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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세페 피오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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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주세페 피오렐리는 1823년 나폴리에서 태어난 이탈리아의 고고학자이다. 1860년부터 1875년까지 폼페이 발굴 책임자를 역임하며 고대 도시의 주소 시스템을 개발하고 프레스코화를 복사, 분류하는 등 폼페이 발굴에 기여했다. 그는 또한 시체의 석고 모형을 제작하는 피오렐리 공정으로 유명하며, 외국 학자들을 위한 훈련 학교를 설립했다. 이탈리아 통일 후에는 이탈리아 고대 유물 및 미술 총감독으로 20년간 재직했으며, 다양한 고고학 관련 저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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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세페 피오렐리
기본 정보
주세페 피오렐리
주세페 피오렐리
이름주세페 피오렐리
출생1823년 6월 7일, 나폴리
사망1896년 1월 28일, 나폴리
국적이탈리아
학력 및 경력
직업고고학자
연구 분야폼페이
소속나폴리 국립 고고학 박물관장, 나폴리 대학교 교수
주요 업적폼페이 유적 발굴 및 보존, 석고 모형 기법 개발
추가 정보
로마자 표기Giuseppe Fiorelli

2. 생애

주세페 피오렐리는 1823년 6월 7일 나폴리에서 태어났다. 1848년 폼페이에서의 초기 작업을 마쳤으나, 고고학에 대한 그의 급진적인 접근 방식과 강한 민족주의적 성향으로 인해 당시 나폴리 왕국의 왕 페르디난도 2세와 갈등을 빚어 잠시 투옥되기도 했다. 정치범으로 수감되어 있는 동안 그는 3권으로 구성된 《폼페이 유물사》(History of Pompeian Antiques, 1860–64)를 저술했다. 석방 후, 피오렐리는 나폴리 대학교의 고고학 교수로 임명되었고, 1860년부터 1875년까지 폼페이 발굴 책임자로 활동했다. 1863년부터는 나폴리 국립 고고학 박물관 관장직도 겸임했다.

1860년 이탈리아 통일과 함께 폼페이의 법적 지위는 군주가 개인 소장품을 모으거나 저명한 외국 손님에게 유물을 선물하기 위해 이용하던 왕실 소유지에서 국가 소유로 변경되었다. 피오렐리는 폼페이 발굴 감독관으로 임명되어, 이곳을 서구 문명의 과거를 엿보고 현대 이전 시대를 이해할 수 있는 방문 장소로 만들기 위한 발굴 작업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그는 고대 도시 내의 각 구조물을 식별하기 위한 주소 체계를 개발했으며, 현장에 남겨진 프레스코화를 복사하고 목록화하는 작업에 집중했다.

1870년, 피오렐리는 제레미아 디스칸노에게 폼페이에서 발굴된 프레스코화를 복사하도록 의뢰했다. 1873년에 출판된 피오렐리의 저서 "1861년부터 1872년까지의 폼페이 발굴"에는 1870년에서 1872년 사이에 제작된 디스칸노의 세밀한 그림 50점 이상이 수록되어 있다.[1]

폼페이 발굴 책임자로서 피오렐리는 발굴 방식에 혁신을 가져왔다. 기존처럼 거리를 먼저 발굴하고 1층부터 집을 탐색하는 대신, 위에서 아래로 집을 발굴하는 시스템을 도입하여 발견된 유물들을 더 효과적으로 보존하고자 했다. 이 방식을 통해 발굴 과정에서 수집된 데이터는 고대 건물과 그 내부 구조를 복원하는 데 활용될 수 있었다. 다만, 중요한 벽화나 모자이크는 여전히 떼어내어 나폴리로 옮겨졌다. 또한 피오렐리는 폼페이 유적지를 '지역(regiones)', '구획(insulae)', '주택(domus)'으로 나누는 체계를 도입했는데, 이는 오늘날까지도 참조 형식으로 사용되고 있다.

피오렐리는 그의 이름을 딴 '피오렐리 기법(Fiorelli process)'으로 만든 석고 캐스트(calchi)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화산재 속에 묻힌 시신이나 다른 유기물이 시간이 지나 썩으면서 빈 공간을 남긴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발굴 중 이러한 빈 공간이 발견되면, 그 안에 파리 석고를 부어 굳혔다. 이후 주변의 화산재를 조심스럽게 제거하면, 죽음의 순간에 있던 사람이나 동물의 형태가 그대로 복원된 석고상을 얻을 수 있었다. 이 기법은 화산 폭발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사망했는지, 마지막 순간에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어떤 옷을 입고 있었는지 등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했다.

피오렐리는 외국 학자들에게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이탈리아인과 외국인 모두 고고학 기술을 배울 수 있는 훈련 학교를 설립했으며, 폼페이에서 사용된 재료와 건축 방법에 대한 연구를 지원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많은 저명한 학자들이 폼페이 유적을 연구하기 위해 방문했는데, 그중에는 1882년 폼페이 벽화를 여러 장식 양식으로 분류하는 체계를 만든 아우구스트 마우도 포함된다. 마우의 연구는 오늘날에도 고대 로마 회화 연구의 표준적인 틀로 인정받고 있다.

1875년, 피오렐리는 이탈리아 고대 유물 및 미술 총감독으로 임명되어 20년간 재직했다. 그의 뒤를 이어 미켈레 루지에로, 줄리오 데 페트라, 에토레 파이스, 안토니오 소글리아노 등이 폼페이 발굴 작업을 계속했으며, 이들은 발굴된 주택 내부에 남아있는 벽화와 모자이크를 보호하기 위해 나무와 타일로 지붕을 복원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피오렐리는 1896년 1월 28일 나폴리에서 사망했으며,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3. 폼페이 발굴 업적

1860년 이탈리아 통일로 폼페이의 법적 지위가 왕실 소유에서 국가 소유로 변경되면서, 주세페 피오렐리는 발굴 감독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폼페이를 단순한 유물 수집 장소가 아닌, 서구 문명의 과거를 엿보고 고대인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역사적인 장소로 만들고자 체계적인 발굴 및 관리 시스템을 도입했다.

피오렐리는 먼저 고대 도시 내의 각 건물을 식별하고 관리하기 위해 '지역'(regioita), '구획'(insulaita), '주택'(domusita)으로 나누는 주소 시스템을 개발했으며, 이는 오늘날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또한, 현장에 남겨진 프레스코화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기록하는 데 힘썼으며, 화가에게 의뢰하여 프레스코화를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다.[1]

발굴 방식에서도 혁신을 이루었다. 기존의 방식과 달리 위에서 아래로 발굴하는 시스템을 도입하여 발굴 과정에서 발견되는 유물과 구조를 더 효과적으로 보존하고, 수집된 정보를 바탕으로 고대 건물의 원형 복원을 시도했다. 물론, 당시에도 중요하다고 여겨진 벽화나 모자이크 등은 여전히 떼어내어 나폴리로 옮겨졌다.

피오렐리의 가장 독창적인 업적 중 하나는 석고 캐스트 기법, 일명 '피오렐리 공정'이다. 화산재 속 빈 공간에 파리 석고를 부어 베수비오 화산 폭발 당시 희생자들의 생생한 마지막 순간을 복원하는 이 기법은 폼페이 연구에 획기적인 기여를 했으며 그의 대표적인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피오렐리는 외국 학자들에게도 폼페이 연구의 문을 열었다. 고고학 기술을 배울 수 있는 훈련 학교를 설립하고, 폼페이의 건축 재료와 기법에 대한 연구를 장려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아우구스트 마우를 비롯한 많은 저명한 학자들이 폼페이를 방문하여 연구를 진행했으며, 이는 폼페이 연구를 국제적인 학문 분야로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다. 피오렐리의 이러한 혁신적인 접근과 체계적인 관리 방식은 이후 폼페이 발굴 및 보존 작업의 기초를 마련했으며, 미켈레 루지에로, 줄리오 데 페트라, 에토레 파이스, 안토니오 소글리아노 등 후임자들에게 계승되었다.

3. 1. 발굴 시스템 혁신

1860년 이탈리아 통일 이후 폼페이가 왕실 소유에서 국가 소유로 바뀌면서, 주세페 피오렐리는 발굴 감독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폼페이를 서구 문명의 과거를 이해하는 중요한 장소로 만들고자 발굴 작업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했다.

피오렐리는 먼저 고대 도시의 각 구조물을 식별하고 관리하기 위해 주소 시스템을 개발했다. 도시 전체를 '지역'(regio|레지오it), '구획'(insula|인술라it), '주택'(domus|도무스it)으로 나누는 이 체계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또한 그는 현장에 남은 프레스코화를 복사하고 목록화하는 작업에도 집중했는데, 1870년에는 제레미아 디스칸노에게 이 작업을 의뢰하기도 했다.[1]

발굴 방식에도 혁신을 가져왔다. 기존에 거리를 먼저 파고 1층부터 집을 발굴하던 방식 대신, 위에서 아래로 주택을 발굴하는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했다. 이 방식은 발굴 과정에서 발견되는 모든 것을 더 효과적으로 보존하고, 수집된 데이터를 통해 고대 건물과 내부 구조를 복원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다만, 가장 중요한 벽화와 모자이크는 여전히 떼어내어 나폴리로 옮겨졌다.

피오렐리의 가장 독창적인 기여 중 하나는 석고 캐스트 기법(일명 피오렐리 공정)이다. 그는 화산재 속에 묻힌 시신이나 유기물이 썩어 빈 공간을 남긴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발굴 중 이런 빈 공간이 발견되면 파리 석고를 부어 굳힌 뒤 주변의 재를 조심스럽게 제거하여, 사망 당시 사람이나 동물의 모습을 그대로 복원했다. 이 석고 캐스트(calchi|칼키it)는 베수비오 화산 폭발 당시 희생자들의 마지막 순간, 복장 등 귀중한 정보를 제공해주었다.

3. 2. 피오렐리 공정 (석고 모형)

주세페 피오렐리는 자신의 이름을 딴 피오렐리 공정(Processo Fiorelliita)으로 만든 석고 모형(calchiita)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는 폼페이 유적 발굴 중 화산재에 묻힌 시신이나 다른 유기물이 시간이 지나면서 썩어 없어지고 그 자리에 빈 공간이 남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발굴 과정에서 이러한 빈 공간이 발견되면, 내부에 파리 석고를 부어 굳혔다. 석고가 완전히 굳은 후 주변의 화산재를 조심스럽게 제거하면, 죽음의 순간에 있던 사람이나 동물의 형태가 그대로 복원된 석고 모형이 드러났다. 이 석고 모형들은 베수비오 화산 분화 당시 폼페이 최후의 날에 희생자들이 어떤 자세로 죽음을 맞이했는지, 마지막 순간에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어떤 옷을 입고 있었는지 등 생생한 정보를 제공하여 폼페이 연구에 획기적인 기여를 했다.

3. 3. 프레스코화 기록

피오렐리는 폼페이 감독관으로 임명된 후, 현장에 남아있는 프레스코화를 복사하고 목록화하는 작업에 집중했다. 1870년에는 화가 제레미아 디스칸노에게 폼페이에서 발굴된 프레스코화를 정밀하게 복사하도록 의뢰하였다. 이렇게 제작된 디스칸노의 세심한 그림 50점 이상은 1873년에 출판된 피오렐리의 저서 《1861년부터 1872년까지의 폼페이 발굴》(Descrizione di Pompei, per Giuseppe Fiorelli)에 수록되었다.[1] 이를 통해 당시 프레스코화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는 데 기여했다. 다만, 발굴된 프레스코화 중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작품들은 여전히 현장에서 떼어내어 나폴리로 옮겨졌다.

4. 고고학 훈련 학교 설립

피오렐리는 외국 학자들을 환영하는 태도로 유명했다. 그는 외국인과 이탈리아인 모두 고고학 기술을 배울 수 있는 훈련 학교를 설립했으며, 폼페이에서 사용된 재료와 건축 방법에 대한 특별한 연구를 수행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많은 저명한 학자들이 폼페이 유적을 연구하기 위해 방문했다. 여기에는 1882년에 폼페이 그림을 다양한 장식 스타일로 분류하는 시스템을 만든 아우구스트 마우가 포함된다. 마우의 연구는 여전히 고대 로마 회화 연구의 표준 틀을 제공한다.

5. 저서


  • "고대 그리스 도시의 희귀한 몇몇 동전에 대한 관찰"
  • 고대 이탈리아의 미발행 동전, 나폴리 1845년, 22, n.9.
  • "''폼페이 유물사''"(History of Pompeian Antiqueseng), 3권 (1860년 ~ 1864년)
  • 나폴리 국립 고고학 박물관의 카탈로그: 메달 컬렉션, 제1권, 그리스 동전, 1870년
  • 나폴리 국립 고고학 박물관의 카탈로그: 산탄젤로 컬렉션. 나폴리, 1866년 ~ 1867년
  • 폼페이의 설명, 1875년
  • 폼페이 가이드, 로마 (Elzeviriana 인쇄소) 1887년, p. 112[2]

참조

[1] 서적 Geremia Discanno il pittore di Pompei Editrice Rotas 2021-07
[2] 웹사이트 AI Forum https://web.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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