쩐 예종 (1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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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쩐 예종은 쩐 왕조의 제10대 황제로, 명종의 아들이자 예종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즉위 전에는 공선왕으로 봉해졌으며, 1372년 형인 예종으로부터 양위를 받아 황제가 되었다. 그는 참파와의 전쟁을 강행했으나 도반 전투에서 참패하여 전사했다. 그의 죽음은 쩐 왕조의 쇠퇴를 가속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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쩐 예종 (10대)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쩐 주에 tông (Trần Duệ Tông) |
한자 | 陳睿宗 (진 예종) |
풀네임 | 쩐 낀 (Trần Kính/陳曔) |
통치 정보 | |
칭호 | 황제 |
왕조 | 쩐 왕조 |
재위 기간 | 1373년 – 1377년 |
연호 | 롱카인(隆慶, 1373–1377) |
휘 | 쩐 낀 (Trần Kính/陳曔), 쩐 녓 도안 (Trần Nhật Đoan/陳日煓) |
묘호 | 주에 tông (Duệ Tông/睿宗) |
시호 | 계천응운인명흠효황제 (Kế Thiên Ứng Vận Nhân Minh Khâm Hiếu Hoàng Đế/繼天應運仁明欽孝皇帝) |
능묘 | 희릉 |
즉위 | 1372년 12월 4일 |
퇴위 | 1377년 6월 19일 |
생애 | |
출생일 | 1337년 6월 30일 |
출생지 | 탕롱, 대월 |
사망일 | 1377년 3월 4일 (향년 39세) |
사망지 | 비자야, 참파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쩐 민종 |
어머니 | 돈자황태비 |
배우자 | 가자황후 여씨 |
자녀 | 쩐 현 |
기타 | |
종교 | 불교 |
재위명 | 계천응운인명흠녕황제 (Kế Thiên Ứng Vận Nhân Minh Khâm Ninh Hoàng Đế/繼天應運仁明欽寕皇帝) |
2. 생애
쩐 예종은 명종의 11번째 아들로, 어머니는 돈자황태비(Đôn Từ Hoàng Thái Phi) 여씨(Lê Thị)이다. 헌종, 유종, 예종의 동생이다. 즉위 전 작위는 '''공선왕'''(恭宣王)이었다.[1]
1370년 형인 예종을 옹립하는데 공을 세웠고, 1371년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1372년 형 예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여, 1373년부터 1377년까지 롱카인(Long Khánh, 隆慶) 연호를 사용했다.
1373년 3월, 황장자 쩐비(Trần Vĩ/진위/陳煒)를 창무대왕(Chương Vũ Đại Vương/彰武大王)으로 봉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요절하였다.
즉위 후 국내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1374년 과거 제도를 시행하고 군대와 행정 시스템을 재조직했다. 호 뀌 리를 군사 고문, 쩐 응우옌 단을 북부 국경 통제관으로 임명했다.
1376년 참파를 정벌하기 위해 12만 명의 군사를 일으켜 친정했으나, 1377년 도반 전투에서 대패하여 전사했다.
2. 1. 즉위 전
쩐 예종은 명종의 11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돈자황태비(Đôn Từ Hoàng Thái Phi) 여씨(Lê Thị)이다. 즉위 전 작위는 '''공선왕'''(恭宣王)이었다.[1]1370년 11월, 형인 예종을 옹립하는데 공을 세웠다.[2]
1371년 4월, 황태자(皇太子)로 책봉되었다.
2. 2. 즉위 후
1372년 11월 9일(12월 4일), 형인 예종(藝宗)의 양위를 받아 황제로 즉위하였다. 1373년부터 1377년까지 연호를 롱카인(Long Khánh, 隆慶)으로 변경하여 사용하였다. 즉위 후, 유종과 즈엉 녓 레의 통치 기간 동안 혼란스러웠던 국내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였다.[4] 1374년 2월에는 과거 제도를 시행하고 군대와 행정 시스템을 재조직했다.[4] 또한, 황실에서 호 뀌 리를 군사 고문으로 임명하고,[5] 쩐 응우옌 단을 북부 국경 통제관으로 임명하는 등[11] 인재 등용에도 힘썼다.2. 3. 참파와의 전쟁과 최후
1376년 정월, 쩐 예종은 신하들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숙적 참파를 정벌하기 위해 12만 명의 군사를 일으켜 친정하였다.[1] 그러나 참파군에게 대패하였고, 1377년 5월 13일(6월 19일) 도반 전투에서 전사하였다.[6][7] 향년 41세(만 세)였다.대월사기전서에 따르면, 쩐 예종은 즈엉 녓 레를 몰아내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오만하고 고집스러운 통치자였다.[1] 그는 참파 군대의 힘에 대한 관리들의 조언을 무시했고, 즉위 직후 체 봉 응아의 군대에 맞서 남쪽 국경에서 군사 작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3]
쩐 예종은 1373년 12월 대월에서 여러 반란이 일어나는 가운데 참파를 공격하겠다는 계획을 공식 발표했다.[10] 체 봉 응아가 대월에 조공을 거부한 것도 참파 군사 작전을 강화한 요인이었다. 이후 역사서에 따르면, 참파 왕은 금 15개 쟁반을 대월에 보냈지만, 남부 국경 담당 관리인 도 뜨 빈이 금을 사적으로 보관하고 황실에 참파로부터 조공이 없었다고 보고했다.[5]
1376년 12월, 예종은 12,000명의 베트남 군대를 직접 지휘하여 참파의 수도 비자야로 진격했고, 호 뀌 리는 작전의 병참을 맡았으며 도 뜨 빈은 후방을 지휘했다. 음력 1377년 1월 23일, 예종의 군대는 참파의 수도 도반 근처 티 나이에 도착했다. 체 봉 응아는 도반에서 상대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계략으로 항복하는 척하는 작은 관리를 내세워 예종으로 하여금 참파 군대가 빈 수도에서 도망쳤다고 믿게 만들었다. 다음 날, 예종은 체 봉 응아가 준비한 매복으로 직접 군대를 이끌었다. 그 결과, 쩐 군대는 도반 전투에서 크게 패했고, 황제는 다른 많은 고위 관리, 장군 및 군대의 70%와 함께 전사했다.[6][7] 반대로 호 뀌 리와 도 뜨 빈은 황제를 구출하려 하지 않고 전투에서 도망쳤기 때문에 살아남았다.[8] 이후 도 뜨 빈은 응에 똥의 명령에 따라 일반 병사로 강등되었고, 호 뀌 리는 어떤 혐의도 받지 않았다.[8][9]
3.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
부친 | 명종 황제 쩐마인(陳奣/진앵) |
모친 | 돈자황태비(敦慈皇太妃) 여씨(黎氏) |
황후 | |
가자황후(嘉慈皇后) 여씨(黎氏) (? ~ 1381년)[10] | |
후궁 | |
신비(宸妃) 응우옌빗쩌우(阮碧珠/완벽주) (1356년 ~ 1377년) - 제승부인(制勝夫人)으로도 불림. | |
공비(恭妃) 쩐응옥호아(陳玉和/진옥화) | |
쩐리우의 딸[11] | |
황자 | |
창무대왕(彰武大王) 쩐비(陳煒/진위) (1360년 ~ 1374년) - 가자황후 소생.[10] | |
건덕대왕(建德大王) 쩐히엔(陳晛/진현) - 가자황후 소생. 제11대 황제 영덕왕(靈德王). | |
쩐응우옌디에우(陳元曜/진원요) (? ~ 1390년) | |
창정왕(彰靖王) 쩐응우옌히(陳元翬/진원휘) | |
황녀 | |
휘진공주(輝眞公主) - 공비 진씨 소생. |
4. 평가
쩐 예종은 유능한 군주가 되기 위해 노력했지만, 성급하고 독단적인 성격으로 인해 실패한 군주로 평가받는다. 특히, 참파와의 전쟁에서의 패배는 그의 가장 큰 실책으로 꼽힌다.[1][3]
예종은 즉위 직후 제바응아의 군대에 맞서 남쪽 국경에서 군사 작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1373년 12월, 대월에서 여러 반란이 일어나는 가운데 참파를 공격하겠다는 계획을 공식 발표했다.[10] 그는 참파 군대의 힘에 대한 관리들의 조언을 무시했다.[1]
한편, 예종은 유종과 양일례의 통치 기간 동안 혼란 이후 국내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몇 가지 활동을 했다. 예를 들어 1374년 2월에 과거 제도를 시행하거나 군대 및 행정 시스템을 재조직했다.[4]
롱카인 4년(1376년), 예종은 조정 신하의 간언을 무시하고 참파와 결전을 벌이기 위해 12만 대군을 이끌고 친정했으나 대패하여 진중에서 사망했다.[6][7] 1376년 12월, 예종은 12,000명의 베트남 군대를 직접 지휘하여 참파의 수도 비자야로 진격했다.[6] 음력 1377년 1월 23일, 예종의 군대는 참파의 수도 도반 근처 티 나이에 도착했다. 도반 전투에서 예종은 제바응아가 준비한 매복에 걸려 크게 패했고, 황제는 다른 많은 고위 관리, 장군 및 군대의 70%와 함께 전사했다.[6][7]
그의 죽음 이후 쩐 왕조는 급격히 쇠퇴하였으며, 결국 호계리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쩐 예종의 사례는 지도자의 자질과 판단력이 국가의 운명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교훈으로 해석될 수 있다.
5. 연호
6. 묘호, 시호, 능호
묘호는 예종(Duệ Tông/睿宗)이며, 능호는 희릉(Huy Lăng/熙陵)이다. 재위 시 존호는 계천응운인명흠효황제(Kế Thiên Ứng Vận Nhân Minh Khâm Hiếu Hoàng Đế/繼天應運仁明欽孝皇帝)이다.
참조
[1]
Harvnb
[2]
Harvnb
[3]
Harvnb
[4]
Harvnb
[5]
Harvnb
[6]
서적
The Champa Kingdom
White Lotus Co., Ltd.
[7]
Harvnb
[8]
Harvnb
[9]
Harvnb
[10]
Harvnb
[11]
Harvn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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