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친위대 기마척탄병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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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국친위대 기마척탄병연대는 프랑스 총재정부 시기 창설되어 나폴레옹 1세 시대에 황제 근위대의 핵심 기병 부대로 활약했다. 1796년 창설되어 여러 차례 개편을 거쳐 1815년 해산될 때까지 주요 전투에 참전했다. 마렝고, 아우스터리츠, 에일라우, 바그람, 보로디노, 라이프치히, 워털루 전투 등에서 활약했으며, 여러 지휘관을 거쳤다. 나폴레옹의 퇴위와 부르봉 왕정 복고 이후 해산되었지만, 그 용맹함은 프랑스 군사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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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친위대 기마척탄병연대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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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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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 기마척탄병연대 |
별칭 | 베시에르의 검은 말들 |
활동 기간 | 1797년 – 1814년, 1815년 |
국가 | 프랑스 제국 |
군종 | 제국 프랑스군 |
유형 | 중기병 |
규모 | 연대 |
지휘 체계 | 제국근위대 |
주둔지 | 에콜 밀리테르, 파리 |
본부 및 보급소 | 본부 및 보급소 |
지휘관 | |
주요 지휘관 | 장바티스트 베시에르 |
전투 및 작전 | |
주요 전투 | 마렝고, 아우스터리츠, 아일라우, 에슬링, 바그람,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하나우, 라 로티에르, 샹포베르, 몽미라이유, 샤토티에리, 보샹, 랭스, 크라온, 메리-쉬르-센, 워털루 |
2. 기원 및 조직
친위대 기마 척탄병 연대의 기원은 프랑스 총재정부의 경호 부대 구성을 규정한 공화력 3년 헌법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경호 부대 내 기병 연대는 1796년에야 복무를 시작했고, 1797년 규정에서 '척탄병'으로 명명되었다.[1] 브뤼메르 18일 쿠데타 며칠 후 프랑스 통령정부에서 연대의 일반 참모진이 재편되었고, 미셸 오르데네르 ''여단장''(대령)이 지휘하고 세 명의 ''대대장''이 보좌했다. 1801년과 1802년에 걸쳐 장-바티스트 베시에르 장군의 지휘 아래 연대는 4개 기병대로 편성되었고, 통령정부 근위대에 통합되었으며, 연대 일반 참모진도 확대되었다.[1]
1804년 5월 18일, 황제 근위대 창설과 함께 연대는 통합되었다. 그 해 7월 칙령에 따라 연대 일반 참모진은 32명, 연대는 4개 기병대(각 2개 중대, 총 123명)로 총 1,016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듬해에는 총 800명으로 구성된 두 개 기병대인 ''벨리트''와 ''부사령관''이 추가되었다. 1811년 8월, 두 개 ''벨리트'' 기병대는 해산되고, 병사들은 총 1,250명으로 구성된 5개 기병대 연대로 재편성되었다. 러시아 원정 직전에는 기병대 수를 다시 4개로 줄였다. 1813년 1월, 러시아 재앙 이후, 연대는 5, 6번째 기병대가 추가되었다. 이 두 기병대는 젊은 근위대로 간주되었으며, 제2 ''척탄병 기마'' 연대라고도 알려졌다. 제6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동안 연대는 4개의 구 근위대 기병대(각 2개 중대, 124명) 형태로 전투를 치렀다.[2]
1814년 나폴레옹 1세 황제 퇴위 후, 부르봉 왕가는 원수 미셸 네에게 연대 해산 및 '흉갑기병 드 프랑스'로 재편성을 요청하여 연대의 정체성을 지우려 했다. 이 새로운 연대는 4개의 기병대로 구성되었다. 원래 6번째 젊은 근위대 기병대를 형성했던 병사들은 카라비니에 기병대로 전출된 것으로 보인다. 백일천하 동안 나폴레옹 복귀로 연대는 다시 황제 근위대 기마 척탄병으로 변모했고, 1815년 11월 25일 영구 해산되었다.[2]
2. 1. 기원
제국친위대 기마척탄병연대(프랑스어: Grenadiers à Cheval de la Garde Impériale)는 공화력 3년 헌법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이 헌법은 프랑스 총재정부의 경호 부대의 구성을 규정했다.[1] 이 경호 부대 내에서 기병 연대가 창설되었고, 대부분의 기병은 제9 용기병대에서 차출되었다.[1] 그러나 기마 경호 부대는 1796년에야 복무를 시작했고, 1797년 규정에서 경호 부대를 '척탄병'이라고 부르도록 명시했다.[1]
브뤼메르 18일 쿠데타 며칠 후인 프랑스 통령정부에서 주요 개편이 이루어졌다.[1] 연대의 일반 참모진이 재편되었고, 연대 지휘는 ''여단장''(대령) 미셸 오르데네르에게 맡겨졌으며, 세 명의 ''대대장''(대대 지휘관)이 그를 보좌했다.[1] 1801년과 1802년에 걸쳐 장-바티스트 베시에르 장군의 지휘 아래 추가적인 개편이 이루어져, 연대는 각각 두 개 중대로 구성된 4개 기병대로 편성되었고, 새롭게 창설된 통령정부 근위대에 통합되었으며, 연대 일반 참모진도 확대되었다.[1]
2. 2. 조직 변화
친위대 기마 척탄병 연대의 기원은 프랑스 총재정부의 경호 부대 구성을 규정한 공화력 3년 헌법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경호 부대 내 기병 연대는 1796년에야 복무를 시작했고, 1797년 규정에서 '척탄병'으로 명명되었다.[1] 브뤼메르 18일 쿠데타 며칠 후 프랑스 통령정부에서 연대의 일반 참모진이 재편되었고, 미셸 오르데네르 ''여단장''(대령)이 지휘하고 세 명의 ''대대장''이 보좌했다. 1801년과 1802년에 걸쳐 장-바티스트 베시에르 장군의 지휘 아래 연대는 4개 기병대로 편성되었고, 통령정부 근위대에 통합되었으며, 연대 일반 참모진도 확대되었다.[1]
1804년 5월 18일, 황제 근위대 창설과 함께 연대는 통합되었다. 그 해 7월 칙령에 따라 연대 일반 참모진은 32명, 연대는 4개 기병대(각 2개 중대, 총 123명)로 총 1,016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듬해에는 총 800명으로 구성된 두 개 기병대인 ''벨리트''와 ''부사령관''이 추가되었다. 1811년 8월, 두 개 ''벨리트'' 기병대는 해산되고, 병사들은 총 1,250명으로 구성된 5개 기병대 연대로 재편성되었다. 러시아 원정 직전에는 기병대 수를 다시 4개로 줄였다. 1813년 1월, 러시아 재앙 이후, 연대는 5, 6번째 기병대가 추가되었다. 이 두 기병대는 젊은 근위대로 간주되었으며, 제2 ''척탄병 기마'' 연대라고도 알려졌다. 제6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동안 연대는 4개의 구 근위대 기병대(각 2개 중대, 124명) 형태로 전투를 치렀다.[2]
1814년 나폴레옹 1세 황제 퇴위 후, 부르봉 왕가는 원수 미셸 네에게 연대 해산 및 '흉갑기병 드 프랑스'로 재편성을 요청하여 연대의 정체성을 지우려 했다. 이 새로운 연대는 4개의 기병대로 구성되었다. 원래 6번째 젊은 근위대 기병대를 형성했던 병사들은 카라비니에 기병대로 전출된 것으로 보인다. 백일천하 동안 나폴레옹 복귀로 연대는 다시 황제 근위대 기마 척탄병으로 변모했고, 1815년 11월 25일 영구 해산되었다.[2]
나폴레옹의 퇴위와 프랑스 부르봉 왕정복고 이후, 척탄병들은 왕의 칙령에 따라 블로아로 이동, "프랑스 왕립 기병대"로 재편성될 예정이었다. 6월 21일 칙령에 따라 장교 42명과 병사 602명, 2개 중대 규모의 기병대로 편성되었다. 1815년 3월 말 나폴레옹 재집권으로 척탄병들은 이전 조직과 지위를 되찾았다. 제7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발발로 근위 중기병 사단에 포함되어 황실 근위 용기병과 참전했다. 워털루 전투에서 척탄병들의 돌격은 맹렬했지만, ''소령'' 장-밥티스트-오귀스트-마리 자민이 영국군 산탄 포탄에 맞아 사망하고, 부관 2명과 다른 장교 16명이 부상당하는 등 사상자도 컸다. 워털루는 이 부대의 마지막 전투였으며, 1815년 말 부르봉 왕가의 2차 복고 이후 해산되었다.[16]
3. 주요 지휘관
베시에르는 1799년 12월부터 1800년 7월까지 제국친위대 기마척탄병연대의 초대 연대장(사단장)을 역임했다.[3] 그는 ''대령 지휘관''이라는 직함을 가졌다.[3] 1800년 7월 18일, 베시에르는 집정정부 친위대(Consular Guard Cavalry) 기병대 총 지휘를 맡게 되면서 연대 지휘는 오르데네 대령에게 넘어갔다.[3]
베시에르가 전체 집정정부 친위대(Consular Guard Cavalry) 기병대의 총 지휘를 맡게 되면서, 1800년 7월 18일, 노련한 오르데네 대령이 제국 친위대 기마척탄병 연대의 지휘를 맡았다.[3] 오르데네는 1806년 5월 20일 현역에서 은퇴할 때까지 연대장 직을 유지했다.[3]
발터는 프랑스 혁명 전쟁의 베테랑이자 선임 기병대 장교로, 1806년 5월부터 1813년 11월 24일 사망할 때까지 제국친위대 기마척탄병연대를 지휘했다.[3] 그는 사단장 계급으로, ''대령 지휘관''(colonel commandant)이라는 직함을 가졌다.[3] 발터의 전임자는 미셸 오르데네였으며, 후임자는 클로드 에티엔 기요였다.[3]
발터 장군이 1813년 11월 24일 사망한 후, 45세의 기요가 연대장이 되었다.[3] 기요는 1815년 7월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연대를 지휘했다.[3]
루이 레피크는 '대령-소령'으로서 제국친위대 기마척탄병연대에서 뛰어난 지휘관으로 활약했다.[3] 그는 전투 경험이 풍부했으며, 프레데리크 앙리 발터 장군이 1813년 11월 24일 사망할 때까지 그의 지휘 하에 있었다.[3]
기능 | 대령 지휘관 | 대령-소령 | 차선임 소령 |
---|---|---|
사단장 | 준장 | 준장 또는 대령 |
베시에르(1799년 12월-1800년 7월) 오르데네(1800년 7월-1806년 5월) 발터(1806년 5월-1813년 11월) 기요(1813년 11월 - 1815년 11월) | 올리에 레피크 라페리에르-레베스크 자맹 드 베르뮈 | 샤스텔 엑셀망 Castex |
3. 1. 장바티스트 베시에르
베시에르는 1799년 12월부터 1800년 7월까지 제국친위대 기마척탄병연대의 초대 연대장(사단장)을 역임했다.[3] 그는 ''대령 지휘관''이라는 직함을 가졌다.[3] 1800년 7월 18일, 베시에르는 집정정부 친위대(Consular Guard Cavalry) 기병대 총 지휘를 맡게 되면서 연대 지휘는 오르데네 대령에게 넘어갔다.[3]3. 2. 미셸 오르데네르
베시에르가 전체 집정정부 친위대(Consular Guard Cavalry) 기병대의 총 지휘를 맡게 되면서, 1800년 7월 18일, 노련한 오르데네 대령이 제국 친위대 기마척탄병 연대의 지휘를 맡았다.[3] 오르데네는 1806년 5월 20일 현역에서 은퇴할 때까지 연대장 직을 유지했다.[3]3. 3. 프레데리크 앙리 발터
프레데리크 앙리 발터는 프랑스 혁명 전쟁의 베테랑이자 선임 기병대 장교로, 1806년 5월부터 1813년 11월 24일 사망할 때까지 제국친위대 기마척탄병연대를 지휘했다. 그는 사단장 계급으로, ''대령 지휘관''(colonel commandant)이라는 직함을 가졌다. 발터의 전임자는 미셸 오르데네였으며, 후임자는 클로드 에티엔 기요였다.3. 4. 클로드 에티엔 기요
발터 장군이 1813년 11월 24일 사망한 후, 45세의 기요가 연대장이 되었다.[3] 기요는 1815년 7월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연대를 지휘했다.[3]3. 5. 루이 레피크
루이 레피크는 '대령-소령'으로서 제국친위대 기마척탄병연대에서 뛰어난 지휘관으로 활약했다.[3] 그는 전투 경험이 풍부했으며, 프레데리크 앙리 발터 장군이 1813년 11월 24일 사망할 때까지 그의 지휘 하에 있었다.[3]4. 주요 참전 전투
제2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동안 이 부대의 첫 번째 실전은 마렝고에서 극적으로 벌어졌다.[4] 제1통령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오스트리아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있을 때, 루이 드제의 프랑스 사단이 전장에 나타났다.[4] 드제의 부대가 돌격할 때, 두 차례의 기병 돌격이 전투의 흐름을 바꾸는 데 기여했다.[4] 켈레르만의 여단은 오스트리아군 우익에 능숙하게 배치된 후 돌격하여 모든 것을 무너뜨렸고, 오스트리아군 좌익에서는 베시에르가 전 헌병 근위 기병대를 동원하여 대규모 돌격을 조직하여 적군의 공황과 궤주를 더욱 심화시켰다.[4] 전투 후 베시에르는 제1통령으로부터 그의 행동에 대해 높은 칭찬을 받았는데, 그는 장군에게 "귀관의 지휘 아래 근위대는 영광을 덮었다. 주어진 상황에서 더 잘 수행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4] 전투 후 한 달이 조금 넘은 시점에, 연대 지휘권은 로렌 출신 미셸 오르드네르 대령이 맡게 되었다.[4]
5년 후, 기마척탄병은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에서 다시 전투를 치르게 된다. 러시아 제국과 오스트리아 제국과의 전쟁이 발발하면서, 당시 황제 근위대에 소속된 기마척탄병은 1805년 10월 1일 라인강을 건너 신성 로마 제국으로 진군했다.[4] 10일 후, 그들은 아우크스부르크에 도착했고 10월 20일 울름 전투에서 항복을 지켜보았다.[4] 이들은 이 전쟁에서 단 한 번의 주요 작전을 펼쳤는데, 12월 2일 아우스터리츠 전투의 프라첸 고원에서였다.[4] 이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의 중앙을 돌파하여 그들의 병력을 분리하려 했다.[4] 오전 중반까지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었지만, 콘스탄틴 파블로비치 대공이 이끄는 러시아 근위대가 도착하여 스타리 비노흐라디('오래된 포도원') 주변의 방담 사단으로부터 프랑스군을 공격하면서 프랑스군에게 잠재적으로 위험한 상황이 발생했다.[4] 처음에는 프랑스 제4보병 연대 1개 대대가 불리한 위치에 놓여 러시아 근위 기병의 공격에 궤멸되었고, 대포의 지원을 받은 프랑스 대대는 연대 기를 잃고 400명 이상의 병력을 잃었다.[4] 그 후, 제4보병 연대를 지원하기 위해 온 제24경보병 연대 역시 혼란 속에 후퇴했다.[4] 바로 이때 나폴레옹은 근위 기병을 투입했다.[4] 황제 근위 기병 척탄병 4개 중대 423명, 황제 근위 맘루크 연대와 근위 기병 포병 1개 포대로 지원되는 기마척탄병 연대 4개 중대 706명이었다.[4] 기마척탄병들은 맹렬하게 돌격하여 러시아 기병 근위 연대와 격돌했다.[4][5] 짧은 백병전 끝에 기마척탄병은 적을 격파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지휘관인 레프닌 공작을 포함한 장교 200명 이상을 포로로 잡았으며, 27문의 포를 노획했다.[4][5] 이 과정에서 기마척탄병은 2명 사망, 22명 부상(장교 6명 부상)이라는 적은 피해를 입었다.[4][5]
1806년 5월, 발터 장군이 오르데너를 대신하여 제국친위대 기마척탄병연대의 지휘관이 되었다. 발터는 선임 장교였기 때문에 베시에르 원수가 부재 시에는 근위 기병 전체의 부지휘관 역할도 수행했다.[6] 1806년의 전격전은 프로이센을 상대로 진행되었으나, 연대는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해 폴란드에서 전쟁은 계속되었고, 프랑스군은 러시아군을 추격했다.[6]
폴란드 겨울의 혹독함, 열악한 도로 상태, 그리고 특정 지역의 극심한 빈곤은 양측 모두에게 상당한 고통을 가져왔고, 제대로 된 정찰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몇 차례의 초기 기동과 소규모 교전 이후, 에일라우 전투에서 첫 번째 주요 전투가 벌어졌다. 여기서 대육군은 심각한 수적 열세[7]에도 불구하고 전투를 벌였으며, 예상했던 증원군이 도착하지 않아 나폴레옹의 입지는 점점 더 위태로워졌다. 이에 황제는 원수 뮈라에게 예비 기병 전체를 투입하여 대대적인 돌격을 감행하라고 명령했다. 처음에 뮈라는 2개 용기병 사단과 1개 흉갑기병 사단을 이끌고 돌격했고, 이들은 러시아 전선을 뚫고 나아가 적 후방까지 진격했지만, 적의 포위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8]
그 결과 황제는 베시에르 원수에게 고립된 예비 기병을 돕도록 명령했고, 이에 따라 ''샤쇠르 아 슈발''을 선두로 하고, 제5 흉갑기병 및 ''기마척탄병''의 중기병이 뒤따르는 두 번째 기병 돌격이 이어졌다. 기마척탄병을 지휘한 사람은 레피크 대령으로, 그는 연대의 2개 소대를 훌륭하게 이끌며, 첫 번째와 두 번째 러시아 전선을 돌파하고, 적 예비 부대 앞에서 멈춰 섰다. 소수의 기마척탄병이 세 번째 적 전선 앞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거의 포위되었고 러시아군은 즉시 항복을 요구했다. 레피크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내 부하들을 보아라, 항복할 것처럼 보이는지 말이다!" 그러고는 즉시 돌격을 명령하여, 자기 진영으로 돌아가는 길을 열었다.[8] 연대는 장교 4명이 전사하고 14명이 부상당했으며, 많은 수의 기병을 잃었지만, 근위 기병의 돌격은 동료 예비 기병들이 포위를 뚫고 원래 위치로 돌아갈 수 있도록 했다. 프랑스군은 그날 저녁 늦게 피비린내 나는 아일라우 전투에서 무승부를 기록했다.[8]
이베리아 반도 전쟁이 발발하고, 제국친위대 기마척탄병연대는 장-밥티스트 베시에르의 스페인 육군 제2군단에 배속되어 마드리드에서 5월 봉기에 참여했다.[9] 이때 연대의 첫 번째 군의관인 고티에가 부상을 입었다.[9] 이후 연대는 국가 북서부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7월 14일 메디나 데 리오세코 전투에서 베시에르는 약 14,000명의 병력으로 바야돌리드 근처에서 약 22,000명의 스페인 군단과 대치했다. 연대의 몇몇 기병대는 피에르 메를 장군의 보병 공격을 지원하면서 짧지만 결정적인 활약을 펼쳐 스페인군을 격퇴하고 전투에서 승리했다.[10]
이후 2년 동안 연대의 몇몇 중대만이 스페인에서 활동하며 참전했는데, 이들은 북서부 스페인에서 베시에르와 함께 했다. 베시에르는 앙드레 마세나의 포르투갈군을 지원하기로 되어 있었다. 마세나는 리스본에서 웰링턴 장군을 포위하는 데 바빴지만, 요새화된 토르스 베드라스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하고 결국 알메이다로 후퇴했다. 웰링턴은 그를 따라갔고, 1811년 5월 푸엔테스 데 오뇨로 전투에서 곤란한 상황에 놓였다. 마세나는 웰링턴의 방어선 약점을 훌륭하게 활용했고 잉-포르투갈군이 궤멸될 것처럼 보였다. 시간이 중요했고, 마세나는 즉시 젊은 부관인 샤를 우디노를 레피크와 근위 기병대를 찾아 즉시 돌격 명령을 내리도록 보냈다. 그러나 우디노는 곧 그의 지휘관에게 돌아와 근위 기병대를 데려올 수 없다고 말했다. 레피크는 베시에르만을 지휘관으로 인정하고 그의 명령 없이는 칼을 뽑지 않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베시에르는 어디에도 없었고, 더 이상의 헛된 공격 끝에 마세나는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11]
1809년 초, 황제는 제5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을 위해 근위대를 중앙 독일로 소환했다. 그들은 수많은 오스트리아 포병의 격렬한 포격 속에서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 참전했고, 훨씬 우세한 적을 막기 위한 군대의 고군분투를 지켜봤다. 나폴레옹 자신이 산탄(canister)에 의해 부츠가 찢어졌을 때, 근위 기병대 사령관인 프리데릭 앙리 발터 장군은 황제가 자진해서 퇴각하지 않으면 그의 척탄병들에게 강제로 후방으로 데려가겠다고 위협했다. 나폴레옹은 이에 따랐지만, 군대의 일반적인 퇴각을 도나우강(Danube)의 로바우 섬으로 명령해야 했다.[6] 6주 후, 나폴레옹은 다시 도나우강을 건너 이번에는 상당한 병력을 이끌고 마르히펠트 평원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공격했다. 이어진 바그람 전투에서 ''척탄기병''은 전투 첫날 예비대로 투입되었다.[6]
그러나 전투 이틀째인 1809년 7월 6일, 척탄병은 나머지 근위 기병대와 함께 자크 맥도날 장군의 대규모 공격 대열을 지원하도록 배정되었다. 초기에 성공을 거둔 맥도날은 눈앞의 무질서한 병력을 격파할 드문 기회를 포착하고, 이를 위해 에티엔 마리 앙투안 샹피옹 드 낭수티 장군 휘하의 기병 예비대의 돌격을 요청했으며, 해당 지역의 다른 모든 기병 지휘관들에게도 같은 요청을 했다. 그러나 근위 기병대는 움직이지 않았고 기회는 수포로 돌아갔다. 분노한 맥도날은 전투 후 발터에게 그의 무대응에 대해 따졌고, 발터는 그의 지휘관인 베시에르 원수도, 황제도 돌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으며, 근위대는 둘 중 한 명의 직접적인 명령 없이는 행동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맥도날은 돌격이 결정적이었을 것이라고 설명하려 했지만 발터는 즉시 경례하고 자리를 떴다.[11]
1812년, 곧 발발할 러시아 원정으로 인해 기마척탄병은 스페인에서 소환되었다. 근위 기병 제3 여단 소속으로, 5개 중대에 1,166명으로 구성되었다. 6월부터 9월까지의 원정 초반은 근위대에겐 긴 행군에 불과했고, 전투에 투입되지 않아 보로디노 전투에 온전한 전력으로 도착할 수 있었다.[12] 이 전투에서 프랑스 야전 지휘관들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은 프랑스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근위대를 투입하는 것을 거부했다.[13] 모스크바 대화재 동안, 기마척탄병은 훈련과 높은 도덕성으로 명성이 높아 도시를 통제하는 데 사용되었다. 10월 중순, 대육군 전체가 폐허가 된 도시에서 철수하기 시작했고, 바르샤바 공국으로의 퇴각은 기마척탄병에게 황제 사령부의 보호 임무를 부여하며 부차적인 작전만을 제공했다. 퇴각 중의 소규모 교전, 추위, 그리고 궁핍함은 연대에 큰 피해를 입혔고, 베레지나 전투 시점에 기마척탄병과 근위 경기병을 합쳐 기병으로서 전투 가능한 병력은 500명에 불과했고, 수백 명은 하마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기는 전반적으로 좋게 유지되었다.[12]
이 연대는 1813년 재편성 후, 4월에 전투에 다시 투입되었다. 나폴레옹은 4월 27일 에르푸르트에서 연대를 사열했고, 며칠 뒤 연대는 장바티스트 베시에르 원수가 리파크 마을 근처에서 러시아 포탄에 맞아 전사했다는 소식을 접했다.[15] 연대는 드레스덴 전투에 참전했고, 10월 말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보병 근위대를 지원하여 로이츠니츠 마을을 점령했다.[15] 10월 말 하나우 전투에서 카를 필리프 폰 브레데 휘하의 바이에른 왕국 군대가 프랑스로 퇴각하는 그랑 다르메를 막으려 하자, 나폴레옹은 직접 '기마 척탄병'을 격려하며 전투에 투입했다. 근위대 기병 전체가 돌격하여 적 기병을 격파하고 추격했다. 이 전투에서 '수석 대령' 루이마리 레베스크 장군은 칼에 여섯 번 베였고, 잘펠트 전투에서 프로이센의 루이 페르디난트 왕자를 죽인 구인데이 대위 보좌관은 전사했다. 11월 24일에는 연대 사령관 프레데릭 앙리 발터 사단 장군이 과로와 질병으로 사망했고, 12월 1일 클로드 에티엔 기요 사단 장군이 연대 사령관으로, 에티엔 마리 앙투안 샹피옹 드 낭수티 선임 사단 장군이 근위대 기병 전체 지휘를 맡았다.[15]
1814년 프랑스 전역에서 낭수티 휘하의 근위대 기병대는 라 로티에르 전투에서 압도적인 적과 싸웠고, 자하르 드미트리예비치 올수피예프 장군 부대의 러시아 보병 사각대형 여러 개를 격파했다.[15] 몽미라이 전투에서 러시아 여단 두 개를 전멸시켰고, 샤토티에리 전투 (1814)에서 연합군 포병대를 공격했으며, 보샹 전투에서 게브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퓌셔의 군대를 격파하는 데 기여했다. 랭스 전투 (1814)와 크론 전투 등 여러 작전에 참여하여 적의 사각대형을 격파했다. 크론 전투에서 척탄병 지휘관 레베스크 드 라페리에르 장군은 다리를 잃었고, 키스터 대위도 전사했다. 마지막 작전은 메리 쉬르 센에서 벌어졌으며, 보헤미아 군의 부교병 팀을 포획했다.[15]
나폴레옹이 퇴위하고 부르봉 왕가가 복고된 후, 척탄병들은 왕의 칙령에 따라 블로아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814년 5월 12일 칙령에 따라 이들은 "프랑스 왕립 기병대"로 재편성될 예정이었다. 6월 21일 칙령으로 부대 정원은 장교 42명과 병사 602명, 2개 중대 규모로 편성되었다.[16] 그러나 1815년 3월 말 나폴레옹이 권력을 되찾으면서 척탄병들은 이전의 조직과 지위를 회복했다.[16]
제7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이 발발하자 척탄병들은 근위 중기병 사단에 포함되어 황실 근위 용기병과 함께 참전했다.[16] 워털루 전투에서 척탄병들은 맹렬하게 돌격했으나, 연합군 사단 근처에서 영국군 산탄 포탄에 맞아 ''소령'' 장-밥티스트-오귀스트-마리 자민이 사망하고 부관 2명(튀페르와 모로) 및 다른 장교 16명이 부상을 입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16] 워털루 전투는 이 전설적인 부대의 마지막 전투가 되었으며, 1815년 말 부르봉 왕가의 2차 복고 이후 해산되었다.[16]
4. 1. 제2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제2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동안 이 부대의 첫 번째 실제 교전은 마렝고에서 극적인 상황 속에서 벌어졌다.[4] 제1통령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오스트리아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있을 때, 루이 드제의 프랑스 사단이 전장에 나타났다.[4] 드제의 부대가 돌격할 때, 두 차례의 기병 돌격이 전투의 흐름을 바꾸는 데 기여했다.[4] 켈레르만의 여단은 오스트리아군 우익에 능숙하게 배치된 후 돌격하여 모든 것을 무너뜨렸고, 오스트리아군 좌익에서는 베시에르가 전 헌병 근위 기병대를 동원하여 대규모 돌격을 조직하여 적군의 공황과 궤주를 더욱 심화시켰다.[4] 전투 후 베시에르는 제1통령으로부터 그의 행동에 대해 높은 칭찬을 받았는데, 그는 장군에게 "귀관의 지휘 아래 근위대는 영광을 덮었다. 주어진 상황에서 더 잘 수행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4] 전투 후 한 달이 조금 넘은 시점에, 연대 지휘권은 로렌 출신 미셸 오르드네르 대령이 맡게 되었다.[4]4. 2.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5년 후, 기마척탄병은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에서 다시 전투를 치르게 된다. 러시아 제국과 오스트리아 제국과의 전쟁이 발발하면서, 당시 황제 근위대에 소속된 기마척탄병은 1805년 10월 1일 라인강을 건너 신성 로마 제국으로 진군했다.[4] 10일 후, 그들은 아우크스부르크에 도착했고 10월 20일 울름 전투에서 항복을 지켜보았다.[4] 이들은 이 전쟁에서 단 한 번의 주요 작전을 펼쳤는데, 12월 2일 아우스터리츠 전투의 프라첸 고원에서였다.[4] 이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의 중앙을 돌파하여 그들의 병력을 분리하려 했다.[4] 오전 중반까지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었지만, 콘스탄틴 파블로비치 대공이 이끄는 러시아 근위대가 도착하여 스타리 비노흐라디('오래된 포도원') 주변의 방담 사단으로부터 프랑스군을 공격하면서 프랑스군에게 잠재적으로 위험한 상황이 발생했다.[4] 처음에는 프랑스 제4보병 연대 1개 대대가 불리한 위치에 놓여 러시아 근위 기병의 공격에 궤멸되었고, 대포의 지원을 받은 프랑스 대대는 연대 기를 잃고 400명 이상의 병력을 잃었다.[4] 그 후, 제4보병 연대를 지원하기 위해 온 제24경보병 연대 역시 혼란 속에 후퇴했다.[4] 바로 이때 나폴레옹은 근위 기병을 투입했다.[4] 황제 근위 기병 척탄병 4개 중대 423명, 황제 근위 맘루크 연대와 근위 기병 포병 1개 포대로 지원되는 기마척탄병 연대 4개 중대 706명이었다.[4] 기마척탄병들은 맹렬하게 돌격하여 러시아 기병 근위 연대와 격돌했다.[4][5] 짧은 백병전 끝에 기마척탄병은 적을 격파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지휘관인 레프닌 공작을 포함한 장교 200명 이상을 포로로 잡았으며, 27문의 포를 노획했다.[4][5] 이 과정에서 기마척탄병은 2명 사망, 22명 부상(장교 6명 부상)이라는 적은 피해를 입었다.[4][5]4. 3. 제4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1806년 5월, 발터 장군이 오르데너를 대신하여 제국친위대 기마척탄병연대의 지휘관이 되었다. 발터는 선임 장교였기 때문에 베시에르 원수가 부재 시에는 근위 기병 전체의 부지휘관 역할도 수행했다.[6] 1806년의 전격전은 프로이센을 상대로 진행되었으나, 연대는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해 폴란드에서 전쟁은 계속되었고, 프랑스군은 러시아군을 추격했다.[6]폴란드 겨울의 혹독함, 열악한 도로 상태, 그리고 특정 지역의 극심한 빈곤은 양측 모두에게 상당한 고통을 가져왔고, 제대로 된 정찰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몇 차례의 초기 기동과 소규모 교전 이후, 에일라우 전투에서 첫 번째 주요 전투가 벌어졌다. 여기서 대육군은 심각한 수적 열세[7]에도 불구하고 전투를 벌였으며, 예상했던 증원군이 도착하지 않아 나폴레옹의 입지는 점점 더 위태로워졌다. 이에 황제는 원수 뮈라에게 예비 기병 전체를 투입하여 대대적인 돌격을 감행하라고 명령했다. 처음에 뮈라는 2개 용기병 사단과 1개 흉갑기병 사단을 이끌고 돌격했고, 이들은 러시아 전선을 뚫고 나아가 적 후방까지 진격했지만, 적의 포위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8]
그 결과 황제는 베시에르 원수에게 고립된 예비 기병을 돕도록 명령했고, 이에 따라 ''샤쇠르 아 슈발''을 선두로 하고, 제5 흉갑기병 및 ''기마척탄병''의 중기병이 뒤따르는 두 번째 기병 돌격이 이어졌다. 기마척탄병을 지휘한 사람은 레피크 대령으로, 그는 연대의 2개 소대를 훌륭하게 이끌며, 첫 번째와 두 번째 러시아 전선을 돌파하고, 적 예비 부대 앞에서 멈춰 섰다. 소수의 기마척탄병이 세 번째 적 전선 앞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거의 포위되었고 러시아군은 즉시 항복을 요구했다. 레피크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내 부하들을 보아라, 항복할 것처럼 보이는지 말이다!" 그러고는 즉시 돌격을 명령하여, 자기 진영으로 돌아가는 길을 열었다.[8] 연대는 장교 4명이 전사하고 14명이 부상당했으며, 많은 수의 기병을 잃었지만, 근위 기병의 돌격은 동료 예비 기병들이 포위를 뚫고 원래 위치로 돌아갈 수 있도록 했다. 프랑스군은 그날 저녁 늦게 피비린내 나는 아일라우 전투에서 무승부를 기록했다.[8]
4. 4. 이베리아 반도 전쟁
이베리아 반도 전쟁이 발발하고, 제국친위대 기마척탄병연대는 장-밥티스트 베시에르의 스페인 육군 제2군단에 배속되어 마드리드에서 5월 봉기에 참여했다.[9] 이때 연대의 첫 번째 군의관인 고티에가 부상을 입었다.[9] 이후 연대는 국가 북서부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7월 14일 메디나 데 리오세코 전투에서 베시에르는 약 14,000명의 병력으로 바야돌리드 근처에서 약 22,000명의 스페인 군단과 대치했다. 연대의 몇몇 기병대는 피에르 메를 장군의 보병 공격을 지원하면서 짧지만 결정적인 활약을 펼쳐 스페인군을 격퇴하고 전투에서 승리했다.[10]이후 2년 동안 연대의 몇몇 중대만이 스페인에서 활동하며 참전했는데, 이들은 북서부 스페인에서 베시에르와 함께 했다. 베시에르는 앙드레 마세나의 포르투갈군을 지원하기로 되어 있었다. 마세나는 리스본에서 웰링턴 장군을 포위하는 데 바빴지만, 요새화된 토르스 베드라스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하고 결국 알메이다로 후퇴했다. 웰링턴은 그를 따라갔고, 1811년 5월 푸엔테스 데 오뇨로 전투에서 곤란한 상황에 놓였다. 마세나는 웰링턴의 방어선 약점을 훌륭하게 활용했고 잉-포르투갈군이 궤멸될 것처럼 보였다. 시간이 중요했고, 마세나는 즉시 젊은 부관인 샤를 우디노를 레피크와 근위 기병대를 찾아 즉시 돌격 명령을 내리도록 보냈다. 그러나 우디노는 곧 그의 지휘관에게 돌아와 근위 기병대를 데려올 수 없다고 말했다. 레피크는 베시에르만을 지휘관으로 인정하고 그의 명령 없이는 칼을 뽑지 않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베시에르는 어디에도 없었고, 더 이상의 헛된 공격 끝에 마세나는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11]
4. 5. 제5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1809년 초, 황제는 제5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을 위해 근위대를 중앙 독일로 소환했다. 그들은 수많은 오스트리아 포병의 격렬한 포격 속에서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 참전했고, 훨씬 우세한 적을 막기 위한 군대의 고군분투를 지켜봤다. 나폴레옹 자신이 산탄(canister)에 의해 부츠가 찢어졌을 때, 근위 기병대 사령관인 프리데릭 앙리 발터 장군은 황제가 자진해서 퇴각하지 않으면 그의 척탄병들에게 강제로 후방으로 데려가겠다고 위협했다. 나폴레옹은 이에 따랐지만, 군대의 일반적인 퇴각을 도나우강(Danube)의 로바우 섬으로 명령해야 했다.[6] 6주 후, 나폴레옹은 다시 도나우강을 건너 이번에는 상당한 병력을 이끌고 마르히펠트 평원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공격했다. 이어진 바그람 전투에서 ''척탄기병''은 전투 첫날 예비대로 투입되었다.[6]
그러나 전투 이틀째인 1809년 7월 6일, 척탄병은 나머지 근위 기병대와 함께 자크 맥도날 장군의 대규모 공격 대열을 지원하도록 배정되었다. 초기에 성공을 거둔 맥도날은 눈앞의 무질서한 병력을 격파할 드문 기회를 포착하고, 이를 위해 에티엔 마리 앙투안 샹피옹 드 낭수티 장군 휘하의 기병 예비대의 돌격을 요청했으며, 해당 지역의 다른 모든 기병 지휘관들에게도 같은 요청을 했다. 그러나 근위 기병대는 움직이지 않았고 기회는 수포로 돌아갔다. 분노한 맥도날은 전투 후 발터에게 그의 무대응에 대해 따졌고, 발터는 그의 지휘관인 베시에르 원수도, 황제도 돌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으며, 근위대는 둘 중 한 명의 직접적인 명령 없이는 행동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맥도날은 돌격이 결정적이었을 것이라고 설명하려 했지만 발터는 즉시 경례하고 자리를 떴다.[11]
4. 6. 러시아 원정
1812년, 곧 발발할 러시아 원정으로 인해 기마척탄병은 스페인에서 소환되었다. 근위 기병 제3 여단 소속으로, 5개 중대에 1,166명으로 구성되었다. 6월부터 9월까지의 원정 초반은 근위대에겐 긴 행군에 불과했고, 전투에 투입되지 않아 보로디노 전투에 온전한 전력으로 도착할 수 있었다.[12] 이 전투에서 프랑스 야전 지휘관들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은 프랑스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근위대를 투입하는 것을 거부했다.[13] 모스크바 대화재 동안, 기마척탄병은 훈련과 높은 도덕성으로 명성이 높아 도시를 통제하는 데 사용되었다. 10월 중순, 대육군 전체가 폐허가 된 도시에서 철수하기 시작했고, 바르샤바 공국으로의 퇴각은 기마척탄병에게 황제 사령부의 보호 임무를 부여하며 부차적인 작전만을 제공했다. 퇴각 중의 소규모 교전, 추위, 그리고 궁핍함은 연대에 큰 피해를 입혔고, 베레지나 전투 시점에 기마척탄병과 근위 경기병을 합쳐 기병으로서 전투 가능한 병력은 500명에 불과했고, 수백 명은 하마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기는 전반적으로 좋게 유지되었다.[12]4. 7. 제6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이 연대는 1813년 재편성 후, 4월에 전투에 다시 투입되었다. 나폴레옹은 4월 27일 에르푸르트에서 연대를 사열했고, 며칠 뒤 연대는 장바티스트 베시에르 원수가 리파크 마을 근처에서 러시아 포탄에 맞아 전사했다는 소식을 접했다.[15] 연대는 드레스덴 전투에 참전했고, 10월 말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보병 근위대를 지원하여 로이츠니츠 마을을 점령했다.[15] 10월 말 하나우 전투에서 카를 필리프 폰 브레데 휘하의 바이에른 왕국 군대가 프랑스로 퇴각하는 그랑 다르메를 막으려 하자, 나폴레옹은 직접 '기마 척탄병'을 격려하며 전투에 투입했다. 근위대 기병 전체가 돌격하여 적 기병을 격파하고 추격했다. 이 전투에서 '수석 대령' 루이마리 레베스크 장군은 칼에 여섯 번 베였고, 잘펠트 전투에서 프로이센의 루이 페르디난트 왕자를 죽인 구인데이 대위 보좌관은 전사했다. 11월 24일에는 연대 사령관 프레데릭 앙리 발터 사단 장군이 과로와 질병으로 사망했고, 12월 1일 클로드 에티엔 기요 사단 장군이 연대 사령관으로, 에티엔 마리 앙투안 샹피옹 드 낭수티 선임 사단 장군이 근위대 기병 전체 지휘를 맡았다.[15]1814년 프랑스 전역에서 낭수티 휘하의 근위대 기병대는 라 로티에르 전투에서 압도적인 적과 싸웠고, 자하르 드미트리예비치 올수피예프 장군 부대의 러시아 보병 사각대형 여러 개를 격파했다.[15] 몽미라이 전투에서 러시아 여단 두 개를 전멸시켰고, 샤토티에리 전투 (1814)에서 연합군 포병대를 공격했으며, 보샹 전투에서 게브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퓌셔의 군대를 격파하는 데 기여했다. 랭스 전투 (1814)와 크론 전투 등 여러 작전에 참여하여 적의 사각대형을 격파했다. 크론 전투에서 척탄병 지휘관 레베스크 드 라페리에르 장군은 다리를 잃었고, 키스터 대위도 전사했다. 마지막 작전은 메리 쉬르 센에서 벌어졌으며, 보헤미아 군의 부교병 팀을 포획했다.[15]
4. 8. 제7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나폴레옹이 퇴위하고 부르봉 왕가가 복고된 후, 척탄병들은 왕의 칙령에 따라 블로아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814년 5월 12일 칙령에 따라 이들은 "프랑스 왕립 기병대"로 재편성될 예정이었다. 6월 21일 칙령으로 부대 정원은 장교 42명과 병사 602명, 2개 중대 규모로 편성되었다.[16] 그러나 1815년 3월 말 나폴레옹이 권력을 되찾으면서 척탄병들은 이전의 조직과 지위를 회복했다.[16]제7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이 발발하자 척탄병들은 근위 중기병 사단에 포함되어 황실 근위 용기병과 함께 참전했다.[16] 워털루 전투에서 척탄병들은 맹렬하게 돌격했으나, 연합군 사단 근처에서 영국군 산탄 포탄에 맞아 ''소령'' 장-밥티스트-오귀스트-마리 자민이 사망하고 부관 2명(튀페르와 모로) 및 다른 장교 16명이 부상을 입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16] 워털루 전투는 이 전설적인 부대의 마지막 전투가 되었으며, 1815년 말 부르봉 왕가의 2차 복고 이후 해산되었다.[16]
5. 유산
참조
[1]
서적
Pigeard, 139-140
[2]
서적
Pigeard, 141
[3]
서적
Pigeard, 147
[4]
서적
La Garde Impériale
[5]
서적
Smith, 58-29, 247
[6]
서적
Pigeard, 143
[7]
서적
Hourtoulle, 4-13
[8]
서적
Hourtoulle, 61
[9]
서적
La Garde Impériale
[10]
서적
Dictionnaire des batailles de Napoléon
[11]
서적
Sokolov, p. 455
[12]
서적
La Garde Impériale
[13]
서적
Sokolov, p. 454-455
[14]
서적
Tulard, vol. II, p. 961
[15]
서적
La Garde Impériale
[16]
서적
La Garde Impériale
[17]
서적
Pigeard, 139-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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