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에이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주에이는 1182년 6월 29일(율리우스력)에 시작되어 1185년까지 사용된 일본의 연호이다. 『시경』의 구절에서 유래되었으며, 1182년 5월 27일에 개원하여 1184년 4월 16일에 겐랴쿠로 개원되었다. 주에이 시대에는 전국적인 기근, 안토쿠 천황과 삼종의 신기의 이동, 고토바 천황의 즉위, 우지가와 전투, 헤이케의 멸망 등 주요 사건이 발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헤이안 시대 - 교토
교토는 혼슈 중앙부에 위치하며 약 천 년간 일본의 수도였던 도시로, 헤이안쿄로 설계되어 전란과 화재를 겪었으나 복구 노력을 통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고, 에도 시대에는 문화와 상공업의 중심지로, 오늘날에는 세계적인 관광 도시로 번영하며 수많은 유적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 헤이안 시대 - 헤이지의 난
헤이지의 난은 1160년 일본에서 발생한 내란으로, 후지와라 노 미치노리의 독단적인 정치와 미나모토 씨의 불만, 니조 친정파와 고시라카와 상황의 대립을 배경으로 후지와라 노 노부요리와 미나모토 노 요시토모의 반란으로 시작되었으나 다이라 노 키요모리의 반격으로 헤이케가 권력을 장악하며 겐페이 전쟁과 가마쿠라 시대의 도래에 영향을 미쳤다. - 일본의 연호 - 다이쇼 시대
다이쇼 시대는 1912년부터 1926년까지 일본의 연호로,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국제 연맹 이사국 진출, 국내 사회 변화, 민주주의 사상 발전 등을 특징으로 하며, 1920년대 후반 세계 경제 불황의 영향을 받았다. - 일본의 연호 - 쇼와 시대
쇼와 시대는 1926년부터 1989년까지 이어진 일본의 연호로, 히로히토 천황의 치세 동안 일본 제국의 군국주의, 태평양 전쟁, 패전 후 민주화와 경제 성장을 겪었으며, 쇼와 천황의 사망으로 헤이세이 시대로 전환되었다.
| 주에이 | |
|---|---|
| 주에이(寿永) | |
| 시대 | 시대 구분 |
| 존속 기간 | 1182년 ~ 1184년 |
| 이전 | 요와 |
| 다음 | 겐랴쿠 |
| 천황 | 고토바 천황 |
| 쇼군 | 없음 |
| 섭정 | 고노에 모토미치 |
| 개원 | |
| 개원일 | 요와 2년 5월 27일 (1182년 7월 19일) |
| 이유 | 길조에 따라 개원 |
| 종료 | |
| 종료일 | 주에이 4년 8월 20일 (1185년 9월 15일) |
| 이유 |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요청에 따라 개원 |
| 사건 | |
| 연호 | 주에이 원년 (1182년): 기근 발생 주에이 3년 (1184년): 미나모토노 요시나카 사망, 구주 섬 전투 발발 |
2. 연호 제정
요와 2년 5월 27일(율리우스력 1182년 6월 29일)에 개원하였다. 새로운 연호는 어떤 사건이나 여러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3] 겐랴쿠로의 개원은 주에이 3년 4월 16일(율리우스력 1184년 5월 27일)에 이루어졌다.
2. 1. 연호의 출전
『시경』의 「率見昭考,以孝以享,以介眉'''壽'''。'''永'''言保之,思皇多祜」에서 따왔다.[3]3. 주요 사건
- '''주에이 2년(1183년)'''
- * 고토바 천황 즉위.[6][7]
- '''주에이 3년(1184년)'''
- * 우지가와 전투에서 미나모토 노 노리요리, 미나모토 노 요시쓰네 군이 미나모토 노 요시나카 군을 격파.[5]
- '''주에이 4년(1185년)'''
- * 3월 : 단노우라 전투에서 헤이케(平家) 멸망.[4]
3. 1. 주에이 원년 (1182년)
寿永|주에이일본어 원년(1182년) 전국에 기근이 닥쳤다.[4]3. 2. 주에이 2년 (1183년)
- 1183년 (주에이 2년, 7월 25일): 헤이케는 안토쿠 천황과 삼종의 신기를 가지고 수도에서 도망쳤다.[5]
- 1183년 (주에이 2년, 8월 20일): 안토쿠 천황이 퇴위 압력에 굴복하는 대신 수도에서 도망치자, 고시라카와 상황은 자신의 어린 동생을 칙령으로 옹립했고, 어린 아이는 퇴위 수용 의식(juzen)을 받았다.[6] 반 다이라 세력은 즉위(senso)를 받으려 했고, 그 직후 고토바 천황이 즉위(sokui)했다고 한다.[7]
- 1183년 (주에이 2년, 8월 20일): 고토바 천황은 삼종의 신기 없이 즉위했다.[5]
- 1183년 (주에이 2년, 8월 20일): 고토바는 겐지에 의해 천황으로 선포되었고, 헤이안쿄와 남쪽으로 도망가는 안토쿠 천황, 두 명의 천황이 동시에 즉위하는 상황이 발생했다.[8]
- 고토바 천황이 천조(践祚).
3. 3. 주에이 3년 (1184년)
우지가와 전투에서 미나모토 노 노리요리, 미나모토 노 요시쓰네 군이 미나모토 노 요시나카 군을 격파하였다.[5] 고시라카와 상황은 헤이케에게 황실 보물 반환을 요구하는 서신을 쓰라고 명령했다.[5] 기소 요시나카가 교토에 입성하고, 평씨가 도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안토쿠 천황 재위 중에 고토바 천황이 삼종신기 없이 즉위하였다. 우지가와 전투에서 요시나카가 패배하여 북쪽으로 달아나고, 미나모토노 요시쓰네, 노리요리 군세가 교토에 입성했다.3. 4. 주에이 4년 (1185년)
3월, 단노우라 전투에서 헤이케(平家)가 멸망하였다.[4]4. 서력과의 대조표
(작은 달)
(작은 달)
(작은 달)
(작은 달)
(작은 달)
(작은 달)
(작은 달)
(작은 달)
(작은 달)
(작은 달)
(작은 달)
(작은 달)
(작은 달)
(작은 달)
(작은 달)
(작은 달)
(작은 달)
(작은 달)
(작은 달)
(작은 달)
(작은 달)
(작은 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