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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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쿠자는 일본의 조직 범죄 단체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폭력단'이라는 법적 명칭 외에도 '고쿠도', '교카쿠' 등으로 불린다. 야쿠자는 오이초카부라는 일본 전통 카드 게임에서 유래되었으며, 은어와 다양한 관련 용어를 사용한다. 야쿠자는 '바쿠토'(도박 집단)와 '테키야'(행상인)에서 기원했으며, 에도 시대부터 활동해 왔다. 야쿠자는 전통적으로 불법 도박, 매춘, 마약 밀매, 고리대금업 등을 통해 자금을 확보해 왔으며, 현대에는 특수 사기, 부동산 투기, 정치 개입 등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야쿠자는 미국과 동남아시아 등 국제적으로도 활동하며, 미국 정부는 야쿠자를 '국경을 넘나드는 범죄조직'으로 지정하여 금융 제재를 가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야쿠자 범죄 근절을 위해 법적 규제와 사회적 대응을 강화하고 있으며, 야쿠자 배제 조례 제정, 반야쿠자 법률 시행 등을 통해 야쿠자 조직의 쇠퇴를 유도하고 있다. 야쿠자는 영화, 드라마, 만화, 게임 등 다양한 작품의 소재로 활용되며, 일본 사회와 문화에 깊이 연관되어 있다.
야쿠자는 일본의 폭력 조직을 가리키는 말로, 다양한 명칭으로 불린다. 일본 정부는 이들을 '폭력단'으로 칭하며, '그 단체의 구성원이 집단적 또는 상습적으로 폭력적인 불법 행위 등을 하거나 조장할 우려가 있는 단체'로 정의하고 있다.[117]
야쿠자는 에도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일본 사회의 변화와 함께 그 모습이 변화해왔다.
2. 명칭 및 어원
오이초카부라는 도박에서 유래한 '야쿠자'라는 말은 '쓸모없는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외에도 가부키 배우를 흉내 낸 무법자를 가리키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설, 유교의 악수(惡數, 재수 없는 수)에서 유래했다는 설 등 여러 가지 어원설이 있다.
2. 1. 명칭
대다수의 야쿠자는 폭력조직으로 불리기를 꺼리며, 특히 자칭으로는 고쿠도(極道), 교카쿠(俠客)로 부른다.[117]
야쿠자를 일컫는 은어로는 '야상(ヤ-さん일본어)', '야쿠(ヤ-公일본어)', '야노쓰쿠히토(ヤのつく人일본어, 야字가 붙는 사람)', '얏찬(ヤっちゃん일본어)', '야노쓰쿠지유교(야字가 붙는 자영업자)', '소노스지노히토(그 계통의 사람)', '스지몽(筋者)', '893', '가라후루상(カラフルさん일본어, 컬러풀한 분)' 등이 있다.[117] 주로 경찰에서 사용하는 '마루보(マルボウ)' 등이 있으며, 특정 폭력단에 알파벳으로 내부분류 코드를 붙여 '마루B', '마루G'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117] 야쿠자를 드러내는 동작으로는 뺨을 손가락으로 비스듬히 문질러, 얼굴에 상처가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117]
'야쿠자'라는 명칭은 일본의 전통 카드 게임인 오이초카부에서 유래했다.[10][11] 이 게임의 목표는 세 장의 카드를 합쳐 9점을 만드는 것이다. 카드의 합이 10 이상이면 두 번째 자릿수가 점수가 된다. 10이나 20의 합계는 점수가 0이다. 8-9-3(고어체 일본어로 '''야-쿠-자'''라고 발음함)의 세 장의 카드를 뽑으면 합계는 20이 되므로 점수는 0이 되어, 뽑을 수 있는 최악의 패 중 하나가 된다.[10][11] 일본어에서 '야쿠자'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가타카나(ヤクザ)로 표기된다.[10][11]
오이초카부라는 도박에서는 3장의 패를 뽑아 합계값의 일의 자리의 크기를 겨룬다. 8, 9의 눈이 나오면 17이 되고, 일반인은 “7”의 경우 “한 장 더 뽑는다”고 하지만, 투기적이고 모험심이 강하며 비상식적인 무리는 “한 방을 걸고, 한 장 더 뽑는다”. 그 결과로 “3”을 뽑고, 최저 점수인 “0”(8+9+3=20)이 된다. 그것에 비유하여, 행동 패턴이나 인생 설계를 “도박적으로 도전하는 자의 삶의 방식”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8, 9, 3을 이어 읽은 “야쿠자”가 “‘패배자, 실망자, 추락자’가 ‘반사회적인 의식을 가지고(수고를 하지 않고 돈을 벌려는 자)’를 의미하는”것이 되어, 그것이 전해져 도박꾼 집단을 가리키게 되었다고 한다. 더욱이 일부 지역에서는 8, 9, 3의 패만 “승부 없음”이라는 룰을 채택하고 있으며, 거기에 유래한다고 주장하는 도박꾼 두목도 있다.[117]
많은 야쿠자는 "폭력단원"이라고 부르지 않고[103], "극도", 협객" 등으로 자칭하는 경우가 있다. 반대로 스스로 "나는 폭력단원이니까…"라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경우 상대방에게 협박(강박)을 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보통은 "조직의 사람" 또는 "단체의 사람" 등으로 표현한다.
'야쿠자'를 가리키는 은어·별칭에는 "야코(ヤー公)", "야상(ヤーさん)", "얏짱(ヤっちゃん)", "야인(や印)", "'야'가 붙는 자유업", "'야'가 붙는 무서운 사람", "무서운 사람", "그쪽 사람", "아치라노 카타(あちらのかた)", "와토세비토(渡世人)", "가교비토(稼業人)", "극도", "임협", "스지모노(筋者)", "본직", "893", "YKZ", "패거리", "구성원", "야쿠자 가게(ヤクザ屋さん)", 광대뼈에서 턱 끝까지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코레몬(これもん)(스카페이스(Scarface): 상처, 흉터가 있는 얼굴을 표현)" 등이 있다.
또한, 주로 경찰에서 사용하는 "마루보(マル暴)", "마루B(マルB)(폭력단)" 또는 "마루G(マルG)(극도)" 등도 있다.[117]
2. 2. 어원
'야쿠자'라는 명칭의 어원은 확실하지 않지만, 도박 용어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가장 널리 받아들여진다. 화투를 사용한 '오이초카부'라는 도박에서 3장의 패를 뽑아 합계치의 1자리 수로 승부를 겨루는데, 8·9·3을 합쳐 20, 즉 0점으로 만드는 것을 일본어로 '야쿠자(893)'라고 읽는 것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10][11] 이는 '쓸모없는 자'라는 의미로 도박 집단을 가리키게 되었다.
다른 설로는 가부키 배우인 '야쿠샤(役者)'의 화려한 모습을 흉내 낸 무법자를 뜻하는 '가부키모노(傾き者)'를 '야쿠샤노요우나(役者のような일본어)'라고 부른 데서 '야쿠샤'가 변하여 '야쿠자'가 되었다는 설,[99] '야쿠자레(役戱れ일본어, 연극 흉내)'에서 유래했다는 설, '야쿠사무모노(やくさむ者일본어)'에서 유래했다는 설, 옛날에 다툼을 중재했던 사람을 '야쿠자(役座)'라고 부른 데서 유래했다는 설 등이 있다. 유교에서 8, 9, 3이 악수(惡數, 재수 없는 수)였던 것에서 유래했다는 추측도 존재한다.
도박 집단을 구성하는 산야쿠(三役, 대주(貸元)·부두목(若頭)·아랫사람 두목(舎弟頭))를 부르는 은어였다는 설도 있다.
3. 역사
메이지 시대에는 토목건축 청부업을 가장하여 '구미(組)'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도 했다.[12] 1884년 '오카리코미(大刈込み, 도박범 처분규칙에 의해 도박꾼들은 재판 없이 10년의 징역을 강제로 받게 하였다)'에 대한 대책으로, 도박 집단의 대부분이 토목건축 청부업 간판을 내걸고 '구미'라는 이름을 달게 된 것이다. 이 이전에는 도박판 건물 이름을 사용하였다. 일가의 명칭을 붙인 것은 확실치는 않으나 메이지·다이쇼 시기에 많이 사용되었다. 데키야의 영향으로 추측되는데, 내무성 관련 부서에서 붙였을 가능성도 있다.[12]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야쿠자는 다시 세력을 확장하고 다양한 범죄 활동에 관여하게 되었다. 1963년 야쿠자 구성원과 준구성원의 총 수는 18만 4,100명으로 최고점을 찍은 후 경찰의 단속으로 감소세를 지속했다.[6] 1992년 폭력단 대책법 시행으로 정규 구성원 수가 감소했고,[73] 2010년경 47개 모든 현에서 야쿠자 배제 조례가 시행되면서 구성원과 준구성원의 총 수는 급격히 감소하기 시작했다. 1990년부터 2020년 사이 구성원과 준구성원의 총 수는 70% 감소했다.[77]
일본 경찰청은 2023년 일본 야쿠자 조직의 구성원이 1만 400명, 준구성원이 1만 명이라고 보고했다.[1]
일제강점기, 일부 야쿠자 조직은 한반도에서 이권 사업에 개입하거나 조선인들을 착취하기도 했다.[66] 해방 이후, 재일 한국인 사회는 차별과 빈곤 속에서 야쿠자와 복잡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66][67] 일본 국민 중 재일 한국인은 0.5%에 불과하지만, 일본 사회에서 부라쿠민과 함께 차별을 받았기 때문에 야쿠자에서 두드러진 부분을 차지한다.[66][67] 1990년대 초, 이나가와계 최고 보스 90명 중 18명이 재일 한국인이었다.[66] 일본 국가 공안위원회는 야쿠자 전체의 10%가 한국인이고, 야마구치구미의 70%가 부라쿠민이라고 밝혔다.[66] 지정 폭력단 대표 중 일부도 한국인이다.[68] 한국인의 중요성은 일본에서 금기시되었고, 캡런과 두브로의 야쿠자(1986) 일본어판이 야마구치구미에 대한 한국인 관련 설명을 삭제하고 1991년까지 출판되지 않은 이유 중 하나였다.[69] 한국 국적을 유지하는 한국계 일본 출생자들은 거주 외국인으로 간주되며, 그룹의 "외부인" 이미지에 부합하기 때문에 야쿠자에 의해 받아들여진다.[70][31]
한국계 야쿠자로는 마치이 히사유키(도세이카이 창립자), 다카야마 도쿠타로(4대 아이즈코테츠계 두목), 기요타 지로(1940년생, 5대 이나가와카이 두목), 마쓰야마 신이치(1927년생, 5대 교쿠토카이 두목), 하시모토 히로후미(1947년생, 야마구치구미 소속 극진연합회(2019년 해산) 창립자) 등이 있다.
3. 1. 기원
야쿠자는 바쿠토(博徒, 도박꾼)와 테키야(的屋, 행상인)라는 두 가지 기원을 가진다.
바쿠토의 기원은 헤이안 시대이며, 무로마치 시대에는 '협객'(俠客) 또는 '도세이닌(渡世人)'으로 불렸다. 에도 시대에는 도박이 중범죄로 엄격히 다루어졌으나, 에도 중기 이후 상습적인 도박 집단이 나타나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에도의 야쿠자와 교토, 오사카의 야쿠자는 구별된다.
테키야는 '히닌(非人, 천민)' 신분으로 구성되었으며, 에도 시대에 절과 신사 경내에서 도박판을 벌여 수입을 얻었다. 이를 '데라제니(テラ錢)'라고 한다. 이들은 도시뿐만 아니라 지방에도 존재했으며, 현대에도 사회 구조 밖에 있는 사람들이다.

현대 야쿠자 조직의 기원에 대한 확실한 정보는 부족하지만, 대부분 17세기 중반 에도 시대(1603~1868)에 등장한 '테키야'와 '바쿠토'라는 두 사회 계층에서 유래했다.[12]
테키야는 에도 시대 최하위 계층으로, 노점 배정 및 상업 활동 보호와 같은 상업 관련 행정 업무를 맡았다.[13] 신토 축제 기간 동안 노점을 열고, 일부는 보안 요원으로 고용되어 노점 배정과 보호를 대가로 임대료를 지불했다.
테키야는 '오야분'(두목)과 '코분'(조직원)으로 구성된 계층 구조를 가졌으며, 이는 가족과 유사했다.[14] 전통적인 일본 문화에서 오야분은 대리 부모, 코분은 대리 자녀로 여겨졌다.[14] 에도 시대에 정부는 텍키야를 공식적으로 인정했고, 오야분은 감독관으로 임명되어 사무라이와 같은 지위를 부여받았다. 즉, 성과 두 자루의 검을 소지할 권리가 주어졌다.[15]
바쿠토는 도박이 불법이었기 때문에 상인보다 낮은 사회적 지위를 가졌다. 이들은 일본 전역의 마을과 도시 외곽의 버려진 사찰이나 신사에 도박장을 만들고, 고객에게 사채 사업을 운영하며 자체 보안 인력을 유지했다. 야쿠자의 좋지 않은 이미지와 '야쿠자'라는 이름 자체도 바쿠토에서 유래했다.
에도 시대 중반의 경제 상황과 상인 계급의 우세로 인해, 야쿠자 조직은 가짜 또는 질 낮은 상품을 판매하여 지역 시장에서 고객을 갈취하기 위해 조직에 가입하거나 조직을 형성한 부적응자와 비행 청소년들로 구성되었다.
시미즈 지로초(1820~1893)는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야쿠자이자 민중 영웅이다.[16] 그는 야마모토 초고로로 태어났지만 입양될 때 이름을 바꾸었다.[17]
야쿠자의 뿌리는 오늘날에도 가입식에서 텍키야 또는 바쿠토 의식을 통합하여 계승되고 있다. 현대 야쿠자는 다양화되었지만, 일부 조직은 여전히 한 그룹 또는 다른 그룹과 관련을 맺고 있다. 예를 들어, 주요 수입원이 불법 도박인 조직은 자신을 바쿠토라고 부를 수 있다.
규슈 섬(특히 후쿠오카현)은 많은 야쿠자 구성원, 특히 야마구치구미의 유명한 보스들을 배출한 곳으로 유명하다.[18] 기타큐슈 지역 출신의 요시다 이소키치(1867–1936)는 최초의 유명한 현대 야쿠자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20] 야마구치구미의 두목인 쓰카사 시노부와 이노우에 쿠니오도 규슈 출신이다. 후쿠오카현은 가장 많은 지정 폭력단(Designated bōryokudan)[21]을 보유하고 있다.
3. 2. 에도 시대
에도 시대에는 도박이 중범죄로 엄격하게 다루어졌지만, 에도 중기 이후 상습적으로 도박을 하는 '바쿠토(博徒)'라 불리는 집단이 나타나 현대 야쿠자의 기원 중 하나로 여겨진다.[12]
한편, '데키야(的屋)'는 '히닌(非人, 천민)' 신분으로, 에도 시대에 절과 신사 경내 등에서 도박판을 벌여 '데라제니(テラ錢)'라 불리는 수입을 얻었다.[12] 이들은 도시뿐만 아니라 지방에도 존재했으며, 사회 구조 밖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에도 시대 중반, 경제 상황과 상인 계급의 우세로 인해 발전하는 야쿠자 조직은 가짜 또는 질 낮은 상품을 판매하여 지역 시장에서 고객을 갈취하는 부적응자와 비행 청소년들로 구성되었다.
현대 야쿠자 조직의 확실한 단일 기원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대부분 17세기 중반 에도 시대에 등장한 '데키야'와 '바쿠토'라는 두 가지 사회 계층에서 유래했다.[12]
3. 3. 근현대
메이지 시대에는 토목건축 청부업을 가장하여 '구미(組)'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도 했다.[12] 1884년 '오카리코미(大刈込み, 도박범 처분규칙에 의해 도박꾼들은 재판 없이 10년의 징역을 강제로 받게 하였다)'에 대한 대책으로, 도박 집단의 대부분이 토목건축 청부업 간판을 내걸고 '구미'라는 이름을 달게 된 것이다. 이 이전에는 도박판 건물 이름을 사용하였다. 일가의 명칭을 붙인 것은 확실치는 않으나 메이지·다이쇼 시기에 많이 사용되었다. 데키야의 영향으로 추측되는데, 내무성 관련 부서에서 붙였을 가능성도 있다.[12]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야쿠자는 다시 세력을 확장하고 다양한 범죄 활동에 관여하게 되었다. 1963년 야쿠자 구성원과 준구성원의 총 수는 18만 4,100명으로 최고점을 찍은 후 경찰의 단속으로 감소세를 지속했다.[6] 1992년 폭력단 대책법 시행으로 정규 구성원 수가 감소했고,[73] 2010년경 47개 모든 현에서 야쿠자 배제 조례가 시행되면서 구성원과 준구성원의 총 수는 급격히 감소하기 시작했다. 1990년부터 2020년 사이 구성원과 준구성원의 총 수는 70% 감소했다.[77]
일본 경찰청은 2023년 일본 야쿠자 조직의 구성원이 1만 400명, 준구성원이 1만 명이라고 보고했다.[1]
3. 4. 한국과의 관계
일제강점기, 일부 야쿠자 조직은 한반도에서 이권 사업에 개입하거나 조선인들을 착취하기도 했다.[66] 해방 이후, 재일 한국인 사회는 차별과 빈곤 속에서 야쿠자와 복잡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66][67]
일본 국민 중 재일 한국인은 0.5%에 불과하지만, 일본 사회에서 부라쿠민과 함께 차별을 받았기 때문에 야쿠자에서 두드러진 부분을 차지한다.[66][67] 1990년대 초, 이나가와계 최고 보스 90명 중 18명이 재일 한국인이었다.[66] 일본 국가 공안위원회는 야쿠자 전체의 10%가 한국인이고, 야마구치구미의 70%가 부라쿠민이라고 밝혔다.[66] 지정 폭력단 대표 중 일부도 한국인이다.[68] 한국인의 중요성은 일본에서 금기시되었고, 캡런과 두브로의 야쿠자(1986) 일본어판이 야마구치구미에 대한 한국인 관련 설명을 삭제하고 1991년까지 출판되지 않은 이유 중 하나였다.[69]
한국 국적을 유지하는 한국계 일본 출생자들은 거주 외국인으로 간주되며, 그룹의 "외부인" 이미지에 부합하기 때문에 야쿠자에 의해 받아들여진다.[70][31]
한국계 야쿠자로는 마치이 히사유키(도세이카이 창립자), 다카야마 도쿠타로(4대 아이즈코테츠계 두목), 기요타 지로(1940년생, 5대 이나가와카이 두목), 마쓰야마 신이치(1927년생, 5대 교쿠토카이 두목), 하시모토 히로후미(1947년생, 야마구치구미 소속 극진연합회(2019년 해산) 창립자) 등이 있다.
4. 조직
야쿠자는 '오야붕-꼬붕(親分-子分)' 관계를 중심으로 조직이 운영되며, 이는 전통적인 일본의 계층 구조이다. 꼬붕(子分, 직역: 양자)은 오야붕(親分, 직역: 양부)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정의와 의무를 의미하는 인의(仁義) 규범은 충성심과 존경심을 강조하며, 오야붕-꼬붕 관계는 사케를 함께 나누는 의식으로 공식화된다.[22]
1884년 도박범 처분규칙에 의해 도박꾼들이 재판 없이 10년 징역을 받게 되자, 대부분의 도박 집단은 토목건축 청부업 간판을 걸고 '구미(組)'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이전에는 도박판 건물 이름을 사용했으며, 일가 명칭은 메이지·다이쇼 시기에 많이 사용되었다. 메이지 시대 《동해유협전》(東海遊俠傳)에서는 협객 시미즈노 지로초(淸水 次郞長)를 중국말로 '따거(大哥)'라고 불렀는데, 이는 두목(親分)보다는 형님(兄貴)에 가깝다.
야쿠자 조직은 다층적인 계층 구조가 특징이며, 꼬붕은 오야붕이 되어 자체 하부 조직을 운영하고, 그 하부 조직의 꼬붕 또한 오야붕이 되어 다시 하부 조직을 운영한다. 오야붕은 구미초(組長) 또는 회장(会長), 의형제는 사테이(舎弟), 꼬붕은 와카나카(若中) 또는 와카슈(若衆)라고 불린다.[27]
야쿠자 집단은 오야붕이 하급 조직원인 꼬붕에게 명령을 내리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조직원들은 가족과의 유대를 끊고 오야붕에게 충성하며, 서로를 가족 구성원으로 부른다. 대부분 남성이지만, 두목의 아내는 아네상(姐さん, 언니)으로 불린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전통적인 테키야/바쿠토 조직은 쇠퇴했지만, 전쟁 후 야쿠자는 다시 적응했다. 2023년 기준, 일본 국가경찰청은 야마구치구미, 고베 야마구치구미, 키즈나카이, 이케다구미(ja), 스미요시카이, 이나가와카이를 주요 야쿠자 조직으로 지정했다.
고베 야마구치구미는 2015년, 키즈나카이는 2017년, 이케다구미는 2020년에 야마구치구미에서 분리되었으며, 이들은 서로 대립한다.[1] 최근 3대 야쿠자 조직은 느슨한 동맹을 형성, 2023년 4월 야마구치구미 2인자 다카야마 기요시, 스미요시카이 회장 오가와 슈지, 이나가와카이 회장 우치보리 카즈야(ja)가 사교 모임을 가졌다.[38]
4. 1. 구조
야쿠자 조직은 여러 층으로 된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상위 조직은 하위 조직을 통제하며, 각 조직은 '오야붕-꼬붕(親分-子分)' 관계를 기반으로 한다. 여기서 꼬붕(子分)은 오야붕(親分)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이는 사케를 나눠 마시는 의식을 통해 공식화된다.[22]야마구치구미와 같은 대규모 조직은 5~6개의 계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하부 조직의 수장은 상위 조직의 간부인 경우가 많다.[23][24][25][26]
조직의 최고 우두머리는 보통 '구미초(組長)' 또는 '회장(会長)'이라고 불린다. 구미초의 의형제는 '사테이(舎弟)', 꼬붕(子分)은 '와카나카(若中)' 또는 '와카슈(若衆)'라고 불린다.[27]
조직 내 주요 직책으로는 구미초(組長), 와카가시라(若頭, 구미초의 2인자), 사테이가시라(舎弟頭, 구미초의 의형제 중 맏형)가 있다. 본부장(本部長), 부구미초(副組長), 사무국장(事務局長)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28][30] 일반적으로 와카가시라, 사테이가시라, 본부장이 조직의 집행부를 운영한다. 사테이는 구미초의 의형제이므로 나이가 많고 명목상 직책은 높지만 실제 권한은 적은 편이다.[29]
야쿠자는 조직원 간의 관계를 가족 관계로 비유하며, 실제 가족과의 유대를 끊고 오야붕에게 충성을 다한다. 서로를 아버지(親父), 삼촌(叔父貴), 형제(兄弟) 등으로 부른다. 야쿠자는 대부분 남성이지만, 극소수의 여성은 두목의 아내로 '아네상(姐さん, 언니)'이라고 불린다.
4. 2. 의례
야쿠자는 '오야붕-꼬붕(親分-子分)'이라는 전통적인 일본 계층 구조를 따른다. 꼬붕(子分, 직역: 양자)은 오야붕(親分, 직역: 양부)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이는 사케를 함께 나누는 의식을 통해 공식화된다. 이 의식은 야쿠자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일본 신토 결혼식에서도 행해진다.[22]야쿠자 조직은 다층적인 계층 구조로, 꼬붕은 오야붕이 되어 자신의 하부 조직을 운영하고, 그 하부 조직의 꼬붕 또한 오야붕이 되어 다시 하부 조직을 운영하는 방식이다. 야마구치구미 같은 대규모 조직은 5~6개의 계층으로 구성된다.[23][24][25]
조직의 오야붕은 구미초(組長) 또는 회장(会長)으로 불리며, 구미초의 의형제는 사테이(舎弟), 꼬붕은 와카나카(若中) 또는 와카슈(若衆)라고 불린다.[27] 조직마다 직책은 다르지만, 구미초, 와카가시라(若頭, 구미초의 차석이자 의형제), 사테이가시라(舎弟頭, 구미초의 의형제 중 장남)가 가장 중요한 세 직책이다.[28][30]
야쿠자는 조직원 간의 유대를 중시하여 실제 가족과의 관계를 끊고 오야붕에게 충성을 바친다. 서로를 가족 구성원으로 부르며, 두목의 아내는 아네상(姐さん, 언니)으로 불린다. 타오카 가즈오 사망 후 그의 아내 후미코가 잠시 야마구치구미 두목을 맡기도 했다.
4. 3. 구성원
야쿠자 조직은 '오야붕-꼬붕(親分-子分)'이라는 전통적인 일본 계층 구조를 따른다. 꼬붕(子分, 직역: 양자)은 오야붕(親分, 직역: 양부)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이는 사케를 나눠 마시는 의식으로 공식화된다. 이러한 관계는 야쿠자뿐만 아니라 일본 전통 신토 결혼식에서도 나타난다.[22]야쿠자 조직은 다층적인 계층 구조를 가지며, 야마구치구미와 같은 대규모 조직은 5~6개의 계층으로 구성되기도 한다.[23][24][25] 조직의 오야붕은 구미초(組長) 또는 회장(会長)으로 불리며, 그의 의형제는 사테이(舎弟), 꼬붕(子分)은 와카나카(若中) 또는 와카슈(若衆)라고 불린다.[27]
조직 내 주요 직책은 구미초(組長), 와카가시라(若頭, 구미초의 차석), 사테이가시라(舎弟頭, 구미초의 의형제 중 장남)이다. 본부장(本部長), 부구미초(副組長), 사무국장(事務局長)도 중요한 직책이다.[28][30] 2024년 기준 야마구치구미의 서열은 구미초, 와카가시라, 사테이가시라, 본부장 순이다.[30]
야쿠자는 오야붕(구미초 또는 회장)이 하급 조직원인 꼬붕에게 명령을 내리는 방식으로 운영되며, 이는 일본의 선후배 관계와 유사하다. 조직원들은 실제 가족과의 관계를 끊고 오야붕에게 충성하며, 서로를 가족(아버지, 삼촌, 형제)으로 부른다. 야쿠자는 거의 남성으로 구성되지만, 극소수의 여성은 두목의 아내로 '아네상(姐さん, 언니)'으로 불린다. 타오카 가즈오가 사망했을 때 그의 아내 후미코가 잠시 야마구치구미 두목을 맡기도 했다.[39]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전통적인 야쿠자 조직은 쇠퇴했지만, 전쟁 후 다시 적응하여 활동을 이어갔다.
2023년 기준, 일본 국가경찰청은 야마구치구미, 고베 야마구치구미, 키즈나카이, 이케다구미(ja), 스미요시카이, 이나가와카이를 주요 야쿠자 조직으로 지정했다. 이들 6개 조직은 총 14,500명(구성원 7,700명, 준구성원 6,800명)으로, 전체 야쿠자의 71.1%를 차지한다.[1]
고베 야마구치구미는 2015년, 키즈나카이는 2017년, 이케다구미는 2020년에 각각 야마구치구미에서 분리되었으며, 이들 조직은 서로 대립하고 있다.[1]
최근 3대 야쿠자 조직은 느슨한 동맹을 형성했으며, 2023년 4월 야마구치구미의 2인자 다카야마 기요시, 스미요시카이 회장 오가와 슈지, 이나가와카이 회장 우치보리 카즈야(ja)가 사교 모임을 가졌다.[3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