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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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홍집은 1842년 한성부에서 태어나, 1880년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하고 《조선책략》을 국내에 소개하며 개화 정책을 추진한 인물이다. 1894년부터 1896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내각을 구성하여 갑오개혁을 주도했으나, 을미사변과 단발령 시행으로 민심을 잃고, 아관파천 이후 친러파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는 친일 행위와 개혁의 모순적인 행보로 인해 엇갈린 평가를 받으며, '친일파 애국자'로 불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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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집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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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직 및 경력 | |
주요 경력 | 문관, 총리대신, 문필가 |
과거 급제 | 1867년 진사시 합격, 1868년 알성문과 급제 |
소속 정당 | 온건개화파 세력 |
주요 관직 | |
영의정 | 1894년 6월 25일 ~ 1894년 8월 20일 |
좌의정 | 1884년 10월 21일 ~ 1885년 1월 12일, 1886년 10월, 1887년 12월 13일 ~ 1888년 5월 1일 |
우의정 | 1884년 12월 7일 ~ 1884년 12월 8일 |
총리대신 | 1894년 8월 15일 ~ 1895년 5월 28일, 1895년 8월 24일 ~ 1896년 2월 11일 |
역대 총리대신 임기 | |
총리대신 1 | 1894년 8월 15일 ~ 1895년 5월 28일 |
총리대신 1 전임 | 새 직책 |
총리대신 1 후임 | 박정양 |
총리대신 2 | 1895년 8월 24일 ~ 1896년 2월 11일 |
총리대신 2 전임 | 박정양 |
총리대신 2 후임 | 김병시 |
기타 정보 | |
관련 웹사이트 | 두산백과 김홍집 |
사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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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출생과 가계
1842년 이조참판을 지내고 증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 김영작(金永爵)과 정부인 성씨(成氏)의 셋째 아들로 한성부에서 출생하였다.[24] 1845년에서 1848년까지 경상도 경주에서 잠시 3년간 유년기를 보냈다. 의정부좌의정을 지낸 김명원의 후손으로,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의 친정아버지인 경은부원군 김주신의 5대손이었다.[25] 증조부 김효대는 공조판서를 지냈고, 종조부 김사목[26]은 의정부좌의정을 지냈다. 어머니 성씨는 우계 성혼의 후손이다.
1867년(고종 4년) 경과정시(慶科庭試)에 급제하여 이듬해 승정원 사변가주서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몇 달 뒤 아버지 김영작이 사망하여 상을 치르느라 사퇴하였고, 아버지의 탈상이 있던 1870년 다시 어머니 창녕 성씨의 상을 당하여 다시 3년상을 더 치렀다.[19]
1880년 여름, 김홍집은 예조 참의로서 총 58명의 일행을 이끌고 2차 수신사로 일본에 갔다. 수행원으로는 이조연, 이용숙 등이 있었으며, 윤웅렬[32], 지석영[33]도 동행했다.
3. 초기 활동
부모의 탈상을 마친 1875년 오위의 부사과(副司果, 종6품)를 거쳐 흥양현 현감으로 나갔다가 1877년 사과(司果, 정6품)를 역임했다.[19] 1878년 이후 호조참의, 공조참의, 병조참의, 예조참의를 두루 지냈다. 그 뒤 광양 현감(光陽縣監)을 거쳐서 1880년 예조 참의로서 제2차 수신사로 임명되어 58명의 사절단을 이끌고 일본 제국을 다녀왔다.[29] 귀국 이후, 서양 근대의 기술적 성과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일본의 문물제도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조사시찰단의 일본 파견을 상주하게 하였다.[30]
4. 수신사
김홍집 일행은 1880년 7월 일본 기선 지토세마루(千歲丸) 편으로 부산항을 거쳐 도쿄에 도착했다.[34] 2차 수신사는 조선과 일본 사이의 해관세 징수, 제물포 개항, 미곡 수출 금지, 일본 공사의 서울 주재 등을 의논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일본은 김홍집이 전권을 위임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식 교섭을 거절하였다.[20]
김홍집은 일본의 교섭 거절로 현안 처리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일본의 변화를 살피고 조선의 부국강병을 이루어야겠다는 개화당의 인식은 분명히 했다.[35] 1차 수신사가 서계 문제 등으로 제대로 된 업무를 수행하지 못한 반면, 김홍집은 일본의 발전을 보고 배워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35]
김홍집 일행은 도쿄에서 1개월 동안 일본 정부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일본의 근대화된 모습을 두루 살폈다. 이들은 일본의 철도와 자동차, 위생 상태 등을 보고 일본의 발전상에 크게 놀랐으며, 일본이 제안하는 근대화 계획에 동조했다.[37] 그러나 김홍집은 일본 내 정한론 흐름을 관찰하고 고종에게 보고하기도 하였다.[38]
4. 1. 조선책략
김홍집은 공식적인 사절 임무에서는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였으나 주일 청국 공사관 참찬관이었던 황준헌으로부터 《조선책략》을 받아 조정에 소개하였다.[39] 원 제목이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 조선의 책략에 대한 개인적 견해)인 황준헌의 《조선책략》은 전통적인 사대교린의 외교 정책을 버리고 중국, 일본, 미국과 공히 외교 관계를 맺어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대항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는 국익을 위한 자주적 외교를 권하는 지금으로서는 상식적인 내용이었으나, 당시 조선에서는 큰 충격을 주었다. 더욱이 이러한 근대적 외교 정책을 추천한 사람이 청나라의 관료였기 때문이다.[40] 《조선책략》은 대러 공조 외교를 얻기 위해 미국을 지나치게 미화하였다는 비판이 있다. 당시 청나라 입장에서는 지속적인 남하 정책을 펼치는 러시아가 가장 시급한 외교적 현안이었지만, 그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을 마치 아무런 이익을 바라지 않는 우호국으로 그린 것은 이미 필리핀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패권 경쟁을 벌이고 있던 미국의 실제를 호도한 것이었다.[41]
김홍집은 황준헌으로부터 정관잉(鄭觀應)의 《이언 (易言)》도 건내받아 들고 왔다. 《이언》은 만국공법을 비롯하여 우정체계, 간척과 가뭄 대책 등 서양의 여러 제도를 소개하는 일종의 백과사전적인 책으로 제목은 "쉬운 설명"이라는 뜻이다. 서구의 문물을 되도록 쉽게 소개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42]
5. 통리기무아문
고종의 신임을 얻어 군사 기밀과 일반 정치를 담당하는 새로 설립된 통리기무아문의 대신을 다시 맡았다.[4] 고종은 김홍집으로부터 건내받은 《조선책략》을 외교 정책에 도입하기로 하고 널리 배포하는 한편 1881년 조사 시찰단을 일본에 파견하여 새로운 문물을 보다 자세히 관찰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고종의 이러한 정책은 위정척사파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30] 각지의 상소가 쏟아지자 김홍집은 사직하였는 모양새를 취하였으나 조정 개혁으로 통리기무아문이 신설되자 다시 복귀하였다.[43] 그는 조선이 세계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일본, 청나라, 미국과 손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근대화에 반대하는 유학자들의 반대에 부딪혀 ‘친일파’로 몰리기도 했다.[4]
6. 임오군란의 수습
1882년 7월에 일어난 임오군란은 여러 문제가 얽힌 복잡한 사건이었다. 표면적으로는 구식 군인에 대한 처우가 열악했던 것이 원인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명성왕후를 앞세운 여흥 민씨 척족 세력과 흥선대원군을 비롯한 위정척사파의 대립이었고, 문화적으로는 개화에 대한 거부감의 표시였다.[48]
훈련도감 군인들의 봉기로 시작된 임오군란은 민씨 척족에 대한 반발과 흥선대원군 복귀를 위한 위정척사파의 쿠데타로 변질되었다. 그러나 청나라가 개입하여 흥선대원군을 붙잡아가면서 위정척사파는 힘을 잃고 민씨 척족이 복귀하였다. 청나라는 이를 계기로 조선에 대한 간섭을 강화하였다.[49]
위정척사파의 상소로 사직했던 김홍집은 임오군란의 뒷수습으로 국내 문제가 복잡한 상황에서 다시 기용되었다. 1882년 경기도 관찰사로 재임명되었고,[50] 이후 청나라에 파견되는 진주사(陳奏使)의 부사로 조영하와 함께 톈진(天津)에 파견되어 흥선대원군의 석방을 교섭했다. 김홍집은 조선 정부의 흥선대원군 석방 운동을 중재하여 북양대신(北洋大臣) 리훙장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이어서 리훙장의 막료인 마젠충(馬建忠), 저우푸(周馥)를 설득하여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했다.[51][52]
임오군란 수습과 열강과의 외교 교섭에서 공을 인정받은 김홍집은 1883년 규장각 직제학을 거쳐[53] 1884년 지춘추관사,[54] 예조판서,[55] 한성부 판윤[56] 등 여러 요직을 역임했다. 이 시기에도 김홍집은 협판교섭통상사무와 독판교섭통상사무 등의 외교 실무 책임자를 맡았다.[57]
1882년 조선으로 돌아온 김홍집은 조선이 미국과의 통상 요구와 임오군란의 여파 등 많은 문제에 직면했기에 다시 등용되었다. 그는 일본과의 1882년 조일수호조규를 최종 확정하고 외교 능력을 발휘하여 일본의 많은 요구를 거절함으로써 경기도 관찰사로 승진했다.[5] 또한 영국, 독일, 미국과 많은 협정을 맺었다.
7. 갑신정변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개화파는 청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낙성식을 기회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김홍집은 정변에 대해 알지 못한 채 우정국 낙성식에 참여했다가 사건에 휘말렸다.[66]
갑신정변 실패 후, 조선은 김홍집 등을 대표로 일본과 한성 조약을 체결했다. 당초 조선은 일본의 군사적 지원을 규탄하려 했으나, 일본은 자국 군인 사상자와 공사관 화재 책임을 조선에 물었다. 결국 조선은 한성조약을 통해 일본에 사죄 국서를 보내야 했다.[66]
이후 김홍집은 사임, 판중추부사라는 한직에 머물렀다. 1887년 의정부좌의정에 다시 임명되었으나, 위정척사파 반발과 지방 유림들의 매국노 규탄 여론으로 곧 사직했다.
7. 1. 개화당
19세기 이후 조선은 밖으로는 여러 나라의 이양선이 등장하고 안으로는 홍경래의 난을 비롯한 각종 민란이 끊이지 않는 불안한 시기였다. 흥선대원군은 양반에게도 군포를 부과하여 조세를 개혁하고 서원을 혁파하여 사림의 근거지를 없애는 등 쇄신책을 세워 정국의 안정을 도모하였는데, 이는 기층 민중들의 요구가 어느 정도 받아들여진 것이었다. 그러나, 기존의 법제 고수와 척화비로 대표되는 쇄국 정책으로는 변화하는 세계에 대응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58]북학파 실학자였던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는 제너럴셔먼호 사건 당시 배를 불태우며 강경하게 대응하였지만,[59] 스스로는 북학파의 주장인 통상개국론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60] 박규수는 제2차 아편전쟁으로 베이징이 영국 프랑스 연합군에 점령된 이후 청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서구 열강의 힘을 직접 경험하였고 양무 운동에 영향을 받아 조선 역시 자강 운동과 개화 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61] 박규수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그의 사랑방에 모여 형성된 것이 개화당으로 1874년부터 김옥균, 박영교, 박영효, 서광범, 오경석 등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개화당이 점차 많은 사람들과 연결되면서 김홍집 역시 개화당과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들은 모두 조선이 세계 여러 나라와 통상조약을 맺고 개화되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하였지만, 그 방향과 속도가 모두 같은 것은 아니었다. 김옥균을 대표로 하는 급진개화파는 법률과 제도를 바꾸는 정변도 불사한다는 입장이었고 이에 반해 김홍집 등의 온건개화파는 서양의 기술을 도입하되 법제는 전통의 것을 점진적으로 개선한다는 입장이었다.[62] 이들 사이의 차이는 초기에는 그리 크게 부각되지 않았지만, 임오군란의 수습과정에서 청나라가 대원군을 납치한 사건에서 정치적 견해 차이가 드러나게 되었다. 청나라는 통상조약인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의 전문에 조선이 청나라의 속방(屬邦, 예속국)이라 명시할 만큼 조선과 외교를 전통적인 사대 관계의 연장선으로 두고자 하였다.[63] 청나라가 대원군을 사로잡아 가자 김옥균 등은 조선의 주권을 침해당했다고 격렬히 반발하였지만, 김홍집은 위정척사파의 거두인 대원군이 사라지는 것에 별다른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다.[61]
8. 김홍집 내각
김홍집은 갑신정변(1884년) 당시 김옥균 등의 급진개화파와 달리 온건한 방식으로 개화를 추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간 뒤, 조선은 김홍집을 대표로 하여 일본과 한성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으로 조선은 일본에 사죄하는 국서를 보내게 되었다.[66]
한성 조약 이후 김홍집은 잠시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으나, 1887년 다시 의정부좌의정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위정척사파와 지방 유림들의 반발로 곧 사직했다.[6]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명성황후는 청나라에 원군을 요청했지만, 일본은 톈진 조약을 이용하여 조선에 개입했다. 김홍집은 1894년부터 1896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내각을 구성하여 일본의 도움을 요청했다.[7]
8. 1. 제1차 김홍집 내각 (1894)
1894년 동학 농민 혁명이 일어나 일본 세력의 침투가 표면화되자 그 힘을 빌어 제1차 김홍집 내각을 조직, 총리대신이 되었다. 그해 동학 농민 혁명이 일어나자 명성황후가 청나라군을 끌어들였고, 조선에 침투를 바라던 일본군은 청일 전쟁을 일으키기 며칠 전인 음력 6월 21일(7월 23일)에 경복궁을 습격하고 무기고를 탈취하는 등 김홍집 일파를 지원하였다. 한편 김홍집은 일본 조정과 친하다는 이유로 음력 6월 말부터 제1차 김홍집 내각을 조직하고 총리대신이 되어 갑오개혁을 단행하였다. 개혁기구로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총재가 되었으며, 흥선대원군을 불러들여 민중의 불만을 완화하고자 하였다.총리대신으로 그는 악습을 폐지하고 과거 폐지, 은본위제의 신식화폐제도 채택, 의정부와 궁내부의 관제 시행, 도량형제도의 채택 등의 개혁을 단행했다.[1]
8. 2. 제2차 김홍집 내각 (1894~1895)
청일 전쟁의 결과 일본이 득세하자 갑신정변으로 일본에 망명갔던 박영효가 입각하여 제2차 김홍집, 박영효 연립 내각이 성립되었다. 이때 군국기무처를 없애고 1차 내각 때부터 작성한 초안을 완성, 새로운 법령인 홍범 14조를 수립하여 고종으로 하여금 발표하게 하였다. 이어 8아문을 7부로 고치고, 지방 8도를 23부로 바꾸고 교육입국조서를 발표하여 사범학교를 설립하였다.[15] 그러나 재정난과 박영효, 서광범 등과의 대립, 유길준 등의 소극적 협력 등으로 지원 세력이 없어 내각은 곧 와해되고, 박영효가 역모 사건으로 일본에 망명하고 박정양 내각이 탄생하였다.1894년 12월 17일,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실각시키고 군국기무처를 해산시켰다. 망명 중이던 박영효가 귀국하여 김홍집과 함께 내각을 구성하고 홍범 14조를 발표하여 조선의 정부, 토지 행정, 조세, 교육 등 여러 분야를 근대화하려 했다. (갑오개혁 § 두 번째 개혁 참조). 그러나 김홍집은 박영효와의 갈등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각에서 사퇴했다.
8. 3. 제3차 김홍집 내각 (1895)
청일 전쟁 이후 일본의 승리로 김홍집은 조선에서 세 번째 내각을 구성하였다. 일본은 요동반도를 점령했지만, 프랑스, 러시아, 독일의 삼국간섭으로 압력을 받았다. 이 시기 조선은 김홍집이 이끄는 친러 내각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은 위협을 느껴 명성황후를 시해했고, 이로 인해 세 번째 내각은 붕괴되었다.[15]8. 4. 제4차 김홍집 내각 (1895~1896)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게 시해당하는 을미사변이 발생하자, 김홍집은 온건하게 사건을 수습하려 하였으나, 이는 반일 감정의 고조와 함께 민중의 지지를 잃게 만들었다.[15] 1895년 3월 25일부터 착수된 을미개혁[16]에 따라 11월 15일에 내려진 단발령은[17] 소중화사상을 가진 보수적인 양반들의 반발을 샀다.이러한 상황에서 1896년 1월, 친러파 양반들이 주도한 민중 봉기가 일어났다. 이들은 "중화를 존숭하고 이적을 탕진한다", "국모 복수" 등을 외치며 쿠데타를 일으켰다. 러시아 공사 베베르는 고종에게 "대원군과 일본이 왕위를 빼앗으려 한다"고 부추겼고, 이에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했다.
김홍집은 "조선인을 위해 죽는 것도 천명이다"라며 피신을 옳지 않다고 여겼으나, 결국 민중에게 살해당했다. 그의 시신은 시내를 끌려다니며 심하게 훼손되었다고 전해진다. 제4차 김홍집 내각은 친일 내각으로, 명성황후 시해 이후 고종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김홍집은 장관직을 거절했다. 그러나 고종이 아관파천을 단행하자, 김홍집은 고종을 만나려 했으나, 고종은 친일 관료 체포 명령을 내렸고, 결국 김홍집은 부하들과 함께 민중에게 살해되었다.
김홍집 사후 친러 정권이 수립되었지만, 이는 사실상 러시아의 괴뢰 정권이나 다름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일본에게 안보 위기감을 느끼게 했고, 일러 전쟁의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9. 생애 후반
1880년(광서 6년) 조선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하였다.[11] 1882년(광서 8년) 8월, 임오군란 이후 제물포 조약 체결 당시 조선 측 부관으로서 제물포에 정박 중인 일본 군함 금강에서 화방의질과 협상하였다.[12][13] 같은 해 10월, 청나라와 조선은 천진에서 중조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하였는데, 이때 조선 측 대표로 조녕하와 김홍집, 어윤중이 서명하였다.[12] 이후 김홍집은 김윤식, 어윤중 등과 함께 청나라 주도의 근대화를 지지하며 민씨 정권과 연계하였다.[14]
1894년(개국 503년) 7월, 조선의 근대화 필요성을 절감한 김홍집은 갑오개혁이라 불리는 내정 개혁에 착수하였다. 개혁은 과거제 폐지를 포함한 정치 기구 개혁, 재정·세제 개혁 등 다방면에 걸쳐 이루어졌다. 1895년(개국 504년) 1월 7일, 김홍집 내각은 근대적 정치 개혁의 기본 강령인 홍범 14조를 발표하였다.[15]
그러나 1895년(개국 504년) 10월 8일 을미사변 발생 당시, 김홍집은 이 사건을 온건하게 수습하려 하였기 때문에 반일 감정이 고조되면서 민중의 지지를 잃었다. 게다가 3월 25일부터 시작된 을미개혁[16]에 따라 11월 15일에 내려진 단발령은[17] 소중화사상을 가진 보수파 양반들의 반발을 샀다.
1896년(건양 원년) 1월, 반(反) 김홍집 입장을 취하던 친러파 양반들이 주도한 민중 봉기가 일어났다. 러시아 공사 베베르는 고종에게 "대원군과 일본이 왕위를 빼앗으려 한다"고 말했고, 이에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아관파천). 김홍집은 "조선인을 위해 죽는 것도 천명이다"라며 피신을 옳지 않다고 여겼으나, 결국 민중에게 살해당했다. 그의 시체는 시내를 끌려다니며 헌 옷처럼 혹독하게 다뤄졌다고 한다.
김홍집 사후 친러 정권이 수립되었지만, 이는 사실상 러시아의 괴뢰 정권이었다. 일본은 이에 안보 위기감을 느꼈고, 이는 일러전쟁의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9. 1. 친일 의혹
군국기무처 총재를 겸임하면서 총재보좌 명목으로 일본 공사관 직원 4~5명을 끌어들여 이들에게 실질적인 권한을 부여하는 등 친일 매국 행위에 앞장섰다는 주장이 있다.[67] 김홍집은 조선의 입법 체계와 복식을 개혁하고 일본의 정부 구조를 도입하려 했다. 또한 조선에 태양력과 우편 제도를 시행했다. 이러한 변화는 일본의 영향을 받았다.[8]9. 2. 자살 미수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가 암살당하자 김홍집은 자결을 시도했다. 때마침 김홍집을 방문했던 유길준은 그럴 필요 없다며 김홍집을 극구 만류했다.[68]유길준은 김홍집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며 설득했다.
유길준|대감 좀 고정하십시오. 대감께서 돌아가신다 해서 모두가 수습된다면 모르지만 왕비는 이미 참변을 당했고 사태는 벌어졌습니다. 우리가 거꾸로 일격을 당한 셈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사태를 수습하는 데 노력하는 것도 충절이 될 것입니다. 대감께서는 그 뒤에 가서 돌아가셔도 늦지 않으니 제발 좀 고정하시고 심사숙고해주시기 바랍니다.한국어
이에 김홍집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김홍집|유공 그대가 말하는 뜻은 다 알아요. 하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보전과 개혁을 위하여 모든 굴욕을 참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이번 사태만은 절대로 저들을 용서할 수가 없어요. 세록지신으로 또 일국의 중신된 자가 국모의 참변을 보고 어찌 살아서 폐하와 만백성을 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나는 유공의 처지와 다릅니다. 유공은 어떤 난국이라도 극복해서 앞으로 이 나라를 건져야 할 사명이 있지만 내가 할 일은 이제 내 스스로 죽는 일 밖에 없습니다.한국어
유길준은 어렵게 김홍집을 설득하여 자살하려는 것을 말리고 대궐로 데려갔다.[68]
10. 몰락과 최후
1896년 아관파천으로 김홍집 내각은 붕괴되고 친러파 내각이 조직되었다. 김홍집은 매국 친일파의 두목으로 몰려 광화문에서 친러파 군인들과 군중에게 살해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향년 54세였다.[10]
그의 시신은 광화문 밖에 효수되었고, 도륙되어 각도로 보내졌으며, 백성들은 수급에 돌을 던졌다. 매천야록에는 그의 시신을 씹는 자까지 있었다고 전한다. 김홍집의 가족들에게도 연좌제가 적용되었는데, 이시영에게 시집간 딸 등 이미 출가한 딸들만이 연좌제를 피했다. 한성부 사저에 있던 부인은 연좌되어 관비로 끌려갈 것을 예상하고 아들을 죽이고 자결하였다.[10]
김홍집 내각은 단발령 강행 등 급격한 개혁을 실시하다 성리학자들의 반발을 샀다. 전국적으로 의병 봉기와 집회가 일어났고, 아관파천으로 이어져 김홍집 내각은 붕괴되었다. 분노한 군중들은 김홍집을 짓밟아 죽였고, 조선 정부는 그의 시신을 가져다 머리를 베어 광화문에 내걸었다. 그의 시신은 여덟 조각으로 나뉘어 조선 각 지역에 보내졌다.[10]
11. 사후
그는 개화파가 몰락하면서 역적으로 단죄되었고, 1910년 한일 병합 후에는 친일파의 득세를 불러온 역적으로 단죄되어 재평가받지 못하였다. 1945년 해방 후 사위 이시영에 의해서 복권 여론이 조성되었고, 1960년대에 가서야 개혁 노력에 대한 연구와 평가가 시작되었다.
묘지는 경기도 파주군 임진면에 안장되었으나 한국전쟁 뒤 경기도 고양군 벽제면 대자리(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로 이장하였다. 《김홍집 선생 묘》는 1986년 6월 16일 고양시의 향토유적 제24호로 지정되었다.
12.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
고조부 | 김후연(金後衍) |
증조부 | 김효대(金孝大) |
조부 | 김사식(金思植) |
생부 | 김영작(金永爵, 1802년 - 1868년) |
생모 | 창녕 성씨(? - 1870년) |
형님 | 김항집(金恒集, 요절) |
형님 | 김승집(金升集) |
조카 | 김춘희(金春熙) |
부인 | 남양 홍씨 |
아들 | 김경희(金敬熙) |
장녀 | 경주 김씨 |
사위 | 이시영(李始榮, 1868년 - 1953년) |
외손자 | 이규봉(李圭鳳) |
외손자 | 이규홍(李圭鴻, ? - 1951년) |
외손자 | 이규흥(李圭興) |
외손자 | 이규열(李圭烈, ? - 1953년) |
외손부 | 서차희(1910년 - ?) |
진외증손 | 이종문(李鍾文, 1940년 - ) |
동생 | 김증집(金證集) |
외할아버지 | 성재순(成載淳) |
장인 | 홍재선(洪在善) |
13. 사상과 신념
김홍집은 조선이 발전하려면 선진 외국과 제휴해야 한다는 개화 교류 사상의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의 개화사상은 '''개화는 반드시 실현해야 하지만, 급진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며 점진적인 방법만이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점진주의적 특징을 보였다.[11] 그는 조선의 근대화 필요성을 절감하고 1894년 7월부터 갑오개혁을 추진하였으며, 1895년 1월 7일에는 근대적 정치 개혁의 기본 강령인 홍범 14조를 발표하였다.[15]
14. 평가
김홍집은 '친일파 애국자'로 불릴 만큼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47] 일본을 통해 조선 개혁을 꿈꾼 정치가라는 시각과, 일본에 이용당한 친일파라는 시각이 공존한다. "일국의 총리로 동족 손에 죽는 것은 천명"이라며 죽음을 맞이해 책임감 있는 정치인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그러나 을미사변을 방조하고, 고종에게 명성황후를 '서인'으로 폐하는 조칙에 서명하도록 강요한 점은 논란거리다.
구한말, 세 차례 내각을 이끌며 개항과 사회 안정에 힘썼지만, 외세에 맞서 자력으로 극복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전에 정국 혼란으로 군중에게 살해되는 비극을 맞았다는 평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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