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1. 개요
이집트는 북아프리카에 위치한 국가로, 고대 이집트 문명의 발상지이자 아랍 세계의 주요 국가 중 하나이다. 고대 이집트 시대에는 'Kemet'으로 불렸으며, 현재는 아랍어로 '미스르'로 불린다. 기원전 1만 년 전부터 인류가 거주했으며, 나일강 유역을 중심으로 문명이 발달했다. 고대 이집트 왕국 시대에는 피라미드 건설 등 눈부신 문화를 꽃피웠으며, 이후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아랍,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1922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이집트 왕국을 수립하였으나, 1952년 혁명 이후 공화국으로 전환되었으며, 가말 압델 나세르 대통령 시기 수에즈 운하 국유화 등으로 국제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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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식 명칭 | 이집트 아랍 공화국 |
|---|---|
| 현지 명칭 | |
| 일반 명칭 | 이집트 |
| 국가 (한국어) | 나의 조국, 나의 조국, 나의 조국 |
| 수도 | 카이로 |
| 최대 도시 | 카이로 |
| 공용어 | 아랍어 |
| 국가 언어 | 이집트 아랍어 |
| 기타 언어 | 이집트 구어체 아랍어 |
| 민족 | 이집트인 |
| 종교 | 이슬람교 (대다수), 기독교 (소수) |
| 종교 (세부) | 이슬람교 (수니파) 90% 기독교 (콥트 정교회) 9% 기독교 (기타) 1% |
| 시간대 | EGY |
| UTC 시간대 | +2 |
| 일광 절약 시간제 | EEST |
| UTC 시간대 (일광 절약 시간제) | +3 |
| 통화 | 이집트 파운드 (LE/E£/£E) |
| 통화 코드 | EGP |
| 국제 전화 코드 | +20 |
| 최상위 도메인 | .eg مصر.아랍어 |
| 정치 체제 | 단일 국가, 반 대통령제 공화국, 권위주의 정권 |
|---|---|
| 대통령 | 압델 파타 엘 시시 |
| 총리 | 모스타파 마드불리 |
| 의회 | 의회 |
| 상원 | 상원 |
| 하원 | 하원 |
| 상하 이집트 통일 | 기원전 3150년 |
|---|---|
| 멤피스 함락 | 기원전 343년 |
| 아랍 정복 | 639–642년 |
| 아이유브 왕조 및 맘루크 왕조 | 1171/4–1517년 |
| 무함마드 알리 왕조 개시 | 1805년 7월 9일 |
| 영국으로부터 독립 | 1922년 2월 28일 |
| 혁명 | 1952년 7월 23일 |
| 공화국 선포 | 1953년 6월 18일 |
| 현재 헌법 | 2014년 1월 18일 |
| 면적 | 1,010,408 km² |
|---|---|
| 면적 순위 | 30위 |
| 수역 비율 | 0.632% |
| 인구 (2017년 인구 조사) | 94,798,827명 |
|---|---|
| 인구 (2024년 추정) | 107,304,000명 |
| 인구 순위 | 14위 |
| 인구 밀도 | 106.20 명/km² |
| 인구 밀도 순위 | 106위 |
| GDP (PPP) | 2조 2320억 달러 |
|---|---|
| GDP (PPP) 년도 | 2024년 |
| GDP (PPP) 순위 | 18위 |
| 1인당 GDP (PPP) | 20,799 달러 |
| 1인당 GDP (PPP) 순위 | 87위 |
| 명목 GDP | 3800억 4400만 달러 |
| 명목 GDP 년도 | 2024년 |
| 명목 GDP 순위 | 42위 |
| 1인당 명목 GDP | 3,542 달러 |
| 1인당 명목 GDP 순위 | 132위 |
| 지니 계수 | 31.9 |
| 지니 계수 년도 | 2019년 |
| 인간 개발 지수 | 0.728 |
| 인간 개발 지수 순위 | 105위 |
| 인간 개발 지수 년도 | 2022년 |
| 운전 방향 | 우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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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나라 -
카자흐스탄
카자흐스탄은 중앙아시아에 위치한 세계에서 아홉 번째로 큰 내륙국으로, 카자흐어와 러시아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며 다양한 민족이 거주하고 유목민 문화의 역사와 천연자원 수출 중심의 경제, 권위주의적 정치 체제, 그리고 복잡한 지정학적 환경 속에서 독자적인 외교 정책을 추구한다. -
아프리카의 나라 -
알제리
알제리는 아프리카 북부 마그레브 지역에 위치한 국가로, 지중해 연안에 자리 잡고 있으며, 사하라 사막을 포함한 국토를 가지고 있으며, 오랜 역사와 다양한 문화를 거쳐 독립했으며, 현재는 대통령 중심 공화국 체제이나 군부의 영향력이 큰 국가이다. -
아프리카의 나라 -
에티오피아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의 뿔 지역에 위치한 공화국으로, 여러 나라와 국경을 접하며 아프리카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많고, 인류 초기 발상지 중 하나로 기원전 980년경 다못 왕국이 건국되었으며, 악숨 왕국, 기독교 국교 채택, 독립 유지, 사회주의 정권, 연방 공화국 수립, 에리트레아 분리 독립, BRICS 가입 등의 역사를 거쳤다. -
중동의 나라 -
북아프리카
북아프리카는 아프리카 대륙 북쪽 끝에 위치하며 지중해, 대서양, 사하라 사막을 포함하는 지역으로, 사하라 사막, 아틀라스 산맥, 나일 강 유역의 지리적 특징을 가지며 아랍인과 베르베르인이 주를 이루고 이슬람교를 믿으며 다양한 문화의 영향을 받아 현재 여러 독립 국가로 구성되어 있다. -
중동의 나라 -
북키프로스
북키프로스는 키프로스 섬 북부에 위치하며 1974년 터키 군사 개입 후 사실상 독립 상태이나 터키만이 국가로 인정하고 있고, 그리스계와 터키계 키프로스인 간 갈등으로 분쟁이 지속되고 있으며 독자적인 정부와 의회를 운영하면서 관광업과 터키 지원에 경제를 의존하고 있다.
2. 국호 유래
고대 이집트의 국호로는 Kemet(kṃt)이 있는데, 이 말은 '검다'는 뜻의 kem에서 나온 말로, 나일강의 홍수로 형성된 비옥한 흑토에서 유래했다. 또 deshret(dšṛt)이라고도 하는데, '붉은 땅'을 뜻하며 이집트의 사막 때문에 붙은 명칭이다. 이 이름은 이집트 언어의 콥트어 시대에는 kīmi, kīmə가 되었으며, 초기 그리스어는 케미아(Χημία, Khēmía)로 나온다. 다른 명칭은 t3-mry으로, '강가의 땅'이란 뜻이다. 상하 이집트는 각각 Ta-Sheme'aw(t3-šmˁw, '사초(莎草)가 자란 땅'), Ta-Mehew(t3 mḥw, '북쪽 땅')이라고 했다.
현대 이집트의 공식 국호는 미스르(아랍어 Miṣr, 이집트 아랍어: Maṣr)이다. 셈어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이집트를 일컫는 다른 셈어파의 단어와 어원이 같은데(가령 히브리어의 מִצְרַיִם , Mitzráyim처럼), 말 그대로 '두 개의 좁은 땅'을 뜻하는 말이었다.(이집트에 상, 하 이집트 두 왕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낱말은 '대도시', '문명' 또 '나라', '변경의 땅'도 의미했다. 영어 명칭 "Egypt"는 고대 그리스어 아이굽토스(Αίγυπτος, 에귑토스)에서 유래하여 라틴어 애급투스(Aegyptus, 에귑투스)를 통해 전해진 말이다. 형용사 aigýpti, aigýptios는 콥트어에 차용되어 gyptios, kyptios가 되었으며, 아랍어에서 qubṭī 가 되었다가 qubṭ로 변해 다시 영어로 전해져 콥트(copt)가 되었다. 원래 이 말은 후기 이집트어 낱말 Hikuptah ('Memphis')에서 나온 말로, 초기 이집트어 명칭 Hat-ka-Ptah (ḥwt-k3-ptḥ), (멤피스의 프타 신전의 이름인 '프타의 카(영혼)의 집'을 뜻했다.)가 와전된 것이다.
아라비아어 명칭 미스르는 고대부터 셈어에서 이 지역을 가리키는 명칭이었다. 참고로, 셈어의 한 갈래인 히브리어에서는 복수형인 미스라임( , 밋츠라임)이 된다.
공식 영어 표기는 Arab Republic of Egypt이다. 일반적으로 Egypt라고 부르며, 발음은 '이집트'에 가깝다. 형용사는 Egyptian이다. 이집트라는 명칭은 고대 이집트어의 후트 카아 프타하(프타하의 영혼의 신전)에서 유래하여 이 지역을 가리키게 된 그리스어 단어이며, 그리스 신화의 아이깁토스에서 유래했다.
일본어 표기는 エジプト・アラブ共和国이다. 일반적으로 이집트라고 한다. 한자로는 埃及라고 표기하며, 埃로 약칭하기도 한다.
3. 역사
나일강 유역의 유적들은 기원전 1만 년 전부터 이집트 지역에 인류가 살았음을 보여준다. 기원전 8000년 경 기후 변화로 농경지가 사막으로 변하자, 사람들은 나일강 유역으로 이주하여 도시를 세웠다.
기원전 6000년 경, 나일 계곡에 신석기 시대가 도래했다. 부락들은 왕국 형태로 발전했고, 남쪽의 상이집트와 북쪽의 하이집트로 나뉘었다. 상이집트의 메네스 왕은 기원전 3150년 경 두 지역을 통일하여 이집트 왕이 되었다. 이후 3,000여 년 동안 이집트 문화는 번성했다. 고왕국 시대(기원전 2700년~2200년)에는 기자의 피라미드를 포함한 여러 피라미드들이 건축되었다.
이집트 제1중간기는 고왕국 시대 이후 150여 년 동안의 혼란기였다. 기원전 2040년 경 중왕국 시대가 시작되며 다시 번성했다. 특히 아메넴하트 3세 시기에는 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힉소스인들이 침입하여 나일강 하류를 정복하고 아바리스에 수도를 세웠다. 아흐모세 1세는 힉소스인들을 몰아내고 제18왕조를 개창, 수도를 멤피스에서 테베로 옮겼다.
이집트 신왕국(기원전 1550년~1070년) 시대에 이집트는 남쪽으로 리비아, 동쪽으로 레반트까지 진출하여 최대 영토를 확보했다. 하트셉수트, 투트모세 3세, 아케나텐과 네페르티티, 투탕카멘, 람세스 2세 등이 이 시기의 파라오들이다. 세계 최초의 유일신앙인 아텐 신앙이 등장했고, 외국과의 접촉은 이집트 사회에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신왕국은 리비아인, 누비아인, 아시리아인들에게 점령당했고, 이집트인들은 독립을 회복했으나 과거의 영화는 되찾지 못했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학자헤로도토스는 “이집트는 나일강의 선물이다”라고 하였다. 이집트는 풍요로운 나일 강의 삼각주에 힘입어 고대 이집트 문명을 발전시켜 왔다. 이집트인들은 기원전 3000년경 이미 국가를 형성하였고, 피라미드와 왕가의 계곡, 상형문자 등을 통해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높은 수준의 문명을 발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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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선사시대와 고대 이집트
나일강 유역의 유적들은 기원전 1만 년 전부터 이집트 지역에 인류가 살았음을 보여준다. 기원전 8000년 경 기후 변화로 농경지가 사막으로 변하자, 사람들은 나일강 유역으로 이주하여 도시를 세웠다.
기원전 6000년 경, 나일 계곡에 신석기 시대가 도래했다. 부락들은 왕국 형태로 발전했고, 남쪽의 상이집트와 북쪽의 하이집트로 나뉘었다. 상이집트의 메네스 왕은 기원전 3150년 경 두 지역을 통일하여 이집트 왕이 되었다. 이후 3,000여 년 동안 이집트 문화는 번성했다. 고왕국 시대(기원전 2700년~2200년)에는 기자의 피라미드를 포함한 여러 피라미드들이 건축되었다.
이집트 제1중간기는 고왕국 시대 이후 150여 년 동안의 혼란기였다. 기원전 2040년 경 중왕국 시대가 시작되며 다시 번성했다. 특히 아메넴하트 3세 시기에는 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힉소스인들이 침입하여 나일강 하류를 정복하고 아바리스에 수도를 세웠다. 아흐모세 1세는 힉소스인들을 몰아내고 제18왕조를 개창, 수도를 멤피스에서 테베로 옮겼다.
이집트 신왕국(기원전 1550년~1070년) 시대에 이집트는 남쪽으로 리비아, 동쪽으로 레반트까지 진출하여 최대 영토를 확보했다. 하트셉수트, 투트모세 3세, 아케나텐과 네페르티티, 투탕카멘, 람세스 2세 등이 이 시기의 파라오들이다. 세계 최초의 유일신앙인 아텐 신앙이 등장했고, 외국과의 접촉은 이집트 사회에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신왕국은 리비아인, 누비아인, 아시리아인들에게 점령당했고, 이집트인들은 독립을 회복했으나 과거의 영화는 되찾지 못했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헤로도토스는 “이집트는 나일강의 선물이다”라고 하였다. 이집트는 풍요로운 나일 강의 삼각주에 힘입어 고대 이집트 문명을 발전시켜 왔다. 이집트인들은 기원전 3000년경 이미 국가를 형성하였고, 피라미드와 왕가의 계곡, 상형문자 등을 통해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높은 수준의 문명을 발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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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 아케메네스 왕조
기원전 525년, 캄비세스 2세가 이끄는 페르시아 군대가 이집트를 침공하여 파라오 프삼티크 3세를 사로잡았다. 캄비세스 2세는 파라오 직함을 얻었으나, 페르시아 수사에서 이집트를 통치했다. 이집트 제27왕조 시기(기원전 525년~402년) 동안 이집트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으며, 페르시아 황제는 자동적으로 이집트 파라오를 겸했다. 기원전 5세기 동안 이집트인들은 페르시아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완전히 몰아내지는 못했다.
이집트 제30왕조는 이집트인들이 세운 마지막 왕조였으나, 기원전 343년에 페르시아에 멸망당했다. 마지막 이집트인 파라오 넥타네보 2세는 전투에서 패배했다. 그러나 이집트를 멸망시키고 31왕조를 세운 페르시아인들도 오래가지 못했는데, 몇 십년 후 알렉산더 대왕에게 정복당했다. 이후 알렉산더 대왕의 부관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이집트를 물려받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세웠다.
3.1.2. 프톨레마이오스 왕국 및 로마 시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치하의 이집트는 강력한 헬레니즘 국가였으며, 동쪽으로는 남부 시리아, 서쪽으로는 키레나이카까지 뻗어나갔으며 남쪽으로는 누비아와 국경을 접했다. 수도인 알렉산드리아는 그리스 문화의 중심지로 부상했으며, 수많은 상선들이 이집트의 항구들을 드나들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왕들은 이집트인들의 호의를 얻기 위하여 스스로를 파라오라 칭하였고, 후기로 갈수록 아예 이집트인들에게 동화되어 이집트식으로 옷을 입거나 신전에도 이집트식으로 자신들의 모습을 새겨넣었다.
클레오파트라 여왕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최후의 지배자였다. 그러나 그녀는 연인이었던 안토니우스가 로마 제국의 패권을 놓고 싸우다가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자 자살하였고, 이후 내전에서 승리한 아우구스투스가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면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왕계도 끊기고 말았다. 이후 이집트는 로마 제국에 병합되었으나, 오히려 그 부는 여전했고 이집트는 광대한 로마 제국 내에서도 가장 부유한 지역들 중 하나로 황제가 직접 관할하는 황제 속주로 남았다. 마가 복음서 저자 마가에 의해 1세기 경에 기독교가 처음으로 전래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재위기에 이르러 이집트는 로마 제국에서 비잔티움 제국으로 그 통치권이 옮겨갔고, 이때 수많은 이집트계 기독교인들이 박해되어 숙청되었다. 이 시기에 신약성서가 이집트어로 번역되었다. 451년의 칼케돈 공의회 이후, 이집트 콥트 교회가 설립되었다.
3.2. 중세
비잔티움 제국은 로마 제국으로부터 이집트의 패권을 넘겨받았으나, 7세기 초 비잔티움-사산 전쟁에서 페르시아에게 10여 년간 이집트를 점령당했다가 되찾았다. 그러나 아랍계 무슬림들이 이집트에서 비잔티움 군대를 격파하고 수니파 이슬람교를 전래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당시 이집트는 콥트 기독교, 이슬람교, 수피교 등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는 사회였다.
639년, 이슬람 2대 칼리프 우마르는 4,000명의 군대를 이집트에 파견했고, 640년에 6,000명이 증원되어 헬리오폴리스에서 비잔티움 제국 군대와 전투를 벌여 승리했다. 641년 11월 8일, 알렉산드리아가 항복하면서 이집트는 아랍의 지배하에 놓였다. 비잔티움 제국은 645년에 알렉산드리아를 잠시 탈환했으나, 646년에 다시 빼앗겼다. 654년 콘스탄스 2세가 보낸 함대가 침몰한 후, 비잔티움 제국은 이집트를 다시 찾지 못했다. 무슬림들은 점령 직후 푸스타트를 건설하여 이슬람 이집트의 수도로 삼았으나, 십자군 원정기에 불타버렸다. 이후 986년에 카이로가 건설되어 아랍 세계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도시로 성장했다.
639년 이슬람 제국의 장군 아므르 이븐 알아스(عمرو بن العاص)에 의해 이집트는 우마이야 칼리파 왕조 및 아바스 칼리파 왕조의 일부가 되었다. 압바스 왕조의 지배가 약해지자, 이집트 총독으로부터 독립한 툴룬 왕조, 이크시드 왕조의 짧은 지배를 거쳐, 969년에 현재의 튀니지에서 일어난 파티마 왕조에 의해 정복되었다. 이후 아이유브 왕조, 맘루크 왕조 등 이집트를 근거지로 시리아 지방까지 영토에 편입한 이슬람 왕조가 500년 이상 지속되었다. 특히 250년간 지속된 맘루크 왕조는 중앙아시아나 카프카스 등 아랍 세계 외부에서 온 맘루크(노예군인)에 의한 지배 체제가 확립되었다.
1517년, 오스만 제국이 맘루크 왕조를 멸망시키고 이집트를 속주로 삼았으나, 맘루크 지배는 유지되었다(이집트 에얄레트).
3.2.1. 아바스 칼리파조
아바스 칼리파조 시대에 이집트는 과중한 세금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이로 인해 콥트교 신자들이 반발하여 아바스 칼리파조의 지배 4년 만에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9세기 초 압둘라 이븐 타히르 재위기에 칼리프는 바그다드에 머무르고 이집트에는 총독을 파견하는 전통적인 지배 구조가 다시 확립되었다. 828년에 또 다른 반란이 일어났고, 831년에는 콥트교도들도 이에 동참하였다. 바그다드의 칼리프도 점차 세력 다툼 등으로 힘을 잃어가면서, 이집트에는 여러 무슬림 장군들이 독자적인 왕조를 세우고 아바스 칼리파조에 반란을 일으켰는데, 대표적으로 툴루니드 왕조와 이크시드 왕조 등이 있다.
3.2.2. 파티마 칼리파조와 맘루크
파티마 칼리파조는 카이로를 수도로 하여 약 600여 년 동안 이집트를 장악하였다. 아이유브 왕조가 끝나자, 군인 계급이었던 맘루크들이 1250년경 정권을 장악하여 이집트를 한시적으로 통치하였다. 13세기 말 즈음의 이집트는 홍해, 지중해를 통한 활발한 교역으로 막강한 경제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인도, 말레이시아, 동인도 등 세계 각국과 교류하였다. 한편 14세기 중반에는 세계를 덮친 흑사병의 피해로 이집트 전체 인구의 약 40%가 사망하였다.
3.3. 근대
1798년 프랑스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집트 원정을 감행하면서 이집트는 근대 국가 형성의 시기를 맞이한다. 프랑스군이 철수한 후, 오스만 제국이 파견한 알바니아인 부대장 무함마드 알리가 혼란을 수습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그는 이집트 총독으로 취임하여 맘루크 세력을 타도하고 중앙 집권화를 확립했다. 경제와 군사 근대화를 추진하여 이집트를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반쯤 독립시키는 데 성공, 알바니아계 무함마드 알리 왕조의 세습 정권을 수립했다. 그러나 유럽 열강은 이집트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고, 무함마드 알리 왕조의 급속한 근대화 정책은 사회 모순을 야기하여 결국 이집트를 열강에 경제적으로 종속시켰다.
1882년, 아흐마드 우라비(Ahmad Urabi)가 주도한 반영 운동(우라비 혁명)은 영국에 의해 무력 진압되었고, 이집트는 영국의 보호국이 되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로 영국이 이집트의 종주국인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시작하면서 이집트는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에서 벗어났다. 1919년 3월, 영국 당국이 독립 운동을 이끌던 사아드 자글룰(Saad Zaghloul) 등을 체포·추방하자, 반영 독립 운동인 1919년 이집트 혁명이 일어났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1922년 2월 28일 이집트 왕국이 성립되었고, 이듬해 영국은 독립을 인정했지만, 이후에도 영국의 간접적인 지배는 계속되었다. 이집트 왕국은 입헌군주제를 채택, 의회를 설치하고 완만한 근대화를 추진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추축국인 이탈리아 왕국군이 리비아에서 침공했지만, 영국군이 격퇴했다(북아프리카 전역). 제2차 세계 대전 전후, 팔레스타인 문제 심화, 제1차 중동 전쟁 패배, 경제 악화, 무슬림 형제단 등 정치의 이슬람주의를 주장하는 세력 등장으로 이집트 왕국은 흔들렸다.
3.3.1. 오스만 제국
오스만 제국은 1517년에 이집트를 정복하여 1867년까지 지배했다. 그러나 이 시기 이집트는 쇠퇴했는데, 군비 증강과 군인 수 증가로 사회적, 경제적 혼란이 발생했고, 역병으로 인해 경제가 악화되어 외국 자본의 침입에 취약해졌다. 포르투갈 상인들이 무역권을 잠식해 나갔으며, 1687년부터 1731년 사이에 6번의 기근이 발생했다. 특히 1784년 대기근 때는 이집트 인구의 1/6이 사망했다.
이집트는 오스만 제국에게도 다스리기 어려운 지역이었는데, 이는 이집트의 국력과 맘루크 잔존 세력 때문이었다. 이집트는 맘루크들의 자치 통치 하에 반자치 상태를 유지했으나, 1798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프랑스 군대의 침략으로 상황이 급변했다. 프랑스의 점령과 패배 이후 이집트는 권력 공백 상태가 되었고, 오스만 제국, 맘루크, 알바니아계 상인들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각축전을 벌였다.
3.3.2. 무함마드 알리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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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8년, 프랑스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한 이집트 원정을 계기로, 이집트는 근대 국가 형성의 시대를 맞이한다. 프랑스군 철수 후, 혼란을 수습하고 권력을 장악한 것은 오스만 제국이 파견한 알바니아인 부대의 대장 무함마드 알리였다. 그는 실력으로 이집트 총독에 취임하여 마멜루크를 타도하고 총독에 의한 중앙 집권화를 확립, 경제·군사의 근대화를 추진하여 이집트를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반쯤 독립시키는 데 성공했다. 알바니아계 무함마드 알리 가문에 의한 세습 정권을 세웠다(무함마드 알리 왕조). 그러나 당시 세계에 세력을 확대한 유럽 열강은 이집트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고, 무함마드 알리 왕조의 급속한 근대화 정책에 의한 사회 모순은 결국 이집트를 열강에 경제적으로 종속시키게 되었다.
1882년, 아흐마드 우라비가 중심이 되어 일어난 반영 운동(우라비 혁명)이 영국에 의해 무력 진압되었다. 이집트는 영국의 보호국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정부의 교육 예산이 대폭 삭감되는 등의 일이 발생했다. 1914년에는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영국이 이집트의 명목상 종주국인 오스만 제국과 개전했기 때문에, 이집트는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에서 벗어났다. 1919년 3월 영국 당국이 전직 관료이자 당시 와프드당을 이끌며 독립 운동을 지도한 사아드 자글룰 등을 체포·추방한 것이 오히려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이를 계기로 반영 독립 운동인 이집트 혁명(1919년)이 발발했다.
3.3.3. 이집트 술탄국
1914년에 오스만 제국이 제1차 세계 대전에 동맹국 측으로 참전하자, 영국에 적대적이었던 아바스 2세는 종주국인 오스만 제국을 돕기로 결정하였다. 영국은 아바스 2세를 강제로 몰아내고 그의 형제인 후세인 카멜을 대신 앉혔다.
후세인 카멜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하고 이집트의 술탄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이집트는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자유주의 정당인 와프트 당이 민족자결주의 열풍을 이끌었고, 선거에서 대승하며 영국의 식민통치에 반발하였다. 영국은 1919년 3월 와프트 당 지도자들을 해외로 추방했고, 이에 대한 국민들의 반발로 첫 혁명이 일어났다. 이집트인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영국은 1922년 2월 22일 이집트의 독립을 인정했다.
3.3.4. 이집트 왕국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1922년 2월 28일에 이집트 왕국이 성립되었고, 이듬해 영국은 그 독립을 인정했지만, 그 이후에도 영국의 간접적인 지배 체제는 계속되었다.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획득한 직후, 이집트 술탄국은 이집트 왕국으로 국명을 바꾸었으며 당시 술탄이었던 푸아드 1세는 ‘이집트의 왕’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다만 명목상으로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으나, 이집트 왕국에는 여전히 영국군이 주둔하였으며 정치적, 사회적으로도 막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새롭게 수립된 정부는 1923년에 헌법을 도입하였으며 입헌군주제를 채택하여 의회제도를 실시하기 위하여 선거를 진행하였다. 이 총선거에서 민족주의 성향의 와프드 당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와프드 당의 지도자였던 사아드 자글룰이 초대 총리로 취임하였다. 1936년에는 앵글로-이집트 조약이 맺어졌고, 마침내 영국군이 수에즈 운하 지역을 제외한 이집트 전역에서 철수하였다. 다만 이 조약에는 수단에 관련된 내용은 빠져있었고, 이에 따라 수단은 1899년 이래 이집트와 영국이 공동통치에 합의한 것이 암묵적으로 유지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다른 말로, 말은 이집트와 영국의 공동통치지만 실제로는 영국의 통치라는 뜻이다.
영국은 이집트를 북아프리카 지역의 세력 교두보로 사용하였으며, 특히 이탈리아와 독일을 상대로 한 군사적 요충지로 사용하며 매우 중시하였다. 특히 동지중해의 핵심 거점이었던 수에즈 운하의 중요성 때문에 이집트를 중시할 수 밖에 없었는데, 영국은 수에즈 운하를 장악하고 이 운하를 통하여 영국 본국과 인도, 오스트레일리아와 교류를 지속하였던 것이다. 한편 영국 정부와 상반되게 이집트 정부는 2차 세계대전에서 상당히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마자 이집트는 계엄령을 선포하였으며, 나치 독일과의 국교를 단절하였다. 다만 독일에게 전쟁을 선포하지는 않았으며 영국의 전쟁 지원국 정도로만 남았다. 1940년에는 이탈리아와도 국교를 단절하였으나, 심지어 이탈리아 왕국군이 리비아에서 침공하였을 때에도 이탈리아에게 전쟁을 선포하지는 않았다. 당시의 파루크 국왕은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영국을 특별히 돕지도 않았다. 이는 당시 이집트 엘리트층들의 의식구조와도 관련이 있었는데, 당시 이집트인들은 영국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심정적으로는 추축국 측에 일부 공감하는 것도 있었던 것이다. 한편 1940년 6월에는 국왕이 영국과의 관계를 악화시킨 알리 마허 총리를 해임하였으며, 하샨 파샤 사브리 총리를 새롭게 임명하였다.
1942년 2월, 영국의 마일스 램슨 경은 파루크 국왕에게 와프드 당이 주도하는 내각을 꾸리라고 강요하였다. 그러나 국왕이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자, 1942년 2월 4일에는 왕궁을 탱크와 병사로 포위한 후 국왕에게 최후통첩을 전달하며 새 내각 구성을 협박하였다. 국왕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친영 내각이 새롭게 구성되었다. 그러나 이같은 행위는 국왕은 진노케 하였으며, 영국의 입맛에 맞는 정부가 세워지는 모습을 그대로 지켜본 국민들과 군부의 신임마저 잃는 결과를 가지고 오고 말았다. 영국군은 수에즈 운하에서조차도 상당수 철수하였으나, 전쟁 전후 시기에 이집트인들의 반영 감정은 갈수록 커지고만 있었다. 게다가 아랍-이스라엘 분쟁에서 이집트 왕국이 처참한 패배를 맛보며 왕정에 대한 불신도 증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1950년 선거에도 와프드 당이 압승을 거두었고, 국왕은 강제로 모스타파 엘-나하스를 새 총리로 지명하였다. 1951년에는 이집트가 일방적으로 1936년의 앵글로-이집트 조약에서 탈퇴하였으며, 모든 영국군에게 수에즈 운하에서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영국은 당연히 이집트의 요구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이집트 관료들은 수에즈 운하의 영국군 기지로 향하는 식수를 끊어버렸으며 식량 반입도 거부하였다. 또한 이집트 인부들이 기지 내부로 들어가는 것 또한 막았으며 게릴라전을 펼치며 기지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수에즈 운하의 영국군 기지는 반쯤은 전투 상황으로 변했으며, 마침내 1952년 1월 24일에 이집트 게릴라 군대가 경찰의 도움을 받아 기지를 기습하였다. 영국군은 이에 맞서 1월 25일에 보병과 탱크를 내보내 게릴라 군대를 돕고 있던 경찰에게 1시간을 주고 당장 항복할 것을 명령하였다. 경찰은 내무장관에게 연락했고, 항복할 것인지 싸울 것인지 물어보았다. 내무장관은 ‘마지막 인원까지 싸워라’라고 답했고, 결국 이로 인하여 경찰서는 박살났으며 43명의 이집트 경찰이, 3명의 영국군이 전사했다. 이 사건은 이집트 전역에서 격분을 불러일으켰고, 다음 날인 1월 26일에는 카이로에서 ‘검은 토요일’이라고 불리는 대규모 반영 시위가 일어나 카이로 일부가 불에 타 전소하기도 했다. 파루크 국왕은 와프드 당에게 시위의 책임을 돌렸고, 총리를 해임한 후 알리 마허 파샤를 새로운 총리직에 앉혔다.
1952년 7월 22일, 무하마드 나기브과 가말 압델 나세르가 이끄는 자유장교단이 쿠데타를 일으켰고, 파루크 1세는 그의 아들이자 태어난 지 7달 밖에 되지 않은 푸아드 2세에게 양위하였다. 왕실은 며칠 후 이집트를 떠났고, 무하마드 압델 모네임을 중심으로 한 섭정위원회가 창설되었다. 그러나 섭정위원회는 명목상의 통치기구일 뿐이었고, 실권은 당연히 나기브와 나세르가 이끄는 혁명통치위원회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 대중들은 쿠데타 이후에는 개혁이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였고, 이 때문에 폭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자유장교단은 마침내 왕정제와 1923년의 헌법을 공식적으로 폐지하였으며 1953년 6월 18일에 공화국을 선포하였다. 나기브 장군이 첫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으며, 나세르가 초대 총리로 취임하였다.
3.4. 현대
이집트의 법 체계는 이슬람법(샤리아)과 민법(특히 나폴레옹 법전)을 기반으로 하며, 최고법원의 사법심사를 받는다. 최고법원은 국제사법재판소의 강제관할권을 일부 유보하여 수용한다. 이슬람 법률학이 주요 입법 근거이며, 샤리아 법원과 카디(이슬람 법관)는 이집트 사법부의 관리 및 허가를 받아 운영된다. 결혼, 이혼, 양육권 등의 사항을 규율하는 개인 신분법은 샤리아에 따라 규정된다. 가정법원에서는 여성의 증언은 남성의 증언 가치의 절반으로 인정된다.
2012년 12월, 무슬림 형제단은 새 헌법을 제정하려 했다. 이 헌법은 국민투표에서 64%의 지지율을 얻었지만, 투표율은 33%에 불과했다. 이 헌법은 혁명 이후 채택된 2011년 이집트 임시헌법을 대체했다. 형법은 "신성모독법"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현행 법원 시스템에서는 부재자에 대해서도 사형을 선고할 수 있다.
2014년 1월 18일, 과도정부는 2014년 이집트 헌법을 제정했다. 대통령은 4년 임기로 선출되며, 최대 2임기까지 연임할 수 있다. 의회는 대통령을 탄핵할 수 있으며, 헌법에 따라 양성평등과 사상의 완전한 자유가 보장된다. 헌법 발효 이후 2개의 대통령 임기 동안 국방부 장관은 군부가 임명할 수 있다. 헌법에 따라 정당은 "종교, 인종, 성별 또는 지역"을 기반으로 할 수 없다.
2003년, 이집트 정부는 국가인권위원회를 설립했으나, 설립 직후부터 현지 활동가들의 강한 비판을 받았다. 활동가들은 국가인권위원회가 정부의 인권 침해 행위를 옹호하고 긴급법과 같은 억압적인 법률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선전 도구라고 주장했다.
종교 및 공공생활에 관한 퓨 포럼은 이집트를 종교 자유가 가장 억압적인 국가 순위 5위로 평가했다. 미국 국제종교자유위원회는 이집트를 면밀히 감시해야 하는 국가 목록에 포함시켰다. 2010년 퓨리서치센터의 조사에 따르면, 이집트 응답자의 84%가 이슬람 탈교자에게 사형을 지지했고, 77%가 절도와 강도에 대해 태형과 손목 절단을 지지했으며, 82%가 간음자에 대한 돌팔매질을 지지했다.
콥트 기독교인들은 정부 부처의 과소 대표부터 교회 건축 또는 수리 제한 법률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별을 겪고 있다. 바하이교 신자들과 수피즘, 시아파, 아흐마디야와 같은 비정통 이슬람 종파 신자들에 대한 불관용 또한 문제로 남아 있다. 2008년 초 이집트 법원은 다른 종교 신자들이 신앙을 기재하지 않고도 신분증을 발급받을 수 있다고 판결했다.
전 대통령 무함마드 무르시 지지자들과 경찰 간의 충돌은 계속되었다. 2013년 8월 이집트 시위 진압 과정에서 595명의 시위대가 사망했고, 2013년 8월 14일은 이집트 현대사에서 가장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날이 되었다.
이집트는 사형을 적극적으로 집행한다. 이집트 당국은 사형 선고 및 집행 건수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유엔 인권사무소 및 여러 NGO는 2014년 3월 이집트 법원의 529명 사형 선고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했다. 이 판결은 국제법 위반으로 비난받았다. 무르시 축출 후 이집트 정부는 무슬림 형제단을 테러 조직으로 규정했다. 인권 단체에 따르면 이집트에는 약 6만 명의 정치범이 있다.
이집트의 LGBT 권리에 따르면, 동성애는 이집트에서 불법이다. 퓨리서치센터의 2013년 조사에 따르면 이집트인의 95%가 동성애를 사회적으로 용인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2017년, 카이로는 톰슨 로이터 재단의 설문조사에서 여성에게 가장 위험한 도시로 선정되었다. 성희롱은 매일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1952년, 군부 내부의 비밀 조직인 자유장교단이 쿠데타를 일으켜 파룩 1세 국왕을 망명으로 몰아내고 무함마드 알리 왕조를 타도하였다(1952년 이집트 혁명).
3.4.1. 이집트 공화국
1952년 혁명 이후, 이집트의 실권은 자유장교단과 군부에게 넘어갔다. 군부는 모든 정당을 법적으로 금지했으며, 1953년 6월 18일에 이집트 공화국을 선포했고 나기브 장군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약 1년 반 동안 대통령직을 맡았다.
그러나 나기브 대통령은 얼마 지나지 않은 1954년에 범아랍주의자이자 1952년 혁명의 실세였던 나세르에 의해 강제로 물러나게 되었고, 이후 가택연금을 당했다. 나기브 대통령 사임 후, 나세르가 새롭게 대통령으로 선출되기 전까지인 1956년까지 대통령직은 공석이었다.
1954년 10월, 이집트와 영국은 1899년의 앵글로-이집트 합의를 파기하고 수단에 독립을 주기로 합의했다. 이 합의는 1956년 1월 1일부터 효력이 발생했다. 한편 나세르 대통령은 1956년 6월에 취임했으며, 영국군이 6월 13일에 수에즈 운하 지역에서 철수하자 곧바로 수에즈 운하 국유화를 선포했다. 나세르 대통령이 이스라엘과 서방권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자, 2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에서 프랑스와 영국 등의 지원을 받은 이스라엘이 시나이반도와 운하를 점령했으나, 전쟁 확산을 우려한 미국과 소련의 중재로 전쟁 이전 상태로 돌아갈 것을 합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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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제2대 대통령에 취임한 가말 압델 나세르(Gamal Abdel Nasser)는 냉전하의 중립 외교와 (범)아랍 민족주의를 기둥으로 하는 독자적인 정책을 추진하여 제3세계·아랍 국가의 강국으로 부상했다. 같은 해 이집트는 수에즈 운하 국유화를 단행했고, 이로 인해 발발한 제2차 중동전쟁(수에즈 전쟁)에서 정치적으로 승리했다. 1958년에는 시리아와 연합하여 아랍 연합 공화국을 성립시켰다. 그러나 1961년에 시리아가 연합에서 탈퇴하여 국가 연합으로서의 아랍 연합 공화국은 불과 3년 만에 사실상 붕괴되었다. 또한 1967년의 제3차 중동전쟁은 참패로 끝나 나세르의 권위는 약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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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급사한 나세르의 뒤를 이은 안와르 사다트(Anwar Sadat)는 자신이 주도한 제4차 중동 전쟁 이후 소비에트 연방과 대립하고 미국 등 서방 국가에 접근했다. 사회주의적 경제 정책 전환, 이스라엘과의 화해 등 나세르 노선에서의 전환을 추진했다. 1971년에는 국가 연합 붕괴 후에도 이집트의 국호로 사용되어 온 "아랍 연합 공화국"이라는 국호를 버리고 이집트 아랍 공화국으로 개칭했다. 또한 사다트는 경제 개방 등으로 방향을 틀면서 좌파에 대항하기 위해 이슬람주의 세력을 일부 용인했다.
1977년에는 물가 상승에 항의하는 폭동을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것으로 단정하고, 이미 결당이 금지되었던 이집트 공산당 등 좌익 조직의 탄압을 강화했다. 그러나 사다트는 이스라엘과의 평화를 실현한 것에 대한 반발로, 1981년 이슬람 과격파인 지하드단에 의해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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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은 이집트의 국제수지를 악화시켰다. 사다트를 대신하여 부통령에서 대통령으로 승격한 호스니 무바라크(Hosni Mubarak)는 미국과의 협력 외교를 추진하는 한편, 20년 이상 개발 독재적인 정권을 유지했다.
무바라크 정권은 1990년 12월 "1000일 계획"이라고 불리는 경제 개혁안을 발표했다. 쿠웨이트 해방을 목표로 한 걸프 전쟁에서는 다국적군에 2만 명을 파병하여, 약 130억 달러의 대외 채무를 감소시키는 외교적 성과를 얻었다. 누적 채무는 500억 달러 규모였다. 군사적 기여로 상쇄된 채무는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한 채무와 미국의 군사 채무 67억 달러였다. 1991년 5월에는 국제통화기금(IMF)의 스탠드바이 크레딧 및 세계은행의 구조조정 차관(SAL)이 제공되었고, 파리클럽에서 200억 달러의 채무 감면이 합의되었다. 이집트 경제 구조조정에서 획기적인 것은 달러 페그에 의한 환율 일원화였다.
무바라크가 대통령 취임과 동시에 발령한 비상사태 선포는 그가 축출될 때까지 30년 이상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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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니지의 자스민 혁명을 시작으로 주변 국가에서 일어난 “색깔 혁명”이 이집트에도 파급되어, 2011년 1월, 30년 이상 독재 체제를 유지해 온 무바라크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같은 해 2월에는 대통령 지지파의 시위도 발생하여 폭동으로 이어지면서 국내 주요 도시에서 대혼란을 초래했다. 대통령 사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날마다 높아졌고, 2월 11일, 무바라크는 대통령직에서 사임했으며, 모든 권한은 이집트군 최고평의회에 위임되었다. 같은 해 12월 7일에는 임시 총리로 하는 정부가 출범했다. 그 후, 2011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인민의회 선거가, 그리고 2012년 5월부터 6월까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어 무슬림형제단(자유정의당)의 무함마드 무르시(محمد مرسي)가 당선되어 같은 해 6월 30일 대통령에 취임했다. 하지만, 대통령 선거 결선 투표 직전에 법원은 선거법이 위헌이라는 이유로 인민의회 해산 명령을 내렸고, 입법권은 무바라크 정권에 가까운 군 최고평의회가 가지게 되었다.
2012년 11월 이후, 새 헌법 제정 등을 둘러싸고 반정부 시위와 폭동이 빈발했다. 무르시 정권은 정권에 대한 불만이 대규모 폭동으로 발전함에 따라, 초기의 경찰 개혁을 추진하는 대신 기존 조직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가 내무장관에 취임한 2013년 1월 이후, 치안 부대의 정치인과 시위대에 대한 공격이 격화되었다. 1월 말에는 당국과의 충돌로 시위 참가자 등 40명 이상이 사망했지만, 치안 부대에 대한 조사나 처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브라힘 내무장관은 2월에 "국민이 원한다면 사임할 준비가 있다"고 말했다.
무르시 정권은 출범 후 약 1년 만인 2013년 7월 3일, 군부에 의한 쿠데타로 막을 내렸다.
2014년 5월 26일부터 28일까지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2013년 쿠데타의 주도자 압델 파타 아시시(Abdel Fattah el-Sisi)가 당선되어 6월 8일 대통령에 취임했으며, 8월 5일부터는 새 수에즈 운하 건설 등 대규모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2015년3월 13일에는 카이로 동쪽에 향후 5~7년 동안 450억 달러를 투입하여 새로운 행정 수도를 건설할 계획임을 밝혔다. 행정과 경제의 중심이 될 새로운 수도는 카이로와 홍해 사이에 건설될 예정이며, 면적은 약 700평방킬로미터로 미국 뉴욕의 맨해튼의 약 12배에 달한다. 대통령궁 등 이집트 행정을 담당하는 지역은 초기에는 UAE의 에마르 프로퍼티즈(Emaar Properties) 및 중국의 중국건축과의 양해각서 체결 후 파기되었으나 2016년 4월 현지 기업에 의해 공사가 시작되었고, 대신 이집트 정부는 피라미드에 필적하는 대규모 사업의 랜드마크로 위치짓고 있으며, 아프리카에서 가장 높은 건물도 건설할 예정인 경제를 담당하는 중앙업무지구는 중국 기업이 맡아 2018년 3월에 착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