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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D. 스톡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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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찰스 D. 스톡스는 미국 출신의 감리교 선교사이자 교육자이다. 그는 1940년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활동을 시작했으나,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후 예일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1947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선교 활동을 재개했다. 한국 전쟁 중에는 피난민 구호와 전쟁 고아 지원에 힘썼으며, 1954년에는 목원대학교의 전신인 감리교 대전신학교를 설립하여 교역자 양성에 기여했다. 또한 호수돈여자중·고등학교, 청신여자중학교 등 감리교 학교의 발전을 위해 헌신했으며, 1983년 은퇴 후 미국으로 돌아가 1997년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2000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다.

2. 생애

1939년 3월, 스톡스는 미국 감리교 세계선교부 왓슨(A.W. Wasson) 박사에게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한국에서 선교사로 일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1947년 11월 내한하여 한글 공부를 하는 한편 북한 지역에서 월남한 사람들을 돌보면서 1950년 한국 전쟁 직전까지 원주에서 선교 사업을 펼쳤다. 한국 전쟁 중에는 피난민 수송과 구호 사업에 힘을 쏟았고, 전쟁 고아 구제를 위해 1952년 3월 충청북도 음성에 아동 보호 시설 음성향애원을 개원하였다. 1952년 6월 안식년으로 귀국하여 1년 동안 미국에 머물면서 한국의 참상을 미국 교회에 알렸다.

1974년 목원대학교 개교 20주년 기념사에서 그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학교를 설립하고 학생들을 가르친 목적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대한민국 정부는 스톡스 사후인 2000년 10월 24일에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하였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스톡스는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서 미남감리회 한국 선교사였던 매리언 스톡스(Marion B. Stokes)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애즈베리대학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하여 1936년 7월에 문학사 학위를 취득했고, 이어 애즈베리신학교에 들어가 신약학을 전공하여 신학석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1938년 9월에는 예일대학교 대학원 박사 과정에 입학하여 공부하였다. 1947년 4월, 한국 감리교회사에 관한 논문 "History of Methodist Missions Korea"로 박사 학위(Ph.D.)를 받았다. 논문 지도교수는 저명한 교회사가 라투레트(K.S. Latourette) 박사였다. 이 논문은 선교사적인 관점에서 1885년부터 1930년까지의 한국 감리교회사를 서술한 것으로, 한국 감리교회의 발전에 대한 미국 감리교회와 선교사들의 공헌과 선교정책의 특징을 강조하고 있다.

2. 2. 한국 선교 활동 (일제 강점기)

1940년 1월, 스톡스는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같은 해 7월 한국에 도착하였다. 서울에서 한글을 공부했으나, 태평양 전쟁 발발로 인해 몇 달 만에 미국으로 귀국해야 했다.

2. 3. 미국 체류 및 목회 활동

스톡스는 1940년 12월 미국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한국을 포함한 동양 지역 선교를 계획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그린스버러 지방의 베들레헴교회와 레오버스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했다. 1946년 9월부터 학업에 전념하여 1947년 4월 예일대학교에서 "History of Methodist Missions Korea"라는 한국 감리교회사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Ph.D.)를 받았다. 이 논문은 1885년부터 1930년까지 한국 감리교회의 발전에 대한 미국 감리교회와 선교사들의 공헌, 선교 정책의 특징을 선교사적 관점에서 서술한 것이다.

2. 4. 한국 선교 활동 (해방 이후)

1947년 11월, 찰스 D. 스톡스는 한국에 다시 들어와 한글 공부를 재개하고, 북한 지역에서 내려온 사람들을 돕는 활동을 했다. 1950년 한국 전쟁 직전까지 원주에서 선교 사업을 펼쳤다. 한국 전쟁 중에는 피난민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 구호 물품을 전달하는 일에 힘썼으며, 전쟁 고아들을 돕기 위해 1952년 3월 충청북도 음성에 아동 보호 시설인 음성향애원을 설립했다. 1952년 6월에는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돌아가 1년 동안 미국 교회에 한국의 어려운 상황을 알렸다.

1954년 1월, 대전에 도착한 스톡스는 농촌 지역 교역자를 양성하기 위한 신학교 설립을 추진하여, 현재의 목원대학교로 발전한 감리교 대전신학교를 설립했다. 초기 신학관 건물을 짓고 캠퍼스를 조성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으며, 1954년 3월 22일 학교 운영비로 500USD를 지불하는 등 많은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했다. 그는 은퇴할 때 평소 모은 3000만목원대학교에 장학금으로 기부할 정도로 학교에 대한 깊은 애정을 보였다. 이후 목원대학교 교수와 이사장 등으로 활동하며 1983년 은퇴할 때까지 후진 양성에 힘쓰며 감리교 교역자를 양성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2. 5. 교육 및 사회봉사 활동

도익서(찰스 D. 스톡스)는 목원대학교 설립 외에도 다양한 교육 및 사회봉사 활동에 헌신했다. 1961년 2월부터 1983년 7월까지 22년간 호수돈여자중ㆍ고등학교 이사로 활동하며 학교 새 교사를 건축하는 데 있어 선교부의 지원을 이끌어냈다. 1966년 청양에 설립된 청신여자중학교가 건축 문제로 어려움을 겪자 미국 교회의 협조를 얻어 교사를 완성했고, 1971년에는 임야 195000평을 매입하여 교지를 확장하는 데 전념했다.

한국전쟁 중에는 피난민 수송과 구호 사업에 힘을 쏟았고, 전쟁고아 구제를 위해 1952년 3월 충청북도 음성에 아동보호시설 음성향애원을 개원하였다. 1952년 6월 안식년으로 귀국하여 1년 동안 미국에 머물면서 한국의 참상을 미국 교회에 알렸다.

그는 기독교연합봉사회 이사 및 이사장으로 활동하며 사회적 약자를 위한 구호 활동을 펼쳤고, 대전 기독교 종합사회복지관 건축위원으로 활동하며 지역 사회 발전에 이바지했다.

2. 6. 결혼

1940년 6월, 알린 암스튜츠(Arlene Amstutz, 한국명 도애련)와 결혼하였다. 1966년 3월 알린 암스튜츠가 심장암으로 사망하자, 1967년 9월 매릴린 테리 스톡스(Marilyn Terry Stokes, 한국명 이명은) 선교사와 재혼하여 아들 데이비드(David)를 얻었다.

2. 7. 은퇴 및 사망

1983년, 스톡스는 정년 은퇴 후 미국으로 귀국하여 애틀랜타에서 여생을 보냈다. 1997년, 82세의 나이로 소천하였다.

3. 학력


  • 1929년 9월 ~ 1933년 5월 서울외국인학교 졸업
  • 1933년 9월 ~ 1935년 7월 미국 애즈베리 대학교 어학과 졸업 (학사)
  • 1937년 8월 ~ 1938년 6월 미국 애즈베리 대학교 신학대학 졸업 (석사)
  • 1938년 9월 ~ 1940년 5월 미국 예일 대학교 대학원 졸업 (석사)
  • 1946년 9월 ~ 1947년 6월 미국 예일 대학교 대학원 졸업 (철학박사)

4. 명예 박사 학위

1965년 6월 미국 애즈베리 신학원 명예 신학박사

5. 경력

찰스 D. 스톡스는 1940년 1월,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그해 7월 한국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한글 공부를 시작했으나, 태평양 전쟁 발발로 인해 몇 달 만에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1940년 12월 목사 안수를 받고, 노스캐롤라이나 주 그린스버러 지방의 베들레헴교회와 레오버스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했다.

1946년 9월부터 학업에 전념하여 1947년 4월, "History of Methodist Missions Korea"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Ph.D.)를 받았다. 이 논문은 1885년부터 1930년까지의 한국 감리교회사를 선교사적 관점에서 서술한 것으로, 한국 감리교회 발전에 대한 미국 감리교회와 선교사들의 공헌, 그리고 선교 정책의 특징을 강조하고 있다.

1947년 11월 다시 한국에 와서 한글 공부를 하며 북한 지역에서 월남한 사람들을 돌보았다. 1950년 한국전쟁 직전까지 원주에서 선교사업을 펼쳤으며, 한국전쟁 중에는 피난민 수송과 구호 사업에 힘썼다. 1952년 3월, 전쟁고아 구제를 위해 충북 음성에 아동보호시설 음성향애원을 설립하였다.

1954년 1월, 대전에 도착한 스톡스는 농촌 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 설립을 추진하여, 현재의 목원대학교로 발전한 감리교 대전신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는 신학관 건물 건축과 캠퍼스 마련을 위해 헌신적으로 모금 활동을 했고, 초기 학교 운영비와 학생들의 장학금을 지원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974년 개교 20주년 기념사에서 그는 "작은 학교를 통해 상상치도 못한 큰 능력이 이룩된다"며, "믿음과 봉사"를 강조했다.

스톡스는 목원대학교뿐만 아니라 감리교 학교들을 위해서도 헌신했다. 1961년부터 1983년까지 호수돈여자중·고등학교 이사로 활동하며 학교 새 교사 건축을 지원했고, 1966년에는 청양에 설립된 청신여자중학교의 교사 건축을 위해 미국 교회의 협조를 얻어냈다.

1983년 은퇴 후 미국으로 돌아가 애틀랜타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97년 82세로 소천하였다.

그의 경력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연도내용
1940년 - 1944년,
1947년 - 1983년
한국 주재 감리교 선교사 (일제 강점기 및 대한민국)
1944년 - 1947년미국 크라이맥스 감리교회 시무
1952년음성향애원 설립 (이사장)
1952년 - ?기독교연합봉사회 이사 겸 이사장
1954년목원대학교 설립 (감리교대전신학원)
1954년 - 1983년학교법인 감리교대전신학원 이사
1957년 - 1983년감리교대전신학교 교수
1960년 - ?목자관 운영이사회 회계
1961년 - 1983년호수돈 여자 중ㆍ고등학교 이사
1966년 - ?청양 청신여자중학교 이사장
1970년 - ?대전 기독교 종합사회복지관 건축위원
1979년 - 1983년학교법인 감리교대전신학원 이사장
1990년기독교대한감리회 자치 60주년 기념 공로 표창


6. 상훈

Charles D. Stokes영어 목사는 2000년 10월 24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받았다. 이는 그의 사후에 추서된 것이다.

7. 평가

(요약 및 참조할 원본 소스가 제공되지 않았으므로, '찰스 D. 스톡스' 문서의 '평가' 섹션에 대한 내용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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