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진수부 (고대)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진수부는 고대 일본에서 무쓰국과 데와국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된 기관이다. 진병이라는 고유 병력을 운용하며 성책 경비를 담당했다. 724년경 진병제가 시작되었으며, 815년에 폐지되었다. 다가 성 시기에는 진수부장군이 안찰사 또는 무쓰 태수를 겸임했고, 간무 천황의 에미시 정벌 시에는 정이대사, 정동대사가 임명되어 군정을 수행했다. 802년 이사와 성으로 이전한 후에는 제2 국부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며 이와테현 남부 일대를 다스렸으나, 헤이안 시대 중기 이후 본래의 역할은 상실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일본의 영외관 - 참의 (일본사)
    참의는 일본 율령제 하에서 종4위 이상의 대신과 함께 정무에 참여한 태정관의 중요 구성원이었으며, 메이지 시대에는 각료인 경보다 상위 직책으로 정부의 집단 지도 체제를 이끌었으나 내각제 도입 후 폐지되었다.
  • 일본의 영외관 - 검비위사
    검비위사는 헤이안 시대에 수도의 치안 유지와 형사 사건을 담당했던 경찰 및 사법 기관으로, 율령의 제약에서 벗어난 청례를 적용하여 신속한 재판과 처벌을 했으며, 헤이안 시대 말기에 권력이 약화되어 쇠퇴했다.
  • 무쓰국 - 와카마쓰성
    와카마쓰성은 1384년 축성되어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까지 아이즈 지방을 대표하는 성곽으로, 가모 우지사토에 의해 근세 성곽으로 개축되어 쓰루가성으로 개명되었고, 보신 전쟁 후 복원되어 현재는 박물관으로 활용되며 일본 100명성에 선정되었으나, 역사 왜곡 시도와 역사적 의미에 대한 논란이 있다.
  • 무쓰국 - 센다이성
    센다이성은 다테 마사무네가 축성한 산성으로, 아오바성이라고도 불리며 다테 가문의 거성이자 무쓰국의 행정 중심지였으나, 메이지 시대 이후 파괴되어 현재는 일부 복원되어 국사적 및 일본 100대 명성으로 지정되었다.
  • 나라 시대 - 고후쿠지
    고후쿠지는 669년 후지와라 가마타리가 창건한 나라의 불교 사찰로, 후지와라 씨의 후원을 받아 번성했으나 화재와 전란으로 피해를 입고 재건을 거듭했으며, 현재는 여러 문화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 나라 시대 - 헤이조궁
    헤이조궁은 710년부터 784년까지 일본의 수도였던 헤이조쿄의 천황 거처로, 내정과 외조, 주작문 등의 시설을 갖추었으며,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국영 역사공원으로 운영되고 있다.
진수부 (고대)
진수부 (고대)
개요
종류군사 기관
역할변방 경비, 군정
위치서쪽: 다자이후
동쪽: 무쓰 국
역사
기원7세기 후반, 덴무 천황 시대
목적일본의 변방 지역 통제 및 방어
주요 진수부다자이후: 서쪽 지역 통괄
무쓰 국: 동쪽 지역 통괄
쇠퇴9세기 이후, 중앙 정부의 통제력 약화와 함께 쇠퇴
조직
수장진수부 장군 (鎮守府将軍)
주요 구성원군사, 행정 관료
역할 분담군사: 변방 경비, 반란 진압
행정: 지역 통치, 세금 징수
기능
군사적 기능변방 경비 및 방어
반란 진압
군사 훈련
행정적 기능지역 통치
세금 징수
민정
영향
지역 사회지역 경제 활성화
문화 교류 촉진
지역 주민과의 관계 형성
중앙 정부변방 지역 통제 강화
군사력 유지
같이 보기
관련 항목다자이후
무쓰 국
진수부 장군
절도사

2. 진병

덴표 9년(737년)에 진병이라는 이름이 기록에 명확하게 나타나지만, 그 이전의 기록에도 "진수 군졸", "진병인"이라는 유사한 표현이 있어, 진병제의 발족은 진키 원년(724년) 무렵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그 후, 무쓰 및 데와의 군단 병사 병력의 증감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지면서 증감을 반복, 고닌 원년(810년)에는 3,800명을 헤아렸지만, 이후 점차 삭감되어 고닌 6년(815년)에 완전 폐지된다.

2. 1. 진병의 특징

진수부에는 진병(鎭兵)이라 불리는 고유 병력이 배치되어 무쓰데와에 배치된 군단의 병사와 함께 성책(城柵)의 경비를 맡고 있었다. 에미시와 대치하는 무쓰 국에는 다른 나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군단(최대 7개)이 설치되어, 다른 많은 나라에서 군단이 폐지된 후에도 오히려 계속 증강되었다. 하지만 군단 병사제는 각 국 농민들로부터 동원하였기 때문에 부담이 너무 컸고 그럼에도 병력이 오히려 부족했기에 별도의 병사로 보완이 필요했다고 생각된다. 군단 병사는 6개 정도의 번을 나누어 교대로 근무하므로 병사가 6000명이어도 상시 배치할 수 있는 것은 1000명에 불과하지만, 진병의 경우는 교대가 없어 3000명이면 3000명 모두를 상시 배치할 수 있었다. 진병은 도고쿠의 군단 병사들로부터 뽑히는 등 사키비토(防人)와 출신이 같았지만 도고쿠의 부담이 너무 커서 점차 현지의 무쓰 국 및 데와 국에서 병력을 모으게 되었고 군단 병사와의 차이가 애매해져 서서히 형해화되어 갔다.

진병이라는 이름이 명확하게 기록에 남은 것은 덴표 9년(737년)이지만, 그 이전의 기록에도 「진수군졸」(鎮守軍卒), 「진병인」(鎮兵人)이라고 하는 유사한 기술이 있어, 진병제의 발족은 진키(神亀) 원년(724년) 무렵이라고 하는 것이 정설이 되고 있다. 그 후, 무쓰 및 데와의 군단 병사 병력의 증감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지면서 증감을 반복해, 고닌 원년(810년)에는 3800명을 헤아렸지만, 이후 점차 삭감되고 고닌 6년(815년)에는 완전 폐지된다.

3. 다가 성 시대

진수부 상당의 기관은 처음 다가 성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덴표호지 3년(759년)에는 장군 이하의 봉료와 부인(付人)의 급부를 무쓰 국의 고쿠시와 같게 하도록 정하였다. 이 무렵부터 진수부장군은 거의 4년마다 임명되었다. 이 시기의 장군은 안찰사 또는 무쓰 태수(陸奥守, 무쓰노카미)를 겸임하는 것이 통례였으며, 그 중에는 세 개의 관직을 겸임하는 경우도 있었다.

간무 천황의 에미시 정벌 때에는 정이대사(征夷大使, 장군)와 정동대사(征東大使, 장군)가 임명되어 정토군이 편성되었다.

3. 1. 주요 임무

진수부는 통상적인 수비와 성곽 건설 및 유지 등 무쓰국 국내의 군정을 주요 임무로 삼았다고 한다.

4. 이사와 성 시대

엔랴쿠 21년(802년),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가 이사와 성을 세우고 다가 성에서 진수부를 이사와 성으로 옮겼다. 고닌 3년(812년)에는 진수부 정원을 장군 1명, 군감 1명, 군조 2명, 의사·노사 각 1명으로 정했다. 조와 원년(834년)에는 무쓰 국인을 사용하는 대신 진수부인을 받았다. 이사와로 이전한 후의 진수부는 다가 성에 있는 무쓰 국부와 함께 제2국부와 같은 역할을 하며 이사와(현재의 이와테현 남부)를 다스렸다.

진수부의 본래 성격은 평상시의 통치였으며, 비상시의 정벌은 아니었다. 따라서 헤이안 시대 중기 이후에는 진수부 본래의 역할은 사라지고, 진수부 장군의 지위만이 무가의 명예직으로 남게 되었다.

4. 1. 제2국부 역할

엔랴쿠 21년(802년)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에 의해 이사와 성이 세워지고, 다가 성에서 이곳으로 진수부가 옮겨졌다. 이 이전 무렵부터 기구 정비도 적극적으로 진행되었는데, 예를 들어 고닌 3년(812년)에는 진수부의 정원이 장군 1명, 군감(軍監) 1명, 군조(軍曹) 2명, 의사, 노사(弩師) 각 1명으로 정해졌다.

조와 원년(834년)에는 원래 무쓰 국인(国印)을 사용하던 것을 새롭게 진수부인(鎮守府印)을 받았다. 이처럼 이사와 이전 후의 진수부는 다가 성에 있는 무쓰 국부와 병존하는 형태로, 말하자면 제2국부와 같은 역할을 맡아 이와테 현 남부 일대를 다스렸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