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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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코틀랜드 왕국은 5세기부터 1707년까지 존재했던 국가로, 1707년 잉글랜드와의 연합 조약을 통해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으로 통합되었다. 스코틀랜드는 여러 작은 왕국들로 분열되어 있다가, 달리아다 왕국의 케네스 1세가 알바 왕국을 정복하면서 스코틀랜드 왕국이 성립되었다는 설이 있다. 13세기까지 잉글랜드와의 국경선이 확립되었고,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했다. 스튜어트 왕조는 왕권을 강화하고 영토를 확장했으며, 1603년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하면서 왕관 연합이 이루어졌다. 이후 찰스 1세의 종교 정책으로 주교 전쟁이 발발하고 삼국 전쟁으로 이어졌으며, 1707년 연합 조약으로 잉글랜드와 통합되어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되었다. 스코틀랜드는 독자적인 정부, 법, 화폐, 지리, 인구, 언어, 종교, 교육, 군사, 깃발 등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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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 왕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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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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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스코틀랜드 왕국 |
현지 이름 | |
존속 기간 | 843년–1707년 |
건국 시기 | 9세기 (전통적으로 843년) |
건국 사건 | 통합 |
멸망 사건 | 잉글랜드와의 연합 |
멸망 날짜 | 1707년 5월 1일 |
수도 | 스콘 () 던펌린 () 에든버러 ( 이후) |
주요 언어 | 중세 아일랜드어 (12세기까지) 스코틀랜드 게일어 (12세기부터) 컴브리아어 (1093년–12세기) 영어 (950–1707) 스코트어 (13세기부터) 프랑스어 노른어 (1471년부터) 중세 라틴어 (15세기까지)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1560년까지) 스코틀랜드 교회 (성공회, 장로교) (1560년부터) |
통화 | 스코트 파운드 |
국가 표어 | In my defence God me defend |
국가 표어 설명 | 'In Defens'는 'In my defens God me defend'(신이 나를 보호할 때 신이 나를 보호한다)의 약어이다. 스코틀랜드의 국화인 엉겅퀴가 심어져 있고, 그 아래에는 스코틀랜드 국왕의 표어이자 엉겅퀴 훈장의 표어인 'Nemo me impune lacessit'(나를 해치고 처벌받지 않을 자 없다)가 라틴어로 기입되어 있다. |
인구 | 1500년: 500,000명 1600년: 800,000명 1700년: 1,250,000명 |
현재 국가 | 영국 ∟ 스코틀랜드 ∟ 잉글랜드 (노섬벌랜드, 컴브리아, 일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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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 |
정부 형태 | 단일 의회 준헌법 군주제 |
군주 | 군주 |
초대 군주 | 케네스 1세 (843–858) |
마지막 군주 | 앤 (1702–1707) |
입법부 | 스코틀랜드 의회 |
역사 | |
주요 사건 | 로디언 및 스트래스클라이드 통합 (1124년, 요크 조약 1237년 확인) 갤러웨이 통합 (1234/1235) 헤브리디스 제도, 맨 섬, 케이스네스 통합 (1266년, 퍼스 조약) 오크니 제도 및 셰틀랜드 제도 통합 (1472년) 왕관 연합 (1603년 3월 24일) |
이전 국가 | 달 리어타 켓트 세 포트리우 피브 스트래스클라이드 갤러웨이 노섬브리아 오크니 백국 |
이후 국가 |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
면적 | |
1482년–1707년 | 78,778km² |
기타 | |
데모님 | 스코틀랜드인 |
2. 역사
말콤 1세 (943–954)는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을 합병했고[10], 그의 뒤를 이은 인덜프는 로시안 일부를 합병했다.[10] 데이비드 1세는 봉건 제도를 도입하고, 왕립 자치 도시와 최초의 스코틀랜드 주화를 설립했으며, 종교 및 법률 개혁을 단행했다.[13]
13세기까지 영국과의 국경은 유동적이었으나, 요크 조약(1237)으로 현대와 유사한 국경선이 확립되었다.[15] 알렉산더 3세는 라르그스 전투와 퍼스 조약 이후 노르웨이가 지배하던 서해안 지역을 합병했고[16], 맨섬은 14세기에 잉글랜드 지배하에 들어갔다.[17]
에드워드 1세 치하에서 영국은 잠시 스코틀랜드 대부분을 점령했으나,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1296–1357)에서 로버트 1세와 그 후계자들은 프랑스 왕의 지원을 받으며 영국의 침략에 맞서 싸웠다.
15세기와 16세기 초, 스튜어트 왕조는 정치적 격변 속에서도 왕권을 강화하고 영토를 확장했다.[18] 1468년 오크니와 셰틀랜드 제도가 노르웨이 왕실로부터 스코틀랜드에 지참금으로 넘어왔고,[19] 1482년 베릭이 잉글랜드에 함락되었다.[18]
16세기, 제임스 5세와 메리 스튜어트 치하에서 왕관과 궁정은 르네상스와 신군주론의 많은 속성을 지녔다.[21] 16세기 중반,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Scottish Reformation)은 칼뱅주의의 강한 영향을 받아 장로교 조직 및 규율 시스템을 도입했다.[22]
16세기 후반, 제임스 6세는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왕위를 계승하여 왕관 연합을 만들었고, 왕실 권력 중심을 런던으로 옮겼다.[24]
찰스 1세가 스코틀랜드에 잉글랜드 종교적 합의를 강요하려 하자, 주교 전쟁(1637–1640)이 발발했고, 이는 왕의 패배와 스코틀랜드의 독립으로 이어졌다.[25] 이후 스코틀랜드는 삼국 전쟁에 개입했다.
찰스 1세의 패배 후,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 내전(Second English Civil War)에서 왕을 지지했고, 1650-1652년 영국-스코틀랜드 전쟁(Anglo-Scottish War, 1650–1652)에서 패배하여 잉글랜드 연방(Commonwealth of England, Scotland and Ireland (1653–1660))에 편입되었다.[26]
1660년 왕정 복고 이후, 스코틀랜드는 별도의 지위와 제도를 회복했지만, 정치적 권력 중심은 런던에 남아 있었다.[27] 1688-1689년 명예혁명에서 제임스 2세가 축출되었을 때, 스코틀랜드는 권리 청구 법령 1689(Claim of Right Act 1689)에 따라 메리 2세와 윌리엄 3세를 받아들였다.[27] 하지만 축출된 스튜어트 왕가는 자코비즘으로 알려진 정치적 불만의 초점이 되었다.[28]
1690년대 경제적 혼란 이후, 대영 제국으로서 잉글랜드와의 정치적 연합 움직임이 있었고, 1707년 5월 1일 연합법이 발효되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의회는 대영 의회로 통합되었다. 하원 513명에 스코틀랜드 의원 45명이, 상원 190명에 스코틀랜드 의원 16명이 추가되었다. 이는 스코틀랜드의 통화, 조세, 무역 규제 법률 체계를 대체하는 완전한 경제적 연합이었다.[29]
2. 1. 기원: 400–943
5세기경, 북부 브리튼은 여러 작은 왕국들로 나뉘어 있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네 왕국은 북동쪽의 픽트족 왕국, 서쪽의 달리아다 스코틀랜드인 왕국, 남서쪽의 스트래스클라이드 브리튼인 왕국, 그리고 남동쪽의 앵글족 왕국인 베르니시아였다. 베르니시아는 653년 데이라와 통합하여 노섬브리아를 형성했으며, 오늘날의 잉글랜드 북부까지 영토를 뻗고 있었다.[5]793년, 바이킹의 맹렬한 약탈이 아이오나와 린디스펀과 같은 수도원들을 시작으로 북부 브리튼 왕국들에 공포와 혼란을 야기했다. 오크니, 셰틀랜드, 그리고 서부 제도는 결국 노르드인들에게 함락되었다.[5] 이러한 위협은 픽트 왕국들의 장기적인 게일화 과정을 가속화했을 수 있으며, 픽트족은 게일어와 관습을 채택했다. 게일족(스코틀랜드인)과 픽트족 왕국들의 합병도 있었지만, 역사가들은 픽트족이 달리아다를 정복했는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에 대해 논쟁을 벌이고 있다.
840년대(전통적으로 843년으로 여겨짐)[6]에 키네드 맥알핀(케네스 맥알핀)이 "픽트족의 왕"으로 등극하면서 알핀 가문이 권력을 잡게 되었다.[7] 900년, 통합된 왕국의 왕으로 사망한 키네드 맥알핀의 후계자 중 한 명인 도널드 2세(도널드 2세)는 처음으로 ''rí Alban''(알바의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한 인물이었다. 라틴어 용어인 스코티아는 점차 이 왕들의 중심지인 포스 강 북쪽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고, 결국 그들의 왕이 통치하던 전체 지역은 영어로 스코틀랜드로 불리게 되었다.[8] 도널드의 후계자인 코산틴(컨스턴틴 2세)의 긴 통치 기간(900~942/3년)은 알바/스코틀랜드 왕국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여겨지며, 그는 스코틀랜드 기독교를 가톨릭 교회와 일치시킨 공로를 인정받았다.[9]
2. 2. 확장: 943–1513
말콤 1세는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을 합병했고[10], 인덜프는 로시안 일부를 합병했다.[10] 데이비드 1세는 "데이비드 혁명"[11][12]을 통해 봉건 제도를 도입하고, 왕립 자치 도시와 최초의 스코틀랜드 주화를 설립했으며, 종교 및 법률 개혁을 단행했다.[13]13세기까지 잉글랜드와의 국경은 유동적이었으나, 요크 조약(1237)을 통해 현재와 유사한 국경선이 확립되었다.[15]
알렉산더 3세는 라르그스 전투와 퍼스 조약 이후 노르웨이가 지배하던 서해안 지역을 합병했고[16], 맨섬은 14세기에 잉글랜드의 지배하에 들어갔다.[17]
에드워드 1세는 잠시 스코틀랜드 대부분을 점령했으나,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1296–1357)을 통해 로버트 1세와 그 후계자들은 독립을 쟁취했다.
15세기와 16세기 초, 스튜어트 왕조는 정치적 격변 속에서도 왕권을 강화하고 영토를 확장했다.[18] 1468년 오크니와 셰틀랜드 제도가 노르웨이 왕실로부터 스코틀랜드에 지참금으로 넘어왔고,[19] 1482년 베릭이 잉글랜드에 함락되었다.[18]
2. 3. 통합: 1513–1690
제임스 5세(James V of Scotland)와 메리 스튜어트(Mary, Queen of Scots) 치하에서 왕관과 궁정은 오랜 왕의 미성년 시절, 내전, 그리고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르네상스와 신군주론의 많은 속성을 지녔다.[21] 16세기 중반,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Scottish Reformation)은 칼뱅주의의 강한 영향을 받아 광범위한 우상 파괴와 장로교 조직 및 규율 시스템의 도입으로 이어졌고, 이는 스코틀랜드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22]16세기 후반, 제임스 6세(James VI and I)는 왕국에 상당한 권위를 가진 주요 지식인으로 부상했다.[23] 1603년 그는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왕위를 계승하여 왕관 연합을 만들었고, 세 국가는 각자의 정체성과 제도를 유지했다. 그는 또한 왕실 후원과 권력의 중심을 런던으로 옮겼다.[24]
제임스의 아들 찰스 1세(Charles I of England)가 스코틀랜드에 잉글랜드 종교적 합의의 요소들을 강요하려고 시도했을 때, 그 결과는 주교 전쟁(Bishops' Wars, 1637–1640)이었고, 이는 왕의 패배와 스코틀랜드에서 사실상 독립적인 장로교 동맹자 국가로 끝났다.[25] 이는 또한 삼국 전쟁을 촉진하는 데 기여했으며, 스코틀랜드인들은 주요 군사 개입을 수행했다.
찰스 1세의 패배 후,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 내전(Second English Civil War)에서 왕을 지지했고, 그의 처형 후 그의 아들 찰스 2세(Charles II of England)를 왕으로 선포하여 1650-1652년 영국-스코틀랜드 전쟁(Anglo-Scottish War, 1650–1652)을 의원파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이 이끄는 잉글랜드의 신흥 공화국 정권에 맞서 벌였다. 그 결과 일련의 패배와 잉글랜드 연방(Commonwealth of England, Scotland and Ireland (1653–1660))에 스코틀랜드가 짧은 기간 동안 편입되는 결과를 가져왔다.[26]
1660년 왕정 복고 이후, 스코틀랜드는 별도의 지위와 제도를 회복했지만 정치적 권력의 중심은 런던에 남아 있었다.[27] 1688-1689년 명예혁명에서 제임스 2세(James VII of England)가 그의 딸 메리 2세(Mary II of England)와 남편 윌리엄 3세(William III of England)에게 잉글랜드에서 축출되었을 때, 스코틀랜드는 권리 청구 법령 1689(Claim of Right Act 1689)에 따라 그들을 받아들였다.[27] 하지만 축출된 스튜어트 왕가(House of Stuart)의 주요 세습 계승자는 자코비즘으로 알려진 정치적 불만의 초점이 되어 주로 스코틀랜드 고지대를 중심으로 일련의 침략과 반란을 일으켰다.[28]
2. 4. 연합 조약: 1690–1707
1690년대 스코틀랜드는 심각한 경제적 혼란을 겪었고, 이는 대영 제국으로서 잉글랜드와의 정치적 연합으로 이어지는 움직임을 촉발했다.[29] 1707년 5월 1일, 연합법이 발효되면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의회는 대영 의회로 통합되었고, 이 의회는 웨스트민스터에서 회의를 열었다. 대영 의회는 대체로 잉글랜드의 전통을 중단 없이 계승했으며, 하원 513명의 의원에 45명의 스코틀랜드 의원이, 상원 190명의 의원에 16명의 스코틀랜드 의원이 추가되었다.[29] 이는 완전한 경제적 연합으로, 스코틀랜드의 통화, 조세 및 무역 규제 법률 체계를 대체했다.[29]이러한 통합 배경에는 항해 조례로 인한 스코틀랜드 경제의 어려움이 있었다. 스코틀랜드는 외국으로 간주되어 런던이나 식민지 항구에서 배척당했고, 경제는 쇠퇴했다. 스코틀랜드 의회는 1704년 안전보장법으로 독자적인 왕을 세울 권리를 선언했지만, 잉글랜드는 1705년 외국인법으로 맞섰다. 결국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에 굴복했고, 달리엔 계획마저 실패하면서 경제 재건은 불가능해졌다. 앤 여왕 때, 스코틀랜드 의회는 1707년 연합 조약에 의해 독립을 포기, 잉글랜드와 공식적으로 통합되어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되었다.
3. 정부
중세 스코틀랜드의 군주제는 이동성을 띠었으며, 스콘은 가장 중요한 장소 중 하나였다. 스터링과 퍼스는 후기 중세 시대에 중요해졌으며, 15세기 후반 에든버러가 수도로 발전하기 전까지 왕실은 정부의 핵심 요소였다.[31] 후기 중세 시대에는 유럽 다른 지역의 새로운 군주들과 관련된 많은 권력 확장을 보였다.[32] 16세기에는 조지 부캐넌에 의해 입헌 군주제와 저항 이론이 제기되었으나, 제임스 6세는 신권 왕권 이론을 발전시켰다.[33] 궁정은 정치 생활의 중심이었으며, 1603년 왕관의 연합으로 사실상 해체될 때까지 주요 전시 및 예술 후원의 중심지였다.[33]
스코틀랜드 왕실은 고등 집사, 재무관, 고등 경찰관, 마샬 백작 및 대법관을 포함한 서유럽 궁정의 전통적인 직책을 채택했다.[34] 비밀 의회는[36] 16세기 중반에 발전했으며, 1603년부터 스튜어트 군주가 잉글랜드에서 통치하기 시작한 후에도 정부 행정의 중심에 남았다.[37] 그러나 1707년 연합 조약 이후 런던에서 직접 통치하게 되면서 폐지되었다.[38]
스코틀랜드 의회는 주요 법적 기관으로 부상하여 조세와 정책에 대한 감독권을 얻었다.[39] 중세 말엽에는 거의 매년 회의를 열었는데, 이는 당시 빈번한 왕실 미성년과 섭정 때문이었을 수 있으며, 이는 군주제에 의해 소외되는 것을 막았을 수 있다.[40] 근세 초기에 의회는 법률과 조세를 제공함으로써 국가 운영에 필수적이었지만, 잉글랜드의 상대 기관만큼 국가 생활의 중심에는 결코 이르지 못했다.[41]
초기에 국왕은 모어마어(후기 백작)와 토이섹(후기 테인)의 거대 영주들에게 의존했지만, 데이비드 1세의 통치 이후 보안관구가 도입되어 더 직접적인 통제를 허용하고 점차 주요 영주의 권력을 제한했다.[42] 17세기에 치안 판사와 공급 위원의 창설은 지방 정부의 효율성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었다.[43]
4. 법
스코틀랜드 법은 중세 시대에 독자적인 체계로 발전했으며, 16세기와 17세기에 개혁되고 성문화되었다. 11세기 이전 스코틀랜드 법은 켈트, 브리톤, 아일랜드, 앵글로색슨의 관습이 혼합된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46] 브리톤과 스코트 사이의 법률은 친족 집단의 연대성에 기반한 보상 체계를 제시했다.[47] 스칸디나비아 지배 지역에서는 우달법이 법 체계의 기반을 이루었다.[48]
스코틀랜드의 데이비드 1세(David I of Scotland) 통치 시대에 도입된 봉건제는 스코틀랜드 법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50] 보안관은 사법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51] 버러는 지역 법을 가지고 있었으며,[53] 교회 법정은 결혼, 상속 등의 문제에 대한 관할권을 가졌다. 대법원장은 왕에게 직접 보고하는 법정을 개최했다.[55] 스코틀랜드 관습법은 켈트 법과 앵글로-노르망디 관행을 통합하여 발전했다.[56] 14세기부터 레기암 마제스타템과 콰이니암 아타치아멘타와 같은 법률 문헌이 남아있다.[60]
스튜어트 왕조는 관습법에 대한 공격을 가했고, 이는 스코틀랜드 관습법의 영향력 확대로 이어졌다.[61] 15세기 후반에는 스코틀랜드 법을 성문화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64] 제임스 4세 치하에서 사법 기능이 합리화되었고, 왕립 사법 대학이 설립되어 법률 전문가 양성이 이루어졌다.[67] 1672년, 최고 항소 법원인 고등 법원이 설립되었다.[68]
5. 화폐
데이비드 1세는 스스로 화폐를 주조한 것으로 알려진 최초의 스코틀랜드 국왕이다. 에든버러, 버윅, 록스버러(Roxburgh)에 조폐국이 생겼다.[69] 초기 스코틀랜드 동전은 영국 동전과 유사했지만, 국왕의 초상이 정면이 아닌 옆모습으로 표현되었다.[71] 주조된 동전의 수는 적었고, 이 시기에 영국 동전이 더 중요한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69] 최초의 금화는 데이비드 2세 시대의 노블(6실링 8펜스)이었다.[70] 제임스 1세 치하에서는 빌론(은과 기본 금속의 합금) 페니와 하프페니가 도입되었고, 제임스 3세 치하에서는 구리 파딩이 등장했다.[70] 제임스 5세 통치 기간에는 보비(1½펜스)와 하프-보비가 발행되었고, 메리 스튜어트 통치 기간에는 "서민들이 빵, 음료, 고기, 생선을 살 수 있도록" 하드헤드라는 2펜스짜리 동전이 발행되었다. 1603년 이후 빌론 화폐는 단종되었지만, 구리 2펜스짜리 동전은 1707년 연합 조약까지 계속 발행되었다.[69]
초기 스코틀랜드 동전은 은 함량이 영국 동전과 거의 동일했지만, 1300년 이후로는 영국 동전보다 은 함량이 더 빠르게 감소하기 시작했다. 1300년부터 1605년까지 스코틀랜드 동전은 10년마다 평균 12%의 은 가치를 잃었는데, 이는 영국 동전의 감소율보다 세 배나 높았다. 스코틀랜드 페니는 1484년경에는 기본 금속 동전이 되었고, 1513년 이후부터는 사실상 별개의 동전으로 사라졌다.[71] 1356년 영국의 선포는 저품질의 스코틀랜드 동전의 영국 내 유통을 금지했다. 1603년 스코틀랜드와 영국의 왕관이 통합된 후, 스코틀랜드 파운드는 스코틀랜드 파운드 12실링이 영국 파운드 스털링 1파운드와 같도록 파운드 스털링에 맞춰 개혁되었다.[69] 스코틀랜드 의회는 1695년에 스코틀랜드 은행을 설립하는 제안을 채택했다.[72] 은행은 1704년부터 스코틀랜드 파운드 12실링의 액면가를 가진 파운드 지폐를 발행했다. 1707년 연합 조약 이후 스코틀랜드 통화는 폐지되었고, 유통되던 스코틀랜드 동전은 영국 표준에 따라 재주조되기 위해 회수되었다.[73]
6. 지리
1707년 국경 당시 스코틀랜드 왕국은 잉글랜드와 웨일스를 합친 면적의 절반 정도였지만, 많은 만과 섬, 내륙 로크들로 인해 약 4,000 마일 (6,400 km)의 해안선을 가지고 있었다.[75] 790개가 넘는 해양 섬이 있으며, 대부분 셰틀랜드, 오크니, 헤브리디스 제도(내부 헤브리디스 제도와 외부 헤브리디스 제도로 나뉨)의 네 개 주요 그룹에 속한다.[74]
스코틀랜드 지리의 결정적인 요소는 북쪽과 서쪽의 고지대와 섬, 그리고 남쪽과 동쪽의 저지대 사이의 구분이다. 고지대는 그레이트 글렌 단층선에 의해 북서부 고지대와 그램피언 산맥으로 더 나뉜다. 저지대는 비옥한 중앙 저지대와 남부 고지대의 더 높은 지형으로 나뉘는데, 여기에는 잉글랜드와의 국경이 지나가는 체비엇 힐스가 포함된다.[76] 중앙 저지대는 평균 약 50 마일 (80 km)의 너비를 가지며,[77] 대부분의 양질의 농지가 있고 교통이 용이하여 대부분의 도시화와 기존 정부 요소를 지원할 수 있었다.[78]
동대서양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스코틀랜드는 강수량이 매우 많다. 현재 동쪽은 연간 약 700mm, 서쪽은 1,000mm가 넘는다. 이는 광범위한 황야의 확산을 촉진했으며, 그 산성도는 강한 바람과 해풍과 결합하여 대부분의 섬을 나무가 없는 곳으로 만들었다. 언덕, 산, 갯벌, 습지의 존재는 내륙 교통과 정복을 매우 어렵게 만들었다.[75] 고지대와 고지대는 비교적 짧은 생장 기간을 가졌는데, 그램피언 산맥 상부의 극단적인 경우 얼음이 없는 계절이 4개월 이하였고, 대부분의 고지대와 고지대는 7개월 이하였다. 근대 초기에는 소빙하기의 영향도 보였는데, 1564년에는 33일 동안 계속되는 서리가 내려 강과 로크가 얼었고, 1690년대까지 일련의 생계 위기가 발생했다.[79]
7. 인구
10세기에 알바 왕국이 성립된 이후 1349년 흑사병이 도착하기 전까지, 경작 가능한 토지의 양을 기반으로 한 추정에 따르면 인구는 50만 명에서 100만 명으로 증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80] 흑사병의 영향에 대한 신뢰할 만한 기록은 없지만, 그 이후 수십 년 동안 버려진 토지에 대한 많은 일화적 언급이 있다. 만약 영국에서와 같은 양상을 따랐다면, 15세기 말까지 인구는 50만 명까지 감소했을 가능성이 있다.[81]
후기 하이랜드 청소와 산업혁명 이후 인구 재분배 상황과 비교할 때, 이러한 숫자는 왕국 전역에 비교적 고르게 분포되어 있었을 것이며, 대략 절반이 테이 강 북쪽에 살았을 것이다.[82] 인구의 약 10%는 후기 중세 시대에 성장한 많은 버러(burgh) 중 하나에 살았는데, 주로 동부와 남부에 위치했다. 이 도시들의 평균 인구는 약 2,000명이었지만, 1,000명 미만인 도시도 많았고, 가장 큰 도시인 에든버러는 중세 말까지 10,000명이 넘는 인구를 보유했을 가능성이 있다.[83]
일반적으로 식량 수요 증가를 반영하는 물가 상승은 16세기 전반기에 인구가 증가했고, 1595년 기근 이후에는 안정세를 보였음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17세기 초에는 물가가 비교적 안정적이었기 때문이다.[84] 1691년 난로세(hearth tax) 반환 자료를 기반으로 한 계산에 따르면 인구는 1,234,575명이었지만, 이 수치는 1690년대 후반의 이후 기근으로 인해 심각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85] 1750년까지 에든버러는 교외 지역을 포함하여 57,000명에 달했다. 같은 시기에 10,000명이 넘는 다른 도시는 글래스고(32,000명), 애버딘(약 16,000명), 던디(12,000명)였다.[86]
8. 언어
역사적 자료와 지명 증거에 따르면, 북쪽의 피크트어와 남쪽의 컴브리아어는 게일어, 고대 영어, 그리고 후대의 노르드어에 의해 대체되었다.[87] 중세 초기까지 스코틀랜드 대부분의 사람들은 게일어를 사용했으며, 당시에는 '스코틀랜드어' 또는 라틴어로 ''lingua Scotica''라고 불렸다.[88] 북쪽 섬들에서는 스칸디나비아 점령자와 정착민이 가져온 노르드어가 지역 언어인 노른어로 발전하여 18세기 말까지 남아 있었고,[89] 아우터 헤브리디스에서는 16세기까지 노르드어가 구어로 남아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90] 프랑스어, 플랑드르 방언, 특히 영어는 스코틀랜드 자치 도시들의 주요 언어가 되었는데, 이 도시들은 대부분 남동부에 위치해 있었고, 이 지역에는 이미 앵글리아 정착민들이 고대 영어의 일종을 가져왔다. 12세기 후반, 작가 애덤 오브 드라이버러는 저지대 로디언을 "스코틀랜드 왕국 내 영국인들의 땅"이라고 묘사했다.[91] 데이비드 1세 즉위 이후, 게일어는 왕실의 주요 언어가 아니었으며, 프랑스어로 대체되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는 당대 연대기, 문학 및 프랑스어로 번역된 행정 문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92][93]
중세 후기에는 당시 영어라고 불렸던 초기 스코틀랜드어가 하이랜드와 아일랜드, 그리고 갤로웨이를 제외한 왕국의 지배적인 구어가 되었다.[94] 이는 주로 고대 영어에서 유래했으며, 게일어와 프랑스어의 요소가 추가되었다. 북부 영국에서 사용되는 언어와 유사하지만, 14세기 후반부터는 별개의 방언이 되었다.[95] 지배 엘리트 계층이 프랑스어를 점차 버리면서 초기 스코틀랜드어를 채택하기 시작했다. 15세기에는 정부의 언어가 되었고, 제임스 1세 통치 이후 의회 법률, 의회 기록 및 재무부 회계는 거의 모두 이 언어를 사용했다. 그 결과, 테이 강 북쪽에서 한때 지배적이었던 게일어는 꾸준히 쇠퇴하기 시작했다.[95] 저지대 작가들은 게일어를 2류의 시골스럽고 심지어 우스꽝스러운 언어로 다루기 시작하여 하이랜드에 대한 태도를 형성하고 저지대와의 문화적 격차를 만들었다.[95]
16세기 중반부터, 왕실 및 정치적 상호 작용의 발전으로 인해 스코틀랜드어는 남부 영국의 발전하는 표준 영어의 영향을 점점 더 많이 받았다.[96] 영국에서 인쇄된 책의 영향력과 이용 가능성이 증가함에 따라 스코틀랜드의 대부분의 글은 영국식으로 작성되었다.[97] 제임스 6세는 그의 전임자들과는 달리 게일어 문화를 경멸했다.[98] 그는 스코틀랜드 "시"의 미덕을 칭찬했지만, 영국 왕위에 오른 후 남부 영국의 언어를 점점 더 선호했다. 1611년 교회는 킹 제임스 성경을 채택했다. 1617년에는 스코틀랜드인과 영국인이 "서로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다르지 않기" 때문에 런던 항구에서 통역관이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선언되었다. 제니 워멀드는 제임스가 "게일어가 최하위이고 영어가 최상위인 3계층 시스템"을 만들었다고 설명한다.[99]
9. 종교
알바 왕국의 기초가 될 픽트족과 스코틀랜드 왕국은 5세기부터 7세기까지 성 콜룸바와 같은 인물들과 관련된 아일랜드-스코틀랜드 선교사들에 의해 대부분 개종되었다. 이러한 선교는 광대한 지역을 담당하는 수도원 기관과 대학 교회를 설립하는 경향이 있었다.[100] 이러한 요인들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주교보다 수도원장이 더 중요하고, 성직자 독신에 대한 태도가 더 느슨하며, 로마 기독교와는 특히 삭발 방식과 부활절 계산 방법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는 독특한 형태의 켈트 기독교를 확인했다. 이러한 문제의 대부분은 7세기 중반까지 해결되었다.[101] 10세기부터 스칸디나비아 스코틀랜드의 재개종 이후, 교황의 권위 아래 있는 기독교는 왕국의 지배적인 종교였다.[102]
노르만 시대에 스코틀랜드 교회는 일련의 개혁과 변혁을 겪었다. 왕실과 평신도의 후원으로 지역 교회를 중심으로 한 더 명확한 교구 구조가 개발되었다.[103] 개혁된 수도원의 대륙 형태를 따른 많은 새로운 재단들이 우세해지기 시작했고, 스코틀랜드 교회는 잉글랜드로부터 독립을 확립하고, 더 명확한 교구 구조를 발전시켜 "로마 교황청의 특별한 딸"이 되었지만, 대주교 형태의 지도력은 부족했다.[104] 후기 중세 시대에 가톨릭 교회의 분열 문제로 인해 스코틀랜드 왕관이 고위 임명에 대한 더 큰 영향력을 얻게 되었고, 15세기 말까지 두 개의 대주교구가 설립되었다.[105] 14세기 흑사병 이후 성직자의 수와 질에 대한 문제와 이 시대의 이단 증거에도 불구하고, 스코틀랜드의 교회는 16세기 이전에는 비교적 안정적이었다.[105]
16세기 동안 스코틀랜드는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을 겪었고, 그 결과 대부분 칼뱅주의적인 국교인 스코틀랜드 교회('더 커크')가 설립되었는데, 이 교회는 장로교적 관점이 강했고, 주교의 권한을 크게 축소했지만, 폐지하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마르틴 루터의 가르침, 그 후에는 장 칼뱅의 가르침이 대륙과 영국의 대학교를 방문했던 스코틀랜드 학자들을 통해 스코틀랜드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특히 루터파 스코틀랜드인 패트릭 해밀턴의 업적이 중요했다.[106] 1528년 그와 다른 프로테스탄트 설교자들의 처형과 1546년 세인트앤드루스에서 화형당한 츠빙리의 영향을 받은 조지 위샤트의 처형은 이러한 사상의 성장을 막지 못했다. 위샤트의 지지자들은 세인트앤드루스 성을 점령하여 1년 동안 유지했지만, 프랑스군의 도움으로 패배했다. 사제 존 녹스를 포함한 생존자들은 노예선에 처해졌고, 프랑스에 대한 분노와 프로테스탄트 대의를 위한 순교자를 만들어냈다.[107] 1560년까지 비교적 소규모의 프로테스탄트 그룹이 스코틀랜드 교회에 개혁을 강요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교황의 관할권과 미사를 거부하는 신앙 고백은 1560년 의회에서 채택되었다.[108] 녹스가 이끄는 개혁가들의 칼뱅주의는 장로교 시스템을 채택하고 중세 교회의 정교한 장식 대부분을 거부하는 합의로 이어졌다. 이것은 종종 성직자 임명을 통제했던 지역 귀족들에게 새로운 교회 내에서 상당한 권력을 부여했고, 광범위하지만 일반적으로 질서 정연한 우상 파괴를 초래했다. 이 시점에서 대다수의 인구는 아마도 여전히 가톨릭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교회는 고지대와 섬 지역에 침투하기 어려웠지만, 다른 곳의 개혁과 비교하여 비교적 적은 박해로 진행된 점진적인 개종과 통합 과정을 시작했다.[109]
1635년 찰스 1세는 그를 교회의 수장으로 만들고, 인기 없는 의식을 제정하고, 새로운 예배 의식의 사용을 강요하는 대교령을 승인했다. 1637년에 예배 의식이 나타났을 때, 그것은 영국식 기도서로 여겨져 분노와 광범위한 폭동을 야기했다.[110] 1638년 2월 28일, 스코틀랜드 사회의 여러 부문의 대표자들이 국가 계약을 작성하여 왕의 예배 혁신에 반대했다.[111] 왕의 지지자들은 반란을 진압할 수 없었고, 왕은 타협을 거부했다. 같은 해 12월, 글래스고에서 열린 총회 회의에서 스코틀랜드 주교들이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축출되었고, 그 후 완전한 장로교 기반으로 교회가 설립되었다. 그 결과 발생한 비숍 전쟁에서의 승리는 장로교 교회를 확보했고 1640년대 내전의 발발을 촉진했다.[112]
1660년 왕정 복고에서 1633년까지의 법률이 폐지되어 비숍 전쟁에서 코브넌터의 이득을 제거했지만, 교회 회의, 장로회, 총회의 규율은 갱신되었다.[114] 주교직의 재도입은 강력한 장로교적 동정심을 가진 지역인 국가 남서부에서 특히 문제가 되었다. 공식 교회를 버리고, 이곳의 많은 사람들은 집회로 알려진 제외된 목사들이 이끄는 불법 야외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했다.[115] 1680년대 초, 프로테스탄트 역사에서 "킬링 타임"으로 알려지게 된 더 강렬한 박해 단계가 시작되었다.[116] 영광스러운 혁명 이후, 장로교가 복원되었고, 일반적으로 제임스 7세를 지지했던 주교들이 폐지되었다. 그러나 교회보다 더 관용적이었던 윌리엄은 혁명 후 제외된 성공회 성직자들을 복원하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그 결과 서부와 북부, 특히 성공회 신자와 가톨릭 신자의 상당한 소수 민족이 있는 교회가 파벌로 나뉘었다.[117]
10. 교육
기독교 확립으로 라틴어가 스코틀랜드에 전해졌고, 수도원은 지식과 교육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중세 후기에는 성가대 학교와 문법 학교가 나타났으며, 시골 지역에서는 소규모 학교들이 기초 교육을 제공했다.[102] 1496년 교육법은 재산이 있는 남작과 자유 소유주들의 아들들은 모두 문법 학교에 가서 '완벽한 라틴어'를 배우도록 규정했다.[102] 15세기까지 대학에 진학하려는 이들은 영국이나 유럽 대륙으로 가야 했으나, 1413년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 1451년 글래스고 대학교, 1495년 애버딘 대학교가 설립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102]
1560년 '교육 규정 제1서'는 모든 교구에 학교를 세우는 계획을 제시했지만, 재정 문제로 실현되지 못했다.[102] 자치 도시에서는 기존 학교들이 유지되었고, 성가 학교와 여러 신설 학교들은 개혁된 문법 학교 또는 일반 교구 학교로 바뀌었다.[102] 1616년 추밀원 법령은 모든 교구에 학교 설립을 명령했고, 1633년 교육법으로 지역 지주에게 세금이 부과되었다.[102] 1696년 스코틀랜드 의회 법령은 모든 교구에 학교를 설립하려는 목표를 다시 한번 강조했다.[102]
종교 개혁 이후 스코틀랜드 대학교들은 앤드루 멜빌과 관련된 일련의 개혁을 겪었다.[102] 멜빌은 '총장 제도'를 대신하여 전문 교수진을 도입했고, 형이상학은 폐지되었으며, 고대 그리스어가 1학년 필수 과목이 되었다.[102] 에든버러 대학교는 1582년에 설립되었다.[102]
11. 군사
17세기 중반 잉글랜드 내전 이전까지 스코틀랜드 왕국에는 상비군이 없었다. 초기 중세 시대 스코틀랜드의 전쟁은 주로 가신 병력으로 구성된 소규모 전투 부대가 약탈과 저강도 전쟁에 종사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고중세 시대가 되면서 스코틀랜드 국왕은 주로 갑옷이 부족한 창병과 궁수로 구성된 "공통 군대"의 일원으로 단기간에 수만 명의 병력을 지휘할 수 있었다. 12세기 "데이비드 혁명" 이후 스코틀랜드에 봉건주의 요소가 도입되면서 기마 기사와 중장갑 기사 소수가 이 군대에 추가되었다.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이후 스코틀랜드와 프랑스 간의 오래된 동맹은 백년 전쟁 동안 국가의 군사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후기 중세 시대 스튜어트 왕조 시대에는 무장 기사와 궁수와 같은 전문 병력이 ''만렌트'' 계약으로 고용되어 군대가 더욱 강화되었다. 궁수들은 영국의 우수성에 대응하기 위해 15세기 프랑스 군대에서 용병으로 인기가 많았고, 스코틀랜드 근위대와 같이 프랑스 왕실 근위대의 주요 요소가 되었다.[161]
스튜어트 왕조는 더 긴 파이크와 대포의 광범위한 사용과 같은 대륙 전쟁의 주요 혁신을 채택했다. 그러나 16세기 초 스코틀랜드에서 결집된 가장 큰 군대 중 하나는 1513년 플로든 전투에서 영국군에게 패배했다.[162] 16세기에 왕실은 군수품 공급에 점점 더 큰 역할을 했다.[163] 파이크가 창을 대체하기 시작했고 스코틀랜드인들은 활에서 화약 무기로 전환하기 시작했다.[164] 봉건적 중기병은 스코틀랜드 군대에서 사라지기 시작했고 스코틀랜드는 상당히 많은 수의 경기병을 운용했는데, 이들은 종종 국경 지대에서 징집되었다.[165] 제임스 4세는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에서 전문가들을 데려왔고 1511년에 주철 공장을 설립했다.[146] 화약 무기는 15세기 중반부터 성 건축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166]
17세기 초 상당수의 스코틀랜드인들이 삼십년 전쟁에 참전한 외국 군대에서 복무했다.[167] 주교 전쟁에서 찰스 1세와의 무력 충돌 가능성이 커짐에 따라 수백 명의 스코틀랜드 용병들이 해외 근무에서 귀국했다.[168] 스코틀랜드 보병은 파이크와 총을 결합하여 무장했고, 기병은 권총과 칼을 장착했다.[170][171]
왕정 복고 이후 국왕 칙령 평의회는 수 개의 보병 연대와 소수의 기병 부대를 설립했고 영국 모델을 기반으로 국가 민병대를 설립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상비군은 주로 코버넌터 반란 진압과 동부의 캐머로니언이 수행한 게릴라전에 사용되었다.[174] 파이크병은 17세기 후반에 덜 중요해졌고 소켓식 총검의 도입 이후 완전히 사라졌으며, 마치락 소총은 플린트락으로 대체되었다.[174] 연합 조약 당시 스코틀랜드 왕국은 보병 7개 부대, 기병 2개 부대, 근위기병 1개 부대의 상비군을 보유하고 있었고, 에든버러, 덤바턴 성, 스털링의 주둔 성에는 다양한 수준의 요새 포병이 있었는데, 이들은 영국군에 편입되었다.[177]
11. 1. 해군
중세 기록에는 사자왕 윌리엄[136]과 알렉산더 2세[137]를 포함한 스코틀랜드 왕들이 함대를 지휘했다는 언급이 있다. 독립 전쟁에서 로버트 1세가 성공한 이유 중 하나는 섬들로부터 해군을 동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스코틀랜드 해군은 1313년과 1317년 맨 섬 침략과 1315년 아일랜드 침략을 가능하게 했다. 또한 1318년 버윅 봉쇄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139] 14세기 후반, 영국과의 해전은 주로 고용된 스코틀랜드인, 플랑드르인, 프랑스인 상선과 사략선에 의해 수행되었다.[140]제임스 1세는 해군력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1424년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후, 리쓰에 조선소, 해양 물품 보관소, 작업장을 설립했다.[140] 15세기에 왕실 해군을 창설하려는 여러 시도가 있었다. 제임스 4세는 뉴헤이븐에 항구를, 에어스의 풀즈에 조선소를 설립하여 이 사업을 새로운 기반 위에 올려놓았다.[141] 그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큰 배였던 ''그레이트 마이클''[142]을 포함하여 총 38척의 배를 확보했다.[143]

스코틀랜드 선박은 사략선에 대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고, 섬들에서 왕을 따라 원정에 참여했으며, 스칸디나비아와 발트해의 분쟁에 개입했지만,[140] 플로든 전투 이후 매각되었다. 1516년 이후 스코틀랜드 해군의 노력은 사략선 선장과 고용된 상선에 의존하게 되었다.[140]
1626년에는 3척의 함대가 구매되어 장비되었다.[143] 또한 여러 척의 사략선 함대도 있었다.[147] 주교 전쟁 동안 왕은 스코틀랜드를 봉쇄하려고 시도했고, 스코틀랜드 사략선은 많은 영국 함선을 나포했다.[151] 1690년대에는 상인들이 다리엔 계획을 위해 5척의 소규모 함대를 설립했고,[157] 전문 해군이 설립되어 3척의 특수 건조 군함이 건조되었다. 1707년 연합 조약 이후 이 선박들은 영국 해군으로 이관되었다.[158]
11. 2. 육군
17세기 중반 잉글랜드 내전 이전까지 스코틀랜드 왕국에는 상비군이 없었다. 초기 중세 시대 스코틀랜드의 전쟁은 주로 가신 병력으로 구성된 소규모 전투 부대가 약탈과 저강도 전쟁에 종사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고중세 시대가 되면서 스코틀랜드 국왕은 주로 갑옷이 부족한 창병과 궁수로 구성된 "공통 군대"의 일원으로 단기간에 수만 명의 병력을 지휘할 수 있었다. 12세기 "데이비드 혁명" 이후 스코틀랜드에 봉건주의 요소가 도입되면서 기마 기사와 중장갑 기사 소수가 이 군대에 추가되었다. 이러한 군대는 일반적으로 규모가 더 크고 전문적인 영국군에 맞설 수 없었지만, 1314년 배녹번 전투에서 로버트 1세가 스코틀랜드 독립을 확보하는 데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159]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이후 스코틀랜드와 프랑스 간의 오래된 동맹이 특히 백년 전쟁 동안 국가의 군사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후기 중세 시대 스튜어트 왕조 시대에는 특히 무장 기사와 궁수와 같은 전문 병력이 ''만렌트'' 계약으로 고용되어 군대가 더욱 강화되었다. 이는 같은 시대 영국의 계약서와 유사했다.[160] 궁수들은 영국의 우수성에 대응하기 위해 15세기 프랑스 군대에서 용병으로 매우 인기가 많아졌고, 스코틀랜드 근위대와 같이 프랑스 왕실 근위대의 주요 요소가 되었다.[161] 스튜어트 왕조는 또한 더 긴 파이크와 대포의 광범위한 사용과 같은 대륙 전쟁의 주요 혁신을 채택했다. 그러나 16세기 초 스코틀랜드에서 결집된 최고의 무장과 가장 큰 군대 중 하나는 1513년 플로든 전투에서 영국군에게 패배했고, 많은 일반 병사, 귀족 상당수, 그리고 제임스 4세 국왕이 사망했다.[162] 16세기에 왕실은 군수품 공급에 점점 더 큰 역할을 했다.[163] 파이크가 창을 대체하기 시작했고 스코틀랜드인들은 활에서 화약 무기로 전환하기 시작했다.[164] 봉건적 중기병은 스코틀랜드 군대에서 사라지기 시작했고 스코틀랜드는 상당히 많은 수의 경기병을 운용했는데, 이들은 종종 국경 지대에서 징집되었다.[165] 제임스 4세는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에서 전문가들을 데려왔고 1511년에 주철 공장을 설립했다.[146] 화약 무기는 15세기 중반부터 성 건축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166]17세기 초 상당수의 스코틀랜드인들이 삼십년 전쟁에 참전한 외국 군대에서 복무했다.[167] 주교 전쟁에서 찰스 1세와의 무력 충돌 가능성이 커짐에 따라 수백 명의 스코틀랜드 용병들이 해외 근무에서 귀국했는데, 여기에는 알렉산더와 데이비드 레슬리와 같은 경험 많은 지휘관들이 포함되었고, 이 베테랑들은 신병 훈련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168] 이러한 시스템은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내전에 개입한 코버넌터 군대의 기반이 되었다.[169] 스코틀랜드 보병은 서유럽에서 거의 보편적이었던 것처럼 파이크와 총을 결합하여 무장했다. 스코틀랜드 군대에는 활, 로카버 도끼, 할버드를 포함한 다양한 무기를 가진 사람들이 있었을 수도 있다.[170] 대부분의 기병은 권총과 칼을 장착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창을 사용한 사람들도 있었다는 증거가 있다.[171] 제임스 그레이엄, 먼트로즈 후작(1643~1644)이 이끈 왕당파 군대와 글렌케언의 봉기(1653~1654)는 파이크와 총으로 무장한 전통적인 보병으로 주로 구성되었다.[172] 먼트로즈의 군대는 포위전에 적합한 중포가 부족했고 소규모 기병대만 있었다.[173]
왕정 복고 이후 국왕 칙령 평의회는 수 개의 보병 연대와 소수의 기병 부대를 설립했고 영국 모델을 기반으로 국가 민병대를 설립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상비군은 주로 코버넌터 반란 진압과 동부의 캐머로니언이 수행한 게릴라전에 사용되었다.[174] 파이크병은 17세기 후반에 덜 중요해졌고 소켓식 총검의 도입 이후 완전히 사라졌으며, 마치락 소총은 더 안정적인 플린트락으로 대체되었다.[174] 명예혁명 직전 스코틀랜드의 상비군은 여러 연대의 약 3,000명의 병력과 주요 주둔 도시의 268명의 베테랑으로 구성되었다.[175] 명예혁명 이후 스코틀랜드는 플랑드르에서의 구년 전쟁(1689~1697)을 시작으로 윌리엄 3세의 대륙 전쟁에 참전했다.[176] 연합 조약 당시 스코틀랜드 왕국은 보병 7개 부대, 기병 2개 부대, 그리고 근위기병 1개 부대의 상비군을 보유하고 있었고, 에든버러, 덤바턴 성, 스털링의 주둔 성에는 다양한 수준의 요새 포병이 있었는데, 이들은 영국군에 편입되었다.[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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