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습대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전습대는 1867년 에도 막부가 서구 열강의 군사적 위협에 대응하고 군사력 강화를 위해 프랑스 군사 고문단의 지원을 받아 창설한 부대이다. 프랑스식 군사 훈련과 최첨단 장비를 갖추었으며, 보병, 포병, 기병 연대 교육을 실시했다. 도바·후시미 전투에 참전하고, 에도 개성 이후에는 오토리 게이스케를 따라 일부 병력이 탈주하여 신정부에 저항했다. 탈주한 부대는 북관동과 아이즈 지역에서 전투를 벌였으며, 1869년 하코다테 전쟁에서 패배하여 해산되었다. 한편, 전습대 일부는 신정부에 귀순하여 신정부군에 편입되기도 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전습대 | |
---|---|
부대 정보 | |
소속 국가 | 에도 막부 |
종류 | 보병 |
역할 | 막부 군대 |
규모 | 4개 대대 |
창설 | 게이오 원년 (1865년) |
해체 | 게이오 4년 (1868년) |
지휘관 | 고마이 곤고로 |
전투 | 보신 전쟁 도바 후시미 전투 고슈 가쓰누마 전투 |
일본어 정보 | |
일본어 명칭 | 伝習隊 (덴슈타이) |
로마자 표기 | Denshūtai |
2. 연혁
1867년(게이오 3년) 샤노아느, 브뤼네 등 프랑스 군사 고문단이 일본에 도착하여, 오구리 타다후미의 주도로 전습대가 창설되었다. 사관, 보병, 포병, 기병 연대 교육이 이루어졌으나, 병사로는 에도의 무뢰한들이 징병되었다. 전습대의 호령은 모두 프랑스어로 진행되었으며, 당시 최첨단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장비는 주일 공사 레옹 로슈를 통해 구입했으며, 나폴레옹 3세는 2개 중대 분의 야포, 산포를 전습대에 증정했다.[2]
오토리 케이스케 지휘 아래 전습대는 3개 대대로 편성되었다. 원래 4개 대대였으나, 오가와마치의 1개 대대가 막부 육군 제6연대에 흡수되었다.
대대 | 대장 |
---|---|
오테마에 제1대대 | 오가사와라 이와미노카미 |
오가와마치 제2대대 | 혼다 고시치로 |
삼번마치 제3대대 | 히라오카 이모사쿠 |
1868년 (게이오 4년) 1월 도바·후시미 전투에 전습대 일부가 막부 육군 소속으로 참전했다.[2]
같은 해 2월부터 4월까지 에도 개성으로 구 막부군 대부분이 신정부에 귀순했지만, 오토리 케이스케를 따라 전습 제1, 2대대 1100명 정도가 탈주했다. 이들은 5월 4일(4월 12일) 시모사 이치카와 고쿠다이에 집결하여 오토리 케이스케를 총독, 히지카타 토시조를 참모로 부대를 편성하고 북관동으로 향했다. 료소대, 관의대 등과 합류하여 병력을 늘리고 오야마에서 신정부군을 격파했으며, 우쓰노미야를 탈환했다.
모나리개 전투에서 큰 피해를 보았고, 홋카이도 마쓰마에 후타마타구치 전투에서 신정부군을 패주시켰다. 이후 고료카쿠로 이동하여 항전하다 1869년 6월 27일(메이지 2년 5월 18일) 에노모토 다케아키를 필두로 항복하여 해산되었다.
전습 제3대대를 중심으로 하는 1200명 가량은 신정부에 귀순, 2개 중대가 조슈번 산하 귀정대로 편입되어 보소반도 진무 활동과 오슈 전투에 참여했다.[3] 1869년 (메이지 2년) 하코다테로 출진하여 탈주 막부군을 공격했다.
2. 1. 창설 배경 (1867년)
1867년(게이오 3년) 1월 13일, 샤노아느(후의 프랑스 육군대신)와 브뤼네 등 15명의 프랑스 군사 고문단이 일본에 도착했다.[2] 이들은 막부의 간정봉행 오구리 타다후미의 주도로 전습대 창설을 지원했으며, 사관, 보병, 포병, 기병 연대 교육을 담당했다. 그러나 총을 드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 때문에 지원자가 적었고, 도박꾼, 야쿠자, 짐꾼, 마부, 소방대 등 에도의 무뢰한들이 징병되었다.[2]같은 시기, 가나가와, 하치오지, 후지사와 등 농가의 차남 이하를 모아 어료병을 편성했지만, 신원은 확실하고 품행은 방정했지만 병사로서의 기질에는 의문이 있었다. 이에 오토리의 제안으로 도박꾼이나 짐꾼 등을 모집했는데, 당시 다이묘들이 에도 저택에서 영지로 돌아가면서 저택 부속의 짐꾼이나 마부들이 많이 실업 상태였기 때문에 이들의 응모가 많았다. 모집 조건은 신체가 튼튼하고 신장이 5척 2촌 이상인 것뿐이었다.[2]
전습대의 호령은 모두 프랑스어로 진행되었으며, 당시 최첨단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2] 장비는 주일 공사 레옹 로슈를 통해 구입했으며, 나폴레옹 3세는 전습대에 2개 중대 분의 야포, 산포를 증정했다.[2]
2. 2. 프랑스식 군사 훈련 및 장비
전습대는 프랑스 군사 고문단의 훈련을 받았으며, 호령은 모두 프랑스어로 진행되었다. 당시 최첨단 장비를 갖추고 있었는데, 이는 주일 프랑스 공사 레옹 로슈를 통해 구입한 것이다. 나폴레옹 3세는 전습대에 2개 중대 분의 야포와 산포를 증정하기도 했다.[2]2. 3. 부대 편성
오토리 케이스케의 지휘 아래, 전습대는 3개 대대로 편성되었다. 원래는 4개 대대였으나, 오가와마치의 1개 대대가 막부 육군 제6연대에 흡수되었다. 막부 육군 보병대는 에도성 주변에 둔소를 두고 주둔했다.[2]대대 | 대장 |
---|---|
오테마에의 제1대대 | 오가사와라 이와미노카미 |
오가와마치의 제2대대 | 혼다 고시치로 |
삼번마치의 제3대대 | 히라오카 이모사쿠 |
2. 4. 보신 전쟁 참전 (1868년)
1868년 (게이오 4년) 1월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전습대 일부(다키가와 구스이, 오카와 마사지로 등)가 막부 육군 소속으로 참전했다.[2]2. 5. 에도 탈주 및 저항 (1868년)
1868년 에도 개성 이후, 구 막부군 상당수가 신정부에 항복했지만, 2000~3000명 가량의 막부 보병대와 신선조 등은 에도를 탈출했다. 이 중 오토리 케이스케를 따라 전습 제1, 2대대 1100명 정도가 탈주했다.[2] 5월 4일(4월 12일) 시모사 이치카와의 고쿠다이에 집결한 탈주 전습대 등 약 2000명은 오토리 케이스케를 총독, 히지카타 도시조를 참모로 하여 부대를 재편했다.[2]2. 6. 북관동 및 아이즈 전투
1868년 (게이오 4년) 5월 4일(4월 12일) 시모사 이치카와의 고쿠다이에 집결한 탈주 전습대 등 약 2,000명은 오토리 케이스케를 총독(대장), 히지카타 토시조를 참모로 부대를 편성했다.[2] 이후 북관동으로 이동하여 료소대, 관의대 등과 합류해 병력을 늘리고 오야마에서 신정부군을 격파했다.[2] 우쓰노미야로 진군하여 성을 탈환했다.[2]초풍대, 회천대 등 기하 자제 부대 약 700명(이후 전습사관대)도 합류, 북관동에서 호쿠리쿠·아이즈로 이동하며 전투를 벌였다.[2] 모나리개 전투에서 큰 피해를 보았다.[2] 이후 보병대 지휘는 오카와 마사지로, 사관대 지휘는 다키가와 주타로가 맡았다.[2]
2. 7. 하코다테 전쟁 (1869년)
홋카이도 마쓰마에의 후타마타구치 전투에서는 신정부군 고마이 마사고로의 군을 패주시키는 등 활약했다.[2] 최종적으로 고료카쿠로 이동하여 항전했다. 1869년 6월 27일(메이지 2년 5월 18일) 에노모토 다케아키를 필두로 하는 고료카쿠의 구 막부군이 항복함에 따라, 전습대도 항복하여 해산되었다.[2]2. 8. 신정부군 편입 부대
1869년(메이지 2년) 전습 제3대대(삼번마치 대대)를 중심으로 하는 1200명 가량은 신정부에 귀순했다.[3] 이들 중 2개 중대는 조슈번 산하의 귀정대로 신정부에 편입되어, 보소반도 진무 활동과 오슈 전투에 참여했다.[3] 같은 해 하코다테로 출진하여 탈주 막부군을 공격했다.[3]참조
[1]
서적
Tenno seiji
https://books.google[...]
[2]
서적
大鳥圭介
[3]
서적
明治維新と陸軍創設
錦正社
2013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