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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 교리 방단적석유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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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천 교리 방단적석유구는 금수산 아래 암반 위에 축조된 석조물이다. 현재 2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하층은 화강암 판석을 9~10단, 상층은 7~8단 쌓아 올렸다. 상층과 하층 사이에는 단이 있으며, 주변 석축과 주춧돌로 보아 사찰 관련 건물터로 추정된다. 축조 시기는 고려시대로 추정되며, 모전석탑이었을 가능성도 제기되지만 원형을 알 수 없어 단정하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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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 교리 방단적석유구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2. 역사

모전석탑고려 시대, 특히 고려 전기에 처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1] 기록에 따르면 본래 7층 또는 5층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으나,[1] 일제강점기에 도굴 등으로 인해 크게 훼손되었다.[1] 1942년 조사 당시에도 일부 형태가 남아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며,[1] 현재는 기단부와 1층 탑신의 일부만 남아있는 상태이다.[1]

2. 1. 건립 및 훼손

모전석탑의 정확한 건립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조성 위치나 석재 다듬는 방식 등이 안동 대사동 모전석탑, 영양 삼지동 모전석탑 등과 유사하고, 사지에서 확인되는 기와 조각 등을 고려할 때 고려 시대, 특히 고려 전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1]

1942년에 발간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따르면, 이 탑은 잘 다듬어진 기와 형태의 석재 조각을 쌓아 올린 7층탑이었으며, 높이는 약 7.5m에 달했다. 탑 주변에는 기와 조각들이 흩어져 있어 이곳이 사찰과 관련된 터였음을 짐작하게 한다.[1]

1960년에 보고된 글에 의하면, 1935년경까지는 7층의 완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마을 주민들이 불공을 드리던 신앙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들어서 도굴꾼들이 탑 안의 보물을 노리고 탑을 무너뜨려 크게 훼손되었다고 전해진다.[1] 한편, 1982년 보고서에는 당시 70세였던 마을 주민의 증언이 실려 있는데, 그가 15세였던 해(1927년경으로 추정) '탑골'에 갔을 때 탑이 5층 정도로 남아 있었고 모퉁이에는 풍경까지 달려있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1]

이러한 기록들을 종합해 볼 때, 제천 교리 모전석탑은 고려 시대에 건립되어 조선 시대까지 유지되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심각하게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1942년경까지도 5층 또는 7층의 모습을 일부 간직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는 기단부와 1층 탑신 일부만 남아있는 상태이다.[1]

2. 2. 발굴 및 연구

1942년에 발간된 『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는 이 탑이 정련된 기와 형태의 석편을 겹쳐 쌓은 7층탑이며, 높이는 약 7.5m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주변에 기와 조각이 흩어져 있어 사찰 터로 추정된다고 하였다. 1960년에 보고된 글에 따르면, 이 탑은 1935년경까지 7층의 완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마을 주민들이 불공을 드리던 곳이었으나, 일제강점기에 도굴꾼들이 탑 안의 보물을 훔치기 위해 파괴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1982년 보고서에는 한 마을 주민(당시 70세)이 15세(1927년경) 때 '탑골'에 갔을 때 5층 정도가 완전하게 남아 있었고 모퉁이에 풍경까지 달려 있는 것을 보았다는 증언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들을 종합해 볼 때, 이 석탑은 교리사지와 관련된 불탑이었으며, 1942년경까지는 5층 또는 7층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

현재 모전석탑은 자연 암반 위에 남쪽(S-10°-W)을 향해 세워져 있으며, 기단부와 1층 탑신석 일부만 남아 있고 주변에는 많은 양의 모전석탑 부재들이 흩어져 있다. 기단은 단층으로, 암반 위에 수평을 맞춰 6~9단 정도로 쌓았다. 기단의 높이는 암반의 높낮이에 따라 동면과 북동면이 70cm~80cm 정도이고, 남서면과 북서면은 105cm~120cm 정도로 더 높다. 기단부의 크기는 대략 4m × 4.3m이다. 기단에 사용된 돌은 60cm×25cm×14cm, 58cm×48cm×10cm, 30cm×30cm×8cm 정도 크기로 얇고 평평하게 다듬었으며, 탑재 사이의 빈틈은 잡석으로 채웠다.[1]

기단 위에는 1단의 탑신 괴임을 놓고 1층 탑신을 쌓았다. 탑신 괴임의 크기는 너비 2.25m × 2.35m, 높이 14cm이다. 사용된 탑재는 기단부 석재와 비슷하나 모서리 부분의 석재가 상대적으로 크다. 1층 탑신은 탑신 괴임에서 안쪽으로 15cm 정도 들여쌓았으며, 크기는 195cm × 202cm × 90cm 정도이다. 탑재는 기단석과 유사한 크기로 다듬어졌으며, 현재 8단까지만 남아 있다. 탑신 상부 중앙에는 100cm × 73cm 크기의 큰 돌을 놓고 주변에 길쭉한 돌과 잡석을 채워 넣었다.[1]

이 모전석탑은 규모는 다르지만 조성 위치나 모전석재를 다듬은 방식 등이 안동 대사동 모전석탑(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70호)과 유사하다. 또한 사찰의 중심 영역에서 벗어나 능선 위나 암반 위에 세워진 입지적 특징은 영양 삼지동 모전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71호), 안동 옥산사지 전탑, 안동 개목사지 전탑 등과도 유사점을 보인다. 이처럼 능선이나 암반 위에 세워진 모전석탑들은 강과 가까운 평지에 조성된 탑들에 비해 규모가 작고 대부분 고려 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이 모전석탑 역시 고려 시대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사찰 터에서 확인되는 기와 조각의 사용 시기와 비교해 볼 때 고려 전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1]

3. 구조

과거 기록에 따르면 이 석탑은 본래 7층 또는 5층 규모였으며, 모퉁이에 풍경까지 달려 있었다고 전해진다.[1] 1935년경까지 7층으로 완전하게 남아 마을 주민들이 불공을 드리던 곳이었으나, 일제강점기에 도굴꾼들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한다.[1] 이후 1942년 조사 기록에는 7층 또는 5층의 모습으로 남아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

현재는 자연 암반 위에 남쪽(S-10°-W)을 향하여 세워진 기단부와 1층 탑신 일부만 남아 있으며, 주변에는 탑을 이루었던 많은 모전석탑 석재들이 흩어져 있다.[1] 돌을 벽돌처럼 얇고 편평하게 다듬어 쌓아 올린 것이 특징이다.[1] 단층의 기단은 암반의 높낮이에 맞춰 수평으로 쌓았고, 그 위에 1층 탑신을 올렸다.[1] 석재 사이의 빈틈은 잡석으로 메웠다.[1]

이러한 조성 위치나 모전석재를 다듬는 방식 등은 안동 대사동 모전석탑이나 영양 삼지동 모전석탑 등 다른 모전석탑들과 유사한 특징을 보인다.[1]

3. 1. 기단부

자연 암반 위에 남쪽(S-10°-W)을 바라보도록 조성되었다.[1] 기단은 단층이며, 암반 위에 수평을 맞춰 6~9단 정도로 쌓았다.[1] 기단의 높이는 암반의 경사에 따라 다른데, 동면과 북동면은 70cm에서 80cm 정도이며, 남서면과 북서면은 105cm에서 120cm 정도로 상대적으로 높다.[1] 기단부의 크기는 가로 4m, 세로 4.3m 정도이다.[1] 기단에 사용된 석재는 60cm×25cm×14cm, 58cm×48cm×10cm, 30cm×30cm×8cm 정도의 크기로 얇고 편평하게 다듬은 것이다. 석재 사이의 빈틈은 잡석으로 채워 넣었다.[1]

3. 2. 탑신부

기단 위에는 1단의 탑신괴임을 두고 1층 탑신을 쌓았다. 탑신괴임은 너비 2.25m×2.35m이고, 높이는 14cm이다. 탑재는 기단부에 사용된 석재와 비슷하지만 모서리 부분의 석재가 상대적으로 큰 편이다. 1층 탑신은 탑신괴임에서 15cm 정도 들여쌓았으며, 크기는 195cm×202cm×90cm 정도이다. 탑재는 기단석과 유사한 크기로 다듬어졌고 현재 8단까지만 남아있다. 탑신 상부의 중앙에는 100cm×73cm 크기의 대석을 두고 주변에 장대석과 잡석을 채워 넣었다.[1]

4. 특징

모전석탑은 자연 암반 위에 남쪽(S-10°-W)을 바라보고 조성되었다. 석탑은 현재 기단부와 1층 탑신석의 일부만 남아있으며, 주변에 많은 양의 모전석탑재가 흩어져 있다. 기단은 단층기단으로 암반 위에 수평을 맞춰 6~9단 정도로 쌓았다. 기단의 높이는 암반의 수평에 맞추었기 때문에 동면과 북동면이 70cm~80cm 정도이고, 남서면과 북서면이 105cm~120cm 정도로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다. 기단부 길이는 4m×4.3m 정도이다. 기단에 사용된 탑재는 돌을 60×25×14cm, 58×48×10cm, 30×30×8cm 정도 크기로 얇고 편평하게 다듬은 것이고, 탑재 사이에는 빈틈을 채우기 위한 잡석이 이용되었다.[1]

기단 위에는 1단의 탑신괴임을 두고 1층 탑신을 축조하였다. 탑신괴임은 너비 2.25m×2.35m이고, 높이는 14cm이다. 탑재는 기단부에 사용된 석재와 비슷하지만 모서리 부분의 석재가 상대적으로 큰 편이다. 1층 탑신은 탑신괴임에서 15cm 정도 들여쌓았으며, 크기는 195×202×90cm 정도이다. 탑재는 기단석과 유사한 크기로 다듬어졌고 현재 8단까지만 남아있다. 탑신 상부의 중앙에는 100×73cm 크기의 대석을 두고 주변에 장대석과 잡석을 채워 넣었다.[1]

이 모전석탑은 규모의 차이가 있지만 조성 위치와 모전석재의 다듬는 방법 등이 안동 대사동 모전석탑(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70호)과 유사하다. 또한 조성 위치의 특징으로 볼 때 영양 삼지동 모전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71호)과 안동 옥산사지 전탑, 안동 개목사지 전탑 등과도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이처럼 사찰의 중심 영역에서 벗어나 능선 위나 암반 위에 세워진 모전석탑들은 강과 인접한 평지에 조성된 모전석탑(혹은 전탑)에 비해 규모가 작고, 대부분 고려 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이 모전석탑의 조성 시기는 고려 시대로 보이며, 사지에서 확인되는 기와 조각의 사용 시기와 비교해 보았을 때 고려 전기 경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1]

5. 의의 및 평가

제천 교리 모전석탑은 비록 현재 기단부와 1층 탑신 일부만 남아 심하게 훼손된 상태이지만[1], 고려시대 모전석탑의 양식과 특징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1] 과거 기록에 따르면 1935년경까지 7층의 완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으며[1], 1942년 조사 당시에도 5층 또는 7층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1]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탑 내부의 보물을 노린 도굴꾼들에 의해 심하게 파괴되어 현재의 모습에 이른 것으로 전해진다.[1] 이는 우리 문화재가 겪었던 수난의 역사를 보여주는 안타까운 사례이다.

이 석탑은 일반적인 사찰 경내의 평지가 아닌 자연 암반 위에 조성되었다는 점에서 독특한 입지적 특징을 보인다.[1] 이러한 입지 조건은 안동 대사동 모전석탑이나 영양 삼지동 모전석탑, 안동 옥산사지 전탑, 안동 개목사지 전탑 등 다른 일부 모전석탑(또는 전탑)에서도 확인되는 특징으로[1], 강과 인접한 평지에 세워진 탑들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고려시대 석탑 연구에 있어 중요한 비교 자료를 제공한다.[1] 또한 석재를 다듬은 방식이나 축조 기법 등에서도 안동 대사동 모전석탑과 유사성이 발견된다.[1]

이러한 특징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제천 교리 모전석탑은 고려시대, 특히 사지에서 발견되는 기와 조각 등의 유물과 비교하여 고려 전기에 건립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1] 훼손 상태가 심각하지만, 남아있는 구조와 주변에 흩어진 탑 부재들은 당시의 건축 기술과 불교 미술의 일면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6. 현지 안내문

금수산 아래의 거대한 암반 위에 축조되어 있으며, 북서쪽 50m 근방에 석축과 주초석이 남아 있어 사찰과 관련된 건물터로 생각된다. 이 방단석조물은 현재 2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원래의 모습은 전혀 알 수 없다. 하층은 네 면의 폭이 4m 내외이며 높이는 1.2m 정도인데 화강암 판석을 9~10단 쌓았다. 상층 폭은 2m 내외, 높이는 0.8m 정도이며 7~8단 쌓았다.[2]

축조에 사용된 석재는 110cm x 25cm x 12cm(높이)의 대형 석재가 있는가 하면 20cm x 20cm x 6cm(높이)의 작은 석재도 있어 크기가 일정치는 않으나 육면체를 기본으로 한 점은 동일하다. 상층과 하층 사이에는 높이 15cm 가량의 단(段)을 두었는데 이러한 모습은 불탑(佛塔)의 탑신 괴임을 연상케 한다.[2]

따라서 이 방단석조물은 원래 사찰과 관련된 모전석탑(模塼石塔)이 아니었을까 추측되나 원형을 알 수 없어 단정짓기는 곤란하다. 축조 시기 또한 알 수 없으나 사지(寺址)로 추정되는 근처의 건물터에서 수습되는 기와편이 고려 시대의 것으로 알려지고 있어서 이 방단석조물 또한 고려 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2]

참조

[1] 간행물 한국의 사지, 현황조사 보고서, 대전광역시 충청북도 2014 上 http://www.cha.go.kr[...] 문화재청
[2] 문서 현지 안내문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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