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나카소네 내각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제1차 나카소네 내각은 1982년 11월 27일에 발족한 자유민주당 단독 내각이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는 록히드 사건 연루자인 다나카 가쿠에이의 지지를 받아 정권을 잡았으며, 다나카의 영향력으로 인해 '다나카소네 내각'으로 불리기도 했다. 주요 정책으로 한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전두환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통해 40억 달러의 경제 협력 지원을 합의했으며, 도시 재개발 촉진을 위한 어반 르네상스 계획을 추진하여 도심 지역의 용적률을 완화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983년 일본 - 제2차 나카소네 내각
제2차 나카소네 내각은 자유민주당의 중의원 총선거 참패 후 신자유클럽과의 연립정권으로 출범하여 자민당 단독정권을 종식시키고, 행정개혁과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의 논란, 그리고 한일 관계에서 경제 협력과 과거사 문제라는 과제를 남겼다. - 1983년 일본 - 동해 중부 지진
1983년 동해에서 발생한 동해 중부 지진은 판 경계형 지진으로 추정되며, 일본과 한국 등 주변 지역에 지진해일 피해를 야기하여 쓰나미 경보 체계 개선의 계기가 되었다. - 나카소네 야스히로 - 제2차 나카소네 내각
제2차 나카소네 내각은 자유민주당의 중의원 총선거 참패 후 신자유클럽과의 연립정권으로 출범하여 자민당 단독정권을 종식시키고, 행정개혁과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의 논란, 그리고 한일 관계에서 경제 협력과 과거사 문제라는 과제를 남겼다. - 나카소네 야스히로 - 제2차 나카소네 내각 (제1차 개조)
나카소네 야스히로를 내각총리대신으로 하는 제2차 나카소네 내각 (제1차 개조)은 1984년 11월 1일부터 1985년 12월 28일까지 존속한 일본 내각으로, 각 부처 대신, 정무 차관, 내각 관방부장관, 내각법제국 장관 등으로 구성되었다. - 1982년 일본 - 일본항공 350편 추락 사고
일본항공 350편 추락 사고는 1982년 일본항공 소속 맥도넬 더글러스 DC-8-61 여객기가 하네다 공항에 착륙 중 기장의 고의적인 조작으로 추락하여 24명의 사망자를 냈으며, 사고 조사 결과 기장의 편집증적 정신분열증이 원인으로 밝혀져 당시 일본 사회의 안전 관리 시스템과 정신 질환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드러냈다. - 1982년 일본 - 스즈키 젠코 내각 (개조)
스즈키 젠코 내각 (개조)는 스즈키 젠코가 내각총리대신으로 선출된 후 자유민주당 내 파벌의 의견을 수렴하여 안정적인 정권 운영을 목표로 경제 성장, 행정 개혁, 미국과의 안보 협력 강화 및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주요 정책 목표로 삼았으나, 정치 스캔들과 소극적인 리더십에 대한 비판 속에 단명으로 막을 내린 내각이다.
2. 성립 배경
1983년 1월, 도시 재개발 촉진을 위한 규제 완화책인 '어번 르네상스 계획'을 세워 도심부(특히 도쿄 23구 내)의 용적률을 대폭 완화했다. 이것은 훗날 지가 상승 등을 초래한 근본적인 요인이 되면서 버블 경기의 토대를 만들어 나가게 됐다.[11]
2. 1. 록히드 사건과 다나카 가쿠에이의 영향력
이 내각은 자유민주당 단독 내각이었다. 나카소네는 록히드 사건의 피고인으로 규탄받던 다나카 가쿠에이의 지지와 후원으로 정권을 잡았다. 사회민주연합의 나라자키 야노스케 등은 "나카소네 내각 위에 '밭 전(田)'자를 붙여 '''다나카소네 내각'''(田中曽根内閣일본어)이라고 비판했다.[6]1983년 1월, 나카소네는 현직 총리로서는 최초로 대한민국을 공식 방문,[7] 청와대에서 전두환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8][9] 총 40억달러의 경제 협력 지원에 합의했다.[10] 이후 록히드 사건 재판에서 다나카에게 실형 판결이 내려졌고, 그해 12월에 치른 제3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유민주당은 의석수가 줄어드는 결과를 낳았다.
3. 주요 정책
1983년 나카소네는 연설에서 "전후사의 전환점"을 강조했다. 같은 해 12월 제3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은 의석수가 줄었으며, 세토야마 미쓰오 문부대신, 오노 아키라 노동대신, 타니가와 가즈호 방위청 장관 등 현직 각료 3명이 낙선했다.
3. 1. 한일 관계 개선
1983년 1월, 나카소네는 현직 총리로서는 최초로 대한민국을 공식 방문하여,[7] 청와대에서 전두환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8][9] 이 회담에서 총 400억달러의 경제 협력 지원에 합의했다.[10] 같은 해, 나카소네는 방한하여 제1차 교과서 문제에 결착을 짓는 동시에 "한일 신시대"를 선언했다.3. 2. 어반 르네상스 계획과 경제 정책
1983년 1월, 나카소네 내각은 도시 재개발 촉진을 위한 규제 완화책인 '어번 르네상스 계획'을 시행하여, 도심부(특히 도쿄 23구 내)의 용적률을 대폭 완화했다. 이는 훗날 지가 상승 등을 초래한 근본적인 요인이 되면서 버블 경기의 토대를 만들어 나가게 되었다.[11]4. 내각 구성
제1차 나카소네 내각은 내각총리대신과 각료, 정무 차관으로 구성되었다.[1]
1982년 11월 30일에 임명된 각료 명단은 다음과 같다.
같은 날 임명된 정무 차관은 다음과 같다.
4. 1. 각료 명단
제1차 나카소네 내각일본어의 각료 명단은 다음과 같다.[1]
4. 2. 정무 차관
1982년 11월 30일일본어에 임명되었다.
5. 평가 및 영향
나카소네 내각은 자유민주당 단독 내각이었다. 나카소네는 록히드 사건으로 비판받던 다나카 가쿠에이의 지지로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사회민주연합의 나라자키 야노스케 등은 "나카소네 내각 위에 '밭 전(田)'자를 붙여 '''다나카소네 내각'''(田中曽根内閣일본어)”이라고 비판했다.[6] 이전의 오히라 내각, 스즈키 젠코 내각은 "그림자 내각"이라고 불렸지만, 다나카의 영향력이 더 커졌다는 의미에서 "'''직각 내각'''"이라고도 불렸다.
1983년 1월, 나카소네는 현직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대한민국을 공식 방문하여,[7] 청와대에서 전두환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8][9] 총 40억달러 규모의 경제 협력 지원에 합의했다.[10] 같은 해, 제1차 교과서 문제에 대한 해결과 함께 "한일 신시대"를 선언했다.
같은 해 1월, 도시 재개발 촉진을 위한 규제 완화 정책인 '어번 르네상스 계획'을 시작하여 도심부(특히 도쿄 23구 내)의 용적률을 대폭 완화했다. 이는 훗날 지가 상승을 초래한 근본적인 요인이 되어 버블 경기의 토대를 만들게 되었다.[11]
그해 12월에 치러진 제3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유민주당은 록히드 사건 재판에서 다나카에게 실형 판결이 내려진 영향으로 의석 수가 줄어드는 결과를 낳았다. 이 선거에서는 세토야마 미쓰오 문부대신, 오노 아키라 노동대신, 타니가와 가즈호 방위청 장관 등 현직 각료 3명이 낙선했다.
참조
[1]
웹사이트
第71代 中曽根 康弘|歴代内閣
https://www.kantei.g[...]
Prime Minister's Official Residence
2023-10-08
[2]
문서
[3]
문서
[4]
서적
新・自民党戦国史
朝日ソノラマ
[5]
서적
千昌夫の教訓
小学館文庫
[6]
문서
[7]
뉴스
韓·日頂上 靑瓦臺서 첫會談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83-01-11
[8]
뉴스
韓半島安定 日안정에 긴요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83-01-12
[9]
뉴스
日, 韓國安定긴요성 同意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83-01-12
[10]
뉴스
韓·日共同聲明 〈全文〉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83-01-12
[11]
서적
센 마사오의 교훈
쇼가쿠칸분코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