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차 (당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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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주치(朱泚)는 당나라 현종 시대에 태어나, 안사의 난 이후 이회선과 주희채 휘하에서 근무했다. 772년 주희채 사후 뤄룽 군의 지휘권을 얻어 절도사가 되었고, 774년에는 당나라 조정의 부름을 받아 장안으로 가서 덕종 황제의 환대를 받았다. 783년 경원 군의 반란으로 덕종이 봉천으로 피신하자, 주치는 스스로 황제를 칭하고 한나라를 세웠으나, 이회광의 공격으로 장안을 빼앗기고 도주하던 중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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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사의 난은 당나라 말기에 안록산이 일으킨 대규모 반란으로, 당나라의 쇠퇴를 가속화시켰으며,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주차 (당나라)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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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휘 | 주차/주체(朱泚) |
원래 이름 | 주차/주체(朱泚) |
가족 성 | 주(朱) |
출생 | 742년 |
사망 | 784년 |
출생지 | 유주 창평 |
사망지 | 경주(慶州) 팽원(彭原, 지금의 감숙성 경양시 서봉구) |
직업 | 군사 장군, 군주, 반란군 |
아버지 | 주회규(朱懷珪) |
형제자매 | 동생 주도 |
통치 | |
재위 기간 | 783년 11월 7일 ~ 784년 |
왕조 | 처음에는 진(秦), 나중에 한(漢)으로 변경 (784년에 변경) |
연호 | 응천(應天) 783-784 천황(天皇) 784 |
2. 생애
주치는 742년 현종의 천보 연간에 유주의 창평에서 태어났다. 증조부 주리(朱利)는 찬선대부를 지냈고, 예부상서로 추증되었다. 조부 주사명(朱思明)은 태자세마였다. 아버지 주회규(朱懷珪)는 천보 초에 범양절도사 배관(裴寬)을 섬겨 아전장·절충장군이 되었고, 755년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연에 가담하여 관병장으로 승격했다. 보응 연간에 이회선이 당나라에 귀순하자, 계주자사·평로군유후·류성군사로 삼을 것을 상주받았다. 766년 주회규가 사망하자, 주치의 공적 때문에 조부에게 태자태사가, 아버지에게 좌복야가 추증되었다[14]。 주치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 종군했다. 허리 둘레가 10위나 되고 기마와 무예에 뛰어났다고 한다. 외모는 도량이 넓어 보였지만, 잔혹한 성격을 지녔다. 재산을 축적하지 않고, 전리품과 은상을 부하들에게 나눠주었기에, 부하들의 신망을 받았다[14]。
2. 1. 배경
주치는 742년에 현종의 치세에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유주(幽州, 오늘날의 베이징) 출신이었다. 그의 증조부 주리(朱利)와 조부 주사명(朱思明) 모두 작은 황실 관료로 일했다. 그의 아버지 주회규(朱懷珪)는 번양(范陽, 유주에 본부를 둠) 절도사 배관(裴寬) 휘하의 장교로 배관의 경비대를 지휘했으며 장군의 칭호를 받았다. 주회규는 나중에 755년 번양 절도사였던 안녹산이 현종의 통치에 반기를 들자 반란국 연의 장군으로 복무했다. 난 말기에 번양을 책임지고 있던 연나라 장군 이회선이 현종의 손자 대종의 통치에 항복했을 때 이회선은 주회규를 기주(薊州, 오늘날의 톈진)의 자사로 임명했고, 주회규는 766년 사망할 때까지 이회선 휘하에서 계속 복무했다.주치 자신은 아버지의 덕분에 젊은 시절 군 경력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체격이 좋고 컸으며, 기마술, 궁술 및 기타 군사 기술에 능숙했다. 그는 관대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보이는 것보다 더 엄격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또한 관대하다고 전해지며, 군사 임무를 수행할 때마다 부하들에게 전리품을 분배했다. 그래서 그는 병사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2. 2. 이회선과 주희채 휘하에서
주차(朱泚)는 이회선(李懷仙) 휘하에서 근무했는데, 768년, 그와 그의 동생 주도, 그리고 동료 주희채는 이회선을 살해할 음모를 꾸몄다. 계획에 따라 주자와 주도는 이회선의 본부에 도착하여 외부 경비병을 죽였지만, 주희채가 병력을 이끌고 들어와 이회선을 죽이지 않자, 주자는 불안해하며 도망갈까 생각했다. 주도가 "계획이 실패하면 어차피 죽을 텐데. 도망가서 뭐해?"라고 훈계한 후에야 그는 머물렀다. 주희채는 곧 도착했고, 그들은 들어가 이회선을 죽이고 그의 가족을 몰살했다.[5] 주희채는 임시 절도사 직함을 주장했다. 황실 정부는 그해 말에 이를 수용하여 주희채를 절도사로 임명했다. 주자는 계속해서 주희채 휘하에서 근무했으며, 같은 성씨를 공유했기 때문에 주희채가 그를 매우 신뢰했다고 전해진다.그러나 주희채는 잔혹하고 가혹하여 부하들을 소외시켰다고 한다. 772년, 주희채의 비서 이회원(이회원/李懷瑗중국어)[6]은 병사들이 주희채에게 분노했기 때문에 그를 암살했다. 처음에는 본부가 혼란에 빠졌다. 당시 본부 경비대를 지휘하던 주도는 신속하게 자신의 병사들을 설득하여 절도사로 계승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오직 주자뿐이라고 선언하게 했다. 다른 장교들도 동의했고, 당시 순무 관저 밖에 있던 주자는 지휘권을 넘겨받기 위해 수도로 환영받았다. 주자는 임시 절도사 직함을 주장하고 당나라 수도 장안으로 사자를 보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고했다. 대종 황제는 주자를 절도사로 임명하고 화녕왕으로 봉했다.
2. 3. 노룡군 절도사로서
당시 당나라 서쪽 국경은 종종 토번의 침략을 받았고, 황제는 가을에 방어를 위해 정기적으로 절도사에서 군대를 징집했는데, 이는 토번이 자주 공격하는 계절이었다. 그러나 안사의 난이 끝난 이후 뤄룽 번진은 그러한 징집에 응하지 않았다. 773년, 주차는 그 전통을 깨고 황실 정부에 복종하는 모습을 보이며, 정예병 5,000명을 거느린 주도를 장안으로 보내 가을 방어에 참여하게 했다. 대종 황제는 매우 기뻐하며 주도를 성대한 연회로 맞이하고 많은 포상을 내렸다.[7]주도의 건의에 따라—스스로 장안으로 가는 것이 황제에 대한 큰 충성을 보여주는 것이라는—주차 본인이 774년 가을 방어에서 뤄룽 군대를 지휘하겠다고 자청했다. 대종 황제는 이를 수락하고, 그의 도착을 기대하며 주차를 위해 대규모 저택을 지어주었다. 774년 가을, 주차는 뤄룽의 임시 지휘관으로 주도를 남겨두고 뤄룽을 떠나 장안으로 향했다. 위주(蔚州, 현대 장자커우, 허베이성)에 도착했을 때 그는 병이 들었다. 그의 부하들은 그에게 뤄룽으로 돌아가 병이 나아지기를 기다리라고 요청했다. 주차는 "내가 죽더라도 계속 나아가 내 시신을 장안으로 옮겨라"라고 말하며 거절했다. 부하들은 더 이상 그에게 다른 것을 권하지 못했다. 그가 장안에 도착했을 때, 안사의 난 이후 안록산의 옛 영토에서 장안을 방문한 최초의 절도사였기에, 관리와 백성들이 그를 환영하기 위해 길게 늘어서서 마치 긴 성벽과 같았다고 전해진다.[7] 대종 황제는 주차와 그의 부하들을 연영전(延英殿중국어)에서 연회에 초대했고, 대종 황제는 그에게 전례 없는 포상을 내렸다고 한다. 그 해 가을, 가을 방어군은 주차와 곽자의, 이보옥, 마린( 馬璘중국어 ) 등 세 명의 저명한 장군에게 분할되어 지휘되었다.[7]
2. 4. 조정의 관료이자 장군으로서
주자사(朱祠)가 율롱(盧龍)을 떠난 후에도 절도사 직을 유지했지만, 주도는 그의 측근들을 죽였고 형제간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주자사는 율롱으로 돌아가는 것이 안전하지 않다고 믿고 장안에 남기를 요청했다.[4] 대종 황제는 이를 승인했지만, 주도를 절도사 대행으로 임명하면서 그에게 절도사 직함을 유지하게 했다. 775년, 주자사는 펑톈(奉天, 오늘날의 시안, 산시) 방어 책임자로 임명되었고, 776년에는 재상 직함인 '동 중서 문하 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중국어)를 받았다.[8] 그는 778년 정초에 장안으로 돌아왔다. 그는 곧 롱유(隴右, 오늘날 칭하이 성, 하이둥 시) 절도사라는 추가 직함을 받았는데, 롱유는 토번에게 함락되어 명예직에 가까웠다. 그리고 원래 하서(河西, 오늘날 간쑤 성, 우웨이 시)와 젤루(澤潞, 오늘날 산시 성, 창즈 시)에서 파견된 군대를 지휘하게 되었다.같은 해, 주자사는 대종 황제에게 행운의 징조라고 생각되는 것을 올렸는데, 그것은 고양이와 새끼 고양이와 평화롭게 사는 쥐의 모습이었다. 창은 이를 행운의 징조로 여겨 대종 황제를 축하했지만, 창의 부하인 최우보는 '중서사인'(中書舍人, 입법부의 중간 관료, 중서성(中書省, ''Zhongshu Sheng''))으로서 이에 동의하지 않고, 이는 고양이의 본성에 어긋나고 관료들이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는 징조라고 주장했다. 그해 말, 토번의 침략이 있었을 때, 주자사는 곽자의, 단수실과 함께 군대를 지휘하여 침략에 맞서 싸웠다.[8] 779년, 그의 작위는 회녕군공(淮寧郡公)에서 수녕군왕(遂寧郡王)으로 바뀌었다.
779년 말, 대종 황제가 죽고 그의 아들 덕종 황제가 즉위했다. 대종 황제의 죽음 직후, 창과 최는 관리들이 대종 황제를 위해 상복을 입는 적절한 기간을 두고 큰 논쟁을 벌였다. 최는 3일(대종 황제의 유언에 따름)만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창은 27일을 주장했다. 창은 분노하여 곽과 주자사의 이름을 서명하여 최의 무례함을 처벌할 것을 청원했다. 덕종 황제는 처음에는 최를 동경 뤄양 부윤으로 강등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이 강등이 발표되었을 때, 곽과 주자사는 모두 최를 변호하는 청원을 올렸다. 덕종 황제는 그들을 소환하여 최의 처벌을 요구하는 청원과 그를 변호하는 청원이 일치하지 않는 이유를 물었고, 그들은 둘 다 처벌을 요구하는 청원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진술했다. 덕종 황제는 재상들이 서로 청원에 서명하는 관례를 몰랐고, 창이 곽과 주의 서명을 위조했다고 믿고 분노하여 창을 멀리 떨어진 조주(潮州, 오늘날의 광둥 성, 차오저우 시) 지사로 강등하고 최를 재상으로 임명했다. 그 후, 주의 방어 기지는 펑샹(鳳翔, 오늘날의 바오지, 산시)으로 옮겨졌고, 그는 펑샹 부윤으로 임명되었다.
780년, 당시 덕종 황제 치하에서 가장 강력한 재상이었던 양염은 당나라 영토였지만 이후 당나라와 토번 사이의 무인지대가 된 원주(原州, 오늘날의 간쑤 성, 구위안 시)를 전진 기지로 재건하려 했다. 양은 이 프로젝트에 매우 열중하여 단수실이 반대하자 단을 징위안(涇原, 오늘날의 간쑤 성, 핑량 시) 절도사직에서 해임하고 엄격하고 가혹하기로 알려진 이회광으로 교체했다. 그는 이후 이회광, 최녕, 주에게 건설 프로젝트를 위한 군대를 지휘하도록 명령했다. 단의 전 부하인 유문희(劉文喜중국어)는 징위안 군대가 이회광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고 반란을 일으켜 단을 복귀시켜 달라는 청원과, 그 대안으로 주를 절도사로 임명해달라는 청원을 올렸다. 덕종 황제는 처음에는 실제로 주를 징위안 절도사로 임명하여 유를 달래려 했지만, 유는 실제로는 절도사 자리를 원했기에 주를 환영하지 않고 토번의 지원을 요청했다. 덕종 황제는 이회광과 주에게 유를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주는 징위안(징위안 절도사의 수도)을 포위했고, 토번이 유문희를 돕기를 거부하면서 유문희의 부하 유해빈(劉海賓중국어)이 유문희를 죽이고 항복했다. 그 후, 덕종 황제는 주에게 더 높은 재상 직함인 '중서령'(中書令중국어)을 주어 그를 명목상 입법부의 수장으로 만들었다.[8]
2. 5. 황제로서
782년, 주도는 황제의 명령에 따라 이유열을 죽이는 데 참여하고 잠시 정덕(成德, 현재 허베이성스자좡에 위치)을 황제의 통제 하에 두었지만, 정덕의 일부를 받지 못한 것에 분노하여 덕종에게 반역했다.[9] 그는 주사에게도 반역을 일으키도록 비밀 서신을 보냈으나, 서신은 황실군에게 가로채였고 주사에게 전달되지 못했다.[9] 덕종은 그 서신을 검토한 후 주사를 장안으로 소환하고 서신을 보여주었다.[9] 주사는 두려움에 굴복했고, 덕종은 주사가 모든 관직을 유지하도록 허용하면서 봉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9] 대신 그는 주사를 장안에 머물게 했지만, 그에게 큰 저택, 토지, 보물을 주어 그를 달래려 했다.[9]783년 11월 2일,[9] 경원 군인들은 약속된 보상을 받지 못한 것에 분노하여 반란을 일으켜 궁궐을 공격했고, 덕종은 봉천으로 도망쳤다.[9] 군인들은 주사를 지도자로 세우기로 결정하고, 그날 밤 주사는 궁궐로 들어가 스스로 무장 세력의 임시 사령관임을 선언했다.[1] 다음 날 그는 덕종을 장안으로 다시 맞이하려는 의도를 보이는 선언문을 발표했는데,[1] 이 선언은 관료들이 주사에게 보고하게 만드는 효과를 냈다.[1] 주사는 덕종에게 충성하는 일부 관료들이 도망치는 것을 보고, 스스로 매우 유능하다고 믿었지만 덕종의 신임받는 재상 노기에 의해 재상이 되는 것을 막혔던 관리 원휴(源休중국어)를 주요 전략가로 삼고, 원휴는 주사가 스스로 왕위를 차지하라고 제안했다.[1] 주사의 측근이 된 인물로는 재상 이충신과 장관 장광승(張光晟중국어)이 있었고, 요령언(姚令言중국어) 또한 주사의 일파에 합류했다.[1] 한편, 단수시 또한 비슷한 불만을 품을 것이라고 믿고 주사는 그를 소환하여 이 내각의 일원으로 삼았지만, 단수시는 비밀리에 주사를 암살하고 덕종을 장안으로 다시 맞이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1]
주치는 덕종을 위협으로 제거하려는 목적으로 요령언의 부하 한민(韓旻중국어)에게 3,000명의 군사를 주어 봉천으로 향하게 했지만, 단수시가 공격을 중단시켰다.[1] 주사는 이충신, 원휴, 요령언, 단수시를 불러 회의를 열었고, 회의에서 단수시는 주사를 암살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살해당했다.[1] 11월 6일, 주사는 스스로 새로운 진(秦)나라의 황제임을 선포하고, 요령언, 이충신, 원휴를 재상으로 임명하고 주도를 황태자로 삼았다.[10] 주치는 봉천(奉天)을 점령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직접 군대를 이끌고 봉천으로 향했다.[11] 그는 봉천을 포위했고, 봉천은 곧 식량 공급이 끊긴 절박한 상황에 놓였다.[11] 783년 가을, 경주와 원주에서 보상에 불만을 품은 병변이 일어나 덕종은 봉천으로 피난했다.[15] 경주와 원주의 병사들은 이미 반역을 일으킨 주도의 형 주치를 따랐고, 주치는 처음에는 지도자가 되겠다고 말했지만, 다음 날에는 덕종을 장안으로 맞이하겠다고 발표했다.[15] 원휴는 주치의 참모가 되어 주치에게 즉위를 권했고, 이충신, 장광성, 요령언과 같은 부장들도 주치에게 협력했다.[15] 단수실은 주치를 죽이고 덕종을 맞이하려 했지만, 주치는 단수실을 끌어들였다.[15] 주치는 한민을 봉천으로 보냈지만, 단수실은 기령악에서 한민에게 싸움을 포기하고 돌아가라고 요령언을 사칭하여 명령하게 했다.[15] 주치는 즉위 계획을 여러 장수들과 논의하고 있었지만, 단수실의 암살은 미수에 그쳤고, 주치는 용서하려 했지만, 단수실은 호병에게 살해당했다.[15] 같은 해 가을, 주치는 대진 황제에 즉위했고, 형의 아들 주수를 태자로 삼고, 동생 주도를 기왕, 태위, 상서령으로 삼았다.[14]
당나라 장군 한유괴(韓遊瓌)와 혼 간이 진나라의 포위를 막으려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동쪽에서 왕무준(王武俊)과 전열(田悅)과 싸우다가 덕종의 곤경을 듣고 즉시 장안으로 향했던 이회광(李懷光)이 정예 삭방 군대를 이끌고 도착했다.[12] 12월 18일,[11] 이회광이 례천(醴泉, 현재의 셴양)에서 진나라 군대를 격파하자, 주치는 이회광에게 패배할 것을 두려워하여 봉천 포위를 풀고 장안으로 돌아갔다.[12] 그는 봉천이 함락되었다는 소문을 주기적으로 퍼뜨려 장안에서 자신의 군대의 사기를 유지하려 했지만, 다시는 봉천을 위협하지 않았다.[12] 주치는 더욱 봉천을 격렬하게 공격했지만, 포위가 한 달 정도 지나자, 당나라의 이회광이 장안으로 향했고, 이회광이 례천의 진군을 물리치자, 주치는 봉천을 포기하고 장안으로 달려갔다.[16] 만약 이회광의 도착이 3일 늦었다면 봉천은 주치의 손에 들어갔을 것이라고 한다.[16]
784년 1월 27일,[13] 주치는 국호를 한(漢)으로 바꾸었다.[14] 원수(元休)의 제안에 따라 그는 덕종 황제의 황족과 친척들을 대량 학살했지만, 당나라 관료들을 강제로 섬기게 하거나 당나라 황실 사당을 파괴하라는 제안은 거부했다.[13] 한편 덕종 황제는 주치를 제외한 일반 사면령을 발표했다.[13] 원휴의 조언에 따라 덕종의 종실을 대거 처형했지만, 장안의 당나라 장수나 전당에 손을 대는 것은 거부했다.[16] 이 무렵, 덕종은 진군의 항복을 기대하며 대사령을 내렸지만, 주치는 이 대사령에서 제외했다.[16]
당나라의 장안 탈환 노력은 곧 내분에 휩싸였고, 주치는 이회광에게 밀사를 보내 이회광을 형님으로 존경하고, 둘 다 독립적인 영역의 황제로 섬기자고 제안하여 이회광은 덕종 황제에 등을 돌렸다.[16] 덕종 황제는 이회광과 주치의 연합 공격의 결과가 두려워 흥원(興元, 현재의 한중, 산시)으로 도망갔다.[16] 주치를 따르는 부하가 속출했고, 이회광의 부하들은 이회광에게 반항하고, 주치도 형이 아닌 신하로 대우하게 되자, 이회광은 분노했고, 또한 이성을 두려워하여 장안에서 하중으로 도망쳤다.[16] 주치는 이성의 군대의 친족을 우대하여 이성을 끌어들이려 했지만, 이성은 거절했고, 혼감과 이성은 합류하여 장안 공략을 준비했다.[16] 토번의 군대도 합류했지만, 주치는 그들에게 뇌물을 보내 포기하도록 설득했다.[16]
784년 6월 12일, 이성은 장안 공격이 시작될 것이라고 선언하고 장안 부근으로 진격했다.[16] 6월 18일, 한나라 장군 장정지(張庭芝)와 이희천(李希倩, 이희열의 동생)은 이성을 선제 공격하려 했지만, 이성은 그들을 격파했다.[16] 장광성은 이성과 은밀히 연락을 취하며 주치에게 장안에서 도망가도록 설득했고, 주치는 6월 20일에 그렇게 했고, 이성은 장안에 입성하여 당나라를 위해 장안을 되찾았다.[16] 주치는 토번으로 도망가는 도중, 경주에서 전희감에게 가로막혔다.[16] 주치는 분노하여 경주를 공격했지만 이기지 못했고, 주치의 경주와 원주의 병사들은 요령언을 살해하고 전희감에게 투항했다.[16] 주치는 계속 도망쳤고, 팽원에 이르자 부하 양정분에게 사살당했다. 향년 43세. 양정분은 주치의 목을 베어 당나라에 투항했다.[16]
3. 평가
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zh:s:資治通鑑/卷228
[2]
웹사이트
中央研究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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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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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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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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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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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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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h:s:資治通鑑/卷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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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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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旧唐書
[15]
서적
資治通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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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資治通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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