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홀리니스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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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홀리니스교회는 1897년 나카다 주지가 미국에서 성결을 체험하고 귀국하여 시작한 성결 운동에서 비롯되었다. 1901년 중앙복음전도관과 도쿄 성서학원을 설립하고, 1917년 동양선교회 일본홀리니스교회로 교파를 형성하여 나카다 주지가 초대 감독이 되었다. 사중복음을 내세우며 성장했으나, 1933년 나카다의 재림 신앙에 대한 논쟁으로 분열되어 일본성교회와 키요메교회로 갈라졌다. 1941년 태평양 전쟁 중 정부의 탄압으로 해산되었으며, 해방 후 일본홀리니스교단, 기독성협단 등의 교단으로 재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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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는 종교적, 사회적 목적으로 많은 사람이 모이는 집회를 뜻하는 용어로, 교회나 종교 단체의 최고 의결 기관, 국제 기구의 주요 의사결정 기구, 국가 및 지방 의회의 명칭 등으로 사용되며, 신약성경에서는 신앙 공동체 전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 성결 운동 - 대한기독교나사렛성결회
일본홀리니스교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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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교파 | 복음주의・성결교회의 원류 중 하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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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 |
주요 인물 | 나카다 주지 나카다 가쓰코 나카다 아야메 나카다 우고 사사오 데쓰사부로 아키야마 유고로 찰스 카우만 레테 카우만 어니스트 킬본 야마자키 데이지 구루마다 슈지 모리 고로 노베지 덴마 미타니 다네키치 요네다 유타카 이치미야 마사키치 스가노 에이 오하라 주소 오하라 스즈코 고이데 도모하루 고이데 시노부 가나모리 미치노리 와타나베 젠타 |
관련 항목 | |
관련 항목 | 일본 홀리네스 교회 |
2. 역사
1897년, 일본감리교회의 전도사였던 나카다 주지(中田重治일본어)는 미국 무디성서학원에서 성결을 체험하고 귀국하여 순회 전도를 하였다.[1] 1901년 찰스 카우만 부부와 협력하여 도쿄 간다 진보초에 중앙복음전도관 및 성서학원을 설립하였다.[1]
이후 어니스트 길보른, 사사오 데쓰사부로(笹尾鉄三郎일본어) 등이 합류하여 동양선교회(1905년)를 설립하였다.[1] 1917년에는 동양선교회 일본홀리니스교회를 설립하고, 나카다 주지가 초대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초교파 선교단체에서 정식 교파로 전환되었다.[1]
일본홀리니스교회는 성결 운동의 핵심 교리인 사중복음(중생, 성결, 신유, 재림)을 내세우며 세력을 넓혔다. 1932년에는 대규모 부흥회(홀리니스리바이벌)을 통해 교회 439개소, 교인 수 19,523명, 교역자 수 428명으로, 당시 일본 내 개신교회 중 5대 교파 중 하나가 되었다.
1933년, 나카다 주지가 재림신앙에 경도되어 일유동조론을 주장하면서, 성서학원의 다섯 교수 (구루마다 아키지, 요네다 유타카, 오하라 도사지, 쓰치야 겐이치, 이치노미야 세이키치)들과 신학적인 갈등이 발생했다. 이들은 교단의 임시총회에서 이 문제를 제기하며 해결을 시도했으나, 교단은 나카다를 지지하는 측과 다섯 교수의 입장을 지지하는 측으로 나뉘어 대립하게 되었다.
1936년, 감독 측과 위원 측은 협의를 통해 분리되었다. 이로써 일본홀리니스교회는 소멸되고, 일본성교회(다섯 교수 측, 세이파)와 키요메교회(나카타 측, 키요메파)로 분리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홀리니스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기로 합의하고, 나카다 주지 감독과 구루마다 아키지 목사가 이에 서명했다.[2]
1941년 일본이 태평양전쟁에 돌입하면서, 일본 내 개신교 교단들은 정부의 압력을 받았다. 같은 해, 이들 교단은 일본기독교단을 조직했다. 일본성교회는 제6부, 키요메교회는 제9부로 이 교단에 편입되었다.
1942년, 일본 정부는 재림 신앙을 문제 삼아 홀리니스계 교회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ホーリネス弾圧事件일본어, ja) 이로 인해 홀리니스계 교회들은 해산되었고, 전도자들은 해직되거나 투옥되었다. 스게노 에이(菅野鋭일본어) 목사와 같이 순교하는 사람도 있었다.
2. 1. 초기 역사 (1897년 ~ 1917년)
1897년, 일본감리교회의 전도사였던 나카다 주지(中田重治일본어)는 미국 무디성서학원에서 성결을 체험하고 귀국하여 순회 전도를 하였다.[1] 1901년 찰스 카우만 부부와 협력하여 도쿄 간다 진보초에 중앙복음전도관 및 성서학원을 설립하였다.[1]이후 어니스트 길보른, 사사오 데쓰사부로(笹尾鉄三郎일본어) 등이 합류하여 동양선교회(1905년)를 설립하였다.[1] 1917년에는 동양선교회 일본홀리니스교회를 설립하고, 나카다 주지가 초대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초교파 선교단체에서 정식 교파로 전환되었다.[1]
2. 2. 성장과 부흥 (1917년 ~ 1933년)
1897년 나카다 주지는 미국에서 무디성서학원 재학 중 성결을 체험하고 일본에 귀국하여 순회 전도를 하였다. 1901년 찰스 카우만, 레티 카우만 부부와 제휴하여 도쿄 간다 진보초에 중앙복음전도관과 1902년 성서학원을 개설한 것이 일본홀리니스교회의 기원이다.이후 어니스트 길보른과 사사오 데쓰사부로/笹尾鉄三郎일본어도 이 운동에 가세하여 구원과 성결의 복음 전파 및 전도자 양성에 힘썼다. 복음전도관의 운동을 통해 구원받고 성결케 되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젊은 전도자들이 독립하여 각지에 전도관 지부를 세웠고, 1905년에는 "동양선교회"(東洋宣教会일본어, ja)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1917년 복음전도관 전체를 아우르는 "동양선교회 일본홀리니스교회"가 세워지고, 각지의 전도관은 "교회"로 호칭이 바뀌며, 선교 단체에서 정식 교파로 변화되었다. 초대 감독은 나카다 주지가 취임했다.
일본홀리니스교회는 성결 운동의 핵심 교리인 사중복음(중생, 성결, 신유, 재림)을 내세우며 세력을 넓혔다. 1932년에는 대규모 부흥회(홀리니스리바이벌)을 통해 교회 439개소, 교인 수 19,523명, 교역자 수 428명으로, 당시 일본 내 개신교회 중 5대 교파 중 하나가 되었다.
2. 3. 분열 (1933년 ~ 1936년)
1933년, 나카다 주지가 재림신앙에 경도되어 일유동조론을 주장하면서, 성서학원의 다섯 교수 (구루마다 아키지, 요네다 유타카, 오하라 도사지, 쓰치야 겐이치, 이치노미야 세이키치)들과 신학적인 갈등이 발생했다.[2] 이들은 교단의 임시총회에서 이 문제를 제기하며 해결을 시도했으나, 교단은 나카다를 지지하는 측과 다섯 교수의 입장을 지지하는 측으로 나뉘어 대립하게 되었다.[2]1936년, 감독 측과 위원 측은 협의를 통해 분리되었다.[2] 이로써 일본홀리니스교회는 소멸되고, 일본성교회(다섯 교수 측, 세이파)와 키요메교회(나카타 측, 키요메파)로 분리되었다.[2] 이 과정에서 '일본홀리니스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기로 합의하고, 나카다 감독과 구루마다 목사가 이에 서명했다.[2]
2. 4. 탄압과 해산 (1941년 ~ 1945년)
1941년 일본이 태평양전쟁에 돌입하면서, 일본 내 개신교 교단들은 정부의 압력을 받았다. 같은 해, 이들 교단은 일본기독교단(일본어: 日本基督教団)을 조직했다. 일본성교회는 제6부, 키요메교회는 제9부로 이 교단에 편입되었다.1942년, 일본 정부는 재림 신앙을 문제 삼아 홀리니스계 교회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ホーリネス弾圧事件일본어, ja) 이로 인해 홀리니스계 교회들은 해산되었고, 전도자들은 해직되거나 투옥되었다. 칸노 에이(菅野鋭) 목사와 같이 순교하는 사람도 있었다.
3. 해방 이후
1941년 일본이 태평양전쟁에 돌입하면서, 일본 개신교 교단들은 정부 압력으로 일본기독교단(日本基督教団일본어, UCCJ)을 조직했다. 일본성교회(세이파)는 제6부, 키요메교회는 제9부로 참여했다. 1942년 정부는 재림 신앙을 이유로 홀리니스계/성결계 교회들을 박해, 해산시켰고, 전도자들은 해직, 투옥되거나 칸노 에이(菅野鋭일본어) 목사처럼 순교하기도 했다(홀리니스탄압사건(ホーリネス弾圧事件일본어, ja)).
전후 일본기독교단의 구 일본성교회 출신 일부는 일본 홀리니스 교단을 세워 독립했다. 키요메 교회는 나가타의 사망 이후 소멸되었으나, 기독성협단이 그 흐름을 이어갔다.
;나카다 감독 측 (키요메파)
;위원회 측 (세이파)
- 임마누엘종합전도단(イムマヌエル綜合伝道団일본어, 1945년 창설)
- 일본홀리니스교단(日本ホーリネス教団일본어, 1949년 창설)
- 일본복음교단(日本福音教団일본어, 1953년 창설)
- 일본복음교회연합(日本福音教会連合일본어, 1953년 창설)
- 일본성천기독교회연합(日本聖泉基督教会連合일본어, 1969년 창설)
- 웨슬리안홀리니스교단(ウェスレアン・ホーリネス教団일본어, 1992년 창설)
;연합교회
3. 1. 나카타 감독 측 (키요메파)
1946년 창설된 기독형제단, 1958년 창설된 기독성협단, 1996년 창설된 동양선교회키요메그리스도교회 등이 있다.3. 2. 위원회 측 (세이파)
임마누엘종합전도단(イムマヌエル綜合伝道団일본어, 1945년 창설), 일본홀리니스교단(日本ホーリネス教団일본어, 1949년 창설), 일본복음교단(日本福音教団일본어, 1953년 창설), 일본복음교회연합(日本福音教会連合일본어, 1953년 창설), 일본성천기독교회연합(日本聖泉基督教会連合일본어, 1969년 창설), 웨슬리안홀리니스교단(ウェスレアン・ホーリネス教団일본어, 1992년 창설) 등이 있다.3. 3. 연합교회
1949년 일본기독교단 내에 홀리네스의 무리(ホーリネスの群일본어) 그룹이 결성되었다.4. 한국 성결교회와의 관계
참조
[1]
서적
中田重治伝
[2]
서적
中田重治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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