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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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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곽자의는 당나라 중기의 장군으로, 안사의 난을 평정하여 당 왕조 부흥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화주 출신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절도사로 임명되었으며, 안사의 난 당시 삭방 절도사로서 반란군을 토벌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후 토번과 위구르의 침략을 막아내고, 분양왕에 봉해졌다. 곽자의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과 관대한 인품으로 존경받았으며, 그의 삶은 부귀영화의 상징으로 여겨져, 다양한 문화 콘텐츠의 소재가 되었다. 한국의 청주 곽씨는 곽자의의 후손을 시조로 한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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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자의
기본 정보
곽자의의 그림, 만소당 - 죽장 - 화전 (晩笑堂竹荘畫傳)에 게재, 중화민국 10년(1921년)에 출판됨
이름곽자의 (郭子儀)
출생697년
사망781년 7월 9일 (83–84세)
아버지곽경지 (郭敬之)
자녀8명의 아들 (곽애 (郭曖) 포함), 곽황후의 아버지
작위대국공 (代國公), 분양왕 (汾陽王)
시호충무 (忠武)
직업군사 장군, 정치인

2. 생애

곽자의는 화주 정현(현재 섬서성 위남시 화주구) 출신으로, 와 같고, 시호는 충무이다. 『구당서』에는 그의 키가 “6척 남짓”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당척으로 계산하면 약 190cm에 달하는 장신이었다. 아버지 곽경지는 자사를 역임한 고관이었다.[19]

735년경 군법회의에서 이백의 중재로 목숨을 건진 곽자의는[2] 무과 시험을 통해 정계에 입문, 749년 무과에 합격하여 당나라 국경 지역의 장교가 되었다.[21][22] 안록산이 난을 일으키자 삭방절도사(朔方節度使)로 승격되어 안록산 토벌에 나섰다.[24][25]

안사의 난 진압 과정에서 곽자의는 뛰어난 전략과 용맹으로 큰 공을 세웠다. 청벽 전투(青壁之戰)에서 7천 명의 반군을 격퇴하고 첫 승리를 거두었으며,[3][4][5][6][7][8][9][10][11][12] 이광비(李光弼) 장군과 함께 사사명(史思明)의 10만 대군을 막아내고 반군 1만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당 숙종 즉위 후, 곽자의는 장안(長安) 탈환에 집중하여 1만 5천 명의 군사로 반란군 1만 명을 격파했다. 그의 활약으로 반란군 지도자 안록산은 아들에게 살해되었고, 숙종은 곽자의에게 "경이 재건한 것"이라며 칭찬했다.

758년, 곽자의는 다른 절도사들과 함께 반란군 소탕 작전에 참여했으나, 숙종의 의심과 환관들의 모함으로 병권을 박탈당하고 한직에 머물렀다.

762년 이후, 곽자의는 토번의 침입과 곽회은의 반란 등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다시 등용되어 뛰어난 군사적 능력과 외교술로 나라를 구했다. 특히, 765년 토번과 위구르 연합군의 침입 때는 위구르 대수(大帥) 약갈라(藥葛羅)를 설득하여 동맹을 맺고 토번을 격퇴하는 큰 공을 세웠다.

당 덕종은 곽자의에게 상부(尚父) 칭호를 내리고, 대위(大尉)·중서령(中書令)으로 승진시켰다. 곽자의는 781년 85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덕종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건릉에 배장(陪葬)하고 이례적으로 봉분을 높이도록 했다.[1]

곽자의는 4대에 걸쳐 조정을 섬기며 두 번 재상에 오른 인물로, 무과 장원 출신으로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로 평가받는다.[1] 민간 전승에서는 그를 "번영과 행복의 신"으로 여기기도 한다.[4]

2. 1. 출자 및 초기 생애

화주 정현(현재 섬서성 위남시 화주구) 출신이다.[19] 와 같으며, 시호는 충무이다. 후진의 류서가 편찬한 『구당서』(이하 “구서”라 한다)에는 “자의 신장은 6척 남짓”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북송구양수가 편찬한 『신당서』(이하 “신서”라 한다)에는 “신장은 7척 2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당척은 약 31.1cm, 송척은 약 30.72cm이므로, 구서의 “6척 남짓”을 당척으로 계산해도 키가 약 190cm에 달하는 장신이었다. 구서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 곽경지는 수주, 위주, 계주, 수주, 사주자사를 역임했다. 이는 결코 낮은 신분이 아니었는데, 신서·백관지 사하에 따르면, “상주” 자사는 “종삼품”에 해당하며, 또한 위주·수주 등에는 중도독부가 설치되어 중도독은 “정삼품”이었다. 부병제가 무너지기 이전에는 도독·자사의 관직은 지방직(외관)으로서 고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곽자의는 중산층 관리 집안 출신으로 화주(현재 화현)에서 태어났으며, 미남으로 키가 1.9미터가 넘었다고 묘사된다.

735년경 곽자의는 군법회의에서 시인 이백이 현지 사령관에게 중재함으로써 구사일생했다.[2]

가족의 다른 구성원들과 달리 곽자의는 문관 시험(문과)이 아닌, 무관 시험을 통해 정계에 입문했다. 749년 무과에 합격하여 당 제국의 국경 지역에서 장교가 되었고, 빠르게 승진하여 절도사(지역 군사 총독)가 되었다.

2. 2. 무장원(武壯元) 및 절도사 승진

735년경 곽자의는 군법회의에서 시인 이백의 중재로 목숨을 건졌다.[2] 그는 무과 시험을 통해 정계에 입문하여, 749년 무과에 합격하고 당 제국 국경 지역에서 장교가 되었다.[21][22]

현종 천보 8년(749년), 목자산에 횡새군(橫塞軍)과 안북도호부(安北都護府)가 설치될 때 곽자의는 횡새군사(橫塞軍使)로 임명되었는데, 이것이 연호를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이른 시기의 경력이다. 당시 그의 나이는 이미 53세였다. 그 후 곽자의는 신임 절도사로 부임한 안사순, 이림보 등을 섬겼다.

천보 13년(754년), 횡새군이 위치한 땅이 농사짓기에 적합하지 않고 인구도 적었기에, 영청책(永淸柵) 북쪽에 새로 성을 쌓고 횡새군과 안북도호부를 그곳으로 옮겼다. 이후 횡새군은 「천덕군(天德軍)」으로 개칭되었다. 이 공으로 곽자의는 천덕군사(天德軍使)가 되고 구원태수(九原太守)를 겸임, 삭방절도우병마사(朔方節度右兵馬使)로 임명되었다.

당시 절도사인 안사순은 안록산의 사촌동생이었다. 천보 14재(755년) 11월, 안록산이 난을 일으키자 안사순은 이전부터 안록산의 반역 의도를 황제에게 알려왔기에 죽음을 면하고[24] 중앙으로 소환되었다. 안사순의 후임으로 우병마사가 된 곽자의는 삭방절도사(朔方節度使)로 승격되고, 위위경(衛尉卿)[25]에 임명되었으며, 영무군태수(靈武郡太守)를 겸하여 삭방군의 병마를 거느리고 안록산을 토벌하라는 조칙을 받았다.

2. 3. 안사의 난 진압

안사의 난 이전 곽자의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곽자의가 명성을 얻은 것은 바로 이 안사의 난 때였다. 755년 반란이 일어나자 곽자의는 중국 국경의 전략적 요충지인 통관(潼關)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1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반군이 통관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곽자의는 반군을 통관 앞의 마을이 드문 평야 지대로 유인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반군은 약탈할 것이 거의 없어 사기가 저하되었고, 반면 당군은 가족이 있는 통관과 수도 장안(長安)을 지키려는 의지로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곽자의는 청벽 전투(青壁之戰)에서 7천 명의 반군과 교전하여 나머지 반군을 격퇴하고, 자군의 피해는 거의 없이 첫 승리를 거두었다.[3][4][5][6][7][8][9][10][11][12]

이듬해인 756년, 재상 양국충(楊國忠)과 그의 환관들의 무능과 부패로 수도가 함락되었다. 당 현종(唐玄宗)은 친위대와 양씨 가족, 그의 후궁 양귀비(楊貴妃)을 포함한 일행과 함께 도망쳤다. 당군을 포함한 일행은 양국충을 장안 함락으로 이어진 실패한 전략의 책임자로 여기며 분노했다. 양국충은 탄핵되어 처형되었다. 이후 황제의 군대는 그에게 사랑하는 후궁 양귀비를 처형하도록 강요했다. 황제는 나머지 일행과 함께 어려운 여정 끝에 험난한 길을 거쳐 견남(劍南)의 成都(成都)로 피신했다.

한편, 곽자의는 반군 지휘관 사사명(史思明)이 이끄는 10만 대군과 맞섰다. 곽자의는 겨우 1만 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증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사사명의 군대를 지연시켰다. 사사명은 곽자의에게 공격하면 매복에 걸릴 것이라고 속아 40일 동안 지체되었다. 그때 이광비(李光弼) 장군이 9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곽자의를 구원했다. 양측의 군대가 충돌하여 당군의 피해는 거의 없었지만, 반군은 1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사사명은 남은 병력을 급히 모아 반군의 거점인 범양(范陽)으로 후퇴했다. 이광비는 곽자의를 당 현종에게 추천했고, 곽자의는 즉시 황제에게 남은 반군을 소탕하기 위한 즉각적인 반격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현종은 그의 요청을 거절했다.

현종의 아들인 이항(李亨)은 756년 8월 12일 영주(靈武)에서 황제로 즉위하였다. 당 숙종은 즉시 반란군에 대한 반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현종은 상왕(上王)으로 불리게 되었고, 장안(長安)이 반란군으로부터 탈환된 후 장안으로 돌아가 761년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반란으로 인해 황실의 권위는 크게 약해졌다. 따라서 숙종은 즉위 후 권위가 약했고 많은 당나라 장군들은 황제의 명령을 가볍게 여겼다. 곽자의와 같이 중국계 장군은 당군 내에 소수에 불과했다. 곽자의는 사령관에 임명되었고 숙종은 그의 군사 작전을 지원했으며, 그 결과 큰 성공을 거두었다. 757년까지 곽자의는 산서(陝西) 전선에 진입했고, 많은 지역 주민들이 반란군에 맞서 그를 자발적으로 도왔으며, 곽자의의 군대는 원래 규모의 두 배에 달할 정도로 증강되었다. 반란군은 장군들의 사망을 포함하여 막대한 손실을 입었고, 그 후 곽자의는 산서 전선에서 승리를 선언했다.

안사의 난의 군사 이동과 함께 곽자의의 활동을 보여주는 지도


곽자의는 즉시 장안 탈환에 집중했다. 그는 1만 5천 명의 군사로 반란군 1만 명을 공격하여 패퇴시켰다. 곽자의의 섬서 및 장안에서의 승리는 반란군 내부의 분열을 초래했다. 반란군 지도자 안록산은 그의 아들 안경숙에게 살해되었고, 안경숙은 반란군의 잔여 세력을 이끌고 낙양으로 후퇴했다. 숙종이 장안에 도착했을 때, 그는 눈물을 흘리며 곽자의에게 "비록 이곳이 내 나라지만, 실제로는 경이 재건한 것"이라 말했다고 전해진다.

758년, 곽자의, 이광비 및 다른 절도사들은 의주에 남아 있는 반란군을 소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숙종은 절도사들의 권력 증대를 우려하여 환관들을 이 전투의 책임자로 임명했다. 이는 재앙이 되었지만, 곽자의는 동료 절도사들을 설득하여 반란군 도시를 포위하면 쉽게 승리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상황을 최대한 활용했다. 모든 절도사들이 이 전략에 동의했고, 포위 기간 동안 반란군의 보급품은 고갈되었다. 그러나 도시를 공격할 때가 되자, 모든 절도사들이 동등한 계급이었기 때문에 공격을 조정할 총사령관이 없었고, 공격은 효과적이지 못했다. 한편, 사사명의 지원군이 안경숙을 지원하기 위해 도착했다. 당군은 반란군을 소탕할 기회를 놓쳤다. 759년, 악천후 속에서 중앙 지휘부 없이 다시 한 번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벌어졌다. 당군이 승리했지만, 양측 모두 막대한 손실을 입었고(반란군 지도자 사사명과 대부분의 몽골계 반란군이 사망), 당군은 상대적으로 적은 사상자를 내면서 승리를 거두는 것으로 알려졌기에 황제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결과였다. 절도사들은 서로 비난하기 시작했고, 많은 이들이 곽자의를 겨냥하여 그에게 책임을 돌렸다. 사실 황제를 제외하고는 일반 백성들이 따르는 유일한 인물은 곽자의였다. 곽자의의 인기에 우려한 숙종은 이를 구실로 그의 권력을 축소하고, 그를 강등시키는 한편 다른 절도사들에게는 후한 상을 내렸다.

반란 평정을 맡아, 곽자의는 삭방군의 이광필(李光弼)과 연계하여 병사를 나누어 하북(河北)으로 진격, 상산(常山)에서 군사를 합쳐 사사명(史思明)의 군을 패배시키고 하북을 수복했다. 이때 곽자의는 황제에게 북쪽으로 범양(范陽)을 차지하고 곧장 반군의 소굴로 진격할 것을 건의했지만, 현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뒤 천보 15재(756년) 위구르군과 함께 하곡(河曲)을 평정하였으며, 이듬해 봄에는 하동(河東)과 풍상(馮翊)을 차례대로 수복하고 동관(潼關)으로 진격, 적군의 최건우(崔乾祐)와 싸워 1만이 넘는 당군 사상자를 낸 끝에 그를 패배시켰고, 최건우는 물러나 포진(蒲津)을 지켰다. 얼마 뒤 안록산이 아들 경서(慶緒)에게 살해되고, 현종은 태자에게 양위하였다. 새로 황제가 된 숙종은 곽자의를 병부상서(兵部尙書)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로 삼았다.

지덕(至德) 2재(757년) 곽자의는 칙을 받들어 봉상(鳳翔)으로 나아갔고, 도중에 백거(白渠) 유운교(留運橋)에서 이귀인(李歸仁)의 철기(鐵騎) 5천 인을 쳐서 패배시켰지만, 5월에는 안수충(安守忠), 이귀인과 청거(淸渠, 지금의 시안 서쪽)에서 치른 싸움에서 불리하여 물러나 무공(武功)을 지켰다. 9월 원수(元帥) 광평왕(廣平王) 숙(俶)을 따라 당과 위구르의 연합군 15만 인을 거느리고 다시 향적사(香積寺, 지금의 장안현 서남쪽) 북쪽에서 전투를 벌였고, 위구르 병사들이 적의 후방을 맡아 전후로 공격하여 적군 6만을 죽였다. 적장 장통유(張通儒)는 섬군(陜郡)으로 달아나고, 마침내 당군은 수도 장안을 수복하였다.

그 뒤 당군은 승세를 몰아 동쪽으로 진격하여, 신점(新店)에서 적장 엄장(嚴莊)과 장통유 등이 이끌던 15만 인을 패배시키고, 안경서를 뒤쫓아 황하(黃河)를 건넜다가 물러나 상주(相州)로 돌아왔다. 동도(東郡) 낙양(洛陽)으로 돌아온 곽자의는 전공으로 사도(司徒)가 되고 대국공(代國公)에 봉해졌다. 사사명은 범양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안경서를 구원하러 왔고, 양군은 안양하(安陽河) 북쪽에서 진을 치고 접전했다. 이때 당군을 지휘한 것은 환관 어조은(魚朝恩)이었지만, 군사적 재능이 없었던 그는 60만에 달하는 당군만 잃고 물러나야 했다(업성鄴城 전투). 어조은은 패전 책임을 모두 곽자의에게 돌린 바람에 곽자의는 장안으로 불려가 병권을 박탈당하고 한직에 머물러야 했다.

당나라 석조 부조, 산악 무늬 갑옷을 입은 무사

2. 4. 이민족과의 전쟁 및 외교

762년, 태원(太原)과 강주(絳州)에서 군란이 일어나자 당 조정은 곽자의를 분양왕(汾陽王)에 봉하여 강주를 지키게 했지만, 환관 정원진(程元振)의 모함으로 병권을 회수당했다. 광덕(廣德) 원년, 안사의 난이라는 혼란을 틈타 토번(吐蕃)이 당나라를 침공, 장안 근처 봉천현(奉天縣)까지 공격해오자 조정은 다시 곽자의를 관내부원수(關內副元帥)로 기용했다. 토번이 이미 위수(渭水)를 건넌 상황에서, 대종은 장안을 버리고 섬주(陝州)로 피신했다. 곽자의는 상주(商州)에서 흩어진 병사 수천 명을 모아 교란 작전을 펼쳤고, 토번은 이에 물러났다. 장안 수복 후 대종은 곽자의를 치하하며 "경(卿)을 일찍 기용하지 못해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광덕 2년, 삭방절도사 복고회은이 위구르와 토번의 군사 10만을 이끌고 관중을 침공하자, 곽자의는 태원으로 진공하여 이를 격퇴했다. 영태(永泰) 원년, 토번과 위구르가 다시 연합하여 당을 침공했을 때, 곽자의는 경양(涇陽)에서 위구르의 공격을 받았으나, 위구르 대수(大帥) 약갈라(藥葛羅)를 설득해 동맹을 맺고 토번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대력(大曆) 원년, 곽자의는 하중(河中)에 주둔하면서 군량을 충분히 확보했다. 대력 8년 토번이 10만 군사로 경(涇), 빈(邠) 지역을 침공하자, 곽자의는 병마사(兵馬使) 혼감(渾瑊)을 의록(宜祿) 방면으로 보냈으나 당군이 불리했다. 곽자의는 작전을 바꾸어 병사를 세 길로 나누어 진군시켜 백성(百城), 반원(潘原) 등을 함락시켰고, 토번은 패퇴했다.

당 숙종안사의 난을 평정하고 나라를 구한 공으로 곽자의는 위위경(衛尉卿), 영무군태수(靈武郡太守), 삭방절도사(朔方節度使), 관내하동부원수(關內河東副元帥)에 임명되었고, 분양왕(汾陽王)에 봉해졌다.

764년, 안사의 난 토벌에 함께했던 곽회은(僕固懷恩)이 환관과의 갈등으로 반란을 일으켜 태원(太原)을 공격했으나, 곽자의는 이를 물리쳤다.

765년, 토번(吐蕃)·위구르(ウイグル)의 반란을 평정하고, 덕종으로부터 상부(尚父) 칭호를 받았으며, 대위(大尉)·중서령(中書令)으로 승진했다.

2. 5. 만년

郭子儀중국어781년 6월에 사망하였다. 향년 85세였다(《구당서》 열전). 덕종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5일 동안 조회를 폐했고, 건릉에 배장(陪葬)하게 했으며, 1품 관리의 봉분 높이는 8장(丈)을 넘지 못하도록 했던 규정을 깨고 이례적으로 10척을 높이도록 했다.[1] 건릉 서남쪽의 파양촌(坡陽村), 즉 지금의 산시성 셴양시 리취안 현(禮泉縣)에 마련된 그의 무덤 앞에는 훗날 시대에 비석이 세워졌지만, 지금의 봉분은 평평하게 변해 있다.[1]

郭子儀중국어는 역대 중국의 과거에서 장원으로 발탁된 인물 가운데서는 유일하게 무과 장원 출신으로서 재상에까지 이른 자였고, 4대에 걸쳐 조정을 섬기며 두 번 재상으로 발탁되었다.[1] 또한 무과 장원 출신으로서 그 공이 가장 두드러진 자로 평가받고 있다.[1]

필라델피아 미술관에 소장된, 1900년경의 ''명인 초상화(Portraits of Famous Men)'' 앨범에 묘사된 모습


郭子儀중국어는 분양군왕(汾陽郡王)에 봉해져 종종 “곽분양”으로 불린다.[2] 그는 동아시아식 나이로 85세까지 살았고, 사후에 충무(忠武: 충성스럽고 무예가 뛰어난)라는 시호를 받았다.[2]

민간 전승에 따르면, 옥황상제는 郭子儀중국어가 국가를 수호하고 백성에게 행복을 가져다준 행동에 매우 기뻐하여 하늘의 관리를 보내 그의 가장 큰 소망이 무엇인지 물었다.[4] 郭子儀중국어는 오랫동안 싸워 많은 유혈 사태를 목격했기에, 그가 원하는 것은 평화와 행복뿐이라고 대답했다.[4] 보상으로 옥황상제는 郭子儀중국어를 천국으로 인도하여 "번영과 행복의 신"이라는 천상의 직책을 수여했다.[4]

태평광기』(이방(李昉) 등 편찬) 권19에 『신선감우전』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싣고 있다.[6]

郭子儀중국어대종대력 연간 초, 하중에 진을 치고 있을 때 중병에 걸렸다.[6] 삼군은 그 사실을 매우 걱정했고, 만약 전장에서 죽게 되는 일이라도 생길까 두려워했다.[6] 그 소식을 들은 郭子儀중국어는 의원과 참모였던 왕연창, 조혜백, 엄영 등을 불러 말했다. "이 정도 병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결코 이런 곳에서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6] 그리고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꺼냈다.[6]

무관으로 삭방의 삭막한 땅에 종군했던 젊은 시절의 일이다. 식사를 마치고 은주로 향하는 길목 십수 리 지점에서 해가 저물어 버렸고, 바람으로 모래먼지가 날리고 짐의 위치도 알 수 없게 되었다. 간신히 길가의 폐가에 피해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밤이 깊어졌을 때, 갑자기 주위가 붉은 빛으로 휩싸였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한 대의 가마가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오고 있었는데, 수놓은 발 안에는 한 여인이 타고 있었다. 郭子儀중국어는 여인에게 절을 하고 기도하며 말했다. "오늘은 칠월칠일이므로, 분명 하늘의 직녀(직녀성)께서 지상에 내려오신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제가 장수와 부귀를 얻을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라고.[6]

그러자 여인은 미소 지으며 "크게 부유해지고 크게 출세할 것이며, 또 장수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말을 마치자, 다시 천천히 하늘로 올라갔고, 그 사이 내내 郭子儀중국어를 바라보았으며, 한참 후에야 마침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후 郭子儀중국어는 공을 세워 출세하여, 위명이 빛나는 존재가 되었다.[6]

이 이야기를 듣고 전군 모두 일제히 축하하고 기뻐했다. 그 후, 郭子儀중국어는 인신의 극치에 이르러, 태위, 상서령, 상부에 임명되어,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6]

郭子儀중국어의 "부귀"와 "장수"에 대해, 신서·본전에 따르면, "(郭子儀중국어의 저택의 웅장함은) 친인리(장안의 방리의 하나)의 4분의 1을 차지하고, 부지 안에는 긴 골목길이 뻗어 있으며, 평소 삼천 명이나 되는 가신들이 출입했지만, 너무나 넓어서 郭子儀중국어가 어느 건물에 있는지 모르는 사람도 많았다.[6]

오랫동안 받은 좋은 논밭, 아름다운 그릇, 명원, 좋은 집 등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대종은 그의 "이름()"를 입에 담지 않고, 항상 "대신"이라고 불렀다. 스스로 천하의 안위에 힘쓴 지 20년, 그 사이에 중서령고 24편을 교정했다.[6]

여덟 명의 아들과 일곱 명의 사위는 모두 조정에서 귀하게 되었다. 내손과 외손은 합쳐 수십 명에 달하여, 모든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 인사를 오면, 그저 '좋다 좋다'하고 고개만 끄덕였다.[6]

(그의 인생을 돌아볼 때) 부유하고 영화롭게 장수한 것에 대해서도, 운과 불운의 순환에 대해서도, 대략 사람으로서 사는 한, 어떤 부족함이 있었을까"라고 평가되고 있다.[6]

3. 가계

곽자의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관계이름비고
아버지곽경지(郭敬之)
어머니미상
동생곽유명(郭幼明)
아내왕씨(王氏)704년 또는 705년생. 천보 연간에 낭야현군(琅琊縣君)에 봉해졌으며, 이후 태원군군(太原郡君), 곽국부인(霍國夫人)에 봉해졌다. 6남 2녀를 두었다. 777년 사망.
장남곽요(郭曜)어머니는 왕씨.
차남곽간(郭旰)어머니는 미상.
3남곽희(郭晞)어머니는 왕씨. 조국공(趙國公)에 봉해짐.
4남곽출(郭昢)어머니는 미상.
5남곽오(郭晤)어머니는 왕씨.
6남곽애(郭曖)어머니는 왕씨. 대종의 딸 승평공주를 아내로 맞아 부마가 됨.
7남곽서(郭曙)어머니는 왕씨. 기국공(祁國公)에 봉해짐.
8남곽영(郭映)어머니는 왕씨.
장녀성도현령(成都顯令) 노양금(盧讓金)에게 시집감.[26]
차녀악주관찰사(鄂州觀察使) 오중유(吳仲孺)에게 시집감.[26]
3녀위위경 장준(張浚)에게 시집감.[26]
4녀전중소감(殿中少監) 이동청(李洞淸)에게 시집감.[26]
5녀사문낭중(司門郎中) 정혼(鄭渾)에게 시집감.[26]
6녀분주별가(汾州別駕) 장옹(張邕)에게 시집감.[26]
7녀화주자사(和州刺史) 조종(趙縱)에게 시집감.[26]
8녀태상시승(太常寺丞) 왕재(王宰)에게 시집감.[26]
손자곽봉(郭鋒)곽요의 아들.
손자곽강(郭鋼)곽희의 장남. 조국공(趙國公)에 봉해짐. 증(贈) 병부상서.
손자곽균(郭鈞)곽희의 차남.
손자곽번(郭鐇)곽오의 아들.
손녀곽씨곽애와 승평공주의 장녀. 헌종의 귀비(貴妃)로서 목종을 낳았고 의안황후로 봉해짐.
손녀곽씨승평공주(升平公主) 소생의 차녀.
손자곽주(郭鑄)곽애의 아들로 승평공주(昇平公主)의 서자.
손자곽쇠(郭釗)곽애와 승평공주의 아들. 아내 심씨(沈氏)의 어머니는 대종의 딸 장림공주(長林公主)이고, 장인은 대종의 부마 심명(沈明)이다.
손자곽종(郭鏦)곽애와 승평공주의 아들로 순종의 딸 한양공주(漢陽公主) 창(暢)에게 장가들었다. 증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손자곽섬(郭銛)곽애와 승평공주의 아들로 순종의 딸 서하공주(西河公主)에게 장가들었다. 후사가 없어 서하공주의 전 남편 심휘(沈翚)의 아들을 양자로 들여 후사를 이었다.


4. 평가

곽자의는 당나라의 명장으로, 그의 군사적 업적과 인품은 다양한 평가를 받았다.


  • 신체 조건: 《구당서》에는 그의 키가 6척 남짓, 《신당서》에는 7척 2촌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척(1척=약 31.1cm) 또는 송척(1척=약 30.72cm)으로 환산하면 약 190cm에 해당하는 큰 체격이었다.[1]
  • 이백과의 관계: 시인 이백안사의 난 당시 영왕 린의 반역죄에 연루되어 처벌받을 위기에 처했을 때, 곽자의가 나서서 이백의 무죄를 주장하여 형량을 감경시켰다. 이는 곽자의가 젊은 시절 이백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적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1]
  • 이광필과의 관계: 안사의 난 평정에 함께 공을 세운 이광필과는 '이곽'이라는 존칭으로 불렸다. 이광필은 곽자의의 부하였으나,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강해 곽자의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곽자의는 이광필의 재능을 인정하면서도, 그가 자만에 빠지지 않도록 신중하게 대처했다.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자 곽자의는 이광필을 장수로 추천했고, 이광필은 곽자의의 깊은 뜻을 깨닫고 함께 난을 진압하는 데 힘썼다.[1]
  • 관대한 인품: 곽자의는 관대한 인품으로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출정하고 귀환할 때마다 황제가 직접 맞이하는 등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구당서》에는 "권세가 천하를 기울일 만 하였음에도 조정은 그를 꺼리지 않았고, 공적은 한 시대를 덮었음에도 주군은 의심하지 않았으며, 그의 사치함이 사람의 욕망을 다하였음에도 군자들은 이를 죄라 하지 않았다"라는 최고의 찬사가 기록되어 있다.[1] 곽영공(郭令公)이라 불리며 한족뿐 아니라 위구르인들에게도 존경받았다.[1]
  • 무덤 도굴 사건: 곽자의의 아버지 무덤이 파헤쳐지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사람들은 평소 곽자의에게 불만이 많았던 환관 어조은의 짓이라고 의심했다. 곽자의는 "제가 군대를 이끌면서 군령을 엄하게 하지 못해 벌어진 일"이라며, "하늘이 제게 내린 벌"이라고 겸허하게 대처했다.[1]
  • 지나통사의 평가: 지나통사에는 "자의는 공훈과 덕망이 모두 높아... 당실은 그 몸 덕분에 안위를 얻은 것이 거의 30년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1]
  • 부마 곽애와의 일화: 곽자의의 여섯째 아들 곽애는 대종의 딸 승평공주와 혼인했다. 곽애가 대종의 생일에 공주가 참석하지 않은 것에 화가 나 "내 아버님은 언제든지 천자가 되실 수 있는 분"이라고 말실수를 하자, 대종은 곽자의를 위로하며 부부 싸움에 개입하지 않았다. 곽자의는 아들을 직접 매질하며 훈계했다. 이 이야기는 경극 《취타금기》의 원형이 되었다.[1]


타이베이에 있는 곽자의 기념관


많은 역사가들은 곽자의를 안사의 난을 진압하고 당나라를 구한 인물로 평가한다. 그의 외교적 노력은 위구르와의 동맹 관계를 회복하는 데 기여했고, 이는 토번에 대한 군사 작전에 큰 도움이 되었다. 곽자의의 활약 이후, 토번은 군사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아시아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했다.

곽자의는 이백을 역모죄로부터 구출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곽자의는 자신의 관직을 걸고 당 숙종에게 이백의 목숨을 간청했다. 결국 당 숙종이백의 형을 유배로 감형했고, 곽자의는 자신의 관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13]

곽자의의 후손 중에는 칭기즈칸이 중용한 장군 곽보옥과 몽골 제국의 장군 곽간 등이 있다. 특히 곽간은 바그다드 포위 공격 (1258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14][15][16]

곽자의는 『중서령고이십사』를 저술했다.

4. 1. 긍정적 평가

안사의 난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이광필(李光弼)과 함께 “이곽(李郭)”이라 불렸다. 곽자의는 관후한 인품으로 황제는 물론 당나라 백성, 국외 유목민,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받았다. 출정하고 귀환할 때마다 황제가 직접 맞이하는 등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1]

구당서(舊唐書)에는 다음과 같은 최고의 찬사가 기록되어 있다.[1]

: “권세는 천하를 기울게 할지라도 조정은 꺼리지 않았고, 공훈은 한 시대를 덮을지라도 주상은 의심하지 않았다. 사치는 인욕을 극에 달하게 할지라도 군자는 그것을 죄로 여기지 않았다.”

곽령공(郭令公)이라 불리며, 위구르인 등 여러 다른 민족으로부터도 경외심을 가지고 대우받았다.[1]

지나통사(支那通史)에는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1]

: “자의(子儀)는 공훈과 덕이 모두 높아, 사도(司徒) ・ 중서령(中書令), 분양왕(汾陽王)이 되었고, 관내(關內), 하동(河東)의 부원수(副元帥)로서 화중(河中)이나 빈주(邠州)에 주둔하였다. 대종(代宗)의 예우가 두터웠고, 참소를 당하지 않았다. 조정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이(夷)와 하(夏)가 모두 그 위명에 복종하였다. 당실(唐室)이 그를 안위의 근본으로 삼은 것이 거의 30년이나 되었다. 덕종(德宗)은 그를 상부(尙父)로 존숭하였다. 건중(建中) 2년(781년)에 죽었다. 여덟 아들과 일곱 사위 모두 현달하였고, 장사(將佐)와 명신(名臣)이 된 자가 매우 많았다.”

신당서 열전에는 곽자의의 부귀와 장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1]

: “(곽자의의 저택은) 친인리(親仁里)(장안의 방리 가운데 하나)의 1/4을 차지하고 부지 안에도 긴 골목이 지나갔으며, 항시 3천여 명의 가인(家人)이 드나들었음에도 너무도 넓었기에 자의가 어느 건물에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하사받은 전답과 아름다운 기물, 이름난 정원과 저택의 수는 셀 수도 없었다. 대종이 그의 이름(휘)를 입에 담지 않고 늘 「대신(大臣)」으로 불렀으며, 몸으로 천하의 안위를 다하기를 20년이었고 그 사이에 《중서령고(中書令考)》 24편을 지었다. 여덟 명의 자식과 일곱 명의 사위가 모두 조정에서 귀하고 현달하였는데, 내손(친손자)과 외손 합쳐 수십 인에 이르러, 모두의 얼굴과 이름조차 다 기억하지 못해 문안드리러 왔을 때조차 그저 『오냐오냐』하고 끄덕일 뿐이었다.”

이백(李白)이 안사의 난에서 숙종의 동생인 영왕(永王) 린(璘)을 따랐다가 영왕이 반역죄로 처벌되자 그의 신하로서 구금되고 죄를 받게 되었을 때, 곽자의가 나서서 이백의 무죄를 호소하여 사형죄에서 유배죄로 처벌이 경감되었다. 이는 곽자의가 청년 시절 이백 덕분에 목숨을 건진 일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1]

763년 토번 군대 10만 명이 당나라를 침략했을 때, 당 현종은 장안 함락이 임박해짐을 알고 11월 16일 장안을 탈출했다. 토번군은 장안에서 이승홍(李承宏)을 당나라 황제로 옹립했지만, 당군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한 달 만에 후퇴했다. 곽자의는 기병 정찰대에게 적이 볼 수 있는 곳에 불을 지르고 후퇴하도록 명령했고, 장안 시민들에게 징을 치고 불을 피우도록 비밀리에 지시했다. 이러한 행동에 혼란을 느낀 토번군은 곽자의가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공격해 온다는 소문이 퍼지자 당황하여 흩어졌다. 토번군이 후퇴함으로써 침략은 양측 모두 피해 없이 종결되었다. 많은 중국 군사 사학자들은 이 승리를 손자(孫子)의 "양측 모두 손실 없이 승리자에게 원하는 결과를 가져다주는 전쟁"이라는 최고의 전투 사례로 여긴다. 곽자의가 파견한 기병의 수에 대해서는 차이가 있는데, 중국 자료는 곽자의가 13명의 정찰병만 보냈다고 명시하지만, 토번 자료에는 200명이었다고 나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번군은 후퇴했고, 곽자의가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장안에 도착하자 현종은 그에게 "경(卿)을 일찍 쓰지 않아 이런 지경에 이르렀다."라고 말했다.[1]

4. 2. 부정적 평가

주어진 원문은 곽자의의 부정적 평가보다는 긍정적 평가에 가까운 내용이다. 따라서, 해당 섹션에 원문의 내용을 직접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원문에 따르면, 764년 곽자의는 티베트 제국의 7만 명 군대의 침입을 검남에서 엄무 절도사의 도움으로 격퇴하였다.

5. 전설

郭子儀|곽자의중국어는 대종 대력 연간 초, 하중에 진을 치고 있을 때 중병에 걸렸다. 삼군은 그 사실을 매우 걱정했고, 만약 전장에서 죽게 되는 일이라도 생길까 두려워했다. 그 소식을 들은 곽자의는 의원과 참모였던 왕연창, 조혜백, 엄영 등을 불러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무관으로 삭방의 삭막한 땅에 종군했던 젊은 시절, 식사를 마치고 은주로 향하던 길목 십수 리 지점에서 해가 저물었고, 바람으로 모래먼지가 날려 짐의 위치도 알 수 없게 되었다. 간신히 길가의 폐가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밤이 깊어졌을 때, 갑자기 주위가 붉은 빛으로 휩싸였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한 대의 가마가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오고 있었는데, 수놓은 발 안에는 한 여인이 타고 있었다. 곽자의는 여인에게 절을 하고 "오늘은 칠월칠일이므로, 분명 하늘의 직녀(직녀성)께서 지상에 내려오신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제가 장수와 부귀를 얻을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

그러자 여인은 미소 지으며 "크게 부유해지고 크게 출세할 것이며, 또 장수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말을 마치자 다시 천천히 하늘로 올라갔고, 그 사이 내내 곽자의를 바라보았으며, 한참 후에야 마침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후 곽자의는 공을 세워 출세하여 위명이 빛나는 존재가 되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전군 모두 일제히 축하하고 기뻐했다. 그 후, 곽자의는 인신의 극치에 이르러 태위, 상서령, 상부에 임명되어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17]

민간 전승에 따르면, 옥황상제는 곽자의가 국가를 수호하고 백성에게 행복을 가져다준 행동에 매우 기뻐하여 하늘의 관리를 보내 그의 가장 큰 소망이 무엇인지 물었다. 곽자의는 오랫동안 싸워 많은 유혈 사태를 목격했기에, 그가 원하는 것은 평화와 행복뿐이라고 대답했다. 보상으로 옥황상제는 곽자의를 천국으로 인도하여 "번영과 행복의 신"이라는 천상의 직책을 수여했다.

6. 문화적 영향

곽자의는 관료로서 성공적인 삶을 살았고 장수를 누렸으며, 자손들 또한 번창하여 세속의 복을 모두 누린 인물로 여겨진다. 후대에 부귀와 공명의 상징이 되었으며, 조선 시대에는 그의 삶을 그린 《곽분양행락도(郭汾陽行樂圖)》라는 병풍이 크게 유행했다. 이 병풍은 곽자의와 같은 부귀와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은 공예품으로, 현재 한국에는 20점 정도가 남아 있다.

많은 역사가들은 곽자의를 안사의 난을 진압하고 당나라를 구한 인물로 평가한다. 그의 활약은 당나라가 위구르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훗날 당나라가 티베트 제국에 맞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곽자의가 티베트를 여러 차례 격파한 이후, 티베트는 군사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아시아에서의 정치적 영향력을 크게 잃었다.

757년경, 곽자의는 시인 이백이 역모죄로 처벌받을 위기에 처하자 자신의 관직을 걸고 그를 구명했다. 당 숙종은 이백의 형을 유배로 감형하고 나중에 사면했으며, 곽자의는 관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13]

곽자의의 후손 중에는 칭기즈 칸에게 중용된 곽보옥(郭寶玉)과 몽골 제국의 장군 곽간(郭侃) 등 뛰어난 장군들이 있었다. 특히 곽간은 1258년 몽골의 바그다드 포위 공격[14][15][16]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여 아바스 왕조 멸망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곽자의는 동아시아의 여러 예술 작품에서 주요 소재로 등장했는데, 다음과 같다:

작가작품명제작 연도소장처
마루야마 오우쿄(円山応挙)곽자의도 붙방 그림(郭子儀図襖絵)1788년효고현 가미정 고야마산 진언종 거주산 다이조지 (중요문화재)
마루야마 오우쿄(円山応挙)곽자의 축하 그림(郭子儀祝賀図)1775년미쓰이 문고
노무라 가이도(野村芥堂)곽자의(郭子儀)1899년교토 시립예술대학
타무라 소우리츠(田村宗立)곽자의상(郭子儀像)1858년교토 시립예술대학
야에가시 토요사와(八重樫豊澤)남극수성·곽자의(南極寿星・郭子儀)이와테 현립박물관
타카무라 코운(高村光雲)곽자의(郭子儀)고단샤 노마 기념관(講談社野間記念館)
테이 슌가쿠(鼎春嶽)곽자의도(郭子儀図)도쿄 국립박물관
시바타 제신(柴田是真)곽자의도(郭子儀図)묘신사(妙心寺) 탑두 다이유인객전(교토부 지정 문화재)



7. 한국과의 관계

곽자의는 관료로서 성공적인 삶을 살았고 장수를 누렸을 뿐만 아니라 자손들 또한 번창하여 세속에서의 복을 마음껏 누린 인물로서 후대에 부귀공명의 상징이 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이러한 곽자의의 삶을 병풍으로 형상화한 《곽분양행락도》라는 병풍이 크게 유행했는데, 곽자의와 같은 부귀와 장수를 염원하는 길상의 의미가 담긴 공예품으로서 현재 한국에 20점 정도의 《곽분양행락도》가 남아 전하고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兩千年中西曆轉換 http://www.sinica.ed[...] 2008-06-15
[2] 문서 Wu, 59
[3] Dissertation Negotiating Belonging: The Church of the East's Contested Identity in Tang China https://utd-ir.tdl.o[...] The University of Texas at Dallas 2019-05-01
[4] 학술지 Silk Road Christians and the Translation of Culture in Tang China https://cambridge.or[...] Published online by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7-05-26
[5] 문서 Translation by Max Deeg, 'A Belligerent Priest: Yisi and His Political Context', in Tang and Winkler, eds, From the Oxus River, 109–10 (with typographical corrections and with slight modifications based on Eccles and Lieu, 'Stele on the Diffusion of the Luminous Religion'); text and punctuation follows Pelliot, L'Inscription nestorienne.
[6] 서적 From the Oxus River to the Chinese Shores: Studies on East Syriac Christianity in China and Central Asia LIT Verlag Münster 2013
[7] 학술지 The Rhetoric of Antiquity. Politico-Religious Propaganda in the Nestorian Steleof Chang'an 安長 2007
[8] 웹사이트 https://mobile.twitt[...] 2021-01-06
[9] 서적 Persian Christians at the Chinese Court: The Xi'an Stele and the Early Medieval Church of the East https://books.google[...] Bloomsbury Publishing 2018
[10] 학술지 Jingjiao under the Lenses of Chinese Political Theology 2019
[11] 서적 Rooted in Hope: China – Religion – Christianity Vol 1: Festschrift in Honor of Roman Malek S.V.D. on the Occasion of His 65th Birthday Routledge 2017
[12] 뉴스 Christmas Celebrated in Ancient China Over 1000 Years Ago? http://chinachristia[...] 2019-12-24
[13] 문서 Wu, 61
[14] 학술지 1. Guo Kan: Military Exchanges between China and the Middle East 2020
[15] 웹사이트 Florence Hodous | Semantic Scholar https://www.semantic[...]
[16] 웹사이트 Florence Hodous | Independent Scholar – Academia.edu https://independents[...]
[17] 서적 「李白 漂泊の詩人 その夢と現実」(書物誕生 あたらしい古典入門)p63-64 金文京 岩波書店 2012年10月24日第1刷発行 岩波書店 2012-10-24
[18] 서적 『[[本藩人物誌]]』
[19] 문서 지금의 중국 [[섬서성]](陝西省) 화현(華縣)이다.
[20] 문서 음서제도. 즉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공적으로 관직에 오르는 것.
[21] 문서 무과. 관료(특히 문관)를 선발하는 과거 시험과 마찬가지로 무관을 뽑기 위한 시험.
[22] 문서 《신당서》 곽자의전에 「무거에 이등(異等)함으로서 좌위장사(左衛長史)로 보임되었다」 , 또는 서송(徐松)이 찬하고 맹이동(孟二冬)이 보정한 『등과기고보정(登科記考補正)』권27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23] 문서 구를 「구邱」로 쓴 것도 있다.
[24] 문서 《신당서》 가서한전(哥舒翰傳) 「처음, 안사순은 녹산이 반드시 반역을 일으킬 것이라 일찍부터 황제를 위해 말한 바가 있어 연좌를 면하였다.」
[25] 문서 오감(五監)의 하나로 위위시(衛尉寺)의 장관. 관품은 종3품.
[26] 문서 《신당서》열전에는 곽자의에게 여덟 아들과 일곱 사위가 있었다고 했으며, 부인 왕씨의 신도비(神道碑)에는 여덟 딸을 두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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