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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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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원 혜종은 1333년부터 1370년까지 원나라의 제11대 황제였다. 그는 명종의 아들로, 어린 시절 유배 생활을 거쳐 즉위했다. 즉위 후, 혜종은 정치적 혼란과 홍건적의 반란, 군벌의 대립 속에서 통치력을 잃었다. 1368년 명나라의 공격으로 수도 대도를 잃고 상도로 천도했으나, 이듬해 상도마저 함락되자 응창으로 피신했다가 그곳에서 사망했다. 혜종은 고려 출신 기황후를 총애했으며, 그의 치세 동안 과도한 개혁, 몽골 지상주의 정책, 천재지변 등으로 인해 민심이 이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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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혜종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황제 혜종의 중국화
혜종 (중국화)
이름토곤 테무르
묘호혜종(惠宗)
시호순황제(順皇帝)
칸 호칭 (리투아니아어)Toγon Temür
칸 칭호 (리투아니아어)Uqaγatu Qa'an
칸 전체 칭호 (리투아니아어)Uqaγatu Toγan Temür Qaγan
칸 전체 칭호 (리투아니아어)Toγan Temür Uqaγatu Qaγan
칸 칭호 (한국어)우카가투 카안
휘 (한국 한자음)타환첩목아(妥懽帖睦爾)
통치
즉위1333년 7월 19일
퇴위1370년 5월 23일
대관식1333년 7월 19일, 대도
연호지순(至順): 1333년
원통(元統): 1333년–1335년
지원(至元): 1335년–1340년
지정(至正): 1341년–1370년
몽골 제국에서의 역할제15대 카안(명목상, 제국 분열로 인해)
원나라에서의 역할제11대 원나라 황제
북원에서의 역할북원 황제 (1368년 – 1370년)
중국에서의 역할황제 (1333–1368)
선대 및 후대
원나라 황제전임: 린친발 칸
후임: 자신 (북원 황제로서)
북원 황제전임: 자신 (원나라 황제로서)
후임: 빌리크투 칸 아유르시리다라
중국 황제전임: 린친발 칸
후임: 홍무제(명나라)
개인 정보
출생1320년 5월 25일
사망1370년 5월 23일
사망 장소잉창, 북원
아버지쿠투크투 칸 쿠살라
어머니카를루크의 마이라이다크
종교티베트 불교
가족 관계
배우자다나슈리(1333년 결혼, 1335년 처형)
바얀 쿠투크(1337년 결혼, 1365년 사망)
기황후(1365년 결혼, 1370년 사망)
자녀아유르시리다라, 토구스 테무르
왕조 및 가문
왕가보르지긴 가문
왕조원나라(1333–1368), 북원(1368–1370)

2. 생애

1329년 아버지 쿠살라가 차가타이 한국에서 원나라로 귀국할 때 함께 귀국했다. 그러나 아버지 쿠살라가 황제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아 엘테무르에게 독살당했다. 1330년 4월 20일 엘테무르는 명종의 정후 바부샤 카툰을 처형하고, 토곤 테무르를 명종의 친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고려대청도로 유배보냈다.[24]

2. 1. 생애 초반

1329년 아버지 쿠살라가 차가타이 한국에서 원나라로 귀국할 때 함께 귀국했다. 그러나 아버지 쿠살라가 황제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아 엘테무르에게 독살당했다. 1330년 4월 20일 엘 테무르는 명종의 정후 바부샤 카툰을 처형하고, 토곤 테무르를 명종의 친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고려대청도로 유배보냈다.[24]

2. 1. 1. 출생과 생애 초기

1320년 5월 25일 중앙아시아에 머물고 있던 쿠살라(후일의 원 명종)와 투르크계 카를룩족의 추장 테무스루의 딸 카를룩 말리아타리(邁來迪) 사이에서 태어났다.[5] 《원사연의》에서는 그의 이복동생 이린친발을 적자라 했고, 토곤 테무르에 대해서는 적자라는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의 이름 '토곤 테무르'는 중세 몽골어로 '철 가마', '철 냄비'를 뜻했다. '타간테무르'(托歎特穆爾), '수간테무르'(妥歡帖木耳)로도 불린다.

1307년 혜종의 아버지 쿠살라의 숙부였던 인종 아유르바르와다는 자신의 형이자 토곤 테무르의 조부였던 무종 카이산이 그에게 제위를 양보하는 대신, 자신이 죽은 후 형의 아들을 차기 황제로 세우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뒤에 약속을 어기고, 윈난성으로 쿠살라를 추방했다. 숙부인 인종으로부터 암살 위협을 느낀 쿠살라는 윈난성에 유배가는 도중 탈출하여, 중앙아시아의 차가타이 한국으로 망명했다.

혜종의 어머니 카를룩 말리아타리는 군왕 아르슬란(阿兒厮蘭)의 후손으로 투르크계 카를룩족의 추장 테무스루의 딸이었다. 카를룩씨는 한때 원나라에 투항한 남송 공제의 첩이었으나, 공제 사후, 혹은 공제가 불교 승려가 된 후 어느 시점엔가 중앙아시아로 귀환했다. 따라서 토곤 테무르가 명종 쿠살라의 친아들이 아니고, 공제의 사생아라는 소문이 시중에 유포되었다.[5] 이에 일부 몽골인들은 명 성조 영락제에 대해 주원장의 친아들이 아니라 명나라가 북경을 함락시킨 뒤 몽골 황후 출신의 여성에게서 태어난 아들이라며 비슷한 이야기를 유포했다. 영락제가 몽골 황후의 아들이라는 설은 17세기 몽골의 사서 《알탄 톱치》의 <몽골 연대기>에도 수록되었다.

혜종이 명종의 진짜 아들이 아니라는 시중의 소문을 사관 우집(虞集)과 마조상(馬祖常)이 사서에 그대로 기록했다. 황제 즉위 후 이 사실을 알게 된 혜종은 분노하여 우집과 마조상을 찾아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토크토아의 극력 만류로 중단했다.

토곤 테무르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상세히 전해지지 않는다. 토곤 테무르는 티베트 불교의 신자였고, 카르마파 랑중 도르제 3세의 제자였으며 불교 탄트라를 수행했다. 훗날 랑중 도르제 3세는 그의 즉위식에 참석하려고, 대도(현, 베이징시)를 방문하기도 했다. 카를룩족은 칭기즈 칸의 친인척도 아니었고, 몽골족이 아닌 투르크계 부족이었다. 토곤 테무르는 몽골 귀족들로부터 출신 가문이 별로 좋지 않은 것으로 취급되었다.

1329년 차가타이 한국에 망명 중이던 아버지 쿠살라원나라로 귀국할 때, 따라서 귀국했다. 1328년 원나라의 대도파 귀족들은 몽골고원파 진왕 계열 황제에게 반기를 들고(양도 전쟁), 그해 10월 16일 무종 카이산의 군인 측근들과 연락해, 카이산의 아들 중 한 명을 황제로 세우기로 약속했다. 이들은 대도 근처에 있었던 투그 테무르를 황제로 추대했지만, 곧 투그 테무르의 형이자 무종의 장남이었던 쿠살라가 대군을 이끌고 대도로 왔다. 토곤 테무르의 숙부 투그 테무르는 자신의 형이자 토곤테무르의 아버지였던 쿠살라에게 제위를 양보했다.

1329년 4월 아버지 쿠살라가 황제가 되었지만 그해 8월 동생 투그 테무르를 만나러 가던 중 엘테무르에 의해 독살되었다(천력의 변). 문종 투그 테무르는 형인 명종 쿠살라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쿠살라의 아들 중 한 명을 황태자로 삼으려 했다. 1329년 8월 킵차크 출신 권신 엘테무르는 토곤 테무르가 원 명종 쿠살라의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추방했고, 3세의 어린 린친발을 황태자로 책봉했다. 어린 황제가 조종하기 쉬울 것이라 보고, 린친발을 선택했던 것이다.

1329년 태자 패랄이 고려 대청도에 유배되었다가 그해 3월 29일 원나라 황제에 의해 소환된 기사가 《고려사》에 전해진다. 이 패랄 태자가 토곤 테무르와 동일인인지 여부는 알려진 것이 없다. 이듬해인 1330년 4월 토곤 테무르는 같은 대청도로 유배되었다.

토곤 테무르는 1자왕, 2자왕의 작위도, 군왕의 작위도 받지 못했다. 1330년 4월 20일 엘 테무르는 명종의 정후 바부샤 카툰을 처형하고, 토곤 테무르는 명종의 친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탄핵을 유도하여, 고려대청도로 유배보냈다.[24] 엘테무르는 자신의 딸 다나슈리를 토곤 테무르와 결혼시켰으나 명종을 독살한 장본인이었기 때문에, 토곤 테무르가 이를 추궁할까 의심하며 항상 경계했다. 고려에서는 토곤 테무르가 계모의 핍박을 받고 유배온 것으로 소문이 생성되어 유포되었다.

2. 1. 2. 유배 생활

1328년 양도 전쟁 이후 아버지 쿠살라가 원나라 황제로 즉위했으나, 곧 동생 투그 테무르에게 독살되었다. 1329년 권신 엘테무르는 토곤 테무르가 쿠살라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추방했고, 1330년 4월 고려 대청도로 유배 보냈다.[24] 엘테무르는 자신의 딸 다나슈리를 토곤 테무르와 결혼시켰으나 명종을 독살한 장본인이었기 때문에, 토곤 테무르가 이를 추궁할까 의심하며 항상 경계했다.

대청도 유배 시절, 도금한 불상 하나를 봉안하고 매일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전해지며, 훗날 황해도 해주에 신광사(神光寺)라는 사찰을 짓기도 했다.[24] 옹진군 백령도의 전설과 조선조의 사서 《택리지》에 의하면 토곤 테무르의 꿈에 부처가 나타나 집을 지어주면 제위에 오르게 해주겠다고 현몽하여 불상을 봉안했다고 한다. 1330년 무렵 토곤 테무르는 고려인 공녀 출신인 기씨를 첩으로 받아들였다. 기씨는 1320년 무렵 고려에서 조공으로 바쳐진 여성들 중 한 명이었다.

1331년 12월 호광행성중서성의 정강부(静江府, 현 광시 성 계림)로 이배되었다가, 다시 광시 성으로 추방되었다. 이때 그는 광시 성의 한 사찰의 주지에게서 한인(漢人) 아동과 같이 글을 배웠다.[25]

2. 2. 즉위 과정

1329년 9월 2일 문종이 붕어하자, 토곤 테무르의 이복 동생인 린친발 태자가 제위를 계승했다. 권신 엘 테무르는 토곤 테무르의 즉위를 반대하고, 문종 투그 테무르의 아들 엘 테구스를 새 황제로 옹립하려 했다. 그러나 투그 테무르의 황후 부다시리 카툰은 엘 테무르의 권세가 커지는 것과, 아들이 권력투쟁에 시달리는 것을 걱정해 이를 거절했다. 부다시리 카툰은 선제 문종이 전전 황제 쿠살라의 아들을 후계자로 정하라고 한 유언을 근거로 엘테무르의 엘 테구스 추대를 계속 거절했다.[24][25]

1332년 문종이 죽자 황후 부다시리는 그의 유지를 따라 명종의 아들을 카안으로 추대할 것을 제안하였고, 대도에 머물던 토곤 테무르의 동생 린친발이 즉위했으나, 불과 두 달 만에 죽었다. 문종 즉위 이후 정권을 장악했던 엘 테무르는 문종의 차남 엘 테구스를 추대하려 했으나, 그의 어머니 부다시리가 엘 테구스가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토곤 테무르를 추천했기 때문에, 부다시리에 의해 토곤 테무르가 광서에서 소환되었다.[24]

12월 14일 영종 린친발이 갑자기 붕어했다. 엘테무르는 부다시리 카툰을 움직여 엘 테구스를 대칸으로 옹립하려고 했으나, 이번에도 부다시리 카툰은 선제 문종의 유조를 이유로 아들의 제위 계승을 사양했다. 당시 군권을 장악한 권신이었던 엘 테무르는 토곤 테무르가 부황 쿠살라를 독살한 것에 대해 앙심을 품고 있다고 보아, 그의 즉위를 반대했다. 하지만 부다시리 카툰은 토곤 테무르를 소환했다. 1333년 2월 토곤 테무르는 린친발 칸의 사망 소식을 듣고 대도로 올라오려 했으나 엘테무르가 말과 수레 이용을 금지하여, 그의 상경을 저지했다.[26]

엘 테무르에 대한 명종 독살설도 있는데, 이미 13세가 된 토곤 테무르가 카안으로 즉위하면 자신의 정치적 권력이 약화될 것을 두려워하여 그의 즉위를 방해했기 때문에, 토곤 테무르가 대도에 도착한 후에도 약 반년 동안 즉위가 연기되었고, 지순 4년(1333년) 봄, 엘 테무르의 죽음으로 마침내 6월 8일에 즉위할 수 있었다.[26]

원나라는 인종 아유르바르와다가 죽은 뒤부터 1333년 토곤 테무르가 즉위할 때까지 13년간 7명의 황제가 차례로 교대하는 이상 사태를 겪었다. 다수의 황족이 제위를 둘러싼 항쟁 끝에 쓰러진 뒤, 광시에서 추방생활을 보내던 토곤 테무르가 즉위함으로써 겨우 제권이 안정되었다.

3. 재위 기간

1340년 혜종은 메르키트 바얀의 조카 토크토아와 손잡고 쿠데타를 일으켜 바얀을 축출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이후 토크토아를 중심으로 개혁 정치를 추진했으나, 잦은 권력 다툼과 자연재해, 전염병 등으로 혼란이 계속되었다.

1340년부터 과거 시험을 다시 시행하고, 1343년부터 토크토아를 시켜 《요사》, 《금사》, 《송사》 등 세 개의 사서 편찬을 주관하여 1345년에 완료했다.

1348년 절강의 방국진이 해상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차례로 반란이 일어났다. 1351년 5월에는 백련교가 중심이 된 홍건적이 한산동, 유복통의 주도로 봉기했다.[28] 이들은 한산동을 송 휘종의 후손이라 칭하고 황제로 추대하며 반란을 일으켰으나 조정은 곧 군사를 보내 진압했다. 그해 혜종은 자이루(賈魯)를 등용했다. 이어 중서성 좌승상으로 승진시켰으나, 자이루는 2년만에 갑자기 병사했다.

1340년 혜종은 문종 투그 테무르가 자신의 아버지 명종 쿠살라를 독살했다고 선언하고, 그해 6월 14일 그의 위패를 태묘에서 철거하고 출향했다.

1348년, 현재의 신장 지역인 차가타이 칸국 동부 지역의 유력 가문인 두글라트(Duglaht) 부에서 투글루크 티무르를 칸으로 옹립하면서 차가타이 칸국이 동•서로 분열되었다. 동차가타이 칸국(모굴리스탄 칸국)의 초대 칸이 된 투글루크 티무르는 잠시 분열된 차가타이 칸국을 통합하고, 여러 부족의 아미르들을 격파하기도 했지만, 이 일시적인 통합은 그가 죽은 1363년에 붕괴되었다. 중앙아시아는 이미 원 무종 카이산 칸 사후 사실상 독립국가화된 상태였다.

즉위 초반부터 혜종은 각지에 운하 건설을 추진하여 농민들을 부역시켰고, 이는 반발을 불러왔다.

한편 고려기황후는 조정의 권력을 장악하려 했고, 자신의 아들을 황태자로 세우려고 했다. 이에 아들 아유르시리다르는 점점 조정의 권력을 장악하려고 시도했다.

3. 1. 즉위 초반의 정치

1333년 5월 엘 테무르가 사망하자, 6월 8일 상도 대안각에서 황제로 즉위하였다.[24] 그러나 엘 테무르 사후, 메르키트 바얀 세력과 엘 테무르의 아들 텡기스 세력이 조정의 권력을 놓고 대립했다. 1334년 메르키트 바얀은 과거 시험을 폐지했는데, 이는 그가 몽골 지상주의자였기 때문이다. 1335년 메르키트 바얀의 세력이 강해지자, 엘 테무르의 아들인 중서성 좌승상 텡기스와 타라카이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 1335년 6월 혜종은 아스트 친위대 사령관 메르키트 바얀을 중서성 우승상에 임명하여 텡기스 등의 반란을 진압하게 했고, 이로 인해 바얀은 황제를 능가하는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24] 텡기스 일파의 반란 진압 후, 혜종은 메르키트 바얀의 요구대로 과거 제도를 폐지했다. 1335년 7월, 바얀을 우승상에 임명한 바얀은 한림원을 폐쇄하고, 과거 제도를 폐지하는 한편, 몽골 지상주의 정책과 한인 억압 정책을 실시해 한족들의 반발을 샀다.[6]

즉위 직후 혜종은 문종의 아들 엘 테구스를 황태자에 책봉하고, 부다시리 카툰을 후견인으로 정했다. 그러나 1340년 기황후에게서 아들 아유르시리다르 빌레그트가 태어났다.

1336년 혜종은 바티칸의 로마 교황청을 서유럽의 대표로 보고 사신을 보냈고, 이들은 1338년 5월 프랑스 아비뇽에 도착, 교황 베네딕토 12세에게 두 통의 편지 서신을 전달하고 귀국했다. 1336년 여름 원나라 조정은 재정 위기에 직면했고, 혜종은 세금 인상 및 소금에 부과하는 세금 인상으로 이를 극복하려 했다. 이는 중국 지역 한족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중화 지역의 기근, 가뭄, 홍수가 계속되었고, 세금 인상과 소금세 인상에 대한 한족들의 반발은 점점 심해져갔다.

혜종은 성인이 되면서 메르키트 바얀의 전횡에 반발했다. 1340년 2월, 혜종은 메르키트 바얀의 조카인 메르키트 토크토아와 협력, 쿠데타를 일으켜 바얀을 광둥 성으로 유배보내고 그 권력을 빼앗았다.[27] 이후 원나라 궁정은 거의 군벌의 내부 항쟁에 의해 움직이게 되었다. 권신 바얀을 축출한 후, 그해 6월 부다시리 카툰과 황태자 엘 테구스를 제거하여 유배보냈다가 유배가던 도중에 사사했다. 일설에는 부다시리 카툰엘 테구스를 유배보낸 것은 메르키트 바얀의 뜻이라는 설도 있다.

혜종은 메르키트 바얀의 권력을 빼앗았으나 바얀의 측근들은 토크토아와 그의 아버지 마자르타이의 편에 서게 되었고, 토크토아는 곧 제국의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메르키트 바얀을 추방한 후 혜종은 한족 문사들을 등용하고, 연호를 지정(至正)으로 고쳤다. 성인이 된 대칸의 권력을 둘러싼 대립이 더해져 1344년 6월 토크토아를 일시적으로 해임시켰다. 그러나 토크토아는 복귀했고, 혜종은 진종 태정제 예순 테무르와 명종 쿠살라의 측근들을 이용해 1347년 토크토아와 마자르타이 부자를 영주(寧州)로 추방했다.[29] 토크토아가 추방당한 1347년부터 1349년까지 중앙 정국의 혼란이 계속되었다. 이 정치 혼란 속에서 어느덧 유럽에 유행하고 있던 흑사병과 비슷한 것으로 보이던 전염병이 원나라에도 유행하게 되었고, 차례로 천재지변이 농촌을 황폐화시켰다.

혜종은 몽골의 유력 부족 내에서 제2 황후를 취하는 일반적인 관행에 벗어나, 고려인 기씨를 제2 황후로 승격시키려고 했다. 궁정에서 이러한 전대미문의 고려 여성의 승격에 대한 반발이 거세지자 혜종은 일단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1340년 1월 23일 기씨가 아들 아유르시다르 빌레그트를 낳자, 아들을 낳은 것을 계기로 기씨를 제2 황후로 승격시켰다.[6]

3. 2. 중반의 개혁과 혼란

1340년 2월, 순제는 메르키트 바얀의 조카인 메르키트 토크토아와 손잡고 메르키트 바얀을 쿠데타로 축출하고 광둥 성으로 유배보냈다.[27] 혜종은 메르키트 바얀의 권력을 빼앗았으나 바얀의 측근들은 토크토아와 그의 아버지 마자르타이의 편에 섰고, 토크토아는 곧 제국의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혜종은 한족 문사들을 등용하고, 연호를 지정(至正)으로 고쳤다.[24] 토크토아는 과거 제도를 부활시켰다.[24] 또한 1343년부터 혜종은 토크토아를 시켜 《요사》, 《금사》, 《송사》 등 세 개의 사서를 편찬하게 하였고, 1345년에 완료했다.

1344년 6월 혜종은 토크토아를 일시적으로 해임시켰다.[29] 1347년 혜종은 토크토아의 권력 확장을 두려워하여, 옛 무종 카이산의 지지자들과 태정제 예순 테무르의 지지자들을 규합하여 토크토아를 탄핵하고 실각시켰다. 1347년부터 1349년까지 토크토아가 추방되면서 중앙 정국의 혼란이 계속되었다. 이 정치 혼란 속에서 흑사병과 비슷한 전염병이 원나라에도 유행하게 되었고, 연이은 천재지변으로 농촌이 황폐화되었다. 1349년, 혜종은 토크토아를 다시 복귀시켰다.[29]

1336년 여름 원나라 조정은 재정 위기에 직면했고, 혜종은 세금 인상 및 소금에 부과하는 세금 인상으로 이를 극복하려고 했다. 이는 중국 지역 한족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중화 지역의 기근, 가뭄, 홍수가 계속되었고, 세금 인상과 소금세 인상에 대한 한족들의 반발은 점점 심해져갔다. 중앙 정부내의 권력 다툼에 몰두한 권력자들은 이에 대한 유효한 대책을 충분히 실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국내는 급속히 황폐화되었고, 원나라의 차별정책 아래 놓여 있었던 옛 남송인의 불만과 상업 중시의 원나라 정책이 만들어낸 경제 착취에 괴로워하던 농민층의 궁핍 등이 원인이 되어 지방에서는 급속히 불온한 움직임이 높아져 갔다.

1348년 원나라 조정의 소금 독점에 불만을 품은 불법 소금 상인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 이후 반란이 계속 발생했다. 1348년 방국진(方国珍) 등의 해적이 해상에서 반란을 일으켜 절강성과 복건성을 점령하고, 원나라의 조세 수송선을 공격했다. 혜종은 토벌군을 보냈으나, 바다에 익숙치 않았던 토벌군은 참패하고 사령관은 포로로 잡혔다. 1351년 5월에는 백련교가 중심이 된 홍건적이 한산동, 유복통의 주도로 봉기했다.[28] 이들은 한산동을 송 휘종의 후손이라 칭하고 그를 황제로 추대하며 반란을 일으켰으나 조정은 곧 군사를 보내 진압했다.

한편 고려기황후는 조정의 권력을 장악하려 했고, 자신의 아들을 황태자로 세우려고 했다. 이에 아들 아유르시리다르는 점점 조정의 권력을 장악하려고 시도했다.

3. 3. 후반의 권력 상실과 북천

1353년 황태자 아유르시리다르는 권력을 장악하려 했고, 황제 대신 정무를 관장하던 혜종의 측근들과 충돌했다. 이 기간 동안 기황후는 세력을 더욱 키워 권력이 점점 더 커졌다. 기황후는 아들 아유르시리다르가 조정의 전권을 장악하기를 원했지만, 혜종의 측근들은 이를 반대하여 조정에서 심각한 갈등이 벌어졌다.[7] 기황후와 측근들은 아유르시리다르를 설득하여 혜종의 측근들을 타도하도록 했다. 혜종은 분쟁을 조절하지 못했고, 1355년 황제의 측근들은 기황후와 아유르시리다르의 음모로 반역자로 몰려 숙청되었다.

1355년 토크토아가 합마의 무고로 유배를 가던 중 독살당했다. 토크토아의 죽음으로 혜종은 정치에 대한 의지를 잃게 되었다. 1364년 군벌 볼라드 테무르가 대도를 점령하고 황태자를 추방했으나, 이듬해 황태자는 군벌 코케 테무르와 연합하여 볼라드 테무르를 몰아냈다. 이러한 내부 갈등은 중앙 정부의 정치적, 군사적 권력을 더욱 약화시켰다.[31]

1366년 홍건적을 붕괴시켰으나, 홍건적 출신의 주원장이 세력을 키워 1368년 난징에서 명나라를 건국했다. 1368년 명나라 북벌군에 의해 대도를 빼앗기고 상도로 천도했다.[31] 1369년 상도가 함락되자, 응창으로 피신했다.[31] 1370년 응창에서 이질로 사망했다.[31]

4. 외교 관계

1359년 혜종은 티베트 불교 카르마파 제4대 교주였던 랑중 도르제 4세를 대도로 초빙했다. 랑중 도르제 4세는 대도를 방문하여 3년간 황제의 자문으로 있으면서 중국에 많은 티베트 불교 사원을 설립했다.

4. 1. 교황청과의 관계

1336년 혜종은 바티칸의 로마 교황청을 서유럽의 대표로 보고 사신을 보냈으며, 사신은 1338년 프랑스 아비뇽에 도착하여 교황 베네딕토 12세에게 두 통의 편지를 전달했다. 같은 해 교황은 조반니 데 마리뇰리를 단장으로 하는 사절단을 베이징으로 보냈고, 그들은 3~4년간 베이징에 머물며 혜종에게 유럽산 말을 선물로 가져왔다.[13]

4. 2. 일본과의 관계

고려가 정찰 활동으로 의심되는 일본 어선을 나포하자, 고려 조정은 이를 원나라 황제 혜종에게 보냈다. 혜종은 어부들을 일본으로 돌려보냈다. 이에 답례로 아시카가 막부는 승려를 사절로 파견하여 감사를 표했다.

5. 사후

명나라는 '순천응인'(順天應人), 즉 '순순히 하늘의 뜻에 따라 물러났다.'며 '순제'(順帝)라는 시호를 추증했다. 북원은 '선인보효황제'(宣仁普孝皇帝)라는 시호와 '혜종'(惠宗)이라는 묘호를 추증했다. 혜종 사후에도 북원은 몽골 고원을 중심으로 세력을 유지하며 명나라에 저항했다. 윈난 성과 구이저우 일대에서는 양왕 바르살바르미 등 원나라 황족과 장군들이 1381년까지 명나라에 저항했다.

6.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조부카이샨제7대 카안
조모인헌장성황후 이키레스씨추존황후
아버지쿠살라제9대 황제
어머니정유휘성황후 카를룩 말리아타리추존황후, 한록로씨
황후이름비고
제1황후단아실리 황후1320 – 1335, 킵차크 부족 출신, 엘 테무르의 딸
제2황후바얀 쿠투크 황후1324 – 1365, 온기라트 출신 홍길라씨, 볼로트 테무르의 딸
제3황후기 황후1315 – 1369, 한국 행주 기씨 출신, 1347년 임신 4개월 만에 유산
제4황후무나실리 황후1307 – 1372, 온기라트 출신
비빈이름비고
숙비용씨, 뢰교중국 용씨[17][18]
숙비정씨, 일녕1333 – 1368[18]
노씨한국 교하 노씨[18]
숙비고씨, 소아[18]
려빈장씨, 아원/아현[18]
재인녕씨, 향아[19][18]
황자이름비고
장남아유르시리다르대원 제17대 카안 소종, 기황후 소생
백안첩목아오왕(吳王)
도선첩목아촉왕(蜀王)
차남투구스 테무르대원 제18대 카안 천원제
연태제왕(齊王)
화태랄초왕(楚王)
진금황자, 요절, 백안홀도황후 소생
정체불명의 황자백안홀도황후 소생[33]
실독아태자[34]
만만태자
마하왕자, 1334년 5월 12일 – 1334년 11월 23일, 단아실리 황후 소생
진금왕자, 바얀 쿠투크 황후 소생[14]
설산왕자, 바얀 쿠투크 황후 소생[15][16]
황녀이름비고
?정국공주, 진동무성왕 박공목소특에게 하가
?초국공주, 요왕 홍길랄 색평지만사특에게 하가
?연국공주, 정남충성왕 홍길랄 초삭극포태가파에게 하가
?완국공주, 평북무헌왕 홍길랄 시금에게 하가
?촉국공주, 안평왕 파통격만에게 하가


7. 기타

원 혜종은 여러 미디어 매체에서 다루어졌다. 드라마 기황후(지창욱 분), 신돈 등에 등장했고, 게임 징기스칸 푸른 늑대와 흰 암사슴 IV에도 등장한다.

7. 1. 문화 작품

참조

[1] 서적 The Mongol Empire and its Legacy
[2] 서적 The History of Mongol Conquests
[3] 서적 The Empire of Steppes
[4] 서적 The Buddha from Dölpo : a study of the life and thought of the Tibetan master Dölpopa Sherab Gyaltsen https://archive.org/[...] Snow Lion Publications 2010
[5] 문서 庚申外史
[6] 서적 A History of Korea Palgrave 2010
[7] 서적 A History of Korea Palgrave 2010
[8] 웹사이트 Descendants of Confucius in South Korea Seek Roots in Quzhou http://www.qz.gov.cn[...] 2014-05-19
[9] 웹사이트 South Korea home to 80,000 descendants of Confucius - People's Daily Online http://en.people.cn/[...]
[10] 웹사이트 New Confucius Genealogy out next year -- china.org.cn http://www.china.org[...]
[11] 웹사이트 China Exclusive: Korean Confucius descendants trace back to ancestor of family tree - China.org.cn http://www.china.org[...]
[12] 웹사이트 China Exclusive: Korean Confucius descendants trace back to ancestor of family tree - Xinhua {{!}} English.news.cn http://news.xinhuane[...]
[13] 서적 Das Chinesische Kaiserreich Fischer 1993
[14] 문서 died at age of 2
[15] 서적 草木子 中华书局 1959
[16] 문서 In 1364 Bolod Temur (father of Empress Bayan) brough his troops in the capital trying to depose Crown Prince Ayushiridara and making Xueshan the new crown prince.
[17] 문서 Before becoming a concubine, she was a servant.
[18] 서적 History of Yuan (Yuán Shǐ)
[19] 문서 She was a courtesan.
[20] 논문 1998
[21] 논문 2008
[22] 논문 2008
[23] 논문 2010
[24] 서적 新元史
[25] 논문 1971
[26] 논문 1971
[27] 논문 2018
[28] 위키소스 Voyages (Ibn Battuta, Sanguinetti)/Asie du Sud-Est
[29] 서적 新元史
[30] 서적 新元史
[31] 서적 新元史
[32] 서적 元史
[33] 문서 원말명초 시기의 인물인 엽자기(葉子奇)가 쓴 서적 「초목자(草木子)」에서만 언급되며 볼라드 테무르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고려 혼혈인 아유시리다라 대신에 태자가 될 뻔 했으나 코케 테무르의 도움으로 상황이 정리되었고 모친인 바얀 후투그 황후가 죽을 때 이 황자는 설산에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귀양을 보낸 뒤 죽었을 것으로 보인다.
[34] 문서 자세한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고려사 권 38, 공민왕세가 1에 의하면 1351년 고려로 와서 고려 여인을 아내로 삼았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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