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토바 천황
1. 개요
고토바 천황은 1183년 3세의 나이로 즉위한 일본의 천황이다. 안토쿠 천황이 삼종신기 없이 도주한 상황에서 즉위했으며, 1198년 퇴위 후 상황으로 23년간 인세이를 펼쳤다. 그는 강력한 왕권 강화를 추구하며 가마쿠라 막부에 대항했으나, 1221년 조큐의 난에서 패배하여 오키 섬으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는 생전, 와카를 장려하고 문화를 융성시키는 한편, 조큐의 난 이후 원령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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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고토바 천황 |
|---|---|
| 일본어 이름 | 後鳥羽天皇 |
| 일본어 발음 | Go-Toba-tennō |
| 휘 | 다카나리 (尊成) |
| 법명 | 료젠 (良然) |
| 별칭 | 오키인 (隠岐院) |
| 출생일 | 1180년 8월 6일 |
| 출생 장소 | 헤이안쿄 (平安京) 고조마치노테이 (五条町の亭) |
| 사망일 | 1239년 3월 28일 |
| 사망 장소 | 가마쿠라 막부 오키 제도 (隠岐諸島) 카리타 고쇼 (苅田御所) |
| 묘소 | 오하라노 미사사기 (大原陵) (교토) |
| 화장 무덤 | 오키 아마초 묘 (隠岐海士町陵) |
| 대관식 | 1184년 9월 4일 |
| 즉위례 | 1184년 9월 4일 |
| 묘호 | 겐토쿠인 (顕徳院) |
| 추호 | 고토바인 (後鳥羽院), 고토바 천황 |
| 추호 칙정일 | 1242년 8월 5일 |
| 재위 기간 | 1183년 9월 8일 – 1198년 2월 18일 |
| 일본식 재위 기간 | 주에이 2년 8월 20일 – 겐큐 9년 1월 11일 |
| 원호 | 주에이 (寿永) 겐랴쿠 (元暦) 분지 (文治) 겐큐 (建久) |
| 정치 체제 | 일본 천황 |
|---|---|
| 섭정 | 고시라카와 법황 (1181년–1192년) |
| 쇼군 |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1192년-1199년) |
| 섭정 | 고노에 모토미치 (1184년–1186년) 구조 가네자네 (1186년–1191년) |
| 간파쿠 | 구조 가네자네 (1191년–1196년) |
| 태정대신 | 구조 가네자네 (1190년) 후지와라노 가네후사 (1191년-1196년) |
| 아버지 | 다카쿠라 천황 |
|---|---|
| 어머니 | 후지와라노 쇼쿠시 (시치조인) |
| 배우자 | 후지와라노 닌시 (1190년 결혼) |
| 자녀 | 쇼시 내친왕 쓰치미카도 천황 준토쿠 천황 마사나리 친왕 |
| 황거 | 헤이안 궁 한인 오이 미카도노 (大炊御門殿)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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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0년 출생 -
에리크 10세
에리크 10세는 13세기 초 스웨덴 국왕으로, 레나 전투에서 승리하여 왕위에 올랐고, 덴마크와의 관계 개선 및 교회와의 협력을 통해 통치 기반을 다졌으며, 사후 요한 1세가 왕위를 계승하고 이후 그의 아들 에리크 11세가 왕이 되었다. -
1180년 출생 -
알카밀
알 카밀은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으로서 제5차 십자군을 격퇴하고 프리드리히 2세와 교류하며 평화를 유지했으나, 제6차 십자군 침공으로 예루살렘을 십자군에게 양도하고 1238년에 사망했다. -
1239년 사망 -
미우라 요시무라
미우라 요시무라는 가마쿠라 막부 초기의 무장으로, 주요 권력 투쟁에서 막부 측에 서서 활약하며 막부 안정에 기여했으나, 와다 요시모리의 난에서 배신, 미나모토노 사네토모 암살 연루설, 쇼큐의 난 진압, 숙로 임명 등 정치적 수완과 교활한 면모를 동시에 보인 인물이다. -
1239년 사망 -
원덕왕후
원덕왕후는 신안후 왕성과 창락궁주의 딸이자 고려 강종의 비, 고려 고종의 어머니로, 강종 즉위 후 왕후가 되었으며, 최장수한 고려 왕후로 기록되어 강화 곤릉에 묻혔다. -
원정 (군주제) -
고시라카와 천황
고시라카와 천황은 토바 천황의 아들로 예상 외로 황위에 올라 다섯 천황의 재위 기간 동안 상황으로서 인세이를 펼치며 호겐의 난과 헤이지의 난, 겐페이 전쟁 등 격동의 시대를 관통한 인물이다. -
원정 (군주제) -
집권
집권은 가마쿠라 막부에서 쇼군을 보좌하며 국정을 총괄하는 직책으로, 호조 씨가 세습하면서 막부 내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여 쇼군이 명목상 지도자가 되는 데 영향을 미쳤다.
2. 생애
1183년 헤이시가 안토쿠 천황과 삼종신기를 가지고 사이고쿠(西國)로 달아난 상황에서 3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고토바 천황은 삼종신기 없이 즉위한 최초의 천황이 되었다.
1192년 고시라카와 법황이 사망하고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가마쿠라 막부를 설립하면서 천황은 명목상의 지도자가 되었다. 1198년 아들 쓰치미카도 천황에게 양위하고 인세이를 시작했지만, 그의 권력은 이전 상황들에 비해 제한적이었다.
고토바 상황은 호넨이 이끄는 정토종을 탄압했는데, 이는 교토 승려들의 불만과 더불어 그의 시녀 두 명이 정토종으로 개종한 사건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1221년, 조큐의 난을 일으켜 가마쿠라 막부 타도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오키 제도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2.1. 신기(神器)가 없는 즉위
헤이케가 안토쿠 천황과 삼종신기를 받들고 사이고쿠(西國)로 피난하면서, 고시라카와 법황과 조정에서는 새 천황을 즉위시켜야 하는 문제가 떠올랐다. 고시라카와 법황은 신기가 없는 상황에서 새 천황을 즉위시킬지, 아니면 안토쿠 천황에게 기대를 걸지 점을 쳐보게 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측근 구조 가네자네(九條兼實)에게 의견을 물었다.
가네자네는 천황의 자리가 비어있는 상황을 우려하여 새로운 천황을 세우는 데 찬성했고, 게이타이 천황이 즉위 이전에 이미 천황을 칭하고 나중에 삼종신기를 받았던 선례가 있다고 답했다. 고시라카와 법황은 여러 신하와 박사들에게 의견을 구한 끝에, 안토쿠 천황의 이복동생인 4세의 다카히라 친왕을 즉위시키기로 결정했다. 《구칸쇼》에는 다카히라 친왕의 좋은 성품과 단고노 쓰보네(丹後局)의 진언이 영향을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183년 8월 20일, 고토바 천황은 태상천황(고시라카와 법황)의 인젠(院宣)을 받는 형태로 즉위했다. 그 의식은 삼종신기가 없다는 점을 제외하고 양위의 예를 그대로 따랐으며, 즉위식도 1184년(겐랴쿠 원년) 7월 28일에 신기 없이 거행되었다. 이로 인해 1183년부터 1185년까지 2년간 안토쿠 천황과 고토바 천황, 두 명의 천황이 재위하는 기간이 겹치게 되었다.
단노우라 전투에서 헤이케가 멸망하고 안토쿠 천황이 사망했지만, 삼종신기 중 보검은 바다에 가라앉아 끝내 찾지 못했다. 1188년 9월 27일, 보검 수색을 맡았던 사에키 가게히로(佐伯景弘)는 수색 실패를 보고했고, 이후 수색은 중단되었다. 1190년 1월 3일에 거행된 천황의 원복 의식도 삼종신기 없이 치러졌다.
조겐 4년(1210년), 준토쿠 천황의 즉위 때, 상황이었던 고토바 천황은 이세 신궁에서 고시라카와 법황에게 헌상했던 검을 보검 대신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궁정 사회에서 천황의 상징인 삼종신기가 없는 상황에서 즉위하고 치세를 보낸 고토바 천황에게 이는 일종의 '컴플렉스'로 작용했다. 이러한 상황은 고토바 천황의 강력한 왕권 추구와 강경한 정치 자세, 그리고 조큐의 난으로 이어지는 원인 중 하나로 여겨지기도 한다.
2.2. 치세와 인세이
고시라카와인에 의한 인세이는 겐큐 3년(1192년) 3월까지 지속되었다. 고시라카와인 사후, 간파쿠 구조 가네자네가 조정을 이끌었으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게 정이대장군 직을 수여한 후 요리토모의 딸 오오히메의 입궁 문제로 관계가 소원해졌다. 겐큐 7년(1196년) 쓰치미카도 미치치카의 양녀가 황자를 낳은 뒤 일어난 '겐큐 7년의 정변'으로 가네자네 세력은 조정에서 축출되고, 딸 닌시도 중궁 자리에서 쫓겨났다. 이 정변에는 요리토모의 동의가 있었다고도 전해진다.
겐큐 9년(1198년) 1월 11일, 고토바 상황은 아들 다메히토에게 양위한 뒤, 준토쿠, 주쿄 3대에 걸쳐 조큐 3년(1221년)까지 23년간 인세이를 폈다. 이는 요리토모의 반대를 무릅쓴 강행이었다.
고토바인은 천황 외척인 미치치카조차 배제하고 덴조비토(殿上人)들을 정리했으며, 인쵸(院廳) 개혁 등 적극적인 정책을 펼쳤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사후(1199년) 가마쿠라 막부에 대해서도 강경 노선을 취했다.
쇼지(正治) 3년(1200년) 후지와라노 사다이에를 백수가(百首歌) 작가로 선발, 이후 두 사람은 와카로 교류했다. 겐닌 원년(1201년) 7월 27일 와카쇼(和歌所)를 설치, 이듬해 3월 《신고킨와카슈》를 편찬했다. 고토바인은 서문에서 "와카는 세상을 통치하고 백성의 마음을 온화하게 만드는 길"이라며 천황 통치에 대한 열망을 드러냈다.
《신고킨와카슈》 편찬 해에 구조 가네자네는 출가하고 쓰치미카도 미치치카는 급사했다. 고시라카와 법황과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도 사망한 상황에서 명실상부한 '치천의 군'은 고토바인 자신이었다. 겐닌 3년(1203년) 상황 주도의 지모쿠(除目)는 이를 보여준다. 공사 재흥, 관례 정비 등 정신적 통제도 강화하려 했으며, 그 어려움은 '범의 꼬리를 밟는' 것과 같았다.
이후 센벤이 가마쿠라 3대 쇼군으로 옹립되자, 고토바인은 '사네토모'라는 이름을 직접 내려주고, 유화책으로 막부 내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막부도 사네토모 후계로 고토바인의 아들을 맞아들이는 '미야 쇼군' 구상을 밝혀, 조정과 막부는 잠시 안정되었다. 고토바인은 사네토모 쇼군 옹립을 계기로 막부에 적극 공작을 펼쳐, 막부 요청으로 사네토모에게 새 지위를 주고, 근신 보몬 노부키요의 딸을 출가시키고, 문장박사 미나모토노 나카아키라를 가마쿠라에 보냈다.
그러나 쓰루가오카 하치만구에서 사네토모가 조카 구교에게 암살당하고, '미야 쇼군' 구상도 상황의 거절로 무산되었다. 조큐 원년(1219년), 다이리슈고(內裏守護) 미나모토노 요리시게가 사이멘노 부시(西面武士)에게 습격당해 인수전(仁壽殿)에서 죽었다. 사이멘노 부시는 상황이 호쿠멘노 부시 외에 자신의 경호를 위해 설치한 무사 조직이었다.
화재로 인수전, 의양전, 교서전 등 궐내 전각이 소실되자, 고토바인은 미나모토노 미치토모에게 대궐 재건을 맡기고 구니마다 재건 비용을 매겼다. 그러나 도고쿠(東國) 지토들이 거절하여 서쪽 지방 비용만으로 재건되었다. 재건 완료 시점은 불확실하나, 조정 주도의 마지막 공사였다.
2.3. 조큐의 난과 몰락
1221년 5월 15일, 고토바 상황은 가마쿠라 막부의 싯켄(執權) 요시토키를 토벌하라는 인센(綸旨)을 내리고, 야마다 시게타다(山田重忠) 등 유력 고케닌(御家人)을 포함한 기나이와 인근 구니의 병사들을 소집하여 막부 토벌군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군사행동은 막부의 대군에 완패하였다. 이를 조큐의 난(承久の乱)이라고 부른다.
두 달 뒤인 7월 13일, 19만 대군을 이끌고 상경한 요시토키의 아들 야스토키에 의해 오키 제도(隠岐諸島)로 유배되었다. 아버지 고토바 상황의 막부 타도 계획에 협력했던 준토쿠 상황은 사도로 유배되었고, 이 계획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던 쓰치미카도 상황은 스스로 도사로 옮겨갔다.
이들 외에도 마사나리 친왕은 다지마로, 요리히토 친왕은 비젠으로 각각 유배되었다. 재위 3개월도 안 된 어린 주쿄 천황(당시 4세)은 폐위되고, 다카쿠라 천황의 손자인 시게히토 왕이 즉위했다. 즉위 경험이 없는 모리사다 친왕은 고타카쿠라인(後高倉院)으로서 인세이(院政)를 행하게 되었다.
3. 가계도
* 중궁: 구조(후지와라) 닌시(기슈몬인, 1173년 - 1238년) - 구조 가네자네의 딸
첫째 황녀: 쇼시 내친왕(슌카몬인, 1195년 - 1211년) - 준토쿠 천황 준모・황후궁
* 뇨고(여원): 미나모토노 아리코(쇼메이몬인, 1171년 - 1258년) - 노엔의 딸, 미나모토 미치치카의 양녀
첫째 황자: 다메히토 친왕(1195년 - 1231년)
* 뇨고(여원): 후지와라(다카쿠라) 시게코(슈메이몬인, 1182년 - 1264년) - 다카쿠라 노리스에의 딸
셋째 황자: 모리나리 친왕(1197년 - 1242년)
황자: 마사나리 친왕(1200년 - 1255년) - 조큐의 난 이후 다지마로 유배
황자: 손카이 입도친왕(1204년 - 1246년) - 천태좌주
* 후궁: 보몬 노부키요의 딸
둘째 황자: 나가히토 친왕(1196년 - 1249년) - 닌나지
셋째 황녀: 레이시 내친왕(가요몬인, 1200년 - 1273년) - 가모 사이인
황자: 요리히토 친왕(1201년 - 1264년) - 조큐의 난 이후 비젠으로 유배
* 후궁: 미나모토 노부야스의 딸
둘째 황녀: 슈쿠시 내친왕(1196년 - ?) - 이세 신궁 사이오
* 궁녀: 겐세이의 딸
황자: 아사히토 친왕(1204년 - 1250년) - 천태좌주
* 후궁: 후지와라 사다요시의 딸
황자: 손엔 법친왕(1207년 - 1231년) - 온조지, 쇼고인
황자: 교초 - 엔랴쿠지
* 텐지: 후지와라씨(쇼나곤 텐지)
황자: 미치모리(1198년 - ?) - 닌나지
* 후궁: 가메기쿠
* 후궁: 다키(?-1265년)
황자: 가쿠닌 법친왕(1198년 - 1266년) - 온조지, 구마노 산잔 겐교
* 후궁: 이시
황녀: 히로코 내친왕(1205년 - ?) - 이세 신궁 사이궁
* 후궁: 히메호시
황자: 가쿠요 - 젠린지
황자: 도엔 - 닌나지
황자: 도이 - 온조지
* 생모 불명
황자: 이치조노미야(1201년 - 1213년)
황녀(1202년 - 1207년)
4. 연호
* 주에이 (1183년8월 20일 - 1184년4월 16일)
* 겐랴쿠 (1184년 4월 16일 - 1185년8월 14일)
* 분지 (1185년 8월 14일 - 1190년4월 11일)
* 겐큐 (1190년 4월 11일 - 1198년1월 11일)
5. 평가
고토바 천황은 무슨 일이든 자신이 몸소 나서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고 이는 아버지 고시라카와인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다. 활쏘기, 스모와 같은 무예에 관심을 가졌고, 직접 칼을 담금질하거나 도적 포획을 지휘하기도 했다. 《조큐키》에는 "수영과 스모뿐만 아니라 아침저녁으로 무예를 일삼고 밤낮으로 무기를 정리하며 병란에 대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큐의 난을 일으켜 막부를 타도하고 구게 정권으로 통합하려 한 것도 왕권 과시적 행위의 하나였다. 와카에 대한 관심, 쇼군 사네토모에 대한 유화책 등 문화적 통합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자 결국 무력을 사용했다.
겐큐 3년(1192년) 친정을 시작한 후 천황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후지와라노 사다이에(데이카), 미나모토노 나카쿠니, 나카아키라, 후지와라노 다다쓰나, 미나모토노 도모치카, 아스카이 마사쓰네, 후지와라노 히데야스 등이 그들이다.
고시라카와인 사후 친정과 인세이를 펼쳤으나, 지텐노키미로서 쓰치미카도 천황을 퇴위시키고 준토쿠 천황을 옹립하여 그 자손에게 황위를 잇게 한 것은 귀족 사회와 다른 종친들의 불만을 샀다. 삼종신기 없이 즉위한 것도 악평을 더했다. 전제적 폭정과 무모한 거병 계획에 대해 원의 측근을 제외한 대부분의 귀족들은 냉담했고, 조큐의 난 이후 막부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진 상황을 제외하더라도 고토바인을 동정하는 의견은 적었다. 《구칸쇼》, 《로쿠다이쇼지키》, 《신황정통기》 등은 모두 "패도를 지향한 정책이 불러온 자업자득"이라며 혹평했다.
조큐의 난 이후 교토 조정은 왕위 계승에 막부의 동의를 필요로 하게 되면서 정치적 자율성을 잃었다. 그러나 간겐 2년(1244년) 고토바 상황 추선팔강 법회가 조정 행사로 격상되고, 고사가 상황은 호지 2년(1248년)에 고토바 상황이 제도화했다가 조큐의 난으로 중단된 인노고쇼 최승강 법회를 '선례'로 부활시켰다. 이는 쓰치미카도 천황 계통인 고사가 천황이 준토쿠 천황 계통의 다다나리 왕(주쿄 천황의 동생)과 왕위 계승을 놓고 긴장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쓰치미카도 계통이 고토바인의 정통 후계자임을 주장하고 고토바인의 명예를 회복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다다나리왕 지지파를 억제하고 고사가 천황 즉위를 강행한 가마쿠라 막부의 묵인 하에 이루어졌다. 가마쿠라 막부 멸망 후에는 가인으로서의 고토바인을 재평가하는 움직임도 높아져, 《마스카가미》에서는 고토바인을 와카를 비롯한 '궁정 문화의 옹호자'로 묘사하고 있다.
彼の権能と威厳の光彩を隠さず輝かせながら、同時にあらゆる芸術と技芸を楽しんだ。この全てにおいて彼は誰にも劣らなかったので、人々は彼がいつどのようにしてそのような熟練を得たのか不思議に思った。そして、これらの芸術の一つまたは複数に精通した多くの人々が、退位した皇帝の関心のおかげで名声と富を得ることになった。仏は十悪と五逆罪を犯した者たちでさえも、すべての人を救済に導くという。退位した皇帝は、どんなに些細で取るに足らないように見える技芸にも関心を示した。そのため、これらのことについて何らかの知識を持つあらゆる種類の人々が彼の面前に呼ばれ、そこで彼らは自由に彼の好意を求めることができたという。일본어
정치적 권력에 제한이 있었음에도 18세에 퇴위한 후(퇴위는 그를 '궁궐의 의례적 감옥'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서예가, 화가, 음악가, 시인, 비평가이자 편집자로서 능력을 키웠다.
궁술, 승마, 검술에 대한 열정 외에도 칼 자체를 매우 좋아해, 여러 해 동안 일본 최고의 검 제작자들을 궁정으로 불러 명예 칭호를 주고 기술을 가르치게 했다. 그는 존경받는 검 제작자가 되었고, 그의 후원과 격려 덕분에 일본 칼 제작의 '황금기'가 탄생했다. 그의 기여는 오늘날에도 높이 평가되어 검술 문헌에서 그가 처음 논의되는 검 제작자라는 전통이 유지되고 있다.
문학에 대한 가장 큰 공헌은 신고킨 와카슈(신고금 와카집)로, 만요슈, 고킨 와카슈와 함께 일본 3대 와카 문집으로 꼽힌다. 그는 제작을 명하고 편집자로 작업반에 참여했다. 와카청(和歌所)을 부활시켜 이 판본의 본부로 삼고, 많은 '우타카이'(와카 모임)와 우타아와세(와카 경연대회)를 개최했다. 창작자이자 조직자일 뿐 아니라 비평가로서 와카의 일반적인 스타일과 당대 시인들에 대한 비평을 저술했다.
유배 기간 동안 오키 섬에서 작품을 만들고 18년 동안 신고킨슈 사본을 편집하며 수백 편의 와카를 계속 작곡했고, 이전 판본에서 약 400편의 와카를 제거했다. 이 판본은 1204년에 공식 완성되었고 1216년에 추가 설명이 완료되었다. 그는 자신의 사본이 진품이라 선언했지만, 오늘날 1216년 판본이 진품으로 간주된다. 그의 판본은 '오키본 신고킨슈'(오키 판본)라 불린다. 유배 기간 동안 미적 비평에 관한 단편 "고토바노 인 고쿠덴"("비밀 가르침")을 저술했을 가능성이 높다. "비밀 가르침"은 후지와라노 테이카와 고토바의 복잡한 관계에 대한 주요 자료로서 특히 귀중하다.
그의 31음절 시 중 하나는 후지와라노 테이카의 햐쿠닌잇슈에 99번으로 선정되었다.
6. 원령으로서의 고토바인
가테이(嘉禎) 3년, 고토바인은 다음과 같은 치문(置文)을 기록했다. "만일 이 세상의 망념에 끌려 마연(魔緣, 마귀)이 된다면 나는 이 세상에 재앙을 가져올 것이다. 내 자손이 세상을 차지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내 힘에 의한 것이다. 내 자손이 세상을 취하게 되는 날 나의 명복을 빌게 하라." 《히라도기》에는 미우라 요시무라(三浦義村)나 호조 도키후사(北条時房)의 죽음을 고토바인의 원령 때문이라고 적은 기술이 있어서, 그 무렵부터 이미 원령이 되었다고 여겨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