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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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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후쿠지는 669년 후지와라노 가마타리가 그의 아내의 쾌유를 기원하며 창건한 사찰로, 나라시에 위치해 있다. 후지와라 씨의 후원을 받으며 번성했고, 불교의 중심지이자 황실에 영향력을 미치기도 했다. 여러 차례 화재와 내전으로 파괴되었지만 재건되었으며, 현재 동금당, 오층탑, 삼층탑, 북원당 등이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1868년 신불분리령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으나, 재건을 거쳐 199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현재도 여러 불상과 건축물, 주요 행사를 통해 그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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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쿠지
위치 정보
고후쿠지 5층 탑과 도콘도
고후쿠지의 5층 탑과 도콘도
기본 정보
이름고후쿠지
로마자 표기Kōfuku-ji
한자 표기興福寺
위치나라현 나라시 노보리오지초 48
종교법상종
주존석가모니불
국가일본
웹사이트고후쿠지 공식 웹사이트
창건자덴지 천황
창건 년도669년
산호없음
사격본산
창건자후지와라노 후히토
별칭없음
순례지서국삼십삼소 제9번 (남엔도)
서국약사사십구영장 제4번 (동금당)
대화북부팔십팔개소영장 제62번 (보제원)
남도칠대사 제2번
신불영장순배의길 제16번 (나라 제3번)
문화재동금당, 오층탑, 건칠 팔부중상 외 (국보)
남엔도, 목조 약왕보살, 약상보살 입상 외 (중요문화재)
고후쿠지 구 경내 (국가 사적)
세계유산
공식 웹사이트 이름법상종 대본산 고후쿠지
상세 위치

2. 역사

고후쿠지의 기원은 669년에 후지와라노 가마타리가 그의 아내 가가미노 오키미(鏡大君)의 병환 회복을 기원하며 절을 세운데서 비롯된다.[1] 원래 부지는 야마시로국 야마시나(오늘날의 교토시)였다.[1] 672년에 절은 일본 최초의 계획적으로 건설된 수도인 후지와라쿄로 이전하였다가[1] 710년에 새롭게 건설된 수도인 헤이조쿄(오늘날의 나라시)의 동쪽의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1]

1911년 고후쿠사


고후쿠지는 후지와라씨가 후견인인 사원으로 후지와라 씨가 권력을 잡는 동안 번창하였다.[1] 절은 불교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황실을 넘어서는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1] 수도를 헤이안쿄로 이전한 후에 도다이지와 같은 남도 7대사는 쇠퇴하였으나 고후쿠지는 후지와라 씨와의 관계 덕분에 영향력을 유지하였다.[1] 절은 여러 번 내전과 화재로 파괴되었다가[2] 여러 번 재건되었다. 그러나 세 개의 금당 중 두 개와 남대문, 중문은 오늘날에도 아직 재건되지 못했다. 중금당(中金堂)은 2018년에 재건이 완료되었다.

은 과거 이 사찰에 있었던 차실(茶室)로, 중 하나로 여겨졌다.[3] 건물의 노후화로 인해 이전되었으며, 현재는 도쿄국립박물관 정원에 있다.[4][5]

2. 1. 창건

고후쿠지는 669년 후지와라노 가마타리의 부인 가가미노 오키미(鏡大君)가 남편의 병환 회복을 기원하며 세운 야마시나데라(山階寺)가 기원이다.[14] 처음에는 야마시로국 야마시나(오늘날의 교토시)에 있었으나,[14] 672년 후지와라쿄로 이전하면서 우마야사카데라(厩坂寺)로 불렸다.[15]

710년 헤이조쿄(오늘날의 나라시)로 천도하면서 가마타리의 아들 후지와라노 후히토가 현재 위치로 절을 옮기고 고후쿠지(興福寺)라 명명했다.[16] 와도(和銅) 3년(710년)이 실질적인 고후쿠지의 창건 연도로 여겨지며, 중금당(中金堂) 건축은 헤이조쿄 천도 직후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17]

이후 천황, 황후, 후지와라씨에 의해 당탑이 세워지고 가람이 정비되었다. 721년 겐메이 천황겐쇼 천황이 후히토의 위령을 위해 나가야 왕에게 명하여 북원당(北円堂)을 건립하게 했다.[14] 같은 날 후히토의 아내인 아가타이누카이노 미치요(県犬養三千代)도 후히토를 위해 미륵정토변상(弥勒浄土変像)을 만들어 금당에 안치했다.[17]

신게이(神亀) 3년(726년)에는 쇼무 천황이 겐쇼 상황의 쾌유를 빌며 동금당(東金堂)을 건립하고, 730년에는 고묘 황후가 오중탑(五重塔)을 건립했다.[17] 734년에는 고묘 황후가 어머니 아가타이누카이노 미치요를 위해 서금당(西金堂)을 건립하고, 팔부중상과 십대제자상 등 여러 불상을 안치했다.[17]

고닌(弘仁) 4년(813년)에는 후지와라노 후유쓰구가 아버지 후지와라노 우치마로의 추선공양을 위해 남원당(南円堂)을 건립하여 중심 가람이 완성되었다.[19][18]

2. 2. 나라 시대의 번영

후지와라노 가마타리가 그의 아내 가가미노 오키미(鏡大君)의 병환 회복을 기원하며 669년에 절을 세운 것이 고후쿠지의 기원이다.[1] 원래 부지는 야마시로국 야마시나(오늘날의 교토시)였다.[1] 672년에 절은 일본 최초의 계획적으로 건설된 수도인 후지와라쿄로 이전하였다가[1] 710년에 새롭게 건설된 수도인 헤이조쿄(오늘날의 나라시)의 동쪽의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1]

고후쿠지는 후지와라씨가 후견인인 사원으로 후지와라 씨가 권력을 잡는 동안 번창하였다.[1] 절은 불교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황실을 넘어서는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1] 수도를 헤이안쿄로 이전한 후에 도다이지와 같은 남도 7대사는 쇠퇴하였으나 고후쿠지는 후지와라 씨와의 관계 덕분에 영향력을 유지하였다.[1] 절은 여러 번 내전과 화재로 파괴되었다가[2] 여러 번 재건되었다. 그러나 세 개의 금당 중 두 개와 남대문, 중문은 오늘날에도 아직 재건되지 못했다. 중금당(中金堂)은 2018년에 재건이 완료되었다.

은 과거 이 사찰에 있었던 차실(茶室)로, 중 하나로 여겨졌다.[3] 건물의 노후화로 인해 이전되었으며, 현재는 도쿄국립박물관 정원에 있다.[4][5]

2. 3. 남도북령(南都北嶺)과 가스가샤(春日社)와의 관계

고후쿠지는 후지와라노 가마타리와 그 가문인 후지와라씨와 깊은 연관을 맺으며 번영하였다. 헤이안쿄 천도 이후 다른 남도 7대사가 쇠퇴하는 가운데에도 후지와라 씨와의 관계 덕분에 그 중요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1]

신고케이운(神護景雲) 2년(768년), 후지와라씨는 그들의 수호신을 모시기 위해 가스가타이샤(카스가샤)를 건립하였고, 고후쿠지와 카스가샤는 점차 신불습합(神仏習合)의 관계를 맺었다. 고후쿠지는 “가스가묘진(春日明神)은 법상옹호(法相擁護)의 신”이라 주장하며 가스가샤에서 독경을 시작했고, 본지수적(本地垂迹) 사상이 진행됨에 따라 가스가샤와의 일체를 주장하게 되었다.[18] 호엔(保延) 원년(1135년) 가스가와카미야(春日若宮) 창설 이후, 고후쿠지에 의한 가스가타이샤 지배는 더욱 강화되었고, 메이지 시대까지 신불습합 신앙 형태가 계속되었다.[18]

이러한 관계는 가스가타이샤의 신위를 내세운 신목동좌(神木動座)·입락강소(入洛強訴)라는 수단으로 이용되었고, “산계도리(山階道理)”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조정(朝廷)을 괴롭혔다. 간지(寛治) 7년(1093년)의 신목동좌는 오미노카미(近江守) 다카카이 타메이에(高階為家)에 대한 것으로, 오미국(近江国)의 가스가타이샤 영지에서 신인(神人)이 폭행당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다카카이 타메이에의 유죄를 강요하여 도사국(土佐国)에 유배시켰다. 이러한 신목동좌·입락은 약 70회에 달했다.[18]

고후쿠지는 야마토국(大和国) 대부분의 쇼엔(荘園)을 영유하여 사실상 국주(国主)가 되었다. 그 세력은 엔랴쿠지(延暦寺)와 함께 “남도북령(南都北嶺)”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절 주변에는 수많은 부속 사원인 자원(子院)이 세워졌고, 전성기에는 100개가 넘었다. 그중 조쇼(定昭)가 창립한 '''일승원(一乗院)'''과 류젠(隆禅)이 창립한 '''다이죠인(大乗院)'''은 황족·섭가의 자제가 입사하는 문적사원(門跡寺院)으로 번영했다.[18]

2. 4. 중세 시대의 쇠퇴와 재건

후지와라노 가마타리의 부인 가가미노 오키미(鏡大君)가 남편의 병환 회복을 기원하며 669년에 절을 세운 것이 고후쿠지의 기원이다.[1] 원래 야마시로국(현 교토부) 야마시나(山科)에 있었으나, 672년 일본 최초의 계획도시인 후지와라쿄(藤原京)로 옮겨졌고, 710년에는 헤이조쿄(平城京, 현재의 나라시) 동쪽으로 다시 이전하였다.

고후쿠지는 후지와라씨의 가람(伽藍)으로서, 후지와라 씨의 번영과 함께 성장하여 불교의 중심지이자 조정에도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1] 헤이안쿄(平安京, 교토시) 천도 이후 도다이지(東大寺) 등 남도칠대사(南都七大寺)가 쇠퇴하는 가운데, 고후쿠지는 후지와라 씨와의 관계로 인해 그 중요성을 유지하였다.

고후쿠지는 여러 차례 내전과 화재로 인해 피해를 입고 파괴되었으나,[2] 재건을 반복하였다. 그러나 세 개의 금당 중 하나, 남대문(南大門), 중문(中門), 회랑 등은 재건되지 못하고 현재까지 남아있지 않다. 2018년에 중금당(中金堂)의 재건이 완료되었다.

로쿠소안/六窓庵일본어은 과거 고후쿠지에 있었던 차실(茶室)로, 산메이세키/三名席일본어 중 하나로 여겨졌다.[3] 건물의 노후화로 인해 이전되어 현재는 도쿄국립박물관 정원에 있다.[4][5]

2. 5. 근세 이후의 변화

1868년 3월 신불분리령이 반포되면서 고후쿠지는 큰 혼란에 빠졌다.[14] 신불습합이 부정되고 고후쿠사와 가스가샤는 분리되었다. 일승원과 대승원의 문주는 환속하여 나라 화족이 되었고, 많은 말사와 자원이 폐지되었으며 승려들은 환속하여 가스가샤의 신직을 맡게 되었다.[21]

1869년 도다이지가 고후쿠지의 관리를 맡고자 했으나 거절당하고, 1870년 상지령으로 사전이 몰수되어 당탑과 부지만 남게 되었다. 종명과 사호도 사용할 수 없게 되어 사실상 폐사 상태가 되었다.[21] 폐불훼석으로 당과 불상이 파괴, 철거되었고, 1871년부터 일승원은 나라현청으로, 중금당은 경찰서, 나라현청, 군청으로 사용되다가 1883년 반환되었다.[21] 1880년 고후쿠지 경내는 나라 공원이 되었다.[14]

폐사 위기 속에서 오중탑과 삼중탑도 매물로 나왔으나, 화재 우려와 관광객 유치 등의 이유로 보존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23] 그러나 오중탑 매각 이야기는 전승일 뿐이라는 설도 있다.[21]

1875년부터 서대사 주지 사에키 코스이에 의해 관리되던 중, 1881년 고후쿠지 재흥이 허가되었고,[14] 1882년 관리권이 반환되었다.[21] 1884년 금당 기단에서 나라 시대 진단구가 발굴되었다.[14]

1897년 고사사보존법으로 북원당, 삼중탑, 오중탑이 특별 보호 건축물로 지정되었다. 1902년 오중탑, 1910년 삼중탑 수리가 완료되었다.[14]

1937년 동금당 해체 수리 중 동상 불두(구 야마다데라 강당 본존상)가 발굴되었다.[14]

1959년 식당 터에 고후쿠지 국보관이 건설되었다. 1962년 대탕우, 1965년 북원당 해체 수리가 완료되었고, 1970년 보다인대묘당이 개축되었다.[14]

1974년 야쿠시지 구 금당을 이축하여 가금당(현 가강당)을 건립하고 중금당 불상을 옮겼다.[14][24]

1979년 삼중탑, 1996년 남원당 수리가 완료되었고, 흥복사 회관이 준공되었다.[14]

1998년 세계유산에 등재되었고,[14] 1999년부터 중금당, 회랑, 중문, 남대문, 북원당 회랑 등의 발굴 조사가 진행되었다.[21]

평성경 건립 1300년을 기념하여 중금당[25]과 남대문 재건이 계획되었다. 2000년 가건축된 중금당이 해체되었고,[14] 2018년 중금당 재건이 완료되었다.[26] 중심 기둥은 카메룬산 케야키(欅)를 사용하였다.[20]

2023년 오중탑 대규모 수리가 시작되어 2031년 완료될 예정이다.[27]

2. 6. 현대의 복원 노력

1868년 신불분리령으로 인해 고후쿠지는 폐불훼불 운동의 여파로 큰 피해를 입었으나,[14][21] 1881년 재건이 허가된 이후[14] 꾸준히 복원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1897년 고사지보존법에 따라 북원당, 삼중탑, 오중탑이 특별 보호 건축물로 지정되었고,[14] 이후 각 건물의 수리가 진행되었다. 1959년에는 보물 수장고(국보관)가 건설되었으며,[14] 1998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14]

2018년에는 19세기 초 소실되었던 중금당(中金堂)이 재건되었다.[26] 중금당 재건에는 카메룬산 케야키(欅)가 사용되었다.[20] 2023년부터는 오중탑의 대규모 수리가 시작되어 2031년 완료될 예정이다.[27]

3. 주요 건축물



고후쿠지는 나라 시의 가스가타이샤를 포함한 몇몇 사원들, 헤이조 궁 유적, 기타 장소들을 포함해 고도 나라의 문화재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지정되어있다.

절의 건물과 보물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남원당은 사이고쿠 33 순례의 9번째 순례지이다.


중금당(중금당)


동금당(동금당)


아수라(불교)


다음은 주목할 만한 사찰 건물과 보물들 중 일부이다.

  • 동금당(東金堂, Tō-kondō)은 1425년 건립되었으며, 옛 삼금당 중 하나로 국보이다.[6]
  • 중금당(中金堂, Chū-kondō)은 2018년에 재건되었으며, 이전의 임시 중금당 건물(仮金堂)은 현재 임시 강당(仮講堂)으로 사용되고 있다.
  • 오중탑(五重塔, Gojū-no-tō)은 1426년에 건립되었으며, 국보이다.[7]
  • 삼중탑(三重塔, Sanjū-no-tō)은 1185년에 건립되었으며, 국보이다.[8]
  • 북원당(北円堂, Hoku'endō)은 1210년에 건립되었으며, 국보이다.[9]
  • 남원당(南円堂, Nan'endō)은 1741년에 건립되었으며, 사국 33 관음 순례(西国三十三ヶ所巡礼, Saigoku 33 Pilgrimage) 제9번지로 중요문화재이다.[10]
  • 대탕야(大湯屋, Ōyūya)는 1394~1427년에 건립되었으며, 중요문화재이다.[11]

원래 사찰 배치도에는 3층탑, 남원당(南円堂, Nan'en-dō), 오유야(御湯屋, Ōyūya)가 겹쳐서 표시되어 있었는데,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5층탑, 동금당(東金堂, Tōkon-dō), 북원당(北円堂, Hoku'en-dō)과 함께 이 세 건물뿐이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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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쿠지 배치도. 붉은색은 현존하는 건물, 회색은 유실된 건물이다.



옛날의 흥복사에는 중금당(ちゅうこんどう), 동금당(とうこんどう), 서금당(さいこんどう)이라는 세 개의 금당이 있었고, 각각에 많은 불상을 안치하고 있었다. 절의 중심부에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남대문, 중문, 중금당, 강당이 일직선으로 늘어서 있었고, 경내 동쪽에는 남쪽에서부터 5층탑, 동금당, 식당(じきどう)이, 경내 서쪽에는 남쪽에서부터 남원당(なんえんどう), 서금당, 북원당(ほくえんどう)이 있었다. 이 외에, 경내 남서쪽 한 단 낮은 땅에는 3층탑이, 경내 남동부에는 대탕야가 각각 세워져 있었다. 이들 당우는 창건 이래 화재를 여러 번 당하여, 소실과 재건을 반복해 왔다. 메이지 시대 이후, 흥복사의 경내는 나라공원의 일부가 되어, 절의 영역을 구획하고 있던 담이나 남대문도 없어져 천평 시대의 질서 정연한 가람 배치를 상상하는 것은 어려워졌다. 「흥복사의 불상」도 참조.

=== 중금당(中金堂) ===

중금당(中金堂, Chū-kondō)은 고후쿠지의 중심 건물로, 710년 나라 천도 직후 후지와라노 후히토에 의해 건립이 시작되어 714년에 완성되었다.[14] 석가삼존상을 안치하기 위한 사찰의 중심적인 당이었다. 이후 동금당과 서금당이 세워지면서 중금당으로 불리게 되었다.

창건 이래 여러 번 소실과 재건을 반복했으며, 1717년 화재로 소실된 후 1세기 이상 재건되지 못했다. 1819년에 임시 건물(가당)로 재건되었으나, 규모가 작고 저렴한 재료를 사용해 노후화가 심했다. 1974년 약사사의 구금당을 이축한 가금당(현 가강당)으로 본존 석가여래좌상 등을 옮겼다. 2000년 기존 가당을 해체하고 발굴 조사를 거쳐 창건 당시 모습을 재현한 새로운 중금당 건설이 시작되었다.

2010년 재건 공사가 착공되어 2018년 10월에 9번째 중금당이 낙성되었다. 현재 중금당에는 다음과 같은 불상들이 안치되어 있다.


  • 석가여래좌상은 본존 불상으로, 1811년에 제작되었다. 높이 283.9cm이며, 측백나무를 사용한 끼워맞춤 구조로 만들어졌다.
  • 목조 약왕보살·약상보살입상(중요문화재)은 원래 폐절된 서금당 본존 석가여래상의 협시였으며, 1202년에 조성된 높이 3.6m의 거상이다.
  • 목조 사천왕입상(국보)은 가마쿠라 시대 작품으로, 원래 북엔당(北円堂)에 안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2017년까지 남엔당(南円堂)에 안치되어 있었으나, 운케이의 아버지 코우케이 일문의 작품으로 알려진 사천왕상과 교체되어 중금당으로 옮겨졌다.


=== 동금당(東金堂) ===

동금당(東金堂)은 원래 세 개의 금당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건물이다.[6] 1415년에 재건된 5대째 건물로, 나라 시대의 천평양식을 참고하여 만들어졌다.[14] 평면은 桁行 7칸, 梁間 4칸이며,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 본瓦葺이다. 1897년 12월 28일 고사지보존법에 따라 특별보호건조물로 지정되었으며, 1952년 3월 29일 문화재보호법에 의해 국보로 지정되었다. 사이국약사사구령장 제4번 찰소이다.

726년 성무천황이 원정천황의 쾌유를 기원하며 약사삼존상을 봉안하기 위해 창건했다. 1180년 화재로 소실된 후, 1187년 흥복사 승병들이 야마다데라에 있던 약사삼존상을 강탈하여 새로운 본존으로 봉안했다. 1411년 다시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1415년 재건되어 현재에 이른다.

당내에는 다음과 같은 불상들이 봉안되어 있다.

  • 동조약사삼존상(중요문화재)의 중존은 1411년 화재 이후 재건된 무로마치 시대 작품이다. 일광보살상·월광보살상은 화재에서 구출된 나라 시대 작품이다.
  • 목조비마거사좌상(국보)은 약사여래상 왼쪽에 봉안되어 있다. 겐큐 7년(1196년) 정경의 작품으로, 재가 불교도의 이상적인 모습을 표현했다.
  • 목조문수보살좌상(국보)은 약사여래상 오른쪽에 봉안되어 있으며, 비마거사상과 짝을 이룬다. 제작자는 불명이나, 정경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 목조사천왕입상(국보)은 당내 네 귀퉁이에 봉안되어 있으며, 헤이안 시대 전기의 중후한 양식을 보인다.
  • 목조십이신장입상(국보)은 약사여래를 수호하는 12권속 불상이다. 켄에이 2년(1207년)경 작품으로, 역동적인 자세와 개성적인 표현이 특징이다.


=== 오층탑(五重塔) ===

고후쿠지의 오층탑은 730년 광명황후의 발원으로 처음 세워졌다. 현재의 탑은 1426년에 재건된 것으로, 높이 50.1미터로 일본에서 동대사 오층탑 다음으로 높다.

1897년 12월 28일, 고사지보존법에 근거한 특별보호건조물(구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1952년 3월 29일 문화재보호법에 근거하여 국보로 지정되었다.

메이지 초기 폐불훼석 정책으로 인해 철거 위기에 놓였으나, 인근 주민들의 반대로 중지되었다. 1905년 7월에는 낙뢰 피해를 입었으나 큰 피해는 없었고, 1907년 8월 피뢰침이 설치되었다.

1902년 수리 이후, 2024년 7월부터 약 120년 만에 본격적인 수리가 진행되고 있다.

=== 북원당(北円堂) ===

북원당(北円堂)은 고후쿠지에 있는 당(건축) 중 하나로, 1210년에 재건되었다.[9][14] 후지와라노 후히토의 1주기를 맞아 721년에 나가야왕이 원명상황과 원정천황의 명으로 창건한 것이 그 시초이다. 현재의 건물은 1210년에 재건된 것으로, 고후쿠지에 현존하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되었다. 법륭사 몽전과 같이 평면이 팔각형인 "팔각원당"이다. 지붕은 단층 기와로 되어있다. 1897년 12월 28일, 당시 고사지보존법에 근거하여 특별보호건조물(문화재보호법의 "중요문화재"에 해당)로 지정되었으며, 1952년 3월 29일, 문화재보호법에 근거하여 국보로 지정되었다. 과거에는 회랑 복원을 계획하기도 했으며, 현재는 그 기단이 복원되어 있다.

본존은 목조미륵보살좌상(국보)으로, 말년의 운경이 1212년경에 완성한 것이다. 미륵불의 협시상(脇侍像)인 목조법원림보살·대묘상보살반가상은 무로마치 시대에 제작되었다. 목조무착보살·세친보살입상(국보)은 유식학의 조사(祖師)인 무착과 세친 형제를 표현한 것으로, 운경 일문의 작품이다. 가마쿠라 시대의 사실주의 조각의 정점을 보여주는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목심건칠사천왕입상(국보)은 헤이안 시대 초기의 불상으로, 원래 대안사의 것이었으며 791년에 조립되었다고 한다. 1285년의 수리명(修理銘)이 남아있다.

=== 남원당(南円堂) ===

1741년에 기둥을 세우고, 1789년에 재건축된 고후쿠지의 남원당(南円堂)은 중요문화재이다. 4대째 건물로, 지붕이 한 겹인 본와가야부키(本瓦葺)의 팔각원당(八角円堂)이며, 정면에 배소(拝所)가 딸려 있다. 1986년 12월 20일,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사이국 삼십삼소 제9번 찰소인 남원당은 후지와라 북가의 후지와라 후유쓰구가 아버지 우치마로의 추선을 위해 813년에 창건한 팔각당이다.

창건 당시 본존불은 원래 고후쿠지 강당에 안치되어 있던 불공건삭관음상으로, 748년에 후지와라 부젠의 추선을 위해 부인 무로 여왕, 아들 후지와라 마사타테 등이 조성한 것이었다. 현재 남원당은 사이국 삼십삼소 제9번 찰소로서 참배객이 끊이지 않지만, 당의 문은 항상 닫혀 있으며, 10월 17일의 대반야경 전독회라는 행사 날에만 개방된다. ( 2002년, 2008년, 2013년에 특별 개방이 있었다).

당 안에는 본존불인 목조 불공건삭관음좌상(국보) 외에 목조 사천왕입상(국보)과 목조 법상육조좌상(국보)을 안치한다. 목조 불공건삭관음좌상은 운케이의 아버지 강경 일문의 작품으로, 1189년에 완성되었으며 높이 336센티미터의 거상이다. 목조 사천왕입상은 원래 남원당에 있던 것으로, 2017년 도쿄국립박물관에서 개최된 "운케이전" 이후 남원당으로 돌아왔으며,2018년에 국보로 지정되었다. 목조 법상육조좌상은 운케이의 아버지 강경 일문의 작품으로, 현빈, 행가, 현방, 신혜, 상등, 선주라는 법상종의 6명의 고승의 초상이다. 당 앞에 있는 "남원당등나무"는 남도팔경의 하나로, 매년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 삼층탑(三重塔) ===

1185년에 건립된 고후쿠지의 삼층탑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원래 배치도에는 후대에 건립된 삼층탑이 다른 건물들과 함께 겹쳐서 표시되어 있으며, 현재 남아있는 건물 중 하나이다.

=== 국보관(国宝館) ===

고후쿠지 국보관은 1959년(쇼와 34년) 식당 및 세전 터에 건립된 내화식 수장 시설이다. 외관은 나라 시대의 사찰 건축 양식을 본떠 철근콘크리트구조로 지어졌다. 국보관 내부는 식당의 본존이었던 높이 5.2미터의 거대한 천수관음입상이 중앙에 안치되어 있고, 불상을 비롯한 많은 사찰 보물이 전시되어 있다. 2010년(헤이세이 22년) 3월에 리뉴얼 오픈하여 전시 점수가 증가했고, LED 조명을 채용하여 많은 불상을 유리 케이스 없이 볼 수 있게 되었다. 2018년(헤이세이 30년) 1월에는 내진 개수 공사를 마치고 다시 리뉴얼했다.

주요 소장품으로는 나라 시대의 건칠팔부중입상(국보)과 건칠십대제자입상 6구(국보)가 있다. 이들은 본래 서금당 본존 석가여래상 주위에 안치되었던 군상 중 일부이다. 팔부중상 중에서는 삼면육비(三面六臂)의 아수라상이 유명하다.() 십대제자상은 10구 중 6구만 현존하며, 나머지 4구는 메이지 시대에 사찰 밖으로 유출되어 파손되었다.

백호 시대의 작품인 동조불두(국보)는 구 야마다데라 불두로, 백호 문화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 원래 야마다데라(현·나라현 사쿠라이시) 강당의 본존·약사삼존상의 중존상이었으나, 흥복사의 승병이 약탈해 왔다.

가마쿠라 시대의 작품으로는 목조금강력사입상(국보), 목조천등귀·용등귀입상(국보) 등이 있다. 특히 천등귀·용등귀입상은 허구의 존재를 사실적이고 유머러스하게 표현한 가마쿠라 시대 조각의 걸작으로 꼽힌다.

이 외에도 판각십이신장상(국보), 금동등롱(국보) 등 다양한 국보와 중요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

=== 기타 ===

남엔당


고후쿠지에는 국보로 지정된 동금당(東金堂), 오층탑, 삼층탑, 북엔당이 있다.[6][7][8][9] 중요 문화재로는 남엔당이 있다.[10] 동금당은 1425년에 건립된 옛 삼금당 중 하나이다.[6] 오층탑은 1426년에 건립되었다.[7] 삼층탑은 1185년에 건립되었으며,[8] 북원당은 1210년에 건립되었다.[9] 남원당은 1741년에 건립되었으며, 사국 33 관음 순례(西国三十三ヶ所巡礼, Saigoku 33 Pilgrimage) 제9번지이다.[10] 1394~1427년에 건립된 대탕야(大湯屋)도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11]

원래 사찰 배치도에는 3층탑, 남원당, 오유야가 겹쳐서 표시되어 있었는데,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5층탑, 동금당, 북원당과 함께 이 세 건물뿐이다.[12]

  • 경장터는 기단이 복원되어 있다.
  • 종루터는 기단이 복원되어 있다. 이 위치에 있었다고 하는 종루는, 밑단이 치마처럼 넓게 퍼지는 “하카마고시(袴腰)”를 가진 모습이었다는 것이 근년의 발굴 조사로 밝혀졌다.
  • 회랑터는 기단이 복원되어 있다.
  • 중문터는 기단이 복원되어 있다.
  • 가강당 건물은 원래 약사사의 금당으로, 게이쵸 5년(1600년)에 마스다 나가모리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약사사에 새로운 금당이 세워지게 됨에 따라 철거될 예정이었기에, 1974년 11월 23일에 지붕을 입모야조에서 요세무네조로 바꾸고, 향배를 철거하는 등의 큰 개조를 실시하여 당사의 강당 터에 가금당으로 이축되었다. 그 후, 노후화된 중금당의 본존·석가여래좌상 등을 옮겨, 오랫동안 가강당으로서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2000년에 노후화된 중금당을 해체하고, 2018년(헤이세이 30년) 10월에 중금당을 재건하자, 가강당은 가강당이라는 이름으로 국보관에 있던 아미타여래좌상을 새로운 본존으로 안치했다.
  • * 범종(국보)은 나라 시대, 신귀 4년(727년)의 명이 있다. 제작 연도를 알 수 있는 범종으로서는 묘신사 종(698년)에 이어, 일본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것이다. 현재는 가강당에 있다.
  • 서금당터는 서금당은 광명황후가 어머니 타치바나 미치요의 1주기에 즈음하여 석가삼존상을 안치하는 당으로 천평 6년(734년)에 창건했다. 헤이안 시대에 두 번, 가마쿠라 시대에 한 번 피해를 입었지만, 매번 재건되어 왔다. 그 후, 에도 시대의 쿄호 2년(1717년) 1월 4일에 강당에서의 화재로 중금당과 남원당과 함께 소실되었다. 이때는 자금난으로 인해 재건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기단만 남은 상태가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서금당터로서 옛날을 그리워할 뿐이다. 다만, 당내에 안치되어 있던 절의 보물에는 소실을 면하고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이 적지 않다. 석가여래상(전·운경 작. 몸체는 소실되어 지금은 머리 부분만 국보관에 안치되어 있다), 양협시상(약왕보살상과 약상보살상. 지금은 중금당에 양협시상으로 안치되어 있다), 범천·제석천상(나라 시대 작. 메이지 시대에 해외로 유출되어, 지금은 미국샌프란시스코의 가 소장), 십대제자상(나라 시대 작. 지금은 10구 중 6구를 국보관 등에 안치), 팔부중상(나라 시대 작. 지금은 국보관에 안치), 금강력사상(전·정경 작. 지금은 국보관에 안치), 사천왕상(소재 불명), 화원반(“카겐케이”라고 읽는 동제 악기로, 나라 시대 작. 지금은 국보관에 안치) 등이 그것이다.
  • 남원당(중요문화재)은 관세이 원년(1789년) 재건. 설명은 이미 서술.
  • 흥선원은 자원. 본래의 흥선원은 보다이인 동쪽에 있는 기쿠스이로 부근에 있었다.
  • 일언관음당은 남원당 옆에 있다. 남도 칠관음 순례소 중 하나. 메이지 시대에 룡화수원 지장당을 이축하여 여러 불상을 옮겼다. 한 마디만 염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관음을 모신다.
  • 부동당은 부동명왕좌상 등 외에 사국삼십삼소 관음영장의 각각의 찰소의 본존을 본뜬 33구의 관음상을 모신다.
  • 액冢은 차우스산이라고 불리는 冢. 옛날 남대문에는 흥복사의 산호였던 “월륜산”이라고 쓴 액이 걸려 있었지만, 이상한 일이 여러 번 발생하여, 결국 월륜이라는 글자가 좋지 않다고 여겨져 그 액이 여기에 묻히고, 이상한 일도 그쳤다. 그 이래, 흥복사는 산호 자체를 없애 버렸다.
  • 종루는 남원당 남쪽. 6시·12시·18시에 시간을 알리는 타종이 있다.
  • 흥복사회관은 3층탑 서쪽에 있다. 불교 문화 강좌 등의 강연회나 여러 행사에 사용된다.
  • 3층탑(국보)은 가마쿠라 시대 전기의 재건(정확한 건립 연도는 불명). 높이 19m, 본기와부키의 삼간삼중탑파이다. 1897년(메이지 30년) 12월 28일, 당시의 고사지 보존법에 근거한 특별 보호 건조물(문화재 보호법에 있어서의 “중요문화재”에 상당)로 지정. 1952년(쇼와 27년) 3월 29일, 문화재 보호법에 근거한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3층탑은 코우지 2년(1143년)에 스토쿠 천황의 중궁·코오카몬인에 의해 창건되었다. 치쇼 4년(1180년)의 헤이지 시게히라에 의한 남도소각에서의 소실 기록은 없지만, 현재의 탑은 건축 양식으로부터 대화재 후 얼마 되지 않아 재건된 가마쿠라 건축이라고 생각된다.
  • 북원당(국보)은 죠겐 4년(1210년) 재건. 설명은 이미 서술.
  • 북원당 회랑터는 남쪽과 동쪽의 기단이 복원되어 있다.
  • 식당 및 세전터는 식당 및 세전은 나라 시대에 창건되어 소실과 재건을 반복했지만, 1874년(메이지 7년), 폐불훼석의 영향으로 흥복사가 황폐해져 있던 시대에 철거되었다. 터에는, 1959년(쇼와 34년)이 되어 절의 보물을 수납하는 내화식 보물고 “국보관”이 건설되었다. 식당과 세전의 유구는 국보관의 지하에 그대로의 형태로 보존되어 있다.
  • 국보관은 1959년(쇼와 34년) 건축. 설명은 이미 서술.
  • 남대문터는 기단이 복원되어 있다.
  • 반야의 잔디는 남대문 기단의 남쪽에 설치되어 있는 토단. 여기서 흥복사 신고노가 행해진다.
  • 오십이단은 남대문과 사루사와이케를 잇는 돌계단. 보살 오십이위에 유래하고 있다.
  • 사루사와이케는 흥복사의 남쪽에 있는 연못. 옛날에는 흥복사의 방생지였다.
  • 본방은 경내 동쪽에 위치한다. 흥복사의 사무를 집행하는 곳으로 일반에는 공개되지 않는다.
  • * 대원당(지불당)은 메이지 시대 건립.
  • ** 목조성관음입상(중요문화재)은 대원당의 본존. 가마쿠라 시대 작. 일반에는 공개되지 않지만, 1997년(헤이세이 9년)에 도쿄국립박물관에서 개최된 “흥복사 국보전”에서 처음으로 전시된 것 외에, 2007년(헤이세이 19년) 10월 20일 - 11월 25일에 절 내에서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절 전승에서는 성관음상이라고 되어 있지만, 상내납입문서에 따르면 원래는 미륵보살상으로서, 겐쵸 5년(1253년)에 불사의 카이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 * 규리
  • * 남객전은 텐쇼 연간(1573년 - 1592년) 건립.
  • * 북객전은 카에이 7년(1854년) 재건. 동서로 긴 승방·동실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 * 표문은 텐쇼 연간(1573년 - 1592년)에 건립된 본기와부키의 사각문을 1907년(메이지 40년)에 자원인 보다이인의 북쪽 츠키지 헤이의 서쪽에 있던 것을 이축한 것이다.
  • 보다이인은 현재 남아 있는 자원 중 유일하게 위치가 바뀌지 않았다. 별명을 “십삼종”이라고도 한다. 5층탑의 남쪽, 산죠도리를 건너간 곳에 있으며, 겐포우의 창건, 또는 보다이를 위로 하는 곳으로 되어 있다. 야마토 북부 팔십팔개소 영장 제62번

3. 1. 중금당(中金堂)



중금당(中金堂, Chū-kondō)은 고후쿠지의 중심 건물로, 710년 나라 천도 직후 후지와라노 후히토에 의해 건립이 시작되어 714년에 완성되었다.[14] 석가삼존상을 안치하기 위한 사찰의 중심적인 당이었다. 이후 동금당과 서금당이 세워지면서 중금당으로 불리게 되었다.

창건 이래 여러 번 소실과 재건을 반복했으며, 1717년 화재로 소실된 후 1세기 이상 재건되지 못했다. 1819년에 임시 건물(가당)로 재건되었으나, 규모가 작고 저렴한 재료를 사용해 노후화가 심했다.[30] 1974년 약사사의 구금당을 이축한 가금당(현 가강당)으로 본존 석가여래좌상 등을 옮겼다. 2000년 기존 가당을 해체하고 발굴 조사를 거쳐 창건 당시 모습을 재현한 새로운 중금당 건설이 시작되었다.

2010년 재건 공사가 착공되어 2018년 10월에 9번째 중금당이 낙성되었다.[66] 현재 중금당에는 다음과 같은 불상들이 안치되어 있다.

  • 석가여래좌상: 본존 불상으로, 1811년에 제작되었다. 높이 283.9cm이며, 측백나무를 사용한 끼워맞춤 구조로 만들어졌다.[31]
  • 목조 약왕보살·약상보살입상(중요문화재): 원래 폐절된 서금당 본존 석가여래상의 협시였으며, 1202년에 조성된 높이 3.6m의 거상이다.
  • 목조 사천왕입상(국보): 가마쿠라 시대 작품으로, 원래 북엔당(北円堂)에 안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2017년까지 남엔당(南円堂)에 안치되어 있었으나, 운케이의 아버지 코우케이 일문의 작품으로 알려진 사천왕상과 교체되어 중금당으로 옮겨졌다.[32]

3. 2. 동금당(東金堂)



동금당(東金堂)은 원래 세 개의 금당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건물이다.[6] 1415년에 재건된 5대째 건물로, 나라 시대의 천평양식을 참고하여 만들어졌다.[14][33] 평면은 桁行 7칸, 梁間 4칸이며,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 본瓦葺이다.[33] 1897년 12월 28일 고사지보존법에 따라 특별보호건조물로 지정되었으며,[34] 1952년 3월 29일 문화재보호법에 의해 국보로 지정되었다.[35] 사이국약사사구령장 제4번 찰소이다.

726년 성무천황이 원정천황의 쾌유를 기원하며 약사삼존상을 봉안하기 위해 창건했다.[36] 1180년 화재로 소실된 후, 1187년 흥복사 승병들이 야마다데라에 있던 약사삼존상을 강탈하여 새로운 본존으로 봉안했다.[21] 1411년 다시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1415년 재건되어 현재에 이른다.

당내에는 다음과 같은 불상들이 봉안되어 있다.

  • 동조약사삼존상(중요문화재): 중존은 1411년 화재 이후 재건된 무로마치 시대 작품이다. 일광보살상·월광보살상은 화재에서 구출된 나라 시대 작품이다.
  • 목조비마거사좌상(국보): 약사여래상 왼쪽에 봉안되어 있다. 겐큐 7년(1196년) 정경의 작품으로, 재가 불교도의 이상적인 모습을 표현했다.[21]
  • 목조문수보살좌상(국보): 약사여래상 오른쪽에 봉안되어 있으며, 비마거사상과 짝을 이룬다. 제작자는 불명이나, 정경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 목조사천왕입상(국보): 당내 네 귀퉁이에 봉안되어 있으며, 헤이안 시대 전기의 중후한 양식을 보인다.
  • 목조십이신장입상(국보): 약사여래를 수호하는 12권속 불상이다. 켄에이 2년(1207년)경 작품으로, 역동적인 자세와 개성적인 표현이 특징이다.

3. 3. 오층탑(五重塔)

고후쿠지의 오층탑은 730년 광명황후의 발원으로 처음 세워졌다.[37] 현재의 탑은 1426년에 재건된 것으로, 높이 50.1미터로 일본에서 동대사 오층탑 다음으로 높다.[37][33]

1897년 12월 28일, 고사지보존법에 근거한 특별보호건조물(구 국보)로 지정되었으며,[34] 1952년 3월 29일 문화재보호법에 근거하여 국보로 지정되었다.[35]

메이지 초기 폐불훼석 정책으로 인해 철거 위기에 놓였으나, 인근 주민들의 반대로 중지되었다.[38] 1905년 7월에는 낙뢰 피해를 입었으나 큰 피해는 없었고, 1907년 8월 피뢰침이 설치되었다.[38]

1902년 수리 이후, 2024년 7월부터 약 120년 만에 본격적인 수리가 진행되고 있다.

3. 4. 북원당(北円堂)



북원당(北円堂)은 고후쿠지에 있는 당(건축) 중 하나로, 1210년에 재건되었다.[9][14] 후지와라노 후히토의 1주기를 맞아 721년에 나가야왕이 원명상황과 원정천황의 명으로 창건한 것이 그 시초이다.[39] 현재의 건물은 1210년에 재건된 것으로, 고후쿠지에 현존하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되었다. 법륭사 몽전과 같이 평면이 팔각형인 "팔각원당"이다.[39] 지붕은 단층 기와로 되어있다.[33] 1897년 12월 28일, 당시 고사지보존법에 근거하여 특별보호건조물(문화재보호법의 "중요문화재"에 해당)로 지정되었으며,[34] 1952년 3월 29일, 문화재보호법에 근거하여 국보로 지정되었다.[35] 과거에는 회랑 복원을 계획하기도 했으며, 현재는 그 기단이 복원되어 있다.

본존은 목조미륵보살좌상(국보)으로, 말년의 운경이 1212년경에 완성한 것이다. 미륵불의 협시상(脇侍像)인 목조법원림보살·대묘상보살반가상은 무로마치 시대에 제작되었다. 목조무착보살·세친보살입상(국보)은 유식학의 조사(祖師)인 무착과 세친 형제를 표현한 것으로, 운경 일문의 작품이다. 가마쿠라 시대의 사실주의 조각의 정점을 보여주는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목심건칠사천왕입상(국보)은 헤이안 시대 초기의 불상으로, 원래 대안사의 것이었으며 791년에 조립되었다고 한다.[12] 1285년의 수리명(修理銘)이 남아있다.

3. 5. 남원당(南円堂)

1741년에 기둥을 세우고, 1789년에 재건축된 고후쿠지의 남원당(南円堂)은 중요문화재이다.[14] 4대째 건물로, 지붕이 한 겹인 본와가야부키(本瓦葺)의 팔각원당(八角円堂)이며, 정면에 배소(拝所)가 딸려 있다.[33] 1986년 12월 20일,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다.[40] 사이국 삼십삼소 제9번 찰소[19]인 남원당은 후지와라 북가의 후지와라 후유쓰구가 아버지 우치마로의 추선을 위해 813년에 창건한 팔각당이다.[19]

창건 당시 본존불은 원래 고후쿠지 강당에 안치되어 있던 불공건삭관음상으로, 748년에 후지와라 부젠의 추선을 위해 부인 무로 여왕, 아들 후지와라 마사타테 등이 조성한 것이었다. 현재 남원당은 사이국 삼십삼소 제9번 찰소로서 참배객이 끊이지 않지만, 당의 문은 항상 닫혀 있으며, 10월 17일의 대반야경 전독회라는 행사 날에만 개방된다.[19] (2002년, 2008년, 2013년에 특별 개방이 있었다).

당 안에는 본존불인 목조 불공건삭관음좌상(국보) 외에 목조 사천왕입상(국보)과 목조 법상육조좌상(국보)을 안치한다. 목조 불공건삭관음좌상은 운케이의 아버지 강경 일문의 작품으로, 1189년에 완성되었으며 높이 336센티미터의 거상이다. 목조 사천왕입상은 원래 남원당에 있던 것으로, 2017년 도쿄국립박물관에서 개최된 "운케이전" 이후 남원당으로 돌아왔으며,2018년에 국보로 지정되었다.[41][42] 목조 법상육조좌상은 운케이의 아버지 강경 일문의 작품으로, 현빈, 행가, 현방, 신혜, 상등, 선주라는 법상종의 6명의 고승의 초상이다. 당 앞에 있는 "남원당등나무"는 남도팔경의 하나로, 매년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3. 6. 삼층탑(三重塔)

1185년에 건립된 고후쿠지의 삼층탑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8] 원래 배치도에는 후대에 건립된 삼층탑이 다른 건물들과 함께 겹쳐서 표시되어 있으며, 현재 남아있는 건물 중 하나이다.[12]

3. 7. 국보관(国宝館)

고후쿠지 국보관은 1959년(쇼와 34년) 식당 및 세전 터에 건립된 내화식 수장 시설이다.[43] 외관은 나라 시대의 사찰 건축 양식을 본떠 철근콘크리트구조로 지어졌다.[43] 국보관 내부는 식당의 본존이었던 높이 5.2미터의 거대한 천수관음입상이 중앙에 안치되어 있고, 불상을 비롯한 많은 사찰 보물이 전시되어 있다.[43] 2010년(헤이세이 22년) 3월에 리뉴얼 오픈하여 전시 점수가 증가했고, LED 조명을 채용하여 많은 불상을 유리 케이스 없이 볼 수 있게 되었다.[44] 2018년(헤이세이 30년) 1월에는 내진 개수 공사를 마치고 다시 리뉴얼했다.[44]

주요 소장품으로는 나라 시대의 건칠팔부중입상(국보)과 건칠십대제자입상 6구(국보)가 있다. 이들은 본래 서금당 본존 석가여래상 주위에 안치되었던 군상 중 일부이다. 팔부중상 중에서는 삼면육비(三面六臂)의 아수라상이 유명하다.() 십대제자상은 10구 중 6구만 현존하며, 나머지 4구는 메이지 시대에 사찰 밖으로 유출되어 파손되었다.

백호 시대의 작품인 동조불두(국보)는 구 야마다데라 불두로, 백호 문화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 원래 야마다데라(현·나라현 사쿠라이시) 강당의 본존·약사삼존상의 중존상이었으나, 흥복사의 승병이 약탈해 왔다.

가마쿠라 시대의 작품으로는 목조금강력사입상(국보), 목조천등귀·용등귀입상(국보) 등이 있다. 특히 천등귀·용등귀입상은 허구의 존재를 사실적이고 유머러스하게 표현한 가마쿠라 시대 조각의 걸작으로 꼽힌다.

이 외에도 판각십이신장상(국보), 금동등롱(국보) 등 다양한 국보와 중요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

3. 8. 기타



고후쿠지에는 국보로 지정된 동금당(東金堂), 오층탑, 삼층탑, 북엔당이 있다.[6][7][8][9] 중요 문화재로는 남엔당이 있다.[10] 동금당은 1425년에 건립된 옛 삼금당 중 하나이다.[6] 오층탑은 1426년에 건립되었다.[7] 삼층탑은 1185년에 건립되었으며,[8] 북원당은 1210년에 건립되었다.[9] 남원당은 1741년에 건립되었으며, 사국 33 관음 순례(西国三十三ヶ所巡礼, Saigoku 33 Pilgrimage) 제9번지이다.[10] 1394~1427년에 건립된 대탕야(大湯屋)도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11]

원래 사찰 배치도에는 3층탑, 남원당, 오유야가 겹쳐서 표시되어 있었는데,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5층탑, 동금당, 북원당과 함께 이 세 건물뿐이다.[12]

고후쿠지 배치도. 붉은색은 현존하는 건물, 회색은 유실된 건물이다.



4. 주요 행사


  • 1월 1일 정중당 참배(제당)가 열린다.
  • 1월 1일부터 7일까지 길상천상 개장(중금당)이 열린다.
  • 1월 2일에는 춘일사 참식(춘일대사 본궁·약궁)이 열린다.
  • 2월 3일에는 퇴나회(동금당)가 열린다.
  • 2월 3일(음력)에는 해탈상인 기일(본방·지불당)이나 비공개로 진행된다.
  • 2월 15일에는 열반회(본방·북객전)가 열린다.
  • 3월 5일에는 삼장회(본방·북객전)가 열린다.
  • 3월 20일 무연불 공양(보태원내·공양탑)은 비공개로 진행된다.
  • 4월 8일에는 불생회(남원당 전정)가 열린다.
  • 4월 17일에는 방생회(일언관음당)가 열린다.
  • 4월 25일에는 문수회(동금당)가 열린다.
  • 5월 셋째 금요일·토요일에는 다마키노(남대문터·반야의 잔디밭)가 열리며, 다마키노 보존회(나라시 관광협회 내)에서 주최한다.
  • 7월 7일에는 변재천 공양(삼중탑)이 열린다.
  • 8월 13일부터 15일까지 열리는 나한공양(본방·지불당)은 비공개로 진행된다.
  • 9월 21일 무연불 공양(보태원내·공양탑)은 비공개로 진행된다.
  • 10월 첫째 토요일에는 탑영능(동금당 전정)이 열리며, 우천 시에는 나라현 문화회관에서 개최된다.
  • 10월 17일에는 대반야경 전독회(남원당)가 열리며, 남원당은 당일만 내진 관람이 가능하다.
  • 11월 13일에는 자은회(가강당)가 열리며, 장소는 약사사와 매년 번갈아 개최된다.
  • 12월 31일에는 세말 독경(제당), 섣달밤 종소리(남원당·보태원 대미당) 행사가 열린다.


이 외에도 봄과 가을에 일정 기간(약 2주간) 북원당이 특별 개방되며, 평소 비공개인 제당의 특별 공개도 이루어진다.

5. 교통

긴테쓰 나라 선 긴테쓰 나라 역에서 도보 약 5분 거리에 있다. JR 야마토 선·나라 선 나라 역에서는 산죠도리를 동쪽으로 도보 약 1.2km 이동하거나, 나라 교통 버스를 이용하여 현청 앞 버스 정류장에서 하차하면 된다.

참조

[1] 서적
[2] 서적 The Samurai Sourcebook Cassell & Co.
[3] Google도서 Chado the Way of Tea: A Japanese Tea Master's Almanac
[4] 웹사이트 Rokusoan Teahouse (Rokusoan) – the Magic of Japanese Masterpieces | NHK WORLD-JAPAN on Demand https://www3.nhk.or.[...]
[5] 웹사이트 六窓庵とは https://kotobank.jp/[...]
[6] 웹사이트 Database of National Cultural Properties https://kunishitei.b[...] Agency for Cultural Affairs 2011-05-14
[7] 웹사이트 Database of National Cultural Properties https://kunishitei.b[...] Agency for Cultural Affairs 2011-05-14
[8] 웹사이트 Three-storied Pagoda National Treasure - KOHFUKUJI Temple https://www.kohfukuj[...] 2023-09-09
[9] 웹사이트 Database of National Cultural Properties https://kunishitei.b[...] Agency for Cultural Affairs 2011-05-14
[10] 웹사이트 Database of National Cultural Properties https://kunishitei.b[...] Agency for Cultural Affairs 2011-05-14
[11] 웹사이트 Database of National Cultural Properties https://kunishitei.b[...] Agency for Cultural Affairs 2011-05-14
[12] 서적 Early Buddhist Architecture in Japan Kodansha
[13] 웹사이트 Miroku, the Bodhisattva of the Future – Works – Museum of Fine Arts, Boston https://collections.[...] 2024-02-17
[14] 웹사이트 興福寺の歴史 https://www.kohfukuj[...] 興福寺 2023-08-24
[15] 웹사이트 興福寺ホームページ 興福寺について 略史1 https://www.kohfukuj[...]
[16] 서적 律令国家の構造 吉川弘文館
[17] 웹사이트 興福寺ホームページ 興福寺について 略史2 https://www.kohfukuj[...]
[18] 웹사이트 興福寺ホームページ 興福寺について 略史3 https://www.kohfukuj[...]
[19] 웹사이트 興福寺ホームページ 境内案内 南円堂 https://www.kohfukuj[...]
[20] 뉴스 多川俊映(1)中金堂落慶/300年ぶり 天平の規模に/事業開始から四半世紀 https://www.nikkei.c[...] 日本経済新聞 2019-10-20
[21] 웹사이트 興福寺ホームページ 興福寺について 略史4 https://www.kohfukuj[...]
[22] 문서 室町時代になると、十市氏を刀禰とする長谷川党、箸尾氏を刀禰とする長川党、筒井氏を刀禰とする戌亥脇党、楢原氏を中心とした南党、越智氏を中心とした散在党、平田党の六党が割拠し、その中でも筒井氏、越智氏、箸尾氏、十市氏の四氏が「大和四家」と呼ばれる勢力に成長していった。
[23] 서적 興福寺 美術史研究の歩み
[24] 웹사이트 興福寺ホームページ 境内案内 仮講堂 https://www.kohfukuj[...]
[25] 웹사이트 興福寺整備計画 http://www.kohfukuji[...]
[26] 뉴스 興福寺 300年ぶり再建の中金堂落慶法要 https://www.sankei.c[...] 産経WEST 2018-10-10
[27] 웹사이트 【重要】当山五重塔修理工事に関するお知らせ https://www.kohfukuj[...]
[28] 문서 信円は松殿家の始祖となった松殿基房の同母弟で、近衛家の始祖となった近衛基実と九条家の始祖となった九条兼実の異母弟にあたる。彼は「奈良僧正」と呼ばれ、後白河法皇、兄の松殿基房、それに九条兼実といった院や摂関家の有力者との関わりが深かったことが『玉葉』などの記述に見える。
[29] 서적 戦国期の権力と文書 高志書院
[30] 웹사이트 興福寺ホームページ 境内案内 中金堂 https://www.kohfukuj[...]
[31] 서적 興福寺国宝展 東京国立博物館
[32] 뉴스 興福寺の四天王像がお引っ越し 奈良 https://digital.asah[...] 朝日新聞 2018-02-16
[33] 웹사이트 国指定文化財等データベース 文化庁
[34] 간행물 内務省告示第87号 内務省 1897-12-28
[35] 간행물 文化財保護委員会告示第21号 1952-10-16
[36] 웹사이트 興福寺ホームページ 境内案内 東金堂 https://www.kohfukuj[...]
[37] 웹사이트 興福寺ホームページ 境内案内 五重塔 https://www.kohfukuj[...]
[38] 서적 九鬼と天心 明治のドン・ジュアンたち PHP研究所 2008
[39] 웹사이트 興福寺ホームページ 境内案内 北円堂 https://www.kohfukuj[...]
[40] 간행물 文部省告示第150号 1986-12-20
[41] 간행물 文部科学省告示第204号 2018-10-31
[42] 웹사이트 文化審議会答申〜国宝・重要文化財(美術工芸品)の指定について〜 https://www.bunka.go[...] 2018-03-09
[43] 웹사이트 興福寺ホームページ 境内案内 国宝館 https://www.kohfukuj[...]
[44] 뉴스 銅造仏頭、東金堂へ80年ぶり還座 - 興福寺国宝館、元日から休館 https://www.nara-np.[...] 奈良新聞 2016-12-30
[45] 서적 週刊朝日百科 日本の国宝 55 興福寺1
[46] 문서 食堂は明治の廃仏毀釈により取り壊されその跡地に国宝館が建っている。
[47] 웹사이트 史跡興福寺旧境内 興福寺鐘楼の発掘調査(平城第625次調査) https://sitereports.[...] 2024-04-01
[48] 웹사이트 興福寺鐘楼、創建時の姿明らかに 建築史巻き戻す発見か https://www.asahi.co[...] 2024-04-01
[49] 뉴스 天平の音 奈良・興福寺の国宝楽器「華原磬」台座を復元・公開 https://www.sankei.c[...] 산케이WEST 2014-04-03
[50] 웹사이트 興福寺ホームページ 境内案内 三重塔 https://www.kohfukuj[...]
[51] 서적 興福寺国宝展 東京国立博物館 1997
[52] 웹사이트 興福寺ホームページ 境内案内 本坊 https://www.kohfukuj[...]
[53] 논문 興福寺本坊持仏堂弥勒菩薩立像(伝聖観音菩薩像)について 1998-04
[54] 웹사이트 興福寺ホームページ 境内案内 菩提院本御堂 https://www.kohfukuj[...]
[55] 웹사이트 興福寺ホームページ 境内案内 大湯屋 https://www.kohfukuj[...]
[56] 간행물 文化財保護委員会告示第59号 1953-07-16
[57] 간행물 文部科学省告示第204号 2018-10-31
[58] 웹사이트 文化審議会答申〜国宝・重要文化財(美術工芸品)の指定について〜 https://www.bunka.go[...] 2018-03-09
[59] 간행물 文部省告示第139号 1999-06-07
[60] 문서 文化庁サイトの「国指定文化財等データベース」に「紺紙金字唯識論」とあるのは誤りで、「紺紙金字成唯識論」が正当。
[61] 웹사이트 興福寺長老 多川乗覚師死去 88歳 https://www.sankei.c[...] 2024-04-16
[62] 웹사이트 多川乗覚さん死去 https://www.asahi.co[...] 아사히신문 2024-04-17
[63] 웹사이트 訃報 多川乗覚さん 88歳=興福寺長老 https://mainichi.jp/[...] 마이니치신문 2024-04-17
[64] 웹사이트 多川乘覺氏(興福寺長老)おくやみ https://www.chugaini[...] 2024-04-19
[65] 웹사이트 興福寺・多川乗覚長老 本山葬で最期の別れ https://www.nara-np.[...] 奈良新聞 2024-04-30
[66] 웹사이트 落慶~奈良・興福寺~ https://thetv.jp/pro[...] ザ・テレビジョン 2019-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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