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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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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3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는 1352년경에 태어나 1381년에 사망한 영국의 귀족이다. 그는 제2대 마치 백작 로저 모티머의 아들이자 1360년에 마치 백작위를 계승했다. 에드워드 3세의 차남인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의 딸 필리파 플랜태저넷과 결혼하여 얼스터 백작위를 물려받았으며, 필리파는 흑태자 에드워드와 리처드 2세 다음으로 왕위 계승 서열이 높아 모티머 가문의 위상을 높였다. 그는 1369년 잉글랜드 원수에 임명되었으며, 프랑스와 스코틀랜드와의 외교 임무를 수행했다. 1379년 아일랜드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나 1381년 코크에서 사망했다.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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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
기본 정보
이름에드먼드 모티머
작위제3대 마치 백작, 얼스터 백작
가문모티머 가문
모티머 가문의 문장
모티머 가문의 문장: "금색과 청색의 배리, 첫 번째 수장의 두 개의 팔레트와 두 개의 자이런 사이에 은색 방패가 전체적으로 놓임"
생애
출생일1352년 2월 1일
출생지웨일스, 브레크녹셔, 리스웬, 랑고에드
사망일1381년 12월 27일
사망지아일랜드, 코크
가계
아버지로저 모티머
어머니필리파 몬태규
배우자필리파 플랜태저넷 (1369년 8월 24일 결혼, 1381년 1월 5일 사망)
자녀
자녀 목록엘리자베스 모티머
로저 모티머
에드먼드 모티머 경
레이디 필리파 모티머

2. 초기 생애 및 가문 배경

에드먼드 모티머는 1352년[4] 제2대 마치 백작 로저 모티머와 그의 아내 필리파 몬터규(윌리엄 몽태규, 초대 솔즈베리 백작과 캐서린 그랜디슨의 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웨일스 변경 영주로서 강력한 지위와 상속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1360년 부친 로저 모티머가 사망하자 어린 나이에 마치 백작위를 계승했다.[4][5] 그는 국왕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의 후견 아래 윌리엄 오브 위컴과 제10대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했다.

1368년[4](다른 자료에 따르면 1369년 8월 24일), 17세의 나이로 에드워드 3세의 차남인 클라렌스 공작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의 외동딸인 14세의 필리파 플랜태저넷과 결혼하였다. 이 결혼은 모티머 가문의 위상을 더욱 높이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필리파의 아버지 라이오넬은 그의 아내이자 윌리엄 돈 데 부르, 제3대 얼스터 백작의 딸이자 상속녀인 엘리자베스 드 버그를 통해 얼스터 백작이 되었었다. 라이오넬이 사망하자 에드먼드는 아내 필리파를 통해 얼스터 백작위를 상속받게 되었다. 이로써 에드먼드는 아일랜드에서 주요 앵글로-노르만 영주 중 한 명의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다.[4][5]

더욱 중요하게는, 필리파의 혈통은 에드워드 3세의 차남 라이오넬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당시 왕위 계승 서열에서 흑태자 에드워드와 그의 아들 잉글랜드의 리처드 2세 다음으로 두 번째로 간주되었다. 이는 에드워드 3세의 삼남이자 초대 랭커스터 공작이 되어 랭커스터 왕가의 시조가 된 곤트의 존보다 앞서는 순위였다.

이 결혼은 잉글랜드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훗날 요크 왕가가 장미 전쟁에서 랭커스터 왕가에 맞서 잉글랜드 왕위를 주장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4세는 필리파의 증손자였다.[4][5] 에드먼드 모티머의 아들인 제4대 마치 백작 로저 모티머는 잉글랜드의 리처드 2세 치세 동안 잉글랜드 왕위의 추정 상속인으로 여겨지게 된다.

3. 결혼 및 왕위 계승 서열

1369년 8월 24일, 17세의 에드먼드는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의 차남인 클라렌스 공작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의 외동딸인 14세의 필리파 플랜태저넷과 결혼했다. 이 결혼은 에드먼드의 지위를 더욱 중요하게 만들었다.

필리파의 어머니 엘리자베스 드 버그, 제4대 얼스터 백작부인는 윌리엄 돈 데 부르, 제3대 얼스터 백작의 딸이자 상속녀였으며, 장인 라이오넬은 결혼을 통해 얼스터 백작 작위를 얻었다. 에드먼드는 라이오넬이 사망하자 아내 필리파의 권리로 얼스터 백작위를 물려받았고[4][5], 이로써 아일랜드의 주요 앵글로-노르만 영주 중 한 명이 되었다.

무엇보다 이 결혼은 왕위 계승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 필리파는 당시 잉글랜드 왕위 계승 서열에서 흑태자 에드워드와 그의 아들 잉글랜드의 리처드 2세 다음으로 높은 순위에 있었다. 이는 에드워드 3세의 또 다른 아들인 곤트의 존이 시조가 된 랭커스터 왕가보다 계승 서열상 앞서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결혼은 모티머 가문의 위상을 크게 높였을 뿐만 아니라, 잉글랜드 역사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훗날 이 결혼은 요크 왕가가 랭커스터 왕가에 대항하여 잉글랜드 왕위를 주장하는 핵심적인 근거가 되었으며, 이는 결국 장미 전쟁으로 이어졌다[4][5]. 실제로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4세는 필리파의 증손자로서 에드워드 3세의 차남 계통 후손임을 내세워 왕위에 올랐다. 에드먼드 모티머의 아들인 제4대 마치 백작 로저 모티머 역시 잉글랜드의 리처드 2세 통치 기간 동안 왕위 추정 상속인으로 여겨졌다.

4. 정치 및 외교 활동

1369년 잉글랜드 원수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몇 년간 프랑스, 스코틀랜드 등과의 외교 임무에 여러 차례 투입되었다. 1373년에는 귀족들이 하원과 협의하기 위해 구성한 위원회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이는 존 오브 곤트가 주도한 프랑스와의 전쟁 자금 지원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대표 의회가 처음으로 공동 회의를 연 사례였다.

에드워드 3세 통치 말기에는 왕과 궁정 세력에 대한 반대 운동에 참여하며 점차 대중적인 지지를 얻었다. 특히 1376년 열린 선량한 의회에서는 흑태자 에드워드를 지지하며, 궁정 세력과 존 오브 곤트에 맞서는 귀족들 사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 의회에서 하원 의장을 맡았던 피터 드 라 마레는 모티머의 집사였는데, 그는 하원의 불만을 대변하고 고위 관리들의 탄핵을 추진했으며, 국왕의 정부였던 앨리스 페러스를 추방시키는 등 존 오브 곤트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모티머는 이러한 피터 드 라 마레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또한 같은 해 흑태자 에드워드가 사망하자, 국왕을 보좌하고 국정 전반에 대해 조언하기 위해 구성된 행정 위원회의 일원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그러나 선량한 의회가 끝난 후, 존 오브 곤트는 의회의 결정들을 뒤집었다. 모티머의 집사였던 피터 드 라 마레는 투옥되었고, 모티머 자신은 잉글랜드 원수로서 칼레를 비롯한 외딴 왕실 성들을 시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는 사실상 좌천성 인사였기에, 모티머는 이 명령을 거부하고 원수직을 사임했다.[1]

1377년 에드워드 3세가 사망하고 그의 손자인 리처드 2세가 왕위에 오르자, 모티머는 정치 고문단의 일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대관식에서는 왕관을 받드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6] 1379년에는 아일랜드 총독으로 임명되어 아일랜드 북부 얼스터로 부임했다. 그는 아일랜드 서부 지역 평정을 시도하며 남서부의 코크까지 진군했으나, 1381년 얕은 물을 건너던 중 익사하였다. 그의 나이 29세였다. 작위는 아들 로저에게 계승되었다.[7]

5. 아일랜드 총독 재임 및 사망

1377년 리처드 2세미성년자로 즉위하자, 에드먼드 모티머는 상설 정부 위원회의 일원이 되었다. 그러나 왕위 계승 서열이 높은 아내 필리파로 인해 왕의 숙부인 존 오브 곤트의 견제를 받게 되었고, 이러한 정치적 배경 속에서 1379년 3월 아일랜드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아일랜드 총독으로서 모티머는 동부 얼스터 지역에서 자신의 권위를 확립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서부의 오닐 왕조를 제압하는 데는 실패했다. 이후 1381년, 남부 먼스터 지역의 반항적인 족장들을 진압하기 위해 코크로 향하던 중, 같은 해 12월 27일 그곳에서 사망했다.[1] 그의 나이는 29세였다.

그는 생전에 후원했던 위그모어 수도원에 안장되었으며, 그의 아내 필리파 역시 후에 그곳에 묻혔다. 그의 작위는 아들 로저에게 상속되었다.[7]

6. 자녀

제3대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는 필리파 드 클라렌스와의 사이에서 2남 2녀를 두었다.[1]

이름출생사망비고
엘리자베스1371년 2월 12일1417년 4월 20일처음에는 헨리 "핫스퍼" 퍼시와 결혼하여 제2대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와 엘리자베스 퍼시 두 자녀를 두었다. 두 번째 남편은 카모이스 남작 토머스 드 카모이스였으며, 외아들 로저 드 카모이스가 있었다.[2] 엘리자베스 모티머는 헨리 8세의 세 번째 왕비 제인 시모어의 조상이다.
제4대 마치 백작 로저1374년 4월 11일1398년 7월 20일리처드 2세의 이복 형인 켄트 백작 토머스 홀랜드의 딸 엘레노어 홀랜드와 결혼하여 앤, 제5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 로저, 엘레노어의 2남 2녀를 두었다. 요크 가문의 왕위 요구권은 장녀 앤을 통해 이어졌다.
필리파1375년 11월 21일1400년 9월 26일처음에는 제3대 펨브로크 백작 존 헤이스팅스와 결혼했다. 두 번째 남편은 제11대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이었으며, 외아들 존이 있었지만 요절했다. 세 번째 남편은 제5대 세인트 존 남작 서 토머스 포이닝스였다.[3]
에드먼드1376년 9월 9일1411년 5월 13일 이전오와인 글린두르의 딸 카트린(캐서린)과 결혼했다. 조카인 제5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를 옹립하여 헨리 4세에게 반기를 들었으나 포위된 할레흐 성에서 사망했다. 라이오넬이라는 아들은 요절했다고 하며, 세 딸은 어머니와 함께 런던 탑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외에도 사생아로 기사 존 모티머(John Mortimer, 1378년경 ~ 1424년)가 있었다.

7. 가계도

관계이름
본인제3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
아버지제2대 마치 백작 로저 모티머
어머니필리파 몬터큐
친할아버지에드먼드 모티머 경
친할머니엘리자베스 드 배들스미어, 노샘프턴 백작부인
외할아버지윌리엄 몬터큐, 제1대 솔즈베리 백작
외할머니캐서린 몬터큐, 솔즈베리 백작부인
(친)증조할아버지로저 모티머, 제1대 마치 백작
(친)증조할머니조앤 드 제네빌, 제2대 제네빌 남작부인
(친)증조할아버지바솔로뮤 드 배들스미어, 제1대 배들스미어 남작
(친)증조할머니마가렛 드 클레어, 배들스미어 부인
(외)증조할아버지윌리엄 몬터큐, 제2대 몬터큐 남작
(외)증조할머니엘리자베스 몬트포트
(외)증조할아버지윌리엄 드 그랜디슨, 제1대 그랜디슨 남작
(외)증조할머니시빌라 드 트레고즈


참조

[1] 문서 Tout
[2] 서적 Plantagenet Ancestry
[3] 서적 Plantagenet Ancestry
[4] 서적
[5] 서적
[6] 서적
[7]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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