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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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민영환은 1861년 서울에서 태어난 대한제국의 문신이자 개화파 인물이다. 1878년 문과에 급제하여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1896년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특명전권공사로 참석하여 서구 문물을 접했다. 귀국 후 독립협회를 후원하고 개혁을 시도했으나, 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하여 1905년 자결했다. 그의 유서는 대한제국 국민들에게 독립의 의지를 강조하며, 그의 죽음은 이후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사후 의정대신으로 추증되었으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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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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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민영환 |
한자 | 閔泳煥 |
로마자 표기 | Min Yeonghwan |
아명 | 문약(文若) |
호 | 계정(桂庭) |
시호 | 충정(忠正) |
출생일 | 1861년 8월 7일 |
출생지 | 서울, 조선 |
사망일 | 1905년 11월 30일 |
사망지 | 서울, 대한제국 |
국적 | 대한제국 |
직업 | 한국의 정치인 및 장군 |
종교 | 유교(성리학) |
형제 | 동생: 민영찬 |
친척 | 백부: 민승호, 고모: 명성황후, 양조부: 민치록, 친조부: 민치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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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직 | |
군부대신 | 임기 시작: 1896년 11월 12일 임기 종료: 1897년 1월 19일 전임: 이윤용 (1855) 후임: 심상훈 (대행) |
내부대신 | 임기 시작: 1904년 3월 1일 임기 종료: 1904년 3월 8일 전임: 심상훈 후임: 이근명 |
학부대신 | 임기 시작: 1904년 3월 8일 임기 종료: 1904년 5월 25일 전임: 이용직 후임: 이재극 |
탁지부 대신 | 임기 시작: 1897년 12월 1일 임기 종료: 1898년 12월 1일 |
군사 경력 | |
군 계급 | 중장 |
복무 기간 | 1896년–1905년 |
훈장 | |
훈장 | 금척대훈장 (사후 추서) 이화대훈장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
참고 자료 |
2. 생애
민영환은 1861년 서울 견지동에서 태어나 1878년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요직을 거쳤다. 임오군란으로 생부 민겸호가 살해되자 잠시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1886년 이조참의로 복귀하여 도승지, 이조참판, 예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 친일 내각에 반대하여 낙향하였다가, 1896년 특명전권공사로 러시아 제국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하면서 서구 문물을 접하게 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 유럽을 방문하며 개화 사상을 갖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 제도 개혁과 민권 신장을 고종에게 상소하였으나, 전제 왕권을 추구하던 고종은 군사 제도 개편만을 채택하였다.
1896년 독립협회를 적극 후원하며 근대적 개혁을 시도하다 민씨 일파의 반감을 사기도 했지만, 이후 다시 관직에 복귀하여 참정대신, 훈1등 태극장 수여,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크게 반발하여 조병세와 함께 상소를 올렸으나 실패하고, 11월 30일 "마지막으로 우리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유서 전문은 다음과 같다.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1861년 ~ 1882년)
1861년 서울 견지동에서 병조 판서를 지낸 민겸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여흥 민씨 가문 출신으로, 친아버지는 민겸호였으나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 민태호에게 양자로 입적되었다.[98] 1878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임오군란 때 생부 민겸호가 살해되자[1] 거상을 위해 사직하였다가, 1886년 이조참의로 제수되면서 다시 정계에 복귀하였다. 1881년 동부승지, 1882년 성균관 대사성에 오르는 등 민씨 척족의 총아로서 빠른 승진을 거듭하며 요직을 거쳤다.[98]
1885년 종이품에 승진한 후, 이듬해까지 친척인 민응식과 함께 러시아 제국과 접촉하여 조로 비밀 협정 체결에 힘썼다. 1887년 정이품에 승진하여 형조, 예조, 병조 판서, 독판내무부사 등을 역임하고, 1891년 종일품에 승진하였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천일책(千一策)』이라는 정책론을 저술하여 여러 외국의 움직임을 견제하고 군비 확충을 주장하였다.
2. 2. 정치 활동과 개혁 노력 (1886년 ~ 1895년)
1886년 이조참의로 다시 정계에 복귀하여 도승지, 이조참판, 예조판서, 형조판서, 한성부윤, 독판내무부사 등의 관직을 지냈다.[98] 1895년 8월에는 주미전권공사에 임명되었으나, 이해 10월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부임하지 못하고 사직했다.[98] 곧이어 친일내각이 들어서자 낙향하여 두문불출했다.[98]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천일책(千一策)』이라는 제목의 정책론을 저술하여 여러 외국의 움직임을 견제하고 군비 확충을 주장하였다.
1895년 출판된 그의 한국 여행 회고록에서 화가 A. 헨리 새비지 랜도어는 민영환(Prince Min-Young-Hwan)으로 알려진 민씨와의 인터뷰와 초상화 작업을 기록하고 있다.[8] 당시 민씨는 육군 총사령관이었으며, 화가에게 예의를 갖추고 선물을 제공했다.[8]
2. 3. 유럽 시찰과 개화 사상 (1896년 ~ 1897년)
1896년 민영환은 특명전권공사로 러시아 제국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일본, 미국, 영국 등지를 거치면서 서구 문명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9][10][11][12][13][14][15][16][17][18][19][20]
니콜라이 2세를 알현하여 한국 국왕의 친서를 전달한 민영환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외무장관 알렉세이 로바노프-로스토프스키를 만나 다음과 같은 5가지 요청을 전달했다.[21][22]
요청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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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군이 신뢰할 수 있는 병력으로 훈련될 때까지 국왕 보호를 위한 경비대 파견. |
군사 교관 파견. |
고문 파견: 국왕 곁에 있을 왕실 고문 1명, 정부 고문 1명, 광산, 철도 등을 담당할 고문 1명. |
러시아와 조선 간에 양국에 유익한 조건으로 전신 연결 설치 – 전신 전문가 파견. |
일본 빚을 청산하기 위한 300만 엔의 차관 제공. |
로바노프는 영국이나 독일과의 갈등을 우려하여 경비대 제공은 어렵지만, 경제 교관 파견, 전화선 설치, 군사 사찰단 파견에는 동의했다.[23] 비록 러시아가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민영환은 13명의 러시아 군사 교관을 한국으로 데려왔다.[24] 이들은 3년 계약직이었다.[24] 이후 민영환은 러시아 시설들을 시찰하고, 1896년 10월 21일 고종에게 니콜라이 2세의 친서를 전달했다.[25]
귀국 후 독립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민영환은 유럽 여행이 자신을 새 사람으로 만들었으며, 한국 개혁에 헌신하겠다고 밝혔다. 독립신문은 민영환이 러시아와의 우호 관계 강화, 한국 독립 선전, 러시아 교관 유치라는 세 가지 공적을 세웠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윤치호는 민영환이 고문, 전신 연결, 차관에 대한 동의를 얻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고 전했다.
1897년 민영환은 영국·독일·프랑스·러시아·이탈리아·오스트리아-헝가리 6개국 특명전권공사로 다시 유럽에 파견되었다.[31] 그는 빅토리아 여왕의 다이아몬드 쥬빌리에 참석하고, 프랑스 및 독일과 비밀 조약을 체결하여 한국의 자주권을 보호하려 했다.[32] 그러나 러시아 외무장관은 민영환의 요청에 동의하지 않았고, 영국 정부도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결국 민영환은 외교적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1897년 7월 유럽을 떠나 미국으로 향했다.[33] 한국 정부는 민영환의 실패에 분노하여 재정 지원을 중단했고, 고종은 그를 해임했다.[34]
잦은 해외 순방으로 서양 문물에 일찍 눈을 뜨게 된 민영환은 개화 사상을 실천하고자 유럽 열강 세력의 제도를 모방하여 정치 제도를 개혁하고 민권 신장을 꾀할 것을 고종에게 상소했다. 그러나 이는 전제왕권을 추구하던 고종의 성향과 반대되는 것이었고, 그의 상소는 군사 제도 개편만이 채택되었다. 이에 고종은 원수부(元帥府)를 설치, 육군을 통할하게 하였다.
2. 4. 대한제국 시기 (1897년 ~ 1905년)
1896년 특명전권공사로 러시아 제국의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하였는데, 이때 그는 일본, 미국, 영국 등지를 거치면서 서구 문명을 처음으로 접하게 된다.[98]귀국 후 의정부찬정(贊政), 군부 대신을 지낸 다음, 1897년(광무 1년) 또다시 영국·독일·프랑스·러시아·이탈리아·오스트리아-헝가리 6개국에 대한 특명전권공사로 발령을 받고 외유하였다. 잦은 해외여행으로 서양 문물에 일찍 눈을 뜨게 된 민영환은 개화 사상을 실천하고자 유럽 열강 세력의 제도를 모방하여 정치 제도를 개혁하고, 민권 신장(民權伸張)을 꾀할 것을 고종에게 상소를 올렸다. 다만 이는 전제왕권을 추구하던 고종의 성향과 반대되는 것이었고 그의 상소는 군사 제도 개편만이 채택되어, 고종은 원수부(元帥府)를 설치, 육군을 통할하게 하였다.[98]
1896년 독립협회를 적극 후원하였고, 보다 근대적인 개혁을 시도하려다가 수구 세력인 민씨 일파에게 반감과 미움을 사게 되어 요직에서 파직되기도 하였다. 그 후 그는 다시 관직에 복귀하여 참정대신(參政大臣)등을 지내고, 훈1등(勳一等)과 태극장(太極章)을 받았다. 그리고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지냈다.[98]
1897년 유럽 6개국 특명전권대사, 탁지부 대신, 장례원경, 표훈원 총재 등을 역임하면서 주요 관료로 겸임했다. 또한 대한제국 반포하기 이전의 여러 공적을 인정받아, 대한제국 선포 후 태극장(太極章)을 수여받았다.[98]

민영환은 친일적인 대신, 관료들과 수차례 대립하였고, 일본 제국의 내정 간섭을 성토하다가 주요 요직에서 밀려나게 된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의 체결을 크게 개탄하며, 조병세와 같이 을사늑약 반대 상소를 수차례 올렸으나 일제 헌병들의 강제 진압에 의해 실패하게 되고, '마지막으로 우리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유서를 국민들에게 남기고 11월 30일 자결하였다.[98]
민영환은 한국으로 돌아온 후 독립협회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으며, 독립협회의 신문인 『독립신문』(The Independent)과의 인터뷰를 했다.[35] 유럽으로의 두 차례 외교 여행을 통해 광무개혁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35] 그러나 그의 수많은 개혁 요구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실행된 것은 일부(대부분 군사 관련)에 불과했다.[36] 박정양 내각이 구성된 후, 궁내부 특별 관리로 한국 정계에 복귀했다.[37] 그 후, 1898년 10월 12일 군부와 내무대신으로 승진하여 권력을 잡았다.[38] 1898년 10월 14일 모든 장교와 병사들에게 군복 착용을 명령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군사 개혁을 시작했다.[39] 1898년 11월 5일, 서양 문화를 수입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며 흥화학교를 설립했다.[40] 1898년 12월 4일, 대한제국 중추원 참정이 되었고,[41] 1898년 12월 20일에는 농상공부대신이 되었다.[42] 세금이 징수되지 않은 이유는 지방 관리들의 부패 때문이라고 단언하며 지방 관리들의 부패를 막으려고 노력했다.[43] 그러나 황제가 한국 개화파를 탄압하기 시작하면서, 개화파 정치인이었던 민영환은 자신의 지위가 위협받는 것을 보았다. 권력에서 물러나 보수파 정치인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44] 1899년 3월 15일, 미국 공사로 임명되었다.[45] 1900년 2월 19일, 육군부 회계장이 되었고,[46] 육군부 회계장으로서의 공로로 태극장 1등을 받았다.[47] 1900년 8월 2일부터 군사경찰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48] 8월 9일에는 표훈원장으로 임명되었다.[49]
당시 민영환은 계속해서 개혁을 지지하는 세력을 지지했다. 예를 들어 1902년에 이동휘와 함께 개혁당을 창당했다.[50] 개혁당은 대한제국의 개혁 세력으로서 독립협회를 계승했다.[51][52]
1904년 3월 8일 교육부대신이 되었다.[53] 교육부대신으로서 방치된 교육부를 비판했다. 공립학교 졸업생과 사립학교 졸업생 중에서 정부 관리를 임명하고, 시험을 통해 관직에 진출해야 한다는 제안을 통해 교육에서 한국 관료제를 혁신하려는 노력을 시작했다. 민영환이 가져오고자 했던 개혁은 3년 또는 4년에 걸친 점진적인 변화가 될 예정이었다. 또한 그는 모든 어린이들이 학교에 다닐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5월 25일, 교육부대신직에서 사임했고,[54] 1904년 5월 26일 육군부 회계장으로 임명되었다.[55] 1904년 한일협약에 대한 그의 반대는 그를 비교적 덜 중요한 직책인 춘추관장으로 임명되게 만들었다.[36] 친일 내각에 반대하며, 한직을 계속 수행했고;[1] 또한 친일 단체인 일진회와 갈등을 겪었다.[56] 1905년 3월 26일, 조병식의 사임에 따라 총리대신으로 임명되었다.[1][57][58] 총리대신으로서 경찰력을 동원하여 만연한 불법 무속 행위를 제한했다.[59] 그러나 1905년 4월 4일 해임되었고,[60] 6월 24일 춘추관장이 되었다.[61] 친일 내각에 의해 정치적으로 탄압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독립의 메시지를 되풀이했다.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한규설을 차기 총리대신으로 추천했다.[1] 이에 대한 대응으로 민영환과 한규설은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기 위해 이승만을 미국으로 보냈다.[64]
1905년 11월 17일, 일본은 한국에 을사조약을 강요하여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조약 체결 3일 후 그 소식을 들은 민영환은 "몇 번이나 기절하고 피를 토했다"고 한다. 고종황제에게 조약을 무효화하고 을사오적으로 널리 알려진 조약에 서명한 5명의 한국 관리들을 처형할 것을 간청했다.[62] 황제가 오적에 대한 처벌을 불법으로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명령을 따르지 않고 1905년 11월 29일 다시 요청했다.[65] 그와 함께 황제에게 요청한 조병세는 덕수궁 대한문에서 황제의 답을 기다렸다.[63] 일본 군사경찰은 민영환과 조병세를 대한제국 최고 법원인 평리원에 투옥했다.[1] 석방된 후, 자결해야 함을 깨달았다.[64] 이원식의 집으로 돌아가 작은 칼로 자결했다.[65] 그날 밤, 두 번 자살을 시도했는데, 첫 번째 시도는 칼이 너무 짧아서 실패했다. 두 번째 시도가 성공적이었다. 그의 사망 후, 그의 주머니에서는 중국,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대표에게 보낸 명함 뒷면에 동일한 메시지 5장이 발견되었는데, 그는 이들 강대국에 한국 내부의 진실을 알려 달라고 간청했다. 그는 또한 한국 백성을 향한 마지막 메시지를 남겼는데, 그 메시지에서 그는 동포들이 단결된 의지와 정신을 강화하고 온갖 노력을 다해 학문을 닦아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한다면 저승에서 도울 것을 약속했다. 정부로부터 국장을 치렀는데, 약 6,000~7,000명이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고,[66] 수천 명의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윤치호는 민영환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민영환이 자결하였다. 차라리 싸우다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의 침착한 용기에 경의를 표한다. 그의 애국심에 경의를 표한다. 그의 영웅적인 죽음에 경의를 표한다. 그의 죽음은 그의 생애보다 더 큰 공을 세울 것이다."[67]
여러 유럽 국가들을 방문하여 군사 시스템을 목격한 후, 유럽인들로부터 대한제국군을 기동화할 최적의 인물로 여겨졌다.[78] 그러나 군부대신에 임명된 후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79] 1896년 군대 현대화를 위해 러시아 군사 교관들을 초빙했고, 러시아에서 돌아온 직후 군부대신에 임명되었다.[79] 그러나 러시아 장교들은 민영환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조선의 군사 시스템을 현대화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군사 개혁을 추진하려 했다. 대한제국 육군사관학교 설립에 참여했고, 친위대 증강, 시위대 창설, 군악대 설립 및 무장청 설립에 기여했다.[35] 1904년, 군제 개혁의 편찬자 중 한 명으로 임명되었지만,[80] 이는 대한제국군의 성장을 견제하기 위한 일본 제국의 군사 개혁이었다.[81][82]
대한제국의 국가 가사를 지었다. 황제, 황태자, 왕자의 깃발을 제정하여 황제의 권위를 높이려고 노력했다. 동시에 황제의 권위를 약화시킨 한국 의회인 중추원을 지지했다.[35] 1897년 10월 13일 독립협회의 항의가 이어진 후 박정양과 민영환이 이끄는 정부가 수립되면서, 정부는 의회 설립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황제는 민영환과 같은 개혁을 주장하는 관리들을 견제하기 위해 친러시아적인 보수 관리들을 요직에 배치했다. 민영환, 박정양, 그리고 독립협회 회원들의 노력의 결과로, 제대로 된 의회인 중추원이 설립되었다.[83]
2. 5. 을사늑약과 자결 (1905년)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민영환은 크게 개탄하며 조병세와 함께 을사늑약 반대 상소를 여러 차례 올렸으나, 일본 헌병들의 강제 진압으로 실패하였다.[98] 그는 11월 30일 "마지막으로 우리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98]을사조약 체결 소식을 듣고 민영환은 "몇 번이나 기절하고 피를 토했다"고 한다. 그는 고종에게 조약 무효화와 을사오적 처형을 간청했다.[62] 황제가 오적에 대한 처벌을 불법으로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민영환은 1905년 11월 29일 다시 요청했다.[65] 조병세와 함께 덕수궁 대한문에서 황제의 답을 기다렸으나,[63] 일본 군사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대한제국 최고 법원인 평리원에 투옥되었다.[1]
석방 후, 민영환은 자결을 결심하고 이원식의 집으로 돌아가 작은 칼로 자결했다.[65] 그는 두 번 자살을 시도했는데, 첫 번째는 칼이 너무 짧아서 실패했고, 두 번째 시도가 성공적이었다. 그의 주머니에서는 중국,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대표에게 보낸 명함 뒷면에 동일한 메시지 5장이 발견되었는데, 그는 이들 강대국에 한국 내부의 진실을 알려 달라고 간청했다.
민영환은 사후 의정대신의 직위와 “충정공(忠政公)”이라는 시호를 추증받았다. 약 6,000~7,000명이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고,[66] 수천 명의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윤치호는 "민영환이 자결하였다. 차라리 싸우다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의 침착한 용기에 경의를 표한다. 그의 애국심에 경의를 표한다. 그의 영웅적인 죽음에 경의를 표한다. 그의 죽음은 그의 생애보다 더 큰 공을 세울 것이다."라고 썼다.[67]
3. 사후
민영환은 사망 후 의정대신(議政大臣)으로 추증되었고, 대한제국 고종 사후 고종 황제의 능원에 배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1] 민영환선생묘는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 544-4에 있으며,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친필로 쓴 묘비가 있다. 1973년 7월 10일 경기도의 기념물 제18호로 지정되었다.
1994년 서울시 견지동에 민영환이 자결할 당시 살던 집터 표석이 설치되었다.[99] 1946년 10월 1일 서울시에서는 시호(諡號)인 충정(忠正)을 따서 충정로라는 동명을 제정했다.
조병세[68] 등 일부 관리들과 그의 인력거꾼은 민영환의 죽음 이후 자결하였다.[69]
민영환은 사후 한국 관료 체계에서 최고위 품계인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로 추서되었다.[70] 고종은 그에게 시호 "충문(忠文)"[71]을 추증하고 국가에 대한 공훈을 기려 금척훈장을 수여하였다.[72] 그의 시호는 1905년 12월 3일 "충정(忠正)"으로 개정되었다.[73] 민영환은 용인에 안장되었다.[1] 1921년 2월 16일 종묘(서울)에 배향되었다.[74]
대한민국 독립 이후, 민영환은 1945년 12월 애국지사 중 한 명으로 기념되었다.[75] 1952년 한국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시된 설문 조사에서 세종대왕, 이순신과 함께 가장 존경받는 역사적 인물 중 한 명으로 꼽혔다.[76]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민영환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하였다.[1]
4. 이승만과의 관계
1904년 한성부 감옥에 수감 중인 이승만에게 석방을 대가로 고종의 밀사를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에게 제출하게 했다. 이 때 이승만은 1904년 12월 31일 워싱턴에 도착하자마자 민영환이 써준 소개장을 들고 아칸소 주 상원의원 휴 A. 딘스모어를 찾아갔는데, 딘스모어는 과거 서울 주재 미국 공사로 재직했을 때 민영환과 인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00]
딘스모어 의원은 이승만에게 당시 미 국무장관이자 중국에 관한 문호 개방 정책론자로 유명한 존 헤이와의 면담을 주선해주었고, 국무성에서 30분간 면담하며 호의적인 답변을 끌어냈으나, 헤이 국무장관은 얼마 뒤 지병으로 사망하였다.[100] 이승만은 민영환과 한규설 앞으로 상세한 보고서를 작성하였고, 일본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딘스모어를 통해 외교 문서 우편으로 주조선 미 공사에게 발송해 전달하였다.[100] 또한 이 보고서에서 이승만은 주미 조선 공사관 직원들과 장시간에 걸친 면담을 한 후, 신태무 대신에 김윤정 참사관을 공사로 임명할 것을 민영환에게 건의하였고, 얼마 후 신 공사는 본국으로 송환되었다.[100]
1905년 8월 10일, 민영환은 결과를 떠나 애국심을 가지고 노력해준 이승만과 윤병구에게 300USD를 보내주었다.[100]
이후 대한민국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그의 애국 충정을 기억하며 1955년 11월 30일에 있었던 50주기 추념식에서 다음과 같은 추념사를 남겼다.[101]
'''고(故) 민충정공 50주기 추념식 추념사'''
(중략)
우리나라의 4천 년 역사에 제일 못되게 쇠폐한 역사는 우리나라 이조 말년에 된 것이니 (중략) 이때에는 우리나라의 관민이 어떻게 못되게 했던지 우리 4천 년 역사에 처음으로 우리나라를 이웃 나라에 뺏기고 40년 동안을 우리나라 사람이 노예가 되는 참상을 당했으니 (중략) 지금 우리는 우리 민국이 다시 일어나서 또 빛나는 역사를 만들고 있으니 이것은 우리 민중이 다 새 민중이 되어서 (중략) 다 각각 내 목숨을 바쳐서 우리나라를 영광스럽게 해야 된다는 정신과 목적을 가지고 일심합력해서 해나가는 결과인 것이다.
그런데 나라가 쇠망할 적에는 정부 당국과 민간 전체가 아무리 부패한 중에서라도 충신과 의사(義士)가 나서 욕스러운 역사에 한 빛난 점이 되게 만드는 것이니 (중략) 이조 말년에는 민충정공(閔忠正公)이 있어서 욕스러운 역사에 빛난 점을 끼쳐 놓았던 것이다. 그때 4천 년 역사에 제일 욕스러운 기록 중에 제일 빛난 기사를 두어서 천추에 자랑할 만한 기록이 있게 한 것은 우리나라의 민충정공인 것이다.
(중략)
망국 시대에 당해서 나라를 구하는데 목숨을 내놓고 싸운 사람이 어찌 민충정공 한 분이리요마는 제때에 자기 손으로 자기 목숨을 공헌해서 우리나라의 혼을 경성(警醒)하고 깨우치게 한 것은 이 한 분의 공적이며 우리가 모두 살아서 끝까지 싸운 사람들은 고초와 희생을 이 분보다 더 했을지라도 충성의 직책을 다 했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요, 오직 목숨을 다한 자가 충의를 행한 것으로 알게 되나니 민충정공은 우리나라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 역사에 그 혁혁한 이름이 높은 자리를 점령하고 또 이 분의 충성을 다한 결과를 우리 한국 정신이 더욱 굳건하며 강대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민충정공의 대의를 행한 50주년 기념에 대해서 우리 모든 민중은 그 충의를 치하하여 언제든지 나라가 위태할 때 우리도 이 분의 뒤를 따르고 우리 자손까지라도 다 이 정신을 지켜서 민충정공의 이름이 영광스럽게 들어나서 우리 나라가 부강한 나라가 되고 영광을 길게 누리기를 바라는 바이다.
5. 평가
- 백부 민승호와 민영환은 시호가 충정공으로 같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민충정공이라 하면 민승호보다는 민영환을 가리킨다.
- 이승만 대통령은 민영환의 애국 충정을 기억하며, 50주기 추념사에서 다음과 같이 그를 기렸다.[101]
- 喬木世臣중국어으로 국운을 맡았던 민영환은 국가 개양 시대에 유신 방면으로 부국강병을 이루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임군이 어둡고 국운이 불행하여 유신당(維新黨)의 모든 지도자들과 백방으로 노력했음에도 결국 실패하였다. 큰 집이 무너지는 것을 한 나무로 바로잡지 못하듯이, 종사(宗社)가 없어지고 고국 강산이 남의 손에 넘어갈 때 민영환은 혼자 골방에서 자결하여 절의를 세웠다. 이는 그가 우리나라 정신을 혼자서 표명한 것이다.
- SBS 다큐멘터리 백만불 미스터리 제작진의 저서 《하룻밤, 미스터리를 찾아서》(더난비즈)에 따르면, 민영환이 일본의 식민지가 될 위험에 처한 조선을 걱정하며 자결한 장소에서 대나무가 자랐다고 전해진다. 이 대나무는 혈죽이라고 불린다.[102] 당시 일본에서는 항일운동이 번질 것을 우려하여 혈죽이 조작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고 조사하였으며, 민영환의 후손들에 의해 보관되어 내려왔다.
- 호레이스 뉴턴 앨런(Horace Newton Allen)은 민영환에 대해 "선한 의도를 가졌지만, 나약하고 우유부단했다."라고 평가했다.[89]
- 윌러드 디커먼 스트레이트(Willard Dickerman Straight)는 민영환을 정의를 위해 죽은 의로운 사람으로 묘사했다.[90]
- 민영환을 기리는 동상은 현재 충정로 사거리 근처의 교통섬에 세워져 있다.[91] 이 동상은 1957년 안국동 사거리에 있었으나 도로 확장으로 인해 1970년 창덕궁 돈화문 근처로 옮겨졌다. 주변 환경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아 2003년 조계사 옆 중앙우체국 근처로 옮겨졌으나, 2022년까지 방치되었다고 한다.[92]
6.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조부 | 민치구(閔致久) | |
조모 | 전주 이씨(全州李氏) | 통덕랑 이옥(李火+玉)의 딸, 경원군 이하전의 고모 |
백부 겸 양부 | 민태호(閔泰鎬) | 생부 민겸호의 맏형 |
중부 | 민승호 | 생부 민겸호의 둘째 형, 민치록에게 입적 |
고모 | 여흥부대부인 민씨 | |
고숙 | 흥선대원군 | |
고종사촌형 | 고종 | |
생부 | 민겸호(閔謙鎬) | 1838년 ~ 1882년 |
생모 | 달성 서씨(達城徐氏) | 1837년 ~ 1885년 |
친동생 | 민영찬(閔泳瓚) | 1873년 ~ 1948년 |
부인 | 박수영(朴秀永) | 반남 박씨, 박용훈의 딸, 1875년 ~ 1947년 |
장남 | 민범식(閔範植) | 1899년 ~ 1934년 |
손자 | 민병철(閔丙哲) | |
손자 | 민병기(閔丙岐) | 1927년 ~ 1986년, 前 고려대학교 교수 |
손자 | 민병일(閔丙逸) | |
차남 | 민장식(閔章植) | 1904년 ~ 1961년 |
손자 | 민병덕(閔丙德) | |
손자 | 민병진(閔丙鎭) | |
삼남 | 민광식(閔光植) | 1905년 ~ 1961년 |
손자 | 민병섭(閔丙燮) | |
손자 | 민병건(閔丙建) | |
7촌 조카 | 민원식 | 민영환의 6촌 형제인 민영철의 3남, 김규식의 보좌역[103] |
13촌 숙모 겸 고종사촌형수 | 명성황후 민씨 | |
14촌 여동생 | 순명효황후 민씨 |
7. 기타
- 백부 민승호의 시호도 그의 시호와 같은 충정공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민충정공이라 하면 민승호보다는 민영환이 더 많이 지목된다.
- 1904년 한성부 감옥에 수감 중인 이승만에게 석방의 대가로, 고종의 밀사를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에게 제출하게 했다. 이 때 이승만은 1904년 12월 31일 워싱턴에 도착하자마자 민영환이 써준 소개장을 들고 아칸소 주 상원의원 휴 A. 딘스모어를 찾아갔는데, 그는 과거 서울 주재 미국 공사로 재직했을 때 민영환과 인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00] 딘스모어 의원은 이승만에게 당시 미 국무장관이자 중국에 관한 문호 개방 정책론자로 유명한 존 헤이와의 면담을 주선해주었고, 국무성에서 그와 30분간 면담을 하며 호의적인 답변을 끌어냈으나, 헤이 국무장관은 얼마 뒤 지병으로 사망하였다.[100] 이승만은 민영환과 한규설 앞으로 상세한 보고서를 작성하였고 일본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딘스모어를 통해 외교 문서 우편으로 주조선 미 공사에게 발송해 전달하였다.[100] 또한 이 보고서에서 이승만은 주미 조선 공사관 직원들과 장시간에 걸친 면담을 한 후, 신태무 대신에 김윤정 참사관을 공사로 임명할 것을 민영환에게 건의하였고 얼마 후 신 공사는 본국으로 송환되었다.[100]
- 1905년 8월 10일, 민영환은 결과를 떠나 애국심을 가지고 노력해준 이승만과 윤병구를 치하하며 300USD를 보내주었다.[100] 그의 애국 충정을 기억하고 있던 이승만 대통령은 1955년 11월 30일에 그의 50주기 추념식 추념사에서 그를 기리었다.[101]
- SBS 다큐멘터리 백만불 미스터리 제작진의 저서인 《하룻밤, 미스터리를 찾아서》(더난비즈)에 따르면, 민영환이 일본의 식민지가 될 위험에 처한 조선을 걱정하며 자결한 장소에서 대나무가 자랐다고 전해진다. 이 대나무를 혈죽이라고 부른다.[102] 당시 일본에서는 항일운동이 번질 것을 우려하여 혈죽이 조작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고 조사하였으며, 민영환의 후손들에 의해 보관되어 내려왔다.
- 1984년 북한 영화 돌아올 수 없는 사절(An Emissary of No Return)에서 최장소가 연기했다.
- 2012년 영화 가비(Gabi)에서 조승연이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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