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즈엉녓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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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즈엉녓레는 1369년 쩐 유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쩐 왕조의 황제이다. 배우 즈엉크엉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쩐 명종의 아들인 공숙왕 쩐응우옌죽의 양자가 되어 쩐씨 성을 받았다. 유종이 후사 없이 죽자 외척의 지지로 즉위했으나, 헌자황태후를 독살하고 향락에 빠져 종실과 백관들의 반발을 샀다. 1370년 쩐 예종에 의해 폐위되어 살해되었고, 후세에는 찬탈자로 평가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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즈엉녓레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혼덕공
한자 표기昏德公
즈엉녓레 (Dương Nhật Lễ/楊日禮)
다른 이름쩐녓끼엔 (Trần Nhật Kiên/陳日熞)
통치 정보
작위대월 황제
왕조쩐 왕조
재위 기간1369년 - 1370년
즉위일다이딘(大定) 원년 음력 6월 15일 (1369년 7월 18일)
폐위일티에우카인(紹慶) 원년 음력 11월 26일 (1370년 12월 14일)
연호다이딘(大定) 1369년 ~ 1370년
전임자쩐 유종
후임자예종
생애
출생불명
사망일1370년 12월 1일
사망 장소탕롱, 대월
매장지다이몽 산, 대월
아버지즈엉크엉 (楊姜), 쩐응우옌죽 (陳元昱)
배우자폐황후 진씨
자녀후사 없음
기타
왕조쩐 왕조
묘호없음
시호없음
절후혼덕공 (Hôn Đức Công/昏德公)

2. 생애

즈엉녓레는 배우 양강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어머니가 공숙왕 쩐응우옌죽(진원욱)의 눈에 들어 그의 아들로 입적되었다. 1369년 유종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헌자태후의 지지로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즈엉녓레는 다이딘으로 연호를 정하고 의붓아버지를 황태백으로 높였다. 그러나 헌자태후를 독살하고 정사를 돌보지 않으며 향락에 빠지는 등 폭정을 일삼았다. 심지어 쩐씨에서 원래 성인 즈엉씨로 돌아가려 하자, 1370년 예종 등이 반란을 일으켜 즈엉녓레를 폐위하고 그와 아들 즈엉리에우를 몽둥이로 쳐서 죽였다.

후대 베트남 사관들은 즈엉녓레를 쩐 왕조의 찬탈자로 간주하며 그의 재위 기간을 인정하지 않는다. 《대월사기전서》도 그의 재위 기간을 본기에 넣지 않고, 〈유종본기〉(裕宗本紀) 뒤편과 〈예종본기〉(藝宗本紀)의 앞편에 부록하였다.

2. 1. 출생과 성장

대월사기전서의 기록에 따르면 즈엉녓레는 배우 양강( Dương Khương|양강vie)의 아들이다. 즈엉녓레의 어머니가 임신했을 때, 명종의 아들 공숙왕 쩐응우옌죽(陳元昱)이 그녀의 미모를 탐하여 자신의 여자로 삼고, 즈엉녓레가 태어나자 자신의 아들로 하였다. 이에 따라 즈엉녓레는 쩐씨 성을 갖게 되었고, 쩐응우옌죽은 그를 궁중에서 친아들처럼 길렀다.[2][3][4] 즈엉녓레의 어머니 예명은 브엉 마우(왕후)였는데, 이는 그녀가 가장 자주 맡았던 역할에서 유래했다.[2]

의붓아버지 쩐 응우옌 욱은 본래 황제가 될 예정이었으나 무능하다는 이유로 명종에 의해 폐위되었고, 그의 동생 유종이 제위에 올랐다.[5]

2. 2. 즉위 과정

대월사기전서의 기록에 따르면 즈엉녓레는 우령(배우) '''양강'''(Dương Khương|楊姜vi)의 아들이다. 즈엉녓레의 어머니가 임신한 후 공숙왕 쩐응우옌죽(陳元昱)이 그녀의 미색을 좋아하여 받아들여 즈엉녓레가 태어나자 자신의 아들로 하였다. 이에 즈엉녓레의 성은 쩐씨가 되었고, 쩐응우옌죽은 그를 궁중에서 자신의 아들로 길렀다.[2][3][4]

1369년 5월 25일(6월 29일), 유종(裕宗)이 병으로 위독해졌는데 아들이 없었고, 유종은 죽기 직전에 즈엉녓레를 후계자로 지정하였다. 유종 사후에 여러 신하들이 쩐 왕조의 황통을 단절시키는 것이라며 극력 반대하였으나, 외척들의 지지를 받았다. 이러한 결정은 후세 사관들에게 맹렬한 비판을 받았다.[6]

6월 15일(7월 18일), 헌자황태후(憲慈皇太后)는 여러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즈엉녓레를 입궁시켜 즉위하도록 하였다. 대월사기전서에 의하면 헌자황태후는 공숙왕 쩐응우옌죽이 명종(明宗)의 적장자이나 일찍 죽어 황위를 계승할 수 없었으므로, 쩐응우옌죽의 아들 즈엉녓레가 황위를 계승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여겼다.[2][8] 즈엉녓레는 즉위한 뒤 다이딘(大定)으로 개원하였고, 공숙왕 쩐응우옌죽을 '''황태백'''(Hoàng Thái Bá|皇太伯vi)으로 높였다.

2. 3. 폭정과 폐위

1369년 5월 25일(6월 29일), 유종이 병으로 위독해졌는데 아들이 없었다. 유종은 죽기 직전에 즈엉녓레를 후계자로 지명하였다. 유종 사후에 여러 신하들이 반대하였으나, 외척들의 지지를 받았다.[6] 이 일은 후세의 사관들에게 맹렬한 비판을 받았다.

6월 15일(7월 18일), 헌자황태후는 여러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즈엉녓레를 즉위시켰다. 즈엉녓레는 즉위 후 다이딘으로 연호를 고치고, 의붓아버지 쩐응우옌죽을 '''황태백'''(Hoàng Thái Bá|황태백vie)으로 높였다.[6]

8월, 헌자황태후와 유종의 황후인 의성황후(儀聖皇后)를 태황태후와 황태후로 올렸다. 그리고 공정왕(恭定王) 쩐푸의 딸 쩐씨를 황후로 세웠다.[6]

12월, 즈엉녓레는 즉위한 지 약 반년도 지나지 않아 헌자황태후를 독살하도록 명령했다.[2] 이후, 선황제 유종과 똑같이 정사를 돌보지 않고 매일 향락을 즐기는 암군이 되었다.

1370년 1월, 그는 심지어 원래의 성인 즈엉씨로 되돌아가고자 하였다. 이는 종실, 백관들 모두로 하여금 실망하게 하였다.

9월, 명종의 황자 태재(太宰) 쩐 응우옌 짝(Trần Nguyên Trác) 부자는 명종의 황녀 천녕공주(天寧公主)의 두 아들과 함께 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18명이 살해되었다. 즈엉녓레의 장인 쩐푸는 타강진(沱江鎮)으로 도망가서 환난을 면했다.[9]

10월, 공정왕 쩐푸는 동생인 공선왕(恭宣王) 쩐낀(陳曔), 천녕공주(天寧公主) 등과 함께 청화부(清化府)에서 병사를 일으켜 즈엉녓레를 토벌했다.[9]

11월 13일(12월 1일), 쩐푸는 즈엉녓레를 폐하여 혼덕공으로 강등시키고, 며칠 후에 황제로 즉위하니 그가 예종이다.[10][11] 11월 21일(12월 9일), 예종의 병사가 도성 탕롱(昇龍)에 이르자 즈엉녓레는 대신 쩐응오랑(陳吾郎)의 권고를 받아들여 예종에게 항복하였으나, 11월 26일(12월 14일)에 예종은 즈엉녓레와 그 아들 즈엉리에우(楊柳)를 몽둥이로 쳐서 죽이고, 대몽산(大蒙山)에 장사지냈다.[5]

후세의 베트남 사관들은 즈엉녓레의 제위를 인정하지 않고 쩐 왕조의 찬탈자로 본다. 《대월사기전서》도 그의 재위 기간을 본기에 넣지 않고, 〈유종본기〉(裕宗本紀) 뒤편과 〈예종본기〉(藝宗本紀)의 앞편에 부록하였다.

3. 평가

대월사기전서』에 따르면, 즈엉녓레의 친아버지는 배우 양강이며, 녓레의 모친이 아이를 가졌을 때 공숙왕 진원욱(명종의 아들)이 눈여겨보고 자신의 아들로 키웠다고 한다.[1]

의붓아버지 쩐 응우옌 욱은 본래 황제가 될 예정이었으나 무능하다는 이유로 명종에 의해 폐위되었고, 그의 동생 유종이 제위에 올랐다.[1] 대치 12년 (1369년)에 자식이 없던 유종이 붕어하자 후계자 문제가 발생했고, 유종의 모친 헌자태후의 지지를 받아 녓레가 즉위하게 되었다.[1]

즈엉녓레는 즉위 후, 자신을 천거한 헌자태후를 비롯하여 많은 황족들을 차례로 학살했다.[1] 또한 국정을 돌보지 않고 술과 여자에 빠져 사치를 부리는 등 무도한 행위가 많았다.[1] 게다가 성을 쩐 씨에서 원래의 즈엉 씨로 바꾸려 하자 황족과 그 지지자들은 대정 2년 (1370년)에 쿠데타를 결행했다.[1] 9월에 태재 공정왕 진원탁(유종의 형) 등이 일으킨 1차 쿠데타는 진압되었으나, 11월에 장인인 우상국 공정왕 진현(쩐 응우옌 또안의 동생)이 일으킨 2차 쿠데타는 많은 이탈자가 생겨 체포되었고, 아들 양류와 함께 처형되었다.[1]

사후 쩐 씨 일족에게 황제의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혼덕공으로 강등되었고 성을 즈엉으로 바꾸었으며, 시호도 존재하지 않는다.[1] 녓레의 불과 1년간의 치세에서 일어난 대량 학살이 쩐 왕조 멸망의 한 원인이 되었다.[1]

4. 연호

혼덕공원년2년
서력
(西曆)
1369년1370년
간지
(干支)
기유(己酉)경술(庚戌)
연호
(年號)
대정(大定)
원년
2년


참조

[1] 서적
[2] 서적
[3] 서적
[4] 간행물
[5] 서적
[6] 서적
[7] 서적
[8] 서적
[9] 서적
[10] 간행물
[11] 서적
[12] 서적
[13] 서적 The Champa Kingdom White Lotus Co., L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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