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친위대 엽기병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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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국친위대 엽기병연대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집트에서 프랑스로 귀환할 때 데려온 부대에서 기원한 프랑스 근위 기병 연대이다. 1800년 기병 샤쇠르 중대로 창설되어 마렝고 전투에 참전했으며, 1804년 황실 근위대에 소속되어 아우스터리츠 전투, 아일라우 전투 등 나폴레옹 전쟁의 주요 전투에서 활약했다. 1812년 러시아 원정에 참전했고, 1813년에는 연대가 9개 소대로 확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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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친위대 엽기병연대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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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 정보 | |
부대 명칭 | 엽기병 연대 |
원어 명칭 | Chasseurs à Cheval (샤쇠르 아 슈발) |
별칭 | 천하무적 (Invincibles) |
또 다른 별칭 | 귀염둥이들 (The Pet Children) |
창설 | 1800년 |
해체 | 181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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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국가 | 프랑스 제1제국 |
군 종류 | 제국친위대 |
병과 | 경기병 |
역할 | 황제 호위대 |
규모 | 1개 연대 (최대 규모일 때 2000명) |
본부 | 파리 에콜 밀리테르 |
후원자 | 황제 |
지휘관 | |
주요 지휘관 | 외젠 드 보아르네 |
2인자 | 니콜라 달만 |
전투 참여 | |
주요 전투 | 마렝고, 울름, 아우스터리츠, 아일라우, 프리틀란트, 에크뮐, 바그람, 스몰렌스크, 보로디노, 말로야로슬라베츠,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하나우, 샤토티에리, 크라오네, 워털루 |
기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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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제국친위대 엽기병연대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개인 호위대에서 출발하여 프랑스 제1제국 시기 황실 근위대의 핵심적인 기병 연대로 발전했다. 이들은 나폴레옹 전쟁 기간 내내 황제를 가장 가까이에서 호위하는 영예로운 임무를 수행했으며, 마렝고 전투, 아우스터리츠 전투, 아일라우 전투, 바그람 전투, 러시아 원정 등 주요 전역에 참전하여 활약했다. 특히 나폴레옹 1세는 이 연대의 상징인 녹색 대령 제복을 공식 석상이나 초상화에서 즐겨 입어, 연대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연대의 구체적인 창설 과정, 전투 기록, 지휘관 변천 등 자세한 역사는 아래 하위 문단에서 다룬다.
2. 1. 기원과 초기 편성 (1799년 ~ 1803년)

1799년 8월 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이집트 원정에서 프랑스로 돌아오면서 가장 헌신적인 병사들로 구성된 Guides à cheval|기병 호위병프랑스어 180명과 Guides à pied|보병 호위병프랑스어 125명을 데려왔다. 18 브뤼메르 쿠데타 이후 프랑스 남부에 머물던 이 호위병들은 파리로 소환되어 Caserne de Babylone|바빌론 병영프랑스어에 주둔하게 되었다. 11월 28일, Garde du Directoire|총재 정부 근위대프랑스어는 Garde des Consuls|집정 정부 근위대프랑스어로 개편되었으나, 이때까지 기병 샤쇠르에 대한 공식적인 언급은 없었다.
1800년 1월 3일 칙령으로 Chasseurs à cheval|기병 샤쇠르프랑스어 중대가 공식적으로 창설되었다. 초대 지휘관은 나폴레옹의 의붓아들인 대위 외젠 드 보아르네였으며, 그는 같은 해 3월 5일에 소령으로 진급했다. 중대는 장교 4명과 병사 113명으로 구성되었는데, 병사들은 대부분 이집트에서 돌아온 호위병 출신이었고, 그중 112명은 1796년 이탈리아 전역 참전 경험이 있는 베테랑이었다. 집정 정부 근위대의 기병대는 Grenadiers à Cheval|근위 기병 척탄병프랑스어 2개 소대와 샤쇠르 중대로 구성되었으며, 전체 기병대는 Chef de brigade|여단장프랑스어 장-바티스트 베시에르가 지휘했다. 그해 5월, 샤쇠르 중대는 파리를 떠나 이탈리아로 이동하여 생베르나르 고개를 넘었다. 마렝고 전투 (6월 14일)에서는 격렬한 전투 끝에 보유한 말 115마리 중 70마리를 잃는 큰 피해를 입었다. 전투 이후 파리로 복귀한 샤쇠르 부대는 9월 8일 집정 정부 칙령에 따라 2개 중대(대대) 규모로 증강되어 병사 수가 234명으로 늘어났다.
1801년 8월 6일 칙령으로 부대는 본부와 2개 소대(Squadron)로 다시 한번 증강되었다. 본부에는 소령(Chef d'escadron) 1명, 부관 소령(Adjutant-major) 1명, 기수(Porte-étendard) 2명, 나팔수(Brigadier-trompette) 1명, 그리고 장인(Maître-ouvrier) 4명이 포함되었다. 같은 해 9월 말, 이집트에 남아있던 나머지 호위병들이 돌아와 부대에 합류했다. 11월 14일 칙령에 따라 샤쇠르는 연대급 부대로 승격되었다. 이론상 연대 지휘관은 여단장 계급이어야 했지만, 나폴레옹은 당시 소령(Chef d'escadron) 계급이었던 보아르네를 그대로 연대 지휘관으로 유지시켰다.
1802년 3월 8일 칙령으로 연대 본부가 더욱 강화되었다. 4명의 기수(Porte-étendard), 나팔 중대장(Trompette-major), 2명의 나팔 하사관(Brigadier-trompette), 그리고 Timbalier|팀발리에프랑스어(케틀 드럼 연주자)가 추가되었다. 같은 해 10월 1일 칙령에 따라 연대는 4개 소대로 증편되어 총 병력은 장교 56명과 병사 959명에 달했다. 외젠 드 보아르네는 10월 13일 여단장(Chef de brigade)으로 진급했으며, 프랑수아 루이 드 모를랑, 니콜라 달만, 프레데릭 오귀스트 드 뵈르만(Frédéric Auguste de Beurmann), 그리고 아르콜 다리 전투 (1796년)에서 활약한 흑인 부사관 출신 조제프 다밍게(Joseph Domingue)가 소대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1803년 3월 22일부터 시작된 여름 훈련 기간 동안, 병사들은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오전 7시 30분에 마르스 광장에서 기마 열병 훈련을 받았고, 매주 수요일 같은 시간에는 보병 훈련을 실시했다. 겨울철에는 열병 훈련이 오전 9시에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1802년과 1803년에는 인간 수영과 노젓기 훈련도 병행되었다.
2. 2. 나폴레옹 전쟁 시기 활약 (1804년 ~ 1812년)
1804년 1월 21일 칙령에 따라 연대는 사단장과 동급의 소령을 맞이했고, 프랑수아 루이 드 모를랑이 이 자리에 임명되었다. 같은 칙령으로 맘루크 중대가 연대에 배속되었다. 5월 18일, 일일 명령에 따라 "집정 정부 근위대"는 "황실 근위대"로 명칭을 변경했다.
1805년 5월 13일, 외젠 드 보아르네는 이탈리아 왕국의 부왕으로 임명되었지만, 1808년까지 연대의 명목상 지휘관 직위를 유지했다. 이에 따라 모를랑이 "제2 사령관 대령"이라는 직함으로 실질적인 지휘관이 되었고, 니콜라 달만은 소령으로 진급했다. 9월 17일에는 일종의 예비 보충 부대로 여겨지는 "벨리트" 소대(4개 중대)가 창설되었다. 연대와 맘루크 부대는 12월 2일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나폴레옹의 수석 부관인 장 랩 장군의 지휘 아래 2개 소대와 맘루크가 돌격하여 러시아 제국 근위대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고, 기병 근위대 사령관 니콜라이 렙닌-볼콘스키 공작을 사로잡는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샤쇠르는 모를랑을 포함한 장교 19명이 전사하고 소대 지휘관 3명이 부상당하는 손실을 입었다. 달만이 모를랑의 뒤를 이어 지휘관이 되었고, 클로드-에티엔 귀요가 소령으로 진급했다.

1806년 10월 14일 예나 전투에는 제1 후사르 연대가 황제 호위 임무를 맡아 참여하지 못했다. 하지만 샤쇠르는 나폴레옹의 베를린 개선 행렬에는 참가했다. 1807년 2월 8일 아일라우 전투에서는 조아생 뮈라가 이끈 80개 소대의 대규모 기병 돌격에 참여하여, 전투 중 위기에 처한 프랑스군 중앙의 압박을 완화하는 데 기여했다. 이 전투에서 장교 17명이 부상을 입었고, 지휘관 달만은 치명상을 입고 결국 사망했다. 그는 1806년 12월 30일에 장군으로 진급했으나, 지휘관이 공석이었던 옛 연대를 이끌도록 허락을 받아 전투에 나섰다가 전사한 것이다. 귀요 소령이 그 해 남은 기간 동안 연대를 지휘했으며, 니콜라-마랭 티리도 2월 16일 소령으로 진급했다.

1808년 1월 18일, "여단장" 샤를르 르페브르-데누에트가 달만의 후임으로 연대 지휘관에 임명되었다. 연대는 마드리드에 주둔 중이었는데, 5월 2일 봉기가 일어나자 피에르 도메닐 소령을 포함한 장교 8명과 맘루크 장교 5명이 부상을 입었다. 11월 30일 루이-피에르 몽브룅 장군이 지휘한 소모시에라 전투에서는 언덕 위로 돌격했지만, 스페인 포병이 폴란드 제1 경 기병 연대와 프랑스 기병의 돌격 전에 이미 제압당했기 때문에 장교 피해는 없었다. (이는 폴란드 제1 경 기병 연대 제3 소대가 큰 피해를 입었던 첫 번째 돌격과는 다른, 두 번째 돌격이었다.)
같은 해 11월 28일, 존 무어 경의 영국군 후퇴를 추격하던 나폴레옹은 발데라스 마을에 영국군이 떠난 지 불과 두 시간 만에 도착했다. 이때 그는 참모진과 샤쇠르 소대만을 대동하고 있었다. 원수 미셸 네는 황제가 위험에 노출된 것을 보고 "폐하, 저의 선봉 역할을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다음 날인 12월 29일, 르페브르-데누에트 장군은 영국군 후위대를 발견하고 에슬라 강을 건너 공격했지만, 파제트 경(훗날 워털루 전투의 영웅 앵글시 후작)이 이끄는 영국 기병대의 반격을 받았다. 베나벤테 전투로 알려진 이 교전에서 파제트 경은 부하들을 이끌고 프랑스군의 측면을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르페브르-데누에트는 권총에 맞아 부상을 입고 포로로 잡혔다. 연대는 다른 장교 6명이 부상을 입고 대위 2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샤쇠르 병사 55명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고 73명이 포로가 되는 큰 손실을 겪었다. 황제의 "가장 총애하는 아들들"로 불리던 근위 샤쇠르에게 측면을 공격당해 무너진 것은 쓰라린 경험이었다. 이 공적을 세운 영국 기병대는 10 왕립 후사르와 18 왕립 후사르의 초병, 그리고 킹스 독일 군단의 제3 후사르였으며, 이들의 손실은 50명에 불과했다. 이 사건은 나폴레옹이 무어 경을 놓쳤음을 깨닫고 프랑스로 돌아가기로 결정하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1809년 2월 말, 연대는 본국으로 돌아왔다. 이 시기에 연대는 베르크 대공국의 "기병"(''Chevau-léger'') 부대를 흡수했는데, 이들은 이전에 뮈라의 호위대(1월 11일)와 모르티에 원수의 호위대(2월 1일)였다. 6월 5일, 귀요 소령은 "제2 사령관 대령"으로 임명되었다. 티리는 육군에서 "여단장"으로 진급하며 연대를 떠났고, 13일에는 도메닐과 에르퀼 코르비노가 소령으로 진급했다. 바그람 전투에서 근위 기병대는 결정적인 공격을 감행한 자크 마크도날의 대규모 부대의 우익을 지원했다. 연대는 바그람 전투(7월 6일)에서 장교 5명이 전사하고 10명이 부상을 입었는데, 새로 진급한 소령 도메닐과 코르비노도 부상을 입어 각자 다리를 잃었다. 귀요 대령은 8월 9일 "여단장"으로 진급하여 지휘권을 유지했으며, 제14 샤쇠르 연대 출신의 장 디에돈느 리옹 대령이 군단의 세 번째 소령으로 합류했다.
1810년은 비교적 조용한 해였으며, 반도 전쟁 중 죄수를 호송하던 임무에서 장교 1명이 부상을 입었다. 1811년 8월 1일, 연대는 5개 소대로 증강되었고 "벨리트" 부대는 폐지되었다. 그 해 동안 소대들은 스페인에 파견되어 근위 사단과 함께 복무했다. 귀요는 "사단장"으로 진급했지만 여전히 연대 지휘권을 유지했다. 부상당한 코르비노와 도메닐 소령을 대체하기 위해, 프랑수아 샤를 장 피에르 마리 다브랑주 다오제랑빌 대령(8월 6일)과 레미 조제프 이지도르 엑셀망 남작 장군(12월 24일)이 새로운 소령으로 임명되었다.
1812년 5월 6일, 영국에서 가석방 상태를 어기고 탈출한 샤를르 르페브르-데누에트 장군이 돌아와 연대 지휘권을 다시 맡았다. 샤쇠르 5개 소대와 맘루크 중대는 러시아 원정에 참가했다. 이 원정에서 연대는 총 500명의 병력을 잃었지만, 장교 부상은 10명에 불과했다. 보로디노 전투에서는 장교 사상자가 전혀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10월 25일, 말로야로슬라베츠 전투 다음 날, 황제를 호위하며 정찰 임무를 수행하던 2개 소대가 코사크 부대의 갑작스러운 습격을 받아 격렬한 전투를 벌였고, 이 과정에서 장교 4명이 부상을 입었다. 코사크 기병 중 한 명은 나폴레옹에게 불과 약 18.29m 거리까지 돌진했으나, 장 랩 장군과 호위병들이 그를 격퇴했다. 이 사건 이후 나폴레옹은 포로가 될 것을 염려하여 항상 목에 독약 주머니를 걸고 다니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러시아 원정에서 연대가 입은 손실은 전투 자체보다는 혹독한 러시아의 기후 조건 때문인 경우가 많았다.
2. 3. 러시아 원정과 몰락 (1812년 ~ 1815년)
1812년 5월 6일, 가석방 중이던 영국에서 탈출한 샤를르 르페브르-데누에트 장군이 돌아와 연대 지휘권을 다시 맡았다. 5개 소대와 맘루크 중대로 구성된 샤쇠르 연대는 러시아 원정에 참여했다. 이 원정에서 연대는 500명의 병력을 잃었지만, 부상당한 장교는 10명에 불과했다. 보로디노 전투에서는 장교 사상자가 전혀 없었다.그러나 10월 25일, 말로야로슬라베츠 전투 다음 날, 나폴레옹 황제를 호위하며 정찰하던 두 개 소대가 코사크 부대와 격렬하게 교전하여 장교 4명이 부상을 입었다. 코사크 부대는 갑자기 숲에서 나타나 나폴레옹을 향해 돌격했고, 장 랩 장군과 호위병들이 그들을 격퇴했지만, 한 코사크 병사는 황제로부터 불과 20야드(약 18m) 거리까지 접근하기도 했다. 이 사건 이후 나폴레옹은 포로가 될 것을 두려워하여 항상 목에 독약 주머니를 지니고 다녔다고 전해진다. 러시아 원정에서 연대가 입은 손실은 전투 자체보다는 혹독한 러시아의 기후 때문인 경우가 많았다.
1813년, 연대는 기존 5개 소대에서 9개 소대로 확장되었다. 처음 5개 소대는 구 근위대에 속했고, 새로 창설된 6~9 소대는 청 근위대를 구성했다. 이 청 근위 소대들은 1815년에 제2 황실 근위 샤쇠르 연대로 재편성되었다.
다음은 제1연대의 코트 색상 구성이다.
연대 | 코트 | 칼라 | 턴백 및 커프스 |
---|---|---|---|
제1 연대 | 녹색 | 붉은색 | 붉은색 |
3. 주요 전투 및 사건
1799년 8월 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집트를 떠나 프랑스로 돌아올 때, 그는 180명의 기병 호위병(''Guides à cheval'')과 125명의 보병 호위병(''Guides à pied'')을 데리고 왔다. 이들은 각 부대에서 가장 헌신적인 베테랑 병사들이었다. 18 브뤼메르 쿠데타 직후, 프랑스 남부에 머물던 호위병들은 파리로 소환되어 바빌론 병영(''Caserne de Babylone'')에 주둔했다. 11월 28일 칙령으로 "총재 정부 근위대"(''Garde du Directoire'')가 "집정 정부 근위대"(''Garde des Consuls'')로 재편되었지만, 이때 기병 샤쇠르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1800년 1월 3일 칙령에 따라 "기병 샤쇠르"(''Chasseurs à cheval'') 중대가 창설되었다. 지휘관은 나폴레옹의 의붓아들인 대위 외젠 드 보아르네였으며, 그는 3월 5일에 소령으로 진급했다. 병력은 장교 4명과 병사 113명으로 구성되었고, 병사들은 이집트에서 돌아온 호위병 중에서 선발되었으며, 그중 112명은 1796년 이탈리아 전역 참전 용사였다. "집정 정부 근위대"의 기병대, 즉 "근위 기병 척탄병"(''Grenadiers à Cheval'') 2개 소대와 샤쇠르 중대는 여단장(''Chef de brigade'') 장-바티스트 베시에르가 지휘했다. 5월에 중대는 파리를 떠나 이탈리아로 향했다. 그들은 생베르나르 고개를 넘어 마렝고 전투 (6월 14일)에서 치열하게 싸워 말 115마리 중 70마리를 잃었다. 전역 후 군단은 파리로 돌아왔다. 9월 8일 집정 정부 칙령으로 병력이 증강되어 2개 중대(대대)와 병사 234명으로 구성된 소대가 되었다.
1801년 8월 6일 칙령으로 군단은 본부와 2개 소대로 증강되었다. 본부 구성은 ''지휘관'' 1명, ''부관'' 1명, ''기수'' 2명, ''나팔수'' 1명, 장인 4명이었다. 9월 말, 이집트에서 남은 호위병들이 돌아와 군단에 합류했다. 11월 14일 칙령으로 샤쇠르는 연대가 되었다. 이론상 지휘관은 "여단장"이어야 했지만, 실제로는 보나파르트가 "지휘관" 보아르네를 그대로 지휘관으로 두었다.
1802년 3월 8일 칙령으로 본부가 증강되어 4명의 기수, 나팔 중대장, 2명의 나팔 하사관, 그리고 "팀발리에"(케틀 드럼 연주자)가 포함되었다. 10월 1일 칙령으로 연대는 4개 소대로 증강되었고, 총 병력은 장교 56명과 병사 959명이었다. 보아르네는 "여단장"으로 진급(10월 13일)했으며, 프랑수아 루이 드 모를랑, 니콜라 달만, 프레데릭 오귀스트 드 보르만, 그리고 아르콜 다리 전투 (1796년)에서 활약한 흑인 조제프 다밍게가 소대 지휘관이 되었다.
1803년 3월 22일부터 시작된 여름 훈련(''travail d'été'') 시기에는 병사들이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오전 7시 30분에 마르스 광장에서 기마 열병을 해야 했다. 매주 수요일 같은 시간에는 보병 훈련을 받았다. 겨울에는 열병이 오전 9시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간 수영과 노젓기는 1802년과 1803년에 실시된 훈련 중 하나였다.
1804년 1월 21일 칙령으로 연대는 사단장과 동급의 소령을 받게 되었고, 모를랑이 이 직책에 임명되었다. 같은 칙령으로 맘루크 중대가 연대에 배속되었다. 5월 18일 일일 명령에 따라 "집정 정부 근위대"는 "황실 근위대"가 되었다.
1805년 5월 13일, 보아르네는 이탈리아 왕국의 부왕이 되었지만, 1808년까지 연대의 명목상 지휘권을 유지했다. 모를랑이 "제2 사령관 대령"이라는 직함으로 실질적인 지휘관이 되었고 달만은 소령으로 진급했다. 9월 17일에는 예비 보충 부대 성격의 "벨리트" 소대(4개 중대)가 창설되었다. 연대와 맘루크는 아우스터리츠 전투 (12월 2일)에서 큰 공을 세웠다. 2개 소대와 맘루크는 나폴레옹의 수석 부관인 장 랩 장군의 지휘 아래 돌격하여 러시아 제국 근위대에 큰 피해를 입히고, 기병 근위대 사령관 니콜라이 렙닌-볼콘스키 공작을 사로잡았다.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샤쇠르는 모를랑을 포함한 장교 19명이 전사하고 소대 지휘관 3명이 부상을 입는 피해를 보았다. 달만이 모를랑의 뒤를 이었고 클로드-에티엔 귀요가 소령이 되었다.
연대는 예나 전투 (1806년 10월 14일)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황제 호위의 영광은 제1 후사르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샤쇠르는 나폴레옹의 베를린 개선 행렬에는 참가했다. 아일라우 전투 (1807년 2월 8일)에서 연대는 조아생 뮈라가 이끈 80개 소대의 대규모 기병 돌격에 참여하여, 전투 중 위기에 처한 프랑스군 중앙의 압박을 완화하는 데 기여했다. 이 전투에서 장교 17명이 부상을 입었고 지휘관 달만은 치명상을 입었다. 그는 최근(1806년 12월 30일) 장군으로 진급했지만, 지휘관이 공석이었던 옛 연대를 이끌게 해달라고 요청하여 그들 앞에서 쓰러졌다. 귀요 소령이 그해 남은 기간 동안 연대를 지휘했으며 니콜라-마랭 티리도 소령으로 진급했다(2월 16일).
1808년 1월 18일, "여단장" 샤를르 르페브르-데누에트가 달만을 대신하여 연대 지휘관이 되었다. 연대는 마드리드에 주둔 중이었는데 시민들이 5월 2일 봉기를 일으켰을 때 피에르 도메닐 소령을 포함한 장교 8명과 맘루크 장교 5명이 부상을 입었다. 연대는 루이-피에르 몽브룅 장군의 지휘 아래 소모시에라 전투 (11월 30일)에서 언덕 위로 돌격했지만 스페인 포병이 폴란드군과 프랑스군 기병의 돌격 전에 한 발의 포탄만 발사했기 때문에 장교 피해는 없었다. (이는 폴란드 제1 경 기병 연대 제3 소대가 거의 전멸했던 첫 번째 돌격과는 다른, 두 번째 돌격이었다.)
11월 28일, 존 무어 경의 군대를 추격하여 아 코루냐로 향하던 나폴레옹은 발데라스 마을에 그의 군대보다 앞서 들어갔는데 영국군은 불과 두 시간 전에 그곳을 떠난 상태였다. 그는 참모진과 샤쇠르 소대만을 동반했다. 원수 미셸 네는 황제가 이렇게 위험에 노출된 것을 알고 그에게 "폐하, 저의 선봉 역할을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다음 날(12월 29일) 르페브르-데누에트 장군이 영국군 후위를 따라잡아 에슬라 강을 건너 초병들을 몰아냈지만 파제트 경(워털루 전투의 앵글시 후작)이 이끄는 영국 기병대의 반격을 받았다. 파제트는 베나벤테에서 프랑스군의 측면을 공격했고, 권총탄에 맞아 부상을 입은 르페브르-데누에트는 포로로 잡혔다. 연대는 다른 장교 6명이 부상을 입고 대위 2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샤쇠르 55명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고 73명이 포로로 잡히는 손실을 겪었다. 황제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들"에게 측면 공격을 받아 격파당하는 것은 혹독하고 새로운 경험이었다. 이 공적을 세운 영국 기병대는 제10 후사르와 제18 후사르의 초병, 그리고 킹스 독일 군단의 제3 후사르였다. 영국군의 손실은 50명에 불과했다. 이 사건은 나폴레옹이 무어가 자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났으며 프랑스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고 확신하게 만든 주요 요인이었다.
연대는 1809년 2월 말까지 본국으로 돌아왔다. 이 무렵 연대는 베르크 대공국의 "기병"(''Chevau-léger'')을 흡수했는데 이는 이전에는 "뮈라의 호위대"(1월 11일)와 "모르티에 원수"(에두아르 아돌프 카시미르 조제프 모르티에, 1809년 2월 1일)의 호위대였다. 6월 5일 귀요 소령은 "제2 사령관 대령"이 되었다. 티리는 육군에서 "여단장"이 되었고 13일에는 도메닐과 에르퀼 코르비노가 소령으로 진급했다. 바그람 전투에서 근위 기병대는 결정적인 타격을 가한 자크 마크도날의 대규모 부대의 우익을 지원했다. 연대는 바그람 전투(7월 6일)에서 5명의 장교가 전사하고 10명이 부상을 입었는데 여기에는 새로 진급한 소령 2명(도메닐, 코르비노)도 포함되었으며 각자 다리를 잃었다. 기요 대령은 (8월 9일) "여단장"으로 진급하여 지휘권을 유지했으며 제14 샤쇠르 연대의 장 디에돈느 리옹 대령이 군단의 세 번째 소령으로 합류했다.
1810년은 비교적 조용한 해였으며 반도 전쟁에서 죄수를 호송하던 중 장교 1명이 부상을 입는 사건만 있었다. 1811년 8월 1일 연대는 5개 소대로 증강되었고 "벨리트"는 해체되었다. 그 해 동안 소대들은 스페인의 근위 사단과 함께 복무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기요는 "사단장"으로 진급했지만 여전히 지휘권을 유지했다. 코르비노와 도메닐을 소령으로 대체하기 위해 연대는 프랑수아 샤를 장 피에르 마리 다브랑주 다오제랑빌 대령(8월 6일)과 레미 조제프 이지도르 엑셀망 남작 장군(12월 24일)을 받았다.
1812년 5월 6일, 샤를르 르페브르-데누에트 장군은 가석방 약속을 어기고 영국에서 탈출하여 연대 지휘권을 다시 맡았다. 샤쇠르 연대(5개 소대)와 맘루크 중대는 러시아 원정에 참여했다. 500명의 병력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장교 부상자는 10명에 불과했다. 보로디노 전투에서는 장교 사상자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10월 25일 말로야로슬라베츠 전투 다음 날 정찰을 위해 황제를 호위하던 두 소대는 격렬한 교전을 벌여 장교 4명이 부상을 입었다. 코사크 부대가 갑자기 숲에서 나타나 나폴레옹을 향해 돌격했다. 랩 장군과 호위병이 그들을 격퇴했지만 한 코사크 병사는 황제로부터 불과 20야드 거리까지 돌진했다. 이 사건 이후 나폴레옹은 포로가 될 것을 두려워하여 항상 목에 독약 주머니를 걸고 다녔다고 전해진다. 이 원정에서 연대의 손실은 전투보다는 혹독한 러시아 기후에 기인한다.
1813년, 연대는 5개 소대에서 9개 소대로 확장되었다. 이 중 처음 5개 소대는 구 근위(Old Guard)에 남았고 새로 창설된 6~9 소대는 청 근위(Young Guard)의 일부를 형성했으며 1815년에는 제2 황실 근위 샤쇠르 연대로 재지정되었다.
다음은 연대의 코트 색상 구성표이다.연대 코트 칼라 턴백 및 커프스 제1 연대 녹색 붉은색 붉은색
4. 주요 지휘관
1800년 1월 3일 칙령으로 창설된 기병 샤쇠르 중대의 초대 지휘관은 나폴레옹의 의붓아들인 대위 외젠 드 보아르네였다. 그는 같은 해 3월 5일에 소령으로 진급했다. 당시 집정 정부 근위대의 기병대 전체는 여단장 장-바티스트 베시에르가 지휘했다.
1801년 연대로 개편되면서 이론적으로는 여단장이 지휘해야 했으나, 나폴레옹은 소령 보아르네를 지휘관으로 유지시켰다. 1802년 10월 1일 연대가 4개 소대로 증강되면서 보아르네는 10월 13일 여단장으로 진급했다. 이때 프랑수아 루이 드 모를랑, 니콜라 달만, 프레데릭 오귀스트 드 보르만, 조제프 다밍게가 소대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1804년 1월 21일, 사단장과 동급인 소령 직책이 신설되어 모를랑이 임명되었다. 1805년 5월 13일, 보아르네가 이탈리아 왕국의 부왕이 되면서 연대의 명목상 지휘권만 유지하게 되었고(1808년까지), 모를랑이 "제2 사령관 대령"이라는 직함으로 실질적인 지휘관이 되었다. 동시에 달만은 소령으로 진급했다. 그러나 아우스터리츠 전투 (1805년 12월 2일)에서 모를랑은 전사했고, 달만이 그의 뒤를 이어 연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클로드-에티엔 귀요는 소령으로 진급했다.
아일라우 전투 (1807년 2월 8일)에서 연대는 조아생 뮈라의 대규모 기병 돌격에 참여했으나, 지휘관 달만이 치명상을 입고 사망했다. 그는 직전에 장군으로 진급했음에도 불구하고 옛 연대를 직접 이끌다 전사했다. 이후 귀요 소령이 그 해 남은 기간 동안 연대를 지휘했으며, 니콜라-마랭 티리가 2월 16일 소령으로 진급했다.
1808년 1월 18일, 여단장 샤를르 르페브르-데누에트가 달만의 후임으로 연대 지휘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해 12월 29일 베나벤테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영국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1809년 6월 5일, 귀요 소령이 "제2 사령관 대령"이 되었고, 티리는 육군 여단장으로 전출되었다. 6월 13일에는 피에르 도메닐과 에르퀼 코르비노가 소령으로 진급했으나, 바그람 전투 (7월 6일)에서 둘 다 다리를 잃는 큰 부상을 입었다. 8월 9일, 귀요 대령은 여단장으로 진급하면서도 연대 지휘권을 유지했으며, 장 디에돈느 리옹 대령이 세 번째 소령으로 합류했다.
1811년, 귀요는 사단장으로 진급했지만 여전히 연대 지휘권을 유지했다. 부상당한 코르비노와 도메닐을 대신하여 프랑수아 샤를 장 피에르 마리 다브랑주 다오제랑빌 대령(8월 6일)과 레미 조제프 이지도르 엑셀망 남작 장군(12월 24일)이 새로운 소령으로 임명되었다.
1812년 5월 6일, 영국에서 가석방 상태를 어기고 탈출한 샤를르 르페브르-데누에트 장군이 돌아와 다시 연대 지휘권을 맡았다. 그는 러시아 원정 동안 연대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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