말으시면 어떠하올지? 끝의 아우 한승은 시무(時務)에 눈 뜨지 않게 하여 주시고, 부디 이 돈으로 전토를 사신다면, 가히 벼 백석이나 얻을 것이오니 두어집 호구는, 되실 것입니다. 남은 일은 길 게 말씀 드리지 아니 하렵니다. 다만 양자에 대해서는, 이후에 끝아우 한승이가 만일 아들이 셋이 되면 한아이 뜻을 머물어 주시옵기 바라옵니다. 멀리서 백번 절하고 글을 올립니다. -음 四월 九일 사제 한응 올림
상장. 오래 편지 못하여, 향렴 간절 하옵니다. 나는 별반 죄악은 없으나, 시운이 불행하여 이에 작별하니 진실로 원통하고 섭섭합니다. 그렇지만 사제 형편이 죽는 것이 사는 것 보다 나으니, 나은 것을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하니 당신이 참으로 불쌍합니다. 나의 일 과히 생각하지 말으시고 생양가모친 위로 하시고, 어린 딸 잘 길러 자미드리시기 바랍니다. 나는 덕이 없고 복이 없는 사람이오니, 생각하지 말고, 형님에게 의지하셔서 살으시옵소서. 찾을 돈은 한 육천여원이 되나봅니다. 집안 일은 다 형님께 말씀 올렸사옵기, 이만 씁니다. - 음 사월 구일 죄인 이 한 응 상장
3. 사후
3. 1. 대한민국 정부의 추서 및 추모 활동
고종은 1905년 11월 조서를 내려 이한응에게 애도의 뜻을 표하고,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 내부협판(內部協辦)을 추서하였다. 고종은 치제문에서 이한응의 곧은 성품과 나라를 위한 헌신을 기렸다.
1962년에는 건국훈장 독립장이 서훈되었고, 1964년 10월에는 서울 장충단 공원에 순국기념비가 제막되었다. 제막식에는 정일권 국무총리 등이 참석하였다.
1995년 5월 12일에는 동국대학교에서 이한응 열사 순국 90주기 추모식이 열렸으며, 윤병석 인하대학교 명예교수가 추모 강연을 하였다. 2005년 5월 12일에는 동국대학교 예술회관에서 이한응 열사 순국 100주기 추모식이 개최되었다. 이홍구 전 국무총리의 개회사와 이태식 외교통상부 차관, 김학준 동아일보 사장의 추모사가 있었으며, 구대열 이화여자대학교 교수가 추모 강연을 하였다.

2015년 5월 11일에는 광복 70주년 및 이한응 열사 순국 110주년을 기념하는 국제학술회의가 서울 프레스 센터에서 개최되었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와 주영국대한민국대사관이 주최하고 국가보훈처가 후원한 이 학술회의에서는 윤주경 독립기념관장의 개회사와 함께 구대열 (이화여자대학교 명예교수), 김원수 (서울교육대학교 교수), Paul Wadey (Korean Culture Center UK), 김도형 (독립기념관 책임연구위원)의 초청 강연이 있었다. 2016년 11월에는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이한응 묘는 용인시의 향토유적 제49호로 지정되어 있다.
3. 2. 묘소
참조
[1]
웹사이트
"[기자수첩]115년 전 이한응 열사가 이루지 못한 꿈, 한반도 중립화 방안"
https://mobile.newsi[...]
2020-08-12
[2]
웹사이트
London landmark of key diplomat forgotten
https://koreajoongan[...]
2022-02-15
[3]
웹사이트
"한국 독립 지켜야 러·일 견제" … 영국 물고늘어진 이한응
https://www.joongang[...]
2015-08-12
[4]
웹사이트
"[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22. 조국의 운명을 죽음으로 알린 이한응 열사"
http://www.kyeonggi.[...]
2019-07-25
[5]
웹사이트
https://www.korea.ne[...]
[6]
간행물
Yi Han Eung - The Death of a Diplomat
2015
[7]
논문
An Unfulfilled Expectation: Britain's Response to the Question of Korean Independence, 1903-1905
http://ijkh.khistory[...]
2018-02-27
[8]
웹인용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
2022-03-31
[9]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한응
http://encykorea.aks[...]
[10]
서적
역사속의 오늘 1
생각의 나무
2005
[11]
서적
한국통사
범우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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